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梅溪處士 安後相과 木美庵"이라는 책입니다. (안동교 교수께서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安奉淳...[등]편
安東敎 역
죽산안씨우봉파종친회
2003
71p
ISBN : 8995418222
소장정보 : 국회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가격 5,000원
이 글을 읽은 뒤,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던 “소뫼 양반“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봉파(소뫼) 후손들께선 조상님들의 행적에 자부심을 느껴도 충분한 자격이 있을 듯 합니다.
우리 신죽산안씨 대표 문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우봉파의 오늘이 있게하신 분입니다.
발 간 사(發刊辭)
우리 문중의 오랜 숙원이었던 「매계처사(梅溪處士) 안후상(安後相, 죽산14세)과 목미암(木美庵)」이라는 책자를 편찬하여 국역(國譯)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선조의 업적을 되새겨보려고 하지 않는 오늘의 세태에 이런 책자를 발간하여 후손들이 널리 읽어볼 수 있게 되어 무한히 기쁘고 또한 다행한 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매계처사(梅溪處士, 1665-1726)의 위업을 흠모하면서도 정작 그 학문과 덕행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처사공(處士公)은 우산(牛山) 안선생(安先生)의 증손자로, 일찍이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유가(儒家)의 학문을 닦고 독실하게 효행(孝行)을 실천하였습니다. 처사공은 과거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인의(仁義)의 덕성을 함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처사공이 거주해온 산골 마을 적전면(積田面, 현재 보성군 문덕면)은 대대로 농토가 적어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하였고, 게다가 배우지 못한 터라 풍속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처사공은 이를 염려하여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하고 의고(義庫)를 건립하여 곡식을 모았습니다. 이를 여러 해 동안 증식하여 거의 천여 섬을 확보한 뒤에 학재(學齋, 학문을 닦는 서당으로 목미암을 말함)를 창건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문학(文學)을 성하게 일으켰습니다.
처사공의 유지를 이어받은 손자 직우당(職憂堂) 창훈(昌勳, 죽산16세)은 목미암(木美庵)을 크게 늘려 중건하고 상관재(相觀齋)를 창건하여 더 많은 학도들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상관재의 학규(學規)를 순호(蓴湖) 수린(壽麟)이 짓고 오봉(五峯) 수록(壽祿)이 써서 현판으로 내걸었는데, 공부하는 규율이 엄격하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처사공은 면민 중 곤궁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사람, 세금을 내지 못하는 사람, 혼인할 때를 놓치거나 장례를 치를 때를 잃은 사람들을 모두 구휼하였고, 심지어 세모(歲暮)가 되면 쌀과 반찬을 노인들에게도 나누어주기도 했습니다. 흉년이 들 때마다 추위에 떨거나 굶주리는 자를 구제하자, 사람들마다 “옛날 범씨(范氏)의 의장(義庄)은 같은 종족에게만 혜택이 미쳤으나 안씨(安氏)의 의고(義庫)는 많은 면민에게 미쳤으니, 그 시행의 규모나 가르치는 방법을 비교해보면 더욱 크고 또 두텁다”고 말하였습니다.
처사공의 정신이 서린 목미암과 상관재에는 저명한 유학자들이 지은 기문(記文)과 시(詩)와 주련(柱聯) 등이 줄지어 걸려 있지만, 한글세대의 후손들이 한문을 전혀 알지 못하여 읽지 못하므로 항상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신사년(2001) 죽산안씨(竹山安氏) 우봉파(牛峯派) 종친회 정기총회에서 목미암과 상관재의 역사를 편찬하여 국역 간행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 후 2년여에 걸쳐 불초 등은 목미암과 상관재에 걸려있는 현판의 글을 모두 수집하고, 「직우당유고(職憂堂遺稿)」, 「순호유고(蓴湖遺稿)」, 「오봉유고(五峯遺稿)」, 「소산유고(蘇山遺稿)」, 「선세행록(先世行錄)」[매우(梅友) 규만(圭萬)이 씀], 「우촌유고(愚村遺稿)」에서 처사공의 학문과 덕행에 관련된 기사(記事)를 빠짐없이 발췌하여 순서대로 편찬하였습니다.
오늘에야 이 글들을 국역하여 발간하게 되니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책자는 우리 문중의 훌륭한 유산인 만큼 후손들이 널리 읽고 되새겨 자랑스런 선조의 유덕(遺德)을 기리 전승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조선조 향촌사회와 향촌 지식인을 연구하는 자료로도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국역을 맡아준 안동교(安東敎) 교수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상세한 주석(註釋)을 붙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계미년(2003) 6월 일
9대손 태순(泰淳) 근지(謹識)
차 례
1. 목미암(木美庵)에 관한 기사(記事)
1) 목미암의 연혁(沿革) 1
2) 木美菴重修記 2
목미암을 보수한 뒤 붙인 기문 3
3) 木美菴記 5
목미암의 기문 5
4) 목미암의 원운(原韻) 7
5) 목미암의 원운을 빌려 지은 시(詩)들 7
6) 목미암의 팔경(八景) 9
7) 목미암에서 동지들에게 보이다[山庵示同志]11
8) 목미암의 주련(柱聯)12
2. 상관재(相觀齋)에 관한 기사(記事)
1) 相觀齋重修記13
상관재를 보수한 뒤 붙인 기문13
2) 相觀齋記14
상관재의 기문15
3) 우산(牛山) 선생의 오륜가(五倫歌)17
4) 상관재의 향음례운(鄕飮禮韻)19
5) 상관재의 팔경(八景)20
6) 상관재의 팔경(八景)을 읊은 시(詩)21
7) 相觀齋學規23
상관재의 학업 규칙24
3. 매계처사(梅溪處士)에 관한 기사(記事)
1) 御史書啓26
암행어사의 서계(書啓)26
2) 積田面上下民人上書27
적전면의 백성들이 관찰사에게 올린 글28
3) 幼學蘇東聖李定鎭朴守根等上書32
유학 소동성․이정진․박수근 등이 관찰사에게 올린 글33
4) 邑誌一段35
「읍지」에 실린 한 단락35
5) 行 狀35
행 장37
6) 墓誌銘 幷序41
묘지명 (서문을 덧붙임)43
7) 墓碣銘 幷序48
묘갈명 (서문을 덧붙임)49
※ 부 록54
1) 宣敎郞府君墓表54
선교랑 부군의 묘표54
2) 學生公墓表56
학생공의 묘표57
3) 參議公墓碣銘 幷序 59
참의공의 묘갈명 (서문을 덧붙임)60
■ 인명록(人名錄)65
1. 목미암(木美庵)에 관한 기사(記事)
1) 목미암의 연혁(沿革)
목미암은 임인년(1722)에 우산(牛山) 안(安)선생의 증손자인 매계처사(梅溪處士) 안후상[安後相: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됨]이 내우산(內牛山) 마을 동쪽 뒤 오봉산(五峯山) 아래에 지은 서재(書齋)이다. 매계공은 우산 선생이 광해군 6년 갑인(1614)에 소뫼[牛山]에 정착한 뒤, 자손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인의(仁義)를 숭상하도록 가르친 뜻을 이어받아, 가문의 전통과 규범을 지키기 위하여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매계공은 과거(科擧)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였으며, 고을의 풍속을 교화시키기 위해 향약(鄕約)을 설치하고 의창(義倉)을 설립하여 곡식 천여 섬을 저축하였다. 그런 뒤에 학식이 높아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극진히 대접하고, 면내의 자제들을 모아 취학하게 하니 인근의 선비들도 찾아와 모인 자가 매우 많았다. 또 가난하여 세금을 낼 수 없는 사람, 혼기를 놓친 사람, 상장(喪葬)을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었고, 연말에 쌀과 반찬을 마련하여 늙은이에게 돌리기도 하였다.
매계공의 유지를 이어받은 손자 직우당(職憂堂) 창훈(昌勳)은 갑진년(1784)에 목미암을 중건하였고, 같은 해에 그 서쪽에다 상관재(相觀齋)를 창건하였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는 그 문을 점진문(漸進門), 서재를 상관재(相觀齋), 방을 수정와(守靜窩)라 이름을 짓고 손수 글씨를 써주었다. 목미암의 정원과 주위에는 오래된 동백 한 그루, 250여 년이 된 서나무 열 그루 외에 백일홍과 소나무 등이 산재해 있어 고풍(古風)을 자아내고 있다.
직우당이 중건한 이후 목미암의 중수(重修) 역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매계공의 현손 명집(命集)은 경인년(1830)에 목미암(木美菴)과 상관재(相觀齋)를 중수하였고, 6대손 인환(寅煥)은 을축년(1865)에 상관재를 보수하였으며, 기환(琦煥)은 경인년(1890)에 상관재를 네 칸에서 세 칸으로 줄이면서 현재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매계공의 8대손 종기(鍾箕)는 정유년(1897)에 노후(老朽)한 목미암을 네 칸 겹집에서 세 칸 홑집으로 축소시켜 재건하였다. 9대손 호순(浩淳)은 정묘년(1987)에 목미암의 앞 툇마루를 늘렸고 목미암과 상관재를 헌 기와로 번와(飜瓦)하였으며 담장도 수리하였다(공사비용은 8백 50만원). 호순은 또 기사년(1989)에 목미암의 원장(垣牆) 밖에다 관리사(管理舍)와 부속건물을 신축하였고(공사비용은 8백 70만원), 임신년(1992)에는 목미암으로 들어가는 길을 확장하여 포장하였다(공사비용은 6백 20만원). 9대손 태순(泰淳)은 경진년(2000)에 목미암과 상관재의 서까래 일부를 교체하고, 한와(韓瓦) 새 기와로 번와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공사비용은 2천 6백 64만원).
이상과 같이 수차에 걸쳐 원 건물을 보전하면서 중건과 보수를 게을리 하지 않고 280여 년을 유지 보존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길이 전승할 것이다.
계미년(2003) 6월 일
9대손 일순(日淳) 근지(謹識)
2) 木美菴重修記
菴以木美名 以其在於牛山 故用鄒聖語命之也 菴之創 寔我高祖梅溪府君 爲子孫讀書地 而世久頹廢矣 從祖職憂公重創於舊址 增其舊制 名其西曰相觀 楣其門曰漸進 而講業之規 供師之節 咸復舊貫 四方之士 日與之從遊講業 乃有蓴湖公松梅亭兩叔父之經學文章 莫非先廕積累之攸曁也 往在戊寅春 余以職憂公命 修築其門牆 仍附一架於其北 而至若正架扶顚之功 則未遑矣 及今址礎傾多 甍瓦觖漏 殆不保朝夕 而嗚呼職憂公已下世矣 在今日重繕 豈非吾諸子孫之責耶 於是乎 撤而新之 朽者易之 漫漶者滌之 制度則就其舊而增損之 只爲其鞏固 而再從叔壽行氏 勞勩甚多 噫 自梅溪府君創建之壬寅 越六十有三年 而甲辰有職憂公之重建 自甲辰四十七年 而又有今日之重繕 則自今日至幾年 嗣而葺之者 又將爲幾人歟 後承之讀書於斯菴者 必顧名思義 不至梏亡其良心 則庶不墜堂構之責 是則菴之興廢 可以卜吾家之隆替矣 後承其勉之哉
崇禎四庚寅仲秋 不肖玄孫命集謹識 辛未初夏 不肖子根洙改書
목미암을 보수한 뒤 붙인 기문
서당을 목미암(木美菴,『맹자(孟子)』 「고자(告子)」 상편을 보면,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큰 나라의 근교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도끼로 벌목해 가니 아름답게 될 수 있겠는가?”[牛山之木, 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하였다. 우산(牛山)은 맹자(孟子)가 살던 시대에 제(齊)나라의 동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인데, 안씨의 후손들이 살아온 우산(牛山)과 지명이 일치한다. 그리고 “우산지목(牛山之木) 상미의(嘗美矣)”라는 구절에서 ‘목미(木美)’를 따온 것이며, ‘암(菴)’이라 한 것은 당시에 서당 또는 글공부하기 위해 산간에 지은 집을 ‘암’이라고 부르는 예가 많아서 그렇게 부른 것 같다.)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서당이 우산(牛山) 땅에 있기 때문에 추성(鄒聖, 추(鄒)나라의 성인(聖人), 곧 맹자(孟子)를 말함.)의 말을 빌려 명명한 것이다. 목미암의 창건은 실로 우리 고조 할아버지 매계부군(梅溪府君: 안후상)이 자손들을 위해 독서할 곳으로 마련했으나 세월이 오래 흘러 무너지고 헐어졌다.
종조(從祖) 할아버지 직우공(職憂公: 안창훈)이 옛 터에 다시 창건하여 옛날의 규모보다 확장시키고, 그 서쪽 집 이름을 ‘상관재(相觀齋)’라 하였으며 문미[楣: 문 위에 가로 댄 상인방]에다 ‘점진문(漸進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강론하고 수업하는 규모나 스승을 받드는 절차를 모두 예전부터 내려오던 관례대로 행하자, 사방의 선비들이 날마다 찾아와 함께 강론하고 학업을 닦았다. 이에 순호공(蓴湖公: 안수린)과 송매정(松梅亭: 안수록) 같은 두 숙부의 경학(經學)과 문장(文章)을 배출하였으니, 이는 선조의 음덕(蔭德)이 쌓인 결과가 아님이 없다.
지난 무인년(순조 18, 1818) 봄에 나는 직우공(職憂公)의 명을 받아 문과 담을 고쳐 쌓고, 이어 그 북쪽에다 한 칸을 덧붙였으나 서까래를 바르게 다듬어 넘어지는 것을 지탱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다. 오늘에 이르러 주춧돌은 무너지고 기와는 새어 거의 하루도 버티기 어렵건만, 아! 직우공은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오늘날 다시 보수하는 일은 어찌 우리 자손들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에 철거하여 새롭게 꾸미면서 썩은 것은 바꾸고 떼 묻은 곳은 씻어냈으며, 집의 규모나 모양은 옛것을 따르되 조금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였으니, 이는 다만 집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재종숙(再從叔) 수행(壽行)씨의 노고가 매우 컸다. 아! 매계부군(梅溪府君)이 창건한 임인년(경종 2, 1722)으로부터 63년이 지난 갑진년(정조 8, 1784)에 직우공(職憂公)이 중건하였고, 갑진년으로부터 47년이 지나 또 오늘에 다시 보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몇 년이 지나야 우리를 이어서 다시 보수하게 될 것이며, 또 그 일을 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는지?
이 서당에서 글을 읽는 후손들이 반드시 집의 이름을 되돌아보고 의미를 생각하여 자신의 양심(良心)을 잃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면, 당구(堂構, 아버지가 건축의 설계를 세우고[堂], 아들이 터를 잡아 집을 짓는다[構]는 뜻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자손이 선조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말이다.)의 책임을 떨어뜨리지 않게 되리라. 이 서당의 흥성함과 쇠퇴함으로 우리 가문의 성공과 실패를 점칠 수 있으니, 후손들이여! 힘써 공부하라.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 황제의 연호) 4경인년(순조 30, 1830) 중추절에 불초 현손 명집(命集)이 삼가 적고, 신미년(고종 8, 1871) 초여름에 불초 아들 근수(根洙)가 고쳐 씀.
3) 木美菴記
隱峰安先生 嘗講道於牛山之下 子孫仍世家焉 梅溪處士諱後相 以文學行義 不失古家型範 築一小齋於其東 爲讀書之所 扁以木美 蓋取鄒聖牛山木美之語也 性潭先生 爲之名其門曰漸進 齋曰相觀 室則守靜 旣又手書八景 以侈其楣 顧名思義 其非尋常結構也明矣 每良辰勝日 鄕黨宗族 杖屨後先 勸業規失 倣藍田之遺約 講義飭躬 遵隱屛之舊規 其所誘掖勸勵 彬彬有可觀 百餘年之間 絃誦不絶 處士六世孫成煥 懼夫後人之或久而怠也 請余一言以勉之 余曰然 祖先之貽謨 譬則山之生木也 後人之紹述 譬則木之成其材也 雖有天下之嘉木 失養則消 人之欲趾先美者 可不知所養哉 孝悌以立其本 文藝以達其支 日夜毋忘其所有事 又毋以外誘之斧斤而戕賊之 則吾之養得矣 而祖先之木 於是乎成矣 種下生種 其傳也又可旣乎 登公之堂 追公之志 則永似佳孫 自有興感於無窮也 請以是爲記
崇禎紀元後 五回昭陽大荒落 一之日下澣 恩津宋秉璿記
목미암의 기문
은봉(隱峰) 안(安)선생이 일찍이 우산(牛山) 아래에서 도(道)를 강론하자, 자손들이 거기서 대대로 가문을 지켜왔다. 매계처사(梅溪處士) 휘(諱) 후상(後相)은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고가(古家)의 본보기를 잃지 않았는데, 마을 동쪽에다 조그만 서당 한 채를 지어 독서할 곳으로 삼고 ‘목미암(木美菴)’이라는 편액을 내거니, 대개 추성(鄒聖: 추나라의 성인 맹자)의 “우산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다[牛山木美]”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성담(性潭: 송환기) 선생은 그 문을 ‘점진문(漸進門)’, 서재를 ‘상관재(相觀齋)’, 방을 ‘수정와(守靜窩)’라 이름짓고 나서, 또 손수 상관재의 팔경(八景)을 써서 기둥에다 화사하게 붙였으니, 그 이름을 돌아보고 의미를 생각해보면 평범하게 지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항상 아름답고 좋은 절기에 고을의 종족들이 서로 이곳을 찾아와, 학업을 권장하고 과실을 규제하여 남전(藍田)이 남긴 향약(鄕約)[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藍田) 지방 출신인 여대균(呂大鈞)이 만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말함. 여대균은 여대방(呂大防)의 아들로 자(字)는 화숙(和叔)이요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제자이다. 그가 만든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강령으로 삼았으며, 후세에 모든 향약의 모범이 되었다.]을 본받았고, 의리를 강론하고 몸을 추슬러 은병(隱屛)의 옛 학규(學規)[은병은 산봉우리 이름. 중국 무이산(武夷山) 속의 제 5곡(曲)에 있는데 높이가 무려 60여 길이나 된다. 이 봉우리 밑에 주자(朱子)의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다. 참고로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43세 되던 해(1578)에 해주(海州) 석담(石潭)에다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어 주자를 추앙하는 뜻을 붙이고,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를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를 따랐다. 그 이끌어주고 권장해준 바가 빛나 볼만하였고, 백여 년 동안 거문고 소리와 글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처사(處士)의 6세손 성환(成煥)이 훗날 사람들이 혹여 오래되면 게을러질까 두려워, 내게 한마디 말을 청하여 그들을 권면(勸勉)하고자 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럴 것이네. 선조가 후손들에게 끼친 가르침을 비유하면 산이 나무를 낳은 것과 같고, 후손들이 선조의 뜻을 계승함을 비유하면 나무가 재목을 이루는 것과 같네. 비록 천하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할지라도 배양하지 못하면 사그라질 것이니, 선조의 미덕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배양할 바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효제(孝悌)로 그 밑둥을 세우고, 문예(文藝)로 그 가지를 뻗쳐 밤낮으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잊지 말아야 하며, 또 밖에서 유혹하는 도끼로 내 마음을 찍거나 해치지 말아야 하네. 그렇게 하면 나의 배양이 이루어지고 선조(先祖)의 나무가 이를 통해 성장하게 되니, 씨를 뿌린 곳에 다시 씨가 생겨나듯이 그 전승(傳承)함이 또한 잘 이루어지리라. 그대의 서당에 올라서 그대의 뜻을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후손들로 하여금 절로 끝없는 감동을 일으키리라” 하고, 이를 기문으로 삼기를 청하였다.
숭정(崇禎) 기원 후 5 소양(昭陽) 대황락(大荒落)[『이아(爾雅)』의 고갑자(古甲子)에서는 소양을 ‘계(癸)’로, 대황락을 ‘사(巳)’로 표기하므로 계사년(고종 30, 1893)에 해당된다.] 1월 하한에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이 적음.
4) 목미암의 원운(原韻)
맑은 강물 떠다가 먼 산에 부으니 平挹淸江遠枕山
지금도 아름다운 나무 여기에 자라네 至今美木在玆間
숲에 떨어지는 비․이슬은 아침마다 젖고 滴林雨露朝朝潤
나무 감싼 구름․노을 골짝마다 돌아온다 擁樹雲霞谷谷還
환한 봄빛 얼굴도 원래 어두웠으니 敷燁春容元自晦
청명한 밤 기운이라야 편안함 찾으리 淸明夜氣可求安
어진 선비 만나 뿌리를 배양하려고 願逢仁士培根節
이 좋은 땅을 귀신도 아껴 숨겼다지 勝地由來鬼亦慳
오봉 안수록 지음. 글씨는 친필을 모음 五峯 親筆集字
5) 목미암의 원운을 빌려 지은 시(詩)들
(1) 목미암(木美庵)
높다란 집 한 채 청산에 숨었는데 岧嶢一室隱靑山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졌네 美木蒼蒼菀此間
큰 골짜기 바람과 서리에 한해가 저물고 大壑風霜經歲暮
어진 하늘 비와 이슬에 봄이 왔음을 알겠네 仁天雨露識春還
재목 만들면서 하필 먹줄 따라 곧게 하랴 成材何必從繩直
물건 됨은 장차 땅을 얻어 편안해 지리라 爲物將看得地安
산중의 나무꾼과 목동의 집에 두루 알려 說與林泉樵牧社
이 편액을 공경하여 서로 아끼길 바라네 欽玆扁額幸相慳
순호 안수린 지음 蓴湖
(2) 목미암에서 오봉부군의 원운을 빌려 삼가 시를 짓다
[木美庵謹次五峰府君原韻]
옛 사람 뜻을 두어 이 산 사들이더니 前人作意買玆山
단아한 서당을 푸른 숲 사이에 지었네 置我明牕紫翠間
그윽한 풀 길로 다 책을 낀 채 나서고 幽艸皆爲書帶出
아름다운 새들도 배워서 외우며 돌아가네 好禽能學誦聲還
시냇가에 바람과 달은 언제나 다할꼬 溪邊風月何時盡
동네 창포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구나 洞裏菖蒲許久安
이로부터 배양치 않아도 곧 성장하리니 自是不培培便長
하늘은 아름다운 나무에 아낌이 없거든 天於嘉木本無慳
출후 증손 성환 지음. 정미년(1907) 出后曾孫成煥丁未
(3) 삼가 목미암의 원운을 빌리다[敬次木美庵原韻]
아름다운 나무 울창하게 온산을 에두르니 美木蒼蒼繞四山
밝은 창 깨끗한 책상이 이곳을 차지했네 明窓淨几占玆間
소나무는 눈에 덮여 하늘을 향해 뻗었고 松交雪幹參天立
물은 돌을 뚫고 홈통을 따라서 돌아오네 水鑿雲根接筧還
또한 책을 펼쳐 부지런히 공부하고 且把簡編須喫苦
생각을 멈추고서 스스로 편안함을 구하리 休思宴處自求安
당시 이미 평천(平泉)의 훈계를 남겼으니 當年已有平泉誡
남긴 발자취 지금까지 보호하여 아끼네 遺躅從來共護慳
현손 규숭 삼가 지음 玄孫圭嵩謹稿
평천(平泉): 이태위(李太尉)의 평천장(平泉庄)을 말함. 당나라 때 이덕유(李德裕)가 지은 별서(別墅)로 하남성 낙양현 남쪽에 있었다. 이덕유의 「평천수석기(平泉樹石記)」가 남아 있고, 백거이(白居易)는 이곳에 자주 들러 시를 지었다고 한다.
(4) 목미암에서 삼가 오봉부군의 원운을 빌려 회포를 적다
[木美庵敬次五峰府君原韻述懷]
당시 숨어 지내려 이 산에 터 잡으니 當年棲息占玆山
떠다니는 골짜기 구름도 돌아보는 곳이라 雲壑都輸顧眄間
추위 견딘 소나무 해마다 꿋꿋함이 어여쁘고 寒保松篁憐歲敵
굶주려 고사리 끊으니 봄이 왔음을 알겠네 飢收薇蕨識春還
혜초 띠고 난초 차니 마음엔 후회가 없고 蕙纕蘭佩心無悔
암혈에서 물길으며 사니 분수 절로 편안하네 谷汲巖居分自安
화려함으로 속된 벗에게 자랑하지 마소 不把繁華誇俗侶
신선이 내게 아끼던 땅을 빌려주었거늘 仙靈借我賴呵慳
불초 5대손 종민 삼가 지음. 정사년(1917) 不肖來孫鍾珉謹稿丁巳
6) 목미암의 팔경(八景)
오봉(五峯) 안수록(安壽祿) 지음
(1) 모악의 돌아가는 구름[茅嶽歸雲]
저녁에 날아드니 산비탈․골짜기 어둑하고 夕飛崖谷暗
아침에 흩어지니 나무와 숲이 성그네 朝散樹林疎
바라보게나 삼복이 지난 후에 請看三伏後
강변의 비가 비로소 개는 것을 江雨欲晴初
(2) 덕봉의 낙조[德峯落照]
쨍쨍 비치던 해가 어느덧 넘어가니 白日行將盡
층층 언덕엔 저녁 그림자가 외로운데 層邱夕影孤
석양의 햇볕은 문득 빛깔을 발하고 返照忽生色
돌 벽은 도리어 순호 속에 나부끼네 石壁飜蓴湖
(3) 순호의 저녁 연기[蓴湖夕烟]
실바람이 돌 벽에 불어오고 微風來石壁
낚시터에는 석양이 찾아드는데 釣臺夕陽低
물가 마을에 밥짓는 연기 다했으니 水村炊欲盡
슬며시 마을 숲 서쪽으로 나서보네 細出巷林西
(4) 조동의 아침 안개[漕洞朝霧]
산마루가 붉은 해를 토해내니 山日紅將吐
맑은 냇가엔 아름다운 기운이 피어나네 晴川發氣佳
아침녘에 백 척이나 뛰어올라 崇朝騰百尺
단장하고 높은 산비탈에 솟아난다 粧點出高崖
(5) 동강의 뱃놀이[桐江行舟]
새벽 물가에는 바람이 지나가고 曉渚隨風過
저녁 모래톱엔 달을 싣고 돌아오니 石洲載月回
제격이야! 두세 명의 벗을 맞아들여 恰受人三兩
오고가며 한 길을 트는 일이 往來一路開
(6) 인연의 고기잡이[印淵打魚]
복숭아 꽃 핀 언덕에 그물을 치고 集網桃花岸
가랑비 맞으며 고기를 몬다 驅魚細雨濱
이끼 낀 바위에서 한번 바라본 뒤 臨機一觀後
회치며 구우니 더욱 화목하다네 膾炙更宜人
(7) 산촌의 길쌈 등불[山村績燈]
등불 아래 푸른 치마 입은 아낙네 燈下靑裙婦
실을 잣다가 밤이 깊어버렸네 理絲夜欲分
남은 불빛 멀리서 서로 비추더니 餘光遠相照
닭소리 들리는 새벽까지 반짝인다 耿耿到鷄聞
(8) 죽림의 돌아가는 새[竹林歸鳥]
석양녘에 바삐 마시고 쪼더니 斜陽飮啄足
대나무 우거진 마을로 날아가네 飛向竹多村
텅 빈 산 마을엔 인간사도 적으니 空山少人事
시끄럽게 지저귀도록 내버려 둘 뿐 任爾作啾喧
7) 목미암에서 동지들에게 보이다[山庵示同志]
선비들이 학업을 닦으려면 吾儒進修業
또한 서당을 지어야 하리 亦似結爲廬
땅이 없어 기둥 세우기 어렵지만 無地難安柱
책상 있어 서적을 쌓을 수 있다네 有床可貯書
이 집에서 얻은 우리의 지식으로 人知由此戶
어찌 인(仁)을 널리 베풀지 못하랴 何莫廣其居
항시 공경하여 배움의 길 이루고 一敬成門路
서로 본받아 허튼 짓 하지 말게나 相效戒勿疎
오봉 안수록 지음. 글씨는 친필을 모음 五峯 親筆集字
8) 목미암의 주련(柱聯)
양기가 피어오르면 陽氣發處
쇠와 돌도 뚫을 수 있고 金石可透
정신을 쏟는다면 精神所到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랴 何事不做
곧 결심을 단단히 하면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음을 비유함.
마음을 기울여 열중하면 안 되는 일이 없음을 말함.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과 같음.
2. 상관재(相觀齋)에 관한 기사(記事)
1) 相觀齋重修記
盖菴之立于斯者 舊矣乎 自昔壬寅 至今庚寅 凡二百二十有九載 六代祖梅溪府君 始刱之 高祖職憂府君 重建焉 底法貽厥之謨 備矣遠矣 族從祖庚寅之增葺 先仲兄乙丑之繕補 亦可謂善繼述 而顧此齋舍 地旣卑隘 歲又寢久 不免有傾圮滲漏之虞 不肖用是憂懼 思有以經營者久矣 肆於今年春 詢謀克合 裒取菴中若干財谷 不足者各出力補助 不肖不敢以勞辭 乃相址于移北數武面陽之地 增損舊制 約四架爲三 而堂居二焉 花木之叢雜者 疏滌使整列 牆壁之頹歇者 修治使直方 凡一月功告訖 可見力齊而工敏矣 因竊有感焉 入此菴者 誠能切磨相資 觀善責戒 以不負吾祖樹立之意 則齋之永久 可卜矣 不然 羣居飽食 徒爲翫愒遊戱之地 則身且不暇 爲如齋何 嗚呼來今 其勿以人廢言 尙克念哉
歲庚寅春 六代孫 琦煥 謹識
상관재를 보수한 뒤 붙인 기문
생각해보니 목미암(木美庵)이 여기에 세워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옛적 임인년(경종 2, 1722)으로부터 올해 경인년(고종 27, 1890)에 이르기까지 모두 229년(169년으로 계산함이 옳을 것 같다.)이 흐른 것이다. 6대조 매계부군(梅溪府君: 안후상)이 비로소 창건하고 고조 직우부군(職憂府君: 안창훈)이 중건하니, 가법을 세워 후손에게 물려준 훌륭한 계책은 자상하고도 원대하였다. 족종조(族從祖: 안명집)가 경인년(순조 30, 1830)에 늘려서 보수하고, 작고한 중형(仲兄: 안인환)이 을축년(고종 2, 1865)에 수리한 것도 또한 선조의 유지를 잘 계승했다고 말할만하다.
그러나 이 서재를 되돌아보니 지세가 낮고 좁으며 세월도 오래 지나 허물어지고 새는 걱정을 면할 수 없었다. 불초(不肖)한 나는 이를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다시 집을 지을 생각을 둔 지 오래되었다. 이에 금년 봄에 서로 상의하여 좋은 생각을 모아 목미암에 딸린 약간의 재곡(財谷)을 끌어 모으고 부족한 것은 각각 힘을 보태 돕기로 하였다.
나는 수고로운 일을 감히 마다하지 않고 곧장 북쪽으로 몇 발짝 옮겨 남쪽을 향한 곳에 터를 잡고, 옛날 규모를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네 칸을 세 칸으로 줄이고 마루 두 칸을 두었다. 더부룩한 꽃나무는 속아내어 정돈하고 허물어진 담은 보수하여 방정하게 만들었다. 한 달만에 공사를 마치니 모두 힘을 합쳐 민첩하게 일했음을 알 수 있다.
일을 마친 후 슬며시 마음에 감흥이 일어났다. 이 목미암(木美庵)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참으로 능히 절차탁마하여 서로 공부를 돕고[切磨相資] 선행을 보고 악행을 책망하고 경계하여[觀善責戒] 우리 선조(先祖)가 세운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상관재(相觀齋)도 길이 전해질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무리를 지어 살면서 배불리 먹거나 한갓 유희(遊戱)만을 탐한다면, 몸도 보살필 겨를이 없는데 이 서재를 어떻게 하겠는가? 아! 슬프다. 오늘 이후 나의 하찮은 말을 버리지 말고 다시금 깊이 생각하기 바라노라.
경인년(고종 27, 1890) 봄에 6대손 기환(琦煥)이 삼가 적음.
2) 相觀齋記丙午
牛山之東 有學舍焉 其名爲木美菴 菴之少北近西 幽靜其室 爽塏其堂 面南而爲齋者 曰相觀 舊在菴之前 中經壞漏 今所建者 改卜地也 而名仍舊 昔我梅溪職憂二祖 先後建修是菴 以訓誨子孫 旣族姓益蕃 挾策者日以衆 舍或不能容 此齋之所爲立也 以處藝業稍秀有意進取者 且以待夫四方賢士之來遊者 蓋亦古者小學大學之遺意也 噫 百工居肆 以成其事 君子之居是齋 可不知所事哉 人之群居 欲何爲乎 論疑答問 所以致其明也 勸勉慕效 所以進其修也 規切繩糾 所以補其失也 在人者 固有以資於己 在己者 亦得以資於人 所謂相觀而善者 蓋如此 其視獨學無輔 孤陋枯澁 而不免有差者 相去固相萬也 故易大傳旣曰自昭明德 又必曰朋友講習 論語旣曰爲仁由己 而由人乎哉 又必曰以文會友 以友輔仁 曰魯無君子者 斯焉取斯 由是觀之 古人之所謂學者 可知已 至於記誦之富 文辭之美 是乃世儒之末務 謂之賢乎己則有之矣 非所以命名之實也 若夫飢而食 飽而逸 以歡謔慢遊爲能事 以相師師 是夫子所謂言不及義 好行小慧 難矣哉者 吾又何敢知 已告於同志 且以自勉戒云.
六代孫 成煥 謹識
상관재의 기문병오년(1906)
우산(牛山)의 동쪽에 학사(學舍)가 있는데 그 이름은 목미암(木美庵)이다. 목미암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한 방과 탁 트인 마루를 갖추고 남쪽을 향하여 서재가 되니, 이를 상관재(相觀齋)라 부른다. 이 서재는 옛날에 목미암의 앞에 있었으나 중년에 집이 허물어지고 물이 새었으므로, 다시 터를 잡아 지은 것인데 이름은 옛것을 그대로 따랐다.
옛날에 우리 매계(梅溪: 안후상)․직우당(職憂堂: 안창훈) 두 선조가 잇달아 이 목미암을 건립하고 보수하여 자손들을 가르쳤다. 이미 문중의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여 책을 가지고 공부하러 오는 자가 날로 많아져, 학사(學舍)에 간혹 수용할 수 없었으니 여기에 서재를 새로 지은 이유가 있다. 이 곳에 재주와 학업이 조금 뛰어나고 적극적으로 공부하는 데 뜻을 둔 사람을 있게 하고, 또 사방에서 찾아온 어진 선비들을 대우하니, 또한 옛적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의 유지를 따른 것이다.
아! 수많은 장인[工]들이 참여하여 그 공사를 마무리짓고, 군자(君子)가 이 서재에 거처하니 종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 거처하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의심을 토론하여 문답하는 것은 밝은 지식을 이루고자 함이요, 학문을 권장하고 흠모하여 본받는 것은 심신의 수양을 진보시키기 위함이요, 잘못을 경계하여 올바로 잡아주는 것은 실수를 보완해주기 위함이다.
남에게 있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보탬이 있고, 나에게 있는 것은 또한 남에게 보탬이 되어, 이른바 “서로 관찰하여 선을 행하게 한다[相觀而善]”[상관(相觀)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예기(禮記)』 제18 「학기(學記)」 편에 보인다. “대학의 교수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 학생의 악습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금지시키는데 이를 예법(豫法)이라 한다. 알려서 깨우치려고 할 때 즉 학생이 스스로 발분하여 알기를 구할 때에 즈음하여 알려주고 가르쳐주는데 이를 시법(時法)이라 한다. 또 학생의 지력 정도를 넘지 않게 교육을 실시하는데 이를 손법(孫法)이라 한다. 학생으로 하여금 서로 학우의 언행을 관찰케 하여 그 선을 따르고 악을 물리치게 하는데 이를 마법(摩法)이라 한다.[相觀而善之謂摩] 이 네 가지가 교육이 흥하는 근본이다.”]는 것이 대개 이와 같으니, 홀로 학문하여 도와주는 이가 없어 견식이 고루하고 난삽하여 어긋남을 면치 못하는 자와 비교해보면 서로의 거리가 참으로 멀다. 그러므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서는 이미 “스스로 명덕(明德: 자기의 밝은 덕성)을 밝힌다” 말하고, 또 반드시 “벗이 서로 강론하고 복습한다”고 말했다. 『논어(論語)』에서도 이미 “인(仁)의 실천은 나에 달려있지 남에게 달려있는가?” 말하고, 또 반드시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仁)을 돕는다”고 말하거나, “노(魯)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을 취했겠는가?”[이 말은 「공야장(公冶長)」 2장에 나온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옛사람이 이른바 ‘학문’을 알 수가 있다. 기송(記誦: 기록과 암송)을 풍부히 한다거나 문사(文辭)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곧 세속의 선비[世儒]나 하는 보잘것없는 일이니, 나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선비라고 이름 붙일 실상은 아닌 것이다. 만일 배고파 먹되 포식하여 방일하고 장난질과 게으름을 능사로 여겨 서로를 스승으로 삼는다면, 이는 부자(夫子: 공자)께서 이른바 “(여럿이 거처하며 하루를 마치면서도) 말이 의리에 미치지 못하고 작은 지혜를 행하기 좋아한다면 환난(患難)이 있으리라”[이 구절은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16장에 나온다.]한 것이니, 내 또한 어찌 감히 알겠는가? 이미 동지(同志)에게 알리고 또 자신을 힘써 경계하고자 한다.
6대손 성환(成煥)이 삼가 적음.
3) 우산(牛山) 선생의 오륜가(五倫歌)
우주의 가득 차고 텅 빈속에서 宇宙盈虛內
사람이 음식과 의복으로 산다네 人生食與衣
만일 오륜을 다하지 못하면 五倫如不盡
새나 짐승과 같이 되리라 禽獸是同歸
부모는 하늘․땅과 같으니 父母如天地
뉘라 사랑과 공경의 마음 없으리 誰無愛敬心
일찍이 불효한 사람을 보았는데 嘗觀不孝者
그 뜻을 끝내 알기 어려웠네 其意竟難尋
임금과 부모가 어찌 다르리요 君父何嘗異
마땅히 충절 다하는 신하가 되리라 當爲盡節臣
탕(湯)․발(發)의 덕을 논하지 말게 無論湯發德
불쌍히 여겨 치는 것도 인은 아니라네 弔伐亦非仁
[은나라 탕 임금과 주나라 무왕이 폭정을 일삼았던 걸(桀)과 주(紂)를 공격한 것은 백성을 불쌍히 여겨 폭군의 죄를 친[弔民伐罪] 것이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한 행동 자체만 두고 볼 때 인(仁)이라는 유가의 윤리에 어긋난다는 뜻임.]
도에 뜻을 둔다면 누구를 쫓아야 하나 志道從何得
스승이 아니면 이룰 수 없다네 非師不可成
만일 방몽의 활 솜씨를 배운다면 如其學蒙射
[스승의 가르침을 거역하거나 배반하는 것을 말함. 『맹자(孟子)』 「이루장하(離婁章下)」에서 “방몽(逄蒙)이 활쏘기를 예(羿)에게서 배워, 예의 기술을 다 배우고 나서 ‘천하에 오직 예만이 자기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예를 죽였다” 하였다.]
영원히 악한 이름이 흐르리라 千載惡流名
거문고나 비파처럼 잘 화합하여 好合如琴瑟
가정 이끌고 나라 사람 교화하라 宜家化國人
일찍이 옛적 부부를 살펴보니 嘗觀古夫婦
서로 대우하여 손님처럼 공경하였네 相待敬如賓
한 몸이 나뉘어 형제가 되니 一體分兄弟
항상 우애하고 공순해야 한다네 尋常友與恭
오히려 서로 좋아하지 못하면 相猶不相好
세상에 죄를 용납 받기 어려우리 於世罪難容
친구는 형제와 같으니 友也如兄弟
경계하는 길이 또한 있다네 箴規道亦存
난잡하고 경박한 사람들과 紛紛輕薄子
어찌 감히 더불어 말하랴 豈敢與之言
이 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此外無他道
간절하게 생각을 이에 두어라 丁寧念在玆
일찍이 옛 사람의 말을 들으니 嘗聞古人語
성인 되는 근본이요 기초라 하더라 作聖是根基
4) 상관재의 향음례운(鄕飮禮韻)
(1) 상관재에서 향음주례를 행한 감회를 읊다
[相觀齋行鄕飮酒禮感吟] 원운
소중화의 문물이 오랑캐로 변해가건만 小華文物化爲戎
이 고가에서는 아직도 예학을 공부한다네 猶有故家尙禮功
어진 주인 아름다운 손님 서로 겸양하니 賢主嘉賓相讓地
이 예를 바라보면 쉬이 고을 풍속 변하리 觀瞻易易變鄕風
연재 송병선 지음 淵齋
향음주례: 온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읍양(揖讓)을 지켜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던 예절이다. 공자도 『예기(禮記)』 「향음주의(鄕飮酒儀)」에서 “나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보고 비로소 왕도를 실현하기가 쉬운 줄을 알았다”(吾觀於鄕 而知王道之易易也)고 말한 바 있다.
(2) 목미암에서 향음주례를 행하고 지은 시를 차운하다
[次木美菴行鄕飮禮韻]
온 세상 어지러이 오융을 익히니 天下紛紛習五戎
어디에서 선비의 공부를 말하랴 却從何處說儒功
예절과 풍속 지키는 선경을 보고서 喜觀禮俗仙鄕在
문강공[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시호(諡號)임.]이 이끌어준 가르침 알았네 認是文康導迪風
심석병부 송병순 지음 心石病夫
오융(五戎): 다섯 가지 무기, 곧 도(刀)․검(劍)․모(矛)․극(戟)․시(矢)를 말하기도 하고, 다섯 가지 병거(兵車), 곧 융로(戎路)․광거(廣車)․궐거(闕車)․평거(苹車)․경거(輕車)를 말하기도 함.
(3) 상관재에서 연재 선생을 모시고 향음주례를 행한 뒤 선생의시를 차운하다
[相觀齋陪淵齋先生行鄕飮禮韻]
근엄한 선비들 술자리에 넘쳤지만 冠衿肅肅酒戎戎
허물없이 예절 끝내고 각자 공부 아뢰네 已事無愆各奏功
우리 고을 또한 제․노라 부를만하니 可是吾鄕亦齊魯
찾아오는 사람들 선생의 가르침을 받드네 來人也挹先生風
무술년(1898) 늦봄에 안성환 지음 戊戌季春成煥
제․노: 춘추 전국시대에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는 모두 문학(文學)의 근원지였으므로, 제로지풍(齊魯之風)이란 말이 생겨났다.
(4) 무술년 늦봄에 상관재에서 향음주례를 행한 뒤,
연재 선생이시 한 수를 내보이자 속히 지어 화답하다
[戊戌暮春者行鄕飮禮於相觀齋先生出示一絶率爾奉和]
일찍이 이천이 피발하는 오랑캐 탄식했는데 曾歎伊川被髮戎
갓 쓴 선비 오늘날 뉘를 의지하여 공부하나 冠儒今日賴誰功
궁벽한 산골에서 뜻밖에 이런 일을 보노라니 窮谷不圖觀此擧
의젓한 학생들은 봄바람을 쐬는 듯 하네 靑襟濟濟坐春風
문인 안종민 지음 門人安鍾珉
이천이 피발하는: 이천(伊川)은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頤)를 말하고, 피발(被髮)은 머리를 풀고 오른쪽 섶을 왼쪽 섶 위에 여미는 옷을 입는다는 뜻의 ‘피발좌임(被髮左袵)’의 준 말. 모두 야만(野蠻)의 풍속이다.
5) 상관재의 팔경(八景)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지음
우산의 아름다운 나무 [牛山美木]
조대의 높다란 돌 [釣臺危石]
율포의 아침 노을 [栗浦朝霞]
순호의 저녁 연기 [蓴湖夕烟]
인연의 고기잡이 불 [印淵漁火]
증봉의 초승달 [甑峰初月]
동강에 떠가는 배 [桐江行舟]
모악에 돌아가는 구름 [茅嶽歸雲]
6) 상관재의 팔경(八景)을 읊은 시(詩)
소산(蘇山) 안성환(安成煥) 지음
(1) 우산의 아름다운 나무[牛山美木]
높다란 나무에 난새 깃들고 高樹已棲鸞
낮은 가지는 말을 다 감추네 低枝盡隱馬
눈 온 뒤에 보지 않는다면 不從雪後看
뉘라서 독야청청을 알겠나 詎識靑靑者
(2) 조대의 높다란 돌[釣臺危石]
너무 길다란 몸을 싫어하여 爲嫌身太長
푸른 연못에 다리를 담갔건만 揷脚靑潭裏
가을날 물이 맑을 적에 畏逢秋水澄
낚시꾼이 깊이 들여다볼까 두렵네 釣父得深視
(3) 율포의 아침 노을[栗浦朝霞]
강가 햇살이 아침 안개를 비추니 江暾射早霧
휘황찬란한 노을이 꾸며지는구나 燦爛欲成霞
아스라이 노래 소리 들으며 杳杳聞歌處
거룻배 타고 산비탈 꽃을 꺾노라 小舟掠岸花
(4) 순호의 저녁 연기[蓴湖夕烟]
호수엔 온통 마름이 깔렸는데 湖中盡鋪菱
호수 가엔 대나무만 피어났네 湖上惟生竹
호수 가득 연기를 덮었지만 所以罨湖烟
길게 뻗어 푸르름을 자랑하네 長能如此綠
(5) 인연의 고기잡이 불[印淵漁火]
강과 불 밤마다 서로 만나 江火夜相合
강물이 온통 붉은빛을 띠니 一江徹底紅
잔 물고기 어찌 수를 헤아리랴 細鱗安足數
늙은 교룡을 근심할 뿐이네 愁殺老蛟宮
(6) 증봉의 초승달[甑峰初月]
서산을 향해 집 지은 것은 作室面西山
걸린 초승달을 맞기 위함이라 爲迎初掛月
둥글지 않다고 싫어하지 말게나 莫厭未團圓
둥근 달도 이내 이지러지는 것을 團圓奈易歇
(7) 동강에 떠가는 배[桐江行舟]
배 위에 저 사람 누구일까 舟上何人是
상인도 아니요 어부도 아니라 不商亦不漁
양 언덕엔 농부 집이 많아 夾岸多農戶
오고가는 긴 도랑이 되었네 往來長爲渠
(8) 모악에 돌아가는 구름[茅嶽歸雲]
봉우리 높아도 나는 길 막지 않고 峯高不礙飛
골짜기는 넓어 모두들 모여드네 谷豁故成聚
모르리. 모이고 나는 것 중에서 不知聚與飛
무엇이 비를 머금었는지 那箇是含雨
7) 相觀齋學規
一. 入齋之規 勿論士族庶類 但有志於學問者 皆可許入
一. 每日昧爽而興 親自整疊寢具 少者操箒 淨掃室堂 以次盥櫛整衣冠 訖長者 立於北壁下南面 幼者南行北面 皆拱手 直月立西壁下東面 抗聲讀警辭 訖 各就讀書處 整冊對案 端肅危坐 從容讀誦 勿顧眄他事 勿與人雜談
一. 食時 就食以齒 而從容整齊 不得戱嬉爭食 食畢 以齒而出
一. 受書之後 各就讀處 兀然端坐 終日讀之 少有疑處 輒來質問
一. 逐日課讀 毋或廢闕 冠者闕課 則一座警責 幼者則加榎楚十度
一. 言語須要詳愼 不得戱笑喧嘩 起居須要端莊 不得倨肆惰慢 若非疾病及夜眠 則不得偃臥
一. 出入步趨 務要安詳凝重 不得跳走票輕
一. 長者出入 少者皆起
一. 旣昏張燈讀書 夜久乃寢
右九條 入書室者 相與遵守 或有違越者 直月從容規戒 若不悛 則告于長 者 而論責之
■ 警辭
凡我同塾 力學律身 互相勸戒 日新又新
蓴湖 著, 五峰 書
상관재의 학업 규칙
1) 상관재에 들어오는 규칙은 선비와 서민을 따지지 않고,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모두 입학을 허락 한다.
2) 매일 먼동이 틀 무렵에 일어나 손수 침구를 정돈하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빗자루를 들고 방과 마루를 청소한 다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한다. 당장(堂長)이 북쪽 벽 아래에 서서 남쪽을 향하면, 어린이는 남쪽에 줄을 지어 북쪽을 향해 모두 두 손을 마주잡고 읍례(揖禮)를 행하며, 직월(直月, 직월(直月): 원래는 향약(鄕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하나의 직임(職任)인데, 여기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진 강론(講論)을 기록하고 수업의 진행을 돕는 사람으로 쓰였다. 율곡(栗谷)이 지은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를 보면, “재(齋) 안에서 나이가 많고 지식이 있는 사람 한 명을 추대하여 당장(堂長)으로 삼고, 또 같은 또래 가운데서 학식이 우수한 한 사람을 추대하여 장의(掌議)로 삼으며, 또 두 사람을 가려 유사(有司)로 삼고, 또 차례로 두 사람을 가려 직월(直月)로 삼는다. 당장․장의․유사는 연고가 없으면 갈지 말고, 직월은 다달이 서로 교체한다” 하였다.)은 서쪽 벽 아래에 동쪽을 향해서 서 큰소리로 「경사(警辭)」를 읽는다. 그리고 나서 각각 독서하는 곳으로 나아가 서책을 정돈하고 책상을 마주하여 단정히 꿇어앉아 조용히 독송하되, 다른 일을 돌아보지 말고 다른 사람과 잡담하지 말아야 한다.
3) 밥을 먹을 때에는 나이 순서대로 나아가 조용하고 가지런히 앉아 먹을 것이요, 장난을 치며 게걸스럽게 먹어서는 안된다. 식사가 끝나면 나이 순서대로 나가야 한다.
4) 책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뒤에는 각각 독서할 곳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읽되, 조금이라도 의심난 곳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가 질문해야 한다.
5) 날마다 일과를 정해 글을 읽되 혹시라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관례(冠 禮)를 치른 사람이 일과를 빼먹으면 온 좌중이 경계하여 책망하고, 어린이는 회초리[榎楚] 10대를 때린다.
6) 말은 반드시 자상하고 신중하게 할 것이요, 킬킬대고 웃거나 시끄럽게 떠들어서는 안된다. 거처할 때는 반드시 단정하고 장중하게 할 것이요, 거드름을 피우거나 게으른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병에 걸렸다거나 밤에 잠잘 때가 아니면 드러누워서는 안된다.
7) 출입할 때의 걸음걸이는 반드시 점잖고 무게있게 뗄 것이요, 뛰거나 달려서 가볍게 흐트러뜨려서는 안된다.
8) 어른이 드나들 적에 젊은이는 모두 일어선다.
9) 날이 어두워지면 등불을 밝혀 글을 읽되, 밤이 이슥해서야 잠자리에 든다.
이상 9조항은 서실(書室)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준수하되, 혹여 어긴 사람이 있으면 직월(直月)이 조용히 타일러 경계하고, 만일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당장(堂長)에게 알려 죄를 논하도록 한다.
■ 경 사(警辭: 경계하는 말)
“무릇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는 우리들은 힘껏 배우고 몸을 가다듬어, 서로 학문을 권장하고 경계하여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
순호(蓴湖) 안수린(安壽麟)이 짓고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이 씀.
3. 매계처사(梅溪處士)에 관한 기사(記事)
1) 御史書啓
景廟辛丑六月三十日 全羅道暗行御史權益寬書啓曰 南原幼學李延德 不事擧業 存心實地 光州幼學高漢元 故名臣高敬命後孫 而孝友之實 寶城儒學安後相 故名儒安邦俊曾孫 而鄕約社倉 頗有條理 此三人令銓曹 更加訪問 隨才甄用何如 傳曰依允 備邊司關文
암행어사의 서계(書啓, 지방에 출장 중인 봉명관(奉命官)이 문서로써 임금께 복명(復命)하는 글.)
경종 신축년(1721) 6월 13일에 전라도 암행어사 권익관(權益寬)이 글로 임금께 아뢰기를, “남원에 사는 유학(幼學) 이연덕(李延德)은 과거공부에 종사하지 않고 본심을 간직하여 실제로 행동한 사람입니다. 광주에 사는 유학 고한원(高漢元)은 고인이 된 명신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습니다. 보성에 사는 유학 안후상(安後相)은 고인이 된 명유 안방준(安邦俊)의 증손자로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을 만들어 자못 조리에 맞게 운영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을 전조(銓曹, 조선조 때 문관과 무관의 전형(銓衡)을 맡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일컫는 말.)로 하여금 다시 찾아 묻게 하여 재능에 때라 적절히 등용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를 내려 “그렇게 하라”고 답하였다.
비변사(備邊司)의 관문(關文, 조선조 때 상급관청에서 하급관청에 시달하는 공문서 또는 허가서.)에 나옴.
2) 積田面上下民人上書 乙巳十月日 蘇震興文尙質等數百人
伏以民等數百 嗟惜人才之空老 去月巡相巡到之日 仰呈一書 則題辭內莫重㫌褒之典 不可以一丈呈書 率爾啓聞 呈于本官 以爲轉報之地 爲有在果 槩揚善之訓 著於易 㫌淑之義 載於書 非揚善 胡得勸也 不㫌淑 安得勉也 特行之擧 賢良之選 固以是夫 天生才行之士 豈使同腐於草木而已 將以展布其能 俾盡抱畀之重 而野遺之歎 前後相續 谷死之怨 古今不絶者 何哉 盖由於先達者 不爲之引進 窮居者 不求其聞達故也 本郡居士人安後相 乃牛山先生三世孫 而牛山一區 卽先生杖屨之所也 先生基址 後相世守之 先生遺業 後相遵襲焉 其淵源之學 篤實之行 一依前緖 久而不墜 則誠所謂善繼而善述者也 惟其天資純粹 稟性溫嚴 物誘不得以累其志 榮辱不得以動其心 故早謝科業 脫略名利 訓後之方 以孝敬爲主 接人之道 惟以忠厚爲務 平生行事 祛一分之華飾 居常動止 絶片刻之懈怠 聖經賢傳 常作專心之工 外家諸書 不爲閱目之見 隣里皆知敬畏 親戚少無間言 此則修己之行 人所誠服者也 且其所居一面 僻在本邑之一隅 而居民蠢貿 無異禽犢 公於是獨憂之 面人兒子之俊秀者 拔而聚之 先以孝悌之義誘掖之 次以文藝之術提警之 使其豕亥莫辨之徒 便作絃誦不撤之鄕 又此本面高山後擁 大川前帶 人多地窄 田土甚貴 可以官役煩重 貧寒之類 末由支保 居民流散 十室九空 公於是深惕焉 別建一義庫于面中 鳩聚若干財穀 存本取息 幾至千有餘石 然後刱設面中之書室 志學之徒 皆使之登齋 而因以是穀出爲饋師之糧 又以是穀除爲應役之備 面民之貧不能貢稅者 給是穀而備納之 面民之窮不能作農者 給是穀而時播之 婚嫁之愆期者 給是穀而成禮 喪葬之失時者 給是穀而無憾 抄其面中男女之老人 優其歲末米穀之頒給 而又以其餘穀之在庫者 分賑面中 雖値凶歲 賴免流離塡壑之患 如是之故 已散者還歸而奠居 遠居者聞風而爭至 鄕隣莫不慕仰 遠近莫不稱艶 此則及人之澤 衆所心悅者也 嗚呼 陳寔以善行稱於鄕里 而著於遺文者 只純黙而已 石奮以嘉法勑其家重 而載於前史者 惟醇謹而已 其餘關西之夫子 汝南之顔子 皆以超世之行 見推於人 而其飾內及外之法 律己繩人之方 果未知備其綜密 亦如是人也耶 惜乎 在肆之馬 伯樂不顧 跨海之鵬 風力未借 使此濟世長民之才 未免空老於丘壑 杜工部所謂大賢之後 竟凌遲於今爲庶爲淸者 正爲此發也 民等同居一鄕 已知實行之如此 而橡樟奇材 不遇匠石而見棄 則行路之見者 所共嗟惜 故玆將行跡之梗槩 仰陳於觀風察俗之下 伏願閤下特照安後相出人之高行 俯燭民等惜才之公議 馳報營門 俾得襃揚 以爲㫌一勸百之地 千萬幸甚
적전면의 백성들이 관찰사에게 올린 글
을사년(영조 1, 1725) 10월 모일에 소진흥․문상질 등 수백 명이 올림.
삼가 아룁니다. 저희 백성 수백 명은 인재(人才)가 헛되이 늙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지난 달 순상(巡相, 순찰사(巡察使)의 별칭. 순찰사는 조선조 때 도내(道內)의 군무(軍務)를 순찰하는 벼슬인데 각 도의 관찰사(觀察使)가 겸임했다.)이 순시하러 오던 날에 한 통의 글을 올렸는데, 제사(題辭, 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 또는 원서(願書)에 대해 쓰는 관청의 판결(判決)이나 지령(指令)을 말함. 제지(題旨)라고도 한다.) 속에서 “공이 있는 사람을 포상하는 은전은 매우 중요하오. 한 통의 글로 경솔하게 임금께 아뢸 수 없어 본관(本官)에게 보내 대신 보고해주도록 했으니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이오” 하였습니다.
“선을 들춰내라[揚善]”[『주역』 「대유괘(大有卦)」를 보면 “불이 하늘 위에 있는 것이 대유이다. 군자는 이것을 본떠서 악을 막고 선을 발양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명에 순응한다”(火在天上, 大有, 君子以遏惡揚善, 順天休命) 하였다.]는 교훈은 「주역(周易)」에 나타나 있고, “선을 표창하라[旌淑]”[『서경(書經)』「필명편(畢命篇)」에서 “선과 악을 표창하고 구별하여 거주하는 마을을 정표하며 …”(旌別淑慝, 表厥宅里 …)라고 했다.]는 의리는 「서경(書經)」에 실려있으니, 선(善)을 들춰내지 않으면 어찌 권장할 수 있겠으며, 선을 표창하지 않으면 어떻게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특별한 행실을 들추고 어진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이 배출한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어찌 풀이나 나무와 함께 썩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장차 그의 재능을 펼쳐서 품은 포부를 다 드러내도록 해야하건만, 초야에 버려 두었다는 탄식이 계속 이어지고 골짜기에서 죽어 가는 원망이 예나 이제나 끊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개 먼저 영달한 자가 나아가도록 이끌어주지 않고, 곤궁하게 거처하는 자가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은 때문일 것입니다.
본 군에 사는 선비 안후상(安後相)은 바로 우산(牛山: 안방준)선생의 3세손이요데, 우산 땅은 곧 선생이 숨어 학문을 닦던 곳입니다. 선생이 살턴 터를 후상(後相)은 대대로 지켜왔고, 선생의 유업을 후상은 그대로 따라 실천했습니다. 그 연원이 있는 학문과 독실한 행실은 한결같이 선조의 유서를 따라 오래도록 지켜왔으니, 참으로 “잘 계승하고 기술해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타고난 자품은 순진하고 맑았으며 성품은 온유하면서 근엄하여, 사물에 이끌려 자신의 뜻을 얽어매지 않았고, 영욕(榮辱)으로 자기의 마음을 흔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일찍이 과거공부를 그만두어 명예와 이익에 초탈하였고, 후손을 훈계하는 방법은 오로지 효도와 공경으로 주안점을 삼았으며,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는 오직 진실과 후덕으로 힘썼습니다. 평생 일을 할 때에는 조그만 꾸밈도 없었고 평상시의 행동거지에는 약간의 게으름도 들어있지 않았으며, 성현의 경전에 항상 온 마음을 쏟아 공부하였고 외가(外家: 유가 외의 제자백가를 말함)의 글들은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공경할 줄 알았고 친척들은 조금도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으니, 이는 곧 수기(修己)의 행실에 사람들이 참으로 감복한 것입니다.
또 그가 사는 적전면(積田面)은 본 읍의 한쪽 모퉁이에 치우쳐 거주민들이 어리석어 금수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공은 이를 홀로 걱정하여 면민 중에 준수한 아이들을 뽑아 모아 먼저 효제(孝悌)의 의리로 가르쳐 이끌어주고, 다음으로는 문예(文藝)의 기술로 깨우쳐 이끌어줌으로써 시(豕)자와 해(亥)자도 분별하지 못한 무리로 하여금 문득 거문고 타는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 고을에서 살게 만들었습니다.
또 본 면은 높은 산이 뒤에서 감싸고 큰 하천이 앞에 둘러있어 사람은 많으나 땅이 좁고 전답과 농토가 매우 귀하였습니다. 게다가 관아의 부역이 빈번하고 막중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버텨나갈 길이 없었으므로,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10가구 중 9가구는 텅 비었습니다. 공은 이를 깊이 근심하여 별도로 면내에 하나의 의고(義庫)를 세우고 약간의 재물과 곡식을 모아 본전을 지키면서 이자를 길러 거의 천여 섬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뒤에 면내에 서당을 새로 세워 학문에 뜻을 둔 무리로 하여금 모두 서당에 입학하도록 하고, 이어 이 곡식을 스승을 대접하는 양식으로 내주었으며, 또 이 곡식을 부역을 면제하는 비용으로 썼습니다.
가난하여 세금을 낼 수 없는 면민에게 이 곡식을 주어 채워서 납부하게 했고, 궁핍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면민에게 이 곡식을 주어 때에 맞게 파종하도록 했으며, 혼인의 시기를 놓친 사람에게 이 곡식을 주어 혼례를 치르도록 했고, 상례나 장례의 시기를 놓친 사람에게도 이 곡식을 주어 서운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면민 중에 남녀 노인들을 뽑아 연말에 쌀과 곡식을 넉넉하게 나눠주었을 뿐만 아니라, 또 창고에 남은 곡식을 면민에게 분배하여 구휼하니 비록 흉년을 만난다하더라도 이에 힘입어 유리걸식하다가 골짜기에서 굶어죽는 걱정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으로 이미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와 터를 잡아 살고 먼 곳에 살던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다투어 찾아들었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흠모하거나 추앙하지 않음이 없었고 원근 사람들도 칭송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남에게 베푼 은택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기뻐한 것입니다.
아! 진식(陳寔, 자는 중궁(仲弓), 후한(後漢) 말의 지방관으로 영천(潁川) 사람이다. 환제(桓帝)때 대구현장(大丘縣長)이 되었는데 송사(訟事)를 판정함에 지극히 공정하였다. 양상군자(梁上君子)를 훈계한 고사로 유명함.)은 선한 행실로 향리에서 칭송을 받았으나 남긴 글에 나타난 것은 단지 순묵(純黙: 순수하고 고요함)하다 할 따름이요, 석분(石奮, 한(漢)나라 온(溫) 땅 사람. 15세에 소리(小吏)가 되어 고조(高祖)를 모셨고, 문제(文帝) 때에는 공을 쌓아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으며, 경제(景帝) 때는 구경(九卿)이 되었다. 경제는 그를 만석군(萬石君)이라 부르고 상대부(上大夫)의 녹봉을 주어 집으로 돌아가 봉양을 받도록 배려했다. 그의 네 아들은 모두 순행효근(馴行孝謹)으로 이름 나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렀다 함.)은 아름다운 법으로 집안 사람들을 단속하였으나 이전의 역사에 실린 것은 오직 순근(醇謹: 온후하고 신중함)하다 할 뿐입니다. 그 나머지 관서(關西)의 부자(夫子)와 여남(汝南)의 안자(顔子)도 모두 세속을 초탈한 행실로 사람들에게 추앙 받았으나, 속마음을 추슬러 밖으로 행동하고 자기를 단속하여 남을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과연 이 사람들처럼 치밀하게 갖추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애석하게도 마구간에 있는 말[馬]을 백락(伯樂)이 보살펴주지 않고[한퇴지(韓退之)의 「잡설(雜說)」을 보면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은 뒤에 천리마(千里馬)가 있게 된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지 않다 …”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은 주(周)나라 때 말을 잘 감정(鑑定)한 사람으로 본명은 손양(孫陽)이다. 천리마는 준마인데 재능이 있는 인재에 비유된다.], 바다를 넘는 붕새[鵬]는 바람의 힘을 빌리지 못하니[『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을 보면,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어 그 이름을 곤(鯤)이라 하는데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그것이 변화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새(鵬)라 하며, 이 붕새의 등 넓이도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를 못한다. 이 새가 한번 기운을 내어 날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일 때 남쪽 바다로 옮겨가려고 한다. …” 하였다.], 세상을 구제하여 백성을 길러줄 인재로 하여금 산골짜기에서 헛되이 늙도록 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두공부(杜工部, 당나라 시인(詩人) 두보(杜甫)를 말함. 자는 자미(子美), 자칭 소릉야로(少陵野老), 두릉포의(杜陵布衣)라 하였고 세상사람들은 두소릉(杜少陵)이라 불렀다.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의 저술을 남겼다.)가 이른바 “대현(大賢)의 후손이 끝내 능지처참 당하니 오늘날 모든 이가 청빈한 가문이 되었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저희 백성들은 한 고을에 모여 살면서 이미 그의 실제 행실이 이와 같음을 알고 있는데, 녹나무와 같은 기이한 재목이 훌륭한 장인[匠]을 만나지 못해 버림을 당한다면, 길을 가는 사람이 이를 보고 모두 안타까워할 것이므로 행적의 대강을 적어서 삼가 풍속을 관찰하시는 분께 아룁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합하(閤下)께서 안후상(安後相)의 남보다 뛰어난 고결한 행실을 특별히 알아주고 백성들의 인재를 아끼는 공정한 의견을 굽어살펴, 영문(營門)에 급히 보고하여 포상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한 사람을 표창하여 백 사람을 권면하는[旌一勸百] 계기로 삼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3) 幼學蘇東聖李定鎭朴守根等上書 辛卯三月
夫有絶倫之行 超世之才 而生未展經綸之大抱 死未蒙㫌褒之盛典 草木同腐 漸至於泯沒 則其爲鄕人之慨惜 公議之抑鬱者 果何如哉 本郡之故士人安公後相 卽牛山先生之三世孫 而克紹先業者也 其淵源之學 篤實之行 有所傳述 而惟其天資純粹 稟性溫嚴 早襲家庭之訓 不事擧業 專心實學 日用行事 務去邊幅 居常動止 皆有實踐 以孝悌訓後 以忠厚接人 鄕里皆知敬畏 士友稱爲師表 此則平生學問之略也 且其所居面 僻在窮峽 居民甚愚 不識長上之義 公於是拔聚其凡民之俊異者 訓以孝敬 敎以文藝 使知事親敬長之道 人多地狹 居民無以爲生 公於是別設鄕約社倉於面中 鳩聚若干穀 存本取息 幾至千有餘石 然後創立書塾 使志學之徒 皆爲受敎 而除出是穀 爲饋師之糧 其餘面民之貧不能貢稅者 窮不能作農者 嫁娶之愆期者 喪葬之失時者 皆以是穀而責應 若値凶歲 則以其餘穀分賑面中 使得免遊離塡壑之患 以此之故 散者還集 聞者爭來 鄕隣莫不悅服 遠近莫不欽慕 此則平生及人之德也 去乙巳年間 巡相及御史 以公才行薦聞于朝 幾至甄用之境 而公忽棄世 事未施行焉 鄕人至今嗟惜之 嗚呼 以公出人之行 幹時之才 若使見用於世 則其律人之繩墨 長民之規模 不但止於一面一鄕 而素蘊未布 只得爲一鄕之善士 則此豈非邦國之不幸也耶 竊伏念朝家待賢之道 逈出前代 雖在沒世之後 自有㫌褒之典 則此實勸善之至意 而惟此安公之懿行盛澤 照人耳目 愈久而難忘 不勝抑鬱之情 敢陳梗槪於觀察之下 伏願巡相閤下特察安公之學行 俯燭生等之公議 論啓天門 俾得㫌褒之典 千萬懇祝之至
유학 소동성․이정진․박수근 등이 관찰사에게 올린 글
신묘년(1771) 3월
대저 남보다 뛰어난 행실과 세속을 초탈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살아서는 크게 품은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죽어서는 표창하여 포상하는 성대한 은전을 입지 못한 채 초목과 함께 썩다가 점차 잊혀져 없어지게 된다면, 고을 사람들의 안타까움과 공론(公論)의 억눌림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작고한 본 군(郡) 출신 선비 안후상(安後相)은 곧 우산(牛山: 안방준)선생의 3세손으로 선조의 유업을 잘 이은 사람입니다. 그의 연원이 있는 학문과 독실한 행적은 가전(家傳)된 기풍을 계승한 바 있습니다.
그의 타고난 자품은 순진하고 맑았으며 성품은 온유하면서 근엄하였습니다.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과거공부에 종사하지 않고 실학(實學)에 전념하여, 날마다 일을 행할 때에 외양만 꾸미지 않았고 일상의 행동거지를 모두 참되게 행하였습니다. 효도와 공손함으로 후손을 가르치고 진실과 후덕함으로 사람을 대접하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공경할 줄 알았고 사우(士友)들은 사표(師表)로 칭송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한평생 학문의 줄거리입니다.
또 그가 살았던 적전면(積田面)은 궁벽한 골짜기에 치우쳐 거주민들이 매우 어리석어 윗사람을 섬기는 의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공은 이에 면민 중에 준수한 아이들을 뽑아 모아 효도와 공경으로 훈계하고 문예(文藝)로 가르쳐,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많고 땅은 좁아 거주민들이 살 수 없게되자, 공은 면내에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을 별도로 설립하고 약간의 곡식을 모아 본전을 지키면서 이자를 길러 거의 천여 섬에 만들었습니다. 그런 뒤에 서당을 새로 세워 학문에 뜻을 둔 무리로 하여금 모두 가르침을 받도록 하고, 이 곡식을 덜어서 스승을 대접하는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그 나머지는 면민 중에서 가난하여 세금을 낼 수 없는 자, 궁핍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자, 시집가고 장가드는 시기를 놓친 자, 상례나 장례의 시기를 놓친 자에게 모두 이 곡식을 나눠주어 잘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흉년을 만나면 그 나머지 곡식을 면민에게 분배하여 구휼함으로써 유리걸식하다가 골짜기에서 굶어죽는 걱정을 면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와 모이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들었으며, 고을 사람들은 기뻐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고 원근 사람들도 흠모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한평생 남에게 베푼 덕(德)입니다.
지난 을사년(영조 1, 1725) 간에 순찰사와 암행어사가 공의 재주와 행실을 조정에 알려 거의 등용이 될 뻔하였으나, 공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일이 시행되지 못하게 되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 공의 남보다 뛰어난 행실과 시국을 경륜하는 재주가 세상에 쓰이게 되었더라면, 사람을 다스리는 규범과 백성을 기르는 규모가 일개 면이나 고을에만 그치지 않았을 터인데, 평소의 포부를 펴지도 못한 채 한 고을의 선사(善士)가 되었을 뿐이니, 이 어찌 나라의 불행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조정에서 현인을 대우하는 도리는 이전 시대보다 훨씬 나아져 비록 세상을 떠난 뒷일지라도 저절로 포상하여 기리는 은전이 있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선(善)을 권장하는 지극한 뜻입니다. 이 안공의 아름다운 행실과 성대한 혜택은 사람들의 눈과 귀에 익숙하여 오래되어도 잊기 어려웠기에, 답답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풍속을 관찰하시는 분께 대강을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순찰사 합하(閤下)께서 안공의 학문과 행실을 특별히 살펴주고 저희들의 공정한 의견을 굽어살펴서, 조정에 아뢰어 포상의 은전을 받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4) 邑誌一段
安後相邦俊曾孫 才器兼備 不墜家庭之學 以孝悌之義誘掖人才 創立義庫以資公私 御史及道臣 連爲襃啓 命銓曹調用 未及蒙恩而卒
「읍지」 실린 한 단락
안후상(安後相)은 안방준(安邦俊)의 증손자이다. 재능과 국량(局量)을 함께 갖추어 가정의 학문을 잘 이어 효도와 공손의 의리로 인재를 가르치고 이끌어주었으며, 의고(義庫)를 창립하여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암행어사와 도신(道臣: 관찰사의 다른 이름)이 잇달아 포상을 청하는 장계를 올리니, 전조(銓曹)에 명하여 적절히 등용하도록 하였으나 성은을 입지 못한 채 죽었다.
5) 行 狀
公諱後相字益卿 姓安氏竹山人 牛山先生之曾孫也 先生嘗手植八梅 而爲壇於屋東溪上 公爲之修築 而日常盤桓於其地 以寓羹牆之慕 鄕人稱之曰梅溪處士 祖諱逸之 於先生爲第五子也 篤志好學 先生甚器重之 不幸早世 考諱崴 奉偏母至孝 鄕隣咸稱服之 妣光山李氏 諱嵂之女也 以顯廟乙巳 十二月初二日生公 幼有美質 屹如成人儀度 聰穎異凡 不煩敎督 文辭日進 及長慨然自奮曰 我曾王父 以儒賢名於世 余不克遵前烈 其孰曰某有後乎 遂不屑意於擧子業 專心性理之學 先用力於四書 而後及六經 外家諸書 罕接於目也 有士友至 略敍寒暄 輒取經傳 疑晦之旨 發難叩問 亹亹不輟 時人長短 守令得失 未嘗一出於口矣 前後居憂 喪制一遵朱文公家禮 有庶弟七人 極其恩愛 導之以義方 皆有以變化 而得其歡心焉 所居積田一面 僻處窮峽 田土甚窄 民無恒産 不能安堵 人皆不學 習俗貿貿 公乃憂之 略倣藍田鄕約 石潭社倉之法 創立義庫 鳩聚若干穀 累年存息 幾至千餘斛 然後立學齋 擇學識 可以爲人模楷者 爲之師 出是穀饋之 聚面人子弟之俊秀者 皆令就學 於是隣近之士 亦有來會者 公常至學齋 正衣冠 置几案 招致學徒 講學討論 考其勤惰 而課督之 不過十餘年 風俗大變 文學蔚興焉 面中之人 窮不能作農貢稅 與夫婚嫁之愆期 喪葬之失時者 亦皆賑給 歲末必以米饌 分惠耆老 每値荒年 接濟其凍餒 人皆曰 古范氏之義庄 只及於同宗 而今此安氏之義庫 遍及於一面之多人 較其設施敎誨 尤大且厚云 公嘗患瘧疾 沈痼三年 面人之至門問疾者 日日如市 後疾愈 老少咸集 爲之設宴而相慶也 景廟辛丑 御史以公才行聞于朝 至蒙收用之命 乙巳邑之多士 又薦公于郡 郡轉聞于巡相 巡相乃啓于朝 未及霑一命 而越明年 公奄棄世 卽丙午正月初七日也 壽六十二 葬于牛山下負乙之原 及公之歿 雖愚夫愚婦 莫不奔走悲號 如喪怙恃 及葬各持奠具 挽紼來哭 喪畢之後 一面合議 欲立祠面中 用報嘉惠之萬一 而本家止之 不得遂焉 寔遵公遺誡也 公凡三娶 元配昌寧曺氏爾泰之女 有二男一女 男長世霖 次世楫 篤孝友好學問 女適崔彦哲 次配咸陽朴氏世中之女 有一女 適李鳳文 季配光山金氏枰之女 有一女 適鄭孝 側出男世車 長房三男昌徵昌賢昌學 二女沈琦梁達泓 次房四男昌奎昌燁昌勳昌重 四女林達遠金舃李象益李可郁 世車二男昌猷昌立 一女高應極 外孫德祚喆祚鄭時喆金時寬妻 李壻出 日喆俊喆奇聖文妻 鄭壻出 內外曾玄 略不盡錄 公天分絶高 溫雅純粹 於勢利芬華 視之泊如也 居家率以禮法 處事動有規模 服膺先訓 食息靡懈 敎子弟必以孝敬 待宗族必以誠信 家雖不贍 至於救灾恤患 曲盡恩義 而不以煦煦爲仁也 見人之善者 輒喜而亟稱之 遇其不善者 諄諄開譬 誠意藹然於辭氣之間 隣里多感悟而化之 自御史襃啓之後 常以聲名爲憂 飭子弟不得出入洛下及道內 近名之事 要譽之施 一切恥而不爲也 又慮身後 公論之發 臨歿遺誡二子曰 生不勤學 名欺一世 追思先烈 失墜旣多 我死之後 勿求人知 增我罪尤 人之自衒其行 能何以異處女之求婚也 嗚呼 公之平生 德行固不止此 而不肖無識 無以盡其用心行己之大致 僅就在人耳目者 撰次如右 以俟君子之袞筆 傳諸來裔云爾
歲癸丑三月日 不肖孫昌勳 謹識
행 장
공의 휘(諱)는 후상(後相)이요 자(字)는 익경(益卿)이요 성은 안씨(安氏)요 본관은 죽산(竹山)이니 우산(牛山)선생의 증손자이다. 선생이 일찍이 손수 여덟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집 동쪽 시내 위에 단(壇)을 만들었는데, 공은 이를 고쳐 쌓고 날마다 그곳을 배회하며 남몰래 갱장(羹牆)의 흠모[몹시 추앙하여 사모한다는 뜻.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을 보면,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 순(舜) 임금은 3년 동안 추앙하여 사모했는데, 앉으면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국[羹]에서 보았다” 하였다.]를 쏟으니, 고을사람들이 ‘매계처사(梅溪處士)’라고 불렀다.
할아버지 휘(諱) 일지(逸之)는 선생의 다섯째 아들인데, 독실한 뜻으로 학문을 좋아하니 선생이 큰그릇으로 여겨 크게 기대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휘(諱) 외(崴)는 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여 고을의 이웃들이 모두 칭송하였고, 어머니는 광산이씨(光山李氏) 휘(諱) 율(嵂)의 딸이다. 현종 을사년(1665) 12월 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을 보여 우뚝 솟은 산처럼 어른다운 몸가짐을 지녔고, 총명함이 범인과 달라서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문장이 날로 진취하였다. 장성하자 스스로 분발하여 이르기를, “우리 증조(曾祖)께서 어진 선비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으니, 내가 능히 선대의 행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누가 아무개에게 후손다운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과거(科擧)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하여 먼저 사서(四書)를 공부한 후에 육경(六經, 여섯 가지 경서. 곧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 『예기(禮記)』․『악기(樂記)』. 『악기』는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에 없어지고 지금은 오경(五經)만 남아있다.)을 읽었으며 외가서(外家書, 유가(儒家)의 경전 외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 곧 『노자(老子)』 『장자(莊子)』 『묵자(墨子)』 『한비자(韓非子)』 따위.)들은 거의 보지 않았다.
선비가 찾아오면 간략하게 안부를 물은 후에 곧 경전(經傳)의 의심난 뜻을 질문하여 논란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당시 사람들의 장단점이나 수령(守令)들의 잘잘못을 한번도 입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부모의 상을 치를 때에 상중의 복제(服制)를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문공은 주자의 시호)의 『가례(家禮)』에 따랐고, 서제(庶弟) 7명에게 극진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의로운 방법으로 이끌어주니, 모두 변화하여 마음으로 즐거워했다.
거주해온 적전면(積田面: 현재 보성군 문덕면의 옛 이름)은 궁벽한 골짜기로 농토가 매우 협소하여 백성들은 일정한 산업(産業)이 없어 편안히 살 수 없었고, 사람들은 모두 배우지 못해 습속(習俗)이 어두웠다. 공은 이를 염려하여 남전(藍田)의 향약(鄕約)[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藍田)에서 태어난 여대균(呂大鈞)이 만 든 향촌사회의 규약을 말함.]과 석담(石潭)의 사창(社倉)[석담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살던 곳으로 해주(海州)에 있다. 사창은 조선조에 지방의 각 촌락에 설치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으로 의창(義倉)과 같은 성질의 기관이지만, 의창은 국가가 경영하고 사창은 사(社: 행정 단위로 지금의 面)가 경영했다. 그 내용은 첫째, 고곡(古穀)을 대출하고 무이식(無利殖)으로 신곡을 받는 것, 둘째,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아들이는 것, 셋째,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아들 이는 등 곡식으로 구호하는 것이다. 원래 사창 제도는 주자(朱子)가 제창하여 송(宋)나라에 시행되었던 것이다.]의 법을 본받아 의고(義庫, 곡식을 백성에게 의롭게 쓰기 위하여 만든 창고인데, 고려시대에 빈민의 구호 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를 의제고(義濟庫)라 했다.)를 창립하고 약간의 곡식을 모아 여러 해 이자를 불려 거의 천여 섬에 이른 뒤에 학재(學齋: 학문을 닦는 서당, 곧 목미암)를 세우고 학식(學識)이 남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골라 스승으로 삼아 곡식을 내어 음식을 대접하고 면내의 준수한 자제들을 모아 다 취학하게 하니, 인근의 선비들도 또한 찾아와 모인 자가 있었다.
공은 항상 학재(學齋)에 들러 의관을 정제하고 책상을 놓고서 학도(學徒)들을 불러들여 강학하고 토론하였으며, 부지런했는지 게을렀는지를 살펴서 일과를 정해 감독하니,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풍속이 크게 변하고 문학(文學)이 성하게 일어났다. 면민(面民) 중에 곤궁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거나 세금을 내지 못한 자, 그리고 혼인할 때를 놓치거나 장례를 치를 때를 잃은 자도 모두 구휼하였고, 연말에는 반드시 쌀과 반찬을 노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흉년을 만날 때마다 추위에 떨거나 굶주리는 자를 구제하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옛날 범씨(范氏)의 의장(義庄)[범씨는 북송(北宋) 초기의 명재상인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자 (字)는 희문(希文),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 호가 내려왔고 공자(孔子)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을 보면 “선생은 안으로는 강직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웠으며 뭇사람을 사랑하고 선행을 즐겼다. 베 풀기를 좋아하여 마을에 의장(義莊)을 설치하고 일가 종족들을 넉넉하게 보살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일컫기를 좋아하였다”고 적혀있다.]은 다만 같은 종족에게만 혜택이 미쳤으나, 지금 이 안씨의 의고(義庫)는 많은 면민들에게 미쳤으니, 그 시행한 규모나 가르친 방법을 비교해보면 더욱 크고 또 두텁다” 하였다.
공이 일찍이 학질(瘧疾)을 앓아 3년 동안 고생하니 집을 찾아와 문병한 면민들이 매일 저자거리를 이룰 정도였는데, 그 후 병이 낫자 노소(老少)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베풀고 서로 경하하였다. 경종(景宗) 신축년(1721)에 암행어사가 공의 재주와 행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거두어 쓰라는 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을사년(1725)에는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또 공을 군(郡)에 천거하였고 군에서는 다시 순상(巡相, 지방의 정치와 민정을 살피는 임시직 순찰사.)에게 보고하였으며 순상이 마침내 조정에 아뢰었으나, 미처 임금의 하명을 한 차례도 받지 못하고 이듬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바로 병오년(숙종 2, 1726) 정월 7일이었다. 향년이 62세였고 우산(牛山) 아래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공이 세상을 뜨자, 비록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도 모두 달려와 슬피 울며 마치 부모를 잃은 것처럼 하였고, 장사를 지내는 날에는 각각 제물을 가지고 와 전(奠)을 올리고 상여 줄을 끌며 통곡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온 면민이 의견을 모아 면내에 사당(祠堂)을 세워 베풀어준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했으나, 본가에서 그만두게 하여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이는 실로 공의 유훈을 따른 것이다.
공은 모두 세 차례 장가를 들었다. 첫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이태(爾泰)의 딸로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세림(世霖), 차남은 세집(世楫)이니 효우가 돈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딸은 최언철(崔彦哲)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은 함양박씨(咸陽朴氏) 세중(世中)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이봉문(李鳳文)에게 시집갔다. 셋째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평(枰)의 딸로 1녀를 두었는데 정효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난 아들로 세거(世車)가 있다. 장남이 낳은 세 아들은 창징(昌徵)․창현(昌賢)․창학(昌學)이요, 두 딸은 심기(沈琦)․양달홍(梁達泓)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네 아들은 창규(昌奎)․창엽(昌燁)․창훈(昌勳)․창중(昌重)이요, 네 딸은 임달원․김석․이상익․이가욱에게 시집갔다. 세거(世車)가 낳은 두 아들은 창유(昌猷)․창립(昌立)이요, 딸은 고응극(高應極)에게 시집갔다. 외손인 덕조(德祚)․철조(喆祚), 정시철(鄭時喆)․김시관(金時寬)의 처는 사위 이봉문이 낳았고, 일철(日喆)․준철(俊喆), 기성문(奇聖文)의 처는 사위 정효가 낳았다.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은 다 적지 못하고 생략한다.
공은 천품이 매우 높아 온아(溫雅)하고 순수(純粹)하여 권세와 이익, 화려함과 영화로움을 담박하게 보았다. 집안을 예법(禮法)으로 통솔하고 일 처리마다 규모가 있었으며, 선조의 유훈을 가슴에 간직하여 먹을 때나 쉴 때나 게으름이 없었다. 자제(子弟)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효경(孝敬: 효도와 공경)을 앞세우고, 종족을 대할 때는 반드시 성신(誠信: 진실과 신의)을 내세웠다. 살림이 비록 넉넉지 못했으나 재앙을 구제하고 환란을 구휼하는 데 이르러서는 은의(恩義: 은혜와 의리)를 곡진히 펴되, 자그마한 은혜를 베푼 것으로 인(仁: 넓고 지극한 사랑)을 행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남의 선행을 보면 기뻐하여 자주 칭찬하고 선하지 못한 자를 만나면 타이르고 깨우치니, 진실한 뜻이 말투[辭氣]에 넘쳐흘러 많은 이웃들이 감동하여 교화되었다.
암행어사가 포상해 주길 아뢴 뒤로는 항상 명성(名聲)을 탐할까 우려하여 자제들을 타일러 서울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고, 도내에서도 명성을 가까이 하는 일이나 명예를 구하는 행위에 대해 수치로 여겨 일절 접촉하지 않았다. 또 사후의 공론(公論)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임종할 무렵에 두 아들에게 유훈을 내리기를, “살아서 부지런히 학문을 닦지 못해 한 세상에 이름을 속였으니, 선조의 업적을 다시 생각해봄에 실추한 점이 이미 많았구나. 내가 죽은 뒤에 남이 알아주길 구하여 나에게 죄와 허물을 더하지 말라. 사람이 자기의 행실과 재능을 스스로 자랑한다면 처녀가 혼처를 구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느냐?” 하였다.
아! 공의 평생의 덕행(德行)은 진실로 이에 그치지 않지만, 불초(不肖)한 내가 아는 게 없어 그 마음씀과 몸소 행한 대강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겨우 사람들이 보고들은 것에 입각하여 위와 같이 엮어서, 훗날 군자(君子)들의 훌륭한 기록을 기다려 후손들에게 전하려고 한다.
계축년(정조 17, 1793) 3월 모일에 불초 손자 창훈(昌勳)이 삼가 적음.
6) 墓誌銘幷序
牛山安先生 嘗於屋東溪上植八梅而築一壇 殊有考槃之趣 迄百載而媵馥不沫 公以先生曾孫 乃修治舊壇 愛護古梅 徜徉乎其中 以寓羹牆之慕 鄕人稱公以梅溪處士 噫 公之淸標雅操 克趾其美者 槩可以想像矣 後之欲知公者 盍亦於此觀之哉 公諱後相字益卿 系出竹山 高麗門下侍中竹城君文惠公元衡爲鼻祖 歷一世有諱挺生 入仕我朝寶文閣直提學 自是簪組相承 至諱重敦中司馬兩試 登第未及唱榜而歿 寔公高祖也 曾祖諱邦俊 自號隱峰 世稱牛山 官參議贈吏曹參判 道德節義 爲後學所尊慕 祖諱逸之通德郞 篤志好學 隱峰大加器重 不幸早卒 考諱崴 事親至孝 鄕隣稱服 妣光山李氏 學生嵂之女 公以顯廟乙巳十一月初二日生 聰穎超凡 課業不煩敎督而日就 及長慨然自奮曰 我曾王父以儒賢名於世 余不克遵前烈 其孰曰某有後乎 遂不事公車業 專意於劬書飭躬 惟於經籍 孶孶不已 外家諸書 罕接於目 士友相對 輒講質不倦焉 所居積田之坊 僻在峽裏 農土甚窄 民多失業 亦不暇於從事文學 習俗極其貿貿 公甚憂之 乃略倣藍田鄕約石潭社倉之法 創立義庫 貯穀至千餘斛而後 爰設學齋 求其學識可爲人模楷者 爲之師 而出是穀餽之 使敎坊內之村秀 於是隣境士子來從者亦衆 公頻至齋中 儼然正坐 聚其學徒 相與講劘 而考其勤惰 嚴加警勉 不踰十數年 蚩俗丕變 儒學蔚興矣 鄕人之甚窶者 則於其公稅之逋 婚嫁之時 喪葬之際 皆有所軫恤惠助 歲末必以米肉分饋耆老 每値荒年 賑救凍餒 遠近聞者 莫不興歎曰 古之范氏義庄 惠及宗黨而已 今安氏之義庫 澤遍一鄕 況有敎學之補 尤豈不偉哉 公嘗患瘧沈篤 鄕里士民之來問者 逐日如市 及其疾愈 老少咸集 爲之設宴而相慶 公之德義施於人 而見孚之深者 有如是焉 景廟辛丑 御史以公才行聞于朝 至蒙收用之命 乙巳因邑士之呈籲 有刺史之薦啓 而未及獲受一命 丙午壽六十二而卒於正月初七日 葬于牛山下負乙之原 初配昌寧曺氏爾泰之女 中室密陽朴氏世中之女 三娶光山金氏枰之女 曺氏朴氏祔葬公墓 金氏葬于兆下 男世霖世楫女崔彦哲曺氏出 女李鳳文朴氏出 女鄭孝金氏出 側出男世車 長房三男昌徵昌賢昌學 二女沈琦梁達泓 次房四男昌奎昌燁昌勳昌重 四女林達遠金舃李象益李可郁 世車二男昌猷昌立 一女高應極 李壻男德祚喆祚 女金時寬 鄭壻男日喆俊喆 女奇聖文 內外曾玄摠若干 公資稟溫粹 孝友篤至 前後丁憂哀戚甚 執喪盡禮 殯窆饋奠之節 一遵文公家禮 平居佩服先訓 誨飭後生 必從孝謹誠信上做去 與庶弟七人相處 極其恩愛而導率以義 皆有利得其歡心 持身而克循規度 接物而不設畛域 尤致意於睦婣任恤之義 其所周窮而救灾者 靡不用極 一語未嘗及於人之長短得失 見人之善 必喜而亟稱之 遇其不善者 諄諄曉譬 誠意藹然 以致其感服開悟 及歿鄕隣之人 雖愚夫愚婦 擧皆相聚悲號 而葬時持奠挽紼者亦多 公於勢利紛華 視之若浼 至如近名要譽之事 深惡而痛絶之 自繡衣薦聞之後 益嫌其聲名之播 乃飭子弟使不得從遊洛下 臨終遺戒二胤曰 生不勤學 名欺一世 追思先烈 墜失已多 我死之後 勿求人知 增我罪尤 及喪畢 一鄕發議 將立祠坊內以報嘉惠 而本家止之 寔體公遺意也 嗚呼 以公才行之卓 德義之厚 而所以施于家庭 行乎鄕里者 有不尋常 乃至於生而有薦剡之登 歿而有祭祀之擬 凡所誦慕 久而無斁 惟其不能大展所蘊於當世者 雖若可恨 而視彼世人之徒得浮榮 終至澌滅者 奚翅霄壤之相懸哉 公之孫昌勳 錄公行蹟一通 遣其子姪之從我遊者 托以幽竁之銘 顧何可孤其勤意 遂爲之敍 而系以辭曰 鄕人稱以梅溪翁 允矣襲賢祖之遺芬 義倉設而學齋建 美哉法前修而遹遵 宜其德義之所被 歿而有祭社之物論 惟徽蹟何必盡記 我撮其大而銘幽墳
崇禎後三丙辰孟冬 德恩宋煥箕 撰
묘지명서문을 덧붙임
우산(牛山) 안(安) 선생이 일찍이 집안 동쪽 시내 위에다 여덟 그루의 매화를 심고 하나의 단(壇)을 쌓으니, 자못 고반(考槃)의 지취(志趣)[현자(賢者)가 은거하여 산수(山水)의 사이를 돌아다니며 즐기는 뜻을 말함. 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장을 보면, “즐겁구나! 산골짜기. 그대의 마음은 너그러워라[考槃在澗, 碩人之寬]” 하였다.]가 있었는데 이로부터 백여 년이 지나도록 남은 향기가 없어지지 않았다. 공이 선생의 증손자로 옛날의 단(壇)을 다시 고쳐 쌓고 오래된 매화를 사랑하여 그곳을 배회하면서 갱장(羹牆)의 흠모[몹시 추앙하여 사모한다는 뜻.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을 보 면,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 순(舜) 임금은 3년 동안 추앙하여 사모했는데, 앉으면 요 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국[羹]에서 보았다” 하였다.]를 쏟으니, 고을 사람들은 공을 매계처사(梅溪處士)라 불렀다. 아! 공의 맑은 풍채와 아름다운 조행은 선조의 미덕을 잘 이었음을 상상할 수 있으니, 훗날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어찌 또한 여기에서 살펴보지 않으랴?
공의 휘(諱)는 후상(後相)이요 자(字)는 익경(益卿)이다. 선계는 죽산(竹山)에서 나왔는데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이 시조가 된다. 1세(世)를 지나 휘(諱) 정생(挺生)이 우리 조정(조선조)에 벼슬을 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이 되었고, 이로부터 벼슬아치가 끊이지 않았다. 휘(諱) 중돈(重敦)은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과거에 올랐으나 미처 합격자를 발표하기도 전에 세상을 뜨니 이 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諱)는 방준(邦俊)인데 스스로 호를 은봉(隱峰)이라 했고 세상 사람들은 우산(牛山)이라 불렀다. 공조참의(工曹參議)의 벼슬을 지내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도덕(道德)과 절의(節義)가 뛰어나 후학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휘는 일지(逸之)로 통덕랑(通德郞)인데 독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좋아하여 은봉이 크게 기대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떴다. 아버지의 휘는 외(崴)인데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고을 사람들이 칭송하고 감복하였으며, 어머니 광산이씨(光山李氏)는 학생(學生) 율(嵂)의 딸이다.
공은 현종(顯宗) 을사년(1665) 11월 초 2일에 태어났다. 공은 총명함이 범인보다 훨씬 뛰어나 학업을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날로 진취하였다. 장성하자 스스로 분발하여 이르기를, “우리 증조(曾祖)께서 어진 선비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으니, 내가 능히 선대의 행적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누가 아무개에게 후손다운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과거(科擧)공부에 종사하지 않고 힘써 글을 읽고 몸을 삼가는 데 전념하였다. 오직 경서(經書)를 부지런히 공부할 뿐 외가서[外家書: 유가(儒家)의 경전 외에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들은 거의 보지 않았으며, 선비와 서로 마주하면 곧 강론하고 질문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거주해온 적전(積田: 현재 보성군 문덕면) 고을은 궁벽한 골짜기에 위치하여 농토가 매우 협소했으므로, 백성들은 대부분 생업을 잃었고 또한 학문에 종사할 겨를이 없어 습속(習俗)이 몹시 어두웠다. 공은 이를 깊이 우려하여 곧 남전(藍田)의 향약(鄕約)[중국 섬서성(陝西省) 남전(藍田)에서 태어난 여대균(呂大鈞)이 만든 향촌사회의 규약을 말함.]과 석담(石潭)의 사창(社倉)[석담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살던 곳으로 해주(海州)에 있다. 사창은 조선조에 지방의 각 촌락에 설치된 일종의 곡물 대여기관으로 의창(義倉)과 같은 성질의 기관이지만, 의창은 국가가 경영하고 사창은 사(社: 행정 단위로 지금의 面)가 경영했다. 그 내용은 첫째, 고곡(古穀)을 대출하고 무이식(無利殖)으로 신곡을 받는 것, 둘째, 곡물을 대여하여 이자만 받아들이는 것, 셋째, 춘궁기에 대출하여 가을에 이식과 함께 받아들 이는 등 곡식으로 구호하는 것이다. 원래 사창 제도는 주자(朱子)가 제창하여 송(宋)나라에 시행되었던 것이다.]의 법을 본받아 의고(義庫: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창고)를 창립하고 곡식 천여 섬을 모은 뒤에 학재[學齋: 학문을 닦는 서당, 곧 목미암(木美菴)]를 세웠으며, 학식(學識)이 남의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구하여 스승으로 삼아 곡식을 내어 음식을 대접하고 고을의 준수한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니, 인근의 선비들도 찾아온 자가 많았다.
공은 자주 학재(學齋)에 들러 근엄한 모습으로 바르게 앉아 학도(學徒)들을 모아놓고 서로 강론하였으며, 부지런했는지 게을렀는지를 살펴서 엄중히 경책(警責)하고 권면(勸勉)하니,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어리석은 풍속이 크게 변하고 선비의 학문이 성하게 일어났다. 고을 사람 중에 매우 곤궁한 자가 공세(公稅: 국가에 바치는 세금)를 내지 못하거나 혼인할 때를 놓치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되면 모두 구휼하여 넉넉히 도와주었고, 연말에는 반드시 쌀과 고기를 노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흉년을 만날 때마다 추위에 떨거나 굶주리는 자를 구제하니, 원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여 말하기를, “옛날 범씨(范氏)의 의장(義庄)은 같은 종족에게만 혜택이 미쳤을 뿐인데, 지금 이 안씨(安氏)의 의고(義庫)는 한 고을에 은택이 두루 미쳤고, 더구나 학문을 가르치는 도움을 주었으니 한층 위대하지 않는가?” 하였다.
공이 일찍이 학질(瘧疾)을 앓아 몹시 고생하니 찾아와 문병한 고을의 사민(士民)들이 매일 저자거리를 이룰 정도였는데, 그 후 병이 낫자 노소(老少)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베풀고 서로 경하하였다. 공의 덕의(德義: 학덕과 의로움)가 사람들에게 베풀어져 깊은 신망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경종(景宗) 신축년(1721)에 암행어사가 공의 재주와 행실을 조정에 보고하여 “거두어 등용하라”는 하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을사년(1725)에는 고을 선비들의 천거로 인해 자사(刺史: 관찰사)가 추천하는 장계(狀啓)를 올렸으나, 미처 임금의 하명을 한 차례도 받지 못하고 병오년(영조 2, 1726) 정월 7일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떴다. 우산(牛山) 아래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첫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曺氏) 이태(爾泰)의 딸이요, 둘째 부인은 함양박씨(咸陽朴氏) 세중(世中)의 딸이요, 셋째 부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평(枰)의 딸인데, 조씨와 박씨는 공의 묘소에 합장하고 김씨는 묘소 아래에 장사지냈다. 아들 세림(世霖)․세집(世楫)과 딸 최언철(崔彦哲)의 처는 조씨가 낳았고, 딸 이봉문(李鳳文)의 처는 박씨가 낳았으며, 딸 정효의 처는 김씨가 낳았다. 측실에서 난 아들로 세거(世車)가 있다. 장남이 낳은 세 아들은 창징(昌徵)․창현(昌賢)․창학(昌學)이요, 두 딸은 심기(沈琦)․양달홍(梁達泓)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네 아들은 창규(昌奎)․창엽(昌燁)․창훈(昌勳)․창중(昌重)이요, 네 딸은 임달원․김석․이상익․이가욱에게 시집갔다. 세거(世車)가 낳은 두 아들은 창유(昌猷)․창립(昌立)이요, 딸은 고응극(高應極)에게 시집갔다. 사위 이봉문의 아들은 덕조(德祚)․철조(喆祚)요, 딸은 김시관(金時寬)에게 시집갔고, 사위 정효의 아들은 일철(日喆)․준철(俊喆)이요, 딸은 기성문(奇聖文)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은 합하여 얼마 되지 않는다.
공은 천품이 온아하고 순수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 매우 슬퍼하고 상을 치르면서 예제(禮制)를 극진히 하여 빈소를 차리거나 묘소를 잡거나 궤전(饋奠: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냄)을 드리는 예절을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 문공은 주자의 시호)의 가례(家禮)에 따랐다. 평소에 선조의 유훈을 가슴에 간직하여 후생(後生)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효도와 근신, 성실과 신의로 행하였다. 서제(庶弟) 7명과 함께 거처하면서 극진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의로운 방법으로 이끌어주니, 모두 마음으로 즐거워하였다.
몸가짐을 법도에 따라 규율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더욱 목․인․임․휼(睦婣任恤)[목은 구족(九族) 간에 화목함이요, 인은 인척과 정분이 도타움 이요, 임은 남을 위해 힘쓰는 것이요, 휼은 궁핍한 자를 구휼하는 것이니, 효․우(孝友: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와 합하여 육행(六行)이라 한다.]의 의리에 뜻을 기울여 궁핍한 자를 보살피고 재앙을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남의 장단(長短)과 득실(得失)에 한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남의 선행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자주 칭찬하고 선하지 못한 자를 만나면 순순히 타이르고 깨우치니, 진실한 뜻이 넘쳐흘러 감동하여 깨닫게 만들었다. 공이 세상을 뜨자, 인근 고을 사람들은 비록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라 할지라도 모두 서로 몰려와 슬피 울었고, 장사 지낼 때에는 전(奠)을 올리고 상여 줄을 끈 사람도 많았다.
공은 권세와 이익, 화려함과 영화로움을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것으로 보아 명성을 가까이 하거나 명예를 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미워하여 통렬히 끊어버렸다. 암행어사가 조정에 천거한 뒤로는 자신의 명성(名聲)이 퍼져나갈까 더욱 우려하여 자제들을 단속하여 서울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종할 무렵에 두 아들에게 유훈을 내려 경계하기를, “살아서 부지런히 학문을 닦지 못해 한 세상에 이름을 속였으니, 선조의 업적을 다시 생각해봄에 실추한 점이 이미 많았구나. 내가 죽은 뒤에 남이 알아주길 구하여 나에게 죄와 허물을 더하지 말라” 하였다. 상을 마친 뒤에 온 고을사람이 의견을 내어 장차 면내에 사당(祠堂)을 세워 아름다운 은혜를 갚으려 했으나, 본가에서 그만두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공의 유훈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이 높은 재행(才行: 재주와 행실)과 두터운 덕의(德義: 덕과 의로움)로 가정에서 시행하고 향리에서 실행한 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기에, 살아서는 암행어사의 천거에 오르고 죽어서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려 하였으니, 모든 이가 칭송하고 흠모한 바는 오래되어도 싫어함이 없었다. 다만 품은 생각을 당시 세상에 크게 펼칠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럽기는 하지만, 저 세상사람 중에 헛되이 뜬구름 같은 영화를 얻었다가 끝장에는 얼음이 녹아 없어지고 불에 다 타 재가 되는 것같이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망해버린 자와 비교해보면, 어찌 하늘과 땅처럼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겠는가?
공의 손자 창훈(昌勳)이 공의 행적을 한 통 기록하고 나에게 배운 아들과 조카를 보내 묘지명(墓誌銘)을 부탁하니, 어찌 그의 근실한 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위처럼 서술하고 이어 명(銘)을 단다.
고을 사람들이 매계옹(梅溪翁)이라 부르니
참으로 어진 선조의 유훈을 이었도다
의창(義倉)을 설립하고 학사를 건립하니
아름다워라! 옛 현인 본받아 뒤를 따랐네
마땅하지. 그 덕의(德義)를 입은 이들
죽은 뒤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자 하네
아름다운 행적을 어찌 다 적으랴?
내 큰 것만 뽑아서 묘지명에 넣노라.
숭정(崇禎: 의종황제 연호) 후 3병진(정조 20, 1796) 초겨울에 덕은(德恩) 송환기(宋煥箕)가 지음.
7) 墓碣銘幷序
蓋當顯肅兩廟之際 寶城之積田坊 有君子儒焉 諱後相字益卿梅溪號也 安氏系出順興 參公參卿 奕奕乎麗氏 至晦軒文成公諱裕 弘闡斯道 從祀聖廡 自文成三傳曰 侍中諱元衡 勳食竹城 子姓移貫竹山云 曾祖工曹參議 贈吏曹判書 文康公諱邦俊 有道學節義 世稱隱峰先生 祖諱逸之宣敎郞 考諱崴 以孝聞 光山李嵂其外王父也 公以顯宗乙巳生 卒於英祖丙午仲冬之二 孟春之七 其月日也 五鳳之原 首乙趾辛而崇四尺者 其幽宅也 用曾孫同知中樞壽彦之貴 贈司僕寺正 公聰穎過人 幼而好學 及其長也 不事貢擧業 專心於經術 講劘矻矻 而實用力於踐履 故制行以孝友爲本 喪祭以家禮爲準 與庶弟七人同居 而恩義幷施 得其歡心 睦于宗戚 加意賙恤 所處乃窮峽耳 居民艱食 不識文字 俗固蠢如也 公獨憂之 略倣藍田石潭之規 刱立義庫 貯穀千餘斛 爲其資斧 起書齋揀良師 以敎坊內子弟 隣境負笈者亦麕至 儒學蔚興 鄕風丕變焉 且庚其租稅之逋 傾其吉凶之禮 每歲杪出米肉 以養耆老 値年荒設賑貸 以濟凍餒 遠近咸稱歎曰 古之范公義田 只及宗黨而已 今安氏義庫 澤被一鄕 景宗辛丑直招使聞于朝 有收用之命 厥後又有刺史之薦 而竟未霑寸祿 豈非命歟 雖然 要譽干進 非其志也 自聞襃啓 蹙然不寧 敕子弟絶洛下跡 臨終戒二子曰 生不勤學 名欺一世 其忝先烈多矣 我死之後 勿求人知 增我諐尤 及喪畢 坊人有立祠之議 而爲二子所止之 於斯乎可以觀公矣 公凡三娶曰 昌寧曺氏父贈左尹爾泰 生二男一女 曰咸陽朴氏父世中 生一女 曰光山金氏父枰 生一女 三配墓皆祔 男長世霖 次世楫贈吏曹參議 崔彦龍李鳳文鄭孝三壻也 側出男世車 長派三男二女 仲派四男四女 崔壻无育 李壻男女各二 鄭壻二男一女 世車二男一女 噫 西銘之不講久矣 皮膜以外 若秦粵然 夫孰知有同胞之義哉 宜其大心衆生之人 不數數見也 若公以近道之姿 服文康之訓 惟孝友于 立其家政 愛人如己 澤及鄕里 暗合乎西銘之旨 學問之力 不可誣也 推是道而行之於爲國乎 何有而惜乎其無位 所施者止於一鄕也 夫性潭宋文敬 旣誌其幽 而不可無顯刻 後孫圭川圭達 謀于不佞 自顧淺學 不敢當者 然竊有所感 追述文敬之餘意 而爲之敍 繼以銘曰 有崔者梅 文康攸植 詒厥肖孫 克葆香色 人有寸長 慍其不知 公焉衆美 惟恐知之 雖則韜晦 闇然日章 于家于邦 自有聲光 卓彼鳳岡 封以馬鬣 昭示來昆 遺芳相接
庚辰仲春 安東金甯漢 撰
묘갈명서문을 덧붙임
현종․숙종 두 임금의 시절에 보성의 적전면(積田面: 현재 문덕면의 옛 이름)에 군자다운 선비가 있었으니, 그의 휘(諱)는 후상(後相)이요 자(字)는 익경(益卿)이요 호는 매계(梅溪)이다. 안씨의 선계는 순흥(順興)에서 나왔는데 높은 벼슬아치들이 고려조에 수없이 배출되더니,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휘(諱) 유(裕)에 이르러 유가의 도를 크게 들춰내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문성공으로부터 3대를 지나 시중(侍中) 휘(諱) 원형(元衡)이 공훈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니 자손들이 죽산(竹山)으로 본관을 옮겼다 한다.
증조는 공조참의(工曹參議)의 벼슬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된 문강공(文康公) 휘(諱) 방준(邦俊)인데, 도학(道學)과 절의(節義)가 있어 세상사람들이 은봉선생(隱峰先生)이라 칭송했다. 할아버지 휘(諱) 일지(逸之)는 선교랑(宣敎郞)이요, 아버지 휘(諱) 외(崴)는 효자로 소문이 났다. 광산(光山) 이율(李嵂)이 외할아버지이다. 공은 현종 을사년(1665)에 태어나 영조 병오년(1726)에 죽었는데 12월 2일과 정월 7일은 그의 생몰 날짜이다. 오봉산 언덕 을좌(乙坐)에 4척 높이의 묘가 그의 무덤이다. 증손자 동지중추(同知中樞) 수언(壽彦)이 귀하게 되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공은 총명함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과거(科擧)공부에 종사하지 않고 경술(經術: 경학과 그 응용하는 기술)에 전념하여 부지런히 강론하고 연마하되 참으로 실천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행실을 규제할 때엔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삼았고 상례와 제사를 치를 적에는 「가례(家禮)」를 준칙으로 삼았다. 서제(庶弟) 7명과 함께 살면서 은혜와 의리를 베풀어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고, 일가와 친척에게 화목을 내세워 긍휼히 돕는 마음을 펼쳤다.
살아온 곳이 궁벽한 골짜기여서 거주민은 먹기가 어려웠고 문자를 몰라 습속이 본래 어두웠다. 공이 홀로 이를 우려하여 대략 남전(藍田)의 향약(鄕約)과 석담(石潭)의 사창(社倉)의 법을 본받아 의고(義庫)를 창립하고, 곡식 천여 섬을 저축하여 밑천으로 삼아 서당을 세우고 훌륭한 스승을 뽑아 면내의 자제들을 가르치니, 이웃 고을에서도 배우러 온 자가 몰려들어 유학이 성하게 일어나고 고을의 풍속이 크게 변하였다.
또 내지 못한 면민의 세금을 갚아주고 혼례나 장례에 재물을 기울여 주었고, 항상 연말에는 쌀과 고기를 내어 노인들을 공양하였다. 흉년을 만나면 어려운 사람에게 재물을 나눠주어 추위에 떨거나 굶주리는 자를 구제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기를 “옛날 범공(范公)의 의전(義田)[범공은 북송(北宋) 초기의 명재상인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자 (字)는 희문(希文),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 호가 내려왔고 공자(孔子)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을 보면 “선생은 안으로는 강직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웠으며 뭇사람을 사랑하고 선행을 즐겼다. 베 풀기를 좋아하여 마을에 의장(義莊)을 설치하고 일가 종족들을 넉넉하게 보살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일컫기를 좋아하였다”고 적혀있다. ]은 같은 종족에게만 혜택이 미쳤을 뿐인데, 지금 안씨의 의고(義庫)는 은택이 한 고을에 미쳤다” 하였다.
경종(景宗) 신축년(1721)에 직지사(直指使: 암행어사를 달리 이르는 말)가 조정에 보고하여 거두어 쓰라는 명을 받기에 이르렀고, 그 뒤에 또 자사(刺史: 관찰사의 다른 이름)의 천거가 있었지만 끝내 조그만 직책도 받지 못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명예를 구하거나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포상해 주길 아뢰었다는 말을 들은 뒤로부터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자제들에게 서울에 발걸음을 끊도록 타일렀다.
임종할 무렵에 두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살아서 부지런히 학문을 닦지 못해 한 세상에 이름을 속였으니, 선조의 업적을 더럽힌 점이 많았구나. 내가 죽은 뒤에 남이 알아주길 구하여 나에게 죄와 허물을 더하지 말라” 하였다. 상을 마치자 고을사람이 사당(祠堂)을 세우자는 의견을 내었으나 두 아들에게 제지를 당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됨됨이를 볼 수 있다.
공은 모두 세 차례 장가를 들었다. 창녕조씨(昌寧曺氏)는 부친이 좌윤(左尹)에 추증된 이태(爾泰)인데 2남 1녀를 낳았고, 함양박씨(咸陽朴氏)는 부친이 세중(世中)인데 1녀를 낳았으며,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부친이 평(枰)인데 1녀를 낳았다. 세 배필의 묘는 모두 부장(祔葬)하였다. 장남은 세림(世霖)이요, 차남은 세집(世楫)이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최언룡․이봉문․정효는 세 사위이다. 측실에서 난 아들로 세거(世車)가 있다. 장파(長派)는 3남 2녀를, 중파(仲派)는 4남 4녀를 두었고, 사위 최언룡은 자식이 없고 이봉문은 2남 2녀를 두었고 정효는 2남 2녀를 두었다. 세거(世車)는 2남 1녀를 낳았다.
아! 「서명(西銘)」[북송(北宋)의 학자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서재의 서쪽 창에 걸어 놓은 좌우명(座右銘). 모두 250자로 되었는데 인도(仁道)의 원리를 밝혀놓은 글임.]이 강론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나의 피부와 점막 밖을 마치 진월(秦粵, 월(粵)은 월(越)과 같은 글자. 춘추시대에 진나라는 서북쪽, 월나라는 동남에 있어 거리가 매우 멀었으므로, 서로 소원(疎遠)한 관계를 나타낼 때 쓰이는 말이다.)처럼 여기니, 어찌 동포(同胞)라는 뜻이 있음을 알겠는가? 큰마음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공과 같은 이는 도(道)에 가까운 모습으로 문강공(文康公)의 유훈을 받들어 오직 효도와 우애로 가정을 세우고,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여 향리에 은택을 베풀어, 우연히 『서명(西銘)』의 취지와 일치하였으니 학문의 힘을 속일 수 없다. 이 도(道)를 미루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실행해보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직위가 없어 시행한 곳이 한 고을에 그치고 말았다.
성담(性潭) 송문경공(宋文敬公: 송환기)이 이미 묘지명(墓誌銘)을 지었으나, 묘갈명(墓碣銘)이 없을 수 없기에 후손 규천(圭川)․규달(圭達)이 나에게 물어왔다. 스스로 되돌아보아 학문이 옅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가만히 느껴지는 바가 있어 문경공(文敬公)이 다 표현하지 못한 뜻을 기술하여 위처럼 적어보았다. 이어 명(銘)을 붙인다.
흰 빛깔의 매화는
문강공이 심은 것으로
어진 증손에게 물려주니
능히 향기를 보전했네
남들은 조그만 장점이 있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성내는데
공은 많은 미덕에도
오직 남이 알까 저어하였네
비록 몸을 깊이 숨겼지만
어둠 속에서 해처럼 빛났으니
가정에서나 나라에서나
절로 소리와 빛을 남겼네
높다란 저 오봉산에
말갈기 같은 무덤을 만들고
밝은 덕을 후손에게 내보이니
남기신 명성 끝없이 이어지리
경진년(1940) 중춘(仲春)에 안동(安東) 김영한(金甯漢)이 지음.
※ 부 록
1) 宣敎郞府君墓表
嗚呼 德山之下 葛田之洞 我安氏族葬 此坐西而最高嘗者 我隱峰先生文康公之第五子 宣敎公所藏 而宜人新平宋氏祔焉 公諱逸之字靜叔 生而卓異 好學不倦 文康公大期之 丙子擧義 公實從焉 不幸以癸未四月二十一日卒 壽止三十一 士林咨嗟 以爲斯文衰矣 公大者如此 其細可略也 吾氏源出順興 貫之竹山 起自高麗門下侍中諱元衡 其家寶城 始於本朝參軍諱民 三傳至諱舳 牧使號鈍庵 鈍庵少子諱重敦 進士無嗣 以兄僉樞諱重寬之子子之 卽文康公 文康公配曰 慶州鄭氏 贈承旨諱承復其考 宜人之考 通德郞諱益 公有二男嵾崴 三女朴世亨梁昌灝崔世瞻 長房男稷相致相出 女適吳興績張以堂白受珪鄭相益 次房男後相贈司僕寺正 女適李耘時李泰開 側出子女 濟相鼐相宅相東相藜相金昌九文以采也 朴世亨六子 梁昌灝四子一女 曾玄不錄 嗚呼 以公偉才闊步 顧不能大振家學以達於用 乃與其年而閼之 天之篤材 故止是耶 是豈獨一家之恨 雖然公之後二百餘年 聞人正士 世世相望 則公之志業 固未嘗隨沒而盡矣 如今戴冠而登降墓庭者過百 童丱不在其數 或者天將以其身之不食 報之孫子於無窮歟
丁酉八月日 八代孫成煥 謹識
선교랑 부군의 묘표
아! 덕산(德山) 아래 갈전동(葛田洞)은 우리 안씨 문중이 대대로 장사지내온 곳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좌향(坐向)을 잡은 가장 높은 곳에 우리 은봉(隱峰)선생 문강공(文康公)의 다섯째 아들 선교랑공(宣敎郞公)의 묘소가 있는데, 의인(宜人) 신평송씨(新平宋氏)가 합장되어 있다. 공의 휘(諱)는 일지(逸之)요 자(字)는 정숙(靜叔)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탁월하고 특이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문강공이 크게 기대하였다.
병자년(인조 14, 1636)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도 공이 실제로 배종(陪從)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계미년(인조 21, 1643) 4월 21일에 세상을 떴다. 향년이 31세에 그치니 사림(士林)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문(斯文: 유학의 도)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했다. 공의 커다란 행적은 이와 같으니 너무 간략하다 할 것이다.
우리 안씨(安氏)는 순흥(順興)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관향을 죽산(竹山)에 정한 것은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진 휘(諱) 원형(元衡)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보성(寶城)에 가문을 연 것은 조선조에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지낸 휘(諱) 민(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대가 지나면 휘(諱) 축(舳)에 이르는데 이 분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호가 둔암(鈍庵)이다.
둔암의 막내아들 휘(諱) 중돈(重敦)은 진사(進士)에 합격했으나 후사가 없었으므로 큰형인 첨추(僉樞) 휘(諱) 중관(重寬)의 아들로 양자를 들이니, 이 분이 곧 문강공(文康公)이다. 문강공의 배위(配位)는 경주정씨(慶州鄭氏)인데,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휘(諱) 승복(承復)이 친정 아버지이다. 의인(宜人)의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휘(諱) 익(益)이다.
공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참(嵾)과 외(崴)요, 딸은 박세형(朴世亨)․양창호(梁昌灝)․최세첨(崔世瞻)에게 시집갔다. 장남의 아들은 직상(稷相)과 치상(致相)이요, 딸은 오흥적(吳興績)․장이당(張以堂)․백수규(白受珪)․정상익(鄭相益)에게 시집갔다. 차남의 아들은 후상(後相)이니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딸은 이운시(李耘時)․이태개(李泰開)에게 시집갔으며, 측실(側室)에서 난 자녀는 제상(濟相)․내상(鼐相)․택상(宅相)․동상(東相)․여상(藜相)․김창구(金昌九)․문이채(文以采)이다. 박세형(朴世亨)은 6남을, 양창호(梁昌灝)는 4남 1녀를 두었고, 증손과 현손은 적지 않는다.
아! 슬프다. 공은 큰 재주와 넓은 포부를 지녔으면서도 능히 가학(家學)을 크게 떨쳐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이내 젊은 나이에 요절하니, 하늘이 인재를 도탑게 보살피는 것이 여기에서 그쳤단 말인가! 이 어찌 한 집안만의 한(恨)이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공이 떠난 뒤 2백여 년 동안 명성을 날린 올바른 선비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니, 공의 지절(志節)과 학업(學業)이 참으로 모조리 없어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관(冠)을 쓰고 묘소의 뜰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백 명이 넘고, 어린 아이들의 숫자도 얼마인지를 모르니, 혹여 하늘이 선조께서 누리지 못한 것을 자손들에게 무궁토록 갚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정유년(1897) 8월 모일에 8대손 성환(成煥)이 삼가 적음.
2) 學生公墓表
公諱崴字景卓 我安氏本自順興出 至文成公晦軒先生第二曾孫文惠公元衡 以功封竹城君 子姓仍貫竹山 子曰勉號雙淸堂封興寧君 歷三世而有諱民 訓練院參軍 殉于王事 贈宗簿寺主簿 始居寶城 歷二世而有諱舳 號鈍庵 與金河西林石川 稱湖南三高 卽公之高祖也 曾祖諱重敦 中司馬兩試 三魁館製 爲東堂直赴第 未唱榜而卒 祖諱邦俊 卽文康公牛山先生 道學節義爲世儒宗 考諱逸之宣敎郞 妣宜人新平宋氏通德郞益女 文節公守忠后 公生以崇禎己卯 卒以肅宗辛巳十一月十四日 配光山李氏宣敎郞嵂女 淸心堂調元后 生一男後相 二女適全州李耘時 星州李泰開 卒某年四月二十七日 墓先兆左麓葛田亥坐雙兆 後配晉州河氏某女 生五南濟相鼐相宅相東相藜相 二女適金昌九文以采 生卒不傳 墓祭堂洞 坐原 孫男世霖世楫世車 孫女崔彦龍李鳳文鄭孝妻 曾玄不錄 嗚呼 公以文康公之孫 梅溪公之父 宜有承襲之懿 義方之訓 而散逸無傳 可勝歎哉 惟於公之曾孫敎官公行狀 有曰事親至孝 鄕隣有咏歌者 此可以當全鼎之一臠也 公之墓世稱牛眠之地 而自政府築大堤於住巖 水逆行氾濫 墓有沒之患 故將利丁卯三月日 遷而合窆于大坂洞先兆下丙坐原 痛惜可及 舊表亦移竪而無陰記 故更磨鍊而記之如此
乙酉光復後初丁卯三月日 十代孫日淳謹記
학생공의 묘표
공의 휘는 외(崴)요 자는 경탁(景卓)이다. 우리 안씨는 본래 순흥(順興)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안향) 선생의 둘째 증손자인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이 공을 세워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면서 자손들이 본관을 죽산(竹山)이라 했다. 그 아들 면(勉)은 호가 쌍청당(雙淸堂)이요 흥령군(興寧君)에 봉해졌다. 3세(世)를 지나 민(民)이 태어나니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순국하여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추증되었고, 처음으로 보성(寶城)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2세(世)를 지나 축(舳)이 태어났는데 호가 둔암(鈍庵)이요 김하서(金河西)․임석천(林石川)으로 더불어 ‘호남삼고(湖南三高)’라 불리니, 이 분이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 중돈(重敦)은 생원과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성균관의 제술(製述) 시험에 세 차례나 장원하였으며 곧장 동당(東堂)의 시험[동당(東堂)의 초시(初試)를 말함. 동당은 식년과(式年科) 또는 증광시(增廣試) 때에 강경(講經) 시험을 보던 곳. 동당문과(東堂文科)라고도 함. 초시는 모든 과거의 맨 처음 시험. 보통 서울․지방에서 식년(式年)의 전해 가을에 보는데 여기에 합격해야 복시(覆試)에 응시할 수 있음.]을 보아 급제하였으나 합격자를 발표하기 전에 세상을 떴다. 할아버지 방준(邦俊)은 곧 문강공(文康公) 우산선생(牛山先生)이니 도학과 절의로 세상의 유종(儒宗: 선비의 으뜸)이 되었다. 아버지 일지(逸之)는 선교랑(宣敎郞)이요 어머니 의인(宜人) 신평송씨(新平宋氏)는 통덕랑(通德郞) 익(益)의 딸이요 문절공(文節公) 수충(守忠)의 후예이다.
공은 숭정(崇禎) 기묘년(1639)에 태어나 숙종 신사년(1701) 11월 14일에 세상을 떴다. 배필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선교랑 율(嵂)의 딸이요 청심당(淸心堂) 조원(調元)의 후예인데, 아들 후상(後相)을 낳았고 두 딸은 전주(全州) 이운시(李耘時), 성주(星州) 이태개(李泰開)에게 시집갔다. 모년(某年) 4월 27일에 세상을 떠 선영 왼편 산기슭 갈전동(葛田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쌍분으로 묻혔다.
후배(後配) 진주하씨(晉州河氏)는 아무개의 딸로 다섯 아들 제상(濟相)․내상(鼐相)․택상(宅相)․동상(東相)․여상(藜相)을 낳았고 두 딸은 김창구(金昌九)․문이채(文以采)에게 시집갔다. 생졸(生卒) 연대는 전해지지 않으며 묘소는 제당동(祭堂洞) 모좌(某坐)의 언덕에 있다. 손자는 세림(世霖)․세집(世楫)․세거(世車)요, 손녀는 최언룡(崔彦龍)․이봉문(李鳳文)․정효(鄭孝)의 아내가 되었다. 증손과 현손은 적지 않는다.
아! 공은 문강공(文康公)의 손자요 매계공(梅溪公)의 아버지로 마땅히 가법을 이은 아름다운 덕행과 올바른 방법으로 가르친 교훈을 남겼을 터인데, 흩어지고 없어져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다만 공의 증손자 교관공(敎官公: 안창훈)의 행장(行狀)에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고을 사람들이 이를 노래하기도 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 한마디 말로 공의 전체를 알 수 있으리라.
공의 묘소는 세상사람들이 우면지(牛眠地, 명당(明堂)을 말함. 중국 진(晉)나라의 도간(陶侃)이 언덕 위의 소가 자는 곳에 집안의 묘를 쓰고 후에 크게 입신출세한 고사에서 나옴.)라 일컫는 곳인데 정부(政府)가 주암(住巖)에다 댐을 쌓아 물이 역행 범람하여 묘소가 침몰할 걱정이 생겼다. 따라서 정묘년 3월 모일에 이장하여 대판동(大坂洞) 선영 아래 병좌(丙坐)의 언덕에다 합폄하게 되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옛날에 세운 묘표(墓表)도 함께 옮겨 세웠으나 후면에 기록이 없으므로 다시 갈고 다듬어 위와 같이 적는다.
을유년 광복 후 첫 정묘년(1987) 3월 모일에 10대손 일순(日淳)이 삼가 적음.
3) 參議公墓碣銘幷序
昔蔡伯喈著郭林宗墓碑曰 余爲有道之文 無愧焉 盖其人其行 師法當時 有可以表述者故爾 余於參議安公貞珉之役 亦云 公諱世楫字濟汝 以高麗順興君諱子美 爲鼻祖 三傳而有晦軒文成公諱裕 爲東方倡學之祖 從祀聖廟 歷文順公諱于器 文淑公諱牧 至文惠公諱元衡 封竹城君 子孫仍貫竹山 有諱挺生 始仕本朝直提學 自是簪纓相承 鈍庵諱舳 累拜掌令不就 與金河西林石川稱三高 再傳至隱峰文康公諱邦俊 逸拜工議不就 世稱牛山先生 諱逸之 丙子陪親擧義 諱崴 隱德不仕 諱後相 是爲梅溪處士 贈司僕寺正 寔公之高曾祖若禰也 妣昌寧曺氏 其考左尹爾泰 公以肅宗丁丑十一月九日生 稟姿穎悟 就傅篤學 平生用工 在學庸二部 雖在道路 莫或廢闕 事二親盡志物之養 早喪慈闈 守制如成人 弔者皆悅 嘗侍親癠 正冠束帶 每夜祝天 疾乃得已 及沒置祭田備儀物 以供香火 每晨謁廟 詣長公所 躬整寢具 湛樂和潝 出入必告期 適以脚瘇差遲一日 伯氏趂期出迎宿旅舍 相泣而歸 待庶弟甚厚 以安其業 均施慈仁 得姊妹歡心 群從子女之貧而不及嫁娶者 使不失時 至於鄕隣 亦極周恤 早事公車 志在榮親 親沒棄擧業 專心爲己之學 師陶庵李文正 深被奘許 得聞性理之說 往來寒圃齋李忠愍鵩舍 託受日記傳諸後 手書鄒經及栗谷李文成所著要訣 訓子姪 擧小雅如臨深淵如履薄氷以戒曰 爲人子者 苟能體此 戰兢自持 恒若臨履 則無忝所生矣 與後生言必依正倫理篤恩義 隱居求道 終老林樊 以英廟壬午三月二十九日卒 享年六十六 墓寶城郡北牛山村右松峴丁坐原 哲宗庚申 贈吏曹參議 配贈淑夫人廣州李氏漢固女 生二男二女 墓合竁 贈淑夫人光山李氏萬成女 生二男二女 墓松峴東船出洞寅坐原 男昌奎无育 昌燁贈吏參 昌勳贈敎官昌重 女林達遠金舃李象益李可郁也 壽鶴出系長房 壽鳳壽坤壽彦以子貴陞同知 壽峻僉知李奎成 二房子壻 壽祿薦除參奉陞僉樞 壽宅壽國高哲鎭李象休 側出壽朋壽身壽欽崔養秀任慶材 三房子壻 壽文林斗漢金尙淳金俊采 四房子壻 內外曾玄 總數百人 後孫圭川圭達甫 謁余爲銘 烏敢辭 嗚呼 古之君子 修行於家 延譽於鄕 乃升用於朝 如公之孝友德行 爲當時所推重 而竟不蜚英 惟無忮求而隱遯无憫 其踐履之正 操守之確 與其收拾靑紫 患得患失 至死不悔者 奚啻霄壤哉 可敬也夫 銘曰 於休我公 劬經飭行 惟孝友于 爲一家政 就師聞道 力學受正 遯世无憫 卓乎自靖 天賦其德 不畀厚命 留其不盡 以延後慶 幽宮侐侐 薰蒿斯永 銘辭載珉 百世止敬
上章執徐仲春日 嘉義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奎章閣直提學 世子侍講院檢校輔德 驪興閔丙承 撰
참의공의 묘갈명서문을 덧붙임
옛날에 채백개(蔡伯喈, 백개는 후한(後漢) 사람 채옹(蔡邕)의 자(字)임. 태부(太傅) 호광(胡廣)에게 배워 시부(詩賦)에 능했으며, 천문(天文)과 음률(音律)에도 뛰어났다. 문집으로 『채중랑집 (蔡中郞集)』이 있다.)는 곽임종(郭林宗, 후한 시대의 학자. 이름은 태(太) 또는 태(泰), 자는 임종(林宗). 고대의 전 적에 널리 통하여 제자 수천 명이 따랐다. 해내(海內)의 인사들을 곧잘 평가하였는데 위태 로운 말이나 엄한 논평을 하지 않았으므로 당고(黨錮)의 화가 일어났을 때도 혼자 면할 수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권98, 「고사전(高士傳)」)의 묘비문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유도(有道: 학문과 도덕으로 칭송을 받은 자)의 글을 지었으니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다. 대개 그의 사람됨과 행실이 당시 세상에 모범이 되어 표창하여 기술할만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데, 나도 참의(參議) 안공(安公)의 비문을 지으면서 또한 그와 같이 말하고 싶다.
공의 휘(諱)는 세집(世楫)이요 자(字)는 제여(濟汝)이니, 고려조에 순흥군(順興君) 휘(諱) 자미(子美)를 비조(鼻祖)로 삼는다. 3대가 지나 문성공(文成公) 회헌(晦軒) 휘(諱) 유(裕)가 태어났는데 동방에 처음으로 학문을 일으킨 원조[東方倡學之祖]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문순공(文順公) 휘(諱) 우기(于器)와 문숙공(文淑公) 휘(諱) 목(牧)을 지나 문혜공(文惠公) 휘(諱) 원형(元衡)에 이르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니, 자손이 이를 따라 본관을 죽산(竹山)이라 했다. 그 손자 휘(諱) 정생(挺生)은 처음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이로부터 높은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졌는데, 둔암(鈍庵) 휘(諱) 축(舳)은 여러 차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김하서(金河西)․임석천(林石川)과 더불어 호남삼고(湖南三高: 호남 지방의 세 명의 높은 선비)라 불렸다. 2대가 지나 문강공(文康公) 은봉(隱峰) 휘(諱) 방준(邦俊)이 태어나 유일(遺逸: 과거 시험을 보지 않은 재야의 뛰어난 학자)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우산선생(牛山先生)이라 불렀다. 휘(諱) 일지(逸之)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를 모시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휘(諱) 외(崴)는 은둔하여 덕을 닦느라 벼슬을 하지 않았고, 휘(諱) 후상(後相)은 매계처사(梅溪處士)이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니, 실로 공의 고조․증조․할아버지․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좌윤(左尹) 이태(爾泰)의 딸이다.
공은 숙종 정축년(1697) 11월 9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모습이 영특했고 스승에게 나아가 독실하게 배웠다. 평생 힘들여 공부한 것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두 책이었는데 비록 길을 갈 때에도 공부를 폐하거나 빠뜨린 적이 없었다. 양친을 섬길 때에는 지물(志物: 뜻을 따르고 맛있는 음식을 차림)의 봉양을 극진히 하였고,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에는 마치 어른처럼 예법을 지키니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일찍이 아버지의 병을 간호할 때에는 의관을 바르게 차리고 띠를 메고서 매일 밤마다 하늘에 기도하니 병환이 이에 낫게 되었으며, 돌아가시자 제전(祭田: 제사에 필요한 전답)을 마련하고 의물(儀物: 제사 도구나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받들었다.
새벽마다 사당에 참배하고 형의 거처로 가서 몸소 침구를 정돈하니 화락한 우애가 넘쳐흘렀다. 밖에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돌아올 날짜를 아뢰었는데 때마침 다리가 퉁퉁 부어 올라 하루가 늦어지게 되자, 형은 돌아올 날짜에 마중을 나와 여관에서 묵으며 기다렸다가 서로 만나 울면서 돌아왔다. 서제(庶弟)를 매우 두텁게 대우하여 생업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자애롭고 어진 마음을 고루 베풀어 자매들이 기쁜 마음으로 살게 되었다. 수많은 조카들이 가난하여 시집가거나 장가들지 못하게 되면 때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었고, 고을의 이웃들도 역시 힘을 다해 두루 구휼하였다.
일찍이 과거공부에 종사했으나 그 뜻은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하는 데 있었고,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 곧 성리학)에 마음을 쏟았다. 도암(陶庵) 이문정공(李文正公: 이재)의 제자가 되어 두터운 칭찬과 인정을 받았으며, 성리(性理: 인간의 본성과 하늘의 이치)에 관한 학설을 듣게 되었다. 한포재(寒圃齋) 이충민공(李忠愍公: 이건명)의 복사(鵩舍, 귀양살이하는 집 곧 적려(謫廬)를 뜻함. 복(鵩)은 올빼미의 일종으로 악성(惡聲)을 발하는 불길한 새이다. 이건명(李健命)은 위중한 병에 걸린 경종(景宗)이 왕제(王弟: 훗날 영조)를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려 하자,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 등과 협의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결국 고흥 나로도(羅老島)로 귀양가서 처형되었다.)를 왕래하면서 그의 일기(日記)를 부탁 받아 후손에게 전해주었다.
손수 「추경(鄒經, 맹자는 전국시대에 추(鄒)나라에서 태어났으므로, 사서(四書) 중에서 『맹자 (孟子)』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과 율곡(栗谷) 이문성공(李文成公)이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 「훈자질(訓子姪)」을 썼으며, 「소아(小雅, 『시경(詩經)』의 편명임. 「소아」 ‘소민장(小旻章)’에서 “맨손으로 호랑이는 잡 지 못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지 못하네. 사람이라면 한결같이 다 아는 일일세. 그러나 그 밖의 일은 도무지 알지 못하니, 오로지 전전긍긍하면서, 깊은 못 가에 이른 듯, 엷은 얼음 을 밟는 듯, 벌벌 떨기만 하네.”라 하였다.)」의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이 하라”는 말을 예로 들어 경계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참으로 이 말을 체득하여 조심스런 마음을 갖되, 항상 깊은 연못에 임한 듯, 살얼음을 밟는 듯이 할 수 있다면, 부모에게 욕됨이 없으리라”고 말했다. 후생(後生)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올바른 윤리(倫理)와 돈독한 은의(恩義)에 따랐으며, 숨어살면서 도(道)를 구하다가 자연 속에서 늙었다.
영조 임오년(1762) 3월 29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이 66세이다. 묘소는 보성군 북쪽 우산(牛山) 마을 오른편에 자리한 송현(松峴)의 정좌(丁坐)의 언덕에 있다. 철종 경신년(1860)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된 광주이씨(廣州李氏) 한고(漢固)의 딸이다. 2남 2녀를 낳았고 묘소는 합봉했다. 숙부인에 추증된 광산이씨(光山李氏) 만성(萬成)의 딸은 2남 2녀를 낳았고 묘소는 송현(松峴)의 동쪽 선출동(船出洞) 인좌(寅坐)의 언덕에 있다.
아들에 창규(昌奎)는 자식이 없고, 창엽(昌燁)은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고, 창훈(昌勳)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끝에 창중(昌重)이 있으며, 딸은 임달원․김석․이상익․이가욱에게 시집갔다. 수학(壽鶴)은 큰아들에게 양자로 들어가 계통을 이었고, 수봉(壽鳳)․수곤(壽坤)․수언(壽彦)은 아들이 귀하게 되어 동지(同知)에 올랐다. 수준(壽峻)은 첨지(僉知)이고 이규성(李奎成)은 둘째 아들의 자식과 사위이다. 수록(壽祿)은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첨추(僉樞)에 올랐고, 수택(壽宅)․수국(壽國)․고철진(高哲鎭)․이상휴(李象休)와 측실 소생인 수붕(壽朋)․수신(壽身)․수흠(壽欽)․최양수(崔養秀)․임경재(任慶材)는 셋째 아들의 자식과 사위이다. 수문(壽文)․임두한(林斗漢)․김상순(金尙淳)․김준채(金俊采)는 넷째 아들의 자식과 사위이다.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은 모두 수백 명에 달한다.
후손 규천(圭川)과 규달(圭達) 씨가 나를 찾아와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아! 옛날의 군자는 가정에서 행실을 닦아 고을에서 영예를 떨쳤고 이내 조정에 등용되었는데, 공과 같은 효우(孝友)와 덕행(德行)은 당시에 높이 추앙을 받았으나 끝내 명성을 크게 떨치지 못했다. 오직 벼슬을 탐하거나 구하는 마음이 없이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고민하지 않으니, 그 올바른 실천과 확고한 지조는 벼슬자리를 구하여 얻을까 잃을까 근심하면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자와 비교할 때, 어찌 하늘과 땅 차이 뿐이겠는가? 가히 공경할 만하다. 이어 명(銘)을 단다.
아! 아름답도다 그대여
부지런히 공부하고 행실을 닦아
오직 효성과 우애로
한 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네
스승을 찾아 도를 깨닫고
학문에 힘써 정도를 지켜서
세상에 숨어도 고민하지 않으니
편안한 마음 우뚝 뛰어났네
하늘이 그 덕을 내렸건만
두터운 운명을 내리지 않아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훗날의 경사를 기다리게 했네
그윽한 무덤은 고요하고
향기로운 연기 길이 피어오르네
이 명(銘)을 비석에 새기니
영원토록 공경할지어다.
상장집서(上章執徐, 1940) 중춘(仲春: 음력 2월) 모일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경연(同知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검교(檢校) 보덕(輔德)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이 지음.
상장집서(上章執徐): 고갑자(古甲子)로 상장(上章)은 경(庚)이요 집서(執徐)는 진(辰)이므로, 경진년(1940)에 해당한다.
■ 인명록(人名錄)가나다 순서로 배열
권익관(權益寬): 1676-? 문신(文臣), 자는 홍보(弘甫), 본관은 안동(安東), 영조 때에 암행어사를 지냈다.
김영한(金甯漢): 1878-1950. 호는 동강(東江), 본관은 안동(安東). 경술국 치에 음독 자살한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의 아들이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다. 『급우재집(及愚齋集)』을 남겼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노완(老阮), 본관은 경주(慶州). 박제가(朴齊家)에게 수업하여 당대에 고증학(考證學)․금석학(金石學)․ 서예가(書藝家)로 이름을 떨쳤다.
김 희(金 憙): 1729-1800. 자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시호는 효간(孝簡), 본관은 광산(光山), 대제학 김익희(金益熙)의 5대손. 정조 때에 우의정이 되었고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 결백하였다.
민병승(閔丙承): 호는 단운(丹雲), 본관은 여흥(驪興). 한말에 참판(參判) 벼슬을 지냈고 『단운집(丹雲集)』을 남겼다.
박광전(朴光前): 1526-1597.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진원(珍原),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스승이다. 임진왜 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을 일으켰고, 『죽천집(竹川集)』을 남겼다.
성 혼(成 渾): 1535-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昌寧), 청송(聽松) 수침(守琛)의 아들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우산(牛山) 안방준 (安邦俊)의 스승이다. 『우계집(牛溪集)』을 남겼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恩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이다. 을사년(1905)에 늑약(勒約)이 체결되자 음독 자결하였으며,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을 남겼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1912년에 활산정사(活山精舍)에서 음독 자결하였으며 『심석재집(心石齋 集)』을 남겼다.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자는 자동(子東), 호는 성담(性潭) 또는 심재(心齋), 본관은 은진(恩津),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문집으로 『성담집(性潭集)』을 남겼다.
안규숭(安圭嵩): 1889-1943. 자는 성거(聖居), 호는 우촌(愚邨), 「우촌유고(愚邨遺稿)」를 남겼다. 안성환(安成煥)의 둘째 아들이다.
안근수(安根洙): 1818-1873. 자는 성고(聖固), 통덕랑(通德郞)이요, 안명집(安命集)의 아들이다.
안기환(安琦煥): 1847-1918. 자는 계헌(季獻), 호는 소봉(小峰), 생부는 안형수(安瑩洙)이고 양부는 안화수(安龢洙)이다.
안명윤(安命允): 1794-1834. 자는 경승(敬升), 호는 연정(蓮亭), 통덕랑(通德郞)이요, 안수록(安壽祿)의 아들이다.
안명집(安命集): 1791-1855. 자는 양직(養直), 호는 매음(梅陰), 안수영(安壽永)의 아들이다.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자는 사언(士彦), 호는 빙호자(氷壺子)․우산(牛山)․은봉(隱峰),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죽산(竹山),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과 우계(牛溪) 성혼(成 渾)에게 배웠다. 「은봉전서(隱峰全書)」를 남겼다.
안성환(安成煥): 1858-1911. 자는 치장(穉章), 호는 소산(蘇山) 또는 고광자(古狂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門人)이다. 경술년(1910) 국치(國恥)에 피를 토하고 병을 얻어 이듬해에 세상을 뜨니 사림이 애석하게 여겼다. 문집으로 『소산유고(蘇山遺稿)』를 남겼고, 안응수(安膺洙)의 아들 이다.
안세림(安世霖): 1694-1766. 자는 용여(用汝), 안후상(安後相)의 장남이다.
안세집(安世楫): 1697-1762. 자는 제여(濟汝),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 유학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안후상(安後相)의 차남이다.
안수록(安壽祿): 1776-1857. 자는 여필(汝必), 호는 오봉(五峰),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인이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오봉유고(五峰遺稿)」를 남겼다.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의 아들이다.
안수린(安壽麟): 1763-1807. 자는 지수(趾叟), 호는 순호(蓴湖) 또는 직암(直菴),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인, 「순호유고(蓴湖遺稿)」가 간행되었다.
안수상(安壽相): 1665-1729. 자는 인수(仁叟), 호는 오헌(梧軒). 학행으로 종묘서령(宗廟署令),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제수받았다.택촌파 안후지(安厚之)의 손자이다. 「오야문답(梧野問答)」을 지었다.
안수택(安壽宅): 1783-1858. 자는 여인(汝仁), 호는 죽야(竹埜), 안수록(安壽祿)의 아우이다.
안수행(安壽行): 1781-1863. 개명(改名)은 수언(壽彦), 자는 경숙(敬叔), 호는 존와(存窩), 안창엽(安昌燁)의 셋째 아들이다. 아들 사간원 정언 명석(命奭)의 귀(貴)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에 올랐다.
안인환(安寅煥): 1835-1881. 자는 중헌(仲獻), 호는 매하(梅下), 안형수(安瑩洙)의 아들이요 안기환(安琦煥)의 형이다.
안일지(安逸之): 1613-1643. 자는 정숙(靜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다섯째 아들이다.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안종민(安鍾珉): 1872-1917. 자는 민옥(民玉), 호는 후송(後松),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이다.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의 직계 5대손이다.
안종선(安鍾宣): 1899-1992. 자는 성홍(聲洪), 호는 봉산(蓬山), 회봉(晦峰) 안규용(安圭容)의 둘째 아들이다.
안창규(安昌奎): 1729-1785. 자는 덕휘(德輝), 호는 임연당(臨淵堂), 안세집(安世楫)의 큰아들이다.
안창징(安昌徵): 1733-1805. 자는 백휴(伯休), 안세림(安世霖)의 큰아들 이다.
안창현(安昌賢): 1736-1792. 자는 희백(希伯), 안세림(安世霖)의 둘째아들로 「우산집(牛山集)」 초간본을 간행 배포하는데 앞장섰다.
안창훈(安昌勳): 1748-1828. 자는 덕로(德老), 호는 직우당(職憂堂),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직우당유고(職憂堂遺稿)」를 남겼다. 안세집(安世楫)의 셋째 아들이요,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의 아버지이다.
안형수(安瑩洙): 1812-1875. 자는 태이(泰以), 호는 괴재(愧齋), 통선랑(通善郞)이요, 안명윤(安命允)의 아들이다.
안후상(安後相): 1665-1726. 자는 익경(益卿), 호는 매계(梅溪). 향약(鄕約)․의창(義倉)․학사(學舍)를 만들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안외(安崴)의 아들이다.
유영선(柳永善): 1893-1970. 호는 현곡(玄谷),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현곡집(玄谷集)』을 남겼다. 전북 고창 사람 이다.
유한지(兪漢芝): 1760-?. 자는 덕휘(德輝), 호는 기원(綺園), 본관은 기계(杞溪). 서예가로 문익점신도비(文益漸神道碑)를 쓴 바 있다.
이건명(李健命): 1663-1722.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손자. 경종 조에 세제(世弟) 책정 문제에 관여하다 고흥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한포재집(寒圃齋集)」을 남겼다.
이도중(李度中): 호는 용호(龍湖) 또는 용산(龍山).
이병전(李秉銓): 1824-1891. 호는 이고(離皐). 「이고집(離皐集)」을 남겼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전주(全州). 교리․호조판서를 걸쳐 순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강산집(薑山集)」을 남겼다.
이용원(李容元): 호는 하석(霞石).
이 이(李 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德水). 「율곡전서(栗谷全書)」를 남겼다.
이 재(李 縡): 1680-1746.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 시호는 문정(文正), 「도암집(陶庵集)」과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을 남겼다.
전 우(田 愚): 1841-1922.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담양.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제자이며 말년에 부안 계화도에서 강학하여 많은 문도를 배출했다. 「간재사고 (艮齋私稿)」를 남겼다.
정운오(鄭雲五): 1846-1920. 호는 벽서(碧棲), 본관은 연일(延日),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송병선(宋秉璿)과 종유(從遊)하였고 「벽서유고(碧棲遺稿)」를 남겼다.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자는 백응(伯應), 호는 매산(梅山),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남양(南陽).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의 제자로 젊어서부터 과거에는 뜻이 없고 오직 수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전해 진다.
梅溪處士 安後相과 木美庵
편 찬 : 安泰淳, 安日淳, 安德淳, 安鍾弼, 安秉五
번 역 : 安東敎(전남대 철학과)
발행일 : 2003년 7월 11일
발행처 : 竹山安氏 牛峯派 宗親會
인 쇄 : 도서출판 라 이 프
ISBN 89-954182-2-2 93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