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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한의원에서 인애가한방병원으로
김덕호(한의학박사, 한방내과 전문의) 인애가 한방병원 이사장은
1953년 1월 25일 경북 영주시 장수면 성곡리 563번지에서
부친 김기진 장로와 모친 김선녀 권사와의 사이에 8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 조부 이당과 김덕호 이사장, 인술로 덕을 쌓아가는 가풍은 아직도 대를 이어 전해져 오고 있다. -
김 이사장은 어린시절 조부 김성환 장로의 무릎에서 조부의 표정을 바라보며
그의 인자함을 배웠으며 조부의 봉사하는 삶을 지켜보며 봉사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김 이사장의 조부는 간혹 어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을 전했다.
가끔 손자의 허물이라도 있으면 보통 부드러운 말로 가르치고 훈계했으나
때로는 얼굴을 붉히거나 무서운 말로 꾸짖는 적도 있었다.
오직 인자함과 자애로움으로 손자를 가르쳤다.
- 무의촌 진료 봉사에 참여한 김덕호 이사장, 뒷줄 맨좌측이며 이때 지도교수로 팀을 이끌었다. -
김 이사장은 어린시절부터 조부의 한의원에서 한약 냄새를 맡으면서 자랐다.
이렇듯 김 이사장은 태어나면서부터 할아버지인 김성환 장로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속에서 자라
영주초등, 장수서부초등, 장수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천자문과 개몽편을 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1968년 영광중학교에 다니면서 동몽선습,
사략 등 사서삼경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받았다.
1971년 영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조부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한의학과에 입학하였다.
김 이사장이 당시 한의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조부의 유지였으며 본인의 뜻이기도 했다.
- 김덕호 이사장의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총장으로부터 한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있다. -
서울대 의대에 입학할 점수를 받아야 경희대 한의과를 들어갈 수 있는
어려운 관문통과도 실상 조부와 부친 그리고 본인의 기도와
기의 선을 향한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재학시절에는 수많은 어려운 과목, 예컨대 해부학, 병리학 등 과목을
올 100점을 맞는 등 교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경희대학교는 의학과, 한의학과, 치의학과 등 3개과가 있어 해부학 등
기초과목들은 공동출제 였는데 여기서 올 100점 수석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고
전국 한의사 국가고시에서도 수석합격, 졸업시에도 수석졸업이라는 명예를 안았다.
이런 결과에도 그는 교만하지 않고 다른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부 전해주고 자신이 받는 장학금 등을 불우한 학생들의 학비로
은밀하게 내 주는 등 겸손과 주는 마음으로 일관했다.
학비 수혜자 중에 한 후배이면서 제자는 지금 미국 하버드대학 아시아 의학연구소에서
활동하는 등 각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도 하다.
-김덕호 박사가 저술한 한의학의 진수인 "Acupuncture & Moxibustion"이라는
영문 교과서와 집필한 전문서적 교과서중 "간계내과학" -
김 이사장은 1977년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해인 1978년 경희대학교 대학원 한의학과에 입학하여
석사과정을 거쳐 1080년 한의학 석사를 취득하고 1985년 같은 대학원에서 한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 이사장은 경희대학교 한의학과(경희의료원)에서
4년 동안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실력을 배양했다.
1980년부터 같은 대학교 한의학과 교수로 발탁되어 경희의료원에서 재직하였다.
경희대학교 캠퍼스와 경희의료원 생활로 20년을 보내고 뜻한 바 있어
1992년부터는 외래교수로 재직하였다.
- 박사학위 수료식장에서 조부 이당 선생과 함께 -
연이어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중풍이나 간장질환, 노인질환 전문의이기 때문에
영주지역에서 그러한 난치성 환자들을 친절하게 돌보아 주었다는 분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또한 “수종 한약물의 면역반응과 항암에 대한 연구”등 많은 논문과
“한방내과학”, “혈액학”, “간계내과학” 등을 저술하였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한국한의학 세계화를 위한 프로젝트의 하나로
한의학의 진수인 “Acupuncture & Moxibustion"이라는 영문 교과서를
최초로 저술하여 서계 각국의 대학도서관에 꼽히게 했다.
이 책을 읽은 외국의 의사나 학자들이 한국으로 와서
경희대 연구실에서 문하생으로 수학한 이들도 많았다.
-대학 졸업식에서 좌로부터 김기환 집사, 김병환 장로, 김규환 집사, 김덕호 이사장, 조부 이당 선생 -
그는 이미 학문연구, 저술활동, 국제학술대회 진행 등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한의학자가 되었다.
진료도 해야지만 강단에서의 강의 뿐 아니라 주말이면
봉사대를 조직하여 철원, 강화, 고성 같은 낙도지역에서 무료진료 봉사를 계속하였다.
서울 쓰레기 매립장이었던 난지도를 위시하여 거여동, 마천동, 하남 등의 빈민지역은
토요일이면 근무를 마치고 봉사를 나갔다.
재학시절부터 김 박사의 혜택을 받은 환자도 연 인원 5만명이 넘을 정도였다.
이름을 날렸던 대학 교수직보다도 빈민지역 주민들을 위해 더욱 봉사할 목적으로
1992년 송파구의 낙후지역인 오금동에 영생한의원을 개원하고
거여동, 마천동 빈민지역의 주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 김덕호 이사장의 레지던트 수료식 -
그 후 1995년 7월 15일 당시 설립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비영리 공익법인인 의료법인 일맥의료재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는 김 이사장이 부친과 부인 윤종옥 여사와의 동의로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는 당시로는 일대 의식혁명을 일으킨 셈이었다.
친구들이나 그를 아끼는 모든 이들이 개인 욕심 없이
저런 행동을 한다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정상이 아니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김 이사장은 이 땅에서의 재산을 소유개념 보다는 관리개념으로
믿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
공공의 것이란 물질관을 갖고 단지 나는 청지기 관리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그 뿐이라는 의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 인턴 수료식 -
이런 물질관을 갖는 사람이 많다면 이 사회의 복지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에
김 이사장의 결단은 당시 사회에 센세이션을 크게 일으켰다.
아울러 서울 영생한방병원을 확장 증설하여 병원장으로 취임 하였다.
그후 조부 김성환(金聖煥) 장로의 유지를 받들어 1996년 4월 고향인 영주에
영주 장수한방병원을 신설하여 조부의 뜻을 이었다.
- 안정면 내줄리 토지 6800평을 영주시에 헌납하는 김덕호 이사장 좌측은 김진영 전 시장 -
김 이사장은 지난 60여년간 고향인 영주시 장수면 반구리에서
‘장수한의원’을 경영하시던 조부(祖父) 김성환 장로의 원호(院號)를
지키고 이어받아 ‘장수한방병원’으로 승계시켜 조부의 뜻을 받은 셈이다.
김 이사장에게 [장수한의원]이란 원호는 그를 길렀고 또 오늘의 그가 있게 한 토대였다.
고향 영주에서 사업을 계획하기 전에 김포, 강화군 등지에서는
무상으로 병원 부지 5만평과 진입도로를 완공시켜 줄테니
병원과 복지시설을 건축해서 운영해달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영주에서 조부의 유지를 받들기로 굳게 결심하게 되었다.
- 한의사 국가고시 1위라고 쓴 경희대학교 교문 현수막 아래서 -
영주에 조부의 유지를 받들고 그동안 영주시민의 큰 사랑에 보답할 목적으로
현재의 꽃동산 로타리의 병원 뿐아니라 안정면 내줄리의 땅 약 3만평을 매입하여
한방복지타운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내줄리의 토지 약 6800평을 영주시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97년 영주시에 헌납하는 등 고향 영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였다.
김 이사장은 귀향하면서 주민등록을 영주로 옮기고
고용창출을 위한 여러 사업계획을 차근차근 이루어 나갔다.
김 이사장은 학창시절 십여리가 넘는 장수면에서 영주까지 도보나 자전거,
기차 통학을 하였으나 하루도 학교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영광고등학교 1학년 때는 생물부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2학년 때는 영어회화반에서 뛰어난 회화를 구사했고
3학년 때는 성경반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탐구했으며 미래관을 위해
필수교과와 선택교과에서 “수”를 받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 영국 엑스터 대학 동료들과 함께 -
또한 교우관계도 좋아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짝꿍’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김 이사장의 성격은 인정이 많고 자상할 것 같으나
때론 덜렁대기도 하고 털털하고 소탈한 편이었다.
또한 명랑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며 불의에는 강직하고 정직∙성실하였으며
주위에 친화력∙지도력∙통솔력을 발휘하여 그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선생님들의 지도에도 두말할 겨를이 없는 학생으로 귀여움을 흠뻑 받으면서 자라났다.
그는 현재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많은 이들의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또한 조부의 뒤를 이어 이미 가풍이 된 봉사활동을
자신의 삶의 소임으로 여기면서 겸허한 자세로 몸과 마음을 낮추어 가며
무의촌 무료 진료에 앞장서고 있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는 잔잔한 갈채가 항상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김 이사장의 장수한방병원 개원 이후 무의촌 무료진료 연인원만 해도 지금까지 4만명이 넘었다.
그의 발길을 살펴보면 고향 영주시 전 지역에 걸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봉화지역에서는 지난 1998년 5월 5일 석포면을 시작으로 전지역,
예천군 상리, 하리, 지보, 모범택시회, 고평교회 등 여러 곳과 단양군,
울진군, 삼척시, 마산 진동면 등 전국에 걸쳐 봉사를 펼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조부의 봉사와 사랑을 이어받아 쉼 없이 오늘도 실천해 오고 있다.
또한 매년 풍기인산축제 기간 동안에도 풍기인삼축제 행사장에 천막을 치고
침대 등을 갖추어 놓고 주∙야간 무료진료에 나서서 풍기를 다녀간 일본인 등
외국인 관광객과 서울 등지에서 축제에 참석한 관광객들로부터 고마운 인사가 이어져 오기도 했다.
- 중국 북경 국제 암 학술대회 주제발표를 마치고 -
김 이사장이 한의학을 공부하게된 것은 조부와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그분들의 뜻을 기리고자하는 그의 지극한 효성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그는 막상 한의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참의료인 모습의 필요성을 깨닫고
한의사의 소명인 국민보건 향상을 도모하고 국민의 건강한 생활 확보에
기여함을 사명으로 지금까지 일해오고 있다.
또한 병원 규모가 커짐에 따라 직원 수가 300여명, 의사 수가 40명이나 되고보니
인사관리, 지식경영 등 전문지식의 필요에 따라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경영마인드에 기초한 병원경영을 하고 있다.
-필리핀을 찾은 인애가한방병원 해외봉사단 김덕호 단장의 환자진료장면과
필리핀 바세코의 빈민지역 어린이들과 함께-
지난 92년 영생한의원으로 출발한 김 이사장은 1995년엔 의료법인 일맥의료재단을
설립함과 동시에 그의 경영능력에 힘입어 영생한의원을 영생한방병원으로 승격, 확장하였다.
또한 1996년엔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고향 경북 영주에 장수한방병원을 개원하여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농촌 오지를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김 이사장이 IMF로 경영이 부실했던 보생한방병∙의원과 신라한방병∙의원,
대전서부 한방병∙의원, 서울 정형∙신경외과를 한 식구로 맞이한 것은
병원도산으로 인한 각 지역의 한방의료 사각지대 발생을
미연에 막고자 하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천공군 비행단과의 자매결연 및 영락원과 의 자매결연-
김 이사장은 지난 2004년 9월에는 서울 강동구의 유일한 재활전문치료 병원으로 소문난
우신향한방병∙의원을 통합시켜 한방계에서는 일부 대학병원보다 규모가 큰
선두그룹의 규모를 갖추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으며
김 이사장을 ‘작은거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의 인간 됨됨이와 탁월한 경영능력, 강한 추진력, 판단력을 두루갖춘
강력한 카리스마적 지도력이 있는 반면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며 인간적인 인성을 가진 CEO라는 평을 각종 경제관련지에서 인정받은 바 있다.
이후 김 이사장은 2005년 1월 일맥∙현일 의료재단 산하 5개병원,
6개 의원을 인애가(人愛家, 사람을 사랑하는 집)라는 명칭으로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3년에는 스승인 고, 김정제 학장이 설립한 30년 역사의
재단법인 동양의학연구원을 수제자인 김 이사장이 맡아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본 재단 주축의 연구기관이 되어 논문집과 전문서적 발간은
물론 각종 한방 연구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영주지역 경주김씨 종친회 수련대회 밒 송파구 새마을 문고의 장수초등학교 전달식
가운데가 김덕호 이사장과 한봉희 회장-
-영주간호학원 12기생 간호조무사 과정 실습장면-
사회복지분야에서 송파구립 마천청소년 수련관 위탁경영으로
청소년을 위한 예절교육을 특화로 한국의 장래성있는 미래 꿈나무로 선도함은 물론
사회복지법인 장수마을 노인전문요양시설(장수마을), 실비노인요양시설(인애가)을 개원하여
실력있고 인성이 좋은 간호조무사를 배출하는 교육기관과
성곡과 안정에 부설약초원을 직접 운영하므로 양질의 신토불이
국산한약재도 수종 생산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직접 약초원으로 나가 약초의 생태연구, 삽목, 이식 등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라는 의식으로 농업연구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농사짓는 마음으로 병원 경영하고 흙을 만져 자연과 합일하는 건강의 비결을 실천하고 있다.
이외에도 예천공군비행단, 소방서, 영락의 집, 문수면 만방리 등 많은 곳과
자매결연을맺고 복지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상좌 : MBC방송출연, 상우 : KBS벙송 출연, 하좌 : 영국 엑스터 대학 동료들과 함꼐,
하우 : 중국 북경 국제 암 학술대회 주제발표를 마치고-
이런 이유로 정부로부터 받은 표창장, 공로상, 감사장들이 수없이 많다.
김 이사장은 진료, 복지사업, 교육, 저술, 병원경영 등의 활동은
물론 현재 경상북도 체육회 부회장, 대한육상연맹 고문, 영주영광고등학교
총동창회장, 새마을운동 송파지회장, 강동구 연합 봉사회장,
선한 이웃회장직을 비롯하여 종친회, 선거관리위원회, 병원협회, 검찰청 방범위원회,
향우회, 평통자문위원회 등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또한 서울 등 지역의 단체가 하는 사업을 영주로 적극 유치하여왔으며
타지역의 고객을 영주로 유입시키고 외부유출을 막는 등 고향 영주사랑에 헌신하고 있다.
특히 국경을 넘어 해외빈민지역 봉사를 통해 사회환원을 하고
민간외교는 물론 인류건강을 위한 횃불을 밝히고 있다.
-상좌 : 연구자료 정리, 상우 : 약초원 오가피밭에서 아들 연준과 작업을 마치고
하좌 : 무료진료, 하우 : 건강강좌
2005년 6월5일부터 6월 11일까지 6.25전쟁 참전국인 필리핀의
세계 4대빈민지역인 바세코에서의 봉사가 바로 그러한 취지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조부와 부친의 유지를 받든 김 이사장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장수한의원에서 인애가한방병원그룹으로 이어진 3대의 지극한 사람 사랑은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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