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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한자) | 안전(安峑) | 본 관 (한자) | 죽산(竹山) | 자(한자) | 경인(景仁) |
호(한 자) | 소와(邵窩) | 생 몰 년 대 | 1614년(광해군 7) 2월 13일 ~ 1686년(숙종 12) 4월 10일 | ||
출생지 (거주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솔매마을 | ||||
주 요 경 력 | ●1648년(인조 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에서 진사에 합격 ●1667년(현종 8) 8월 18일 장사랑(將仕郞)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67년(현종 8) 9월 11일 종사랑(從仕郞)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68년(현종 9) 1월 27일 승사랑(承仕郞)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69년(현종10) 10월 3일 무공랑(務功郞)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70년(현종11) 2월 5일 선교랑(宣敎郞)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70년(현종11) 3월 18일 승훈랑(承訓郞)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70년(현종11) 7월 15일 승의랑(承議郞)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 ●1671년(현종12) 6월 8일 승의랑(承議郞)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임명됨. ●1672년(현종13) 3월 봉훈랑(奉訓郞)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임명됨. ●1672년(현종 13) 종묘서 령(宗廟署令)에 임명됨 ●1672년(현종13) 12월 21일 통덕랑(通德郞)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에 임명됨. ●1673년(현종14) 7월 12일 통덕랑(通德郞)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됨. ●1674년(현종15) 2월 2일 통덕랑(通德郞)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됨. ●1674년(현종15) 2월 2일 통덕랑(通德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됨. ●1674년(현종15) 9월 15일 조봉대부(朝奉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됨. ●1675년(현종16) 1월 28일 조봉대부(朝奉大夫) 송화 현감(松禾縣監)에 임명됨. | ||||
출전(出典) 및 주요저서 | 출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보성읍지(寶城邑誌)》 ● 안전(安峑)의 백패(白牌)·고신(告身) ●《죽산안씨족보(1994년)》 ●《무자 식년 사마 방목(戊子式年司馬榜目)》
저서 ●《소와유고(邵窩遺稿)》 | ||||
기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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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자 | 13대손 안재중(011-628-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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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8년 8월 18일 (경인) 원본203책/탈초본10책 (7/18) 1667년 康熙(淸/聖祖) 6년 (송화공 54세)
崔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以崔寬爲執義, 尹衡聖爲司藝, 安峑爲昌陵參奉, 黃胤貞爲敦寧參奉。金壽興·朴長遠·李慶億爲承文提調, 曺漢英·閔維重爲副提調, 閔鼎重爲宗簿提調, 洪南立爲相禮。李端夏爲吏曹正郞, 李翊相爲校理, 完平副守李洪今加明善。學諭單, 盧三錫·李東溟爲掌令, 李世長爲副修撰, 朴世堂爲副校理, 兼西學敎授孫海英, 兼春秋李程減下。
현종 15년 2월 2일 (병신) 원본238책/탈초본12책 (14/21) 1674년 康熙(淸/聖祖) 13년 (송화공 61세)
洪處大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行都政, 以洪處大爲兵曹參判, 李耋爲司䆃直長, 徐文緯爲禮賓別提, 孟萬始爲戶曹佐郞, 申澤爲大靜縣監, 鄭行一爲陽智縣監, 李蓍吉爲長水察訪, 柳以泰爲定山縣監, 趙根爲副修撰, 趙嘉錫爲掌令, 李希哲爲尙瑞院副直長, 柳楙爲尙衣院直長, 方世健爲碧沙察訪, 姜錫武爲高山察訪, 權瑎爲兵曹正郞, 李蕃爲活人別提, 愼祉膺爲德源府使, 李鼎至爲繕工副奉事, 金千鎰爲禮曹佐郞, 李復明爲鐵山府使, 洪遠普爲掌樂主簿, 李益泰爲兵曹佐郞, 李端夏爲副提學, 鄭載禧爲修撰, 安峑爲司圃別提, 朴世堅爲兵曹參議, 李廷龍爲長興奉事, 洪重亨爲郭山郡守, 洪受禮爲眞寶縣監, 金錫衍爲瓦署別提, 李汝曾爲宗廟直長, 李希哲爲尙瑞直長, 金禹錫爲定州牧使, 李沆爲典籍, 任以道爲禮曹正郞, 李春成爲典獄奉事, 李彙晉爲豐基郡守, 趙師錫爲吏曹佐郞, 徐文尙爲中學敎授, 李九成爲監察, 任弘望爲典籍, 權誢爲扶餘縣監, 辛聖重爲尙瑞副直長, 洪萬里爲雲峯縣監, 安峑爲禁府都事, 韓衡爲庇仁縣監, 鄭重徽爲弼善, 崔胤績爲活人別提, 尹搢爲綾州牧使, 姜壽南爲司圃別提, 姜璘爲引儀, 尹善慶爲司畜別提, 金夢麟歸厚別提單付, 李舜岳·鄭徵典籍去官單付, 吳始大爲尙衣主簿, 李相堯爲義盈主簿, 朴長世爲掌苑別提, 朴時珉爲軍器判官, 洪受疇爲濟用副奉事, 沈棡爲繕工假監役, 兪夏謙爲栗峰察訪, 趙璿爲司圃別提, 鄭載濟爲引儀, 李重龜爲監察, 宋奎明爲司饔主簿, 邊四達成均博士單付, 孫萬雄爲工曹佐郞, 申汝晳爲寧陵參奉, 李萬葉爲齊陵參奉, 李德昌爲軍器主簿, 丁益燾爲熙川郡守, 金夏鉉爲安奇察訪, 李慶華爲北部主簿, 李怭爲漢城參軍, 李沆爲禮曹佐郞, 朴贄爲洪州牧使, 李商翼爲繕工監役, 羅以俊爲輔德, 金萬軸爲中部主簿, 鄭載濟爲監察, 柳廷舟爲繕工假監役, 金垓爲江華經歷, 李喜澤爲長陵參奉, 姜栢年爲同知成均, 金夐爲京畿都事, 洪得禹爲典設別檢, 黃克順爲定山縣監, 朴崇阜爲厚陵參奉, 柳攀爲氷庫別檢, 柳星昌爲蔚珍縣監, 李煟爲引儀, 李善淵爲順陵參奉, 權順善爲內贍主簿, 李世億爲繕工監役, 琴聖徽爲恭陵參奉, 李世甲爲監察, 李宣岳爲禁府都事, 韓世臣爲靖陵參奉, 金繼隆爲承文校檢, 尹命哲爲典籍, 朴元度爲海運判官, 韓厚明爲典籍, 李端夏爲大司成, 申汝哲右尹除授, 柳瑺爲東部參奉, 朴璸爲典牲主簿, 李㘽爲麒麟察訪, 趙始晉爲繕工假監役, 崔世益爲禮賓參奉, 李澬爲宣陵參奉, 柳長元爲穆陵參奉, 趙泰基爲金井察訪, 宋有栻爲繕工參奉, 金錫胄爲副應敎。
숙종 원년 1월 28일 (정해) 원본244책/탈초본12책 (23/31) 1675년 康熙(淸/聖祖) 14년 (송화공 62세)
勅使가 越江하니 站上接待 등의 일을 미리 料理하기 위해 未署經 수령들에 대해 변통으로 처리할 것을 청하는 李東老의 계
○ 李東老啓曰, 勅使越江數字缺站上接待等事, 不可不豫爲料理, 而通津縣監吳始謙, 憲府引避, 時未署經, 漣川縣監趙相愚, 松禾縣監安峑, 亦未署經, 合有變通之道, 何以爲之? 敢稟。傳曰, 竝除署經發送。
● 죽산안씨족보(1994)
안전(安峑)
자(字) 경인(景仁)
호(號) 소와(邵窩)
생(生) 光海 甲寅(1614년) 2월 13일
仁祖 戊子 進士
인조 무자년(1648)에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趙文靖復陽 以學行薦于朝 除昌陵參奉 宗廟署令 尙瑞院直長 皆不就旋拜 司圃署別提 義禁府都事 松禾縣監
정미년(1667), 현종이 사복[嗣服, 선인(先人)의 사업을 이음.]할 때 공은 「경명행수(經明行修)」[경전에 밝고 행실이 잘 수양되어 있음.]로 문정공(文靖公) 조복양(趙復陽,1609~1671)의 천거를 받아 조정에 부름을 받고 창릉참봉[昌陵參奉, 예종(睿宗)의 왕릉을 수호하는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신해년(1671)에 또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자년(1672)에 또 종묘서 령(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 이 해 겨울에 다시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에 임명되었고, 계축년(1673)에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갑인년(1674)에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제수되었다가 3월에 다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다. 숙종 을묘년(1675)에 송화 현감(松禾縣監)에 임명되자, 공은 “여러 차례 전하의 임명을 받고 한번도 숙사[肅謝, 관직을 임명받고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하지 않는 것은 예절로 보아 미안한 일이다.”하고, 이 해 2월 억지로 관직에 나아가니 상께서 돈유[敦諭, 임금이 의정(議政)이나 유현(儒賢)에게 면려(勉勵)를 권하는 말이나 글.]가 간절했고 보살피는 뜻이 높고 깊었다. 공은 관직에 임한 지 8개월만에 투인[投印, 관직의 징표를 던짐. 벼슬에서 사퇴함.]하였다.
澤堂李文靖植 稱廊廟之器
택당(澤堂)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1584~1647)은 일찍이 우산선생에게 공의 아름다운 점을 칭송하기를, “현랑[賢郞, 남의 집의 자제를 높여 부르는 말.]의 기상과 도량은 낭묘(廊廟)를 맡을 그릇[묘당(廟堂 ; 조정 또는 정부)에 앉아 천하의 정무에 참여할만한 인물. 곧 재상. 정승.]입니다. 어르신 집안의 명성은 결코 쓸쓸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고,
兪杞平省曾 稱瑚璉器局
기평(杞平) 유성증(兪省曾,1576~1649)도 또한 말하기를, “호련[瑚璉, 은나라 때 종묘에서 서직(黍稷)을 담던 제기(祭器). 곧 우수한 인물을 비유함.]과 같은 그릇이요 도량입니다.”라고 하였다.
魯西尹文敬宣擧 稱獜角鳳嘴
노서(魯西)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1610~1669, 윤황(尹煌,1572~1639)의 아들.]도 공의 기기(奇氣)에 감복하여 “기린의 뿔, 봉황의 부리와 같다”[인각봉취(麟角鳳嘴)]라고 말했다.
졸(卒) 肅宗 丙寅(숙종12 1686년) 4월 10일
배(配) 淑人完山李氏垢女(완산이씨 이구 어른의 따님)
생(生) 光海 壬子(1612년) 8월 1일
졸(卒) 肅宗 乙卯(1699년) 9월 5일 壽88
묘(墓) 福內竹坊獨占洞酉卯原合窆
복내면 죽방 독점동에 합장(보성에선 죽뱅이라 불리우는 곳)
鄭孝憲枋撰墓碣銘后孫鍾鶴撰表陰
효헌공(孝憲公) 정방(鄭枋,1707∼1788)이 짓고, 후손 안종학(安鍾鶴,1863~1923)이 쓰다.
● 안전(安峑) : 1648년 진사 합격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과거 및 취재 / 생원진사시
안전(安峑) [생원진사시] 인조(仁祖) 26년(164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21위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548C804FFFFB1614X0 자 경인(景仁) 호 소와(邵窩) 생년 갑인(甲寅) 1614년 졸년 병인(丙寅) 1686년 합격연령 35세 본관 죽산(竹山)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이력사항] 전력 유학(幼學) 관직 송화현감(松禾縣監)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안후지(安厚之) 관직 : 유학(幼學) 증직 : 증좌승지(贈左承旨) [처부] 성명 : 이구(李垢) 본관 : 전주(全州) [제] 성명 : 안음(安崟) 성명 : 안회(安𡼾) [출전] 《무자 식년 사마 방목(戊子式年司馬榜目)》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03호. 은봉 종가 소장.) |
● 출처 : 조선시대 생진시방목(사마방목) / 생진시-06 p.522
● 1675년(숙종 1) 1월 28일 송화현감 임명교지
1675년에 이조에서 안전(安峑)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5년(숙종 1) 1월 28일에 이조에서 안전(安峑)을 조봉대부(朝奉大夫) 행(行)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조봉대부는 종4품의 문관 품계이며, 현감은 종6품 외관직이다. 송화는 현재의 황해도 송화군이다.
송화현(松禾縣) 현재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 황해도 북서부에 있는 723 ㎢ 면적의 행정구역, 고구려 때 마경이(麻耕伊)라 불리우다 고려시대에 청송현(靑松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408년(태종 8)에 청송현과 가화현(嘉禾縣)이 합하여 송화현(松禾縣)이 되었으며, 그 뒤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송화군이 되었다. |
● 정방(鄭枋,1707∼1788)이 지은 안전(安峑,1614 ~1686)의 묘갈명
소와공(邵窩公) 묘갈명(墓碣銘)
삼청재(三淸齋) 효헌공(孝憲公) 정방(鄭枋) 지음 번역 : 안동교
선조·인조 시대에 우리 동방의 문명은 매우 융성했다. 우계(牛溪)·우산(牛山) 두 선생이 (이 무렵을) 전후로 태어나 파산[坡山,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이 강학하였던 경기도 파주군.]에서 도(道)를 강론하여 낙민[洛閩, 정자(程子)는 낙수(洛水)에서 살았고 주자(朱子)는 민(閩) 땅에서 살았으므로 정주학(程朱學)을 일컫는 말.]의 가르침을 크게 천명하니,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져 찬란한 빛을 발했다. 공은 두 선생의 내외(內外)의 초손(肖孫)으로 그 뒤에 태어나 아름다운 범절을 습득하고 덕성을 도야하여, 올바른 법문(法門)과 학맥(學脈)을 잇는데 힘을 쏟았으며, (학문의) 연원(淵源)에 물을 대고 (經世의) 사업을 능히 계승하였으니, 그 숭고한 학업과 융성한 명성은 거의 측량할 수 없었다. 따라서 향리에서 어든 중망(重望)이 조정에 알려져 초야에 묻힌 공에게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니, 공은 “아름답고 선한 (두 선생을) 뒤이어 어진 덕을 본받아 서술한 사람”이라고 불리워질만 하다.
공의 휘는 전(峑), 자는 경인(景仁)이요, 소와(邵窩)는 그의 자호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안씨의 시조 원형(元衡)은 고려 말 문하부(門下府)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죽성(竹城)」에 식읍(食邑)이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혜공(文惠公)이다. 이 분이 낳은 면(勉)은 호가 쌍청당(雙淸堂)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첨의부(僉議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이 분이 낳은 정생(挺生)은 문과에 합격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거쳐 처음으로 조선조에 출사(出仕)했다. 이 분이 낳은 을겸(乙謙)은 문과에 합격하여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지내고 외직인 영암군사(靈巖郡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2세에 걸쳐 모두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
예안공(禮安公) 범(範)은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학행(學行)으로 서사[筮仕, 처음으로 벼슬할 적에 길흉을 점쳐 태도를 결정하는 일. 곧 초사(初仕)를 말함.]하니 세상사람들이 「청백리」라 칭송했고 호는 만휴정(晩休亭)이다. 이 분이 낳은 수륜(秀崙)은 진사에 뽑히고 을과(乙科)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역임하고 의정부 사록(議政府司錄)으로 전임했는데, 전려[傳臚, 임금이 전상(殿上)에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호명하여 들어오게 하는 것.]한 지 1년이 채 못되어 요절했다. 이 분이 낳은 축(舳)은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만년에 을과에 급제하여 미원[薇垣, 사간원(司諫院)의 별칭.]과 오대[烏臺, 사헌부(司憲府)의 다른 이름.]에 여러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롭지 못한 때를 만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호가 둔암(鈍庵)으로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초야에 묻혀 유유자적하니 세상 사람들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칭송했다. 이 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 중돈(重敦)은 문장과 학술이 뛰어나 일찍이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고 성균관의 제술시(製述試)에 세차례 장원하였으며 동당직부시[東堂直赴試, 식년과(式年科)나 증광시(增廣試) 때에 강경(講經) 시험을 보던 곳을 동당(東堂)이라 하는데, 나중에는 식년과나 증광시 자체를 동당이라 불렀음.]를 보아 급제하였지만 창방(唱榜)하기 전에 죽었다. 조부 방준(邦俊)은 (도학과 절의가 탁월하여) 스스로 사도[斯道, 유학(儒學)의 도(道)를 말함.]를 책임졌으며 이경[二卿, 공조참의(工曹參議)같은 대부(大夫)의 벼슬.]에 초빙되었지만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세상 사람들이 「우산선생(牛山先生)」이라 불렀다.
아버지 후지(厚之)는 송음(松陰)이라 자호하고 은둔하여 출사하지 않았지만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숙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창랑(滄浪) 문준(文濬)의 따님이요 우계(牛溪)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손녀이다. 어머니는 파산에 살면서 공을 낳았는데, 그 해가 만력(萬曆) 갑인년(1614, 광해군 7년) 2월 13일(을미)이다. 공은 빼어난 자태로 태어났으며 견식과 도량이 넓었다. 창랑공은 그 범위(範圍)를 칭찬하고 원대(遠大)한 그릇이 되리라 기대했다. 우산선생에게 수학하면서 돈독한 신념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학업에 정진했다. 날마다 일찍 일어나 경건한 마음으로 단정히 앉아 추로염락[鄒魯濂洛, 맹자(孟子)·공자(孔子)·주자(周子)·정자(程子)의 유학(儒學)을 말함.]의 여러 책을 골라 숙독하여 그 맛을 음미하였다. 또 각각의 책을 여러 번씩 돌려 읽으면서 정밀하게 강구하여 하나하나 마음으로 이해하였고, 힘써 그 뜻을 궁리하여 실천하기를 요구하였다. 이치에 합당하게 말을 하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행동하였으며, 마음을 다잡을 때는 참된 신념을 정도로 삼았고 행동을 지킬 때는 견고한 마음을 준칙으로 삼았다. 공은 일상생활의 말하고 침묵하는 사이에 스스로 규모와 과정을 갖추어 마음을 함양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항상 스스로 정돈· 엄숙·겸공(謙恭)하게 자신을 다스렸다.
택당(澤堂)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은 일찍이 우산선생에게 공의 아름다운 점을 칭송하기를, “현랑[賢郞, 남의 집의 자제를 높여 부르는 말.]의 기상과 도량은 낭묘(廊廟)를 맡을 그릇[묘당(廟堂; 조정 또는 정부)에 앉아 천하의 정무에 참여할만한 인물. 곧 재상. 정승.]입니다. 어르신 집안의 명성은 결코 쓸쓸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고, 기평(杞平) 유성증(兪省曾)도 또한 말하기를, “호련[瑚璉, 은나라 때 종묘에서 서직(黍稷)을 담던 제기(祭器). 곧 우수한 인물을 비유함.]과 같은 그릇이요 도량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학업이 날로 진보하여 시나 문장이 넉넉하고 정밀했으며, 경전의 뜻에 근거하여 문장을 유려하고 운치있게 지어냈다. 그러나 기수[氣數, 천지(天地)의 돌아가는 운수(運數).]에 걸렸는지 인조 무자년(1648) 봄에야 비로소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고 과거시험에 높은 성적으로 선발되었으나 끝내 계적[桂籍,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名簿).]에 발탁되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당시 식자들이 「칭굴(稱屈)」이라 말했다.
항상 사우(士友)들에게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의 사업은 지극히 크나니 문장은 다만 여가로 하는 일이다. 과거공부의 과정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으며 내실있는 행동에 독실해야 한다.”고 했다. 공이 종유(從遊)한 사람은 모두 예학(禮學)에 뛰어난 선비였다. 공은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고 성현의 가르침을 담론하여 풀어냈으므로, 평탄한 길을 걷듯 명징하게 분석했고 얼음이 풀리듯 막힘이 없어, 선생이나 어른들도 또한 그 넓은 견식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에 마음에 지극한 아픔이 있어 종신토록 애모(哀慕)의 정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갑진년(1664)에 아버지 상을 당해 상장(喪葬)의 여러 예절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랐다. 이로부터 세상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을 돈독히 하고 행동에 힘을 쏟았으며, (마음과 본성을)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였으며, 거문고와 책을 벗삼아 회포를 풀면서 몸을 마치려 하였다.
정미년(1667), 현종이 사복[嗣服, 선인(先人)의 사업을 이음.]할 때 공은 「경명행수(經明行修)」[경전에 밝고 행실이 잘 수양되어 있음.]로 조정에 부름을 받고 창릉참봉[昌陵參奉, 예종(睿宗)의 왕릉을 수호하는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신해년(1671)에 또 종묘서(宗廟署) 부봉사(副奉事)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임자년(1671)에 또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 이 해 겨울에 다시 상서원(尙瑞院) 부직장(副直長)에 임명되었고, 계축년(1673)에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갑인년(1674)에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가 3월에 다시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숙종 을묘년(1675)에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임명되자, 공은 “여러 차례 전하의 임명을 받고 한번도 숙사[肅謝, 관직을 임명받고 임금에게 사은숙배(謝恩肅拜)하는 것.]하지 않는 것은 예절로 보아 미안한 일이다.”하고, 이 해 2월 억지로 관직에 나아가니 상께서 돈유[敦諭, 임금이 의정(議政)이나 유현(儒賢)에게 면려(勉勵)를 권하는 말이나 글.]가 간절했고 보살피는 뜻이 높고 깊었다. 공은 관직에 임한 지 8개월만에 투인[投印, 관직의 징표를 던짐. 벼슬에서 사퇴함.]하였는데 그의 정치방식은 「보폐거해[補弊祛害, 폐단을 보수하고 해악을 제거하는 것.]」에 힘쓰는 것이었다. 공은 학교를 맡아 몇차례 생도를 끌어모아 몸소 강의하고 수업하였다.
이후로 한번도 도하(都下, 서울 아래.)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임천(林泉)에 숨어 살면서 경전에 파묻히거나 여러 자제들을 가르쳤다. 공은 형제간에 화락(和樂)하고 우애가 극진하여 즐거운 마음이 쇠할 줄 몰랐다. 가운데 동생 좌랑공[佐郞公, 휘는 음(崟), 호는 송촌(松村) 또는 퇴우(退憂).]은 지기(志氣)가 성글고 활달하여 침착하게 사색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문장에도 또한 신중하지 못하여 글을 쓸때도 대부분 멋대로 붓을 휘둘렀지만, 곧 공의 박아전중(博雅典重)한 성품과 석연명창(釋然明暢)한 문장에 심복하여 “이 점이 바로 가형(家兄)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고 말했다.
숙종 병인년(1686) 4월 10일에 송산(松山, 솔뫼)의 집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이 73세였다. 이 해에 사아리(沙兒里) 선영 곁에다 장사를 지냈다가 유택이 불길하다 하여 본군 복내면 내죽방(內竹坊) 독착동(篤着洞) 천저봉(天抵峰) 묘좌원(卯坐原)으로 이장했다.
공은 성품과 자질이 온화하고 순수하였고 생각이 엄정하고 원대하였으며,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친히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공은 오롯하고 확고하게 마음을 세웠으며 엄밀하고 독실하게 공력을 쏟아, (이치를) 음미하고 사색하여 채우고 넓혀가 공부를 원만히 이루었다. 이러기를 젊어서부터 늙도록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우산선생은 공의 중후(重厚)함을 인정하였고, 석호(石湖) 윤충경공[尹忠敬公, 윤문거(尹文擧). 대사간 황(煌)의 아들.]과 노서(魯西) 윤문경공[尹文敬公, 윤선거(尹宣擧). 또한 황(煌)의 아들.]도 공의 기기(奇氣)에 감복하여 “기린의 뿔, 봉황의 부리와 같다”[인각봉취(麟角鳳嘴)]라고 말했다. 공의 효성과 우애, 청렴과 결백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가정의 교훈을 지키고 권세와 이익에 담담하였으며, 기미를 보아 깨끗하게 물러나 세간의 더러움을 뒤집어쓰지 않았으므로 군자들이 공을 칭송했던 것이다.
공은 모든 일은 반드시 삼가하여 조금도 방만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극진히 하여 조석으로 기쁜 얼굴로 봉양하였으며,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올려 참된 효도의 뜻을 다졌다. 생신이나 아름다운 절기(節氣)에는 성찬을 차려 잔치의 즐거움을 붇돋우고, 몸소 자제들을 이끌고 술잔을 올려 장수를 축원했으며, 아울러 동년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즐거움을 나누었다. 선조를 숭봉하고 제사를 모실 적에 능히 정성과 경건함을 준수하여 (제물을) 삶고 씻는 일을 결코 종에게 맡기지 않고, 반드시 몸소 나아가 극진히 준비한 뒤에 그만두었다.
공은 논의가 화평하여 각박하거나 모가 나는 논조가 없었지만, 의리를 변석(辨釋)해야할 말이나 기강(紀綱)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탁견과 엄정한 논리를 내세워 조금도 구애받지 않았다. 학문은 문채[文彩, 겉으로 보이기 위한 화려한 형식적인 것.]만을 숭상하지 않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식을 확장하였으며, 자신을 반성하여 실천적으로 행동했다. 평상생활에서는 사물(또는 물질)을 마음에 머물러 두지 않았고 비속하거나 게으른 것을 또한 잠시도 마음에서 싹트지 않도록 했다. 공은 부지런히 노력하고 독학역행(篤學力行)하여 덕스러운 그릇(德器)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 조업(操業)이 돈독하고 내실이 있어 그 용모를 접하거나 그 뜻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후덕한 군자」라고 말했다.
숙인(淑人) 완산이씨는 사복시 정(司僕寺正, 정3품) 구(坵)의 따님이요 태묘(太廟, 태조 이성계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배향된 개국공신 완산부원군 양도공(襄度公) 천우(天佑)의 후예인데, 성품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효성스럽고 정숙했으며, 경건하고 신중하고 온화하고 화목했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 4년) 8월 1일에 태어나 숙종 기묘년(1699) 9월 5일에 죽으니 향년이 88세였다. 2남2녀를 낳았는데 장남 두상(斗相)은 장사랑(將仕郞)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차남 익상(翼相)은 통덕랑(通德郞)이다. 딸은 사인(士人, 벼슬하지 않은 선비.) 오수석(吳壽錫)과 고응천(高應天)에게 시집갔다. 두상(호는 樂貧堂)은 원주이씨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빈(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1녀를 낳았다. 아들은 세현(世賢, 장손임)과 세당(世塘), 딸은 사인 유성화(柳聖和)에게 시집갔다. 익상은 풍천임씨 장사랑 방(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세련(世璉)과 세복(世復)을 낳았다. 오수석은 대광·대호·대영·대무를 낳았고, 고응천은 만령(萬齡)을 낳았다. 세현은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현손인 통덕랑 세태(世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창로(昌老, 장증손임)·창조(昌祚)·창정(昌禎)이요 딸은 진사 이홍보·박성구에게 시집갔다. 세당(호는 松軒)은 금성오씨 명곡(明谷) 희도(希道)의 손자 수석(綏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창국(昌國)이요 딸은 사인 유과(柳薖)에게 시집갔다. 유성화는 아들 진태(震泰)를 낳았다. 세련은 삭령최씨 군수 용(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고 세복의 큰아들 창재(昌再)로 뒤를 이었다. 딸은 사인 임주극과 박명동에게 시집갔다. 세복(호는 夕可齋)은 남양방씨 서주(西洲) 두재(斗載)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창재(出系함)와 창의(昌毅)이고, 딸은 백신원과 유증범에게 시집갔다. 창로는 고령신씨 명익(命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악(處岳)을 낳았고, 창조는 광산김씨 원최(元最)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나 자녀를 낳지 못해 종형 주촌공(酒村公) 창국의 네째 아들 처룡(處龍)으로 뒤를 이었다. 창정은 영광정씨 호(瑚)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문(處文)을 낳았다. 창국(호는 酒村)은 흥성장씨 우홍(宇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처태(處泰)·처형(處衡)·처항(處恒, 호는 恒齋) · 처룡(출계함)이요, 딸은 사간원 정언 임일원(任一源)에게 시집갔다. 창재는 광주이씨 부사(府使) 광위(光衛)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신(處愼)을 낳았다. 창의(호는 無慍齋)는 통덕랑으로 순창조씨 동지(同知) 두신(斗臣)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처한(處罕)·처민(處敏)·처일(處馹)이요 딸은 윤몽연(尹夢淵)에게 시집갔다.
방(枋)은 일찍부터 공의 순수한 덕과 지극한 행실을 흠모하여 항상 간절하게 우러러 보았는데, 공의 후손 명현(命賢)이 묘갈명을 적어줄 것을 청하니, 나는 문장에 능하지 못하다 하여 사양할 수 없어 들은 바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다음처럼 명문(銘文)을 적는다.
아! 안공은 대현(大賢)의 가문에서 태어나/ 은봉의 초손(肖孫), 파산의 외손이 되었네.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사도(斯道)가 더욱 장려되고/ 의리를 강론하여 밝히며 위기[爲己, 자기를 위한 학문. 곧 성리학.]를 배워 궁구하였네.
명성이 알려기를 구하지 않았으나 명성은 저절로 이르러/ 은제[恩除, 임금이 벼슬을 임명하는 것.]가 여러 차례 내려오니 어쩔 수 없이 나아갔네.
8개월 고을을 다스리니 청백리로 이름나고/ 벼슬을 버린 채 향리로 돌아와 자연을 만끽하였네.
경전(經傳)에 파묻혀 세밀하게 분석하고/ 여러 자제들을 가르쳐 가문의 명성을 세웠네.
선열(先烈)에게 빛을 더하고 후생(後生)에게 아름다움을 심으니/ 공을 알고 싶은 사람은 마땅히 이 명문(銘文)을 살펴보라.
정방(鄭枋,1707∼1788)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토직(土直), 계직(季直). 증조부는 정광연(鄭光演), 조부는 정흡(鄭潝), 아버지는 정민하(鄭敏河)이고, 외조부는 이운익(李雲翊)이며, 신임사화(申壬士禍) 때 김일경(金一鏡) 일파를 노론(老論) 4대신과 함께 공격했던 승지 정택하(鄭宅河)가 숙부다. 두 번 결혼을 하였는데 첫 번째 부인은 양대하(梁大厦)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정태규(鄭泰逵)의 딸이다. 영조(英祖) 29년(175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4위로 급제하였다.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조태억(趙泰億)을 탄핵하다 오히려 자신이 삭직 구금되었다가 단천(端川)으로 귀양 갔다. 후에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를 역임하고, 부총관(副摠管)으로 있을 때 나이가 80에 이른다는 이유로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한지 40년이 되었다하여 도총관(都摠管)의 자급과 함께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현재 작자 미상의 초상화가 남아 있으며, 작품으로 양반가사 율조인 3·4조를 위주로 하여 지은 198구 장편 서사시인, 아곡(莪谷) 전우창(全禹昌)의 효에 대해 지은 효자가(孝子歌)가 있다. |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 안전(安峑)의 백패(白牌)·고신(告身)
http://203.254.129.108/service/data/dataDetail.jsp?data_group=9012
1648년에 진사시에 입격한 안전에게 발급한 증서
1648년(인조26) 9월 9일에 유학(幼學) 안전(安峑)이 진사시에 3등 제21인으로 입격하여 발급받은 문서이다. 조선시대에는 생원진사시 입격자에게 백색 종이에 입격등급을 상세히 기입한 뒤 어보를 찍은 증서 즉 백패를 발급하였다.
1667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67(현종8) 8월 18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장사랑(將仕郞)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무덤이고, 참봉은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장사랑은 종9품의 문관 품계이다.
1667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67년(현종8) 9월 11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종사랑(從仕郞)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무덤이고, 참봉은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종사랑은 정9품의 문관 품계이다.
1668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68년(현종9) 1월 27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승사랑(承仕郞)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무덤이고, 참봉은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승사랑은 종8품의 문관 품계이다.
1669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69년(현종10) 10월 3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무공랑(務功郞)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무덤이고, 참봉은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무공랑은 정7품의 문관 품계이다.
1670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2월 5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선교랑(宣敎郞) 행(行)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무덤이고, 참봉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선교랑은 종6품의 문관 품계이다.
1670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3월 18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승훈랑(承訓郞) 행(行)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무덤이고, 참봉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승훈랑은 정6품의 문관 품계이다.
1670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7월 15일에 이조에서 승훈랑(承訓郞) 행(行) 창릉참봉(昌陵參奉) 안전을 승의랑(承議郞)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의 무덤이고, 참봉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종9품 관직으로 가장 말단직이다. 승의랑은 정6품의 문관 품계이다.
1671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1년(현종12) 6월 8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승의랑(承議郞) 행(行) 종묘서 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종묘서는 종5품 아문(衙門)으로 왕릉과 제각을 지키는 일을 맡았으며, 부봉사는 정9품의 관직이다. 승의랑은 정6품의 문관 품계이다.
1672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2년(현종13) 3월에 이조에서 안전을 봉훈랑(奉訓郞) 행(行)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종묘서는 종5품 아문(衙門)으로 왕릉과 제각을 지키는 일을 맡았으며, 부봉사는 정9품의 관직이다. 봉훈랑은 종5품의 문관 품계이다.
1672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2년(현종13) 12월 21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통덕랑(通德郞) 행(行) 상서원 부직장(尙瑞院副直長)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 품계이다. 상서원은 보새(寶璽)․부인(符印)을 관장하였던 정3품 아문(衙門)이며, 부직장은 정8품 관직이다.
1673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3년(현종14) 7월 12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통덕랑(通德郞) 행(行)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의 품계이다. 상서원은 보새(寶璽)․부인(符印)을 관장하였던 정3품 아문(衙門)이며, 직장은 종7품 관직이다.
1674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4년(현종15) 2월 2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통덕랑(通德郞) 행(行)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 품계이다. 사포서는 궁중의 원포(園圃)나 채소재배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며, 별제는 조선시대 종6품 참상관이다.
1674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4년(현종15) 2월 2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통덕랑(通德郞) 행(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 품계이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도사는 종5품의 관직이다.
1674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4년(현종15) 9월 15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조봉대부(朝奉大夫) 행(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조봉대부는 종4품의 문관 품계이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며, 도사는 종5품의 관직이다.
1675년에 이조에서 안전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5년(현종16) 1월 28일에 이조에서 안전을 조봉대부(朝奉大夫) 행(行)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조봉대부는 종4품의 문관 품계이며, 현감은 종6품 외관직이다. 송화는 현재의 황해도 송화군이다.
●《보성읍지(寶城邑誌)》인물(人物)편
안전(安峑)
邦俊之孫。器度重厚。踐履篤實。以家庭之學。克承先訓。爲世所推。大臣趙復陽筵奏筮仕。官至縣監。
안방준의 손자이다. 재기(才器)와 도량(度量)이 정중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천리(踐履, 실천함)가 독실했고, 가정에서 배운 학문으로 선조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추중을 받았다. 대신 조복양(趙復陽)이 경연(經筵)에서 아뢰어 벼슬길에 올라 관직은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 아버지 안후지(安厚之)의 문집 『송음당시고(松陰堂詩稿)』하권에 『소와유고(邵窩遺稿)』라 하여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