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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독은 일반적으로
講讀강독
講 외울 강, 讀 읽을 독,
글(책)을 읽고 그 뜻을 분석해 밝히는 것입니다.
글을 읽고 그 뜻을 분석해 이해하며 읽는 것입니다.
글을 강의(講義), 토론(討論)하며 읽음. 책을 읽고 그 뜻을 밝힘
옛날 서당 교육에서 그 결과를 확인 하기 위하여 점검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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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해, 설교의 개념/왕대일 교수
다음 왕대일 감신대 교수의 글을 참고하세요. 잘 나와 있습니다.
주석, 주해, 설교의 개념/왕대일 교수
1. 주석이란 무엇인가?
주석이 무엇인지는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그 여러 가지 설명을 하나로 정리할 때 주석이란 본문이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이해한 내용을 "보도하는" 행위가 된다. 이 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말과 "보도한다"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본문을 대하는 주석자의 자세를 가름한다. "보도한다"는 것은 주석 작업의 결과를 표현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주석은 철두철미 "엑세게오마이"(exegeomai)가 되어야 한다. 즉 본문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그대로 "보도하는" 노력이 되어야한다. 말 그대로 주석(註釋, exegesis)이 되어야지 사석(私釋, 사사로운 풀이, 즉 eisegesis)이 되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의 목소리를 보도해야지 주석자의 편견, 기분, 판단, 주장 등을 나타내는 통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석은 본문에 대한 세심한 읽기이다. 본문을 "예민하고 세밀하게 읽어 가는 과정"(sensitive close reading)이 바로 주석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주석을 본문의 구절(verses)에 대한 해설(commentary)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최근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WBC(Word Biblical Commentary)나 Interpretation 시리즈 같은 주석 책들을 보면 현대 주석학의 경향이 본문을 구성하는 구절이나 단어에 대한 풀이에서 구절들이 모여 이루어진 최종형태의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WBC 카멘타리의 경우, 본문의 구절에 대한 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본문의 형태, 본문의 구조, 본문의 정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난 뒤 본문의 구절을 해석한 다음 본문의 가르침을 주해 형식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것은 주석이란 단순히 본문의 구절 풀이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석은 구절들이 모여 형성된 본문(텍스트)을 파악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주석은 본문의 소리를 듣는 노력이다. 주석의 대상은 본문(말씀)이다. 주석 하는 자는 누구나 이 본문과 "뜨겁게" 만나야 한다. 주석자는 함부로 본문 속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본문을 상징이나 암호로 보고 그런 암호가 뜻하는 바를 영감 있게, 은유적으로, 우화적으로, 교리적으로 풀이하려고 서둘러서는 안 된다. 본문의 증언을--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든지 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보도하려는 노력에 우선 충실해야 한다.
주석은 "해석의 과학"(science of interpretation)이다. 주석은 해석학의 인도를 받아 실천되는 "해석의 예술"(art of interpretation)이다. 주석 작업에 방법론이 요청되는 것은 우리가 해석해야할 본문이 "말씀"이되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해석학적 방법론을 동원하든, 성서 본문을 주석하는 자는 누구나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옛 문서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 있고 역동적인 "말씀"을 해석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 사람의 "말"로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총체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영감어린 "말씀"이 바로 우리가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본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석은 사람의 글과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성실하게 보도하는 해석학적인 몸짓이다.
2. 주석은 어떻게 하는가?
"주석하기"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기존에 출판된 여러 주석 책들을 읽고 연구하면서 배우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 본문을 읽고 공부하면서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가는 과정이다. 필자가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석하기"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이다. 물론 전자도 "주석하기"의 일환인 것은 틀림없다. 성서본문을 주석 하려고 할 때 으레 무슨 좋은(또는 은혜로운!) 주석 책이 없는지를 살피는 것도 "주석하기"를 주석 책을 공부하며 정리하는 노력으로 전제했던 데서 비롯된 습관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런 노력은 주석 작업이 아니다. 주석이란 주석 책을 살피는 작업이 아니고 성서 본문을 탐색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주석 작업의 교재는 성경책이다. 성서본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주석 책이라도 그것은 부교재에 불과하다. 부교재를 들여다보면서 말씀의 뜻을 파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주석은 성서 본문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노력이다. 성서 본문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음을 파악하는 노력이다. 그러하기에 주석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본문이다. 다른 어떤 참고서를 보기 전에 주석자는 먼저 성서 본문과 뜨겁게 만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가 얻은 수확의 폭을 넓히거나 깊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수정하거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여러 다른 주석책들을 참고로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성서 본문에 대한 주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 과정을 크게 셋으로 구분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첫째는 본문을 읽는 과정이고, 둘째는 본문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며, 셋째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해설하는 과정이다.
첫째로, 본문을 읽는 과정은 대략 다음 몇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주석자는 자기가 해석해야 할 텍스트의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즉 본문을 결정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주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말 개역 성경의 경우 겹동그라미 표시로 단락 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 설정의 단계에서 우리는 이런 표기를 참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의 단락 결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문 이야기와 그 가르침의 통일성(integrity)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야기나 가르침의 통일성이야말로 본문의 단락을 결정하는 중요 기준이다. 크든, 작든, 넓든, 좁든, 어떤 이야기나 가르침 속에 일관성 있는 한 흐름이 있다면, 주석자는 그것을 본문 설정에 필요한 단락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본문을 설정한 후에 주석자는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본문을 "뜨겁게" 읽어야 한다. 외울 만큼 거듭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면서 본문에 등장하는 구절과 글자 등을 파악해야 한다. 이 때 가급적 하나의 본문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우리말 개역,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으로도 읽고, NIV, NRSV같은 영어 번역으로도 읽어야 한다. 능력이 된다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된 원어 본문을 읽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 할 경우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본문을 해설하고 있는 책이라도 참조해야 한다.
이 때 본문의 맥락(본문의 문맥과 본문의 배경)을 파악하는 작업이 소중하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가름하는 척도는 대개 본문의 맥락에서 결정된다. 맥락을 떠난 본문이란 없다. 본문의 맥락의 흐름을 무시한 특정 본문만의 해석이란 참으로 위험하다.
둘째로, 본문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은 주석의 몸통에 해당된다. 이 과정에서 주석자는 본문 안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단어, 어구, 표현 등을 파악해야 된다. 그렇기 위해서 본문 전체→ 문단→ 절→ 반절→ 음절→ 단어 등의 순서대로 본문을 파고 들어가면서 본문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글의 형식, 형태, 문법, 구문, 관용어, 상투어, 문체, 도식 등을 갈무리해야 된다. 예를 들어 한 본문 속에 중심 역할을 하는 동사들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노우트에 적어 보라. 이 과정에서 주석자는 성서 낱말 사전, 성구 사전, 성서 신학 사전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제대로 거치게 되면 본문 안에 개진되어 있는 "의미상의 층"이 대개 발견된다.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은 바쁘다. 일주일에도 열 편 이상의 설교를 해야 되는 목회자들이 바로 이 땅의 목회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편의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 한 본문만을 오랜 시간 붙들고 늘어지는 주석 작업이란 때론 지루하거나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설교자는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성실한 자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한 편의 설교를 그 열매로 얻게 되는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작업에 크게 도움이 되는 과정이 곧 본문의 구성/구문을 파악하려는 노력이다.
본문의 말씀은 그냥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틀, 짜임새, 디자인 속에 조직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텍스트(text)는 텍스쳐(texture)인 것이다. 본문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피라는 말은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기 전에 본문의 구성 형식을 식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의 외형을 먼저 파악한 후에 그 외형 속에 담긴 내용을 정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때 주석자는 본문의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의 문예적, 언어적, 문법적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본문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동사들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주목해보자. 동사들의 쓰임새, 이를테면, 동사의 시제의 변화, 인칭의 변화 같은 것들은 본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수사학적으로 드러내는 통로이다. 주석의 대상으로 삼은 본문이 가르침이라면, 본문의 중심 단어, 중심 모티브, 문체를 비롯한 말투, 소리, 심상 등도 검토해야 한다. 본문이 이야기 형식인 경우 이야기의 기승전결이나 줄거리(plot)의 전개 과정을 무엇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왜라는 질문과 함께 추적한다. 또 등장인물이나 배경, 해설자의 관점 등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왜 이런 작업이 주석 작업에서 소중할까? 왜, 무슨 이유로 본문의 형식을 살피는 일이 본문의 내용이나 줄거리를 파악하는 일보다 앞서야 할까? 그것은 본문의 뜻(concept)이 본문의 내용이나 줄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은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글, 어구, 문장 등을 표현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 때 본문의 뜻은 글자나 구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와 글자 사이, 구절과 구절 사이에도 들어가 있다. 신문을 읽어 갈 때 행간(行間)을 읽어야 된다는 소리가 있지 않은가. 고기도 그물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그물코 사이에 걸리지 않은가. 본문의 뜻이나 의미는 텍스트의 표면에만 아니라, 텍스트를 구성하는 글자 사이에도 있고, "텍스트의 바닥에, 또는 텍스트의 심층에도"(underneath the text) 존재하고 있다. 본문이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를 파악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셋째로, 지금까지의 결과를 정리하면서 본문의 메시지(의도, 기능, 의미 등)를 규정하게 된다. 이 때 우리는 지금까지 다룬 본문이 어떤 상황 속에서 선포(기록)된 말씀인지를 새삼 확인해야 한다. 본문은 단순한 문학적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한 틀(표현)과 알맹이(사상)를 갖춘 글이다. 이 "말씀"은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 주어졌다. 본문의 의도나 의미 등은 어떤 상황 속에, 어떤 말씀이, 어떻게 선포되었는지를 확인할 때 비로소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석 작업이 성서 본문을 단순히 심미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머물러서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텍스트를 텍스트 되게 하였던 역사적, 사회적 정황은 본문이나 그 맥락에서 파악될 수도 있고, 아니면 주석자가 들춰보아야 하는 참고서들(개론서, 역사서, 성서지리 등)에서 파악될 수도 있다. 어떤 경로를 밟든 언어의 사회(학)적 기능에 대한 이해는 본문의 메시지를 파악하는 일에 중요하게 활용된다. 이런 작업의 결과를 정리하면서 본문과 본문의 내용, 본문과 본문의 말을 듣는 사람(청중) 사이에 형성되는 메시지를 확인하게 되면 우리가 주석이라고 부르는 대장정이 성공리에 그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3. 주해/강해란 무엇인가
주해/강해를 설명하기 전에 우선 주석과 주해/강해가 어떻게 서로 다른지를 언급하고 지나가야 한다. 우리 가운데에는 주석이나 주해/강해는 모두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이고, 이 둘 사이에는 다만 그 서술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즉 주석이 보다 구절풀이에 매달리는 작업이라면, 주해/강해는 보다 문단해설에 초점을 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주석이란 본문의 단어, 구절, 어구, 표현 등을 풀이하는 작업이지만, 주해/강해는 문단을 해설하는 작업이라고 단정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주석과 주해/강해의 차이는 주석을 나타내는 말인 "엑세제시스"(exegesis)와 주해/강해를 표시 하는 단어인 "엑스포지션"(exposition)의 차이에서 파악해야 한다. 주석은 "엑세제시스"란 말답게 본문의 소리를 "끄집어내어" 읽는 노력이지만, 주해/강해는 "입장을 바꿔서" 해설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주해/강해(exposition)는 라틴어 엑스포지티오(expositio)가 말하듯이 어떤 한 본문을 다른 글/말로 제시하는 설명이다. 이 때 주해가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면, 강해는 그것을 구두/설교로 해설할 뿐이다. 이런 차이를 존중한다면 주석의 결과는 주해(exposition)로, 주해의 열매는 "강해"(expository preaching)로 정리되게 된다.
주석이 원저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살피는 시각에서 본문을 풀이한다면, 주해/강해는 본문의 뜻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적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석이 본문의 세계 ("그 때 그 곳")를 탐색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면, 주해/강해는 그 본문의 세계를 "오늘 여기"에 있는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고자 본문을 풀이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석이 보다 저자 중심적 이해에 치중할 때 주해/강해는 다분히 독자 지향적 해석이라는 면모를 지니게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석은 목회자를 대상으로 쓴다. 주해/강해는 회중(교인)을 대상으로 쓴다. 여기에 목회자들이 쓴 주해/강해가 성서해석사에 공헌하게 되는 자리가 있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회 의 말로 통역하는 능력이란 목회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에게는 성서학자들이나 석학자들에게 없는 목회자들만의 현장(회중, 교인)이 있지 않은가. 목회자들의 성서주해/강해가 성서해석에 기여하게 될 공헌은 바로 이 현장성에 있다.
주해/강해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의 세계와 회중의 세계를 균형 있게 다루려는 노력이다. 본문의 세계와 회중의 세계라는 두 기둥 사이의 창조적인 긴장 관계가 주해/강해에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은 곧 주해/강해의 결과가 곧바로 강해 설교로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설교자에게는 본문(텍스트) 외에도 회중(컨텍스트, 곧 인간, 사회, 역사, 창조세계 등)에 대한 깨달음과 회중의 삶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있는 소리가 아니라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계신 말씀"이다. 회중에 대한 깨달음과 회중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성서 본문 중심적이면서도 회중에게 의미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해/강해할 수 있다.
주석은 주해/강해로 옮겨가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주석이나 주해/강해의 대상은 성경 구절이 아니다. 단어 풀이도 아니다. 주석이란 본문 전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살핀 후, 그것을 주석자의 말로 설명해 주는 노력이다. 이 점은 주해/강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주해/강해는 주석에 비해 다분히 회중 중심적이다. 본문의 가르침을 단순히 전달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회중의 삶 속에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으로 뿌리를 내리도록 애쓰게 된다. 주해/강해는 주석에 비해 다분히 실용적, 실제적, 역동적이다. 이런 까닭에 주해자/강해자에게는 주석의 결과 확인된 메시지를 "입장을 바꿔놓고"(ex-position) 생각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된다.
주석에서 얻은 본문의 메시지에 대한 풍부한 묵상과 기도, 끊임없는 명상과 성찰이 주해자/강해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여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석의 결과를 오늘의 현실에 적용시키게 되는 통찰력이야말로 주해자/강해자에게는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주석의 대상은 본문이지만, 주해/강해를 하면서 고려해야 할 대상은 회 중(교회, 사회, 역사)이다. 회중에 대한 고려 없이 전달되는 성서지식의 나열은 주해자/강해자의 유식함 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 결코 생명을 낚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회중을 만나고, 체험하며, 회중의 말과 마음을 주해자/강해자가 경험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눈 높이를 맞추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걸음걸이의 폭을 같이하는 것이다. 눈 높이를 맞추라는 것은 지적인 수준을 함께 하라는 것이고, 걸음걸이를 함께 하라는 것은 정서적인 폭을 같이 나누라는 것이다. 본문과 뜨겁게 만나는 과정(주석)에서는 학자적인 성실함이 요구된다. 하지만 회중과 뜨겁게 만나는 과정(주해/강해)에 들어선 자에게는 구도자의 간절함이 요청된다.
주석의 단계에서는 학문이, 주해의 과정에서는 기도와 묵상이 전제된다. 그래야 설교의 본문으로 삼은 성경 말씀이 오늘 우리 상황 속에 새롭게, 역동적으로 풀어질 수 있다. 이럴 때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적용이 동반되게 된다.
주해자/강해자는 성서본문을 가지고 세상을 읽어가야 한다. 세상을 통해서 성서 말씀을 읽기보다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세상을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서 본문은 우리 일상을 점검할 수 있는 거울이다. 날마다 우리에게 배달되는 신문이 세상을 새롭게 묘사하듯이 성서의 세계를 통해서 우리 일상생활을 새롭게 가다듬는 노력이 주해자/강해자에게는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주해/강해는 어떻게 하는가? 주석의 결과(열매)를 회중의 말, 회중의 감정, 회중의 상황 속에 다시 풀이하려는 노력에서 주해/강해는 자리잡게 된다. 이 때 첫째, 본문의 문맥을 철저히 이해하라. 둘째, 본문의 중심언어(중심소재와 중심주제를 구성하는)를 이해하라. 셋째, 본문의 언어들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그 문법적인 특성을 이해하라. 예를 들어 단어의 배열 순서나 문장의 구조를 이해하라.
넷째, 본문의 말씀들의 배경을 이해하라. 원래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파악한 후 그것이 오늘 이 시점의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라. 다섯째, 구약 본문의 증언은 신약에서, 신약 본문의 증언은 구약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이해하라. 이때 자의적이거나, 인위적이거나, 우화적이거나, 지나치게 모형론적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지금까지 다룬 작업을 글로 써 가야 한다. 이때 본문의 소리나 증언을 한 구절 씩 파악하기보다는 한 문단 씩 파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각 문단을 다루면서 그 속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구절이나 단어를 풀이하는 형식을 밟아가라. 일곱째, 본문의 문단을 다루어 갈 때에는 본문 전체의 "주제"(main theme)를 회중이 알아듣도록 분해해서 제시하거나, 아니면 본문의 구조(논리적 순서)나 본문의 사상이 배열된 순서(내적 구조)를 따라서 본문의 증언을 회중의 말로 풀이해서 제시할 수도 있다.
4. 주해/강해에서 강해설교로
설교는 여러 갈래로 구분된다. 설교의 내용에 따라서는 교리설교, 절기설교, 인물설교, 윤리설교 등이 있고, 설교의 형식 (또는 성서본문을 취급하는 방식)에 따라서는 제목설교, 본문설교, 강해설교 등이 있다. 무슨 형식의 설교를 하든 설교자는 성서의 세계와 오늘날 회중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성서본문의 말씀을 설교자의 언어로 전달하려는 노력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포장으로 전달해서는 안 된다. 성경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도록 하는 것(Let the Bible Speak out in the Pulpit)-- 그것이야말로 진정 이 시대의 설교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성경 말씀을 설교라는 형식을 통해서 선포해야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성서 본문을 이용해서 전하고 마는 것은 설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또 하나의 "아이세제시스"(eisegesis)이다. 이런 점에서 강해설교는 여러 설교 형식 중에서도 오늘날의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절히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는 흔히 설교자에게 절실한 것은 설교의 아이디어(또는 영감)라고 한다. 물론 틀리지 않는 말이다. 성서 본문을 연구하면서, 학문적인 주석이나 목회자의 강해나 설교집 등을 참고하는 것도 설교를 구성할만한 창조적인 생각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런 설교의 아이디어는 성서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주석→ 주해하는 과정에서도 얻을 수 있고, 이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일상 삶 한 가운데서도 발견할 수도 있다. 아이디어야말로 설교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설교가 아이디어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이디어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설교는 성서 본문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지, 설교자의 아이디어가 설교 형식으로 전달되어서는 안 된다. 킬링거(J. Killinger)란 설교 학자가 "아이디어에도 맛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J. Killinger, Fundamentals ofPreaching, 47-89).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맛이 들어 있어야 하는지가 더 큰 문제이다. 필자가 기대하는 맛은 성경적인 맛이다. 성서적 설교의 아이디어는 성경본문이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전달하고 있는지를 조직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그 맛을 낼 수 있다.
주해/강해에서 강해 설교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이 필요하다. 곧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 주해/강해를 철저하게 거치다 보면, 우리는 본문의 소리를 참으로 풍성하게 듣게 된다. 이 때 설교자는 지금까지 파악된 말씀의 세계, 본문의 음성, 말씀의 이미지 등을 노트 한 두페이지에 써 놓은 후, 그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만을 간추려서 하나의 설교로 정리하는 방식이 요청된다. 어떤 본문을 주해/강해하면서 깨닫게 된 아이디어를 한꺼번에 모두 한편의 설교 속에 쏟아 넣으려고 애쓰지 말자.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콤팩트"(compact)한 언어로 구성된 설교가 훨씬 더 힘있고 효과적이다. 설교를 듣는 회중의 집중력이 30분을 넘기지 못한다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이론도 이런 주장에 도움이 된다. 이런 노력을 돕는 효과적인 방식 중의 하나가 본문의 증언들을 도표 형식으로 정리해 보는 것이다. 즉 본문 연구에서 파악된 여러 주제, 소재 등을 하나로, 체계적으로 묶어보는 것이다. 본문을 주석하고 주해하면서 얻은 모든 깨달음을 모조리 그냥 나열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어떤 주제에 맞춰 정리하다 보면 여러 설교문의 대지와 소지를 선별할 수 있다. 이렇게 하고자 할 때 강해 설교에도 이른바 통일성, 예술성 등이 갖춰지게 된다.
성서 본문을 주해/강해할 때 우리는 여러 다양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강해 설교를 전공한 사람들에 따라서는 무엇이 강해설교이고, 무엇이 강해설교가 아닌지에 대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본문의 문단을 본문의 내적 구조에 따라서 풀이하는 방식이거나, 본문 전체의 주제를 설교자의 명제로 삼은 다음 그것을 분해해서 전달하는 형식 모두가 넓은 의미에서 강해 설교라는 범주에 속한다. 이 두 방식 모두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다루는 과정을 설교의 형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가 기억할 것은 "running commentary preaching" (이른바 본문 구절 풀이식 설교)으로는 감동적인 강해 설교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강해 설교는 어디까지나 성서 본문에 대한 설교이다. 강의와 설교는 엄밀히 말해서 다르다. 강의는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 주목적이다. 설교는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본문의 말씀을 전달해서 회중을 깨닫게 하고, 변화하게 하며, 결단하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는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강해 설교에도 일정한 흐름과 짜임새, 통일성과 논리적 전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짧은 설교 시간에 어떻게 효율적인 메시지의 전달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를 고려할 때 본문에 대한 구절풀이식으로는 효과적인 강해 설교를 기대할 수 없다.
강해 설교에는 반드시 적용이 있어야 한다. 적용을 빼드린 강해 설교로는 감동과 결단을 이루어낼 수 없다. "강해 설교의 혼은 적용에 있다"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본문의 적용을 위해서 설교자들이 가장 심혈을 쏟는 노력이 예화의 사용이다. 설교학자들에 따라서는 예화가 건물에 있어서 창문 역할을 한다고 보기도 하고, 그 반대로 음식점을 비유 삼아 음식점에서 중요한 것은 주메뉴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고 꼬집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예화가 설교 본문에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예화의 사용은 설교를 듣는 회중의 관심을 본문에서 떠나게 만드는 역효과를 가져온다. 또 본문의 의미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현재의 상황 속에 적용할 때 지나치게 그 의미를 "강요하는"(imposition) 문제를 낳아서도 안된다.
설교의 윤곽을 만들고, 설교를 작성하는 데에는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방법이 어떠하든지, 모든 설교는 그 눈 높이에서, 그 걸음마에서 회중의 삶과 신앙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의 지식과 정서 속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 영혼과 육체 속에 말씀의 깊이가 뿌리 내리게 해야 한다. 설교학(homiletics)이란 단어가 "같은"(homo) 것을 "말한다"(lego)라는 단어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성서번역의 이론 중 하나인 "의미의 동등성"(dynamic equivalence)은 강해설교 작업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다. 강단의 언어는 동시대인의 언어여야 한다.
5. 강해 설교의 준비
강해 설교를 준비하는 자는 다음 세 요소가 전제 된다. 즉 성서본문이라는 세계, 그것을 해석하는 설교자의 자리, 설교자의 말씀을 듣는 회중의 상황이라는 삼각관계가 그것이다. 이 삼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서 강해 설교의 서론, 본론, 결론은 그 구도를 세우게 된다. 그렇다면, 강해 설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첫째, 강해 설교는 우선 본문을 연구(주석과 주해)한 후 그것을 기도와 묵상으로 다듬는 단계에서 시작된다. 이 때 성서 본문의 세계를 오늘, 여기에 있는 회중에게로 연결 짓는 접촉점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해야 된다.
둘째, 본문의 세계를 "브레인스토밍"(여기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주해에서 강해설교로"를 참조하라)을 통해서 정리하면서 설교의 명제와 설교의 목표를 확정하게 된다. 이 과정을 할 수만 있으면, 설교준비 노우트에 기록해 두자. 좋은 설교의 목표란 구체적이어야 하고, 달성할 수 있는 것이야 하며, 측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설교의 명제와 목표가 설교 속에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교의 명제와 설교의 목표를 기록해 놓으면, 그 기록은 특정한 성경책을 연속으로 강해해 나갈 때 아주 소중한 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구약의 예언서 중 한 권을 강해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자. 구약의 예언서에는 매 장마다 비슷한 내용, 비슷한 어조의 꾸짖음과 탄핵, 심판 선고가 반복되고 있다. 이 때 각 설교의 명제와 목표를 확실히 정해 놓고 구분하지 않으면, 늘 비슷한 내용을 설교 시간마다 반복하게 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아니면 이사야서를 설교하면서 아모스서처럼 설교하게 되거나, 호세아서를 설교하면서 예레미야서처럼 설교하게 되는 실수에도 빠질 수 있다.
셋째, 설교의 명제, 목표를 정한 후에는 설교의 대지(뼈대)를 세우는 절차를 밟게 된다. 설교의 뼈대(대지)는 본문의 내적 구조를 따라가면서 본문의 사상을 밝힐 수도 있고, 설교 전체의 주제를 설교자의 명제로 재구성한 다음 그것을 분해해서 세울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설교의 대지는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청중이 기억하기 쉽도록 단순해야 한다. 설교의 전개과정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어야 한다.
그 전개과정은 논리적일 수도 있고, 심리적일 수도 있으며, 신학적일 수도 있고, 수사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뜨개질하듯"("뜨개질"이라는 용어는 존 킬링거의 것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말씀과 상황을, 신학과 세계를, 설교자와 회중을 촘촘하게 연결짓고자 노력해야 한다.
넷째, 필요하다면 말씀의 적용을 위한 예화를 적절하게 설교의 대지 속에 적절히 배열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계기는 말씀의 적용에서 온다. 예화는 설교의 포인트와 적절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진부한 예화를 사용하기보다는 신선한 예화를 사용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예화 사용에서 중요한 것은 적절성과 다양성이다.
다섯째, 지금까지 한 작업에 서론과 결론을 첨부한다. 서론은 성서 본문과 그것을 듣는 회중 사이에 어떤 공감대를 갖게 하거나, 기대감을 갖게 하는 디딤돌이 되어야 하고, 설교의 결론은 설교를 들은 회중에게 어떤 결단을 촉구할 수 있는 매듭이 되어야 한다. 이 때 설교의 결론에 본문의 구체적 적용을 위한 예화를 사용할 수도 있다.
여섯째, 설교의 제목을 정한다. 설교의 제목은 지금까지 준비한 작업을 회중에게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는 표제어이어야 한다. 좋은 설교 제목이란 회중에게 설교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성서 본문의 어떤 구절을 현재적으로 재구성해서 제시할 수도 있고, 회중이 당면한 문제와 본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적절성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일곱째, 지금까지 준비한 설교 작업을 원고로 정리한다. 강해 설교의 원고는 구어체이어야 한다. 설교는 귀를 위한 것이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다.
설교의 스타일과 형식은 다양하다.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에 따라서 설교의 관점들도 달라질 수 있다. 강해 설교가 유행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강해 설교자일 필요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타일의 설교를 개발해야 한다. 그렇지만 설교자들은 모두 "표현 방법이 곧 메시지"라는 말을 새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표현 방식이 메시지의 효율성을 결정짓는데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을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떻게 전해야 효율적인가 하는 문제는 설교의 윤곽에 따라서 판정날 수 있다. 이른바 "귀납법적 강해 설교"라는 것을 우리가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납법적 강해 설교라는 말은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에스베리 신학교의 랄프 루이스(Ralph L.Lewis)가 제일 먼저 한 말이다. 성경 강해는 엄밀히 말해서 연역법적이다. 성경 강해라는 말 자체가 성서 본문이 오늘 우리 상황 속에 어떻게 "풀어지는지를" 줄기차게 관심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회중의 상황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바로 성서 강해이다. 성서 강해는 원칙적으로 회중의 상황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결되는 방식보다는 말씀 자체의 컨텍스트(즉 본문의 배경이나 문맥, 본문의 정황) 등을 소개하면서 성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을 밟는다. 성경 강해라는 말 자체가 성경 본문에서 시작하여 상황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법적 강해 설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설교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보다 효율적인 방법은 연역법적 전개보다는 귀납법적 전개라는 점을 강조한다. 성서 강해가 엄밀히 말해 연역적이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에서는 귀납법적 전개라는 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보자는 것이다. 이 때 특별히 신경을 쓰는 영역이 강해 설교의 서론을 귀납법적으로 구성하는 일이다. 즉 설교의 서론이 회중이나 설교자의 상황에서 시작하여 본문으로 연결되는 전개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설교와 설교를 듣는 회중 사이에 성서 본문에 대한 "공감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다. 결코 설교의 방법론이 아니다. 설교의 성패(?)에서 중요한 변수 역할을 하는 것은 설교자에 대한 신뢰이다. 설교의 방법론보다는 설교자의 인격이 설교의 성패를 좌우한다. 설교는 설교자가 한다. 그렇기에 설교자의 신학은 설교의 형성에 자못 소중하다. 신학이 깊으면 설교가 무르익는다. 웨슬리의 정신과 감리교 신학은 우리의 성서 강해와 강해 설교에 녹아 있어야 할 자양분인 것이다.
(이 글은 왕대일, <새로운 구약주석- 이론과 실제>, 서울: 성서연구사, 1996, pp. 57-154,
269-286에 실린 "본문 주석과 본문 설교의 이론"과 왕대일, <목회자의 실패, 목회자의 성공>,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0, pp. 256-286에 수록된 "구약의 말씀과 설교"에 기초한 글이다).
출처
http://kidok.net/bbs/view.php?id=mokh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