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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로댕(로댕의 아버지)의 흉상 (1864년,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이 흉상은 로댕의 첫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 로마풍의 생김새가 너무나 뚜렷하기 때문에 제작 연도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러나 <코가 찌그러진 남자>도 동일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로댕의 아버지의 흉상도 초기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로댕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작품에서 머리를 빡빡 깎아 버린 자기 자신의 모습, 특히 구렛나루를 깎아 버린 모습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코가 찌부러진(깨진) 사나이(1864년, 대리석,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생 마르세구에서 "비비"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이 호인다운 노인은 자기의 마스크를 만들도록 모델이 되어 주었다. 추위 때문에 찰흙에 금이 가 머리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자 로댕은 이 작품을 마스크로 제작, 살롱전에 출품했으나, 입선되지 않았다.
이 얼굴이 만들어진 것은 로댕의 작품 활동 초기로 생계를 이어가기가 매우 어려운 때였다. 그는 버젓한 모델을 구할 수 있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웃집에 사는 비비라는 가난한 노인의 얼굴에서 착상을 얻었다. 그러나 난방 시설이 없는 아틀리에는 너무 추워서 비비의 머리를 빚은 점토가 얼어 갈라졌으며 두개골은 깨지고 간신히 얼굴만 지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가 깨진 이런 얼굴의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는 이런한 얼굴을 탄생시킨 후 계속해서 시리즈로 이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나중에는 대리석으로 조각한 <코가 깨진 남자>는 드디어 살롱전에 입선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1880년 <지옥의 문>의 제작 때 계속 사용되어 <생각하는 사람>의 바로 옆에 배치되게 하였다.
젊은 여인의 초상 (1865년, 테라코타,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21세 때 처음으로 제작된 젊은 모습의 Rose Beuret의 초상으로, 그녀는 53년간의 충실한 내조 끝에 1917년 2월, 죽기 며칠 전에 정식으로 로댕과 결혼한다.
설교하는 성 요하네 (1870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몸은 <걷는 사람>으로 하고, 얼굴은 그의 친구 Danielli를 모델로, 몸가짐은 이탈리아 사람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원래 어깨에 십자가를 메도록 구상하였으나 전체적인 동작이 깨지게 되어 로댕은 그것을 없앴다.
설교하는 성 요하네 2 (1870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청동시대>와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성 요하네(세례 요한)>도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조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 중에 하나다.
여인의 흉상 (1875년, 테라코타,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로댕이 제작한 테라코타 작품 중의 하나로 그의 친구인 심슨부인을 모델로 제작한 흉상 작품이다. 나중에 이 작품은 심슨부인을 위해 그녀에게 기증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로댕은 모자 위의 장식에 특히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로댕은 장미꽃이나 포도잎사귀 몇 개를 보태거나, 리본 등으로 매듭을 지어 머리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표현하곤 하였다.
Ixelles의 전원시 (1876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소학원>에서 18세기의 큐피트상을 연구한 후 로댕은 자신의 독자적인 큐피트상을 만들게 되었다. 로댕은 1871년에서 1876년까지 벨기에에 있는 동안 그림을 그리고 조각상 제작은 프랑스로 돌아간 후에 기념물로 장식할 때 이를 사용했다.
청동 시대(靑銅 時代)( (1876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로댕이 만든 최초의 입상(立像)으로, 그의 가장 유명한 조각품 중의 하나이다. 1870년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이 조각이 너무나 완벽하게 인체를 표현하였다고 하여 무명의 작가인 로댕이 살아 있는 인체를 그대로 형을 떠낸 작품이라 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던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네이(Auguste Neyt)란 젊은 군인을 모델로 <패배자>란 명칭으로 제작되어 브뤼셀 살롱전에 출품하였으나, '실물에 의한 주조'로 비난을 받자 로댕은 <청동시대>로 이름을 바꿔 파리 살롱전에 출품하였다. 원래 이 작품은 헤리클레스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영웅이 아니라 보불전쟁(프로이센(독일) 비스마르크의 엠스전보사건에 대응하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프랑스의 패전으로 파리에 공화정이 선언되고 국방정부가 성립되었다.)에서의 패배로 패배의식이 가득한 프랑스 민중들에게 용기와 힘을 다시 불어 넣고자 제작한 비애로 가득찬 근대인, 즉 이름없는 아폴로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Bellona (1878년, 테라코타,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로댕은 이 작품을 공화국을 상징케하는 흉상으로서 파리의 13구청에 기증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사자의 갈기로 장식된 투구와 깊게 패인 강렬한 눈 등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평온한 공화국을 상징하기에는 너무 고통받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제목을 전쟁의 여신인 <벨론>으로 지었다. 이 작품은 Rose Beuret를 모델로 하여 만든 것으로, 여기서 그녀의 모습은 매우 긴장되고 상기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나이와 고생의 자국이 잘 나타나 있다. 이 Rose Beuret의 초상에 나타나 있는 어떤 서러움은 로댕이 1860년에 그린 그의 어머니 마리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다.
무기를 들어라 (1878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우의적(寓意的)인 이 작품은 1870년의 보불전쟁(프러시아(독일제국)와 프랑스간의 전쟁)에서 파리시를 방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국방 기념비로 제작된 것으로 살롱전에 출품되었으나 제대로 심사평을 받지 못하고 홀대받은 작품이다. 그러나 1916년에 이것을 확대한 작품이
무기를 들어라 2 (1878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아담 (1880년, 브론즈, 뫼동 로댕박물관 소장)
로댕이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 아담의 상을 조각하였지만 마음에 안들어 깨뜨려 버렸다. 처음에는「원시인 」, 「창조」라는 제목을 붙여 문 위에 <세 명의 망령>에 배치할 생각으로 제작하였다. 이 상은 흔히 "노예'의 모습과 같을 정도로 미켈란젤로의 스타일에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지옥의 문> 문짝에 조각되어 있으며, '이브'와 함께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1875년 로댕은 이탈리아 여행 중 그리스의 조각 작품들이 아름다움과 죄에 대한 기독교적 의식을 결합시킨 미켈란젤로의 작품 <아담과 이브>를 성 시스티나 성당에서 보았다. 로댕은 그의 작품 <아담과 이브>를 제작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의 <아담과 이브>의 특징과 해부학적 형태를 정확히 기억해 냈다. 즉 앞으로 뻗친 집게 손가락은 미켈란젤로의 벽화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을 나타내며, 구부린 다리와 뒤틀린 왼쪽 팔, 어깨에 떨어뜨린 머리 등의 모습은 프랑스 바로크 시대 조각가 피에르 퓌세가 제작, 마르세이유 미술관에 소장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을 닮고 있다.
세 망령 (1880년, 브론즈, 파리 로댕 박물관 소장)
<지옥의 문> 맨 위에 있는 세사람은 단테의 시에서 유추해 보자면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틈 속에서 도망치는 망령들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1880년 무렵 로댕이 제작한 다른 많은 작품들처럼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강건하고 근육과 약간 뒤틀린 형태는 작품 <아담(Adam)>과 함께 줄리어스 2세 교황의 무덤을 위해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노예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
생각하는 사람 (1880년, 브론즈,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처음 <지옥의 문>을 구상하면서 작품에 들어 갈 부분 작품들을 한 작품, 한 작품 씩 제작해 나갔다. 이 작품도 그 작품들 중 일부이다. <지옥의 문>의 중앙에 있는 인물로 지옥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기 전에 자신의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긴장감있게 표현한 작품.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슷한 서글프고 체념에 찬 인간의 고독과 집중적인 정열이 잘 나타나 있다.
6미터가 넘는 거대한 문의 위쪽 팀파늄의 중앙에 홀로 외로이 앉아있는 이 누드의 남성은 자신의 발 아래로 펼쳐지는 지옥의 풍경, 특히 시인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와 <우골리노와 아들들> 등 저주받은 인간 군상들을 힘없이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1880년 로댕은 장식미술관의 문을 장식할 조각을 주문 받자마자 점토로 몇 개의 모형(에스키스)을 제작하였는데 세 번째 모형부터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저승의 음산한 심문자, 즉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심문하는 미노스(Minos)의 모습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턱을 괴고 깊은 상념에 잠긴 사람의 형상은 특히 르네상스 미술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도상해석학적 관점에 따르자면 이러한 도상은 모두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내려온 체질론 중 우울질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으로부터 분리되어 여러 개로 제작되었으며, 1904년에 대형의 석고상으로 확대된 작품은 1906년에는 브론즈로 주조해 파리의 판테옹 앞에 설치되었다가 로댕이 죽은 후 뮈동의 로댕미술관(로댕의 묘소)으로 이전되었다.
생각하는 사람 (1880년, 석고조, 파리 로댕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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