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세계 트레킹 동호회 원문보기 글쓴이: 자이언트
일정 |
순다리잘 |
치소빠니 |
고도 |
1,379 m |
2,200 m |
상승 |
1,064 m | |
하강 |
220 m | |
소요시간 |
4시간 50분 (4:45) | |
거리 |
9 km | |
(소요시간 - 점심시간 제외, 휴식시간 포함) |
|
힘들었던 하루
오전 8시, 호텔에서 아메리칸 스타일로 아침을 먹었다. 15명 정도의 단체 관광객들이 있었다. 이틀째 묵고 있는 이곳 티베트 게스트하우스는 단체 손님들이 많았다. 작년에 이곳에 묵은 경험이 있어 낯설지 않았다.
이곳이나 2002년도 묵었던 인터내셔널 게스트하우스와 포탈라 호텔 모두 비슷 비슷한 수준이고 티베트풍이라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세 곳 중 식당이 가장 활발한 곳은 티베트 게스트하우스. 인터내셔널과 포탈라는 로비에서 식당이 바로 훤하게 보이는 이곳에 비해 좀 어두워 선뜻 발길이 잘 가지 않았다.
'미국식 아침식사'는 양이 많았다. 커피가 3잔 정도 들어 있는 작은 포트에 주스, 콘프레이크, 베이컨을 곁들인 토스트, 계란후라이 2개. 평소 아침을 먹지 않지만 여행 중에는 꼭 챙겨 먹는다. 이른 바 생존차원이다. 더구나 오늘은 랑탕트레킹을 떠나는 날이다.
위에 부담이 갈 정도로 양이 많았으나 천천히 다 먹었다. 음식 남기는 사람을 제일 혐오하므로 내 사전에 음식을 남기는 일은 없다. 다 못먹을 것 같으면 미리 덜어놓든지 양이 적은 것으로 시킨다. 이 세상에는 하루 한 끼로 견디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습관은 아마 어릴 때 워낙 배고팠던 기억이 있어서 일테지만 나중에 출가하여 절집에서 익힌 검소한 식사법의 영향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앞 자리 길게 연결해 놓은 테이블이 이곳 저곳 이야기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하다. 단체관광객은 나라를 불문하고 시끄럽다. 그것이 단체만이 갖는 프리미엄이다. 단체여행에 그런 맛이 없다면 아무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작년에 우리도 저렇게 테이블에서 떠들지 않았던가.
9시, 삼툭이 포터와 함께 왔다. 포터는 아는 여행사 사장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17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쿰부가 고향인 이 어린 친구의 이름은 겔젠. 너무 어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워낙 어릴 때부터 짐을 나르기 때문에 잘 하리라 믿었다. 또 짐도 그리 많지 않아 15kg 정도이니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침낭을 빌렸다. 타멜의 거리는 이제야 문을 여는 중이었다. 저녁에 일찍 문을 닫고(보통 8시면 문을 닫는다) 아침에 늦게 문을 여는 이곳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외부에서 보면 참 행복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 전부터 주 5일 근무를 하는 서양의 노동자들과는 다르다. 간단하게 말해서 손님이 없기 때문이다.
9시 40분 타멜을 출발하여 10시 20분 가게 서너 개 있는 조그만 버스정류장인 순다리잘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트레킹이 시작된다. 오늘이 토요일(우리의 일요일)이어서 놀러 온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카트만두에서 여기까지 거리는 15km. 이안은 1999년 이곳까지 택시요금을 500루삐 주었으며 너무 많이 준 것 같다고 했다. 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500루삐가 정상요금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500루삐에 계약했으나 침낭 빌리느라 20여분 대기한 관계로 도착 후 550루삐를 달라는 운전사의 요구에 따랐다. 삼툭이 운전사와 실랑이 하는 것을 말렸다. 처음 계약할 때는 대기시간을 넣지 않았으니 더 달라...뭘 이 불경기에 그정도 기다린 것 가지고 더 달라느냐...보나마나 이런 내용일 것이다. 더 주는 것이 당연하다. 비록 네팔사람들은 그렇게 지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네팔트레킹의 선구자 틸먼
네팔 트레킹의 원조는 영국인 틸먼(H.W. Tilman, 1989~1977)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탐험가이자 등반가 중 한 사람인 틸먼은 아프리카, 파타고니아, 히말라야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오지를 등반 또는 탐험했는데 등반의 어려움, 스타일, 기간, 등반성격 등은 하나의 전설이 되고 있다.
그는 1934년 인도 최고봉인 난다 데비(7,816m)의 내부 지성소(inner sanctuary)를 동료인 에릭 쉽턴(Eric Shipton)과 함께 탐사했으며 1935년 에베레스트 영국원정대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1936년, 3명의 등반가로 이루어진 영국팀과 4명의 하버드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미국팀의 연합 등반대 리더로 참가해 지리학자 오델(N.E. Odell)과 난다 데비를 초등했다. 이 것은 1950년 프랑스 원정대의 모리스(Maurice Herzog)와 루이스(Louis Lachenal)가 안나푸르나(8,091m)를 오르기 전까지 가장 높은 산의 등정 기록이었다. 틸먼의 주요 경력은,
틸먼은 1949년 네팔 랑탕 밸리를 방문하고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찬탄했다. 이 말을 만일 힐러리가 했다면 '힐러리 생각'에 불과할 것이지만 전 세계의 오지를 두루 섭렵한 틸먼이 말했기 때문에 권위를 가질 수 있었고 자연 랑탕 게곡은 유명해졌다. 도대체 랑탕계곡이 어떠하길래 이 세상의 수많은 계곡을 답사한 틸먼이 감탄했을까?
짐을 정리하여 10시 35분 출발. 랑탕 헬람부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다른 트레킹도 그렇지만 랑탕-헬람부 트레킹도 코스를 다양하게 짤 수 있다. 간단하게는 랑탕 밸리만 다녀오는 8일짜리가 있고 랑탕과 헬람부와 연결하는 15일 짜리가 있다. 좀 더 전문적인 트레커라면 캠핑 준비를 하여 랑탕 계곡의 끝 컁진곰빠에서 바로 이 지역에서 제일 높은 강자라(5,320m)를 넘어 헬람부로 오기도 한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랑탕 밸리만 다녀올 수밖에 없지만 나는 시간이 충분한 관계로 랑탕-고사인쿤드-헬람부를 연결하는 풀코스를 택했다. 이 코스도 랑탕에서 시작하여 헬람부로 넘어오든지 아니면 반대로 헬람부에서 시작하여 랑탕에서 마치는 일정을 택할 수 있다.
나는 아직까지는 캠핑트레킹(organized trekking)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우선 경비가 많이 든다. 너댓 명만 모으면 현재의 개별 트레킹(independent trekking)비용(가이드와 포터 고용시 1일 25~30불)의 2배 정도인 1일 50불 정도로 가능하지만 우선 뜻이 맞는 사람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같이 가는 것은 어쩌면 트레킹 자체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또 캠핑트레킹을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한 번 이상 네팔 트레킹 경험이 필요하다.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 서너 명 모으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같다.
나는 헬람부부터 시작하는 코스를 택했다. 우선 트레킹의 시발점인 순다리잘이 카트만두에서 가깝게 있어 접근이 쉽다. 그 다음으로는 계속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갈 수 있어서 풍광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이 코스를 예티존의 이안이 답사하고 자세한 안내서를 써놓은 책이 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대체로 내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숨어 있기도 했다.
출발하면서부터 길 오른쪽으로 굵은 송수관이 길과 같이 연결되어 있다. 이 송수관으로 운반된 물이 카트만두의 식수의 40%를 담당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인구증가로 많이 부족하다고 한다. 송수관의 크기를 보니 그럴 것같다. 그 오른쪽은 바그마티 계곡이다. 바그마티라면 카트만두 파슈파티나트를 관통하는 작은 강이니 이 계곡이 그 상류인 것이다.
오늘이 공휴일(토요일)이어서인지 놀러 나온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곧 시바뿌리국립공원을 알리는 간판이 나왔다. 이곳은 1976년 시바뿌리 유역 보존지구(Shivapuri Watershed Reserve)로 지정되었다가 1984년에는 시바뿌리 유역과 야생동물 보존지구로 확대된 후 다시 2002년에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44㎢.
그러나 보존지구로 지정된 후 주민들의 삶은 더 어려워졌다. 연료로 쓸 나무를 마음대로 베어낼 수 없고 농작물을 해치는 동물들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다. 해가 빠지면 차량출입이 금지된다. 이곳에 롯지가 드문 이유도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고 나니 자명해졌다. 이곳이 상수원 보호지역이기 때문에 롯지의 설립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었다.
길은 계속 오르막 계단이다. 아직 2,000m 이하의 저지대라 땀이 많이 나 쉬는 시간에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상의를 벗고 얇은 쿨맥스 티셔츠로 갈아 입었다. 곧 오르막 중간 동굴에 모셔져 있는 시바 링감이 나왔다.
출발한지 45분 쯤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초소가 나왔다. 그곳에서 입장료(250루삐)를 냈다. 군인 한 사람이 비디오카메라가 없느냐고 묻고 삼툭이 없다고 대신 대답했다. 없기는 왜 없어. 목에 건 작은 배낭에는 카메라와 캠코더가 들어 있다. 이번에는 큰 맘 먹고 캠코더까지 가지고 왔다. 트레킹을 마친 지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진과 캠코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어려웠다. 배터리 문제도 있었다. 결국 스틸 사진 위주로 찍다 보니 캠코더는 부실해졌다.
다른 코스와 달리 랑탕 헬람부 지역은 비디오카메라를 금지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무조건 안된다고 한다. 이안은 이곳을 지날 때 초병들에게 길을 묻는 질문을 함으로써 주의를 딴곳으로 돌렸다고 그의 <Langtang Trek VCD>에서 말하고 있다. 다른 지역도 금지한다면 모를까 특별히 이곳을 찍지 못하게 할 이유가 없다. 아니면 차라리 촬영비를 책정하고 요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체크포스트에서 조금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돌계단 아래 조그만 댐으로 지나는 길이 치소빠니로 가는 길이다. 댐을 지나면서부터는 다시 오르막이 계속 되었다. 댐 근처에 작은 롯지가 하나 보였다.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출발한지 불과 1시간 반만에 점심을 먹기가 뭐해 다음에 나오는 물카르카에서 먹기로 했다. 결국 이 결정은 실책으로 판명되었다.
쫄쫄 굶다
일단 산 중턱을 오르니 풍광은 좋았다. 추수가 끝난 계단식 논이 아늑하게 보였다. 한쪽에는 뚱바의 원료가 되는 기장이 아직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쉬면서 풍광을 바라보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아침을 그렇게 빵빵하게 먹었건만 이렇게 쉽게 꺼지다니...
12시 30분에 도착한 물카르카. '각본'에 의하면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뿔싸 이곳의 '소박한' 롯지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이곳 헬람부는 시즌이 아니면 찾는 트레커들이 많지 않아 문을 닫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롯지가 문을 닫다니! 그리고 치소빠니까지 더 이상 롯지가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했다. 보통 네팔 트레킹 코스는 쏘롱라 패스나 촐라 패스 같은 고개를 넘지 않는 한 적어도 1시간 간격으로 롯지들이 나타났다. 헬람부도 순다리잘에서 치소빠니까지 5시간 가까운 코스니 당연히 롯지가 여러 개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곳은 시바뿌리 국립공원지역으로 상수원과 야생동식물 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건물은 들어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 탓인지 예티존에서 구입한 덴마크 Nelles Verlag에서 발행한 헬람부-랑탕 10만분의 1 지도를 보면 시바뿌리 안에는 마을도 두어 개밖에 없고 집도 얼마 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규제 때문에 원주민들의 생활이 여려워져 하나 둘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Nelles Verlag에 지도에도 공원 바깥 중산간 지대에는 집들이 빽빽하게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과 확연히 구별되었다.
오후 1시 넘어 2100m까지 올랐다. 숲이 무성한 사이로 제법 넓은 길이 나 있었다. 산길 오르막에서 순찰을 돌다 쉬는 듯한 군인들 열댓 명을 만났다. 그들에게 치소빠니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니 앞으로 두 시간을 더 가야한단다. 아이구 내 팔자야! 이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계속 전진해야 한다니...조금 더 오르자 넓은 잔디밭 가운데 버려진 군인막사가 나왔다. 멀쩡한 막사를 버린 것도 상수원 보호를 위해서이다. 다른 국립공원과는 달리 시바뿌리 지역 자체를 신성한 구역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막사 옆 잔디밭에서 가져간 비상식량(초코바, 비스킷 등)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땀이 식자 한기를 느껴 윈드자켓을 껴입었다. 길 옆에 파이프로 연결시켜 놓은 물을 먹어보니 맛이 좋다. 히말라야에서 먼 곳이고 나무가 많아 물맛이 한국 산골짜기 물과 비슷했다.
다시 사람들의 왕래도 많지 않은 숲 길을 걸어 2400m 지점의 고갯길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힘은 들어도 경치는 좋았다. 히말라야는 보이지 않았지만 중산간 지방의 아늑한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정상의 평탄한 숲 길을 걷다 다시 내리막길이 나왔다. 치소빠니가 2200 고지니 다시 200m 내려가야 한다.
치소빠니 도착
길은 움푹 파진 황톳길로 바뀌었다. 급경사를 한참 내려가니 넓은 산판도로가 나왔다. 길은 넓지만 차가 다닌 흔적이 없다. 치소빠니에도 짚차가 다닐 수 있다. 군인 막사가 있어 물자를 나르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길 위쪽 능선에 막사와 총을 든 군인들이 보였다. 10여분 넓은 군사도로를 오르니 고개마루가 나왔다. 오후 3시 45분, 치소빠니에 도착했다.
넓은 길은 고개마루 반대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 쪽이 카트만두와 연결된 길이다. 나가르코트도 그 길로 간다고 한다. 카트만두 밸리 3박 4일짜리 미니 트레킹 코스 중 하나는 부다닐칸타(아래 지도 참조)에서 트레킹을 시작하여 시바뿌리 언덕 1박, 치소빠니 1박, 사랑 코트 1박 한 후 카트만두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트레킹 초보자가 아니라면 굳이 여행사를 통할 필요없이 개별적으로 이 코스를 한 번 가볼만 하다. 시바뿌리, 치소빠니, 나가르코트 모두 히말라야 전망대로 유명한 곳이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히말라야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최고 높이가 2800m에 불과(?)하니 크게 힘들지 않을 것이다.
초소에서 공원 입장권 검사를 마치면 바로 코 앞에 치소빠니 롯지가 있다. 이안은 이 롯지들이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흉물스런 시멘트 건물이라고 비난했지만 내가 보기엔 비난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비록 시멘트 건물이지만 몇 개 안되어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또 여행사에서 단체 미니트레킹으로 예약할 경우 방을 잡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다. 다행히 시즌이 끝나는 중이어서 방이 텅텅 비어 있었다.
제일 큰 롯지는 사람들이 들어 있어 다음 롯지로 갔다. 삼툭에게 손님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니 없다고 한다. 롯지를 택할 때 기왕이면 손님이 없는 곳을 이용한다. 같이 벌어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화장실이 딸린 방은 200루삐, 아닌 방은 100루삐. 당연히 100루삐 짜리를 썼다. 아무도 없는 롯지에서, 샤워 한 번 하면 될 걸 비싼 방을 쓸 이유가 없다.
방에 들어가 우선 빨랫줄을 치고 땀에 흠뻑 젖은 옷부터 널었다. 이층 끝방이라 창문이 두 군데 있어 경치는 좋지만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대체로 오래된 롯지 건물은 이렇게 창문 아귀가 틀어져 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온기가 없으니 이렇게 바람으로라도 빨래를 말리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여기는 그렇게 추운 곳이 아니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따뜻한 물이 나와 샤워도 했다.
도착할 때만 해도 구름에 가려 있던 히말라야가 오후 5시가 되자 여기까지 올라 온 수고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위쪽 구름을 걷어내고 얼굴을 보여주었다. 히말라야를 보니 오늘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느낌이다. 가이드북 마다 한결같이 치소빠니는 아침의 풍광이 아름다워 반드시 하룻밤 묵기를 권하고 있다.
권하지 않아도 다음 롯지가 있는 파티반장까지는 1시간 30분이나 더 가야 하니 지친 몸으로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설사 힘이 넘치고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더라도 그렇다. 히말라야에 오는 것은 이런 멋진 풍광을 보려고 온 것 아닌가! 일정을 조금 더 단축하려고 푹 꺼진 곳에 있는 파티반장까지 갈 생각이라면 목돈을 들여 히말라야에 온 의미가 없다. 트레킹을 절대 기록단축 경기가 아니다. 시간이 없다면 처음부터 짧은 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은 트레킹을 빨리 마쳤다는 초보자를 만나면 겉으로는 '예의상'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 그래요! 그렇게 빨리 마치다니 체력이 참 놀랍군요!"
그 초보 트레커는 자기의 능력을 만천하에 알리게 되어 의기양양하다 못해 눈물까지 나오려 할테지만 상대방의 속 마음을 들여다 보았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애구...수고하셨소...고생이 많았겠구먼...쯪 쯪...근데 뭐하러 히말라야까지 왔니? 집에서 담박질이나 열심히 하여 마라톤 대회나 나갈 것이지...'
옥상에 올라가 한참 바라보았다. 바람이 많이 분다. 치소빠니의 뜻이 '찬물'이니 찬 바람이 많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산 능선 꼭대기에 위치한 치소빠니는 바람의 길목이었다.
배고픈 탓에 저녁을 맛있게 먹고 일찍 잠을 잤다. 밤중에 '자연의 부름'을 받고 일어났다. 창문에는 김이 서려 있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희미한 달빛 아래 산 전체가 운무에 싸여 있다. 아랫집 롯지 마당에서는 트레킹 마친 여행사 캠핑트레킹 팀들이 모여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놀고 있다.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덧붙이는 글>
생각해보면 오늘 코스가 특별히 힘든 코스는 아니었다. 어느 트레킹이든 처음 이삼일은 힘들기 마련이다. 푼힐도 첫 날 울레리로 가는 코스는 힘들다. ABC를 페디에서 시작한다면 담푸스까지 땀 깨나 흘려야 한다. 쿰부트레킹 둘째날 남체 오르는 길도 만만찮은 오르막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딩도 둘째날 바훈단다 오를 때 '아이고오~'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평소에는 등산을 잘 하지 않다가 갑자기 오르막을 많이 오르자 느슨했던 다리 근육이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첫날 1000m 이상 올랐음에도 다리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1년 이상 체력단련을 한 보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이 들었던 것은 중간에 점심은커녕 찌아 한 잔 못 마셨기 때문이다.
가이드북만 조금 주의 깊게 보았다면 적어도 물카르카에서 치소빠니까지 4시간 동안 롯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집중적으로 본 책은 Ian과 Jamie의 가이드북이었다). 지도에는 2400m 지점 고개 정상에 롯지가 하나 있다고 표시되어 있지만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ABC 지도에도 시누와-뱀부 사이의 쿠디가르에 롯지가 있다고 되어 있으나 현장에 가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다. 지도가 해마다 나오지만 거의 20년 전에 만들어 둔 것을 계속 찍고 있기 때문이다.
힘든 이유는 단 한가지. 쉬울 줄 알고 가볍게 출발했다가 '어! 이게 아닌데...'하고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내 이럴 줄 알고 있었지'하고 마음을 단단하게 먹고 트레킹을 시작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의 교훈 - 다음날 일정을 잠자기 전 가이드북에서 잘 확인하고 점심 먹을 롯지가 없거나 어중간한 코스라면 비상식량을 배낭 속에 충분히 넣어가자! |
순다라질-치소빠니 개념도 (Jamie McGui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