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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先代)의 묘소(墓所)에 얽힌 이야기
(제1화) 시조공(始祖公) 묘소(墓所)의 설단(設壇)과 남성재(南城齋)를 세우다.
(제2화)사정공(司正公)에 대한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당지산(唐旨山)의 명당(明堂)을 얻었다.
(제3화)노촌공(魯村公)의 효성(孝誠)에 감동한 설학대사(雪學大師)가 하천(夏泉) 명당(明堂)
을 잡아 주었다.
(제4화)전장(戰場)에서 아버지를 구하고 전사(戰死)한 백암공(柏巖公)의 시총(詩塚)이야기
(제5화)선외조모(先外祖母) 이씨부인(李氏夫人) 묘소(墓所) 를 외손들이 봉사(奉祀)하고 있다.
(제6화) 봉사(奉事)최덕금(崔德嶔) 선외조부(先外祖父)님의 묘소 (墓所)를 외손들이 봉사(奉祀)
하고 있다.
(제1화) 시조공(始祖公) 묘소(墓所)의 설단(設壇)과 남성재(南城齋)를 세우다
<전설(傳說)> “영일정씨 정습명 묘역”
<대동일보(96.3.13) ‘우리고장의 전설’>
포항시 남구 대송면 남성리(浦港市 南區 大松面 南城里)에는 시조(始祖)인 정습명(鄭襲明)을 제향(祭享)하는 남성재(南城齋)와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성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현청(縣廳)을 고읍리로 옮기기 전에는 새로 부임(赴任)하여 오는 현감(縣監)마다 죽게 되어,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중에 담력(膽力)이 좋은 한 선비가 자청(自請)을 해서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신임현감(新任縣監)은 전임현감(前任縣監)의 사인(死因)을 조사하고자 밤을 새우던 중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한 노인(老人)이 나타나
“내가 누운 자리에 무엄하게도 현청(縣廳)을 지었으니 빨리 옮겨라 그 렇지 않으면 너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고 했다. 이에 현감이 대답하기를
“정확한 묘 자리가 어디입니까? 알려주시면 분부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니
“내일 새벽 일찍 까치 한 마리가 날아 올 것이며, 맨 처음 땅위에
앉는 자리가 내가 묻힌 자리이니라.”
라고 일러주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安堵感)과 밤을 새운 피로감(疲勞感)에 지쳐 잠시 졸고 있는 사이 까치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까치는 벌써 여러 곳을 뛰어다니고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으나 그 부근(附近)을 조사해서 정습명(鄭襲明)의 묘역(墓域)임을 밝히고 현청(縣廳)을 옮겼으며 제사(祭祀)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역사의 격랑(激浪)속에서 시조(始祖)의 묘소를 알 수 없다가 영조(英祖)때에 이르러 영천(永川)의 양수(兩叟)선생이 설단안(設壇案)을 거론하여, 오회공(五懷公)과 만은공(晩隱公)이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하여 당시의 영일(迎日) 현청(縣廳)을 철거(撤去)시키고 그 자리에 시조공(始祖公) 설단(設壇)을 하였다. 그 단하(壇下)에 남성재(南城齋)를 지어 향화(香火)를 받들고 산하(傘下)에 수 만평의 부지를 구입하여 재전(齋田)으로 삼으니 이가 오늘의 남성재(南城齋) 이다.
<참고문헌> 영일군사. 대동일보(96.3.13) (우리 고장의 전설)
“영일정씨 정습명 묘역”- 하천종약회보(제13호)에
시조공(始祖公) 29세손(世孫) 민식(旻植) 전재(轉載).
<남성재지(南城齋誌)에 나타난 기록(記錄)>
1.남성단소(南城壇所)의 지형(地形)
경북도 포항시 대송면 남성리(慶北道 浦港市 大松面 南城里) 후원(後原)으로 반월형(半月形)의 중원(中原)에 설단(設壇)을 하였다.
경주 남동대산(南東垈山)의 만호봉에서 동으로 뻗은 운제산(雲梯山)이 주맥(主脈)이오, 태백산(太白山)이 일월산(日月山)을 거쳐 팔각일지(八角一枝)가 천리(千里)의 남으로 치술산(鵄述山)까지 뻗어 다시 역류하여 형산강(兄山江) 건너 북제산(北弟山)과 대안(對岸)하는 남형산(南兄山)이 외청룡(外靑龍)이며, 황룡산(黃龍山)에서 만들어 내려온 진전산(陳田山)이 외백호(外白虎)이다. 감여가(堪輿家-풍수학을 공부한 사람)가 말하기를 단산(壇山)은 오공혈(蜈蚣穴-지네혈)이며, 안산(案山) 인화봉(人花峰)은 구인형(蚯蚓形-지렁이형)으로 매년(每年) 추석(秋夕)이면 사녀(士女)들이 묘여 상월(賞月)하여 인화만산(人花滿山)이라 세칭(世稱)하니 팔대명산(八大名山)으로 이른다.
2.설단연혁(設壇沿革)
1) 숙종(肅宗) 35년 기축(己丑)(1709)에 21세손 만양(萬陽)과 규양(葵陽)형제가 종친들과 같이 여러 날을 답사한 결과 형양공(滎陽公)의 묘소란 확증을 못 잡고 말씀하기를
“조상(祖上)의 묘를 잃으면 단소(壇所)를 마련하는 것은 옛 부터 있어온 일이니 어찌 지금이라고 못 할 리 있겠느냐”
하시자 여러 종친들이 찬성하여 설단(設壇)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성읍(城邑) 안팎에 토지(土地)를 점유(占有)하기로 하였으나 관(官)과 읍민(邑民)이 허락(許諾)하지 않아 난관(難關)에 봉착(逢着)하였다.
2) 숙종(肅宗) 35년 기축(己丑)(1709) 9월에 20세손 석현(碩玄)등이 선외손(先外孫)인 순사(巡使) 홍만조(洪萬朝)에게 선조의 묘를 영일현청(迎日縣廳) 북쪽에 봉식(封植)할 수 있게 하여 달라는 정문(呈文)을 냄.
홍공(洪公)은 본현(本縣)에 령(令)을 내려 정문(呈文)의 내용에 의하여 현장의 분형(墳形) 등을 살펴서 논보(論報)하라고 지시하였다.
3) 경종(景宗) 2년 임인(壬寅)(1722)에 설단(設壇) 할 일에 대하여 합의를 보고, 용인(龍仁)의 영모재(永慕齋)에 통문(通文)을 냈더니 마땅히 하여야 한다는 회답(回答)이 왔다.
후손 세복(世復)등이 순사(巡使) 유척기(兪拓基)에게 재차(再次) 정문(呈文)하니, 그해 11월 순사관문(巡使關文)에 의하여 성남(城南)에 단기(壇基)를 닦고 흙을 쌓아 단소(壇所)를 조성하여 설단(設壇)하고, 다음해 10월 초 5일 후손 만양(萬陽) 찬(撰) 제문(祭文)으로 초제(初祭)하고, 여러 종중(宗中)에서 힘을 모아 위토(位土)를 매입하였고, 그 후 10월 초 10일에 세일제(歲一祭)하였다.
4) 영조(英祖) 16년 경신(庚申)(1740)에 순찰사(巡察使) 정익하(鄭益河)에게 정장(呈狀)을 내어 청원(請願)하였다.
5) 영조(英祖) 18년 임술(壬戌)(1742)에 매산(梅山)이 각 곳의 종인(宗人)들과 의논하여 구관청(舊官廳)터 오른편으로 10보쯤 되는 곳에 다시 설단(設壇)을 하고 또 재사(齋舍)를 짓고, 비(碑)도 세웠다. 비(碑)는 유척기(兪拓基)가 찬(撰)하고, 후손 지익(志翼)이 전서(篆書)하였다.
그 곁에 소나무를 심고, 사신(四神)의 석상(石像)을 세워 사람을 모아서 소와 말의 방목(放牧)을 금지하였다.
6) 영조(英祖) 27년 신미(辛未)(1751)에 묘단(墓壇)위에 비(碑)와 재사(齋舍)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모두가 공유지(公有地)라 후손 지중추부사어영대장(知中樞府事御營大將) 겸 총계사(總戒使)인 찬술(纘述)이 문중별로 쌀 수십 섬을 모아 그 자금으로 포전(浦田)을 매입하여 읍지(邑址)와 상환(相換)함으로써 대지(垈地)를 구득(購得) 할 수 있었다.
7) 영조(英祖) 28년 임신(壬申)(1752)에 재사(齋舍) 삼간(三間)과 부옥(附屋) 삼간(三間)을 건립하고 고자(庫子)를 선정(選定)하였다.
8) 기묘(己卯)년(1759) 겨울에 후손들이 모여 논의 한 바 무너진 묘단(墓壇)을 사초(莎草)하고, 묘단 앞에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
자손 중에 인(鏔)이 그때에 송라(松羅)의 승(丞)이 되어왔던 바 공사를 할 인부(人夫)와 비석(碑石) 및 상석(床石) 만들 돌을 마련하여 배로 실어다 단소(壇所)에 까지 운반하여 놓았다.
9) 갑신(甲申)년(1764) 큰 홍수가 나서 관(官)과 교환한 포전(浦田)이 거의 떠내려 가버려 관(官)에서 원래의 교환했던 대지(垈地)를 되돌려 달라고 해왔다.
10) 기축(己丑)년(1769) 일필(一鉍), 일관(一金貫)등이 현령(縣令)에게 간청(懇請)하여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 5 두락(斗落)을 추가로 매입하여 관(官)에 납입(納入)하고 영원히 변치 못할 철안(鐵案)으로 바꾸었다.
11) 갑진(甲辰)년(1784) 7월에서 을사(乙巳)년(1785) 4월까지 일필(一鉍) 등이 모든 종인들과 의논하여 거두어 들인 곡식과 돈을 이자(利子)를 놓고 지세(地貰)을 모아 목재와 기와를 구입하여 재사(齋舍)의 수리(修理)를 하였다. 재사(齋舍)는 19간이고, 방이 6간이며 대청도 이와 비슷하여 세제(歲祭)때 재원(齋員)들이 거처 할 만 하였다. 남은 목재로 비각(碑閣)을 세워 비(碑)를 보호 하였다.
12) 무오(戊午)년(1798)에 제사(祭祀)에 여러 종친(宗親)들이 상의하여 땅을 처분하고 남은 경비 및 수세(收貰)로 후손 하직(夏溭)에게 재사(齋舍) 중수공사(重修工事) 책임을 지게 하였다.
13) 신유(辛酉)년(1801)에 하옥(夏沃)과 협력하여 중수(重修)를 시작하여, 무진(戊辰)년(1808)에 완성하니 재사(齋舍)는 정당(正堂)이 3간(間), 재실(齋室)이 4간(間), 주방, 창고 모두 합하여 14간(間)이다.
14) 병인(丙申)년(1896) 후손 치전(治田)과 금산(金山)의 환옥(煥玉), 현필(賢弼)이 종의(宗議)에 따라 구목(邱木) 25주(株)를 베어 250양(兩)을 마련하여 랑역(廊役)을 하였다.
15) 을축(乙丑)년(1925)에 4월에 8도의 제족(諸族)에게 통문을 보내어 자금을 마련하여 구재(舊齋)에 가까운 서편에 24개의 초석을 놓고 제단(齋壇)과 바로 마주보는 자리에 재사공사(齋舍工事)를 시작하여 4년 후인 무진(戊辰)년(1928)에 준공(竣工)하였다. 오실(奧室)이 4간(間)이고 좌우(左右)에 헌함(軒檻)이 둘려 서로 통하게 하였다. 중앙의 8간(間)은 충순당(忠純堂)으로 하고 총합하여 편액(扁額)을 남성재(南城齋)라 함.
16) 무인(戊寅)년(1938)에 옛 재사(齋舍)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 재소(齋所)에 재력(財力)이 없어 서로 근심하고 있던 차에 후손 재용(載鎔)이 그 비용 수 천원을 담당하기를 자원하여 정성을 다하여 중수함.
<전재자료> 남성재지(南城齋誌) 1992.10 남성재(南城齋)
*내용정리- 시조공(始祖公) 30세손(世孫) 병극(炳極).
(제2화)사정공(司正公)에 대한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당지산(唐旨山)의 명당(明堂)을 얻었다.
당산재기(唐山齋記)에 의하면 팔공산(八公山)의 한 줄기가 동으로 약 50리를 달려서 당지산(唐旨山)이 우뚝 솟았으니, 이 산은 ‘용(龍)이 꿈틀거리며 가는 모습과 봉(鳳)이 춤을 추는 형상’ 완연유약룡행봉무지상(蜿蜒有若龍行鳳舞之狀)으로 산세는 수려하여 신령(神靈)의 맑은 기운을 잉태(孕胎)하고 있는 것 같고, 그 산 아래에는 옛 못이 있어 당지(唐池)라 불리 우니 세칭(世稱)으로 이 산을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혈’ 갈마음수지국(渴馬飮水之局)이라고 부른다.
그 중원(中原)에 여러 봉(封)의 묘소가 있으니 곧 우리 선조이신 원당(元堂)에 계시는 판서공(判書公) <휘 광후(光厚)9世>의 배위(配位) 익양군부인영천이씨(益陽郡夫人永川李氏)의 묘소가 수위(首位)이고, 그 장자이신 사정공(司正公) <휘(諱) 위(瑋)10世>의 묘소 및 배위(配位)이신 대구서씨(大邱徐氏)의 묘소가 다 같은 언덕에 있다.
사정공(司正公)께서 어린 시절 큰 자라를 구해준 그 은혜(恩惠) 갚음을 받아서 이 길지(吉地)를 얻었다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傳)해오고 있다.
<사정공(司正公) 19세손(世孫) 민식(旻植) 구술(口述)>
고려말(高麗朝)의 고관(高官)을 지내시고 포은선생 (圃隱先生)의 재종 조부(再從祖父)이신 판서공(判書公)<휘(諱) 광후(光厚)9世>선조께서는 이성계(李成桂) 일파(一派)로 부터 신변(身邊)의 위험(危險)을 느껴 이를 피 (避)해 영천의 전촌(錢村)으로 은입(隱入)해 오셨다. 야밤중에 남몰래 식구(食口)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살림살이가 아주 어려 우셨다고 한다. 슬하(膝下)에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두셨는데 장자(長 子)가 사정공(司正公) <휘(諱) 위(瑋)10世>이시다.
어릴 때부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셨고 재주가 있어 글공부를 잘 하셨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形便)이지만 자녀교육(子女敎育)을 소홀히 할 수 없어 서당(書堂)에 보내어 공부토록 하였다. 그때의 풍습(風習) 이 책(冊) 한 권을 다 배우면 제자(弟子)가 책거리 떡을 하여 스승에게 바치어 스승의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는데
하루는 아드님이 어머니께 말씀드리기를
“어머니! 책을 한 권(卷)을 다 배웠으니 책거리 떡을 해 주십시오.”
라고 여쭈었으나 워낙 가난하여 떡을 해줄 형편이 되지 못해서
“그럼 다음 책을 다 배우면 떡을 해 주겠다”
라고 약속(約束)을 하시었다. 두 번째 책(冊)도 떼고 나서 다시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으나 역시 대답(對答)은 같았다. 세 번째는 거절(拒絶) 할 수가 없어 이웃에 가서 쌀을 빌려다 책거리 떡을 만들어 아들에게 주셨다. 신나는 마음으로 떡 그릇을 들고 서당(書堂)으로 가는데 도중(途中)에 자라를 파는 장수를 만났다. 어떤 사람과 한창 흥정을 하고 있는데 여러 마리의 자라 중에 한 마리의 자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정소년(鄭少年)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니 팔려갈 자라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자라를 파는 장수께
“내가 들고 있는 떡을 다 줄 것이니 자라와 바꾸자”
라고 제안(提案)하시었다. 자라 주인(主人)도 귀한 떡이라 좋다하고 바꾸어 주었다. 정소년(鄭少年)은 떡과 바꾼 그 자라들을 가까운 물속에 모두 놓아주었더니 눈물을 흘리던 자라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꺼덕이며 인사를 하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결국(結局) 스승의 은혜(恩惠) 보다 팔려가 죽을 자라를 살려주는 생명존중(生命尊重)을 택(擇)하신 것이다. 그 후 세월(歲月)이 흘러 어머니이신 익양군부인영천이씨(益陽郡夫人永川李氏)께서 돌아가시자 묘(墓)터를 찾아 여기 저기 다니시다가 당지산(唐旨山) 근처에 가니 큰 자라 한 마리가 상주(喪主)이신 사정공(司正公)의 앞길에 기어가기에 이상(異常)히 여겨 따라가 보니 언덕으로 올라가 양지(陽地) 바른 곳에 멈추어 섰다. 그곳에 서서 산세(山勢)를 살펴보니 명당(明堂)이라 여겨져 묘를 섰다고 한다. 그 후에 자라를 살려준 사정공(司正公) 내외분의 묘소도 그 곳에 섰다.
그 묘 터가 명당(明堂)이라 판서공(判書公)의 그 자여손(子與孫) 양대(兩代)에서 문과(文科) 8급제(及第)가 나서 세상에서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을 드날렸다. 약 600여년을 내려오며 자손(子孫)은 수 천호(數 千戶)에 이르고, 벼슬길에도 그 명성(名聲)을 이어졌으며 효도(孝道)와 우애(友愛) 및 문행(文行)과 훈공(勳功)과 석덕(碩德)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結局) 자라가 생명(生命)을 구(救)해준 은인(恩人)에게 보은(報恩)으로 묘(墓) 터를 명당에 점지(占地)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생명(生命)을 존중(尊重)하신 사정공(司正公)의 훌륭한 생명존중사상(生命尊重思想)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큰 교훈(敎訓)이 된다. 그 후 자손(子孫)들은 자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판서공(判書公) <휘(諱) 광후(光厚)9世> : 고려말(高麗末)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시어 상주목사(尙州牧使)와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을 역임(歷任)하셨다. 이성계(李成桂) 일파에 의해 포은공(圃隱公)께서 순절하시자 우리 가문에 미칠 화를 피하느라 영천의 전촌(錢村)에 부공(父公)이신 전공펀서(典工判書)<휘 인언(仁彦)8世>을 모시고 은입(隱入)하시었다. 새로운 조선조(朝鮮朝)에서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除授)하여 불렀다. 공께서는 비록 이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마는 그 거취(去就) 여하에 따라 가문(家門)의 존망(存亡)이 판결(判決)날 처지였다. 그러므로 가문을 위해 나아가서 취임(就任)하심으로서, 그 덕으로 후손들이 향화(香火)를 천추(千秋)에 보전(保傳)하게 된 것이다. 비(妣)는 익양군부인영천이씨(益陽郡夫人永川李氏)로 전리판서(典理判書) 후룡(厚龍)의 따님이시다.
*사정공(司正公) <휘(諱) 위(瑋)10世> : 판서공(判書公) 휘(諱) 광후(光厚) 선조(先祖)의 장자이시며 관직으로는 돈용부위(敦勇副尉)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후령사정(後領司正)을 역임하셨다. 삼남 이녀를 두었으니, 장남에 이파(二派) 파조이신 생원공(生員公) 휘 문예(文裔)(11世)이시다.
<참고자료>
영일정시문헌록(迎日鄭氏文獻錄) 당산재기 (唐山齋記)
*내용정리- 사정공(司正公) 20세손(世孫) 병극(炳極).
(제3화)노촌공(魯村公)의 효성(孝誠)에 감동한 설학대사 (雪學大師)가 하천(夏泉) 명당(明堂)을 잡아 주었다.
아버지이신 선무랑공(宣務郞公)<휘 차근(次謹)14世>께서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 를 피해 영천의 대전(大田)에서 노항(魯巷)으로 옮겨와 사르셨다.
아들이신 노촌공(魯村公) <휘(諱) 윤양(允良)15世>께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그를 모두가 정효자(鄭孝子)라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어린 정효자는 병간호를 지성(至誠)으로 하였으므로 보는 이 마다 감탄하였다고 한다.
끝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애통(哀痛)해 하는 모습이 차마 볼 수 없으리 만큼 애처로웠으며, 장례절차(葬禮節次)를 행(行)함에 있어서 예법(禮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일견봉(日見峰) 아래에 묘 터를 잡아 미리 광중작업(壙中作業)을 하며, 상주(喪主)가 친히 관을 묻는 데 필요(必要)한 흙을 채로 치고 있을 때, 마침 스님 한 분이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 제자(弟子)와 더불어 말하기를
“저 상주는 6덕(德)을 갖춘 사람으로서 정성스런 효심으로 좋은 터를 얻을 터인데 어찌하여 여기다가 터를 잡느냐?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명혈(名穴)이 있는데...”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상주(喪主)가 그 스님의 뒤를 십 여리나 쫓아가서 물으니, “옛말에 물건은 각각 그 주인이 있거늘 그대의 정성(精誠)스러운 효성으로 능(能)히 이 산의 주인이 되지 않겠는가.”하고는 이에 함께 가서 그 터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대의 후손에는 반드시 어진 군자(君子)가 많이 나오리다.”하니 공께서 간절히 집에 모시고자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옷을 털고 뒷산으로 가는 것을 하인을 시켜서 쫓아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공께서 드디어 날을 다시 잡아 장사하니 그곳이 바로 기룡산(騎龍山) 산록 하천(夏泉)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촌공(魯村公)의 지극한 효성 때문에 그렇게 명당(明堂)을 얻을 수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하천묘역의 혈(穴)의 형상(形象)이 기룡(騎龍)의 좌장혈(左掌穴)로서 부귀(富貴)를 겸하여 가운(家運)이 융성(隆盛)하고, 힘차게 내려 쏟는 기룡(騎龍)의 정기(精氣)를 받았으니 위인(偉人)이 태어날 징조(徵兆)고, 또 청룡(靑龍) 백호(白虎)가 세 겹으로 되어 있으니 손세(孫勢)도 아주 좋은 형상(形狀)이라 전해오고 있다.
그 결과(結果) 손자(孫子)이신 호수공(湖叟公)과 증손자(曾孫子)이신 백암공(柏巖公), 처사공(處士公), 만호공(萬戶公), 호군공(護軍公), 그리고 그 후손(後孫)들에서 유명(有名)한 학자(學者)와 관리(官吏) 및 무인(武人)들이 많이 났으며, 자손수(子孫數) 또한 2000년 현재 동자(童者), 관자(冠者) 합하여 13,800여명에 달하니, 명당(明堂) 자리의 덕(德)을 톡톡히 보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후손 중에 조선조(朝鮮朝)에서 문무과시(文武科試) 23名, 진사(進士) 33名이 났다.
*무오사화(戊午史禍) : 1498년 연산군 4년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등의 신진사료(新進士瞭)가 류자광을 중심 한 훈구파(勳舊派)에 화(禍)를 입은 사건으로 사림파(士林派) 중심의 김종직(金宗直)을 부관참시 하였다. 탁영 김일손이 춘추관의 사관(史官)일 때 사초(史草)에 기록을 문제(問題) 삼아 반대 세력을 몰아 부친 사건이다. 사성공의 아드님 3형제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의 교분이 깊었는데 그 아랫대가 선무랑공 이시다. 무오사화가 영남일대를 휩쓸 때 세의(世誼)가 깊었던 우리 가문이 안심할 수 없어서 동서남북으로 사성공(司成公)의 손자(孫子) 8종반 및 그 가족(家族)들이 몸을 피해 헤어짐.
*노촌공(魯村公) <휘(諱) 윤양(允良)15世> : 선조(先祖)께서는 어려서부터 효자(孝子)라 이름이 널리 불리었으며, 노승(老僧)이 하천(夏泉)에 명당(明堂)의 묘(墓) 터를 잡아주었다.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에 열중(熱中)하셨고 나중에는 안동(安東)의 퇴계 이황선생(退溪 李滉先生)의 문하(門下)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자양서당(紫陽書堂)을 지어 학문(學問)을 폈으며, 임고면(臨皐面) 부래산(浮來山)에 방선조(傍先祖) 포은 정몽주선생(圃隱 鄭夢周先生)의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爲)해 임고서원(臨皐書院)을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자문(諮問)을 받아서 지으니, 임금으로부터 사액(賜額)이 내려와 향풍(鄕風)을 크게 이르키 셨다.
*육덕(六德) : 지(知), 인(仁), 성(聖), 의(義), 충(忠), 화(和)의 여섯 가지 덕.
<참고문헌>
*永川儒林, 永川市, 慶北道敎育委員會, 烏川鄭氏夏泉宗約會 등에서 발간한 문헌(文獻).
*하천묘역안내서 오천정씨하천종약회 2011.
*내용정리- 노촌공(魯村公) 16세손(世孫) 태기(胎基).
(제4화)전장(戰場)에서 아버지를 구하고 전사(戰死)한 백암공(柏巖公)의 시총(詩塚)이야기
호수선생실기((湖叟先生實紀)의 시총비명(詩塚碑銘)에 의하면 백암공(柏巖公) 휘(諱) 의번(宜藩)께서는 자질이 뛰어나고 또 아버지의 가르침을 복종해서 항상 고요한곳에서 글을 읽어서 밖의 일을 모르고 지내었다. 부모의 명에 의해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향시(鄕試)에 장원(壯元) 급제(及第)하고 을유년(乙酉年)(1585)에 사마진사(司馬進士)에 급제하니 명성이 높으셨다. 임진년(壬辰年, 1592) 영천성 복성전에 참전하고 여세를 몰아 8월 21일에 경주의 왜적(倭賊)을 공격함에 경상 좌절도사(左節度使) 박진(朴晋)의 군사와 더불어 합세하여 영천(永川) 의병장(義兵將) 호수공(湖叟公)께서 선봉(先鋒)이 되어 성 아래에 육박하니 적이 문을 열고 반격해 나왔다. 죽기를 각오한 의병의 공격으로 적은 크게 패하고 능히 지탱하지를 못하다가 이에 기병(奇兵)으로서 나와 등 뒤를 공격하여 박진의 군사가 패해서 물러나고 의병(義兵)도 또한 따라서 무너졌다.
호수공께서는 한 때 적진을 함락시키고 힘껏 싸우다가 포위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아들 백암(柏巖) 정의번(鄭宜藩)이 칼질하면서 돌진(突進)해 포위망을 뚫으니 호수공께서 이로 인해 포위에서 탈출하였으나 공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좌우로 충돌하면서 부공(父公)을 두루 찾아 다녔다.
드나든 지 세 번 만에 몸에는 수 십 군데 창(槍)에 찔렸으나 오히려 말을 채찍질하여 앞서서 전진하며 활을 걸어 당겨 왜적(倭賊)을 쏘니 적이 활을 받고서 거꾸러졌다. 결국 공이 탔던 말이 탄환(彈丸)에 맞아서 적에 포위당한 바가 되었다. 적이 공을 항복시키고자 하였으나 꾸짖으며 굴복치 아니하고 전사하였다.
경상우도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이 공의 죽음을 듣고서 놀라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200년간 북돋아준 유화(遺化)가 아니겠느냐.(玆非二百年培養之遺化)”
하고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니 임금이 이것을 아름다이 여기시고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증직(贈職)하였다.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한 때 사귀어 놀던 친구들이 다투어 글을 지어 조상(弔喪)하는데 부공(父公)인 호수공께서 애사(哀詞)를 모아서 기룡산(騎龍山) 선영(先塋) 아래 임좌(壬坐)에 장사하니 남들은 이른바 시총(詩塚)이라 하였다. 뒤에 공인신씨(恭人辛氏)를 여기에 부장(祔葬)하였다.
*시총비명(詩塚碑銘)
<....다만 시(詩)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다. 때문에 시문(詩文)은 체백(体魄)에 대신(代身) 할 수 있으니 시(詩)로써 무덤을 하는 것이 또한 예(禮)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반드시 뼈로 장사 지낸 것을 옳다 하고 시(詩)로 장사지내는 것은 부당하다 생각하나, 그러나 쓸쓸한 황혼에 장사 지내는 것이 많겠지만 이는 마침내 썩어 없어지는데 돌아갈 뿐이고 그 사람의 시(詩)는 오래되어도 썩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 무덤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嘉善大夫龍驤衛副司直兼弘文館提學同知義禁府春秩館事 吳光運 撰
*시총부(詩塚賦)
<....정씨(鄭氏) 일문에 충효(忠孝)가 모인 것이요 아버지는 적세(賊勢)가 충돌(衝突)하는 날에 절개(節槪)를 다하였고, 아들은 임금과 아버지가 위급한 즈음에 목숨을 바쳤다. 아래로는 종과 기르는 천인(賤人)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능히 주인의 절의(節義)를 본받아 은혜를 갚으니 어찌 효렬(孝烈)의 격동(激動)이 아니랴. 이 반드시 천지간에 순수하고 강직(剛直)하고 지극(至極)히 바른 기운(氣運)이 정씨(鄭氏)에게 모아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剛窩 任必大
<그 外 撰者>
*묘지명(墓誌銘)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柳命天 撰
*제시총비후(題詩塚碑後) 承旨 李獻慶 撰
*‘조선(朝鮮)의 풍수(風水)’朝鮮總督部 官房文書課 囑託 村山智順 著 <전재자료>
오천정씨하천종약회 - 종약회보(제7호) 1991.
국역호수선생실기 - 권지 6 1976.
하천묘역안내서 오천정씨하천종약회 2011.
*내용정리- 백암공(柏巖公) 종(從)14세손(世孫) 태기(胎基).
(제5화)선외조모(先外祖母) 이씨부인(李氏夫人) 묘소(墓所) 를 외손들이 봉사(奉祀)하고 있다.
호(號)가 정헌(靖軒)이신 사성공(司成公)<휘(諱) 종소(從韶)12世>께서는 어린 시절(時節)에 외삼촌(外三寸)이신 대전이공(大田李公)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셨고, 문예(文藝)가 뛰어나셨으며 은해사(銀海寺)에서 독서(讀書)하고 계실 때 그곳을 들린 이웃 군(郡)의 윤통태수(尹統太守)가 재능(才能)이 뛰어남을 보고, 사위로 삼으셨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세종(世宗)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及第)하시고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자원(自願)하시어 여러 고을을 살아 셨으며 역전랑(歷詮郞)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으로 계시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故鄕)인 영천대전(永川大田)으로 돌아오시어 은거(隱居)하셨다.
사성공(司成公)의 장조모(丈祖母)이시고, 목사공(牧使公)의 외증조모(外曾祖母)이신 이씨부인(李氏夫人)이 돌아가시자 북안면(北安面)의 반정(半亭)의 뒷산에 묘소(墓所)를 섰다. 그러나 외손(外孫)이신 목사공(牧使公)께서 외가(外家)집에 후손(後孫)이 없으니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기 시작(始作)하여 오백 여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代)를 이어 묘소를 수호(守護)하고 묘사봉사(墓祀奉祀)를 하고 있다.
<반정(半亭)에서 하천(夏泉)으로 이장(移葬)한 사연(事緣)>
1987년 4월 13일 원당(元堂) 춘향일(春享日)에 영천시(永川市) 북안면 (北安面) 반정(半亭)에 선외조모(先外祖母)이신 이씨부인 (李氏夫人) 묘 사(墓祀)를 지내러가니 비석(碑石)만 남아있고 묘(墓)는 없어지고 말았 다. 그래서 수소문한 끝에 군용지(軍用地)로 편입(編入)되어 군사도로 (軍事道路)를 내면서 이장공고(移葬公告)에 응(應)하지 않아 무연고묘
(無緣故墓)가 되어, 임의개장(任意改葬)으로 경주시 서면(慶州市 西面)의 서라벌 공원묘역(公園墓域)에 이장(移葬)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50사단 관재과(管財課)에 가서 분묘이장승인서(墳墓移葬承認 書)를 받아 하천종약회(夏泉宗約會) <회장(會長) 달식(達植), 총무(總 務) 태용(泰龍)> 가 중심(中心)이 되어 이장절차(移葬節次)를 밟아, 1987년 7월 29일에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永川市 紫陽面 聖谷里) 초등 학교(初等學校) 뒷산에 이장(移葬) 하였다. 처음에는 원당(元堂)의 판 서공묘역내(判書公墓域內)에 이장(移葬)하기로 하였으나 타(他) 문중 (門中)의 반대(反對)로 시행(施行)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4월 셋째 주(週) 일요일(日曜日)에 하천묘역(夏泉墓域)의 묘사행사시(墓祀行祀時)에 같이 묘사(墓祀)를 지내고 있다.
*사성공(司成公) <휘(諱) 종소(從韶)12世> : 호(號)는 정헌(靖軒)께서는 조선조(朝鮮朝) 세종(世宗)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류성원(柳成源) 등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하신 선조(先祖)이시다.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에서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자원(自願)하시어 의성(義城), 영주(榮州), 예천(醴泉), 함안(咸安) 등(等) 여러 고을을 살아 셨으며 가시는 곳마다 덕(德)으로 선전(善政)을 베푸시어 그 치적(治積)이 동국여승람(東國與勝覽)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역전랑(歷詮郞)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으로 계시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故鄕)인 영천대전(永川大田)으로 돌아오시어 은거(隱居)하셨다. 그 후 단종(端宗)을 도운 유신(遺臣)으로 충남(忠南) 계룡산(鷄龍山) 동학사 숙모전(肅慕殿)에 배향(配享)되어있다.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평산윤씨(平山尹氏)로 참판(參判) 통(統)의 따님이시다.
*목사공(牧使公) 휘(諱) 이휘(以揮)(13世) :.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시어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직제학(直提學), 양주목사(楊洲牧使)를 지내셨다.
배위(配位)는 창녕오씨(昌寧吳氏)와 계배(繼配)는 춘천박씨(春川朴氏) 효전(孝田)의 따님이시고, 슬하(膝下)에 오남일녀(五男一女)를 두셨으며, 묘소(墓所)는 영천시 오미동 삼귀리(永川市 五味洞 三歸里)의 생원공(生員公) 묘소(墓所) 아래에 있다.
<참고자료>
하천종약회보(夏泉宗約會報)(제4호)
*내용정리- 사성공(司成公) 18세손(世孫) 병극(炳極).
(제6화) 봉사(奉事)최덕금(崔德嶔) 선외조부(先外祖父)님의 묘소 (墓所)를 외손들이 봉사(奉祀)하고 있다.
노촌공(魯村公)<휘 윤양(允良)15世>의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영천최씨(永川崔氏) 봉사(奉事) 덕금(德嶔)님의 따님이신데 호수공(湖叟公)의 어머니이시다. 최씨(崔氏) 집안에는 아들이 없어 대(代)가 끊어지고 말았다.
훗날 외조부(外祖父)이신 최덕금(崔德嶔)님께서 돌아가시어 영천시 오미동(永川市 五味洞)의 삼귀재(三歸齋)의 생원공(生員公) 휘(諱) 문예(文裔)(11世) 선조님(先祖任)의 묘소(墓所)에서 서(西)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 묘소(墓所)가 마련되었다. 후손이 없으니 호수공(湖叟公)께서도 아버지이신 노촌공(魯村公)의 외가를 생각하시는 정신을 이어받아 묘소(墓所) 수호(守護)와 해마다 묘사를 지내드렸다. 그르다 훗날 삼귀재(三歸齋)에서 의론(議論)하여 음력(陰曆) 10月 17日에 생원공(生員公) 묘사(墓祀)날에 같이 묘사(墓祀)를 지내고 있다. 1996年 11月 15日에는 하천종약회(夏泉宗約會)<회장 민식(旻植), 총무 연성(淵晟)> 결의에 의하여 묘소(墓所)에 상석(床石)을 놓고, 묘소 입구(入口)에는 입구표석(入口表石)을 세워 묘소 찾기에 편(便)하도록 하였다. 몇 년(年) 전(前)에는 최봉사공(崔奉事公)의 방손(傍孫)들이 우리 가문(家門)에서 500여년(餘年)을 내려오며 선외조부님(先外祖父任)의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고 묘사(墓祀)를 지내고 있음은 알고, 그들의 방조(傍祖)이신 최봉사공(崔奉事公)의 묘소(墓所)에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성묘(省墓)를 하고, 우리 문중(門中)에 고마움도 표(表)해 왔다고 한다.
이처럼 500여년(餘年) 동안 선외조부님(先外祖父任)의 묘소(墓所)를 수호(守護)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선조(先祖)님 들께서는 효도(孝道)에는 친외가(親外家)의 구분(區分)이 없음을 보여주는 이어받을 아름다운 전통(傳統)이요 교훈(敎訓)이다.
*호수공(湖叟公) <휘(諱) 세아(世雅) 16世> : (1535-1612) 자(字): 화숙(和叔). 시호(諡號): 강의(剛義). 관직: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증직(贈職):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 24세 때 진사(進士). 5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형제(휘 의번, 휘 안번)를 데리고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義兵將)에 추대되어 빼앗겼던 영천성을 도로 찾고 경주성 싸움에서 큰공을 세우셨다. 영천, 경주성을 다시 찾고 그 공(功)은 장수들에게 양보하고 자양 옛 고장에 들어와 자호정사(紫湖精舍)에서 학문의 연구에 몰두하다 체찰사(體察使)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잠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다녀오신 후 왜란으로 불에 탄 임고서원(臨皐書院)을 다시 짓고, 후진 양성에 몰두하셨다.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창석(蒼石) 이준(李埈),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등 여러 선비들이 때때로 찾아와 학문(學文)을 토론(討論)하였으며 끝내 벼슬을 사양하시고 수려(秀麗)한 산수(山水)를 벗삼아 천수(天壽)를 누리시어 향년(享年) 78세로 돌아가셨다. 영천, 경주성 복성(復城)한 공으로써 강의(剛義)란 시호(諡號)와 증직(贈職)으로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가 내려졌다.
유(有): 호수실기(湖叟實記). 강호정(江湖亭). 향(享):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유(有): 신도비(神道碑), 풍원부원군영의정(豊原府院君領議政) 조현명(趙顯命) 찬(撰).
지명(誌銘): 좌의정(左議政) 송인명(宋寅明) 찬(撰).
배(配): 증(贈) 정부인(貞夫人) 일직 손씨(一直孫氏) 현감(縣監) 치운(致雲)의 여(女).
<참고자료>
하천종약회보(夏泉宗約會報)(제13호)
영일정씨문헌록(迎日鄭氏文獻錄)(券之1)
*내용정리- 노촌공(魯村公) 15세손(世孫) 병극(炳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