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 사가랴 부부
(눅 1:5-7)
김동휘 선교사
누가는 복음의 시작을 말하면서 먼저 예수님의 복음 사역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던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하여 말하고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같이 엘리야가 오리라(말 4:5-6)한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엘리야의 심정으로 오는 세례요한의 탄생을 소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부모를 소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1. 제사장 사가랴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1:5)
이야기의 배경은 유대왕 헤롯 때입니다(5절).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보통 대헤롯이라 하는데, 본문에서 '헤롯 때에'라 함은 곧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는 B.C. 37년 로마 제국 원로 회의를 세금 상납 및 치안유지 등의 약속으로써 매수하고, 특히 당시 실권자인 옥타비우스와 안토니오를 등에 업음으로써 유대 곧 팔레스틴 전체의 분봉왕이 되어 B.C. 4년에 그가 죽기까지 유대의 실질적인 통치가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는 에서의 후손인 이두메 태생 이방인으로서 지략과 용기가 탁월한 정치가였고 특히 유대 백성에 대한 유화 정책상 유대교의 후원자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시한 수많은 공공건물을 건립케 함으로써 유대 백성들의 마음을 유화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반면에 그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적을 제거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과 아내 및 장모, 처남, 삼촌 등을 죽일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정치적 술수가 워낙 뛰어나, 로마의 비호 아래 대제사장의 임명과 폐위에까지 간여하여 그 타락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실로 이 시기는 종교적으로 타락한 시기였고 정치, 사회적으로 비극적이며 희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제 이러한 비극과 어두움을 배경으로, 누가는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그는 말라기 선지자(B.C. 435-425 추정) 이후 400년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중단으로 인한 영적 암흑기를 마감하는 위대한 여명기가 시작됨을 알리려 합니다.
암흑시대인 헤롯의 때 하나님께서 여명의 빛을 던져주신 것은 구원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게 될 가정은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 사가랴의 가정입니다. 여기서 ‘반열’은 성전의 매일 봉사를 위한 제사장의 직무 순서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아론 자손 곧 제사장 가문에 기초하여 24반열로 구분하는데 각 반열은 순서에 따라 1주일씩 성전에서 봉사하였습니다. 24반열 중 아비야 반열은 8번째 순서였습니다(대상 24:10). 사가랴는 히브리 이름으로 보통 스가랴라고 하며 유대인 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왕하 14:29).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엘리사벳으로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내 하나님은 맹세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고며 '엘리세바'와 동일 이름으로 여겨집니다(출 6:23). 이들 부부는 모두 제사장 가문의 출신으로,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을 한다는 것은 이중적인 영예로 여겨졌습니다. 본래 율법은 제사장이 이스라엘 태생의 처녀에게 결혼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습니다(레 21:14). 그러나 반드시 제사장 가문에서 아내를 취해야만 한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가랴가 대제사장 가문(아론의 자손)의 처녀와 결혼했다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도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가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려는지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았던 사가랴 부부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1:6-7)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밝힙니다(6절). 그들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 흠이 없이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말은 원래 구약적 개념으로서 율법적으로 온전한 자에게 붙여진 관용구였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말은 법률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정당한 판단에 따른 긍정적인 시인 내지는 평가를 받은 자들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 단어가 '하나님 앞에'라는 병행 문구와 같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확실시됩니다. 즉 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바른 자들', '하나님의 명령을 온전히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자들'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사실 인간이 그 인격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나설 수 없습니다(롬 3:10). 그런 까닭에 성경적인 의미의 '의'는 믿음을 가진 죄인에게서 그 죄와 죄의 대가를 제거하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의미를 결정지어 주는 객관적인 기준이 되시며 그 말의 의미를 변치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의의 기준이십니다. 진정 인간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만으로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롬 3:20-24). 그런 점에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본성적이고 본질적으로 의인이기 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로 인해서' 의인인 것입니다. 이 '의인'이란 말은 선민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칭찬의 말로 간주되었었는데(창 6:9; 7:1; 18:23-28; 겔 18:5-9)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경건한 인물에게만 붙여졌습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신약 성경에 와서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고 자랑했던 바울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구약 율법 시대의 의인관에 따른 표현이었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단죄하는 복음관에서의 평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구약적 의인관에서 볼 때 특히 누가복음 내에서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부부들 및 시므온과 안나 등이 하나님께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또 그분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주의 계명과 규례를 흠이 없이 행하였’습니다(6절). 여기서 '계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고 지시하신 권위에 찬 명령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규례'는 '하나님께서 정당히 여기시는 것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옳게 여기시는 것들'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결국 위의 '계명'과 '규례'는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룩하고 온전한 명령과 생활 규범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명과 규례는 히브리인들이 즐겨쓰는 셈어적인 중복 기법으로 보아 여호와의 법령을 강조하기 위해 중복적으로 두 단어를 사용한 것일 뿐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흠이 없이’란 '비난받거나 책망받을 것이 없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이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켰다는 사실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실로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종교, 도덕적인 삶을 책망하거나 비난할 수 없을 만큼 그들 두 사람은 경건히 생활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참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고 그들의 나이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과 그 기업으로 믿고 있어 자식이 없는 것을 대단한 수치와, 하나님께 대한 죄의 형벌로 알았습니다(시 127:3). 또한 유대 랍비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파문당할 수 있는 7가지 유형을 기록한 목록 서두에서 "유대인이면서 아내가 없고, 또 아내가 있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자한 것은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두 부부는 이미 나이가 많아 수태의 가능성은 더욱 희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누가의 소개는 그들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기대를 갖게 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슬픔과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은 두 노부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자신들의 위치에서 묵묵히 그 역할을 감당해 갔습니다. 결국 이 경건한 노부부는 구약의 예와 같이(창17:16-17-사라; 삼상 1:5-11-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아들이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 선택되는 영광까지 얻음으로써 지금까지 그 어떤 부모도 얻지 못한 큰 은혜를 덧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사는 삶
사가랴 부부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지켰지만 그들에게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서 예비한 세례요한을 그들 가정에 주기로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사는데도 일반적인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믿음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나가야하며, 그때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은총으로 우리에게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사가랴 부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방해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가능하면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옛자아에 대해서 사도바울처럼 선포해야합니다. 우리(옛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산다고 고백해야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살아야합니다. 사가랴 부부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산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임재의식 보다는 사람들을 너무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다보면 도덕주의에 빠지기 쉽고, 잘못하면 외식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우리의 환경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현재의 환경을 오히려 감사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건강이나 재물 등의 일반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받은 것이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적인 어려움 때문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고 있다면,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