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武人時代)'는 고려중기 무신정권의 등장을 그린 것으로, 화려한 배역과 극적 반전 등으로 시청자의 흥미와 관심을 사로잡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였다. 우리에게는 이 드라마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무신정변의 주역 이의방(李義方: ? ~ 1174(明宗 4))인 것이다.
《고려사열전》에 이의방을 소개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의방은 전주인(全州人)이니 의종(義宗)말에 산원(散員:정8품)으로서 견룡행수가 되었는데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난을 일의키니 왕이 두려워 하여 이의방을 응양용호군 중랑장(정5품)으로 올리고 형 이준의(李俊義)는 승선(정3품)을 삼았다』
무신의 난 주역 이의방의 부친은 이용부(李勇夫)로, 전주이씨 조상을 기록한 《씨족원류 》에 따르면 아버지 이용부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 : 태자를 보호하는 시위대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었으니 이의방은 개경 명문세족 출신이다.
이의방의 형제는 4남1녀이다. 일설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나 맏형이 이준의이고 둘째가 이의방, 세째가 이린(李麟 또는 李璘), 네째가 이거 그리고 다섯째가 여자누이이다.
이들중 이의방의 동생인 세째 이린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6대조로서, 우리가 아는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이 날으샤'의 주인공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의 첫 대왕 '목조(穆祖)'의 할아버지인 것이다.
이린의 아들이 이양무(李陽茂)이고 이양무의 아들이 목조 이안사(李安社)로써 이른바 시조 위 한(翰)으로부터 18세인 것이다. 지금 삼척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가 바로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인 이양무의 묘인 것이다. 전주이씨의 조상을 기록한 《씨족원류 》에는 이준의와 이의방의 이름은 빠져 있고 이린과 이거만이 올라 있다.
《고려사열전》이의방편을 보면 이의방이 형 이준의와 싸우는데 아무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형제가 왕도 갈아치우는 거물들이니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까봐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 말리는데 당시 장관급인 중서시랑평장사 문극겸이었다. 고려사는 '이의방이 문극겸과 친하고 또 이의방의 아우 이석린(李石麟)이 문극겸의 사위인 까닭에 그의 말은 들었다'고 했다.
이석린이 바로 이린으로 목조 이안사의 할아버지이다. 고려사 세가 명종 4년인 1174년의 12월조를 보면 『계해에 이린으로 집주(執奏, 추밀원 소속의 문관)를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문극겸은 무신의 난을 당한 의종에게 평소 충언을 해 온 충신인데 무신의 난이 일어난 직후 그가 해 온 충언과 바른 행적때문에 참살을 면했다. 《고려사열전》문극겸편에 보면 『문극겸의 딸이 집에 있으매 이의방의 아우 이린이 그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계사의 난리(1173년에 일어난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의 의종 복위반란)때 일족이 다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다.
문극겸은 이의방의 집안과 혼사를 맺음으로서 권부의 실세가 되고 무신들의 문신 살해를 앞장서 말리며 또 새임금 명종의 신임도 받게 되었다.
1174년 12월 이린의 집주 임명기록이 있은 지 8일 뒤 이의방과 그 일가는 정중부와 개경의 불교세력에 의해 몰살당한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개경의 승려 종참이 합세하여 이의방을 기습 살해하고 이의방의 형 이준의와 동류세력인 고득원 등이 죽는데 그 때 이린은 다치지 않았다. 이고가 살해된 뒤 이고의 아버지가 살아남 듯 일족이라도 소원한 사이의 혈족은 살려두었던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이린은 당시 명종의 총애를 받았던 문극겸의 보호를 받았으며 비록 이의방의 동생이지만 문신으로서 온유하며 덕이 있어 명종과 정중부는 이린을 죽이지 않았다.
이린 일족마저 죽였다면 목조대왕(穆祖大王), 그리고 대왕의 장자이며 우리의 중시조인 안천대군(安川大君), 그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나올수 없었을 것이니 이 얼마나 중요한 가문의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의방의 형제 4남1녀 남자 중 이준의, 이의방, 이린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이 이거이다.
《고려사열전》최균편을 보면 이거가 나오는데 그는 반란군 조위총의 편이었다.
1174년 가을 조위총의 반란이 한창 펼쳐질 때 이의방이 보낸 고려조정군이 화주성(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반란군과 싸운다. 토벌대장인 동북로 도지휘사 최균(全州崔氏의 시조)이 이끄는 고려조정군은 들판에서 싸우다가 화주성으로 들어갔는데 조위총의 반란군이 성밖을 에워싸며 진을 쳤다. 그때 화주성의 낭장 이거가 조위총의 반란군과 내통하고 화주성문을 열어 반란군이 들어와 도지휘사 최균이 죽는다.
성문을 연 이거가 이의방의 동생이자 이린의 동생이다. 이거는 형 이의방과 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전주이씨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 이린과 이거만 나오는 이유는 이의방과 이준의가 역신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전주이씨가 고려시대 후반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의방과 이준의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선은 개국 후에도 조정에 반기를 드는 역신을 경계한 때문에 그들은 영원히 복권되지 못하였다.
이의방에게는 누이가 한 사람 있었는데, 《고려사열전》우학유(于學儒)편에 그 기록이 나온다.
『정중부가 이의방과 난을 꾸밀 때 무신 우학유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려 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난이 성공한 후, 이의방과 이고가 그를 죽이려 하니 그는 겁이 나서 이의방의 누이에게 장가 가서 무사하였다』고 하였다.
계보를 정리하자면, 이의방의 아버지 이용부는 전주이씨 시조 1세 이한의 15세손이다.
그 다음의 16세가 이준의, 이의방, 이린, 이거 형제이고 17세가 이양무로 이양무의 묘가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의 준경묘이다. 18세가 목조 이안사, 19세가 익조 이행리이다.
18세 목조대왕은 아들 6남을 두었는데 사자(嗣子: 계대의 정통을 받아 잇는 아들을 말함)로 4남 익조 이행리를 삼았으며, 장남 이어선(李於仙)이 바로 우리의 중시조인 안천대군(安川大君)이며 시조의 19세손이 된다.
20세가 도조 이춘, 21세가 환조 이자춘 그리고 22세가 환조대왕의 2남으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인 것이다.
전주이씨의 문중 기록인 《완산실록》에 이린 가족의 행적이 나온다.
『(명종)왕이 대노하여 이린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지금의 함경남도 길주)에 귀양 보냈고, 부인 문씨(문극겸의 딸)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곧 오랑캐의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개경의 대간(臺諫)들이 탄핵하여 경상도 경산(慶山)으로 유배지를 옮기고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