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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체험학습 보고서
체험학습명 : 일본 미에현 청소년과의 문화교류
12월 23일의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후 5시까지 상담실에서 소집한다는 이야길 전해듣고 나와 내 친구는 상담실로 향했다.
나는 이번 체험학습을 처음으로 ‘청소년 선도 지도회’의 청소년회원이 되었다.
물론 내 친구도 나의 소개로 함께 가입하게되었다.
달동 상담실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상담실로 소집된 달동지구 회원들은 환영식이 열리는 애니원고등학교로 향했다.
서울에도 있는 애니원고등학교. 울산에 생긴지 올해로 두 돌을 맞는 학교였다.
환영식에는 달동지부 외에도 많은 상담실 식구들이 일본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일본 친구와 처음 만나는 기회여서 무척 떨렸다.
일본 친구들의 도착시간이 다되어가자 선도회 회원들은 한 손엔 일장기, 다른 한 손엔 태극기를 들고 일본 친구들을 환영할 준비를 했다.
푸른 조끼를 갖춰입고 일본 친구들을 환영하기 위해서 강당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친구들을 태우고 버스한 대가 오고 있었다.
긴장되는 마음.. 콩닥콩닥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버스는 몇미터 앞에서 멈추고 차례로 내리는 일본 친구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내리는 미에현 친구들. 언어는 달라도 같은 또래의 청소년이다 보니 맞잡은 두손이 부끄럽지 않은 순간이었다.
일본인 친구들과 한국인 친구들 모두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눈 것이다. 날씨가 추웠던 탓인지 내 손은 너무 찼다. 하지만 일본인 친구들의 손은 따스했고,
예쁘게 웃으며 건네는 ‘안뇽하세요’ 라는 어설픈 한국어 인사도 멋지게만 느꼈다.
강당으로 들어온 선도회 회원들은 뒤쪽에서 등장하는 일본인 친구들을 박수로 환영하고,
선도회원들이 채우지 못한 강당의 남은 좌석은 애니원고의 언니, 오빠들이 채워주었다.
박수로 맞은 일본인 친구들과 좁은 길 하나를 사이로 두고 환영식이 개최되었다. 환영식 중간에 공연들이 많았는데 모두 한국적인 공연이어서 평소 한국무용이나 한국악기 연주를 못들어본 나는 너무 좋았다. 조금 지루했던 점은 없지 않아 있었다. 아마도 현황보고나 내빈들의 인사가 길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일본 친구들은 첫날을 한국 친구들의 집에서 홈스테이(home stay)를 할 예정이었다고한다.
나와 함께 가입한 친구는 홈스테이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해져있던 터라 그 아쉬움은 더했다.
그렇지만 상담실로 향하는 차안에서 몇 마디 되지 않지만 일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기뻤다.
나는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학원도 몇 달 다녔지만 정말 본토의 사람과의 대화는 떨렸다. 언젠가 배웠던 일본어도 그 순간엔 소용이 없었다.
나이를 물어야 하는데 학년을 물어 아리송해진 분위기 때문에 ‘진작에 공부를 열심히 할 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렇지만 즐거웠다.
12월 24일 아침 9시.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아침은 정말 정신 없는 아침이었다.
전날 밤에 챙긴 짐도 잘 추스르지 못해서 쩔쩔매며 9시까지 마그넷 앞에서 소집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봐 열심히 뛰었다.
윤정이(함께 가입한 친구)와 함께 만나서 주차장으로 갔다.
그 곳에는 여러 상담실 식구들과 일본인 친구들이 있었다.
잠이 덜 깬 듯 한 친구도 있었고, 화장을 고치는 친구도 있었다.
조를 짤 때에도 두근두근 거렸다.
나는 4조에 속하게 되었다. 4조는 일본어로 ‘四組(욘구미)’라고 하는 것도 잘 알 수있었다.
첫 날의 일정은 버스를 타고서 견학을 다녔다. 현대 자동차를 방문하고, 경주로 향했다. 현대 자동차에서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사방에 자동차들만 있는 주차장들이 있고 외국으로 수출하는 자동차를 싣는 커다란 배도 봤다. 또 그 어마어마한 면적에서 놀라고 아기자기하거나 멋진 자동차들, 외국으로 수출해 우리나라의 핸들방향과 반대인 자동차도 볼 수 있어 즐거웠었다.
현대 자동차 견학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정자로 갔다.
정자에 대한 기억이라면 파란 겨울바다가 펼쳐져있고, 넓은 자갈밭이 있는 정자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만이 생각 났다.
그러니 정자가 너무도 반가웠다. 바다 냄새와 여기저리 무리지어다니는 갈매기들.
작은 배들과 빨간 등대. 아름다운 바닷가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식사시간. 점심의 메뉴는 맛있는 회였는데 일본 친구들은 자기가 먹을 만큼만 먹고 그 이상 먹지 않아서 신기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아까워서라도 억지로 먹는데.. 일본 친구들은 그렇지 않아 더 신기 했던 것 같다.
‘살이 찌지 않는 비결이 여기에 있군.’ 라고 생각했다.
배도 든든하겠다.
사진을 찍으며 뛰노는 한국, 일본 청소년들이 좋아보였다.
윤정이와 카요쨩, 하루카쨩과 함께 걸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경주로 향했다.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서 축구 연습을 하는 연습장도 있었는데 그 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엔 정말 긴 다리인 광안대교가 있었는데 정말 길었다.
옆에 앉은 친구와 태화교를 40번정도 왕복하면 이 다리 한번 지난 거랑 맞먹지 않냐며 농담을 했다.
아쉽게도 나는 용기가 없어 일본인 친구와 버스에선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그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광안대교를 지나 경주에 거의 다다를 쯤엔 난 이미 잠들었었다.
경주에 도착한 한국, 일본 청소년들은 경주의 유적지 탐방에 목적을 두고 두리번 거리면서 열심히 보았다.
천년의 산 역사를 보고 즐겼다.
그 곳에는 관광용으로 이용하는 거대한 말이 있었는데 일본 친구들이 귀엽다고 해서 함께 사진도 찍고 말이 배설한 응가도 관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버스가 멈춘 것을 감지한 내 눈이 저절로 떠졌다.
그리고 숙소 앞에서 줄을 섰다.
조별로 방을 쓴다고 해서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다.
2박 3일간 묵게된 곳은 도자기를 만드는 곳으로 방과 방사이에 있는 복도엔 값비싼 도자기들이 많았다.
고가의 도자기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청소년들은 문화교류를 해야만 했다.
방을 배정받고 방에 들어서자 서로의 발냄새로 괴로워 해야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몇 분 적응이 빠른 우리들의 코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하고 두 나라의 청소년들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서로가 서먹서먹 했었다.
그렇지만 말문이 트인쪽은 오히려 우리나라 쪽. 재일 2세가 있었던 우리 조는 의사소통이 편한 쪽이어서 2박 3일 동안 재밌었다.
연예인 이야기도 나누었고, 일제의 신기한 물건들도 구경했다. 콘택트렌즈를 담아 두는 통이 너무 귀엽게 생겼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만큼 저녁을 먹은 두 나라의 청소년들은 식당에 모여 선물도 교환하고 크리스마스를 자축하는 파티도 했다.
그 행사에서는 일본 청소년 언니들이 춤을 보여줬는데 내가 알고 있는 노래도 있어서 좋았다. 선물교환식이 있었는데 한국 청소년 대표 언니와 일본 청소년 대표 언니가 대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한국측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처용탈 목걸이를 선물하고, 일본측은 복을 부르는 고양이 저금통을 선물했다.
개인적인 선물을 주고 받을땐 선물을 받지 못해 섭섭하지 않아도 될 섭섭함을 느꼈다.
모두 홈스테이를 한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듯 했다.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귀여운 고양이 저금통을 받았다.
일정표에 선물교환이라고 써있어서 선물을 준비했었는데 마침 옆에 앉아 있던 아미쨩에게 선물을 했다. 편지도 썼었는데 너무 급하게 쓰느라 날려쓴 히라가나와 그 뜻은 ‘고마워, 잘부탁해.’ 로만 일축되는 내용이었다.
창피스러웠지만 나는 그 선물을 전했고 아미쨩은 너무 고마워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캠프파이어를 즐겼다.
손에 손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삼삼 오오 모여서 상품도 받고 친목도 쌓는 좋은 캠프 파이어였다.
나는 그 게임에서 처용탈 목걸이를 상품으로 받았다.
또 카드게임도 있었는데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이 진 사람 카드를 가져서 10장이상 모으면 앞으로 나가는 게임이었다.
선착순 3명에게 현금 상품이 있었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을까.. 첫 번째 상대와의 가위바위보에서 패배해 너무 슬펐지만, 나의 친구는 당당히 10장을 모아 선착순 세 사람에 들었다.
부러웠지만 게임은 게임이라 생각하고 그 순간을 보냈다.
취침시간이 다 되어서 방으로 들어간 우리는 우정이란 열기 속에 치러진 캠프 파이어도 한겨울의 추위는 못 막는 다며 몸을 녹이기에 바빴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 빨리 잠을 잔 나는 지금 후회한다.
다른 아이들은 그때 자지 않고, 일본 친구와 이야길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회한다. 아무튼 아침에 눈을 떠보니 웬 과자선물이 있었다.
순간 스치는 생각이 ‘오늘이 몇일이지? 25일.. 크리스마스구나!’ 였다.
선생님들께 감사했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좀 그랬지만.. 일본 친구들과 정말 잘 보호해주시는 선생님들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좋았었다.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경주 박물관으로 향했다.
경주 박물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말이 잘 통하질 않아 재일 2세언니와 손짓 발짓을 하며 의사소통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아는 일본어 단어를 총동원해서 설명을 했지만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다. 재밌는 헤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일본 친구들을 위해 화장실로 안내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화장실이 50m 정도 나가야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걷다가 뒤로 돌아보니 우리가 내려온 건물 바로 아래층에 화장실이 있었던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그 화장실로 갔는데, 남자 화장실 쪽의 창문이 열려있고 그 창문으로 남자의 머리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친구들은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고 재밌어서 웃느라 정신이 없었고,
안내하던 한국 친구들도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튼 경주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쇼핑을 해야했다.
‘한국의 정은 재래시장’에서 느껴라는 말이 있을까? 아무튼 내가 그런 말을 지어낼 정도로 활기찬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경주시내 역근처의 재래시장. 좁은 통로로 된 시장 이곳 저곳을 본 친구들이 원하는 물건을 찾아 해맸다.
하지만 잘 찾을 수 없어 애를 먹었다.
결국 일본 친구들이 산 물건은 핸드폰 줄이었다. 장구가 달려있고 별자리가 달려있는 핸드폰 줄. 재래시장은 정이 있지만 일본 친구들의 추억이 될만한 물건은 없었나 보다.
그렇지만 그들에겐 값진 경험이었을 것 이다.
그리고 바뀐 일정에 따라 온천으로 향했다.
나는 눈썰매를 기대했지만 일정이 바뀌는 바람에 온천을 갈것인지 말것인지 고민해야했다.
피곤한 나머지 온천행은 선택하지 않았다.
온천에 들어가지 않는 학생들을 하나의 버스로 모아 숙소로 돌아갈 땐 정말 졸렸다.
일본, 한국 청소년 모두가 25일은 고된 하루였나보다.
숙소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온천을 하고 올 친구들을 기다렸다.
온천욕을 즐긴 친구들이 도착하고 우리는 조별로 이야기 마당을 벌였다.
이번 체험행사로 느낀 점과 문화의 차이점등을 커다란 전지에 채워나갔다.
역시 양국의 언어가 되는 아미쨩의 공이컸다.
열심히 귤도 그리고 포도송이도 그렸다. 시간은 짧았지만, 서로가 상대의 말을 소중히 듣는 그런 귀중한 순간이었다.
발표시간이 되어서 식당에 모인 한.일 청소년들은 조별로 앉아 떨리는 마음을 열심히 다스렸다.
우리조가 발표할 차례가 되어 많은 사람들 앞에 서니 간이 콩알 만해져서 자꾸만 뒤로 돌아보게되고 딴청도 피웠다.
그 점이 마이너스가 되어 우리조의 발표성적이 저조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발표를 하고, 일본 청소년을 대표한 언니들의 반성할 점들도 들어보았다.
눈물을 보이는 언니들이 안쓰러웠다.
모두가 개선해야할 점은 다 갖추고 있었고, 우리들은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숙소로 돌아가 오지 않는 잠을 청해야했다.
‘마지막 밤’ 이란 생각에 모두가 복도를 오가며 사진찍기에 정신이 없었다.
나는 주로 사진을 찍어주는 쪽이었다. 잠이와서 먼저 자버렸는데 그게 너무 후회스럽다.
하지만 일본 친구와 잠을 잔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일어나 세안을 하고 밥을 먹고 도자기를 빚었다.
물론 제일 잘만드시는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돌아가는 판위로 미끄러지듯 도자기를 빚는 할아버지가 부럽게만 느껴졌다.
우리들은 초보이기에 열심히 두드리고 붙였다. 못을 이용해 글씨도 새겨넣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국이나 일본 청소년들의 생각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두 나라의 풍습은 방을 오가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었지만 우정이나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하트 모양의 접시 세트를 만들었다.
주위의 친구들 모두가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
어릴적 하던 흙장난을 떠올리며 혼신을 다해 빚은 우리 모두의 도자기가 잘 구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별은 해야하고 그 아쉬움은 더해갔다.
아침에 마당까지 짐을 옮겨 줄때도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별이 순간이 되자 그 아쉬움의 농도는 배로 짙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참고 웃으며 배웅해줬다.
꼭 잡은 두손을 놓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끝내 눈물을 보이며 이별을 가슴에 묻는 친구들도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팔이 부러져라 손을 흔들었다.
모두가 아쉬운 마음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우리나라의 생각과 정, 문화를 얼마나 그 친구들에게 전했나를.. 많이 전해진 못해도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웃음과 몸짓은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일본 친구들이 울산을 또 방문한다면 그때는 정말 유창한 일어 실력으로 의견교환을 했으면 좋겠다.
끝으로 2박 3일간 고생하신 모든 지도자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말도 있지 않나.
열심히 한다면 그 열매는 달것이라고 나는 믿기에 오늘도 봉사를 하고 학생으로서의 임무도 잊지 않는다.
정말 수고 하셨습니다.
2003. 12. 23 이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