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표범’, ‘잡초류’, ‘순국산 된장(또는 고추장) 바둑’ 하면 떠오르는 ‘그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참으로 애기가(愛棋家)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 일천만 바둑팬 중, 아니 전 세계 수억의 바둑팬 중에서도 ‘서봉수 9단’을 모르는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 특히 젊은 팬들은..... 요즈음 바둑TV 한국바둑리그에도 선수로 보이지 않고, 바둑책이나 매스컴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다 보니 그리된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감히 그 누가 서봉수를 죽었다 하는가! 그는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칼을 갈며, 이빨을 갈며! 그의 이름은 잊혀질 만하면 언론에 등장한다. 마치 “승부사 서봉수, 나 아직은 살아 있어!”라고 외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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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봉수/민홍기 |
1953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이제 54살, 동네 기원에 죽치고 계시던 아버지를 기다리며 중학교 1학년 때 어깨너머로 처음 바둑을 접한 이후, 제대로 가르쳐 준 스승도 없이 거의 독학으로 바둑을 배워 5년만인 고3때 입단의 관문을 뚫었다.
이 입단하기 전 까까머리 여드름쟁이 소년 서봉수가 남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친구들이 기이한 정석의 한 갈래를 제시하여 그 후속 수단을 알아맞혀 보라고 골탕을 한번 먹여보자고 모의(?)를 했다.
정석사전이 처음 출판되었을 무렵이었다. 엄청나게 난해하여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서봉수 앞에 들이댄 그 정석! 그러나 소년 서봉수는 몇 분 간 끙끙 앓기는 했지만 그 기이한 정석의 후속 수단을 귀신같이 짚어 냈다!
그에게는 정석사전이 따로 필요 없으며, 어떤 배석 상황에서든 최선의 수를 스스로 찾아서 앞으로 나가는 힘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천부의 재능이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을......
입단 2년만인 1972년 19살 때, 당대 최고의 기사 천하의 조남철 8단(그 당시)을 제4기 명인전 도전기에서 3승 1패로 가볍게(?) 물리치고, 그 당시로서는 파천황의 대사건인 ‘19살 2단의 명인’으로 탄생했다.
그후 명인전 5연패 - 5년 연속 우승 -, 국수전, 왕위전, 기왕전, 국기전 등등 수많은 국내 기전에서 우승했으며, 1993년 40살 때는 4년마다 열리는 바둑 올림픽격인 제2회 응창기배 세계 바둑 대회에서 결승전에서 일본의 강호 오다케 9단을 접전 끝에 3승 2패로 꺾고, 제1대 조훈현 9단에 이어 제2대 세계 바둑의 황제로 등극했다. 우승 상금 40만 달러(그 당시 환율로 약 5억 원)의 두둑한 보너스와 함께.......
그러나 승부사 서봉수의 진면목은 4년 후인 1997년 한, 중, 일 3국의 국가 대항전인 진로배(현 농심배의 전신)에서 9연승의 신화를 연출하면서 완성된다. 혼자서 중국과 일본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9명이나 때려눕힌 것이다!
이 9연승의 신화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팀의 제2장으로 출전해, 남은 동료 3명은 바둑 한판 두어보지 못하고 우승 상금만 나누어 가지자 했던 것이다. 저 삼국지 관운장의 ‘오관 참육장(五關斬六將)’ - 주군 유비를 만나러 가면서 앞길을 가로막는 조조측 5관문의 6장수를 목벤 일- 을 3명이나 뛰어넘은 그야말로 기적 같은 승리였다!
그는 작년 6월 국수전 50주년 기념으로 열린 ‘역대 국수 초청전’에서 다시 우승했다. 이창호 9단이나 최철한 9단을 만나지 않은 대진운도 따랐지만, 결승전에서 동갑내기 친구이자 평생의 라이벌 조훈현 9단을 이기면서 그의 칼이 아직도 녹슬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보여줬다.
조훈현 9단과는 입단 이후 20여년에 걸쳐 ‘조-서 전쟁’으로 유명하다. 불세출의 기사 이창호 9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천하무적이었던 조9단과는 통산 약 120승 250패, 그러니까 3판 두면 1판 이기고 2판 지는 승률이었다. 이 두 기사의 약 370판 공식 대국은 세계 최고 기록이다.
서봉수는 작년 8월 개막된 제11회 삼성화재배 세계 바둑 대회에서 4강까지 올라갔다. 성적이 초라하여 시드 배정도 못 받고, 실력으로 예선 통과도 못하고, 주최측의 배려에 의한 와일드카드로 겨우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완전히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던 그가 중국의 젊은 신예 강자 장웨이, 천야오예, 왕야오 등을 모조리 눕히고, 아쉽게도 준결승에서 이 대회 우승자인 중국의 창하오 9단을 만나 패하여 결승행이 좌절됐지만, 그 당시 그 어느 누구도 서봉수의 4강 진출을 예상한 사람이 없었다.
젊었을 때는 죽기보다 바둑 지는 것을 싫어했지만, 이제는 “나는 이제 승부를 떠났다. 젊은 친구들과의 바둑이 즐겁기만 하다.”며 마음을 비운 서봉수 9단. 그 비운 마음 -허심(虛心) -에서 승부 세계의 더 큰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그는 50살이 지난 지금도 자기 바둑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자신한다. 생활에 여유가 없어 바둑 연구에 몰입할 여건이 안 되기 때문이라며, 만약 돈을 좀 벌어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바둑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어한다.
이제 그 꿈이 이루어져 다시 타이틀 홀더로 우뚝 선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신이여, 서봉수를 도우소서! |
첫댓글 분명 바둑계의 엘리트 이실텐데도, 전혀 그런티가 보이지 않는 구수한 분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