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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임숙녀 전교사님이 쓰신 자서전 <조신부님과 임회장님>입니다. 두 분께서 마지막 봉사를 하셨던 게쎄마니 피정의 집을 지나면서 두 분이 생각났습니다. 두 분의 자취가 남아 있는 피정의 집에서 많은 추억을 떠올렸었지요.
2007년 1월 7일에 작고하신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생전에 이 글들을 제 홈페이지에 실어도 좋다고 허락하셨기에 여기에 소개합니다. 임숙녀 전교사님께서는 자신의 글이 자신을 돋보이려는 자랑의 마음으로 보이지 않을까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 글에 관심을 보이시는 분이 있다면, 그런 취지를 헤아려주시면서 믿음 외의 목적으로 활용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이 글의 원문은 임숙녀 전교사님께서 집필하셨으며, 조 필립보 신부님의 한국전쟁 회상기 '기나긴 겨울'에도 일부 인용된 바 있습니다. 저는 네이버 오픈 백과에 조 필립보 신부님이나 임 숙녀 전교사님 또는 서석천주교회에 관해 몇 편의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내용들은 임숙녀 전교사님의 이 글을 토대로 하여 쓴 것입니다.
제가 네이버에 올린 글들이 여러 블로그나 카페 등에 옮겨진 것으로 보아서, 하느님께 평생을 봉헌한 두 분의 삶에 대해 감동을 느끼는 분이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두 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옮겨간 것에 대해, 저로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글 (이 글을 바탕으로 하여 쓴 저의 글과, 제 글을 옮겨 간 다른 게시판의 글 포함)에 대한 모든 권리는 임숙녀 전교사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1955년 12월, 신부님의 희생과 은혜 받은 성탄 미사
해마다 겨울이 되면 성당의 난방이 문제였다. 어떻게 하면 신자들이 미사 시간을 춥지 않게 보낼 수 있을지를 조신부님께서는 늘 고심하셨다.
그러던 중 12월초에 원주의 미군부대에 가셔서 중고 온풍기를 한 대 얻어오셨다. 그것은 비행기 기계가 얼지 않게 하는 용도로 쓰이던 것이라고 한다. 신부님께서는 그 온풍기를 성당 지하실에 설치하신 뒤 원래 휘발유를 쓰던 장치를 석유를 넣도록 고치셨다.
성탄 4일을 앞둔 12월 20일. 신부님께서는 온풍기의 가동을 실험하시려고 기계 가까이에 가서 불을 붙였다.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강한 불길이 앞으로 뿜어져 나왔다. 미처 피하지 못한 신부님께서는 얼굴 전체와 양손에 큰 화상을 입으셨다.
신부님께서는 놀람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시고 사제관으로 들어가셔서 방문을 잠그신 뒤 기도를 시작하셨다.
식복사는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울면서 방문을 두드렸다.
"신부님, 문을 열어주세요. 병원에 가셔야지요."
그러나 아무리 애원해도 신부님은 대답이 없으셨다. 그 때 보좌신부님은 출타중이어서 식복사는 전화를 걸며 여기저기로 찾으셨다. 그런 중에 본당사목회장님이 소식을 듣고 오셨다. 회장님께서도 문을 두드리며 열어주실 것을 부탁했으나 신부님께서는 여전히 대답이 없으셨다.
사목회장님은 춘천 성골롬반 의원의 수녀님께 전화로 알려 드렸다. 수녀님은 급히 응급치료약을 준비하시고 구급차로 오셨다. 수녀님께서 문을 열어주실 것을 부탁하자 비로소 방문이 열렸다.
신부님께서는 사고를 당한지 다섯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수녀님께서는 춘천 성골롬반 의원 개원이래 첫번째 입원환자가 신부님이라고 뒷날에 말씀하셨다.
다음날 레지오 임원(나는 그 당시 레지오 서기였음) 4명이 조신부님의 입원실로 위문 방문을 했다. 얼굴 전체와 양손을 붕대로 감으신 신부님께서는 눈도 입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저마다 눈물을 감추려고 애쓸 뿐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더구나 우리 신자들을 춥지 않게 해주시려다가 이렇게 되셨으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조신부님께서는 수녀님께 24일 성탄자정 미사를 본당에 가서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수녀님께서는 당연히 거절하셨다. 절대 안정이 필요한 큰 부상이었기 때문이다.
24일 밤이 되었다. 저녁을 드신 신부님께서는 수녀님들께서 잠깐 방심을 하고 있는 사이에 붕대를 풀고 병원을 빠져나오셨다. 터미널로 가신 신부님께서는 바로 홍천행 버스에 오르셨다.
그 때 홍천본당에서는 목자가 안 계신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신자들이 울적한 마음으로 모여 있었다. 약을 바른 거즈를 그대로 얼굴에 붙인 채 성당에 들어서는 신부님을 본 신자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
편찮으신 얼굴로 화상 자국이 그대로인 양손을 들고 자정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을 보며 신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고의 흠숭과 찬미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맞았다. 신부님의 육체적인 아픔 속에 우리의 정신적인 아픔이 아우러진 그 날의 미사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성대한 봉헌이었을 것이다.
신부님께서 안 계신 것을 알게 된 성골롬반 의원의 수녀님들이 뒤늦게 홍천본당으로 찾아오셨다. 수녀님들은 25일 아침까지 함께 계시다가 신부님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시면서 말씀하셨다.
"조신부님께서는 보통 사제가 아닙니다."
뒷날 사목회장님께서 신부님께 여쭈어 보았다.
"신부님, 그 날 왜 문을 잠그신 채 열어주지 않으셨습니까?"
신부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대답이 없으셨다. 신부님께서 문을 잠그신 채 열어주지 않으셨던 뜻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1957년 여름, 신자들이 청하면역경을 마다하지 않으신 신부님
밤낮으로 폭우가 내렸다. 장마비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고, 산사태가 나고, 도로가 파손되었다. 그런데 내면 공소에서 혼인성사 신청이 들어왔다. 조신부님께서 가실 차비를 차리자, 한복사님께서 만류하셨다.
"물도 많이 불었고 길이 파손되어서 가시는 것이 위험합니다. 장마가 그친 뒤에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닙니다. 혼인 성사는 중대한 것이어서 연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는 차로 가고, 그 다음에는 걸어서라도 가야합니다.
홍천에서 내면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이고 당시에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로 물살이 급하고 폭이 좁은 개울이 많았다. 그래도 신부님께서는 미사짐을 준비하신 뒤 내면공소를 향해 출발하셨다.
작은 개울들도 흙탕물이 세게 흘러내리니 물속으로 큰돌이 굴러 내려와서 차가 개울을 건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이 차안으로 들어와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 힘들게 건넜다고 한다. 또, 도로 곳곳에는 큰돌이 굴러 내려와서 그것들을 피하거나 치우면서 차를 몰았다.
이런 고생 끝에 서석면 입구인 솔치고개까지 오셨다고 한다. 험하고 높은 솔치고개 곳곳이 산사태로 찻길이 막혔으므로 삽으로 흙을 치우며 간신히 고개를 넘었다. 이어서 폭이 넓은 어론리의 강이 나왔다. 교량은 파손되었고, 물이 너무 많아서 차가 건널 수 없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차를 두고 물을 건너자고 하셨다. 한복사님은 물의 깊이도 알 수 없고, 흙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으므로 겁이 나셨다고 한다.
"신부님, 위험합니다. 건너갈 수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건너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웃옷과 바지를 벗으셔서 미사짐과 같이 머리에 단단히 묶고는 한복사님의 손을 잡고 물에 들어서셨다.
강물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 그 때 물이 턱까지 올라와서 입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므로 물을 뱉어냈다고 한복사님은 회고했다.
신부님께서는 키가 좀 크시니까 어깨까지 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물살이 급박했으므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복사님의 손을 꼭 잡으시고 힘을 다해서 겨우 건너셨다고 한다.
이렇게 어론리의 강을 건넌 두 분은 내면까지 걸어서 가셨다. 당시 서석에서 내면까지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서석과 내면 사이에도 뱃재고개 등 크고 작은 고개와 개울들이 있었다. 두 분의 고생은 얼마나 크셨을까.
이렇게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내면공소에 도착한 두 분은 혼인성사를 주신 뒤에 즉시 돌아섰다. 똑같은 고생을 하며 오던 길을 되돌아서 홍천본당으로 돌아오셨다.
이 이야기는 한복사님께 들은 이야기다. 한복사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 날 신부님의 고집때문에 수호천사께서 몹시 바쁘셨을걸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알았다. 사제는 신자를 위한 길이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가신 다는 것을, 사제라는 직분은 목숨을 담보로 내어놓고 십자가를 지고 험지로 가야 한다는 것을….
1961년, 전염병 환자의 입에서 꺼낸 성체를 영하신 신부님
내가 성산공소에서 전교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었다. 관할 지역에 화촌면 삼포리가 있다. 그곳에 매월 봉성체를 해드리는 여자 환자 한 분이 있었다. 그분은 젊은 분이었는데 페결핵 말기였다.
어느 날 위독해져서 홍천본당으로 연락했더니, 조신부님께서 마지막 성체를 모셔드리기 위해 오셨다. 그 여자 환자는 조금 전까지도 말을 잘했고 고백성사까지 보았으므로 신부님은 성체를 영해드렸다. 그러나 미처 성체를 모시기 전에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그 환자의 입에서 조심조심 성체를 도로 모셔내더니 자신이 영하셨다. 그것을 본 나는 걱정이 되었다. 페결핵 환자는 임종 때 병균이 밖으로 나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임종 직전의 환자의 입에 있던 성체를 자신이 영하셨으니 큰일이 아닌가.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아무일도 없으셨다. 만병을 물리치는 대의사이신 예수님의 몸인 성체 앞에서는 병균도 꼼짝못했던 것일까.
포천본당 사목시절
(1969∼1975년)
1969년 12월, 서울 교구에 속해있던 경기도 포천본당이 춘천교구로 이관되었다. 조신부님께서는 포천본당의 초대 본당신부로 임명되시었다. 나는 이 때 본당의 전교사로서 신부님을 모셨고, 은퇴하시기까지 계속 했다. 이 시절 이후의 신부님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 생각한다.
신부님께서 부임할 당시에 포천본당의 미사 참여자는 40여명이었고, 미사 봉헌금은 1.500원 내외였다. 포천본당의 성전은 6군단장이었던 이한림 장군이 높은 산을 깎고 터를 닦아서 석재로 지었다. 산중턱에 건물을 짓다보니 마당이 없었다. 산허리에 터를 만들고 사제관과 전교사 사택을 목재로 건축했다. 조금 내려와서 다시 터를 만들고 강당을 지었다. 성당 주위의 터는 산이라 쓸모가 없었다.
조신부님께서는 지금의 성당은 위치가 너무 높아서 노약자나 어린 아이들이 오기에 매우 힘들 것이라고 보셨다. 그러나 불도저로 이 산을 밀어서 넓은 공간을 조성하면 훌륭한 성전이 들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인근의 국군공병대 부대장을 찾아가셔서 도움을 부탁드렸다. 공병대 공병관은 성당까지 와서 답사를 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우리 기술과 장비로는 공사를 할 수 없다면서 포기했다.
신부님께서는 다시 미군의 부대장을 찾아가 부탁했다. 현지에 답사를 온 미군 부대 공병관도 공사가 어렵다며 망설였다. 하지만 신부님께서 간곡히 부탁하니 그는 "빨리는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해보겠다."라고 대답했다. 신부님께서는 훗날 그 때 공병관은 마지못해 응락하는 듯했다고 말씀하셨다.
며칠 뒤 작업이 시작되었다. 하루 일을 하는 듯하다가 며칠을 쉬었다가 또 하고, 다시 쉬었다가 또 하기를반복했다. 이러기를 6개월이 지난뒤에 드디어 넓은 대지가 조성되었다.
신부님은 축대를 쌓기 위한 돌을 운반해오시고 기술자도 구하시는 등 바쁘게 움직이셨다. 성당 정문 좌우로는 높은 축대를 쌓고, 대지 옆으로도 위치에 알맞게 튼튼한 축대를 쌓아 가셨다.
대지 조성이 끝난 뒤에는 성당 마당의 한 쪽에는 테니스 코트도 마련하셔서 젊은 남녀 교우들이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이렇게 조성된 성당의 넓은 마당은 본당에서 연중 행사로 체육대회를 실시하는 등 지금까지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1970년, 가난한 환자를 도운 신부님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포천에도 가난한 분들이 많았다. 조신부님께서는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분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손수 도립병원에 데려가셔서 치료를 받게 해주셨다. 치료비는 신부님께서 부담하셨다.
당시 본당 관할구역인 청산면 백의리 공소 지역에 미군부대가 있었다. 미군 부대 안의 병원은 굉장히 컸다. 신부님께서는 이곳의 군의관을 찾아가셔서 가난한 환자들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셨다. 신부님은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가리지 않으시고 어려운 환자는 모두 데리고 가셨다. 이렇게 해서 2년간 많은 분들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언젠가 대수술을 받을 분이 있었다. 그 분이 피가 부족하여 A형 혈액형을 급히 구한다는 연락을 받은 신부님은 주일날 미사 시간에 발표하셨다. 수혈 봉헌자 다섯 분을 모시고 미군 병원으로 갔다. 다섯 분의 혈액형을 다시 검사하니 한 분은 B형이라서 안되었고, 다른 네 분이 수혈을 했다. 이로 인해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그 환자 분은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
포천 지역에서는 신부님께서는 영혼의 병뿐만 아니라 육체의 병도 고침 받게 해주시는 아버지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70년, 성당 진입로 개통과 김상봉 형제
포천 시내에서 성당으로 가는 도로는 마을을 관통하는 좁은 길이었다. 따라서 교통사고의 위험이 컸다. 언젠가 조신부님께서 이사하시는 날 짐을 싣고 오실 때 길이 너무 좁다보니 어떤 주택의 싸리나무 울타리를 무너뜨렸다. 신부님은 곧 주인에게 사과를 하고 보상해주셨다. 그 뿐 아니라 이 골목 저 골목에서 갑자기 어린이가 뛰어나오기도 하여 불안해 하셨다.
신부님께서는 마을을 우회하는 차도를 내실 생각을 많이 하셨다. 그러려면 밭주인 3명과 논주인 1명으로부터 땅을 사면 될 것이라고 보셨다. 그러나 땅주인들은 팔지 않으려고 했고, 자연히 시세보다 배를 더 주고 밭주인 3명으로부터 땅을 계약했다.
큰길과 만나는 곳에는 논이 있었다. 도로를 내려면 그 논의 가운데로 지나야 했다. 그렇게 되면 논은 양쪽으로 조금만 남게 되므로 논을 버리게 되는 셈이다. 주인에게 논을 팔라는 말을 하기가 너무나 미안했다.
며칠을 기도드린 끝에 용기를 냈다. 나는 신부님을 모시고 논주인을 찾아가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논주인은 선선히 허락을 하는 것이었다.
"신부님께서 좋은 나라를 두고 우리나라에 오셔서 우리 민족을 잘 살게 해주시려고 하는데 땅 좀 못 드리겠습니까? 필요한 만큼 쓰십시오. 값은 받지 않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놀랐다. 누구든지 땅에 대한 욕심이 많은 법인데도 신자도 아닌 분이 귀한 땅을 내어 주신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포천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있다는 것이 기쁘기도 하셨다.
"형제님 이름이 무엇입니까?"
"김상봉이라고 합니다. 저는 신자가 아닙니다."
"김상봉 형제님, 당신은 나의 친구이십니다."
그 날 신부님께서는 김상봉씨에게 사례의 말씀을 드렸다.
며칠 후 논 값을 후하게 계산해서 김상봉씨를 찾아갔지만, 그 분은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으셨다. 신부님은 논값을 치르려던 돈을 자선단체에 봉헌하셨다.
신부님의 이런 저런 노력으로 인해 큰도로에서 성당 정문까지의 진입로가 개통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1971년이 되었다. 어느날 마을 유지 네 분이 신부님을 찾아오셔서 간곡한 부탁을 했다.
"신부님,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가정 불화로 홧김에 농약을 마신 사람이 있는데 지금 혼수상태입니다. 도립병원의 내과 과장께서 XX약이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약은미군 병원에 가야 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미군부대 분들을 잘 아시니 백의리 병원에 가셔서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당시 백의리에 있던 미4군 육군병원이 부산으로 이전 중이었다. 그래서 병원 문을 닫고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그 사정을 알고 계신 신부님은 정중히 거절하셨다.
"죄송합니다. 그 병원이 이사하는 중이기 때문에 부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 유지분들이 다시 부탁을 올렸다.
"그 사람을 꼭 좀 살려주십시오. 착하고 좋은 분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조금 언성을 높이시며 거절하셨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런 무례한 부탁을 하실 수 있습니까? 안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신부님께서 한 번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영원히 안 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지들이 포기하고 가기를 바랬다. 그러나 유지 분들은 가시지 않고 10여분 정도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중 신부님께서 무심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농약을 마신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지분들은 대화가 시작된 것을 좋아했으나,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분은 교회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신부님께서 모르실 것입니다. 신안리에 사는 김상봉이라고 합니다."
유지들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신부님은 크게 들으셨다.
"김상봉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신부님께서 그 사람을 아십니까?"
"알고 말고요. 그 분은 나의 친구이며 은인입니다. 오…. 이럴 수가! 급합니다. 제가 미군 부대에 다녀오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급히 자동차 키를 들고 밖으로 나가셨다. 밖에는 도립병원 구급차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신부님은 당신 차를 타고 백의리로 가셨다. 일반 차량은 부대 안에 들어갈 수없기 때문이다.
신부님께서는 혹시 군의관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또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김상봉씨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몹시 걱정을 하셨다. 그래서 운전을 하시면서도 그 두 가지를 위해서 기도를 하시며 가셨다고 한다.
하느님의 도움으로 신부님은 그 군의관을 만날 수 있었다. 군의관은 신부님을 상당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협조하겠다고 하시면서 인부 한 사람을 데리고 큰 창고로 가셨다. 완벽하게 포장되어 있는 이삿짐 상자들 중에서 해독제가 든 상자를 힘들게 찾아냈다. 군의관은 25병이 들어있는약 상자를 통째로 신부님께 건네면서 말했다.
"신부님의 친구분이 살아나시기를 빕니다."
신부님께서는 도립병원 내과과장에게 약상자를 모두 인계했다.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신부님께서는 그 날 병실에서 밤을 새우며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셨다.
내과 과장은 해독제를 링게르 약병에 넣어서 주사로 투입했다. 김상봉씨는 이틀만에 손과 발을 움직이더니 드디어 눈을 떴다. 목숨을 구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신부님은 남에게 실례되는 일은 안하시려고 거절, 또 거절을 하셨다. 하지만 성령께서 신부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극약을 먹은 사람의 이름을 물어보게 하셨고, 끝내 치료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 모두가 하느님께서 하신 것이다. 당신에게 땅을 봉헌한 김상봉 형제의 정성을 잊지 않으시고 위험한 순간에 생명을 구해준 것이다.
모두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김상봉씨의 가족들은 깊은 감사를 드리며 훗날 입교를 했다. 1999년 현재 83세를 맞은 김상봉(요셉) 형제님은 건강하게 살고 계시다. 내과 과장님은 김상봉씨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남은 약으로 다섯 분의 생명을 더 구함으로써 음독한 사람을 구한 명의로 유명해졌다.
1972년, 장애인에게 기능을 가르쳐 주신 신부님
포천 시내에 한 쪽 다리가 불편한 김00이라는 장애인이 살고 계셨다. 그 분은 1930년 생으로 부인과 어린 자녀 세 명이 있었다. 그러나 발이 불편하다 보니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서 생활이 어려웠다. 이런 사정을 그 구역의 반장인 이 카타리나 자매님이 알려줬다.
조신부님께서는 그 분이 외인이지만 상관하지 않으시고 인부로 쓰시기로 했다. 그래서 매일 성당에 나와서 일을 하라고 하셨다. 김00 형제는 돌담을 쌓는 일 외에는 잘하는 것이 별로 없었다. 신부님께서는 그 분과 함께 손수 일을 하면서 기술을 가르쳐 주셨다.
목수 일, 연탄 아궁이 놓기, 보일러 놓는 법, 벽돌쌓기, 파이프 자르는 법, 산소 땜 기술, 창고 건축 기술, 수도 연결법 등을 가르쳐주셨고, 뿐만 아니라 신부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다양한 기계 사용법도 알려주셨다. 가끔 신부님께서 어떤 일의 요령을 설명하신 뒤에 사목 일을 마치고 나오면 그르쳐서 큰 손해를 끼친 때도 있었다. 신부님께서는 화를 참으시고 다시 설명해 주시곤 했다.
그것을 본 신자 중에 어떤 분이 똑똑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드릴 테니 인부를 바꾸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러나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끝까지 가르쳐서 기술자로 만들 생각입니다."
김00 형제는 신부님께서 포천에 계시던 6년 동안 매일 성당에 나와서 일을 함으로써 생활도 좋아졌고, 기술도 늘었다. 그러는 사이 그 분의 가족들도 모두 입교하여 영세를 받았다.
신부님께서는 다른 본당으로 가신 뒤에도 김00 형제를 자주 부르셔서일을 맡기셨다. 그 분은 신부님 덕분에 다양한 기술을 익힌 훌륭한 기능인이 될 수 있었다.
1972년, 팔을 잃은 환자를 구하신 신부님
어느 날 성 보나 자매가 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했다. 동리 방앗간의 주인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작업 중에 몸이 방아기계에 끌려 들어가면서 팔이 잘려 나가고 피부가 벗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병원에 갈 차가 없다는 것이다. 택시 기사는 물론 승용차가 있는 마을 사람도 모두 거절했다는 것이다. 워낙 피가 많이 흐르는 데다 가다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중에 연락을 받으신 조신부님께서는 급히 사고 현장으로 가셨다. 오른쪽 팔은 잘려 나가서 살갗만 매달려 있고, 가슴과 얼굴에는 큰 상처가 있는 등 처참한 모습이었다.
신부님은 차에다가 담요를 깐 뒤 환자를 누이고는 서울의 성가병원으로 향했다. 환자는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보호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데 신부님은 손이 떨려서 운전하기가 아주 힘드셨다고 한다.
서울까지 중간쯤 갔을 때 환자의 신음 소리가 약해졌다. 신부님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환자가 죽을까봐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니 앞이 잘 안보여서 몇 번이나 사고가 날 뻔했다고 한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한 뒤 응급실에 들어섰다. 치료를 마친 의사 선생님은 환자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면서 조금만 늦었더라면 사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님께서 정말 힘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 날 처음으로 보았다. 얼마나 걱정을 하셨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식복사는 신부님이 입으셨던 속옷에서 물을 짜낼 정도였다고 했다.
그 환자는 한 쪽 팔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상처가 잘 회복되어서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 그 분은 불교 신자였다. 억지로 개종시키지 말라는 신부님의 말씀이 있었으므로 신앙 문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날 마을 사람들은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더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도와주시는 신부님의 자세를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신부님께서 더욱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3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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