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 동학을 가까이하면서 기행까지 함께 했어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다시 실감하게 된 또 하나의 기행...
"정읍 원평 집강소-->전주역사박물관(또는 전주성입성기념비:완산칠봉 근처)--->삼례역사문화공원-->공주 우금치"로 이어지는 기행 그냥 보면 무미건조한 코스인데... 설명과 곁들어 다니면 하루 코스로 괜찮았어요.
서글프게도 학생들은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120년 전 이땅을 지키기 위해 피흘리며 싸우고 생을 다한 분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안중근의 영웅도 그런 의미에서 학생들에게 관람을 독려... -했어요:개인적인 생각이므로 ~
우선 준비된 간식~~
원평 집강소
마을 가운데... 주변은 가정집이나 상가...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원평 집강소... 지역의 동학연구 향토사학자들이 아니면 사라졌을 곳이라는 생각을 하니 남다른 감동이 들던 곳....
원평 집강소 안쪽에 걸린 플랑이 눈에 띕니다. 여기서 한마디~~~
2차 동학농민혁명은 전주화약(-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이... 조정의 청군파병요청으로 인해...10년전의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도 동시 파병해서 우리땅에 청군, 일본군이 모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우려함. 따라서 동학군은 ... 집강소설치와 패정개혁안을 제시하여 자진해산..-) 이후 일본군에 맞서 동학군이 다시 모인 때부터를 2차봉기라고 말함.
- 이들은 외세를 내몰기위해 척양척왜라는 구호로 싸우고자 했으나 신식병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공주우금치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제에 의해 동학잔당마저 소탕당함.(경복궁 범궐로 일제에 의해 조정은 조종당함)
- 일본군이 동학군을 그렇게까지 해서 전멸시키려 했던 원인은 그들이 의병으로 탈바꿈... 3.1운동으로까지 면면히 흐르는 역사가 증명함(독립선언서 33인 중 손병희: 동학의 3대교주 ) / 병인양요 이후 지속적으로 활동하던 의병으로 일제는 동학군의 의병화를 미리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동학군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것을 문서 등을 통해 확인함(각종 방송매체로 확인^^)
-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는 시점은 "을미사변(1895)이후"부터인데 "동학농민혁명(1894)과 근대화에 불을 당긴 갑오개혁(1894)"은 바로 한 해 앞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동학농민혁명 2차봉기는 명백히 경복궁을 범궐한 외세(일본)를 이 땅에서 물러가라고 외친 2차봉기(농민군, 유생민보군이 모두 합세)부터이므로 동학농민혁명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플랑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원평에서 전주역사박물관으로~~~~
전주역사박물관 3층에는 동학농민혁명관이 있습니다. (해설사도 있어요) 여기서 설명듣고~~ 삼례로 출발
아래는 동학교주 최제우의 사상을 동학의 2대교주 최시형선생이 정리한 동경대전(동학의 경전)
최근에 도올선생이 동경대전 해설을 책으로 냈어요~
아래는 삼례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찾는 이는 우리만...(2차례 답사 모두 우리만 있었음.)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불처럼 타올랐던 동학농민혁명.... 학자들은 프랑스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공부할수록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은 민주항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청나라 말기의 태평천국의 난(중국 남경지역에서는 태평천국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해설사의 말씀)과 우리의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정권과 외세에 맞서 항쟁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한다. 한국사에서 위로부터의 혁명은 이보다 10년 전에 일어난 "갑신정변"이라고 한다.
위로부터의 혁명인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그로부터 10년 후에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근대화의 길목에 선 봉건의 마지막에서 외친 민중의 함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삼례역사문화광장에 새겨 있는 패정개혁안 12개조. 수능시험에도 등장한다... 여기서 맨 아래 12조 평균분작!!!(사회주의의 시초로 보이는 사상이라고들 평가한다)
아래는 공주 우금치 언덕.....
높이 솟은 석상 뒤 언덕너머가 피흘리며 싸웠던, 그리고 거의 전멸한 우금치 재이다. 여기 그 언덕 너머에 위령탑을 세운 이유는 동학군이 끝내 못넘은 언덕 우금치를 ...
넘지 못한 한을 위령탑만이라도.... 재 너머에 세워서 피흘리며 간 그들 동학농민군의 소망에 답하고자 하는...
동학단체 후손들이 생각한 그들을 기리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설명을 통해 들었다.
위 사진의 언덕을 넘어서 걸어오면
아래 사진의 우금치재를 아래로 관통하는 사진의 도로가 나온다.
해설사의 말로는... 하마터면 우금치 재는 사라질 뻔 했다 한다. 동학관련 학자와 단체들이 강력 항의하여 도로를 뚫는데.... (힘이 없어...) 역사의식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직선도로를 뚫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위의 언덕의 원형이라도 보존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나~~
아무튼 현재 우금치 재는 그 아래로 터널이 되어 있다는 웃픈 현실!!! 그래도 남아 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동학농민혁명의 현주소가 좀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언덕사진~ 지금 보이는 대로(평탄화는 했지만...) 사진 속의 올라가는 이들이 가는 방향으로 그렇게 동학군은 나라를 지키러 서울을 향해 가기 위해 500여명의 관군일본군에 맞서 50000명이 재를 올랐으나... 대패함.
저 재를 올라넘어서야만... 서울로의 진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던 관군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의 격전지를 걸으며~
현재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이 언덕이 120년 전 그 때는 숲으로 나무로 언덕으로 되어 있었고 척양척왜를 외치던 민중의 함성은 지고,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15년 후 일본에 합쳐지는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내려오며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