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트롤어선 608호의 철수를 위해 뉴델리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업무진척상황을 보고하느라 본사에 전화를 내었더니 전무가 나와 대뜸 하는 말이 이랬다.
"안 차장, 알젠틴 단순입어허가가 떨어졌어. 그쪽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들어와. 나는 민들레호 수리 때문에
곧 라스팔마스로 나가야 해."
민들레호는 알젠틴 단순입어를 위해 최근에 구입한 선박으로 스페인 항구에서 채낚이 어선으로 개조하는 수리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경섭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기조차 했다.
"전무님, 입어허가서는 읽어 봤습니까? "
"입어허가서 사본은 사장이 품에 안고 안 보여 주네. 허가서 발급비용으로 척당 십만 불씩 벌써 송금도 되었어."
"그러면 알젠틴 수산청의 대금 청구서가 정식으로 날아왔습니까?"
"야! 그것은 자네가 들어와서 알아보면 되잖아. 빨리 들어오기나 해! "
팩하고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전무도 사장이 혼자 차·포 떼고 두는 장기에 부아가 잔뜩 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사장이 입어허가서를 품에 안고 보여주지 않는다? 이건 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알젠틴 단순입어는 용선입어의 대안으로 89년부터 꿈꾸어온 사장의 숙원사업이었다.
오징어 채낚이 어선인 703호의 용선입어가 실패로 끝난 후 사장은 차동한이란 현지 교포에게 목을 매달고
지난 2년간 꾸준히 공을 들였고, 드디어 지금 그 입어허가서를 품에 넣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일에는 매사에 순서가 있고 앞뒤가 맞아 돌아가야 하는 법. 송금과정의 의혹은 말할 것도 없고 정작 제일 중요한 입어허가서가 그 때까지도 공개되지 않고 있었으니 아무리 월급쟁이 직원이라 해도 사장이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알젠틴 입어허가서를 좀 보여주시지요."
"안 차장, 자네도 그게 그리 궁금하나? 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어업허가장은 당분간 잊어버려."
전무도 팩스로 부쳐져온 입어허가서 사본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차장인 그가 감히 그것을 보여 달라고 했으니 사장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그러나 경섭은 귀국한 바로 다음날 경리부장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에게 보여준 종이쪽지가 머리에 떠올라 말을 이었다.
"송금 영수증 말인데요. 그게 좀 이상해서... "
"아-그거, 내가 그냥 약식으로라도 하나 만들어 보내 달라고 했어. 송금이 전액 완료되면 2 차로 총액에 대한 걸
정식으로 보내 준다고 했어."
그가 인도에서 돌아온 직후에 부친 돈까지 모두 합하면 2백만 불 가까운 돈이 이미 알젠틴으로 송금되었던 것인데 선박입어료는 척당 3십만 불로 7척에 해당하는 입어료만 당시 환율로 20억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말비나스 수역에 입어하는 채낚이 어선들이 3월부터 5월까지 고작 3개월 동안 조업을 하는 반면 알젠틴 수역은 어군만 형성된다면 주년조업도 가능하므로 만약 단순입어만 성사된다면 일약 돈방석에 올라앉는 프로젝트였다.
사장은 알젠틴 수역에서의 단순입어사업으로 신청된 7척의 채낚이 어선 중 타사선 3 척을 뺀 자사선 4척만으로도 일 년 만에 송금된 돈은 거뜬히 벌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마치 복권을 사다놓고 당첨되면 돈 쓸 걱정부터 하는 사람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사장의 결정은 너무나도 무모하게 느껴졌다. 일확천금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어디 목숨을 건 모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사장실을 걸어 나오는 순간 경섭은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낮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사장의 전력을 생각하면 그의 범상치 않은 결단에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하였다.
60년도 말 사병으로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제대 후에도 월남에 남아 미군 PX에서 헐값으로 빼낸 전자제품을 들고 격전의 전장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한국 귀환장병들을 상대로 보따리장사를 한 끝에 이십만 불이라는 거액을 벌었다는 얘기는 그의 고향에선 이미 작은 전설이었다.
그 뿐인가. 고향인 묵호로 돌아와 청년실업가의 꿈을 키우던 그가 자라면서 보고 배운 게 오징어잡이 배였는지 남들이 생각 못한 450톤급 원양 오징어채낚이 어선 세 척을 덜렁 계획조선으로 신조하여 80년도 초에 줄줄이 포클랜드 어장으로 출어시켰는데, 그 해 오징어만으로 20억 원을 벌어 들였으니 그 당시 수산업계의 사람들이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도대체 그만한 배가 부산을 출항하여 인도양을 거쳐 케이프타운을 돌아가는 45일간의 긴 항정을 소화해 낸다는 것은, 더구나 남위 50도의 거친 해역에서 수 개월간 조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백전노장 선장출신들이 군림하던 당시 수산업계로서도 위험천만의 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대만의 시험조업 보고서를 입수한 D수산의 은밀한 출어계획을 알아낸 그가 사계의 우려를 비웃기나 하듯 출어를 감행한 결과 오징어의 황금어장을 개척한 공로자가 되어 일약 수산업계의 기린아로 우뚝 서게 된 것이었다.
말비나스(포클랜드)섬의 스탠리항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1,200마일 떨어진 사우스조지아 섬 주위로 17세기에 침몰한
구라파 범선들의 잔해가 수두룩한 것을 알고 있는 선장출신 사장들은 아마도 서울 안 가본 박 서방처럼 십중팔구 그를 처음부터 얼간이로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오징어가 명태나 고등어처럼 대중어로서 폭발적인 수요가 일어난 것은 80년대 초 프로야구의 출범과 통행금지 폐쇄에 따른 유흥주점의 범람과 때를 같이했다. 그 당시 마른 오징어와 땅콩은 야구장이나 룸살롱의 단골메뉴였다. 남서대서양의 오징어 어장발견으로 일 년에 무려 60여 만 톤의 오징어가 국내에서 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우습고도 민망한 것은 그가 알젠틴 송금을 위한 자금을 구하러 어느 종합상사를 찾아 갔을 때의 일이었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되기 전, 다시 말해 세상이 보다 투명해지기 전 일부 종합상사들은 외형 불리기와 돈놀이에 치중했다. 매출액 기준으로 재계서열이 매겨지고 여전히 관치금융이 만연했던 시절이었으니 내로라하는 종합상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외형을 늘려 싼 이자의 은행돈을 끌어대는데 급급했다.
종합상사의 수산부는 생산자의 어획물을 현금으로 인수하여 1차 판매업자에게 이자조로 마진을 붙여 넘기고 매출자료만 챙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때 이자는 전적으로 생산자의 부담이었다. 수출입대행도 다 이자놀이의 방편으로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IMF 이후 기업의 구조조정 탓으로 저마다 수산부라는 간판을 걷어치웠지만 그 때는 원양선사들의 어획물을 미끼로 다들 돈놀이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더러 자체적으로 마진장사를 하는 직거래 형태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자놀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장은 D상사의 수산담당 이사를 찾아 가 알젠틴 프로젝트를 설명하며 50억 원의 선수금을 요구했다. 입어허가서가 떨어졌다는 얘기를 했음은 물론이다. 빌려준 돈의 이자는 제쳐 놓고라도 오징어배 7척의 연간 수양고가 어림잡아도 200억 원이고 당시 이자율은 년 26프로였다. 구미가 당기는 거래였다. 그렇다고 돈을 빌려주는데 물속의 고기를 담보로 할 바보천지가 어디 있으랴. 그 이사라는 양반이 말했다.
"담보는 제공할 수 있겠지요? 사장님, 그런데 입어허가서를 좀 보여줄 수 있습니까? "
"아- 그럼요. 근데 이사님 이건 절대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
그렇게 말한 뒤 사장은 품에서 입어허가서사본을 꺼내어 이사의 얼굴에 쑥 들이 밀었다가 재빨리 도로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사님, 배 이름들 봤지요? "
"저...잠깐 읽어보면 안 될까요? "
"아- 내용은 서반아어로 돼 있어 읽어도 모릅니다. 또 알아서도 안 되고요. "
"...... ? "
D상사의 수산부 팀장이 바로 그 뒷날 경섭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안 차장님, 알젠틴 단순입어가 맞기는 맞는 겁니까? "
경섭인들 입어허가서 내용을 읽어 보기나 했나. 그렇다고 함부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팀장님, 그 땜에 이번에 채낚이 어선을 새로 한 척 더 샀다 아닙니까. 그런 걸 어찌 속이겠습니까. 업계에 허가서 내용이 미리 누설되면 사업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
다만 경섭은 차동한이 선장출신들이 버글버글한 원양수산업계의 특성을 간파하고 직원들에게조차 허가서 내용을 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사장에게 신신당부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우려가 백번 일리 있는 생각이라고 해도 사장 자신은 외대 서반아어과 학생이라도 몰래 불러 품에 넣고 다니던 그 입어허가서를 한 번 읽어 보기라도 했어야 했다.
신년이 되어 조업시기가 임박해졌다. 단순입어의 세부조건이 곧 부칙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에 맞춰 선박운항계획을 짜야 했으므로 운항책임자인 경섭은 날이 갈수록 마음만 고단했다. 라스팔마스에 간 전무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 그가 알젠틴행 비행기를 탄 것은 포클랜드수역 입어가 이미 개시된 3월 초순이었다.
註)
1.용선입어: 외국의 경제수역내 입어를 위해 현지인이 외국어선을 용선하여 어업을 행사하 는 형태로서 선박의 국적을 유지한 채 현지인의 사업체 명의로 어업허가를 득하 는 방법임.
2. 단순입어: 외국어선이 자국의 국적을 유지한 채 연안국의 어업허가를 득해 입어하는 형 태임. 이 경우 선주는 연안국 정부에 대해 입어료만 지불함.
첫댓글 이 글을 왜 올리셨나요?
이거 허구의 소설인것은 아시지요? 하지만 그냥 소설이니까 하고 지나쳐 지지가 않아서요.. 배경이 아르헨티나와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며 그 소재가 제가 속해 있는 영역이기 때문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본국에서 느끼는 이민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특히 아르헨티나등 남미)을 유난히 많이 느끼면서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냥 흥미로 읽고 지나쳐 지지 않더군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것인지... 소설을 쓴 배경과 동기...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등도 궁금해 졌구요..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뿐 그이상 무게들 두고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