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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로, 1174년(명종 4) 조위총의 난 때 원수 기탁성의 휘하에서 용감히 싸워 별초도령이 되었으며, 뒤이어 섭장군이 되었다. 1196년에 아우 최충수, 생질 박진재 등과 함께 당시 실력자 이의민(李義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집권하고 나서 그동안 누적되었던 폐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봉사십조>를 올려 집권의 명분을 삼으면서 왕의 측근 50인을 추방하고 좌우승선을 거쳐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그해 9월에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하자 왕을 창락궁에 유폐한 뒤 신종을 즉위시키고, 자신은 정국공신에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 주국이 되어 최씨 독재정권의 길을 텄다.
1198년(신종 1)에 만적(萬積)의 난을 평정하고, 그 이듬해 황주목사 김준거 등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였다. 1204년 신종을 폐하고 희종을 옹립한 후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 상주국 판병부어사대사 태자태사에 오르고, 1206년(희종 2) 진강후가 되고 흥녕부를 세웠는데, 이때부터 그를 시종하는 문객이 3,000여인이나 되었다. 1211년 내시낭중 왕준명 등의 계책으로 궁궐에서 죽을 뻔하였으나, 도방의 구출로 살아난 뒤 왕을 원망하고 이를 폐위하여 강화로 내쫓고 강종을 즉위시켰다.
이듬해 그의 흥녕부를 고쳐 진강부라 하였으며,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에 봉하여졌다. 무신정권 수립 이후 하층구조와 사원 세력에 의한 반란이 거듭 일어났는데, 최충헌이 집권한 뒤에도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1198년에는 개성에서 만적의 난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에는 명주(지금의 강릉) 및 동경(지금의 경주)에서 도둑이 일어나 주군을 약탈하였으며, 최대의 등이 난을 일으켰다. 또한, 1200년에는 진주의 관리 정방의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금주(지금의 김해)에서는 잡족인이 난을 일으켜 호족을 죽였으며, 1202년에는 탐라(지금의 제주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경주에서는 별초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영주 부석사와 대구 부인사의 중들이 반란을 꾸미다가 잡혀 귀양갔다. 이렇게 거듭 일어나는 반란에 대하여 강경책을 써서 토벌을 강행하는 한편, 회유책을 써서 반란을 진압시키는 데 성공하여 그로 하여금 강력한 집권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중요한 뒷받침이 되었다.
서희
고려 전기 거란의 침입을 외교력으로 해결한 문신.
내의령을 지낸 서필의 아들이다. 조부 서신일 생존 때까지는 이천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년(성종 2)에는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가 되고 이어서 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정치적 활동에서도 중책을 맡았으나 외교적으로도 이에 못지않은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 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그가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 10월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이때 거란은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끼고 동경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귀주와 태천의 중간지점인 봉산을 격파하고 계속 칩입할 태세를 갖추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서희는 할지론에 적극 반대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왕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때 마침 소손녕도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에게 패하여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서희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하여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하였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으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로 논한다면 귀국의 동경(곧 요양)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귀국과 친교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하며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이러한 서희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흥화진 등에 강동6주에 성을 쌓아 대북방 군사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서희는 성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성종 15)에 병으로 개국사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천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강감찬
고려 전기의 명장으로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수.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에서 금천(衿川 : 지금의 서울 금천구)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며,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의 아들이다.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예부시랑이 된 후 한림학사·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1018년(현종 9)에는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와 서경(지금의 평양) 유수를 겸하였다.
당시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자주 고려에 칩입하였는데, 해를 거듭하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를 보지 못하자 1018년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삼아 고려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12월 10일, 소배압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강감찬은 총사령관격인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20만 8천의 대군을 이끌고 안주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그는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전진하여 정예기병 1만 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인 삼교천을 막아두었다가 적군이 달려오자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적을 수장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지금의 개성)을 침공하려고 남진하다가 강민첨의 침공을 받아 자주의 남쪽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대패하였다.
거란의 소배압은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남진하여 이듬해에는 개경을 위협하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전선에서 1만명의 병력을 후송 배치하여 개경을 방어케 하고 동북지방의 3천 병력도 들어와 원조케 하는 한편, 도성 밖의 백성들을 성 안으로 철수시켜 거란군에 대항하였다. 거란군이 거듭되는 패전으로 사기를 잃은 데다 수도 일원의 방비도 철통 같았으므로 소배압도 개경 공략이 불가능함을 알고 철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군 도중 영변에 이르렀을 때 고려군의 습격을 받아 5백여의 군사를 잃고, 2월 1일 귀주에서는 강감찬의 맹공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어 침입군 10만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2월 6일 강감찬이 3군을 거느리고 개선하자 현종은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친히 금화팔찌를 머리에 꽂아주는 등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귀주대첩 후 거란은 침략 야욕을 버리고 고려와 평화적 국교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감찬은 이후에도 개경에 나성을 쌓을 것을 주장하여 국방에 큰 공을 세웠으며, 말년에 문하시중(재상)이 되어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며 나라를 다스렸다. 재상으로 있을 때 중국 송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문곡성을 못 본지 오래 되었는데, 그 별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면서 강감찬에게 하례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 수태사 겸 중서령에 추증되었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낙성대(落星垈, 서울시유형문화재 제4호)는 바로 강감찬의 출생지를 기념하여 세운 유적지이며,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묘청
고려 인종 때의 인물로 서경(평양) 출신의 승려였다.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白壽翰)을 통하여 인종의 근신(近臣)들과 접촉하였고,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등과 함께 서경출신의 정치세력들을 결집시켰다. 묘청은 개경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을 내세워 서경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 등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경세력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김부식(金富軾) 등 개경세력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234년 삼중대통지누각원사에 올라 왕에게 서경천도를 계속 청하였으나, 1235년(인종 13) 서경천도가 불가능해지자 조광(趙匡), 유참, 조창언(趙昌言) 등과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천견충의군(天遺忠義軍)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묘청의 반란군은 김부식을 원수로 한 고려 조정의 진압군에 의해 토벌되었고, 묘청은 부하 조광에게 피살된 후 개경에 효시(梟示)되었다.
태조
유리왕의 손자, 고추가 재사(再思)의 아들로, 이름은 궁(宮)이다.
재위 기간 동안에 대외 정복사업을 활발히 벌여 동옥저를 비롯한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하고, 나아가 중국 후한의 세력권인 요동과 현도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였다. 105년 현도군을 공격하여 무순방면으로 몰아내고 나아가 요동군의 여섯 개 현을 공격하고 돌아왔다. 121년에는 후한의 유주자사 풍환(馮煥)이 현도태수 및 요동태수와 함께 쳐들어오자, 거짓항복으로 지연작전을 전개하고 별도로 정예병 3천명을 동원하여 요동·현도 양군의 중요 거점지역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현도군의 후성(候城)을 불태우고 군민 2천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해 12월에는 무순으로 이동한 현도성을 다시 공격하였다가, 2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현도성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부여왕자 위구태(尉仇台)와 현도성의 협공을 받아 군사 500여 명을 잃고 후퇴하였다. 그 후, 146년에 다시 기습적으로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가족을 생포하기도 하였다.
태조왕은 고구려의 영역을 동쪽으로 창해(滄海), 남쪽으로 살수(薩水)까지 확장하였고, 일찍부터 요동과 현도 지역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여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중국 후한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투항해온 주변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왕권 아래에 흡수하고, 각 지방을 순행하여 이들 지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키고, 계루부에 의한 왕위계승을 확립시켜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홍건적
몽골족에 의해 세워진 원(元)나라에서 가장 혹독한 민족적 차별과 가렴주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남송(南宋)의 통치하에 있었던 남인(南人)이었다. 강남 지방의 한인 가운데서도 지주계층은 원(元)제국의 국가 권력에 기생하면서 이민족 왕조에 의지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전호와 중소 농민의 몽골인에 대한 반감은 심각하였다. 유목민인 몽골인은 농업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토지를 빼앗기도 하고 가혹한 세역을 부과하였다. 그러므로 농민은 정복자인 몽골인과 그 밖에 지주, 상인, 고리대자본가의 이중적 수탈을 받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이에 원말 많은 중국 각 지방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하남(河南)지방에서 봉기한 무리들이 홍건적(紅巾賊)이었다. 백련교도인 한산동(韓山童)은 자신이 미륵불의 환생이라 하여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유복통(劉福通)은 한산동(韓山童)을 송 휘종의 8세손이라고 선전하였다. 한산동(韓山童)은 이후 관군에 잡혀 처형되지만 유복통(劉福通)은 홍건(紅巾)으로써 표식을 하고 각지를 공격하고 다녔다. 후에 한산동(韓山童)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1차 침입은 공민왕(恭愍王) 8년(1359)에 있었다. 홍건적(紅巾賊)은 2월에 고려에 글을 보내 침입을 예고하였고, 그 해 11월에 3,000여 명이 건너와 약탈함으로써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압록강의 얼음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함락시키고 부사 주영세(朱永世)와 의주(義州) 주민 천여 명을 살해하였으며, 그 다음 날에는 정주(靜州)(지금의 의주(義州) 부근)를 함락시켰다. 한 때 서경(평양)까지 함락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계속되는 반격으로 전세가 고려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공민왕(恭愍王) 9년 정월 정미(丁未)일에 마침내 서경 탈환 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내몰았다. 후퇴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옛 선주에 이르러 적 수백 명을 무찌르니 남은 적의 무리 3백여 명이 의주(義州)에서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후 고려는 적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고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10월 홍건적(紅巾賊)이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다. 이들은 개경까지 진격해 내려오니 난을 피하기로 경정하고 개경의 부녀자와 노약자를 먼저 성 밖으로 내보내니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11월 18일에 홍건적(紅巾賊)의 선봉대가 흥의역(興義驛: 현재 황해도 우봉)에 이르러 개경을 압박하자 공민왕(恭愍王)은 그 다음날 태후, 공주와 함께 남쪽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공민왕(恭愍王)은 안동까지 내려갔고, 그 곳에서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아 교서를 내려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은 개경을 함락시킨 후 수개월 동안 주둔하면서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한 홍건적(紅巾賊)의 개경 점령과 약탈에 대항하여 곳곳에서 저항을 하였고, 고려 조정도 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군대를 정비토록 하여서 공민왕(恭愍王) 11년 정월 눈과 비가 내려 적들의 방비가 늦추어진 틈을 타서 개경을 포위하고 총 공격을 하였다. 특히 이성계(李成桂)는 휘하의 친병 2천여 명을 이끌고 먼저 성에 올라 적을 격파하여 나머지 군사들의 사기가 고무되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노국공주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비. 보탑실리공주(寶塔實里公主)라고도 한다. 원(元)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1349년 원나라에서 공민왕과 결혼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난산(難産)으로 죽었다. 그녀가 죽은 뒤부터 왕은 상심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히 왕비의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불사(佛事)를 일으켜 혼제(魂祭)를 지내고 화려한 영전(靈殿)을 지었다.
호족
호족이란 신라말과 고려초의 지방세력을 일컫는 말로 신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 독립하여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정권다툼에서 패배한 중앙귀족,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 해상세력, 지방군진세력, 초적 등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신라를 붕괴시켜 중세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을 촉진시켰으며, 신라말과 고려초 지방사회와 정치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고려에 의해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그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여 성종대(재위 981∼997) 이후 일부 세력은 중앙의 관리층으로 흡수되고 대다수 지방세력은 향리층으로 전락하였다. |
고려청자 - 청자상감국화문탁잔[靑磁象嵌菊花文托盞
높이 12.5cm 인 상감청자(象嵌靑磁)의 한종류. 잔대와 잔이 완전하게 갖추어진 매우 조형미 넘치는 우수한 작품이다. 잔대와 잔이 모두 10엽 화판(花瓣)으로 이루어졌는데, 잔대의 굽은 약간 높게하여 각 면에 모란절지문을 넣고, 잔대의 전에도 화판 각면에 국화절지문을 배치하였다. 잔받침은 빙 둘러 복련으로 배치하였다. 잔은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기름한 판면(瓣面)에 굽도 역시 좁다란 화판으로 되어 밑이 나팔처럼 벌어졌고, 국화잎이 상하로 연속된 입국절지문을 베풀었다. 고려시대 탁잔의 양식은 원래 당송(唐宋) 기명(器皿)의 형태에서 유래하였지만 12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기형(器形)과 유태(釉胎)에 고려적인 특색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후 12세기 후반 청자 상감 시대가 되면 잔의 비례가 고준(高峻)해지고 전체의 균형과 조화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탁잔은 전체적인 비례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초기의 작품으로서 12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며, 잔의 꽃잎 끝 부분이 산(山)처럼 뾰족해졌고, 잔대의 전이 사면(斜面)을 이루었고 굽이 훨씬 높아지는 등, 전 시기에 비해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잔의 바깥 면과 잔대의 전에 국화 무늬가 흑백상감되었다. 유약은 옅은 녹색을 띤 맑은 비색유(翡色釉)이며 그물꼴의 빙렬(氷裂)이 있다. 굽다리 밑에 규사눈 세 개를 받쳐 구운 자리가 있다.
삼별초 항전
삼별초는 경찰로서의 치안유지 및 무인집권자들의 정권유지 기반의 역할을 했다. 또한 대몽항쟁기에 모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씨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무인집권자들의 권력쟁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력이었다. 고려 왕실은 대몽강화를 주도하면서 무인집권기에 빼앗겼던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인 삼별초를 해체했고, 이는 곧 삼별초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삼별초가 봉기했다. 한편 대몽강화 후 국왕 측근의 문신들이 몽골과 친선유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무인들의 집권을 방지하려 한 데서 비롯된 무인들의 반발과, 몽골의 압력에 의한 일본원정 준비로 고려가 입는 막대한 피해와 희생도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항쟁에는 몽골에 대한 고려의 종속을 막자는 의도도 있었다. 1270년 장군 배중손(裴仲孫)은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熺)와 함께 삼별초를 이끌고 항전을 일으켰다. 양반과 백성들을 강화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세웠다. 그러나 양반관리들과 군사들이 강화도를 빠져나와 육지로 도망함으로써 사태가 불리해지자, 선박을 모아 재물과 백성·노비 등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삼았다. 진도로 옮긴 삼별초 정권은 그 기세를 크게 떨쳐 남해(南海)·창선(彰善)·거제(巨濟)·제주(濟州) 등 30여 개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했다. 육지에도 세력을 뻗쳐 육지의 물자를 진도로 옮겨 항전의 태세를 굳게 하고 장흥(長興)·합포(合浦:지금의 馬山)·금주(金州:金海)·동래(東萊) 등 연안 요지를 비롯하여 전라도 등지를 공격하여 그 위력을 떨쳤다. 이에 따라 조운(漕運)이 막힌 개경 정부는 경제적으로 큰 위협을 받았다. 이렇게 삼별초가 진도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자 주군(州郡)이 호응하여 진도까지 가서 알현했으며, 육지의 봉기세력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는 형편이었다.
한편 개경 정부는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가자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몽골군과 함께 이를 쫓게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새로 김방경을 전라도토역사(全羅道討逆使)로 삼아 몽골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완강히 저항하는 삼별초의 기세를 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해는 겁을 먹고 후퇴했다. 몽골은 아해를 소환하고 흔도(都)로 대체시키는 한편, 군대를 증강했다. 고려에서도 양반·백정(白丁)·잡색(雜色)·승도(僧徒)를 징발하고 다시 지방군까지 동원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이리하여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1271년 5월에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폈고, 진도는 이들에게 함락당해 승화후 온과 배중손이 여기에서 죽었다. 이에 삼별초는 다시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그 근거지를 탐라(耽羅:濟州道)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항거 했다. 개경 정부는 몇 차례 회유했으나 실패하자 김방경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편성, 탐라를 공격하여 1273년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골과 강화한 뒤 민란으로 인해 민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왕실, 친몽골파 귀족들과 대립되는 친무인파와 기존의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고려 정부와 원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삼별초 항쟁의 좌절은 민의 역동적인 사회변화 의식을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14세기 민의 움직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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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206&mode=title&query=%C8%A3%C1%B7&dircode=0
9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255&mode=title&query=%B0%ED%B7%C1%C3%BB%C0%DA&dircode=0
10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90303&mode=title&query=%BB%EF%BA%B0%C3%CA&dircode=0
소감:이번 역사 숙제는 선생님이 복사를 하라 그래서 시간은 걸렸는데 그래도 다른 날 보다는 시간이 덜 걸린것 같다 그리고 찾다 보니까 고려청자 중에서도 종류가 많이 있다는 것을 이번 시간에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싸 1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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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최중헌이아니라 최충헌 아닌가요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네 고쳤습니다.
박창석군 위에 왕관이 왜쓰여져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