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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가. 빳타나와 일체지
일상생활을 할 때 나타나는 몸과 마음에서 생기는 현상의 조건들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비담마의 일곱 번째 책인 『빳타나(24조건)』1*에 기술되어 있다. 깨달은 날 밤에 부처님께서는 현상의 모든 조건을 꿰뚫어 보시고, 연기와 중생이 윤회하는 조건들과 이러한 원인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숙고하셨다. 『앗타살리니』2*의 서문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네 번째 주에 북서쪽에 있는 보배궁전에 앉아서, 아비담마를 숙고하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비담마는 나중에 일곱 가지 책3*으로 편집되었다.
1* 빳타나(Paṭṭhāna): 24조건. 발취론(發趣論). Conditional Relations. “조건 관계” 혹은 “상호의존”으로 번역한다.
2* 앗타살리니(Atthasālinī): 아비담마의 첫 번째 책인 담마상가니(法集論)의 주석서.
3* 일곱 가지 책 및 그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ī, 法集論): 실재법(빠라맛타)을 2개씩, 3개씩, 4개씩 혹은 5개씩 묶어서 자세히 설명.
위방가(Vibhaṅga, 分別論): 각각의 실재를 아주 자세하게 분별해서 설명.
다뚜까타(Dhātukathā, 界論): 요소에 관한 가르침. 오온, 12처, 18계, 4성제의 범주로 나누어 설명.
뿍갈라빤냣띠(Puggalapaññatti, 人施設論): 여러 가지 개념(빤냣띠)법을 자세하게 설명.
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 여러 가지 견해를 설명.
야마까(Yamaka, 雙論): 2개씩 설명.
빳타나(Paṭṭhāna, 發趣論): 조건(원인)과 조건의 결과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
『담마상가니』를 숙고할 때에는 부처님의 몸에서 빛이 나오지 않았으며, 그 다음의 다섯 가지 아비담마 책들을 숙고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빳타나』의 뿌리 조건, 대상 조건 등의 24가지 조건의 보편적인 인과 관계를 숙고하시기 시작하자, 부처님의 일체지가 드러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마치 띠미라띠삥갈라4*는 깊이가 84,000요자나인 대양에서만 살 수 있는 것처럼, 부처님의 일체지는 『빳타나』에서만 발휘될 기회를 가진다. 일체지로 미묘하고 심오한 법을 숙고하실 때, 부처님의 몸으로부터 파란색, 황금색, 붉은색, 흰색, 황갈색의 빛 그리고 번쩍이는 빛이 방사되었다.
4* Timirati-piṅgala. Timirati-miṅgala라고도 함. 거대한 바닷물고기. 고래.
24조건에 대한 가르침은 심오하고 『빳타나』를 읽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적어도 여러 가지 조건들을 공부하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기 시작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전에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추론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했었다. 삶의 근원이나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숙고했을 수도 있고, 원인과 결과를 살아가면서 생기는 사건들과 관련지어서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삶의 현상의 진정한 조건들을 꿰뚫어 보지는 못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적 즉 궁극적인 의미에서 진리(실재)를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치셨다. 관습적 의미에서의 실재와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재의 차이를 모른다면 『빳타나』를 이해할 수 없다. 몸이나 마음은 관습적인 의미에서는 실재이지만, 궁극적 의미에서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몸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조건이 되는 요소들에 의해서 생겼다가 즉시 사라지는 여러 가지 실재들의 일시적인 조합들이다. 그것들은 또 다시 사라지는 새로운 실재들에 의해서 계승되며, 삶은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몸, 마음, 사람이나 중생은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나마. 마음과 마음부수)과 물질(루빠)이 궁극적 의미에서의 실재이지만, 그것들은 단순히 지나가는 현상이다.
궁극적 진리는 추상적이지 않다. 빠알리어로 “빠라맛타 담마5*”라는 궁극적 실재들은 모두 변할 수 없는 그것들 각각의 특성이 있다. 그 명칭은 바뀔 수 있지만, 특성은 바뀌지 않는다. 안식(眼識. 눈 의식)은 궁극적 실재이며, 눈을 통해서 나타난 형색을 경험한다. 안식은 모든 사람에게 실재이며, 그 자체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성냄은 그 자체의 특성이 있고, 뭐라고 부르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실재이다. 눈, 귀, 코, 혀, 몸이나 의문(意門)을 통해서 궁극적 실재들이 나타나면, 그것들은 직접 경험될 수 있다. 실재들은 생길 만한 적절한 조건들에 의해서 생긴다.
5* paramattha dhamma. Ultimate reality. 실재법(實在法). 여기에는 마음, 마음부수, 물질, 열반 모두 네 가지가 있다.
『빳타나』에는 24가지 조건들이 열거되어 있다. 이것들을 이해하려면 이 24가지 조건들에 포함된 실재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아비담마의 첫 번째 책인 『담마상가니』는 모든 종류의 마음(찟따)들6*, 그리고 마음과 함께 생기는 마음부수(쩨따시까)들7*, 그리고 모든 물질들에8* 대한 분석적인 해설서이다.
『담마상가니』는 어느 마음부수가 어느 마음과 함께 생기는지 설명한다. 한순간에는 단 하나의 마음만 존재하지만, 각각 자체의 기능을 수행하는 몇 개의 마음부수들이 그 마음과 동시에 함께 생긴다.9* 『담마상가니』는 어느 물질들이 무리 지어서 함께 생기는지 그리고 물질들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인 업, 마음, 온도, 음식도 설명하지만, 다른 형태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술하지 않는다.
6* 마음(citta, 찟따, 의식, consciousness)에는 89가지 혹은 121가지가 있다. 첨부 1. “마음” 참조.
7* 마음부수(cetasika, 쩨따시까)에는 52가지가 있다. 첨부 2. “마음부수” 참조.
8* 물질(rūpa, 루빠)에는 28가지가 있다. 첨부 3. “물질의 개요” 참조.
9* 첨부 4. “마음-마음부수의 자세한 도표”는 어떤 마음에 어떤 마음부수가 결합하는지 보여준다.
『빳타나』는 현상 간의 가능한 관계 모두를 상세하게 설명한다.10* 우리의 삶에서 생기는 모든 실재는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방법으로 작용하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동시에 발생해야만 생길 수 있다.
10*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3", (XVII 101-272), 초기불전연구원, 2004, 76-152쪽 참조.
이식(귀 의식)은 귀에 와서 부딪치는 소리에 의해서 조건 지어진다. 소리와 귀는 모두 물질이고, 이것들도 자체의 조건들로 말미암아 생긴 다음에 사라지는 물질들이다. 그리하여 물질들에게 조건이 되는 실재들이 오래가지 못하므로, 그것들을 조건으로 해서 생긴 이식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조건 따라 생긴 실재들은 모두 아주 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실재들을 통제할 수 있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각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는가? 손을 움직이거나 걷거나 울거나 웃거나 집착하거나 걱정할 때, 그러한 순간들이 생기게끔 하는 조건들이 있다.
『빳타나』는 우리의 행동이 생기게끔 하는 깊이 숨어있는 동기들, 그리고 번뇌가 생기게끔 하는 조건들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는다. 그것은 선(善, 꾸살라)이 불선(不善, 아꾸살라)한 마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선한 행위인 보시로 말미암아 불선한 실재들인 탐욕, 사견(邪見)이나 자만이 생길 수 있다.
『빳타나』는 불선법이 선법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도 설명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불선법을 통찰지로 숙고할 때이다. 이것은 자주 간과되는 아주 중요한 핵심이다. 불선법이 사띠와11* 바른 견해의12*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바른 도(道)는 계발될 수 없다.
11* 사띠(sati): mindfulness, 알아차림, 마음챙김, 기억, 마음 깨어 있음, 마음을 대상에 붙임, 주시, 주목, 관찰, 새김, 수의(守意), 염(念)라고도 번역한다. 선심과는 언제나 함께 생기는 19가지 아름다운 마음부수(첨부 2 참조) 중의 하나이다. 사띠는 지금 현재 생기고 있는 대상(정신과 물질)에 마음을 밀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사띠하면 대상에 사띠가 확립되고, 찰나삼매가 생긴다. 그러면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무상 고 무아로 보는 위빳사나 지혜가 생긴다. 그 지혜가 정점에 도달하면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출세간 지혜가 생겨서 깨닫게 된다. 그래서 대념처경에서 사띠 확립이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법문한 것이다.
12* 바른 견해: 정견(正見). 바른 지혜. 바른 이해. right understanding.
『빳타나』에 나열된 여러 가지 분류들이 처음 보기에는 무미건조하고 부담스러운 것 같겠지만, 신중하게 고려해 보면 그것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도중에 나타나는 실재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비담마를 공부해서 그 지식을 우리 자신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지고 재미있을 것이다. 조건들이 다르므로 선심과 불선심이 생긴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실재들과 그 조건들에 대해 상세하게 아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이 적어지면 이익이 된다. 번뇌들은 즉각 근절될 수 없고, 슬픔과 걱정과 좌절감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재들이 그것들 자체의 조건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불가능한 것을 하려는 성향 즉 조건들로 말미암아 생긴 것을, 바꾸거나 통제하려는 성향이 줄어들 것이다. 보다 잘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덜 괴로워하고 더욱 잘 참게 된다.
『빳타나』는 지금 생기고 있는 선법과 불선법이, 어떻게 미래에 선법과 불선법이 생길 조건이 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모든 마음은 하나의 마음이 생기고 사라지자마자 즉시 그 다음 마음이 뒤따라 생긴다. 그러므로 선하거나 불선한 성향들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축적될 수 있다.
지금 생기고 사라지지만 계속 축적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고, 점점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실재들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계발하고, 나아가서는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다. 『빳타나』를 공부하면 모든 좋은 성품들과 함께 지혜가 계발되는 방향으로 우리 자신이 고무된다.
물질이 한 번 생멸할 때 17개의 마음순간들이 지나간다는 것을 배워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몇 개의 마음순간이 지나갔는지 결코 셀 수 없다. 그러나 물질의 존속 기간이 길다는 것에 대한 지식은 물질이 마음보다 오래감을 알게 해 줄 것이다.13*
13* 눈 한번 깜빡하는 동안 1조개 이상의 마음순간들이 생멸한다고 한다. 멤 틴 몬 지음, 김종수 옮김, 『체계적으로 배우는 붓다 아비담마』, 불광출판사, 2016, 177쪽 참조.
물질은 생기는 순간에는 약하지만 일단 생긴 다음에는 마음을 생기게 하는 조건이 된다. 한 개의 물질은 마음보다 오래가기 때문에 여러 개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조건이 된다. 예를 들면, 감각대상인 물질(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은 오문인식과정에서 생기는 일련의 마음들이 경험하는 대상이 됨으로써, 그 마음들에 대하여 대상 조건으로 조건이 된다.14*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인 물질들은, 생성되는 장소인 토대가 됨으로써 마음의 조건이 된다. 그런 식으로 물질과 마음의 존속기간에 대한 지식은 그것들의 관계를 분명하게 설명한다.
14* 첨부 5. “오문인식과정과 의문인식과정의 마음들” 참조.
아비담마와 경장과 율장은,15* 사견을 비롯한 모든 번뇌의 근절이라는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빳타나』를 공부할 때에도 그 목표를 회상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직접 24가지 조건들을16* 가르치셨는지 의심한다. 그들은 왜 조건들을 경전에서 가르치지 않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15* 아비담마(論藏)는 42,000법문인데 비하여, 경장(經臟)과 율장(律藏)은 각각 21,000법문이다. 즉 84,000 법문의 반이 아비담마이다. Dr. Mehm Tin Mon, 『The Essence of Buddha Abhidhamma』, Mya Mon Yadanar Publication, Yangon, Myanmar, 1995, 2-3쪽 참조.
16* 첨부 6. “24가지 조건” 참조.
조건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다른 가르침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선정의 요소들, 도 요소들, 지배 조건의 요소들과 그것들과 함께 생기는 실재들에 대해서 경전에 기술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빳타나』에 설명된 24가지 조건들에 속한다.
존재가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게 하는 조건인 요소들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빠띳짜사뭅빠다), 그리고 그 윤회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요소들도 경전의 모든 부분에서 발견된다. 연기의 가르침은 빳타나의 가르침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연기는 빳타나에서 가르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조건에 대한 지식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조건의 여러 가지 형태들을 완전히 고찰해야만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야만 빳타나의 내용이 진리에 적합한지 아닌지 스스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A. D. 5세기 초 스리랑카의 위대한 주석가인 붓다고사가 그전에 있던 주석서들을 편집해서 만든 『청정도론(위숫디막가)』에도 조건들이 설명되어 있다.
불교는 점점 쇠퇴할 것이고 불교 경전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주석서들은 말하고 있다. 아비담마 특히 『빳타나』는 가장 먼저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빳타나』는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조건들에 대한 이론적 지식을 얻는 것이 『빳타나』의 목적이 아니다. 단순히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는 조건들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빳타나는 자아가 없다는 진리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 때문에 팔정도를 계발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문과 마노의 문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실재의 직접적인 이해를 계발하도록 우리를 고무시킬 것이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이해가 통찰지의 두 번째 단계인17* 조건파악의 지혜까지 계발되면, 실재들이 조건 지어진 것임을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조건들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면, 정신과 물질에 대한 사띠를 통제할 수 있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행을 바르게 하도록 빳타나가 도와줄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속되도록 촉진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팔정도의 바른 실천이다.
17*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인 통찰지(insight, 위빳사나 지혜)는, 깨달음을 성취할 때 있는 그대로 실재들이 보일 때까지 몇 개의 단계를 거치며 계발된다. 첫 번째 단계인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를 깨닫기 전에는 두 번째 단계(“조건파악의 지혜”)를 깨달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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