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역(東仁川驛)
동인천은 인천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인천시의 지도를 펴놓고 보면 동인천은 인천 시내의 동쪽이 아니라 정반대인 서쪽에 있다. 인천시가 옛날에 비해 무척 넓어지면서 땅 모양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만도 아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정답은 경인철도 기차역 때문이다.
‘인천역의 동쪽에 있는 곳’이라 해서 ‘동인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따라서 사연은 경인철도 개통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9월18일 인천~노량진간 52.8km의 경인철도가 개통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놓인 것이다.
이 때 이 구간에는 인천, 축현, 우각, 부평, 소사, 오류동, 노량진 등 7개의 역사(驛舍)가 만들어졌다. 그 얼마 뒤 한강철교가 완공됨 에 따라 1900년 7월에는 인천역~서대문역 간에 경 인 철도가 개통된다.
이 철도는 당초 모스(James. R. Morse)라는 미국인이 조선 정부로부터 설치 권한을 받아 1897년 3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사 중에 자금난이 심해지고, 철도가 지나는 지역에 땅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과의 갈등도 잦아졌다. 이에 모스는 결국 일본인들이 만든 「경인철도 인수조합」에 설치 권한을 넘겼고, 이 조합이 나머지 공사를 끝냈다. 따라서 역사의 이름을 짓는 것도 일본인들이 주도했는데, 인천 방면 종점역의 이름을 ‘인천역’이라고 붙인 것이다.
이 인천역 일대는 흔히 ‘제물포(濟物浦)’라 불리던 곳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곳에 ‘제물량영(濟物梁營)’이라 불리던 수군(水軍)기지가 있었고, 제물포는 그 관할에 들어있는 작은 포구였던 것이다. (→‘제물포’에 대해서는 미추홀구 ‘제물포’ 편 참고)
따라서 이곳에 만든 역의 이름은 당연히 ‘제물포역’ 이 됐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곳에 인천역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당시 이곳을 비롯한 개항장(開港場) 일대가 인천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에 간다고 하면 대부분 이곳으로 올 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내리면 인천의 중심지에 온 것임을 승객들이 잘 알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는 말이다.
이와는 다르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인천을 비롯한 우리나라 곳곳에서 자기들 멋대로 지역 이름을 바꾸고 뒤섞어놓음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은 일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행위를 시작하는 첫 단계로 이곳에 일부러 제물포역이 아닌 인천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동인천역
어쨌든 이쳐럼 경인철도 개통과 함께 인천역이 생기자 지금의 동인천 일대는 그야말로 ‘인천(역)의 동쪽’인 동인천이 되고 말았다.
당시 동인천에는 지금 동인천역의 전신(前身)이라할 ‘축현역 (杻峴驛)’이 생겼다.
‘축현(杻峴)’은 ‘싸리나무 고개’ 라는 뜻으로 ‘싸리재’라는 이곳의 동네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하지만 사실 싸리나무와는 관계가 없고,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수리’에서 발음이 바뀌어 생긴 이름이다.(→‘싸리재’에 대해서는 중구 ‘싸리재’ 편 참고)
원래 축현역의 위치는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조금 떨어진 전 한국원예협동조합(청과물시장) 자리였으나 190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축현역이 이렇게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은 이곳을 지나는 경인철도의 노선을 직선화(直線化)한 것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그 이전까지 화물은 취급하지 않고 사람만 타고 내렸던 축현역을 새로 크게 짓고, 이때부터 화물도 함께 취급토록 했다. 당시 경인철도는 사람보다 화물 운송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 덕분에 화물까지 취급하게 된 축현역은 그 뒤로 빠르게 커나가 많은 사람과 화물이 이용하는 역이 됐고, 주변도 계속 발전하게 된다.
축현 역은 1926년 에 ‘상인천역 (上仁川驛)’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축현역’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인천에 있는 역인지 잘 몰라서 제때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32년에 인천교육회가 펴낸 「인천향토지(仁川鄕土誌)」에 「역명 개칭(改稱) 이유」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는 글이 이를 알려준다.
“1926년 4월25일 당시 축현역을 상인천역으로 개명(改名)하였다. 이 역은 위치관계상 거의 여객 전문역 이어서 먼 곳에서 인천으로 오는 여객은 옛 이름인 축현역이 그 소재가 인천부내(仁川府內)에 있는 것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축현역에서 내려야 하는 여객이 인천역까지 가서 내리는 사례가 빈번해 여러 불편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역 이름의 개정 필요성을 말하게 되었고, 주민들 또한 그 번영 정책상 촉진운동의 일환으로 부(府) 내의 각 정(町:지금의 동) 총대표 전원의 조인을 얻어 철도당극에 요청하여 개명 쪽으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당국도 또한 사정을 잘 알아 개명에 동의하고 인천상업 회의소에 새로운 역 이름의 선정을 맡겼다. 이에 회의소는 심의 결과 동인천이라고 하도록 적당한 뜻을 답신했다. 그리고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 매일신문사는 이것과 때를 같이 하여 현상모집 광고로 널리 세상 일반에 새로운 역명을 모집했던 터였는데, 갑자기 현재 명칭인 상인천역이 최고점으로 당선되었다. 당국은 빈의(民意)를 존중해서 개칭 역명을 상인천역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1926년 축현역은 상인천역으로 바뀌었고, 이에 대응해 지금의 인천역은 ‘하인천역 (下仁川驛)’으로도 불렸다. ‘위〈上〉 인천역’과 ‘아래〈下〉 인천역’이 된 것이다.
상인천역은 광복 뒤인 1947년 8월 다시 축현역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리고 1955년 7월에는 이 축현역이 ‘동인천역’으로 바뀌어 드디어 지금의 동인천역이 탄생한다. 동인천역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에 대해 1955년 6월9일자 「인천신보(仁川新報)」는 이렇게 전한다.
“(오는 7월 1 일부터는) 축현역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 있는 역명으로서 한자음(漢字音)과 국문으로써 구별하기 곤란한 역명과, 그 지방과 연관이 없는 명칭이며 또한 전국 각 지선(支線) 등의 명칭도 동 지선의 종착역(終着驛)의 역명을 붙이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천에서는 ‘축현역’을 동인천 역 (東仁川驛)으로, ‘수인역 (水仁驛)’을 남인천역 (南仁천驛)으로 개칭케 된 것인데, 이것은 이미 철도국장 회의에서 결정을 보았던 것으로 교통부장관 명의의 통첩이 인천상공회의소에 전달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7월1 일부터 없어질 ‘축현’이란 명칭은 구(舊) 한국 시대에 현재의 용동 일대를 지칭하던 동명(洞名)으로, 일정(日政) 때에 상인천(上仁川)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8·15 이후에 ‘축현’으로 되었던 것이며, 이번에 부르기 쉬운 명칭으로 ‘동인천역’이 된 것이다.”
1926년에 “사람들이 인천에 있는 역인지 알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상인천역’으로 바뀐 ‘축현역’이 이번에는 “한자(漢字)와 국문(한글)으로 구별하기 곤란하다”는 이유에서 다시 동인천역으로 바뀐 것이다. “한자음과 국문으로써 구별키 곤란하다”라는 말은 ‘축현(杻峴)’이라는 한자가 어려워서 많은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어디인지 잘 모른다는 얘기로 보인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보면 동인천역은 인천역의 동쪽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동인천에 있는 역이기 때문에 동인천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꿔 말하면, 동인천역이라는 역 이름이 생기기 전부터 사람들이 인천역의 동쪽인 이곳을 동인천이라 부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앞서 본 것처럼 인천상업회의소가 심의를 거쳐 축현역의 이름을 ‘동인천역’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했던 사실에서도 얄 수가 있다. 이곳을 사람들이 흔히 ‘동인천’이라 부르고 있으니까 역 이름을 ‘동인천역’이라 하자고 결정했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동인천역이 문을 열기 4년 전인 1951년 8월 이곳에 동인천중학교가 문을 열고, 1년 전인 1954년에는 동인천세무서가 신설된 것으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당시 사람들이 이곳을 흔히 ‘동인천’이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나 세무서의 이름에 동인천이 붙은 것이고, 나중에 역 이름에도 붙게 된 것이다.
인현동
한펀 동인천역이 있는 지금의 ‘동인천동(東仁川洞)은 1998년 11월에 생겼다.
그 이전에는 ‘인현동(仁峴洞)’이었다. 그러다가 인천시가 인구가 적은 동들을 묶어 하나의 동으로 만드는 행정구역 통폐합 방침에 따라 인근의 내경동(內京洞)과 인현동을 합쳐 새로 동인천동이라는 행정동을 만든 것이다.
'‘인현동’은 1883년 인천항이 개항(開港〉을 한 뒤 일본인들이 차츰 밀고들어와 우리나라 사람들을 밀어내고 그들의 마을로 만든 곳이라고 한다. 이어 1914년 일본인들은 이곳에 일본식으로 ‘용강정(龍岡町)’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岡(강)’은 고개나 언덕을 이르는 글자이니, 용강정이란 이 동네에 있는 용동고개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용강정보다 흔히 ‘축현’이나 ‘싸리재’ 라는 이름으로 이 동네를 부르곤 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이 동네는 인현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인현은 ‘인천〈仁〉의 가운데에 있는 고개〈峴〉’ 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 하는데, 이 고개는 물론 싸리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