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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침묵을 일깨워주는 산시(山詩)
--임윤식 시집 나무도 뜨거운 가슴은 있다에 대하여--
이 동 순(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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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헤아려보면 인간은 산에서 났고, 결국은 산으로 돌아가는 존재란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 농경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산기슭에 지어진 고향집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추억을 갖고 있다. 신세대들이 태어난 도시의 여러 병의원들도 지금은 엄청난 도시계획으로 평평한 도심의 한 빌딩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지난날에는 그곳이 모두 어느 산기슭의 한 자락이었다. 인생의 모든 과정을 거쳐서 삶을 마감하고 떠나가는 곳 또한 산이니 굳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산은 인간과 모든 풍경의 시초이자 종착점인 것이다.
산에 가보면 대자연의 온갖 변화와 신선한 공기, 살아 숨 쉬는 우주의 맥박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서양의 철학자 고웰즈(Gowells)라는 분의 사색적인 글을 읽다보니 다음과 같은 대목이 깊은 공감으로 우리를 이끌어 들인다.
깊은 슬픔이 있을 때라도 언덕길을 산보하면 가끔 마음의 위안을 받는 수가 있다. 심산계곡을 소요하면 한결 마음이 가라앉을 수 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이 우리 인생의 고민을 어루만져 준다. 높은 산을 보라. 그것이 이미 하늘과 땅 사이에 있으면서 두 세계를 반씩 영위하고 있다. 그 위대한 모습은 사소한 인간의 번민 따위는 한 입김으로 불어 내던지는 느낌이 있다. 깊은 산골에는 숭고한 정적이 있다. 갖가지의 소리를 감춘 침묵 속에는 무한한 무엇이 물결치고 있다. 거기에 자연은 순화되어 어떤 초자연적인 엄숙한 모습에 이르고 있다.
산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중요함은 참으로 크고 막중하다.
모름지기 산을 즐기고 가까이 하는 이들의 모습에는 세 가지 양태가 있는 듯하다. 생활에 시간적 물질적 여유가 생긴 이후로 건강을 위해서 산에 간다는 사람이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이런 부류들은 대개 겸손함이 부족하고, 산에 와서도 마구 고성을 질러대어 다른 등산객들에게 방자하며 피해를 끼친다. 두 번째 스타일로는 오로지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산에 오른다는 부류들이다. 산길을 마구 달리는 듯이 오르고 내리는 그들의 거친 기세 앞에서 산길 주변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산꽃들과 숲의 풍경들은 전혀 눈과 가슴에 담을 필요가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가장 등급이 높은 부류는 산을 오르면서 하늘과 숲을 가슴에 깊이 담으면서 유유자적하는 마음가짐으로 겸손하게 산을 오른다. 산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그저 경이롭고 모든 것이 찬탄의 대상들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떤 스타일인가?
흘러간 시절, 가까운 지인 몇몇이 어울려서 약 일곱 해 동안 매주 등산을 즐기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정기적 등산이 부담스러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약 서너 달 지나면서 몸이 먼저 산을 찾으려는 관심과 의욕이 생겨났다. 그때부터는 집보다 산에 있을 때가 한결 마음이 편하고 안정이 되었다. 한반도의 얼마나 많은 산길을 헤매 다니며 나는 국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뒤늦게 완상할 수가 있었던 것인가? 늘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을 직접 느껴볼 겨를이 없을 것이다. 산에 오르겠다는 결단과 집념이 마침내 국토사랑으로 이어질 수가 있었다.
사계절 여러 산을 매주 다니다보니 온갖 일화들도 많았다. 한겨울이라 스님이 아랫마을로 떠나간 산중의 텅 빈 암자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한 적도 있었고,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능선의 바윗길을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엉금엉금 기어서 지나간 적도 있었다. 짙은 안개속의 하산 길에서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헤매던 낭패한 심정도 떠오른다. 눈이 내린 산길에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오솔길을 걸어갈 때 내 앞에 점점이 찍혀있던 토끼, 멧돼지, 노루 따위의 산짐승 발자국들을 대면하던 감격스러움은 또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슬이 내려 축축한 산길을 온몸 흠뻑 적시며 걸어갈 때 문득 내가 지나온 길에서 얼굴에 부딪쳐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걷어내었던 거미줄이 사실은 거미들이 밤새도록 애써 차려놓은 아침 밥상이었던 것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다. 이마위에 매단 반딧불처럼 작은 랜턴 하나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산꼭대기 부근의 암자를 향해 오르던 아득한 기억들도 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굴곡도 많았던 산행의 온갖 경험들은 오로지 험난한 인생길의 축도판(縮圖版) 그대로였던 것이다.
산을 정복의 개념으로만 인식하는 인간의 태도가 얼마나 편협한 인간의 판단인가를 우리는 깨닫는다. 히말라야의 8.000m급 거봉인 낭가파르바트를 혼자서 무산소로 등정했던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쓰너(Reinhold Messner:1944∼ )는 주변의 거대한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자기가 마치 구름위에 서 있다는 착각을 느끼기 위해서 높은 산에 오른다고 했다.
사계절 동안 시시각각 변화의 장관을 보여주는 산의 일관된 빛깔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푸른색이 아닐까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산의 얼굴빛은 푸르스름한 태고의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와 같은 철학자는 산이 영겁의 세월동안 오로지 푸른빛 한 가지만을 빚어낸다는 뜻으로 ‘만고청산유마청(萬古靑山唯磨靑)’이라 표현했으리라.
이런저런 산담(山談)을 글머리에서 먼저 펼쳐놓는 까닭은 오늘 임윤식(任崙植) 시인의 인간과 문학과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임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우선 느끼게 되는 첫 인상은 시인의 시정신 속에 무르녹아 있는 신선하고 풍부한 산의 기운과 올곧은 정기다. 우주와 대자연의 고농축이 그대로 산이요, 그 산을 가슴에 담고 있는 시인이 바로 임윤식이다. 항시 온유하고 너그러운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있는 임 시인이지만 작품에 임하는 결의만큼은 시 「꽃샘추위」에 등장하는 구절처럼 ‘매섭게 쏟아내는 눈초리’ ‘끈질긴 집념’ ‘순간순간 몰아치는 날카로운 기세’와 같다.
이번 시집에는 반드시 산에 관한 작품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푹 익은 바람’(시 「용주사 동종」), ‘곰삭은 홍어’(시 「홍어」) 등에서 느껴볼 수 있듯 오랜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맛보게 하는 시작품들도 다수 들어있다. 시 「사리(舍利)」)와 같은 작품에서는 혹독한 겨울을 너끈히 이겨내고 향기로운 알뿌리로 우리들 밥상에 감격스럽게 다가와 대면하는 달래를 시적 대상으로 선택하고서도 그것을 불가적(佛家的) 수행의 최고결정체인 사리에 비견하는 놀라운 시적 성취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재미와 즐거움을 다양하게 경험시켜 주는 임윤식 시인의 이번 시집에는 아무래도 시인 자신이 전문적 등산가이니만큼 산과 인생에 대한 이러한 열정과 통찰이 가장 농도 짙게 반영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부터 시집 나무도 뜨거운 가슴이 있다의 책갈피를 조심스럽게 열고 그 고유의 세계로 천천히 들어가 보기로 하자.
2
시인이 시를 쓰는 틈틈이 산을 그처럼 열정적으로 오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찍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에 판각된 글귀 중에는 산과 관련된 귀한 담론이 들어있다. 즉 ‘산은 마음의 고요와 고상함이요, 큰 산은 높은 덕이 솟은 것과 같다’라 했으니 인간의 품격적 완성의 최고경지를 바로 산에다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불완전 속에서 결함을 지닌 채 살아가게 마련이거니와 그러한 결함이 있으므로 비로소 인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항시 불완전을 껴안고 어딘가 모자란 듯이 살아가는 존재! 그게 곧 인간의 운명적 모습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결손(缺損)이란 것이 인간의 필수조건과 맞닿아 있는 상태라 할 터인즉, 이 결손을 보충하고 완성에 이르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고 수양해가는 것 또한 인간의 참된 삶의 지향이 아닐까 한다. 공자가 진작 설파했던 인자요산(仁者樂山)의 경지도 결국은 인격적으로 완성된 단계인 ‘인자(仁者)’를 향해 한 결함투성이의 인간이 적극적으로 노력해가는 삶의 과정임을 말해주는 것에 다름 아니리라.
그리하여 임윤식 시인은 벽을 기어가는 담쟁이덩굴조차도 아슬아슬한 암벽을 오르는 수행의 과정에 비유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평소 산꾼으로서의 전문적 식견과 경험을 가진 시인의 인식세계에서 클라이밍(climbing)의 아슬아슬한 과정을 거꾸로 담쟁이덩굴의 표상에 비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클라이밍이란 등산에서 암벽을 기술적으로 오르는 일을 가리킨다.
이 작품 속에서 암벽야영의 전체과정은 담쟁이덩굴, 혹은 자벌레에 비견되고 있다. 두 세계는 이 작품 내부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통합과 일치의 세계로 모여든다.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해 저문 석양 무렵에 천길 절벽을 오직 한 줄의 자일에 온몸을 대롱대롱 매어달고 아슬아슬하게 오르는 알피니스트의 모습을 보았다. 멀리서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오금이 저려왔다. 저렇게 오르는 도중에 일몰(日沒)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근심으로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었다. 바위벼랑을 오르다가 날이 저물면 절벽 바위에 비박 텐트를 공중에 매단 채 그대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을 포타렛지(portaledges)라고 하는데, 이런 방법으로 산꾼들은 천연덕스럽게 잠을 자는 것이다.
등반가 메쓰너의 사진을 보면 등반의 강렬한 긴장과 불안 속에서도 항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그처럼 잘 웃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독일 슈테른지의 기자 빌헬름 비토로프는 말한다. 메쓰너가 시시때때로 짓는 미소는 어떻게 보면 불안을 이겨보려는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이다. 이렇듯 불안이란 인간의 잠재력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내부에 저장된 가능성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인식된 불안은 그 다음 단계에서 더욱 강한 감정과 위험을 스스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험난한 길에서도 이처럼 아슬아슬한 위기의 시간들은 얼마나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일까?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는 것은 더욱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임윤식 시인은 암벽등산의 과정에서 바위의 홈을 더듬어 손잡이를 확보하는 것을 ‘손 발 끝으로 더듬는 경전(經典)’이라는 탁월한 선적(禪的) 구절로 설파하였다. 결국 암벽등반의 전체과정은 불가에서 실천하는 면벽수행(面壁修行)의 과정과 동일할 뿐만 아니라 삶의 과정을 수련의 과정에 투영시킴으로써 이 작품의 시적 형상화가 튼튼한 구조로 결속하는데 놀라운 성공효과를 거두고 있다.
천애절벽을 오른다
한 치 두 치 기어오르는 자벌레
하늘 끝에 자일을 건다
다시 내려갈 수 없는 외길
바위에 붙어 잠을 잔다
포타렛지도 없는 암벽야영
손 발 끝으로 더듬는 경전經典
얼마나 더 오르면 그 뜻을 깨우칠 수 있을까
늘 아슬아슬한 길
멀고 먼 면벽수행의 그 길
- 「담쟁이덩굴」 전문
암벽타기를 담쟁이덩굴이나 면벽수행에 비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거니와 클라이밍을 절정의 시간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위로 팔랑팔랑 날아오르는 한 마리 나비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는 시 「인수봉」의 경우도 이 작품의 발상구조와 서로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양손과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락 클라이밍, 즉 암벽타기는 손발 가운데 세 개는 발판으로 하고, 나머지 한 개는 움직여서 기어 올라간다. 대체로 조를 이루어 등반하며 자일(seil), 매입 볼트, 등자(鐙子) 등의 도구를 사용한다. 여기서 자일이란 대마, 나일론, 마닐라 삼(杉) 등으로 튼튼하게 만든 등산용 밧줄을 말한다. 암벽등반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므로 숙련된 등산가만이 즐길 수 있으며 세심한 주의와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암벽타기의 과정은 한 순간도 방심과 시간 관리의 느슨함이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다. 자칫 실수하게 되면 그것이 곧장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작품을 보기로 하자.
팽팽한 끈 하나에 전 생(生)을 건다
날카로운 바람이 암벽을 치고 밀려와
나를 흔들어 봐도
아직은 밀려날 수 없는 내 자유
당당히 버틴다
절정은 어디인가
하늘에 걸린 봉우리
그곳에 오르면 다시 올라야 할
또 다른 정상이 거기 있다.
저 혼자 외롭다
날아라 날아라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마지막 하늘 끝까지
절벽 난간에서 서성이는 그 나비 한 마리
- 「인수봉」 전문
수직(垂直)의 가파른 바위벼랑을 올라가는 클라이밍은 위험성과 정신적 쾌감이 동시에 수반되는 고도의 산악운동이다. 평범한 산행이 아니라 험난한 과정을 돌파하고 극복하는 한계성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클라이밍을 위해서는 등반하는 사람 모두에게 안전장치 설치에 대한 책임이 부여된다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앞서 올라가는 선등자(先登者)는 정신적 부담도 많이 갖게 되고, 자칫하면 실수로 말미암아 일행의 치명적 사고를 유발할 수도 있다. 물론 현대적 확보기술을 충분히 활용하고 응용한다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성과 모험성이 동시에 수반되는 전통적 암벽등반에서는 육체적 능력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능력에 보다 더 가치비중을 높게 둔다. 말하자면 고도의 지적 수련이 갖추어져야만 험난한 과정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갖추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래 한국산악계의 경우 산악인으로서의 고급한 지적 수련과정을 다소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예기치 않은 조난이나, 추락, 실종과 같은 불길한 사고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락 클라이밍을 완수했을 때의 그 정신적 쾌감과 카타르시스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그 기분을 헤아릴 수 없으리라. 최근 한국의 등산문화에서는 청년세대들이 주로 암벽타기의 짜릿한 쾌감 만을 경험해보기 위해 다소 무모한 암벽타기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항시 철저한 준비와 정신적 자세가 필요함을 다시금 이 기회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다.
다음에 읽어보는 시작품 「아, 염초암릉」은 서울의 삼각산 염초 릿지 암벽코스 등반도중 돌연한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느 비운의 청년산악인과 그의 아까운 죽음을 다루고 있다. 사고를 당한 산악인은 평소 시인과 매우 도타운 정을 나누는 동료였고, 시인은 그날 청년의 바로 곁에서 충격적 사고를 직접 목격하고 마음의 애잔함을 제어하지 못한 채 마침내 이 작품을 쓰게 된 듯하다.
그대 오르는 길 밝히려나
그날따라 하늘은 참으로 맑고 푸르렀네
그대는 바람 타고 구름 타고
날개 펄럭이며 춤추듯 떠나갔네
한번 오르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는 정상
그대가 먼저 하늘길 열었네
언제나처럼 선등으로 올라갔네
왜 그렇게 서둘렀는가
혼자 가는 길 외롭지 않던가
인수봉, 선인봉, 오봉, 만장봉,
숨은벽, 만경대, 약수암, 염초봉...
함께 오른 바위봉우리들 마다
그대 모습이 보이네
그대가 자일을 타고 있네
- 「아, 염초암릉」 부분
산의 표상을 통해서 삶과 인간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일깨우는 임윤식 시인의 작품세계는 전문적인 산꾼답게 산과 관련된 테마의 시작품들이 수두룩하다. 그 가운데서 우리들 가슴에 각인되는 또 다른 몇 편의 시작품을 함께 읽어보기로 한다.
일찍이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대상과 정신의 연결과 융합에 대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작품을 써서 많은 후세인들의 심금을 울렸었다. 시인은 마음속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할 때 눈앞에 바라보이는 산은 오로지 수심으로 가득한 듯이 보인다고 했다.
강 위에 천산은 시름 속에 첩첩
공중에 뜬 푸른 이내는 안개와 같구나
산인지 구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이윽고 운무가 걷히니 산만 그 자리에 우뚝하여라
江上愁心千山疊
浮空積翠如雲煙
山耶雲耶遠莫知
煙空雲散山依然
강과 그 위에 비친 산, 그리고 운무에 가렸다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산의 광경이 한 폭의 동양화를 그대로 보는 듯하다. 대상으로서의 산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과의 거리가 너무나 정겹고 흐뭇하여 여유롭다. 이를 일러 ‘동양적 거리’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소동파, 두보(杜甫:712∼770), 이백(李白:701~762)을 비롯한 중국의 대다수 시인들, 뿐만 아니라 윤선도(尹善道:1587∼1671)를 비롯한 한국의 전통시대 시인과 심지어 조지훈(趙芝薰:1920∼1968)과 같은 현대 시인들에게 있어서도 산의 표상은 항시 바라보는 대상으로서 시인과의 일정한 거리를 반드시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윤선도의 경우 ‘잔 들고 혼자 앉아 먼 뫼를 바라보니…’로 시작되는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수록된 시조작품을 먼저 떠올릴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산은 오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상이었다. 조선시대의 주옥같은 명작들만을 수록해놓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수록된 어느 무명씨(無名氏) 시조작품의 경우도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라고 하였다.
거기서도 산의 표상은 여전히 먼 곳에 그대로 있고 중심화자는 산과 그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마주보며 삶을 관조하고 있다. 그 정신적 배경 속에는 산의 듬직함, 우뚝함, 선명함, 높은 기상, 빼어난 정기, 굴복하지 않는 용기 따위의 상징성을 고스란히 닮으려 하는 유가적 수양과 도야(陶冶)의 자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임윤식 시인의 작품세계에서 산이라는 시적 대상은 그것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견자(見者)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산 속에 들어가 산과 일치되어 시인과 시적 대상이 하나의 아름다운 통합을 이루는 구도로 설정되고 있다. 이것은 시인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산을 직접 오르고 산을 가슴속에 늘 담고 있으며, 시인 자신이 산처럼 듬직한 삶을 실천하고 있기에 가능한 경지이다.
한국의 산길을 다니다보면 가장 흔히 만나게 되는 것이 산죽(山竹)이 우거진 광경이다.
산죽은 일명 조릿대라고도 한다. 그밖에도 시누대, 얼룩조릿대 등으로도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산에서 자라는 키 작은 야생 대나무를 일컫는다. 옛날에는 줄기를 베어서 쌀을 일 때 쓰는 조리나 바구니, 삼태기 따위를 만드는 데 재료로 사용하였다. 키는 1~2미터쯤 자라고 잎은 긴 타원꼴이며 한반도의 남부, 중부의 산에서 흔히 자란다. 산죽의 잎은 항암작용, 살균작용, 항궤양작용이 뚜렷하며, 특히 암세포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등산길에서 산죽이 우거진 광경을 보면서 그 속을 통과하는 경험은 놀랍고 장엄하다. 필자가 보았던 산죽 밭은 지리산 청학동 일대와 밀양의 천황산 언저리의 산죽 밭이다. 한반도의 곳곳에는 여기저기 알려지지 않은 산죽 군락지가 많을 것이다. 그 군락지 중간을 지나갈 때 산죽의 잎과 줄기가 온몸에 와삭와삭 스치는 소리는 자못 특별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산죽 밭 주변의 공기는 더욱 정화되어 청결하고도 상쾌한 느낌을 준다.
임윤식 시인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산죽 밭은 한라산의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을 오르는 중산간(中山間)에서 만난 산죽 밭으로 추정된다. 시인은 산죽을 응시하면서 시적 대상으로서의 식물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떠올린다. 뿐만 아니라 산죽에 함유된 고유의 생태적 특성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교훈성을 지니는가에 대하여 통찰하고 있다. 즉 산죽의 키가 유난히 작은 까닭은 자신을 한없이 낮출 때만 안전한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작고 초라한 모습의 산죽이 개체로 독립해서 살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존재들끼리 군락을 이루어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삶을 지탱해가는 광경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뿐만 아니라 큰키나무들 사이에서 낮은 키로 살아가는 운명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슬, 바람, 풀벌레소리 따위와 정겹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교감하는 어여쁜 광경도 잘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시인 자신의 삶의 지향성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는 판단이 들게 된다.
산죽은 키가 크면 쉽게 부러질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터득하고 있다
늘 낮은 자세로 산다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
항상 이웃들과 체온을 비비며 산다.
얇은 잎가지에 아침이슬이 영롱하다
바람소리에 몸을 흔들어 화답하고
새소리 풀벌레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울창한 나무가지 틈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는 그 산죽
- 「그 산죽」 부분
시인은 산길을 다니면서 그냥 앞만 보고 속보(速步)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산길 주변의 계절과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른 봄 나무의 작고 가녀린 우듬지 끝에서 느껴지는 봄기운까지도 포착해낸다. 뿐만 아니라 암벽타기로 바위를 힙겹게 기어오를 때 손발의 끝에 집중되는 기운의 소중한 의미와 새로운 움을 틔우려는 우듬지 끝의 안간힘을 대비시키며 자연과 인간의 밀접한 관계성까지 통찰해내고 있다.
소귀고개 숲길을 걸으며 초봄
나무들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앙상한 가지 끝에서 꿈틀대는 산고(産苦)
곧 새싹을 터트리겠다
.......
바위를 타 본 사람은 안다
손 발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가장자리에 모아지는 힘
그것은 온몸을 끌어올리는 지렛대다
- 「가지론論」 부분
이렇게 틈만 나면 산을 오르며 대자연과 인간의 삶을 함께 통찰하는 시인의 행보를 우리는 시집에 수록된 작품을 통해서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다. 청산을 방안에 들일 수가 없어서 주변에 둘러놓고 보겠다던 옛 선인들의 크나큰 포부처럼 임윤식 시인의 경우도 큰 산을 다만 가슴으로만 껴안기에 너무 벅차고 성에 차지 않아서 시작품의 넉넉한 공간으로 잠시 이동시켜 놓았을 뿐이다.
3
임윤식 시인은 산을 통해서 삶을 깨닫고 산을 닮은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은 우직함 그 자체이다. 세상의 어떤 번잡(煩雜)과 훤소(喧騷)에도 귀를 막고 오로지 우직하게 앞만 보며 산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시인의 호젓한 광경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풍모를 우리는 다음 시작품 「길」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시작품에서 구사되고 있는 황소 이미지는 실제로 시인 자신의 모습이며 밭은 산의 또 다른 장소적 표현이다. 산을 좋아하고 산의 정신을 실천하려는 시인의 모습은 황소처럼 우직하기만 하다.
황소가 밭을 간다
깊이 파인 밭고랑 하나같이 똑바르다
지그재그로 가도 되는 요령은 아직 배운 적이 없다
그에게 길이란 오직 바른 길 뿐이다
길 위에서 결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물웅덩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에게 땅은 곧 하늘이다
거꾸로 세상을 읽는다
순교의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그 거룩한 침묵
- 「길」 부분
그 우직함이란 바로 이 시의 한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있는 ‘거룩한 침묵’이 아니고 무엇이랴? 침묵이란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 484∼406)의 어록에 등장하는 말처럼 ‘참된 지혜에서 우러나오는 최상의 응답’인 것이다.
마음이 쉽게 안정되지 않는 독자들이여!
하루라도 빨리 모든 것을 멈추고 산으로 달려가서 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산이 보내오는 거룩한 침묵은 무서운 웅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산의 차갑고 엄숙한 가슴에 귀 기울여 보라! 그대는 대자연이 인간에게 웅변적으로 보내오는 모든 메시지의 근원이 산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임윤식 시인은 바로 그 산이 품고 있는 존재와 사물의 근원에 대한 탐구를 하기 위해서 오늘도 등산배낭의 짐을 차곡차곡 꾸리고 있으리라.
홀로 산을 오른다
배낭 하나 달랑 등에 업었다
능선 바위에 누워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몇 점 구름이
한가롭게 흘러간다
바람이 산허리를 휘감고
내 속살을 파고든다
나는 온종일 바다가 되어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 「자유」 전문
추천의 말
이생진(시인)
임윤식 시인, 그는 부지런한 시인이요 사진작가이다. 그의 가슴은 항상 뜨겁고 연戀하다. 그는 높은 산과 낮은 바다를 가볍게 오르내린다. 그의 발은 나의 발보다 길다. 그는 섬에 오면 높은 산부터 올라간다. 우이도 돈목에 와서도 그는 도리산에 올라가고 나는 백사장을 게처럼 기고 있었는데 그는 상산을 넘어 진리까지 갔다 왔다. 그렇게 돌아다녀도 피로를 모르는 즐거움에 얼굴이 환하다. 암태도 건너 추포도 염전에서는 소금꽃이 피는 화단을 시와 사진으로 곱게 물들였다. 울릉도에서도 그랬고 독도에서도 그랬다. 홍도에서도 흑산도에서도 손발이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부지런하다. 암벽을 타고 정상에 올라가서도 한 마리 나비를 따라다니느라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았다.
‘새순을 길러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가 저 젖꼭지로 모여들었을까’ 라며 파고드는 그의 열정. 2012년에도 갈 곳이 생기면 함께 가자는 약속인데,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표4>시집 단평
임윤식 시인은 시인이기에 앞서 등산가이다. 그래서 그의 시엔 자연과 우주에 대한 장엄한 퍼스펙티브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한계와 운명에 대한 인식, 생에 대한 그의 외경의 정신은 아마도 여기서 연유할지 모른다. 또한 그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항상 삶과 현실을 살아 있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공동체에 대한 헌신, 지식인으로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 등은 우리들의 의식을 서늘하게 깨우쳐 준다.
오세영(시인,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회원,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
그의 강인한 몸에 비하면 그의 시는 사뭇 수줍음 잘 타는 풋풋한 감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늘 소년 같고 청년같다. 꾸미지 않는 어조로 토해내는 그의 작품은 언제나 시적 자아의 오롯한 눈망울이 그야말로 눈물겹게 떠오른다.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그것이 지닌 객관적 사물성보다는 항상 서정적 자아의 눈높이로 바라보기 때문에 풍경으로서의 자연만이 아니라 그 안에 투영된 시인의 생애가 번뜩이며 묻어나고 있다.
오탁번(시인, 작가, 고려대 명예교수,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