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스다쓰 大山倍達 1923 ~1994)
최영의는 1923년 전라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어릴적에는 일본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겁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9세때 그의 아버지가 고용한 중국인 출신의 농군으로 부터 중국무술 남권을 배웠다. 1938년 16세때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에 있는 군관학교에 들어가 가라데를 배우기 시작한다. (쇼오토오칸 松濤館 가라테)
그는 동경으로 나와 拓殖大學학생이 되었는데 이때 근때 가라테의 아버지라 할수있는 후나고시 기찐의 사설고장에 나가 2년간 그 마스타에게 직접 배웠다. 18세때 군대에 들어가 부토쿠카이(武德會)에 들어가게 되는 20세때 4단이 된다. 그리고 게릴라 ,정탐부대의 사범이 되었다. 전후 그는 미야기 쵸오주뉴(宮城長順 1888-1953)의 제자인 한국인 조형주밑에서 2년간 쿄오쥬주우류(剛柔琉)를 공부한다.
1947년 24세때 京都에서 열린 전후최초의 무도대회 가라테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조형주의 권고로 1948년 치바(千葉)顯남부에 있는 키요즈미산에 들어가 18개월동안 완전히 인간세의 문명과 단절된 고행을 하면서 몸을 단련한다. 폭포수밑에서 좌선을 하고 야생동물과 싸우고 맨손으로 나무와 바위를 치면서....
이 시기에 그는 자기류의 가라테를 확립하고 1951년 문명세계로 돌아왔을 땐(타테야마 해변에 거주) 가라데의 진의를 세계에 전파할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시기에 52마리의 황소와 맨손으로 결투를 하게 되는데 그중 26개의 소뿔을 잘라버리고 세 마리를 즉사시켰다. 쇼오찌쿠(松竹)영화사는 그의 황소대결을 20분짜리 필름으로 만들어 전국에 보급시켰다. 이로써 그는 전국적 유명인이 된다.
타테야마의 자기도장을 닫고 동경으로 이주 한때 토요쿄오에 있는 한국영사관의 보디가드 노릇도 했다. 그는 1952년 3월부터 11월까지 일본유도대표 앤토오 코오키치와 함께 미국 순회시범공연을 하게 되는데 위스키병을 공중에서 산산조각 내는 신기를 펼치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프로복서들과 프로레슬러들을 연전연승 모두 한방에 "아웃" 시켜 버렸고 이러한 경이로운 광경에 놀란 주최측들의 최영의의 싸움장면을 텔레비젼에 방영시켰는데 이것이 가라데가 신비한 동양무술로써 미국 매스메디어에 등장하게 되는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로써 최영의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라데 마스터가 되었다. 1954년 3개월간 동남아 순방길에 오르는데 이때 '블랙코브라'라는 웰터급 타이 킥복서를 첫 회 3분만에 그 턱을 으스트려 버렸다.
1956년 그 자신의 학교를 열었고 1961년 禪과 자유롭고 거친 쿠미테(組手)를 강조하는 극진회를 창립하였다. 1959년과 1962년에 미국에 돌아와 시카고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 그의 분관들을 설립하고 30개의 기왓장을 박살내는 등 희안한 격파술 시범을 보이면서 미국대중에게 강력하게 어필하였다. FBI시범도 하였고 1962년에는 유럽순방도 하였다.
1965년 지금 東京都豊島區西池袋 3-3-9에 있는 極眞會館 4층건물을 건축하였고 소련과 동구군에도 그의 분관을 넓혔다.
지금 520개를 넘는 극진회관이 세계에 분포되어 있고 오오야마 자신도 《생명의 가라테》 《가라테는 무엇인가》 등 62권이나 되는 책을 발간하는 등 이론가로서도 활약하였고 그의 전기는 일본인들에게 크게 인기가 있다.
이와함게 최영의는 오래 전부터 청소년의 우상으로 받들어졌다. 그가 최영의가 아니고 최배달, 일본명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가 된것도 그가 일본 청소년의 우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20여년 전 '일본의 위대한 역대 10걸'중 한명으로 뽑히자 극진회 후원장이었던 사토 전 일본 총리가 "외국인의 우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며 귀화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일을 귀하가 아니라 단순한 일본국적 취득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그의 생을 소재로 한 <대야망>, <바람의 파이터>등의 만화와 최근 <넘버3>(송강호 대사), <바람의 파이터>영화로 더욱 유명한 그는 지난 1964년 국제 공수도회관 극진회관을 일본에 세운 뒤 국제 공수도 연맹 초대관장을 지내면서 일본국내뿐만 아니라 북, 남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각국에 산하연맹을 세우면서 공수도의 국제화를 주도했다.
그리고 그는 세계 격투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동경에 "대산 도장"이라는(지금은 일본 내의 격투계의 전설적인 도장, 당시 입문자중 70%가 일주일을 견디지 못했고, 그때의 제자들이 지금 세계 격투계를 움직이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름으로 처음으로 제자를 양성한다.
그리고 1994년 4월 71세의 나이에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