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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건전성 확립해 지역현안 순환적 재투자, 동해경제 살린다!
전국적 경쟁력 갖춘 복합해양관광-통합광역시 제안!
존경하는 동해시민 여러분!
내 고향을 사랑하는 열정과 동해의 생존을 걱정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애절한 뜻을 모아
저 전억찬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동해시장에 출사표를 던집니다!
현재 우리 동해시의 현실은 암울할 따름입니다.
동해시는 적은예산과 줄어드는 인구에 비해 매년 700~800억의 지방부채를 안고 있습니다. 취약한 재정자립도는 줄곧 20%를 밑돌다 작년에는 17%까지 급락했습니다.
이러한 빚더미 재정을 고민하지 않고, 지난 민선15년 시정은 과도한 예산이 낭비되는 무리한 사업과 과시적 행사를 강행해 왔습니다.
재정건정성은 이미 취약을 넘어 위험수위에 도달한 자치단체로 전락했습니다.
전억찬은 선심성 이벤트나 새로운 사업을 펼치기보다는,
산적해있는 지역현안을 사안별 우선순위에 바탕을 두고,
실현가능한 부분부터 조속히 매듭지어 나가겠습니다.
또한 세밀한 계획에 기초한 지역개발과 그에 따른 사업수익 확보로,
건전한 지방재정을 유지하면서 수익의 재투자를 통한 ‘성장연쇄효과’가 가능하도록 견고한 ‘순환발전모델’을 구축하겠습니다.
전억찬은 동해시 미래발전전략으로 통합광역시를 제안합니다.
동해시는 그동안 기업 및 사업유치에서 인근 자치단체와 소모적 경쟁으로 많은 역량을 낭비해왔습니다.
인근 시군이 서로의 역량과 장점만 잘 살려낸다면 대한민국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경쟁력있는 명품관광도시가 탄생할 것입니다.
이제 ‘내륙의 제주도’를 목표로 하는 ‘복합해양관광-통합광역시 추진’은 동해와 인근 시군이 공생발전해야 할 시대적 사명이 되었습니다.
통합광역시가 출범하게 되면 자체적인 도시계획권을 갖게 됩니다.
강원도를 거쳐 중앙 정부와 협의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행정절차 간소화 및 정책추진에 가속도가 붙고, 도세를 낼 필요가 없어 재정자립도가 높아질 수 있습니다.
특히 동해, 삼척, 태백은 지역주민 정서와 생활권이 동일한데 반해, 지금의 구시대적 행정체제가 서로의 발전역량을 저해해왔습니다.
작년부터 대두된 동해,삼척의 통합여론은 과거보다 한층 성숙해 있습니다.
지역학계에서도 동해,삼척은 물론 과거 단일행정구역이었던 동해·삼척·태백·옥계 등을 아우르는 행정구역 개편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지자체별로 시민의 뜻이 반영된 통합추진위를 구성하고 이후 통합추진공동위원회를 결성해 통합에 관한 기본 계획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끝으로, 통합광역시로의 내적 에너지 결집을 위해 시민통합 행정을 펼치는 것도 잊지 않겠습니다. 능동적 행정으로 현장을 찾아가 다양한 시민의견을 수렴, 시정에 반영하는 ‘민의행정문화’를 정착시켜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사랑하는 동해시민 여러분!
이제 이 땅! 동해의 운명이 걸린 이번 선거는
우리에게 역사적 전환점이 되어야만 합니다.
역사는 사람들을 벌하지 않습니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 사람들을 벌할 뿐입니다!
동해시민이!
강한 자존심이 살아있다는 것을 세상 만천하에 보여줍시다!
전억찬은 현명한 동해시민 여러분을 믿습니다.
동해시를 위해서 목숨 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러분의 선택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후보경력]
전억찬 후보는 90년 강원도 최고 득표율로 제3대 강원도의원에 당선되었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시장선거에서는 두 차례 차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 후보는 북부권공동화비상대책위, 망상송변전소철탑반대공대위, 제2준설토매립대책위, 동해균형발전위원장을 맡으며 수많은 지역현안과 일선에서 부딪혀 왔으며, 2007년 동해경제인연합를 구성해 25건의 지역현안을 다루었으며(해결10건,추진15건), 이를 모태로 작년에는 18개 시군이 참여하는 강원경제인연합회로 조직을 확대․출범시켜 올해 2월 사단법인으로 승인받았다.
[출처] 전억찬 강원경제인연합회장 동해시장 선거 출마 선언|작성자 이웃사촌 전억찬
1948년 초겨울 전억찬은 망상에서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공부가 어려웠던 시절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소 먹이고, 밥 짓고, 동생들 빨래며, 나무도 하면서 집안일을 닥치는대로 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광산으로 어머니는 과일행상으로 집을 비우면 가정의 살림을 어린나이에 도맡아야 했다. 남자가 아닌 여자가 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했던 것이다.
늦어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등록금이 없었던 부모님은 다음해에 중학교에 보내 주겠다고 했으나 그동안 집안 사정 때문에 초등학교도 늦게 졸업한 셈이 아닌가. 그는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입학만 시켜달라고 밤낮으로 애원했다. 결국 중학교 입학시험을 부모 몰래 쳐서 합격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빚을 내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입학 후가 더 문제였다. 동생들은 자꾸만 커가고 수업료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기에 새벽 3시에 책가방을 인력거에 싣고, 묵호어판장을 돌며 오징어 내장을 주워 팔고 인력거는 학교근처에 세워두고 등교했다. 또 다음날은 산에서 나무를 하고 새벽 4∼5시에 대진, 어달리, 묵호로 장작을 팔았다.
때로는 경찰들의 눈을 피해 해안로로 숨어 가다가 잡혀 나무는 모두 빼앗기고 울면서 돌아올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어린나이에 힘들었지만 꿈에 부풀었던 그에게 또 한번의 난관이 찾아왔다.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광산에서 병을 얻어 병석에 누워 계셔야 했던 것이다.
마구간의 소들도, 그 잘 되던 텃밭도 모두 팔아 버렸다.
결국, 그 역시 학교를 중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주변 사람들의 야유도 대단했다. 중도 포기가 당연한 것처럼...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는 얘기였다.
당시 정부는 권력싸움에 찌든 정치인들로 인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로인해 국민은 정부를 불신임하고 있는터라 지식인이 많으면 나라가 망하고 만다는 편견이 앞서던 시기였다.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비싼 돈 들여 도둑 키우려 한다고 나무랬다.
밭일과 과일장사를 하며 고생하는 어머님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초롱초롱한 동생들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미어져 남몰래 책상 앞에 엎드려 펑펑 울어 보았지만 어린가슴은 더 조여오기만 했다.
그런 어느날 고등학교에 다니는 정선배가 가정교사로 공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찾아가 가정교사 자리를 요청 했으나 중학교 2학년에게 자식을 선뜻 맡길 부모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 선배의 소개로 찾아간 곳이 지금의 묵호역 굴다리 밑 시계점 아들인 초등학교 2학년생을 소개 받았다.
당시 월 450원을 받기로 하고 오후 시간을 택해 가르쳤다. 더러는 수업을 마치고 아이 앞에 앉아 가르치노라면 배도 고프고 피곤도 해서 잠이 오는 때가 많았다.
어느날 꾸벅꾸벅 졸다가 주인 아저씨에게 들켜 주인이 공부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게끔 거울을 걸어놓고 수업한 일도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집저집을 전전하며 가정교사 수업도 하면서 새벽엔 신문을 돌리고, 등교하면 쉬는 시간에 주간지 신문을 학생들에게 팔아 턱 없이 부족했던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번 돈의 일부는 떼어서 고등학교도 가리라는 결심에, 저축을 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의 시련이 닥쳐와도 혼자 벌어서 대학까지 마치겠다는 욕망이 어린가슴을 불태우기 시작 했다.
그렇게 어린 전억찬은 한해 두해를 넘겨 어느덧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지게 위에 흑판을 세워...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런 그가 더 큰 꿈을 결심하게 된다.
낳아준건 부모였지만, 어린 그를 성장시킨건 가난이었고, 세상이었다. 남들도 손가락질 하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학비를 스스로 마련하면서 ‘하면된다’는 신념은 이때부터 그의 작은 심장에서 끌어올라 용솟음 치고 있었다.
1966년 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 당시, 마을에서 중학교도 그 혼자서, 고등학교 입학도 그 혼자서 입학하는 영광아닌 영광을 이룬다.
“그래 가난이 뭔 대수냐! 내 미래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만들어 가는 거야!”
어린 전억찬은 이때부터 고등학교를 입학하면 반드시 고향 마을에 중학교를 가지 못한 친구들과, 후배들을 위해 배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 보겠노라 결심하기 시작한다.
그 역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세탁소 세탁일, 신문배달, 구두닦이, 나무장사, 공사장 막노동을 하며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는 처지였지만, 농사 때문에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동네 후배들에게 자신처럼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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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이 지역의 청소년들이 부모들처럼 무지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공부를 해 밖의 세상을 알고 우리 지역도 문명의 해가 비치는 부락으로 만들어 보자!”
전억찬의 신념은 억수장마비가 와도 흔들림 없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16살의 전억찬은 등에 작은 흑판을 메고 한손엔 의약품을 들고 밤마다 산골짜기 마을을 돌며 농촌을 깨우쳐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새로운 농사지식의 보급과 문맹자 교육을 착실히 해나갔다.
그때부터 하나둘 모여든 선, 후배들을 모아 망상리 공회당에서 야간중학교 과정을 개강해 수업했다.
차츰 입소문이 나자 이마을 저마을에서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머리를 길게 땋은 누나뻘 처녀들부터 형뻘 되는 사람, 어린 아이들까지... 중학교 과정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밤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들을 위해 그는 열정을 다해 열심히 가르쳤다.
처음에는 촛불을 켜고 2년여 수업하다 나중에 어선에 다는 큰 등 5개를 구해 불을 밝혔다. 장시간 밝혀야 했었기에 석유가 떨어질 때는 어쩔수 없이 수업을 중단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과서는 같은 반 동료들로부터 쓰던 것을 얻고, 분필, 흑판 등은 고등학교에서 쓰던 것을 주워왔고, 학용품과 석유는 신문을 팔아 모은 돈으로 마련했다.
저녁밥을 거르는건 다반사였다. 마을회관에서 집까지 10리가 넘기 때문에 저녁밥을 먹고 올 여유가 없어 곧바로 회관에 들려 수업을 하다보면 밤 12시가 넘을 때가 많았다.
때론 비가 오면 멈출 때 까지 수업을 연장하다 밤을 거의 세울 때가 있는가 하면, 밤길을 가기 무서워하는 여자 아이들을 10리가 넘는 집까지 데려다 주고 새벽에 집에 오면 지쳐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해 그렇게 그들만의 학구열은 더해가고만 있었다.
처음 8명으로 시작한 야학은 어느덧 80여명의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 했다.
학생들도 늘기 시작하면서 교실하나 없었지만 학교의 모습을 찾으면서 교복을 맞춰입었다. 남.여 학생 모두가 새교복을 입고 보니 정규학생들과 다를바 없었다.
“그래 이게 바로 너희들의 모습 아니던가...” 깨끗하고 순진한 모습들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날 처음으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앞에 놓고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던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달밤에 돌아 오는 길, 산 마루터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둥근달을 보고 맹세 했다.
“내가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운명으로 알고 조금도 괴롭거나 고통스러워하지 말자. 이젠 더 이상 울지 않고 살아가자”며 몇 번이고 맹세를 했다.
또 하나의 시련
그렇게 부푼 희망을 안고 야학을 하던 어느날 ,또 한번의 시련이 그를 찾아왔다.
수업이 막 끝나려 하는 마지막 5교시 영어 수업시간.
‘와르륵’ 출입문이 열렸다.
쇠스랑과 몽둥이를 든 건장한 청년들이 몰려왔다. 3명이서 그를 끌어내 바닥에 내던졌다.
그때 한 청년이 쇠스랑으로 등불을 찍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30여평되는 회관 안이 불바다로 변하면서 불길이 책상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모두들 회관 밖으로 도망치려들자 창밖에서 몽둥이를 들고 서서 뛰쳐나오지 못하게 위협을 가했다. 학생들은 어쩔줄 몰라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그 자리에서 질식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이들의 등에 엎혀 집에 왔지만 밤새도록 헛소리만 하며 앓다가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새벽 3시에 그를 찾아온 학부형이 있었다. 일어나 보니 밤새도록 잠 한숨 못 자고 찾아왔다며 내 딸을 살려 놓으라고 통곡했다. 한 여학생이 온 몸에 화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지친 몸이었지만 벌떡 일어나 학부형을 따라 묵호에 있는 최외과를 단걸음에 찾아갔다. 화상이 심해 다들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 여학생을, 아니 그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와 그는 손도장을 찍고 잘못돼 죽어도 병원에서 책임지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수술을 하기 시작 했다.
바로 그녀 머리맡에 놓인 석유등이 쇠스랑에 찍혀 석유가 그녀의 온몸에 퍼지면서 불이 옮겨 붙었던 것이다.
불이 옮겨 붙자 몸에 불을 끄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나일론 옷 때문에 온몸이 조여 찰거머리 같이 달라붙었다. 깊은 상처가 발에서 목 밑까지 험하게 생겨났다.
결국 수차례의 수술과 1년가까이 치료 끝에 그녀는 살아났지만 학교는 사고 때문에 3개월이 넘도록 쉬게 되었다.
그후 흩어진 아이들을 다시 모았으나 80명에서 27명으로 줄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고, 학교를 가고 싶었으나 부모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 못하다가는 아까운 자기 자식들을 모두 병신 만들 것 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그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마을주민과 학부모들로부터 욕을 먹기 시작했다.
낮이면 논밭에 나가 일할 아이들을 꼬드겨 밤에 잠을 못자게 해, 낮에 일도 못하게 한다며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학부모들과 주변에서는 그를 이 지역에서 떠나라며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부모님의 마음도 안정된 공무원을 바란 것인데 엉뚱하게도 욕먹는 일을 하고 있다며 나무랬다.
부모님은 더 이상 무모한짓 그만 두고 직장을 찾으라고 했지만 그의 결심은 여간해서는 움직이질 않았다. 그 누구도 그를 좌절시키고 꿈을 뺏을 수 없었다.
그럴수록 밤으로 쉬지 않고 수업을 계속해 갔다. 그때를 지금의 전억찬은 이렇게 회고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회관으로 찾아오는 그들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배우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이 가난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없었고요.”
그렇게 그는 배움에 갈망하는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가슴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사실 전억찬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면서 서울로 상경하려했다.
어쩌면 가난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니 그가 처해있는 현실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 고난이 내 운명이라면 달게 받아들이겠노라. 그러나 반드시 극복하고 이겨내겠노라”
그렇게 1969년의 봄은 다가오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학교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이 참에 아예 학교를 만들자!”
시련은 그를 더 강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망상동민들이 농경지 작업차 모인 자리에서 이제 막 고등학교 교복을 벗은 모습의 그는 막걸리 2말을 사들고 찾아가 학교를 짓고 싶으니 부지를 희사해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의 가르치려는 열의, 학생들의 배우려는 의지는 결국 동네 어른들을 감복시켰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다행히도 버려진 자갈밭 부지 200평을 읍장에게 희사받을 수 있었다.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습니다. 바쁜 일과 속에 매일 밤마다 꽁꽁 언 돌당을 일구고 벽돌을 만들어 교실 한칸한칸 지어나가며 힘든줄 몰랐습니다.”라고 그는 회고한다.
학교부지와 마을 부락과는 500m가 떨어진 곳에 위치 하고 있어 밤이면 전혀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구전으로 도깨비가 나오는 무서운 무인지역이었다고 한다.
이후 3개 교실을 신축하고 장마로 유실된 황무지를 개간. 700여평 대지에 4개동의 교사와 실습장 등을 갖추게 되었다.
버려진 황무지를 밤낮을 쉬지않고 가시덩굴을 걷어내고 바위돌을 깨어냈다.
차가 다니는 길도, 물길도 뒤범벅된 상태의 땅을 물길을 바로내고, 찻길을 500미터나 닦아 제방도 쌓았다. 마을안길 도로 300미터를 만들어 시내버스가 들어오게 하고, 도지사에게 건의해 50미터의 다리를 완성했다.
폭풍우 속에서도 교실을 가질 수 있는 희망이 있었기에 그는 한번도 웃음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돌밭을 파헤쳐 운동장을 한 뼘씩 늘릴 때마다 그렇게 그의 시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야 말았다.
학생들은 강원도 전지역은 물론 경상도와 충북에서도 중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기 위해 찾아왔다. 그러나 비좁은 20평 교실에서 해결할 수 없어 천막1동을 교실옆에 치고 천막수업도 했지만 모여드는 학생들로 인해 72년 75평의 교실 3칸을 짓기 위해 동분서주 뛰었다.
농민들에게는 나무와 모곡을 그리고 독지가를 찾아다니며 자재를 모았다. 블록은 손수 만들어야 했다.
심지어 도지사는 물론 장관, 대통령에게까지 눈물의 호소문을 쓰며 도움을 요청했다.
“하면된다”는 신념 하나 만으로...
공사를 시작하고 4년만인 75년 10월 14일 제1교사(교실3칸)가 준공되던날 부인 김성자씨와 웨딩마치는 없었지만 마을주민들과 학생들의 축하속에 결혼식을 가졌다.
이때부터 혼자하던 모든 것이 둘의 힘으로 나눠지면서 용기백백해 학교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갔다.
수업도 서로 나누고 학교관리를 그때부터 맡겼다.
여기저기서 후배들이 자원교사로 자청하고 교구시설도 관공서와 학교를 돌아 다니면서 얻어 날랐다. 가진 돈은 없어 학교의 규모가 커가면서 경제적으론 더 고달팠다.
‘오늘 하루는 잘 넘겼으니, 내일도 오늘처럼만 잘 넘어가다오’ 밤마다 마음속으로 빌었다. 정신력과 의지만으로는 버거운게 사실이었다.
교실을 만들기위해 진 빚을 갚느라 아내와 세 아이가 밥 한번 배불리 못 먹었을 때는 너무나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전억찬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학교의 모습은 날로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역사회 활동에 더 적극적이었다. 지금까지 모내기, 벼베기 봉사 등 농촌 일손 돕기 활동은 물론, 도로보수, 꽃길조성, 망상해수욕장 자연보호, 지방문화재 관리보수, 농기계 수리, 전자제품 수리 등 그 활동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13년간 사비를 털어 학교에서 여는 노인 위로잔치 행사는 지역 노인 400여명을 한자리에 모시고 학생들의 예의와 공경에 대한 산 교육의 장으로 마련하고 있는 행사중에 큰 생사로 손 꼽고 있다.
그렇게 불우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마을금고 조직, 문맹자 교육, 농사기술정보 보급 등 어린 나이에 비해 힘겨운 일들이지만 묵묵히 행동으로 어두운 사회를 일깨워 보고자 ‘대한효도회’를 전국에 조직하며 농촌 환경개선과 과학 영농을 위해 4H활동에 앞장섰다.
또 6개 부락의 숙원인 2천여평의 평지를 닦아 당시 북강리민(묵호-옥계간) 종합체육대회가 개최 실시됐다.
특히, 망상지역에 농촌봉사활동의 모체인 명광 4H구락부를 조직. 지역 봉사활동에 전력한 결과 강원도 뿐만아니라 전국에서도 4H우수성을 알아주고 정부로부터 많은 격려도 받았다.
그리고 망상초등학교 강사, 재건국민운동위원회 묵호읍간사, 농협의 순회강사로 활동하면서 야간학교를 중, 고등부 과정으로 개편해 시내권 불우청소년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나이 20대의 일이다.
전억찬이 어려서부터 가슴속에 굳어버린 ‘하면된다’는 신념은 드디어 묵호새마을청소년학교를 이 세상에 등장시켰다.
이것이 바로 현. “강원산업중고등학교”의 첫 출발인 “묵호새마을청소년학교”였다.
그로부터 지난 40여년간을 외부의 지원도 없이 사재를 털어 부인 김성자씨와 같이 현재의 학교로 키워 온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님을...
그의 나이 29살 되던 1979년 12월 15일 전국에 소개된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 “인간승리” 초구리 학교 프로는 22일 다시 앙콜 방송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인생드라마는 1979년 KBS 「인간승리」를 시작으로 89년「11시에 만납시다」, 90년「현장기록 요즘사람들」등에 방영되면서 지역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많은 격려가 이어졌고, 그의 노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특히 “인간승리”는 대역을 써 그의 어린시절부터 학교를 세우기까지 내용이 담겨져 있어 누구나 보고 눈시울을 적시게 한 감동의 프로였다.
결국 묵호새마을청소년 학교는 지역 뿐아니라, 전국에서도 관심있는 대상이었다.
주위에서는 그런 그를 ‘억척이’라고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나온 길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첫눈에 보고 키도 작고, 체구도 외소해 나약한 사람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돈이 없었을뿐 그의 생각과 행동은 어디에서건, 누구에게건 당당했다.
“아니 가난하고 돈 없다고 죄인은 아니잖습니까?”
학교를 만들때도 그랬지만 60을 넘긴 지금도 항상 하는 말이다.
그에게 불가능이란 정말 있을 수 없는 것일까?
하면된다는 신념. 그 굳은 신념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진리로 알고 살아온 전억찬. 언제든 그에게 수많은 고통과 시련이 닥쳐올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순간이 바로 그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강원산업중고등학교를 설립, 운영하게 된 동기 역시 자신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지역, 이 나라에 생기지 않기를 단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막아 보자는 것이었다.
60년을 한결같이, 시민이 원할 때 함께한 사람!
결국 그토록 바라던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도시 및 지방행정,석사)을 졸업하고 오직 지역을 위해 노력을 쏟아 지역주민들의 격려속에, 당시 30살인 1980년 강원도 최연소로 제12대 대통령선거인단에 당선된다.
지방자치시대 원년인 1990년에는 40세의 나이로 강원도 최연소, 최다득표로 도의원에 당선돼 예결위원장을 역임하며 동해발전을 위한 구상을 현실화시켰으며 업무수행 능력 또한 ‘지방자치를 빛낸 전국 지방의원 100인’에 포함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침체된 지역경기 회복과 분위기 쇄신을 갈망하는 시민들의 뜻에 따라 1995년과 2002년 시장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모두 2위를 기록한다.
이후에도 강원도 무대접푸대접 규탄 궐기대회를 주도했고, 대한제지부지를 동해 건조인협회에서 매입하도록 해결을 봤으며, 대진동 쓰레기장 문제도 해결하면서 동해시 북부권 공동화 비상대책위원장이란 중책을 맡아 지역경기 회생에 몰입했다.
또, 망상 송변전소 철탑반대 대책위원장, 동해시 제2 준설토 매립대책위원장, 동해균형발전위원장을 맡으며 수없이 산적해 있는 지역현안 해결을 위해 시민의 입장에서, 시민과 함께 최 일선에서 부딪혀 싸워왔다.
또한 2007년 동해경제인연합회를 구성해 이전하려던 한국철도공사 강원본부를 동해시에존치시킨 것을 시작으로 현재 진행중인 북평변전소 옥내화 사업 조기촉구, 강릉-울릉 여객항로 취항 대책, 동해안 경제자유구역 지정 촉구, 동해항 3단계확장 촉구, 동해삼척 통합시 추진 등 25건의 지역현안을 다루고 있다.
결국 이를 모태로 작년에는 18개 시군이 참여하는 강원경제인연합회로 조직을 확대, 출범시켜 2010년 2월 사단법인으로 승인받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가능케 하는 그의 이러한 투지와 열정은 더 이상 잃을 게 없이 만신창이가 된 암울한 동해시 현실 속에, 수많은 시민들이 안타까움에 통탄하고 있는 이상, 그래서 그를 믿고 필요로 하는 시민들이 있는 이상, 2010년 잃어버린 동해시민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오늘도 제일 먼저 동해의 아침을 깨우며 달리고 있다.
[출처] 동해시장 전억찬 예비후보가 걸어온 길"가난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작성자 이웃사촌 전억찬
2002년 6·13 동해시 지방선거 결과
1위 김진동(한나라당) 28.65 % - 당선
김진동 후보는 11,993 표를 얻어서 민선 3기 동해시장 자리에 올랐다.
2위 전억찬(무소속) 22.01 % - 낙선
전억찬 후보가 9,213 표를 얻어서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3위 김진모(무소속) 20.34 % - 낙선
김진모 (전) 강원랜드 사장
동해시장에 3번 출마했으나, 아쉽게도 3번 다 낙선했다.
이 분이 동해시장이 되셨다면 동해시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전 강원사회복지재단 김진모 이사장 별세
김진모 전 강원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
2016년 2월 24일 오전11시15분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동해 출신으로 북평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동력자원부 광업등록사무소장, 감사관, 광무국장,
석탄산업합리화사업단 이사장, 북평중·고 총동문회장,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상근부회장, 한국석유화학공업협회 상임고문,
강원랜드 사장, 한국연탄공업협회 회장, (주)강원랜드복지재단 이사장,
한국장애인스키협회장, 강원도민 중앙회 고문 등을 지냈다.
강원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지역의 복지시설과 생활이
어려운 불우이웃들을 찾아 지원했으며, 강원랜드 사장 재직 시절
폐광지역 활성화를 위해 앞장서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화숙씨와
김응수(아식스스포츠 부장)·성희(유치원 교사)씨 등 1남1녀가 있다.
△발인=26일 오전 7시30분
△장지=성남 추모공원
△빈소=분당 제생병원 특2호실
△연락처=(031)781-6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