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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태자파 후예여러분! 순웅대장군은 외할아버지께서 길렀읍니다. 그에 따른 내용을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의 연구내용을 올리겠읍니다.
국력은 약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각자는 어떻게 생명을 보존할지를 예측할 수 없으며 행과 불행이 교차한다. 신라말 중앙 정부의 실정이 계속되자 지역의 실력자들인 지방관리, 부호 호족 성주등이 납세를 거부하는 등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전국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이들 세력을 업고 신라 통일후 200여년만에 소위 후삼국의상태로 변하였으며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태봉국 등 대립이 격화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지방 실력자인 성주 또는 호족들은 어느쪽 세력이 나은가 눈치만 보는 세상이 되었다. 다음 한 두 곳 전황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본론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927년 왕도 금성을 급습한 백제군 회군은 대구 공산(公山桐 (艸+數)덤불수자) 지역을 거쳐 의기 양양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견훤은 왕건의 고려 군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때 일만 명의 고려군을 이끈자는 공훤으로 보는데 견훤에게 전멸을 당했다. 이대 왕건은 신숭겸에게 구조되어 겨우 몸만 빠져 나갔고 이때 신장군 자신과 아끼든 김락장군도 주검을 당했다.
2. 공산전투의 패배는 견훤에게 큰소리를 치게 했다. 지금까지 전투에서 왕건은 나의 깃털 한개 뽑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왕건은 이 전투에서 위로(慰勞)를 불신의 음조와 산수의 영험스런 기운이 나에게 일시적인 효과라도 있을까? 928,929년 견훤은 완건이 왕도 금성에 접근 못하도록 죽령부근지역을 차례로 점령하였다. 929년7월에 중무장한 견훤군 5000명이 의성부를 공격하여 고려의 영향권인 문경 영주 예천 안동 일원이 그 남부의 요진(要鎭)인 의성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이 중심에 성주(城主)장군 홍술이었다. 견훤은 격렬하게 항전하는 홍술의 목을 베었다. 홍술은 왕건과 군신의 인연을 맺은 지 7년 만이었다.
3. 견훤은 여세를 몰아 안동과 예천 사이의 순주를 공격했다. 장군 원봉은 922년 6월 왕건에게 귀부한 이래 왕건에게 헌신한 호족이었다. 이런 연유로 왕건은 고을 이름을 순주(順州) 로 승격시켰다. 원봉은 밤중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왕건은 성을 버린 원봉을 처벌하려 했지만 전날의 공로를 생각하여 용서해 주었다. 그에 반해 견훤은 순주를 하지현(下枝顯)으로 격하 하였다. 왕건은 숱한 전투에서 힘겨운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왕건은 발성(勃城)전투에서 포위 당했으나 박수경의 역전으로 간신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4. 백제는 고려군을 소백산맥 밖으로 모두 축출하려고 929년 12월 견훤은 기세좋게 고창(안동)을 포위했다. 경상 북부좌편제일의 고을이었는데 왕건이 그냥 내어 줄 수는 없었다. 고려군3000명이 포위되어 있었다. 이곳이 견훤에게 떨어진다면 소백산맥안의 신라계 호족세력을 모조리 견훤에게 넘겨줘야 할 형편이었다. 왕건은 예안에 이르러 작전 숙의를 하였는데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승산이 없는 작전에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대상 공훤과 공신 홍유가 말문을 열었다.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면 빠져나갈 길을 닦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5. 유검필이 말하기를 싸우기도전에 퇴로를 생각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당장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의 3000여 병력을 고스란히 적에게 주는 격이니 빨리 공격하기 바랍니다. 듣고 있던 왕건이 유검필의 의견을 따랐다. 왕건은 예안진에 남아 전세를 관망하고, 유검필은 빠른 속도로 진격, 저수봉 능선을 넘어 백제군을 사납게 몰아붙였다. 저수봉을 빼앗긴체 백제군은 퇴각했다. 송현동 소위 "소뺨다리"에서 격전이 벌어졌으며, 전투는 해를 넘기며 계속되었다. 930년 정월 늙은 견훤은 혹심한 추위 속에서 지휘하며 고창군에서 버티고 있었다. 백제군은 북쪽 석산(石山)과 고려군은 병산(甁山)에 각각 진을 쳤다. 두 진영사이의 거리는 500보 밖에 되지 않았다. 양측은 한판 승부 대결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뜻하지 않았던 변수가 생겼다. 이곳 호족인 김선평(金宣平.후에 新安東金氏 始祖)과 권행(權幸.후에 安東權氏 始祖,원래는 김행(金幸,경주인)), 장길(張吉. 安東張氏)이 향군을 이끌고 고려군을 지원하였는데 이유는 이러하다. 권행은 본시 신라 왕성(王姓)이었는데, 경애왕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격하여 고려에 항복했다. 팽팽하던 전세는 저녁 무렵에 일순간에 바뀌었으며 백제군은 한꺼번에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전사자만 8000명을 낼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견훤의 참모였던 시랑 김악(金渥)도 고려군에 체포되었다. 기다리던 왕건은 고창군에 입성하고 득의에 차서 기다리던 유검필 진영으로 향했다. 힘겨운 상황에서 큰 승리를 올린 유검필을 격려하였다. 견훤의 세력이 급전직하로 떨어지자 동해안의 주군(州郡) 110 여 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다. 6. 신라의 호족들이 왕건 자신에게 기울어졌음을 확인한 그는 신라의 인심을 장악하기 위한 마지막 끝내기 수순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경훤이 927년 왕도를 습격한 때와 판이한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하였다. 931년2월23일 얼음이 풀릴 때를 기다려 기병50여 명만 대동한 체 경주 북쪽에 도착하였다. 선필을 보내 경순왕에게 면회를 요구하였으며 재당종제(再堂從弟)인 국상(國相) 김유렴(金裕廉)이 나가 맞이하여 궁안에 들어 온 후 93일간 머물면서 장래 나라를 이양할 구체적인 협약(?)이 있었을 것이며, 신라 지배층의 송도 이주와 왕도의 안전에 대한 보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월26일 국상 김유렴과 함께 송도로 귀환했다. 태조는 귀환을 앞둔 5월20일에 경순왕과 태후 죽방부인(竹房夫人), 상국 김유렴, 잡간 예문(禮文), 파진찬 책궁(策宮) 윤유(尹儒)와 한찬(韓粲), 책직 흔직 의경(義卿) 양여(讓餘), 관봉 함의(含宜) 희길(熙吉) 등이 양국협상에 공헌한 인물인 것 같다. 7. 신라의 귀부는 최종적으로 신라 정부의 군신회의(君臣會議)에서 최종 결정되었다. 군신의 의론은 혹은 가하다 혹은 불가하다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마땅히 충신,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이니,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 주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아 형세는 능히 온전히 할 수 없으니 기왕 강하지도 못하고 도 약하지도 못하여 무죄한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이에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국서를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귀부를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며 사별(辭別)하고 곧 설악산개골로 들어가 신라 부흥운동에 들어갔다. 왕건 태조의 송도 귀도의 뜻을 받아드려 11월 3일 백료 사서들 그리고 셋째왕자 종, 손자인 선웅, 숭우과 함께 왕도를 출발, 10일만인 12일 개경에 도착하고 유화궁에 머물렀다. 4년전에 도착한 국상 유렴이 어린 외손을 받아 길렀다. 열흘 후에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정전인 회경궁에서 만조백관이 축하하는 자리에서 혼인하였으며, 태조 왕건도 신라에 청혼 김부대왕의 종백부녀 덕용과 혼인하였다. 이 보다 앞서 태자 일행은 모후박씨, 태자비 영란, 덕주공주, 부흥운동에 동참할 맹장군 등 일행은 조령을 넘어 충주 월악산 미륵세계사에 도착하고 모후박씨, 태자비, 덕주공주는 설악산 병참지가 준비될 때끼지 이곳에 잠정 머무르시도록 하였다. 덕주공주는 이곳에서 세상을 마치었다고 전한다. (주): 상기 내용은 신라가 고려 왕건에게 손국되는 과정과 태자의 아들 "선웅, 순웅"두분의 성장 과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위의 내용은 경주김씨 계보연구회의 2008년 秋 冬 합본 내용 중 "태자(마의태자)"아들에 관한 내용임. 의문 점이 있으신 분은 반론의 기회를 드리며 확실한 문헌 제출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