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음악에 있어서 '고전(classic)'이라는 의미는 고전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일반적인 분류와 그리고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활동한 1750∼1820년경까지의 음악에 적용되어 왔다. 다른 음악사적 시대 분류도 그렇지만 고전음악을 구분하는 이 시기도 엄격히 적용될 수는 없다. 고전적이라고 할만한 음악양식의 특성은 이미 바로크 말기부터 나타났으며 상당수의 바로크 시대 음악형식은 고전주의 시대에 와서도 명칭만 달라졌을 뿐 내용은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대를 정의할 수 있는 음악적 특성이 불명확하다는 말은 아니다.
고전 시대의 음악을 정의할 수 있는 배경은 이 시대의 철학사상으로부터 기인된다. 당시의 사회적 추세는 계몽주의 철학으로 시민권이 향상되고 자유주의의 물결이 일어나 예술 분야도 과거처럼 종교나 특정인만이 향유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게 수용되었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져서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과 균형의 조화를 추구하는 음악을 지향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위적인 음악보다는 호모포니적인 음악을 선호하였고, 개성적인 감각의 성악음악보다는 기악음악이 인기가 있었다. 이제 작곡가들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음악 기법을 창안하는 노력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소나타 형식(sonata form)'이라는 정격화된 형식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시대는 형식의 범주 안에서 단순 명료하고 질서와 절제를 중시하는 인간적인 음악이 주가 되어서 종교음악 분야는 음악 사상 처음으로 침체 국면을 맞게 된다.
음악의 객관적인 형식을 중요시한 고전주의 작곡가들은 기악음악을 선호하게 되었고 기악음악을 통하여 정격화된 형식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특히 교향곡에는 악장의 개념과 소나타 형식을 정착시켰는데 이는 다른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관현악의 편성도 근대화되고 악기도 더욱 개량되어서 장려한 교향곡의 음향을 창출해 내었다. 실내악 부문도 발전을 가져왔는데, 특히 현악4중주가 인기가 있었다. 독주악기를 위한 소나타로는 이 시대에 와서 구조적으로 개선된 피아노의 발전에 힘입어 피아노 작품이 두드러진다. 협주곡에서는 독주 부분이 합주 못지 않게 중요성을 띄면서 강한 대조 효과를 만들어 고전 협주곡의 새로운 특성을 과시하였다.
성악음악에서는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를 들 수 있는데 전반적으로 커다란 발전은 없었다. 특히 고전 시대에 이르면서 종교음악은 침체되어 바흐와 같은 대작곡가도 잊혀지고 있엇다. 그러나 하이든의 <천지창조>, 모차르트의 <레퀴엠>, 베토벤의 <장엄미사>등과 같은 걸작들이 이 시기에도 꾸준히 작곡되었다.
바로크 시대 말기부터 이탈리아 나폴리 오페라가 극의 내용을 무시하고 성악적 기교만을 과시함으로써 야기시킨 문제점은 전고전 시대부터 서서히 제기되었고, 고전 시대에 이르러 오페라 개혁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글룩의 오페라 개혁 운동은 오페라의 종합적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풍토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 시대에 가장 빛나는 오페라 작곡가는 모차르트이다. 음악의 형식적인 개혁이나 독창성은 없었으나 그의 천부적인 창의력의 산물인 <마적>, <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등은 오늘날에도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 레퍼토리 중의 하나이다.
역사적배경 고전주의 시대로 분류하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의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가 있었다. 이성의 시대와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이 시기는 칸트(Kant)이외에도 볼테르(Voltaire), 루소(Rousseau), 레싱(Lessing), 아담 스미스(Adam smith)등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철학사상이 점철된 시기였다. 자유주의 사상과 세계주의적인 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시민정신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을 촉발시켰고, 과학 분야에서는 영국의 산업혁명을 추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셉2세는 교육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 형제애, 종교의 관용을 증진시켰고 전시대까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예술과 문화를 대중이 보다 폭 넓게 향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시대의 화가로는 바토(Watteau), 고야(Goya), 다비드(David) 등이 유명하였다. 음악은 교회와 궁정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지역사회에서도 점차 생활화되었고, 아마추어 음악가들도 많이 생겨났다. 18세기 말에 접어 들면서 여러 도시를 돌며 연주하는 직업연주가들이 많았고 연주회에는 입장권이 등장하였다. 음악이 이처럼 대중화되었어도 교회와 궁정의 후원없이는 아직도 자립은 힘든 상태였다. 교회는 여전히 음악의 중요한 후원자로 남아서 연주와 창작활동을 도왔고, 궁정과 귀족의 후원은 계속됐으나 음악가들의 독립적 활동에 대한 후원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특징 고전주의 음악은 1750년 이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전고전 양식에서부터 찾을 수 있겠지만 성숙된 고전음악은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양식으로 대표할 수 있는 빈 악파의 시대에 와서 시작된다. 빈 악파의 음악과 함께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추구하였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은 일정한 형식과 규칙을 필요로 하였고 이에 따라 작곡가들은 소나타 형식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후 소나타 형식은 다악장 음악의 구조적인 원칙을 제공하면서 고전주의 음악의 주된 음악형식이 된다. 바로크 시대의 장려하고 복잡한 음악을 피하고 균형과 절제가 강조되는 단순 명료한 음악은 고전주의 작곡가들의 이상이 되었다. 대위법은사라지지 않고 대조나 발전을 위해서 부분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호모포니 구조를 음악 구성의 기초로 삼았다. 새로운 화성재료는 언제나 명확한 화성을 사용하였고, 조(調)와 조 사이에는 화성적인 조건을 전제로 하였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교향곡, 소나타 등을 포함한 기악음악이 성악음악에 비하여 더욱 중요시되었다. 대부분의 기악음악은 바로크 시대의 기악음악에서 유래되어 고전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변모되고 발전되었다. 오페라는 개혁 운동이 있었지만 획기적인 변화는 없었다. 다행히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있어서 고전 시대의 오페라는 명맥을 유지하였다.
고전주의의 연결자 바하
바하의 작품은 47권의 전집으로 되어 있고, 죽은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널리 연주되고 있다. 바하는 1685년, 중부 독일의 튀링언 州의 아이세나하 市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거리의 악사였고, 삼촌도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다. 바하는 이러한 음악적인 피를 이어받고 있었으므로 음악가가 된 것이지만 그러한 유전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가 나면서부터 음악적인 공기를 호흡하고 음악적인 자극을 받았음은 사실일 것 이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행복한 날은 얼마 계속되지 못하였다. 9세때 어머니를, 그 이듬해에 아버지를 여인 바하는 오르소르프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있던 맏형 요한에게로 가게 되었다. 이 형은 바하 이전의 중남미 독일의 최대의 오르가니스트 였던 요한 파헬벨에 사사한 일이 있었다. 바하는 형 요한을 통하여 훗날 "파헬벨 코랄'이라 불리는 코랄 전주곡의 작곡 수법이라든가 간결하고도 요령있는 푸가의 서법을 배웠다. 1703년 4월, 18세가 된 바흐는 처음으로 바이마르 궁전 악단에 바 올리니스트로 취직하게 되었다. 같은해 8월부터 그 근처의 아른슈타트(1703-1707), 뮐하우젠(1707-1708)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일했는데, 이 시대가 바하가 작곡가로써 활동한 초기이다. 연구심이 왕성하고 혈기에 넘치는 바하는 열성을 다해 일하는가 하면 때로는 내동댕이친채 아랑곳하지 않았으므로 물의를 일으켰다.
특히 유명한 이 시대의 일화요, 말썽거리는 1705년의 뤼베크방문이었다. 바하는 이 해 10월 한 달의 휴가를 얻어 뤼베크로 향했다. 북스테후데의 음악에 매혹된 바하가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아른슈타트의 성직 회의는 바하를 호되게 문책하 였다. 그 문책의 문서에는 직무를 소홀이 하였다든가, 성가대 훈련에 무성의하였 다는 문책이외에도 오르간 코랄연주에 귀에 설은 음을 많이 섞었으며 거기에 대해 문책을 받자 극단적으로 짧게 했다는 조목이 있다. 아직 완성도 상에 있는 바하의 인품을 엿볼수 있어 흥미롭다. 그는 이 직책에서 물러난 다음 뮐하우젠으로 간다. 뮐하우젠의 교회오르가니스트가 된 바하는 아른슈타트에서 알게 된 먼 친척뻘인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바하가 뮐하우젠에 있던 기간은 1년 정도였으며 별로 신통한 공적은 남기지 않았으나 바야흐로 오르가니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소수의 교회 칸타타 작곡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 시대의 그의 칸타타는 바이마르 후기 이후의 작품에 비교하면, 아직 이탈리아풍의 레시타티브와 아리아의 영향이 적고 북독일풍의 중후한 모데토 스타일의 칸타타 작풍에 따라 솔로와 중창, 합창이 매우 유연하게 추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르간 음악의 거장인 젊은 바하는 명연주자였을뿐 아니라 뛰어난 설계자요, 동시 연주자이기도 했다.그는 오르간 개조에 대한 의견이라든가 새 오르간 감정과 시주에 대한 의뢰를 받기도 했다. 바하는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바이마르 궁전에서, 그 당시 갓시작된 이탈리아 협주곡의 세계에 눈을 뜬 것이다. 중후하고 폴리포닉한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음악과 라틴적인 명쾌한 형식감을 지닌 협주곡의 형식은 이내 바하를 사로 잡았다. 이윽고 알비노니, 마르첼로 등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그것을 오르간 또는 쳄발로 독주용으로 편성한 수 많은 작품을 쓰게 된다.
1717년의 연말 바하는 바이마르를 떠나 작센지방의 소도시 쾨텐으로 옮겨 가, 그 곳 궁전 악장이 되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당시 23세의 안할트 쾨텐의 군주 레오폴트였다. 이 젊은 영주는 아름다운 테너 음성을 가지고 있었다. 궁정악단에도 참가하여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고, 쳄발로 앞에 앉아 통주저음의 반주를 맡을 정도로 아마추어의 범주를 넘는 음악가였다. 쾨텐의 궁정악단에는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시피스 외에 궁정악사 자격을 가진 비올라 다 감바의 명수 아벨, 그리고 풀룻의 베르디히와 프라이타크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바하는 이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실내악곡을 만들었는데,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이 6곡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와 6곡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쾨텐 시대의 바하는 후에 젊은 시절의 친구 에르트만에게 보낸 편지속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음악을 사랑하고, 또한 음악에 조예가 깊은 군주를 모시고 그 분 밑에서 평생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언제까지나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1720년 초여름, 그가 군주를 따라 보헤미아의 피서지 카를스바트에 갔다가 7월에 돌아와 보니 그의 부재중에 아내가 이미 죽어 장례식까지 끝나 있었다. 1723년 봄 바하는 라이프리치히의 성 토마스교회 부속학교의 합창장으로 옮겨갔다. 그때 39세의 바하는 65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27년간을 이 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 시기를 통해서 그는 고금의 대작곡가 바하로부터 차츰 시대에 뒤처지는 고고한 거장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라이프리치히 시대의 최초의 약 7년간에 바하는 오늘날에 현존하는 그의 교회칸타타 약 2백곡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작품을 썼다. 바하는 이 작품들을 성토마스 교회 부속학교의 30명 남짓한 합창대와 10여명도 채 안 되는 관현악으로 연주해야만 했다. 1730년 이러한 연주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건의서를 라이프니치 시의회에 제출하였으나 무시당하자, 그 즈음부터 차츰 교회 음악에 대한 열의를 잃게 되었다. 그 후의 대작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1734)"는 의외일 만큼 전작으로부터 많이 차용했고 미사곡 b단조는 라이프니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드레스덴 선제후의 궁정 예배당을 위해 씌어졌다.
바하는 만년의 1741년과 1747년의 두 번에 걸쳐 베를린을 방문했고 대왕 프리드리히 2세의 궁전에서 오르간과 쳄발로의 묘기를 피력하였다. 최초의 방문때는 베를린주재 대사를 섬기던 골든베르크를 위해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작곡하였고, 두번째 방문때 "음악의 헌정"이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받쳐졌다. 1750년 전 해에 일어 났던 뇌졸증의 발작과 시력감퇴로 체력이 두드러지게 약해졌는데, 수술과 치료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해 7월 28일 밤 8시 45분, 사랑하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65세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바하는 죽고 가족은 흩어져으며 그 악보는 산일하였다. 바하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거의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하의 작품은 지금 인류의 가장 귀중한 보물의 하나로 되어 있다. 현대의 서양 클래식음악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진다 해도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만 남아 있다면 현재의 음악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할 만큼 음악사에서 바하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얼마나 큰 것인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은 바하를 가리켜 "작은 개울이 아니라 드넓은 바다"라고 한 것은 베토벤 역시 바하의 풍부한 독창성과 그의 창조성, 다양성등을 알아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2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바하의 모든 곡들과 정신과 영혼이 음악가에게 살아 있는지 모른다.
하이든
하이든은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 양식의 대표자로 인정받았지만 그는 이미 전시대의 양식을 경험했고 직접 사용도 하였으므로 그의 작품에는 바로크의 모든 양식과 전고전주의의 갈랑 양식, 엠핀트자멜 양식, 질풍노도 양식의 특징들이 자주 나타난다
하이든의 교향곡들이 인기가 높아지자 다른 작곡가들이 작곡한 교향곡들을 하이든의 작품으로 가장하여 출판한 사례가 많았다. 이로 인해서 하이든이 정확하게 몇 곡의 교향곡을 썼는지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략 106곡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이든의 교향곡은 대부분이 에스테르하지 궁정을 위해서 작곡되었으나 전체적인 작품 목록으로 볼 때 이들 교향곡들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a)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들어가기 전 잠시 모로친 궁정에 있었을 때 작곡된 5개의 교향곡
(b) 에스테르하지 궁정을 위해 작곡된 제6~81번 교향곡
(c) <파리 교향곡>, <런던 교향곡>을 포함하여 개인적으로 위촉받은 교향곡
초기 교향곡들은 일정하게 표준적인 악장 구조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4악장으로 구성된 곡도 몇 곡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교향곡은 전고전주의 신포니아에서 유래한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구조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들은 새로운 고전양식과 바로크적인 옛 양식이 자주 혼합되어 나타난다. 관현악 편성에서는 여전히 하프시코드를 사용하고 있다. 1770년경까지 하프시코드는 하이든 교향곡의 필수적인 악기로 나타난다. 초기 50여 개의 교향곡의 관현악 편성을 보면 일반적으로 2개의 오보에, 2개의 호른, 현악기와 하프시코드가 있는 콘티누오로 구성된다. 제20번 이후의 작품부터는 다른 악기들이 간헐적으로 삽입되는데 제20번에는 2개의 트럼펫이, 22번에는 2개의 잉글리시 호른(English horn)이 들어 있다. 제70번을 시작으로 하여 1779년 이후의 작품에는 플루트가 지속적으로 편성되어 있다.
1760년대의 교향곡에는 실험적인 요소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제31번(D장조)에는 당시 교향곡에서 일반적으로 2개의 호른을 사용한 것에 비해 4개의 호른을 사용하고 있고, 첫 악장도 독주 호른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Horn signal'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었다.
1760년대 말에 이르면서 하이든은 보다 내면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단조의 조성으로 된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단조 교향곡은 구양식을 탈피해서 새로운 질풍노도 양식으로 도입하려는 하이든의 의지가 보여지는 작품들이다.
1768~1773년까지 하이든은 전과 달리 많은 단조 교향곡들 (제26, 39, 44, 49, 52번)을 썼다. 1771년부터 작곡된 교향곡 제42~48번, 50~52번, 54~56번, 65번은 초기 교향곡들보다 규모가 크다. 화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악상 변화가 빈번하며 느린 악장에서는 현악기에 약음기를 사용할 만큼 감정으 표현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조성의 선택에서도 18세기로서는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F#단조(제45번), B장조(제46번), F단조(제49번)등을 사용하였다. 제45번 <고별>교향곡은 제1악장 F#단조, 제2악장 A장조, 제3악장 F#단조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조성 변화도 흔치 않은 예이다. 마지막 끝부분의 Adagio에서 연주자들은 자신의 연주가 끝나면 악기를 정리하고 보면대 위의 촛불을 끄고 퇴장해 버리며 단지 두 명의 연주자만 남아서 작품을 끝맺기 때문에 <고별>교향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처럼 악기편성을 축소해 나간 이유는 휴가 중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연주단원들이 휴가를 받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간청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45번은 악기 편성 뿐만 아니라 제1악장의 발전부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이든으 교향곡 중에서도 유일하게 발견되는 창작기법이기도 하지만 이 당시의 다른 고전음악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밖에도 1780년대의 교향곡에서 하이든은 때때로 마지막 악장에 론도 소나타(rondo sonata)형식을 사용하였다. 1782년에 작곡한 제77번의 마지막 악장에 처음으로 론도 소나타 형식을 사용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7개의 부분으로 된 론도(ABACABA)와 유사하다. 처음의 ABA는 제시부, C는 발전부, 마지막 ABA는 재현부로 취급된다. 론도 소나타 형식은 하이든보다 모차르트의 작품에서 먼저 나타났다.
1785년에서 이듬해까지 파리에서의 연주회를 위해 작곡된 파리 교향곡(제82번~87번)과 1787~1788년 사이에 작곡한 5개 교향곡(제88~92번)은 하이든으 성숙기를 대표하는 교향곡들로 고전 교향곡의 모델로 간주되는 작품들이다. 82번과 85번 등 몇 곡은 작품 속의 악구(phase)에 나타난 특징 때문에 별명을 갖고 있다. 82번은 춤곡같은 마지막 악장에 단조로운 저음반주가 나온다고 해서 'Lours(곰)'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85번은 여왕 마리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가 좋아했던 프랑스 선율의 변주곡이 나온다고 해서 'La Reine(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교향곡 제88번~92번은 대부분이 위촉작품으로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헌정한 제92번 <옥스포드>교향곡이다. 이 기간에 작곡된 교향곡들에는 첫 악장에 느린 도입부가 나타나고, 마지막 악장에는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는데 특별히 대위법적인 기법들이 많이 나타난다. 제88번으 마지막 악장의 카논은 이러한 예를 반영하여 준다. 교향곡 제93~98번, 99~104번은 두 차례의 런던 방문 때에 작곡된 곡들이다. 12개에 달하는 이들 교향곡은 런던의 청중들을 위해 작곡되었다고 해서 '런던 교향곡'이라 하기도 하고, 음악 흥행을 주선하는 잘로몬(Salomon)의 협조하에 작곡되었다고 해서 '잘로몬 교향곡'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들은 고전 교향곡의 정수이자 하이든 교향곡으 최고의 작품들이다. 오늘날 하이든을 대표하는 교향곡들은 대부분이 이12개의 교향곡을 가리킨다.
이 교향곡들은 전형적인 고전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었지만 대부분이 1악장에 프랑스 서곡에서 유래한 느린 도입부를 사용하였다. 도입부의 조성은 교향곡 본래의 조성으로 시작되지는 않는다. 104번은 D장조이지만 도입부는 D단조로 시작한다. 긴 도입부는 코다에서 다시 확대, 발전시키므로 작품의 균형감을 잃지 않게 한다.
하이든은 민속 선율에서 주제를 선택하기도 하였다. 103번의 1, 2악장과 104번의 마지막 악장은 민속 선율에서 주제를 차용한 것이다. 제99, 100, 103, 104번의 제1주제는 선율적 내용이 아니라 조성의 변화에 의해 딸림조로 제2주제에서 다시 나온다. 이와 같은 주제의 설정은 전형적인 고전 소나타 형식에 기초한 것이다.
런던 교향곡들 중에는 2악장의 특징 때문에 별명이 붙여진 교향곡들이 있다. 101번은 2악장에서 시계소리와 같은 규칙적인 리듬 때문에 '시계'라는 별명이 붙었고, 94번은 2악장에서 조용한 주제가 흐르다가 약박에서 갑자기 포르테(f)가 나오기 때문에 '놀람'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런던 교향곡'들의 악기 편성은 이전의 교향곡들보다 크고 다양하다. 2개의 트럼펫과 팀하니는 모든 '런던 교향곡'에 들어 있고, 100번 <군대>교향곡에서는 트라이앵글, 심벌즈, 큰북이 2, 4악장에 삽입된다. 마지막 6개의 '런던 교향곡'에서는 102번만을 제외하고 2개의 클라리넷이 사용된다.
하이든의 교향곡에는 바로크, 전고전주의, 고전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요소가 전부 들어 있다. 하이든은 초기부터 많은 실험적인 교향곡을 발표하다가 12개의 런던 교향곡에 이르러 고전주의의 완숙한 음악형식을 실현한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악기 편성도 크고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주제의 전개에서 호모포니와 대위법을 음악재료에 따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음악은 색채감이 넘치고 장대하여졌다. 교향곡에 나타난 하이든의 창작기법과 실험정신은 교향곡을 고전음악의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았고 모차르트, 베토벤을 비롯한 후기의 교향곡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오라토리오
하이든은 3개의 오라토리오만을 작곡했다. <Il ritorno di Tobia (토비아의 귀환, 1775)>는 아리아와 몇 개의 합창으로 구성된 이탈리아 양식의 오라토리오이다. 나머지 두 편의 오라토리오는 런던 방문 후에 작곡했다. <Die Schopfung (천지창조)>은 밀턴(John Milton)의 [실락원(Paradise Lost)]을 대본가 슈비텐(Swieten)이 각색한 것에 음악을 붙인 것이다. 헨델의 오라토리오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작곡한 이 작품은 독창(S.A.T.B), 4성부 합창, 하프시코드으 콘티누오, 3개의 트롬본, 팀파니가 포함된 오케스트라로 구성된다. 관현악 전주와 간주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조성과 악기 편성은 가사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풍과 파도치는 바다를 d단조로, 번개의 번쩍임은 플루트로, 큰 고래나 바다 생물들은 저음부 현악기로 묘사하였다. <천지창조>의 조성은 C단조로 시작되지만 혼돈에서 질서로 가면서 C장조로 정착된다. C장조는 영광, 권세, 위엄, 천국, 그리고 인간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작품의 끝 부분에서 아담과 이브의 멸망을 묘사할 때에는 Bb 단조가 사용되었다.
<천지창조>는 하이든으 교회음악을 대표할 만큰 뛰어난 작품으로 양식과 형식 면에서 교향곡, 미사, 오페라, 오라토리오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헨델의 <메시아>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작곡된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몇 편 안되는 걸작 중의 하나로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Die Jahreszeiten (사계)>는 시작과 끝 부분은 종교적이지만 다른 부분은 자연과 인간을 묘사하는 세속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선율적이며 아리아와 웅장한 합창으로 변화하는 계절의 전원을 묘사한 18세기 최고의 표제음악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사와 오라토리오 이외에도 하이든은 세속 칸타타와 무대 작품을 작곡하였으나 대부분이 분실되었고 일부만 남아 있다.
◆건반악기
하이든의 건반악기 작품들로는 대략 50여 곡의 소나타와 몇 곡의 협주곡, 몇 편의 주제 변주곡, 그리고 <카프리치오 G장조>, <판타지아 C장조> 등과 같은 성격적인 작품들이 있다. 50여 곡의 소나타 가운데 1750~1767년 상에 작곡된 초기 소나타들은 장조로 되어 있고, 음악 특징 면에서 디베르티멘토와 유사한 작품들이 많다.
현존하는 초기 피아노 소나타 가운데 4악장 구성으로 된 제6번과 8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3악장으로 되어 있다. 또한 1770~1780년 사이에 작곡된 4곡의 소나타인 제20번(C 단조), 제36번(E 단조), 제36번(C# 단조)등은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단조로 작곡되었다. 이들 작품들과 제25번 (Eb 장조)의 미뉴에트 악장은 전고전주으 양식, 특히 C. P. E. 바흐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후기에 작곡된 소나타에서는 하이든의 성숙된 고전양식이 발견된다. 소나타 제52번은 고전 소나타 형식으로 된 3악장 구성의 작품으로 하이든으 원숙한 현악 4중주에 비견할 만하다.
◆실내악
18세기 후반까지도 실내악이라는 음악 장르는 그 범위가 한정되지 않았다. 궁정에서 연주되었던 작은 합주와 독주곡들은 물론 교향곡이나 기타 관현악 작품들도 흔히 실내악이라 하였고, 19세기에 와서는 각 파트를 한 악기가 연주하는 합주음악을 실내악이라고 하였다. 하이든은 이 두 가지 형태의 음악을 모두 작곡하였다. 그의 실내악으로는 현을 위한 2중주(duo), 3중주(trio), 4중주(quartet), 5중주(quintet), 6중주(sextet), 그리고 바이올린과 건반악기를 위한 소나타, 피아노 3중주, 현과 목관악기의 다양한 혼합으로 된 3, 4, 6, 8, 9중주 음악들이 있다. 이러한 하이든의 실내악 목록은 실내악의 효시적인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든의 초기 4중주(현악4중주)는 디베르티멘토를 편곡한 형태와 유사하다. 실제로 하이든은 이들 작품의 상당수를 디베르티멘토라고 이름 붙였다. 이밖에도 Op.1의 4중주(No.5, in Bb 장조)는 하이든의 첫 교향곡을 인용하였다. 이러한 4중주들은 2부분 형식이고, 빠름-미뉴에트-느림-미뉴에트-빠름의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이든의 4중주에 삽입된 미뉴에트의 위치는 교향곡과는 달리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1780년대 이전에 쓴 초기 4중주는 고전양식의 현악 4중주로한정지을 수 없는데 이는 '현악 4중주'라는 명칭이 1781년에 작곡한 <6개의 4중주 (op.33)>에 처음으로 붙여졌기 때문이다. 1780년대의 현악 4중주들로는 op.33, op.42, op.50, op.54, op.55, op.60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기법과 형식 면에서 1780년대의 후기 교향곡들과 같다. op.33의 4중주는 러시아의 폴 공작을 위하여 작곡했기 때문에 <러시아 4중주>라고도 하고, 미뉴에트 악장 대신에 스케르초 악장을 사용한 유일한 현악 4중주이기도 하지만 여러 면에서 하이든의 새롭고 독특한 기법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가운데 제2곡의 1악장에서는 호모포니를 바탕으로 하여 대위법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주제를 발전시킨다. Op.33 중에 가장 유명한 4중주인 제3곡은 가볍고 즐거움이 넘치는 작품으로 <새>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Op.42의 D 단조 4중주는 하이든의 초기와 중기의 4중주 기법을 보여주고, Op.50인 <프러시안 (Prussian) 4중주>는 뛰어난 첼로 주자였던 빌헬름 2세에게 헌정된 작품이고 1788~1790년 사이에 쓴 12개의 4중주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토스트(Johann Tost)에게 헌정되었다. 토스트는 이 작품들을 Op.54(3개의 4중주, 1788), Op.64(6개의 4중주,1790)로 나누어 출판하였다.
하이든의 말기 현악 4중주들로는 op.71, op.74, op.76, op.77, op.103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하이든의 최고의 작품들로 완성된 고전 형식의 현악 4중주 기법을 보여준다. op.71과 op.74는 하이든이 런던을 처음 방문했던 1793년에 작곡되었다. 특히 op.74는 확대된 화성구조, 조성의 급격한 변화, 재현부 안에서 발전부와 재현부를 혼합하는 기법이 사용되어 낭만주의의 기법을 느끼게 한다.
op.76에는 원숙한 하이든의 양식이 나타나 있다. 제1곡 1악장에는 제1주제를 대담한 푸가로 전개시킨다. 2개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가 각각 옥타브로 진행되는 2성부 카논의 미뉴에트(Hexen menuetto, 마법의 미뉴에트)를 사용하고 있고, 제2곡 1악장의 제1주제에는 하행하는 5도가 사용되어 '4중주를 위한 5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제3곡 2악장은 찬미가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의 선율을 완전하게 차용한 변주곡이고, 제5곡은 낭만적인 라르고 악장이 유명하며 제6곡은 반음계와 빈번한 전조로 이루어지는 판타지아 아다지오(Fantasia Adagio) 악장이 특징이다. op.76의 6개의 작품들은 모두 스케르초의 특징이 나타나는 미뉴에트 악장(제3악장)을 사용하고 있다.
op.77의 제1곡(G장조)과 제2곡(F장조)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 가운데 기법적으로 그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마지막 현악 4중주 작품은 op.103(1803)은 느린 악장과 미뉴에트 악장만 작곡된 미완성 작품이다.
모짜르트의 음악
하이든과 함께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모차르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이미 6세 때에 미뉴에트를 작곡했고, 9세에 교향곡을, 11세에는 오라토리오, 그리고 12세에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음악 장르도 다양해서 교향곡이나 오페라와 같은 대규모의 기악곡과 성악곡에서부터 가벼운 소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서 받은 음악교육과 많은 연주여행을 통해 얻은 자연적인 체험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600여곡이 넘는 작품들에는 작품번호가 붙어 있지 않았는데 편집자 쾨헬(Ludwig von Köchel, 1800~1877)이 이 주제별로 분류하여 K.(Köchel)번호를 붙였다. 그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작품은 모두 626곡으로 알려져 있다.
짧은 생애에 비추어 많은 작품을 남긴 모차르트는 그의 생애에서 볼 수 있듯이 오스트리아라는 한 지역에서만 정착하지 않고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활동한 국제적인 작곡가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음악이 하이든이나 베토벤의 음악보다 더욱 다양한 소재를 선택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입증이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어느 한 국가나 민족의 음악만을 반영하지 않고 세계적인 음악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전주의 음악의 사상과도 일치하며 '절대음악(absolute music')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겠다.
◆ 오페라
모차르트는 1768년에 빈에서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La finta semplice(가장한 바보)>와 독일의 징슈필 <Bastien und Bastienne>를 작곡하였다. 이들 오페라는 J. C. 바흐의 오페라와 연주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 이탈리아의 오페라에서 감동을 받아 작곡되었다. 이 작품들은 어린 시절에 작곡된 것이어서 구성이나 내용이 미흡하여 모차르트 오페라의 계열에 올리지는 못하지만 이미 이 때부터 모차르트는 오페라에 대한 관심과 창작 열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오페라 부파(opera buffa), 그리고 징슈필(Singspiel)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 모두에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7편의 오페라 세리아는 성공적인 오페라들은 아니다. 이 오페라들은 전시대의 바로크 오페라를 답습하고 있으며 오페라의 종합성과 음악의 진행 면에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보여 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1781년에 작곡한 오페라 세리아 <Idomeneo (이도메네오)>는 극적인 합창, 아리아와 중창, 발레, 그리고 오페스트라가 적절하게 조합된 우수한 오페라이다. <이도메네오> 이후 작곡된 오페라 세리아오는 <La clemenza di Tito (티토의 자비)> 밖에 없다. 이 작품은 1791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의 왕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위해서 위촉받아 작곡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부파에서 더욱 큰 업적을 이루었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조잡한 형태의 오페라 부파를 예술적 수준의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고 나아가 고전 시대의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로 자리잡게 하였다. 모차르트의 희극 오페라는 단순한 희극적 오락성을 넘어서서 인간의 내면까지 표현하고 있다. 오페라에 대한 모차르트의 철학은 글룩과는 달랐다. 그는 바로크 시대 오페라의 문제점이나 개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듯하며 오페라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극의 내용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에게는 글룩의 주장처럼 음악이 대본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태어난 오페라들이 <Le nozze di Figaro (피가로의 결혼, 1786)>, <Don Giovanni (돈 조반니, 1787)>, <Cosi fan tutte (여자란 다 그런 것, 1790)> 등이다.
폰테(Lorenzo da Ponte)의 대본을 4막으로 구성한 <파가로의 결혼>은 18세기 이탈리아 양식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 인물의 성격 묘사를 위하여 독창 아리아 뿐만 아니라 중창을 이용하여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있어서 중창은 성격 묘사 뿐 아니라 극의 진행과 통일성을 가져오게 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경쾌한 서곡에 이어서 등장하는 알마비아 백작(바리톤), 그의 하인 피가로(베이스), 피가로의 애인 수잔자(소프라노), 가정부 마르첼리나(메조 소프라노), 의사 바르톨로(바리톤)가 벌이는 사랑 행각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음악으로 인간의 심리를 묘사한 모차르트의 통찰력과 천재적인 창작기법은 이 작품을 단순한 희극 오페라에만 머무르게 하지는 않는다.
프라하에서 대성공을 거둔 <피가로의 결혼> 덕분으로 다른 오페라를 위촉 받았는데 이 작품이 <돈 조반니>이다. 이 오페라는 무절제하게 엽색 행각을 벌이다 결국 지은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돈 후안(Don Juan)'의 이야기를 대본으로 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은 타락한 인물이지만 대본가 폰테는 주인공을 낭만적인 인물로 다루면서 권위에 대한 거부와 형식적인 윤리에 대한 냉소를 보내고 자유주의오 개인저의적인 사상을 은밀하게 그리고 있다. <돈 조반니>도 등장 인물의 성격 묘사가 세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희극적인 장면과 비극적인 사건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오페라 부파로 분류되지만 희극과 비극의 혼합이라는 면에서 드라마 지오코조(drama giocoso)라고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희극 오페라 <여자란 다 그런 것>은 대표적인 오페라 부파이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의 단순하고 명료한 형식감을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음악 요소들로 표현하고 있다. 모차르트만이 가질 수 있는 뛰어난 선율적 감각이 이 오페라에서도 시종 일관된다.
모차르트의 독일 오페라에서 볼 수 있는 음악적 특징은 음악적 감각이나 재치보다 음악이 함유한 예술성이나 내면성이라 하겠다. 징슈필은 독일의 희극 오페라로 분류되나 모차르트의 징슈필은 희극 오페라의 단순함이나 경박함을 넘어서서 내면적인 예술성을 창조하였다. 징슈필의 주요한 작품으로는 <Die Entfuhrung aus dem Serail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1782)>와 <Die Zauberflote (마적, 1791)>을 들 수 있다.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는 작곡가들이 자주 사용한 대본인데 모차르트는 이를 가지고 낭만적이고 희극적인 오페라로 구성하였다. 이 작품을 통해 징슈필은 예술성이 있는 오페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마적>은 최초의 독일 근대 오페라이자 고전주의 오페라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마적>은 당시 빈의 극장 감독이었던 쉬카네더(Johann Emmanuel Schikaneder)의 대본을 음악화한 것이다.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줄거리로 대중적인 희극을 구성하였는데 음악에는 재치와 유머가 있는가 하면 심오함과 아름다움이 넘치기도 한다. 희극적인 극의 진행 속에서도 엄숙한 내면성이 항상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1723년에 런던에서 창설된 프리메이슨 운동에 모차르트가 참여한 사실을 반영해 주기도 한다. 프리메이슨 운동은 성실, 신의, 형제애를 이념으로 하는 세계주의 운동을 위한 단체이다. 모차르트는 <마적>에서 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이기고 사랑의 승리를 얻는 주인공 타미노와 파미나의 이야기를 프리메이슨 운동의 사상적 배경과 일치시키고 있다. <마적>에는 18세기의 모든 오페라들이 갖고 있는 음악적 특징들이 전부 융합되어 있다. 이탈리아의 풍부한 선율적 아리아, 독일적인 레치타티보, 효과적인 중창, 심오한 합창들과 그밖에도 민요풍의 가곡, 바로크적인 코랄 프렐류드 기법, 색채감이 있는 관현악 편성 등으로 오페라가 구성되어 있다.
<마적>은 독일 낭만 오페라의 효시적인 작품으로 일컫는 베토벤의 <피델리오>나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예견할 수 있을 만큼 고전주의 시대에 낭만성을 구가한 작품이다.
◆ 교향곡
9세 때부터 작곡하기 시작한 교향곡은 그 수가 50여 곡에 달한다. 작품 목록에 정식으로 자리잡은 41곡의 교향곡을 살펴보면 초기의 교향곡은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이나 전고전 시대의 J. C. 바흐의 교향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점차 만하임 악파와 빈 고전파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빈에 정착하기 이전인 1773년 말부터 1774년 초에 작곡된 G단조(K.183)와 A장조(K.201)에는 질풍노도 양식의 강한 감정표현이 나타난다. 주제의 통일과 형식의 확장은 이미 고전양식에 숙달되었음을 보여 준다. <파리>교향곡(K.297)과 잘츠부르크에서 쓴 C장조(K.338)는 잦은 여행을 통해 얻은 성과로 보여지며 이후 빈에 정착하면서 작곡한 6개의 교향곡은 고전 교향곡의 걸작품들이다.
세레나데로 작곡된 곡을 교향곡으로 전용(轉用)한 <하프너>교향곡(K.385), 느린 서주부가 1악장에 삽입되어 하이든적(的)이라는 평을 받는 <린츠>교향곡(K.425), 서주부가 있는 3악장의 <프라하>교향곡(K.504), 그리고 모차르트 최후의 3대 교향곡 Eb장조(K.543), G단조(K.550), C장조(주피터, K.551) 등이 이 6개의 교향곡에 해당된다. 1788년, 불과 40여일 만에 작곡된 마지막 3대 교향곡은 모차르트를 대표하는 교향곡일 뿐만 아니라 고전 시대 교향곡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백조의 노래'라는 별명이 붙은 제39번 Eb장조(K.543)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형식으로 하이든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함이 있는 이 작품의 미뉴에트 악장은 특히 유명하다. 제40번 G단조(K.550)는 우울한 서정성이 긴장감을 유지하며 전개된다. 비극적 우아함으로 표현되는 페이소스(pathos)적인 감동은 낭만주의 음악을 예견케 한다. 제41번 C장조(K.551)는 <주피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교향곡이다. <주피터>라는 제목처럼 스케일이 크고 장려하다. 제1악장에 나타나는 목관악기의 대위선율과 제4악장의 푸가 기법은 이 작품을 화성 양식과 대위법 양식의 융합으로 이끌어 가는 모차르트의 독창적인 창작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 협주곡
모차르트는 협주곡 분야에서도 고전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특히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고전 협주곡 형식의 확립에 기여했고, 음악적으로도 뛰어나서 오늘날까지 인기있는 연주 곡목으로 무대에 오른다. 25개의 피아노 협주곡 이외에도 7개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플루트 협주곡, 오보에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 바순 협주곡 등 목관악기를 위한 다양한 협주곡들이 있다.
25개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초기의 작품들과 후기의 작품들이 양식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양식적으로 성숙된 협주곡은 1781년 이후인 빈 시절의 작품에서부터 나타난다. K.375를 시작으로 작곡된 초기의 작품들은 전고전주의와 바로크적인 양식의 협주곡들이다. 독주와 관현악은 뚜렷한 대조를 이루지 못하고 콘티누오도 그대로 남아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4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1773~1779년 사이에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한 K.175, 238, 246, 271과 3개의 협주곡 K.242, 2개의 협주곡 K.365
1782~1783년 사이에 빈에서 작곡한 K.413, 414, 415
1784년 빈에서 작곡한 K.449, 450, 451, 453, 456, 459
1785~1791년 사이에 빈에서 작곡한 K.446, 467, 482, 488, 491, 503, 537, 595
1782년부터 빈에 정착하면서 작곡한 17곡의 피아노 협주곡들 중 14곡은 초연 때에 모차르트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였다. 고전형식으로 작곡된 빈 시대의 협주곡들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25곡 모두가 연주되고 있으나 그 중에서도 빈 후기의 작품들이 자주 무대에 올려지며 <대관식 협주곡>이라고 불리는 D장조 (K.467)와 베토벤이 1, 2악장에 카덴차를 붙인 D단조 (K.466)가 특히 유명하다.
실제로 고전 협주곡 형식은 1780년대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고전 협주곡도 바로크의 독주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빠름-느림-빠름의 3악장 구조이지만 미뉴에트는 생략되어 있다. 고전 협주곡은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두 개의 제시부로 시작되는 수정된 소나타 형식이다. 첫 번째 제시부에서는 독주가 관계조로 앞의 주제 소재을 화려하게 연주한다. 제2악장은 느린악장으로 서정적이다. 모차르트 협주곡의 2악장은 발전부가 없는 소나타 형식으로 안단테(Andante)나 라르게토(Larghetto)의 서정적인 아리아를 딸림조나 관계단조로 연주한다. 제3악장은 론도나 론도소나타 형식으로서 활기찬 악장이다. 독주와 투티의 기교가 넘치는 화려한 악장으로 한 개 이상의 카덴차가 나타난다. 특히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은 독주와 투티의 경쟁과 균형이 지속되고, 관현악과 독주의 음악적 색채감이 뛰어나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1775년에 작곡된 K.216, 218, 219와 1777년에 작곡된 K.271, 그리고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심포니 콘체르탄테(K.364)>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중에서 군악(軍樂)과 같은 힘찬 리듬이 나타나는 제4번 D장조(K.218)와 스타카토를 동반한 분산화음으로 시작하는 제5번 A장조(K.219)가 특히 유명하다.
◆ 소나타
모차르트의 현존하는 독주 간반악기 작품으로는 18개의 소나타와 17세트의 변주곡 그리고 몇 편의 환상곡이 있다. 이들 작품들은 3악장 구성으로서 제1악장은 소나타 형식, 제2악장은 서정적인 아다지오(Adagio)나 안단테(Andante), 제3악장은 카덴차가 있는 경쾌한 론도 악장으로 이루어진다.
1774~1775년에 잘츠부르크와 뮌헨에서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K.279~284는 하이든과 C. P. E 바흐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갈랑 양식이 뚜렷이 나타난다. 1777~1778년에 만하임에서 작곡된 K.309와 K.311은 기교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곡으로 화려한 알레그로와 우아한 안단테 악장으로 되어 있다. 1778년에 파리에서 작곡된 K.310과 K330~333에는 널리 알려진 곡들이 많다. 특히 K.331은 유명한 <터키 행진곡>이 포함된 인기있는 곡이다. <작은 별>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동요 <Ah, Vous diraise-je maman>에 의한 변주곡인 K.265를 포함한 피아노 변주곡들도 1778년에 파리에서 작곡되었다. 연주곡들은 대부분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작곡되었다. 1788년에 빈에서 출판된 C단조 소나타 K.457과 K.475의 첫머리에는 '환상곡(Fantasia)'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이 작품들은 연속적으로 연주된 것 같고 이러한 작품의 예는 C. P. E 바흐에게서도 발견된다. K.457은 베토벤의 <비창>소나타에 영향은 미쳤다. 1789년에 작곡된 마지막 소나타 D장조(K.576)는 알베르티 베이스 대신에 다른 종류의 분산화음을 사용하고 있으며 1악장에는 대위법이, 3악장에는 장식적인 음형이 들어 있어 연주하기에 대단히 난해한 작품이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35곡에 이른다. 초기의 작품은 피아노가 중심이었고 바이올린은 임의로 삽입되는 형태였다. 이러한 작품들을 보면 바이올린은 반주의 기능에 머물렀으므로 피아노 소나타로 불리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했다. 그러나 1777~1778년 사이에 만하임과 파리에서 작곡된 E단조(K.304)와 빈 시대에 작곡된 Bb장조(K.454), Eb장조(K.481), A장조(K.526) 등에서는 바이올린이 피아노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면서 고전주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 실내악
고전 시대의 실내악은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잇지만 작품의 형식들은 아직도 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여러 형태의 음악들을 실내악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디베르티멘토, 세레나데, 카사치오네(cassazione) 등도 일정한 구분없이 사용되었고, 현악 3~5중주 이외에도 다른 악기들을 하나씩 삽입하여 만든 3~5중주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시대에 사교적인 모임이나 축제, 오락 등을 위해서 또는 귀족들에게 위촉을 받아서 13곡의 세레나데, 20곡의 디베르티멘토, 2곡의 카사치오네를 작곡하였다. 이들 음악의 악기 편성은 다양해서 현악 합주에 관악기를 추가한 것, 관악기만으로 구성된 것, 교향곡이나 협주곡과 유사한 것 등이 있다. 특히 유명한 세레나데는 1776년에 작곡된 <하프너(Haffner)> 세레나데 D장조(K.250)이다. 이 작품은 잘츠부르크의 시장이었던 하프너의 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작곡한 곡이며 <하프너> 교향곡(1782)은 이 작품을 확대 변형한 것이다. 빈에서 1787년에 작곡된 <Eine kleine Nachtmusik, K525>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레나데로 분류되어 있지만 악기 편성은 현악 5중주와 같다. 이들 작품 이외에 실내악으로 분류할 수 있는 디베르티멘토는 현악기와 호른으로 구성된 K.247, 287, 334와 7중주 K.251이 있고 관악기만으로 구성된 K.252도 있다. 뮌헨과 빈에서 작곡된 세레나데 C단조 K.388과 디베르티멘토 Eb장조(K.563)도 유명하다. 현악 5중주 곡으로는 K.515, 516, 593이 유명하고, 관악기를 포함한 5중주로는 클라리넷 5중주 A장조(K.581)가 널리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는 하이든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하이든 4중주'라고 알려지는 6곡의 작품은 모차르트가 빈 시절에 하이든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하이든의 영향을 받아서 작곡되었지만 각 곡마다 모차라트의 독창성에 의한 새로운 기법들이 나타난다. 제1곡 G장조 (K.387)에서는 마지막 악장에 푸가가 사용되고, 제2곡 (K.421)은 D단조로 우울한 분위기를 표현한다. <사냥>이라는 표제가 붙은 제4곡 Bb장조 (K.458)은 아다지오 악장에서 낭만적 화성감이 넘치며 <불협화음>이라고 불리는 제6곡 C장조 (K.465)는 대담한 화성이 나타난다. 또다른 유명한 현악 4중주로는 프러시아 왕에게 바친 <프로이센왕 4중주 (K.575, 589, 590)>가 있다. 현악기와 관악기가 혼합된 4중주로는 플루트와 오보에를 위한 곡들과 피아노 4중주 G단조(K.478)와 Eb장조(K.493), 피아노 3중주 Bb장조(K.502)와 E장조(K.542), 그리고 현악 3중주 K.563이 있다.
◆ 미사
모차르트의 미사는 교향곡이나 오페라처럼 대규모의 관현악을 사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음악구성은 고전 시대의 호모포니를 기초로 하나 부분적으로는 바로크 시대의 대위법 양식도 자주 나타난다. 대표적인 미사곡으로는 1779년에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된 <대관식>미사 C장조(K.317)와 C단조(K.427),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곡한 미완성인 <레퀴엠(requiem)> 미사D 단조(K.626)를 꼽을 수 있다. <대관식>미사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교회으 성모마리아상의 대관을 기념하기 위하여 작곡되었다. 이 작품은 오페라적인 세속적 요소가 많아서 종교적인 경건함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으나 예술성이 뛰어나서 자주 연주되고 있다. 1782년 결혼 서양을 위하여 작곡된 미사 C단조(K.427)는 미완성이지만 바흐의 <B단조 미사>와 견줄만큼 뛰어난 작품이며, <레퀴엠>의 마지막 부분은 그의 제자가 완성시켰지만 이 작품은 모차르트 최고의 교회음악이다. 이 작품 역시 빈 고전악파의 창작기법에 기초하고 있으나 바로크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Kyrie에 나오는 2중 푸가는 바흐와 헨델의 대위법 양식을 반영하며 'Dies irae'부분의 극적인 합창은 낭만파 시대의 미사나 극음악에서 볼 수 있는 합창기법을 예견케 한다. <레퀴엠>은 알지 못하는 어떤 귀족의 위촉으로 작곡하게 되었는데 모차르트는 이미 죽음을 예감하여 이 작품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조곡으로 생각하고 썼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일생을 통해 얻은 모든 창작기법과 종교적 체험을 동원하여 이 작품을 고전주의 최고의 교회음악으로 승화시키고 짧은 생을 마쳤다.
모차르트의 또다른 교회음악으로는 모테트<춤추라, 기뻐하라 (Exultate jubilate, K.165)>가 있다. 이 작품은 소프라노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의 형태이다. 2악장에는 유명한 독창곡 '알렐루야(Alleluia)'가 나온다. 이밖에도 성체를 찬미하는 라틴어 기도문을 가사로 한 모테트 <귀하신 몸(Ave verum corpus, K.618)>이 널리 알려져 있다.
◆ 성악곡
모차르트의 세속 성악음악으로는 60여 곡의 연주회용 아리아, 20여 곡의 중창과 합창곡, 30여 곡의 가곡이 있다. 연주회용 아리아는 뛰어난 독창자들을 위해 작곡되었으므로 기교적으로 어려운 작품들이 많다. 모차르트의 가곡은 그의 다른 음악에 비하여 중요시되지는 않으나 괴테의 시를 가사로 한 <Das Veilchen(제비꽃)>을 비롯한 몇 곡은 고전 시대의 어떤 가곡보다 널리 애창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