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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대리 닷고개 ]
석남동 1통과 경계를 이루는 석지방죽을 지나서 양대선(시도 1호 선) 도로의 고개마루를 “닷고개”라고 부르는데 “댓고개”란 죽성리의 대나무 밭에서 연유되어 대나무 고개가 약해진 지명이 라고 한다.
옛날에는 현 석지방죽 근방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을 것이므로 배의 닻을 많이 내리었다는 뜻에서 닻(碇)고개라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 장동 낫머리 ]
낫머리는 장동 2통 2반을 말하는데 특별한 의미는 없고 마을지형이 낫과 같이 기역자로 생긴 지형이다.
“머리”란 산천의 끝 또는 동리 또는 마을의 끝이라는 뜻으로 말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 갈산동 지석댕이 ]
성연, 지곡, 대산면에서 서산 시내로 들어오는 도보길의 유일한 통로중에 성연면 일람리와 갈산리와의 경계가 되는 고개에 있다.
1926년 발행된 「서산군지」에 의하면 “성황단(城隍壇)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서산면 동문동 향교 뒷산 밑 성연면과 인지면 면계에 부지 157평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城隍壇祭城隍神之所瑞山在瑞山面東門里鄕校後麓(今釋堂聖淵面線仁旨面界敷地一百五拾七坪)」
현 은미목장이 있는 뒷편 양지바른 곳인데 성연, 지곡, 대산면민들은 서산장을 오갈때 이곳에 쉬어 다니던 곳이고 이곳을 “지석댕이”라고 했다
[ 석림동 배못이 ]
배못이 마을은 구 영창공업사(현, 오성 주유소)가 있던 주변과 눈물고개에서 서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못이란 배가 있는 못이란 뜻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곳의 지형이 배처럼 생겨서 배못이라 했다는 이야기 도 있고, 일설에는 망운대와 서산여고 사이로 옛날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올라와 배를 대는 곳이었기로 그때부터 배못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상당한 근거가 되는 말이지만 지금은 바다가 모두 막혀서 현재로서는 상상키 어려운 것이다.
바다 매립전에도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이 옛날보다는 많이 떨어지는 융기현상을 많이 볼 수 있었으니 이곳에 배가 정박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석림동 쌍다리 ]
청지천교를 옛날 사람들은 쌍다리라고 불렀는데 현재에도 쌍다리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
쌍다리란 시멘트다리로 놓기 이전 목조다리였을 때 서산지방에서 내려가는 하천과 수석동 지역에서 내려오는 두 하천이 이곳에서 합쳐졌으며 중간에 둑을 중심으로 하천의 위아래로 두개의 다리가 있었으므로 생겨난 다리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후에는 다리가 하나였음에도 큰 다리라는 이름의 뜻으로 쓰여 왔다.
[ 석림동 대숲말 정주골 ]
현 서산중학교 동쪽 덕지천선 도로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대숲말로 옛날에 이모씨 집에 대나무밭이 울창하여 이 집을 대밭집이라 부르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앞 정주골 이름은 골이 깊어 배가 수시로 들어와 닻을 내리었으므로 배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여 정주(碇舟)골이라 했다.
[ 읍내동 서원말 ]
성암서원(聖巖書院)이 있는 주변 마을이며 현 읍내42통, 41통 마을로서 서원이 있었다는데서 유래된 마을명이다. 이 서원에는 우리 지방의 명현이 고려 때 문신인 사암(思菴) 유숙(柳淑)선생과, 조선조 때 문신인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 선생을 배향된 서원이다. 이 서원은 숙종 45(1719년)에 세워졌고 경종원년 1721년 성암서원이라 사액되었다.
이 서원은 고종 8년(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일시 훼철되었다가 고종 19년(1882)에 서원복설령으로 1924년에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곳이다. 이 곳에서는 유림들이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일에 이 두분 명현의 위엄을 숭모하는 제향을 올린다.
[ 읍내동 봉화산 ]
봉화를 올리던 산으로 부춘산의 정상(해발 197.8m)에 있다. 부석면에 있는 도비산과 고북면에 있는 고구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국가의 전란이 있을 때 봉화를 올리어 신속히 알리던 통신수단 이었던 곳으로 알려져 잇다.
날이 가물어 한해(旱害)가 심할 때 이곳 수령들이 기우제(祈雨 祭)를 지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봉수대(烽燧坮)는 옥녀봉(玉女峰) 뒤쪽 옛 북주산성내에 있다.
[ 읍내동 옥녀봉 ]
서산시의 뒷산인 옥녀봉은 그 자태가 아름다워 빼어난 몸매의 여자와도 같다.
해발 187.6m밖에 안되는 얕으막한 산으로 산이 험하지도 않고 군데군데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따라서 옛 부터 옥녀봉이라 했던가?
이 산이 특히 유명한 것은 분묘가 없다는 것이다. 전국 어디를 가 보아도 도심속의 산에도 묘가 없는 산이 없건만 이 산에는 묘(墓)가 1기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넓은 면적에 1기의 묘가 없다는 것은 이곳에 사는 모든 시민들의 강한 의지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뒤로한 주산(主山)이 옥녀봉(玉女峰)이어서 이앞에서 살면 남성보다는 여성중에서 인물이 많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서산지방에서는 미인도 많고 또 서산에 처가를 가진 사람 중에는 출세한 인물이 의외로 많은데 우연한 일치가 아닌 것 같으며 이 때문에 외지 남성들이 기대를 갖고 서산 여성에게 장가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 석림동 망운대 ]
망운대(望雲臺)는 서산중학교에서 동남쪽으로 4~5m지점 덕지천 선으로 가는 도중 동남쪽 해발 3~40m의 융기한 작은 구릉의 동산이 있는데 이 동산의 정상에 있다.
고려 고종때 정신보(鄭臣保)가 중국 절강(折江) 사람으로 송나라에서 원외랑(院外郞)이란 벼슬을 하다가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신하되기를 피하여 땟목을 타고 단신으로 바다를 건너 현 부석면 간월도에 상륙하여 고창현(古昌顯) 현덕산(現德山) 오영노(吳永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서산의 위인인 정인경(鄭仁卿)이며 정신보(鄭臣保)는 서산정씨(瑞山鄭氏)의 시조가 되었다.
아들을 낳은 정신보는 아들을 데리고 서산 대사동(大寺洞) 마을에 와서 살았으며 이역만리에 와서 외롭게 사는 신세를 자탄, 고국 산천이 그리워서 아침 저녁으로 앞산에 올라가 말없이 바다 멀리 고국 하늘을 우러러 흘러가는 구름을 보노라면 더욱 고국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간절하여져서 산 위에 망운대(望雲臺)를 세우고 평생을 조석으로 이 대에 올라 고국을 바라보았다. 그 후 그의 외손인 진사(進士) 한영희(韓永禧)가 다시 이곳에서 살았는데 그도 경상도 창녕(昌寧) 사람으로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여 이 망운대(望雲臺)를 다시 수축하고 이 곳에서 조석으로 망향(望鄕)하였었다.
한영희의 묘소는 서산중학교에서 남쪽으로 400m 지점에 현재도 있으며 한영희 둘째아들인 한경춘(韓慶春)의 영향을 받은 한경춘의 자(子)인 한여현(韓汝賢)이 호산록(湖山錄)을 지었다.
※ 세상사람들은 이 망운대(望雲臺)를 만대봉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이름이다. 바로 잡았으면 한다.
[ 석림동 ]
석림동은 망운대 앞마을 대숲밭 대못이마을 무세기 등 4개의 자연부락이 합쳐져서 형성된 곳이며, 무세기에서 석(石)자와 대숲마을에서 숲의 임(林)자를 합쳐서 석림동(石林洞)이 되었다
[ 읍내동 ]
서산 지방의 원래 치소(治所)는 군명(郡名)이 부성현(富成縣)으 로 지곡면 산성리(地谷面 山城里)에 있었으나 1182년(고려 명종 12년) 현위(縣尉)가 현령(縣令)을 핍박(逼迫)하는 불상사가 일어 났으므로 충청북도 현 옥천군(沃川郡)인 관성(管城)과 함께 관호 (管號)를 없애고 폐현되는 불운을 겪고 서산지방은 현 홍성(洪城)인 운주(運州)에 예속되는 결과가 되었었다.
그 후 이 곳 대사동(大寺洞) (現 瑞山市 邑內, 東門, 潛紅, 溫 石, 石林, 石南洞 地方)출신인 정인경(鄭仁卿)이 몽고군이 직산 (稷山)과 신창(新昌)에 침입하자 야간에 기습하여 크게 전공을 세우므로써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충열왕(忠烈王)이 원나라에 머물게 될 때 호종(扈從)한 점과, 1274년 충열왕(忠烈王)이 왕위(王位)에 오르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 인정되어 폐현(廢縣)었던 부성현(富成縣)이 1275년 (忠烈王 元年)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되면서 치소(治所)도 정인경(鄭仁卿)이 성장지인 서산시 읍내동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일설에 의하면 치소(治所)의 위치가 처음에는 현 읍내동의 서산시청이 있는 곳이 아니라 석림동 근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을 확인할 길은 없다.
따라서 읍내동은 이때부터 서산지방의 ''''정치, 문화, 상업, 교통, 예술'''' 등 모든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읍내동은 북쪽으로는 해발 197.8m의 봉화산(烽火山)과 187.6m의 부춘산(富春山), 옥녀봉(玉女蜂)을 뒤로하고 아늑하게 남쪽으로 펼쳐진 곳이다.
옥녀봉(玉女峰)에는 북주산성(北主山城)이 있고 현 시청(市廳)이 있는 곳(1호광장이 있는 곳)을 돔밖이라 하였고 서문(西門)이 있던 곳은 문화회관 거리에 있는 서산수협지소 앞 근처이다.
따라서 이 곳을 섬밖 또는 서문밖, 서문리라 하였다.
[ 활성동 ]
현 한국전기통신공사 서산전화국 사옥과 서산도서관(교육청 소 속) 터가 있는 곳, 그리고 서산초등학교 운동장이 있는 터에 옛 날에 높이 3m, 둘레길이 600m가 되는 토성이 있었는데 이것을 ''활성(活城)''이라 했고, 이 지역 전체를 활성이라 일컬어 왔다.
이 토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은 없고 다만 고려 때에 축성한 것으로 전시(戰時) 노약자의 피난처와 양곡을 저장 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반면 최근세에 김재덕이라는 사람이 재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축성했다고도 하는데 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인 호산록(湖山錄)에는 활성에 대한 기록은 없으니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으나 일시 이곳에 치소(治所)를 설치하기 위하여 축성(築城)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어쨌건이 활성이란 이음은 근대에는 이 지역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1989년 서산읍이 시(市)로 승격되면서 이 지역의 행정동명을 ''활성동(活城洞)''이라 정하게 되었다.
[ 장동 ]
차령산맥에서 분기하여 내포평야(內浦平野) 한가운데 덕숭산(德崇山)과 가야산맥(伽倻山脈)이 길게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그 분맥은 서북으로 높고 낮은 산맥이 발달하여 음암면 도당리에 간대산(艮垈山)과 자모산(慈母山), 성왕산(聖王山), 서산 뒷산의 주봉(主峰)인 부춘산(富春山), 인지면 성리의 비룡산(飛龍山) 차리에 있는 서각산(犀角山)과 도비산(島飛山) 등 흡사 병풍(屛風)처럼 혹은 살아있는 용이 꿈틀꿈틀 달려가듯 산맥을 이루었는데 이 산맥안의 드넓은 평야는 마치 치마폭을 펼쳐 놓은 듯 발달되어 있다.
이 넓은 평야속에 불쑥 돌출(突出) 융기(隆起)한 아담한 봉오리가 있으니 이것이 곧 소탐산(蘇耽山)이다.
이 산에서 서남으로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서 현 서산시 오산동의 행정구역이 되는데 그 중에서 장동(獐洞)은 모든 땅의 근원의 마무리가 되는 것처럼 구릉이 멈추어지는 지대가 된다. 따라서 풍수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이 지역은 모든 지맥(地脈)이 결실을 가져올 수 있는 땅이 될 수 있으므로 길지(吉地)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지역에서는 많은 큰 인물이 배출되거나 거쳐갔다.
전 승지 김병연(金炳秊), 언론인이며 문인이었던 민태원(閔泰湲), 강원지사를 지낸 이정규(李晶珪) 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인물들이 이 곳에서 속속 배출되었음은 우연한 일이라고 보아 넘길수만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 기대되는 지역이다
[ 예천동 ]
조선조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현 예천동은 군내면 로하리 (路下里) 일부와 율곶면(栗串面), 여전리(余田里) 일부가 합해 져 1914년에 예천리로 개편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천리"란 이름은 예천 1통과 2통의 경계가 되는 곳에 "나무 장골"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나무장골은 원래 큰 하천이었는데 아주 먼 옛날 단층(斷層) 또는 습곡(褶曲) 등 지각변동(地殼變動)에 의한 변화로 하천은 없어지고 지금과 같은 개활지(開豁地)로 된 논밭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지각변동 전의 하천 이름이 예천(禮川)이었기로 여기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지형상으로 볼 때에는 뒤로는 부춘산으로부터 뻗어내린 공림산(公林山)과 명림산(明林山)이 가깝게 있어 집수구역(集水區域)이 없으므로 하천다운 하천이 없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나무장골"에서 깊이 땅을 파보면 큰 나무가 묻혀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논이나 밭의 지질이 단층 현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연지질이 부분부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나무장골"이란 옛날에 이 하천 주위에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졌던 연유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나무 장터가 있던데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 수석동 ]
수석리는 조선조 시대에는 서산군 동암면(銅巖面) 주동리(注洞 里)와 소탐리(蘇耽里)로 되어 있던 것을 1895년 구한말 행정구 역 개편시에 수동(壽洞) 강석리(江石里) 외주동(外注洞) 내주동 (內注洞) 익동(益洞) 평리(坪里) 도곡리(道谷里)로 개편하였다가 1914년 일제하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음암면으로 되면서 수동 (壽洞) 마을의 수(壽)자와 강석(强石) 마을의 석(石)자를 따서 수석리(壽石里)로 하였었다. 1973년 7월 1일에 서산읍(瑞山邑)으로 편입되고, 다시 1989년 1월 1일 서산읍이 서산시(瑞山市)로 승격됨에 따라 수석동(壽石洞)로 되었다.
이 마을의 특징은 소탐산(蘇耽山)에 있는 것 같다. 소탐산은 음암면 신장리와 경계에 있는 산(山)으로 해발 122m밖에 되지 않지만 동으로 가야산(伽倻山), 북으로 간대산(艮臺山)과 성왕산 그리고 부춘산 옥녀봉(玉女峰)을 병풍처럼 두른 앞에 넓게 펼쳐진 평야위에 알듯 모를듯 노년기의 잔구로 내려온 구릉이 마침 내 둥근 봉우리를 이룬 산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소탐산이다.
산의 생긴 모양이 너무 아담하고 예뻐서 옛부터 이름이 있어왔고 높은 산이 없는 이 곳 사람들에게는 비가 오지 않아 가뭄 이 심할 때 기우제도 지내고 우러러 위하는 산이 되었다.
이 산에는 명당이 있다는 전설도 있으며, 조선조 제2대 정종대왕의 현손이요, 정종대왕의 10남인 덕천군(德泉君)의 증손으로 왕가종친인 변성군(邊城君)의 묘소가 있는 산이기도 하다.
소탐산이란 한방에서 쓰는 소엽(蘇葉)이 이 산에 자생하였거나 주변 마을에 많이 재배한데서 산 이름도 연유된 것이 아닌지 모른다.
소엽이란 꿀풀과에 속하는 일년초로서 중국이 원산으로 원래는 재배식물이나 야생으로도 씨가 떨어지면 잘 자란다.
들깨잎과 비슷하나 잎이 자주빛이고 향기가 있으며 줄기는 네모지고 30cm내지 100cm까지도 자라며 여름에 담자색 꽃이 피고 한방에서는 잎은 소엽, 씨는 소재라 하여 약재로 쓰고 있다.
지형은 저산성 구릉지대이며, 마을의 전체 면적은 약 9km2 로서 서산시 전체면적의 약 20%에 가까운 면적을 점하고 있는 넓은 지역으로서 현재는 342가구에 1550명이 거주하는 곳이지만 지금으로부터 230여년전에는 가구수가 42호에 인구는 114명밖에 거주치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산은 낮지만 옛날에는 울창한 산림지대였고 낮은 골짜기만 논으로 경작하며 사람들이 산 것이 아니었을까?
옥녀봉(玉女峰) 망루(望樓)에서 건너다보면 드넓게 펼쳐진 수석동의 짓푸른 평야지대가 가히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조망(眺望)이 좋은데 현지에 가 보아도 어느 곳이나 지대가 얕고 굵은 마사토로 된 사질 토양이라서 무슨 곡물이든지 잘자라는 곳으로 최근에 와서는 서산시 지역에서는 비교적 우뚝한 인물들인 공무원으로는 도지사, 차 · 부장검사, 서장 등이, 군에서는 장군 등이 배출되고 있는 현상은 눈여겨 보아둘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계속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될 수 있는 여건이 충만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갈산동 ]
갈산동은 조선시대에는 노지면(盧旨面) 갈산리로 되었다가 1914년 일제시대 행정구역 개편때에 인지면 갈산리(葛山洞)로 되었고, 1973년 7월 1일 서산읍으로 편입되어 1989년 1월 1일 서산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갈산동으로 되었다.
이 마을은 동남으로는 해발 187.6m나 되는 부춘산(富春山)과 서(西)로는 해발 260m가 넘는 죽사(竹寺)가 있는 비룡산이 병풍 처럼 앞뒤로 막혀 넓은 들이 없는 협곡(峽谷)마을이다.
연접(連接)한 서산 시내와 성연면과는 큰 고개가 없어 자연스 럽게 넘나드는 곳이지만 옛날부터 이 마을을 갈티라 불려 왔는데 칡덩굴이나 고개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고개 주변의 칡있는 상태가 특별난 것도 아닌데 갈티 또는 갈산동(葛山洞)이라 불리우는 것을 보면 이상한 일이다.
서산시의 중심지인 읍내동과 동문동과는 지척에 있으면서도 산 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옛날부터 행정구역이 달리 소속되므로 인하여 코앞에 있는 서산읍사무소나 서산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지나치고 멀리 인지면 소재지까지 왕래해야 했던 불편함 때문에 오지(奧地) 이상으로 문화의 혜택이 늦어졌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1940년경에 수축한 풍전저수지가 남쪽으로 가로막힘으로써 인지면 소재지와도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여 비교적 교육의 기회 등 지역발전에 지장을 받아왔던 곳이다.
그러나 1973년 7월 1일부터 현 서산시의 전신인 서산읍으로 편입되면서 새로운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이 되었다.
[ 동문동 ]
동문리(東門里) 또는 동문동(東門洞)이라는 이름은 조선조(朝鮮朝)때에는 없던 이름이다.
1895년 구한말 행정구역(行政區域)을 개편할 때에 생긴 이름이다.
조선 영조 35년 1759년에 발간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현 동문동 의 위치는 정확히 구분할 수 없으나 대체로 동문동 중 41통 근방과 동문동 31통 중 향교가 있는 근방을 제외한 동문동 1통, 2통, 31통 전부를 지칭하였던 것 같다. 동문 31통 중 향교골과 온석동을 교동(校洞)으로, 동문 41통 가든회관 앞은 율지리(栗枝里) 밤갓마을이라 하였었다.
그러나 옛날 동리의 획정인 행정구역의 획정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조선조때의 월경지(越境地)라고 해서 남의 행정구역안에 섬처럼 행정 관할 구역이 있었던 것을 볼 때 마을의 단위도 오늘날에 추측할 수 없는 들쑥날쑥하게 가구의 분포에 따라 또는 길(路)의 편리에 따라 구획되었었으니 탑동(塔洞)이란 마을 구역은 보다 광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동문동이란 1895년 이후부터 생긴 이름이고 뜻은 서산의 내성(內城)의 동문밖(東門外)에 위치해 있다는 뜻에서 연유된 것이다.
[ 인지면 애정리 ]
애정리(艾井里)란 이름은 원래 무학대사(無學大師)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조선조때까지는 애당리(艾堂里)였던 것이 1895년의 구한말 행정구역 개편때에 애당리(艾堂里) 언정리(彦井里)로 나뉘었다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때에 다시 한마을로 합쳐지면서 애당리(艾堂里)에서 애(艾)자를 따고 언정리(彦井里)에서 정(井)자를 따서 애정리(艾井里)라 한 것이다.
애당리(艾堂里)의 속칭은 쑥댕이라 부르는데 애(艾)자는 쑥풀애 자로 애당(艾堂)이란 한문 표기로 바꾼 것 뿐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애정리1구 구역이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이곳에서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조선조 초기쯤에는 이곳에 그를 위하는 사당을 세웠던 모양이나 현재는 흔적조차 없고 1989년 12월에 서산군수 박융화가 세운 무학대사 기념비(無學大師 記念碑)가 있는데 그 비에 기록된 비문(碑文)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학의 아버지는 간월도리에서 살았었는데 가난하여 갈대로 삿갓1)을 만들어 서산장에다 내다 팔아서 연명하고 살았었다. 그런데 우연히 부상 당한 상처의 악화로 관가에서 빌려다 쓴 500량을 기한내에 갚지 못하는 일이 생겼었다.
관아에서는 사령(使令)2)을 시켜 무학의 아버지를 데려 오도록 하였으나, 그가 마침 집에 없자 대신 부인인 무학의 어머니 채씨 (蔡氏)를 데려 오게 되었다.
무학(無學)의 어머니가 사령들에 끌리어 이 지방을 지나던중 갑자기 산기가 있어 길가에서 아기를 낳으니 이날이 1327년 9월 20 일로 이가 곧 무학(無學)이다.
사령들은 지엄한 수령의 지시의 이행을 위하여 아이를 부근에 쑥을 뽑아 덮어 놓게 하고 산모를 이끌고 관아에 도착하여 그 상황을 수령에게 알리니 수령은 황급히 채씨 부인을 돌려 보내어 아이를 살피도록 하였다.
채씨 부인이 되돌아와보니 아기는 웬 학(鶴)이 날아와서 고이 품고 있다가 무학의 어머니가 가까이가니 날아가 저편 남쪽 마을 모월리와 산동리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을 한바퀴 비행해서 돌은 후 바위에 앉았다가 날아 가더라는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곳을 쑥댕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무학이란 이름도 당초에는 학이 춤추며 날아 갔다하여 무학(舞鶴)3)이라 이름 지었었는데 후에 무학(無學)4)으로 고쳤다”는 내용이다.
이 비문(碑文)은 이양(李良)이란 분이 찬한 비문을 근거로 문학 박사 이종익(李鍾益)이 지었다고 되어있는데 모월리(毛越里)를 모월리(暮月里)로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하여 기록한 것이겠지만 늦은 해, 늦은 저녁이라는 말은 있어도 지는 달로 쓰는 것이 상식인데 시(詩)적 감각에서 지어낸 지명일까, 앞뒤가 안맞는 이름인 것 같다.
이 마을에서 사는 유한동(柳漢東)이 구연(口演)한 전설은 다음 과 같다.
“옛날 무학의 오메는 간월도에서 살면서 그곳에서 나는 갯갓5) 을 헤다가 스산장이다 팔어서 먹구살었는디 워느날은 그이(蟹) 를 잡어가지구서래미 스산장으루 팔러 갔었드리야.
그런디 이 쑥댕이를 지날라구 허는디 금방 배가 아프면서 아이를 낳게 됐드리 야. 그런디 워떻게 허겄어. 그이를 장에 갔다 팔아야 살겠으닝께 낳은 아이는 헐 수 없이 길가에다 놓구서는 쑥을 뽑아서 덮어 놓구서는 그 길로 그이(蟹)를 팔러 스산장으로 갔었드랴.
그때는 그말이어 여러가지로 어려웠으닝께 포대기가 있었겠어. 땅 바닥에 깔아놓을 비닐이나 종이가 있었겄어. 그냥 내버리고 간게나 마찬가지지.
무학이 오메가 서산장을 댕겨오너 보니께 죽은줄 로만 알았던 애기는 웬 하얀학이 품어 안고 있었다가 사람이 가니께 학은 날아서 건너편 모월리편으로 날아가다가 한바퀴 빙 돌 더니 저멀리 날아 가더리아야. 그 후루다가 이곳은 쑥댕이라 허구 모월리와 산동리 경계가 되는 곳은 학돌재라 했다는 기여.
무학이라는 이름도 학이 춤추며 날아갔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기여. 이상이 다여.” 옛 언정리(彦井里)였던 곳은 현 애정리2구 마을이다.
언정리(彦井里)란 애정리 2구 들가운데 물이 잘 나는 샘이 있었는데 이 샘 하나로 4∼5,000평이 넘는 넓은 면적의 논 에수리를 안전하게 관개 할 만큼 많은 샘물이 용출 하였기에 큰 샘(彦井)이란 의미의 이름 붙여졌고 이 샘(井) 이름이 마을 이름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샘도 최근 경지정리로 모두 흔적조차 없어졌다. 애정리에는 관청터(官衙址) 새말(新村) 왯골(外谷) 두우사(杜宇寺) 읍바위(泣岩) 정문골(旌閭谷) 장자터(長子址) 사장터(射場址) 중간말(中間村) 서원말(書院村) 등기산(嶝起山) 매봉재( 峯峙) 등의 자연 마을과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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