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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걸에 핀 꽃
2014 신춘문예 매일신문 당선작 김옥매
뒷산에 올랐다. 고라니 뜀박질에 바짝 언 할미꽃이 겨우 숨을 고르는 고갯길, 상수리 잎 성긴 그늘이연신 산길을 쓸어댄다. 남실바람에 몸을 푼 송화는 구름과 비를 찾아 허공을 탐색한다. 정상에 서니 소나무 등걸 하나가 눈으로 들어온다. 모진 풍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그 남루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가슴 깊은 곳에서 신산한 바람이 인다. 생명의 끈을 놓아 버려서일까? 수런대는 숲의 기지개에 미동도않는다. 드러난 뿌리는 소임을 다한 듯 허물어져 간다.
한때는 푸른 꿈을 꾸며 청춘을 불살랐겠지. 쭉쭉 뻗은 가지는 새들을 불러들여 생명을 보듬었을 거야.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젖은 땀방울 식혀주기도 했으리라. 그 영광된 날이 꿈인 듯 지나가 버린 허망함을 어찌 견딜까.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으리라. ‘그래, 원 없이 꽃피워 보아라!’ 뿌리째 뽑아 집으로 가져왔다. 허물어져 가는 몸뚱이에 착생식물인 풍란을 심어 주었다.
이른 아침, 정체 모를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자신이 표시한 영역을 확인하는 들짐승처럼 근원을 찾아이리저리 코를 실룩거린다. 베란다가 가까울수록 짙어지는 향기, 창문을 여는 순간 향수병을 쏟은 듯 뿜어져 나오는 내음에 정신이 아찔하다. 날름 내민 꽃잎 사이로 살포시 발산하는 우윳빛 향기, 나뭇등걸이 품은 풍란이 주범이다. 꽃을 일으켜 세웠다. 곱게도 키웠다. 온기 한 점 없는 빈 가슴 어디에 힘이 남아 있었을까. 더는 내어줄 게 없었던 초라한 밑동, 그의 봄은 향기로 일어난다.
숲의 편견은 일흔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더는 나무로 봐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푸른 마음은 서슬의 톱날에 무참히 잘렸다. 늘 베푸는 것에 익숙한 삶이었다. 다섯 자식을 건사하며 퍼주기만 했던 사랑이었다. 이제 더는 줄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나. 그의 마음은 첫서리에 내려앉은 나뭇잎처럼 무너진다. 그보다 더한 것은 오랫동안 몸에 밴 일이 순간에 없어진 허탈감이었으리라. 앞만 보고 살아온 당신의 인생이 등걸처럼 허물어져 간다.
아이들의 고운 눈망울이 별똥별처럼 떨어지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조롱조롱 매달린 무게가 천근만근이 되었으리라. 농사로는 초롱초롱한 별빛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 얼마 되지 않은 땅뙈기를 정리하고 고향을 떠나신 아버지. 험한 골짜기의 쓸모없는 논은 아무도 사려는 이가 없어 남의 손에 맡겼다. 어쩌면 애써 팔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평초처럼 떠돌다 섬으로 남겨둔 그곳에 이르러 쉬고 싶었을까. 고향에 든든한 뿌리를 내려두고 어디에서 든 흔들림 없는 삶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살이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를 바라는 치유의 땅을원했을 수도 있겠다.
고향에 봄이 왔다. 복숭아꽃들이 속살대는 언덕 아래 서 마지기의 다랑논이 나직이 앉았다. 보리밭 이랑에 몸을 걸친 할머니, 그 뒤로 투덜투덜 밭고랑만 세는 내가 보인다. 새하얀 다리에 거머리를 떼어내며 모를 찌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하다.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소 이끄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밤숲을 적시던 개울은 쉼 없이 흘렀다. 뒷걸음치던 가재는 사라지고 세월도 휭 지나가 버렸다. 남의 손에서 서른 해를 돌고 돌아 다시 찾은 땅, 그것은 아버지의 풍란이었다.
도시의 골목을 서성이던 발걸음은 깃털 같은 날개를 달고 흙으로 향한다. 정을 느낄 새도 없이 떠나보낸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땅. 홀어미로 노심초사하며 키워 오신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서린 요람의 땅. 두 분의 땀 냄새가 밴 그 아득한 언저리에 앉은 아버지. 과일나무 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또르르 당신의 눈가에 떨어진다.
등걸보다 건조하던 아버지의 얼굴에 다시 꽃이 피기 시작했다. 평생을 업으로 잡았던 망치가 아버지의 손에서 가볍게 춤을 춘다. 손끝 매운 솜씨로 작은 쉼터를 지었다. 이랑마다 아버지의 푸른 꿈이 새록새록 자란다. 주렁주렁 열린 과일이 당신의 땀방울을 먹고 쌔근쌔근 자란다. 나뭇가지로 재잘재잘 자식들이 모여들었다.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아버지. 숲에서 밀려난 아버지는 이제 더는 숲을 꿈꾸지 않는다. 푸른 마음은 어디에서나 키울 수 있으니까.
복숭아 자두 꽃이 내려앉은 개울물에 발을 담근다. 두 발 모아 밤송이 가르던 추억 한 자락이 여울을 따라 흐른다. 입안에 텁텁한 밤 껍질이 씹힌다. 가시투성이로 멍들었던 개울은 이제 꽃 그림자를 안았다. 가시밭길 인생의 끝에서 다시 꽃 피우는 법을 터득하신 내 아버지처럼.
감나무 잎을 흔들며 산들바람이 분다. 도미노처럼 스르르 창틈을 뚫고 들어와 풍란의 향주머니를 쓰러뜨린다. 아버지의 땀 냄새인 듯 달콤하다. 그 향기에 취해 눈을 감으면 어느새 아버지의 뜰에 닿아 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이랑 위에 앉은 아버지. 내 아이의 아이들이 그 뒤에서 이랑을 세고 있다. 아득한 그날의 나처럼.
심사평
꼭 필요한 만큼의 언어, 문장 구성·이야기 풀어가는 솜씨 남달라
신춘문예는 ‘작가의 꿈’을 실현하는 관문이다. 마땅히 치열한 문장 수련과 문학을 향한 열정이 작품 속에녹아 있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최소한 수필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조건, 다시 말해서 낱말의 부림이나 문장의 구성, 주제의 설정과 형상화, 그리고 사람살이의 지혜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 거기다 신인다운 참신성을 겸비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신변잡기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응모작이 태반이었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하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타인의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주체 밖에 존재하는 사물이나 현상에 관해 서술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작가 개인의 자잘한 신변사를 글감으로 삼는데, 자칫하면 무늬 없는 평범한 작품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외당’, ‘순수의 계절’, ‘피아노가 있던 자리’, ‘석곡’ 같은 작품도 예외가 아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남편이나 아이들에관한 이야기, 또는 사물에 관한 보편적인 현상을 평범하게 나열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 ‘외당’, ‘순수의 계절’, ‘피아노가 있던 자리’, ‘등걸에 핀 꽃’, ‘석곡’을 놓고 거듭해서 읽고 토론하였다. 그 가운데 한 편을 가려 뽑는 작업은 힘들면서도 즐거운 일이었다. 고심 끝에 문학적 품격이 돋보이는 ‘등걸에 핀 꽃’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등걸에 핀 꽃’은 뒷산에 있는 소나무 등걸에서 착상된 작품이다.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 등걸을 집안에 들여놓고 거기다 풍란을 심는다. 어느 날 그 풍란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가족의 살아온 나날들을 되돌아본다. 고향을 떠나 도시의 골목을 서성이던 고단한 삶,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환하게 웃음을 되찾은 가족들의 모습을 맛깔스럽게 풀어낸다.
낱말의 부림이나 문장의 구성이 탄탄하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부족할 것도 넘칠 것도 없이 필요한 만큼의 언어가 사용되었다. 읽고 나면 뒷맛이 삼빡하다. 당선,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만하지 말고 정진하여 꽃을 활짝 피우기 바란다.
백정혜(수필가)ㆍ김종욱(수필가)
뜨개질
2014 신춘문예 전북일보 당선작 한경희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했다.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갇혀 온 방을 떠다닌다. 내 유년의 엄마가 햇빛 드는 창가 쪽에 앉아 뜨개질을 할 때도 그랬다.
지는 엄마 손끝에서 머리까지 이리저리 부유했다. 엄마는 해가 떨어질 때가 돼서야 숙인 고개를 들었다. 뜨개질을 멈추면 엄마 주변에 갇혀있던 먼지도 풀려났다.
책상 후미진 곳에 쌓인 먼지가 보인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데로 무늬가 새겨진다. 그 무늬에는 어떤 과거가 갇혔을까. 밤사이 풀려난 먼지는 내 낙서 위에 고요로 덮였다.
는 목이 유난히 길고 추워 보였다. 나에게 여섯 살 때 헤어진 엄마 이야기를 했다. 내 손으로 감쌀 수 없는 그의 목에 꼭 맞는 목도리를 뜨기로 했다. 내가 뜬 목도리가 그의 목을 데워줄 생각을 하면 내 가슴이 훈훈해졌다. 절로 손이 빨라졌다.
벌집무늬는 난해하다. 잠시라도 정신을 팔면 무늬가 흐트러진다. 틀린 코를 풀어 다시 바늘대에 끼우기를 반복하며 마지막 코를 마무리했다. 목도리를 내 앞자락에 펼쳐보았다.
엄마는 뜨개질 도중에 간간이 나를 불렀다. 미완의 뜨개옷을 내 가슴에 대어보며 길이를 가늠했다. 한 코로 시작한 스웨터는 날마다 옷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내가 백 점을 맞아 온 날이었다.
“아이고, 우리 딸 잘했네. 일주일만 기다려.”
엄마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엄마는 계획한 일주일을 다 채우지 않았다. 이틀 먼저 내 옷은 완성되었다. 내게 새 스웨터를 입히며 함박웃음을 거두지 못하던 엄마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엄마를 생각하다 벌집무늬가 흐트러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불러 세우고 싶다. 목도리로 그의 목을 폭 감싸고 싶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며 웃는 모습이다. ‘넌 참 좋은 내 친구야.’ 그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감은 눈 속에서만 또렷한 그다. 눈을 뜨면 이내 사라지는 그.
내 목에 목도리를 둘러보았다. 길이는 짧고 폭이 너무 넓다. 거울 앞의 내가 목에 깁스를 한 것 같다. 좀 더 따뜻하라고 두 겹으로 떴더니 너무 뻣뻣했다. 마감한 코를 죄다 풀어 되감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늦가을이 되면 집안을 거두는 일 외에는 늘 뜨개질이었다. 내 옷을 뜨는 엄마 주변을 나는 기분 좋게 맴돌았다. 헐렁한 옷 대신 날선 맵시의 스웨터를 빨리 입어보고 싶었다.
엄마는 항상 조금 큰 새 옷을 사왔다. 키가 클 것을 예비해서다. 하지만 뜨개옷만은 내 몸에 꼭 맞게 떴다. 뜨개옷은 되풀어서 다시 짤 수 있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한 해 동안 자란만큼 내 뜨개옷은 작아져 있었다. 엄마는 작아진 스웨터를 풀어 실뭉치로 감았다. 라면발 같은 실을 끓는 주전자 뚜껑에 끼워 주둥이로 뽑아냈다. 스팀을 받은 털실은 다시 살아 곧게 펴진다. 실뭉치를 풀어주는 건 내 몫이었다.
꽈배기 무늬 유행이 벌집무늬로 바뀌면 내 스웨터는 또 풀렸다. 유행에 쳐진 털옷은 입어 본 적이 없다.
실을 펴는 주전자의 뜨거운 김은 엄마의 가슴에 고인 한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굽이굽이 마음속에 쌓인 한숨은 무엇으로 곧게 펼까.
다시 떴던 목도리가 완성되었다.
“그냥 심심해서 떠 봤어. 실뭉치가 굴러 다니 길래……”
그의 덤덤한 표정이 맹꽁이 같다. 그래도 나는 추운 날 항시 그의 목에 감겨있기를, 그리고 잠시라도 내 생각을 하며 목에 두르기를 바랐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목도리 올올에 담았다면 거짓일까.
그날 전화선을 타고 온 그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무섭도록 쿵쾅 찧었다. 그가 긴 여행을 갔다 온 후 처음으로 넘어 온 전화 목소리였다. 즐거운 긴장이 몰려와 내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걸 느꼈다. 반가운 김에 내 응답이 떨렸나보다.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들었니?”
“아니 그냥. 저…….”
“아, 그래. 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 그 친구 전화번호 바뀌었더라. 네가 친하니 알 것 같아서……”
“……으응……”
내 심장은 이내 끝을 모르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친구의 새 번호를 더듬더듬 알려주었다.
며칠 후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 사람이 ‘고백을 했다.’고 설레는 목소리였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내 눈에는 뭍사람들 속에서 그만 보였다. 그가 나에게 건넨 말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다가왔었다. 나는 내 마음의 방 속에 그의 말들을 꽁꽁 가두고 수시로 꺼내어 들었다.
를 알고부터 무의미했던 내 삶에는 생기가 돌았었다. 의미가 커질수록 그의 방도 커져갔다. 그 방에 푸른 물이 점점 차오르더니 넘실대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때부터였다. 그리움이란 당의정이 내 입 속에 들어온 것은. 달달한 맛에 빠져들었다가 그 쓰디쓴 약의 속살에 치를 떨곤 했다. 다시 뱉고 싶었지만 이미 내 속은 달고 쓴 맛으로 꽉 차 있었다.
그는 전화 이후로도 나를 보면 그전과 똑같이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내 속의 모든 것들을 금방 비우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는데…….
나는 대바늘이 아닌 코바늘로 자동차 방석을 뜨기로 했다. 엄마에게 일부러 복잡한 무늬를 부탁했던 내 마음을 그는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너무 어려운 무늬였다. 1분 1초라도 설사 그게 그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면 뜬 만큼 다시 풀어야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였을까. 한 줄이 완성되기도 전에 무늬는 흩어졌다. 생각의 조그만 포말은 파도가 되어 어느새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한참을 허우적거리면서도 손가락이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나는 자동인형처럼 코를 떴다. 절정에 이른 파도가 힘을 다하여 사구(砂丘)를 밀쳐 내고는 바다로 되돌아갔다. 그러면 또 내 손에는 엉망으로 뒤틀려버린 무늬만 남아 있었다.
방석을 다 완성하기까지 나는 수 없이 풀고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해가 져도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엄마의 뜨게 무늬는 사정없이 흩어졌다. 아빠는 술 속이 좋지 않았다. 술을 마신 날은 집안이 시끄러웠다. 엄마는 돌부처처럼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날의 엄마는 굳은 표정으로 뜨개질만 하였다. 한숨소리에 실을 엮었다.
엄마는 뜨개질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뜨개질을 했다는 걸 나는 방석을 뜨면서 깨달았다. 털실과 바늘대와 손놀림의 반복, 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끼어들면 스웨터고 방석이고 무늬는 엉망이 된다.
코와 그 옆의 코가 맞닿아 무늬가 되기까지 나는 실을 짜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짜고 있었다. 점점 머릿속은 비워지고 그에 대한 감정이 다 정리될 때쯤 내 생각의 너비만큼 큰 방석이 완성되었다.
나는 방석을 그의 차에 깔아주었다. 비로소 그를 향한 내 마음도 실려 보냈다. 그에게 방석을 준 후 열네 번의 봄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그에게 줬던 방석이 낡기도 전에 그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방안의 먼지가 햇빛의 그물망에 걸려 끝없이 떠돈다. 이리저리 부유하다 언제든 내 속에 들어와 뿌옇게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뜨개바늘을 잡을 것이다.
심사평
"한땀 한땀 '뜨개질 구성' 돋보여"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고 했다. 옳은 말이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붓 가는 대로’ 쓰다 보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주관적인 감상이나 관념을 장황하게 나열하기 십상이다. 이야기의 전후맥락을 살피지 않고 신변잡기를 단선적으로 풀어놓기 일쑤다. 읽는 맛을 낸다고 멋스러운 단어를 고르는 일에 집착하기도 한다. 자신이 쓴 글로 읽는 이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어깨동무를 하고 가야 하는데, 제 흥에 도취되어서 멀찍이 앞서가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니 읽는 이는 감동을 얻기 어렵다.
적잖은 공을 들여서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박금아(가명)의 <유산>, 박세정의 <슬픔은 내 삶의 원천>, 허숙영의 <화로>, 윤미애의 <박>, 전성옥의 <가로수의 마지막 여름>, 박시윤의 <빗살무늬토기>, 이정인의 <마당>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그랬다. 이 일곱 편의 수필을 쓴 이들은 하나같이 사물을 바라보는 눈길이 깊고 따뜻하다. 문장력도 웬만큼 갖추었다. 그건 분명 수필가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작품들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삶의 진솔한 얘기가 부족했다.
당선작으로 고른 한경희의 <뜨개질>은 그런 점에서 앞선 일곱 편과 달랐다. 제목 그대로 이 작품의 글감은 ‘뜨개질’이다. 작중화자가 어린 시절에 곁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뜨개질하는 모습과,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위해 손수 뜨개질했던 일을 한 땀 한 땀 ‘뜨개질하듯’ 구성한 점이 돋보였다. 한때 ‘그’를 사랑했던 작중화자의 애잔한 감정에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인고의 시간을 교차시켜서 잘 녹여내었다. 읽는 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를 조금 더 유연한 문장으로 빚어낼 수 있는 능력만 보완한다면 앞으로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맷수쇠
2014 신춘문예 전북도민일보 당선작 정원정
한낮이다. 길가 목 좋은 모퉁이에 벌여놓은 보자기가게(坐商)에 들렀다. 무 하나, 애호박 두 개를 사 들고 쉬엄쉬엄 오는 길에, 어찌나 걸음걸음이 팍팍하던지 길녘 벤치에 앉았다. 맞은 편, 눈부시게 하얀 아파트 한끝에 머문 시월막사리 하늘은 푸른빛이 깊다 못해 왕연(旺然)한 반물빛이다.
지난겨울, 이사한 집의 묵은 때를 벗기느라 힘이 들었다. 그 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정형외과에 가 보았더니, 엑스선 사진을 살펴본 의사 설명인즉 걸어가다 쉬고 싶을 거라며 척추골 네 개가 협착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게, 어느 시인이 어머니 말투를 빌린 시구에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하듯 나도 그랬던가 보다. 척추는 저뭇한 세월에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끈끈한 묵은 정으로 몸 매무시를 지탱해 주었던 걸까.
나는 평소에는 척추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탈이 나고서야 비로소 한평생 직립으로 허릿심을 지탱해 준 척추의 됨됨이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귀한 살붙이임에도 마음 쓰지 못하다니, 내 아둔한 구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 발 건너선 이웃에게야 오죽 무심했겠는가 싶다.
척추한테서 두남받은 고마움에 생각이 머물다 보니,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주변에 척추의 역학적 구조와 닮은 사물들이 눈에 띄었다. 세상 만물은 저 혼자 독립해서 생의 무게를 지탱하는 실체는 없다는 것에 수긍이 갔다.
우연찮게 맷수쇠를 알게 되었다. 맷돌 아래짝 한가운데 박힌 아주 작은 뾰쪽한 쇠를 맷수쇠라 하는데, 제 몸보다 엄청나게 큰 맷돌 몸통을 거리낌 없이 지탱해주는 물건이다. 더욱 맷수쇠는 무생물임에도 사람 사는 품과 닮은 데가 있어 흥미롭다.
맷돌은 암 맷돌, 수 맷돌이 포개져 있다. 윗돌이 밑돌을 암팡스레 껴안고 숨차게 돌고 돌며, 알곡도 무거리도 가루로 잘게 부수고 으깬다. 밑돌과 윗돌은 한속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부드러운 먹을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암 맷돌에는 곡물을 넣는 ‘아가리’도 있고, ‘어처구니’란 맷손도 있다. 맷돌질할 때 그네들도 맷수쇠 못지않게 힘깨나 쓰는 일꾼들이다. 그 연모들도 서로 감싸주고 도우며 갈기, 부수기, 기피 내기를 하며 제구실을 다한다.
거기에는 밑돌 중심부에서 윗돌과 밑돌이 정확히 맞도록 역할을 하는 맷수쇠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맷수쇠는 비록 작은 부품 같아도 중심을 잡고 버티는 데는 시골집 앞마당에 긴 빨랫줄을 받쳐주는 키 큰 간짓대의 몸짓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아주 작은 몸으로 거대한 위 맷돌을 받치고 제자리를 지키는 맷수쇠는 그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성찰하는 사람 같다. 참으로 겉보기보다 내면이 깊다. 어려운 시대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 역시 생색내지 않고 제 서 있을 자리를 알고 행동하지 않던가. 사람도 돌덩이 같은 무거운 짐을 지고 한껏 살아가는 게 태반인데 각기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나의 설 자리를 알고, 내 분수를 알면 거기에 따른 책임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노상 빗먹듯, 실수 덩어리를 몰고 다녔다. 여들없이 감정을 헤집어 뒤변덕스레 어디에고 차분히 마음 기대지 못하고, 거처마저도 어느 이국의 유랑민처럼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느라 더 혼란스러웠다. 새도 가지를 가려서 앉는다는데, 어디에고 안착을 못 하고 방황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길이 없다고 생각했고, 길이 사라져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럴 적엔 인생길이 꼭 그믐칠야처럼 느껴졌다. 황혼의 저물녘까지 잰걸음으로 걸어온 고빗길마다 참 서툴게 살아왔다.
그 사이 척추는 한눈팔 겨를 없이 제자리에서 한세상을 엄살 한번 피우지 않았다. 나는 그 속사정의 경계를 숫제 거니채지 못하고, 그저 불편한 다리 탓만 했다. 그는 뼈마디가 구부스름히 일긋했으련만 말없이 안으로 안으로만 삭혔을 터, 내 유년의 마을 들목에 서 있는 느티나무처럼 비바람이 후려치는 극한의 외로움을 홀로 견뎌냈으리라.
흔히 작고 미미한 것보다는 으리으리한 것에 눈이 간다. 숨겨진 곳에 깊고 아늑한 은혜가 스며있음에도 말이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건 자연과 사람에게서 두남받은 은혜를 서로 나누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하고 혼탁한 세상일지라도 그래도 중심을 잡고 인간의 길을 고뇌하며 양심적으로 번민하는 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 나와 다른 삶과 존재 방식을 존중하고, 서로가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함께하는 따스한 모습은 우리의 위안이고 희망이다. 꽃이 인간의 재주를 제치고 자연의 섭리로 개화의 시기를 알아 자기 몫몫을 펴 가듯 스스로 진정성을 안고 행동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맷수쇠인 것이다.
『무신예찬』에서 작가 데일 맥고원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우주적으로 하찮은 존재다. 공간에서는 한 점에 불과하고 시간에서는 한 찰나에 불과한 헤아릴 길 없이 미미한 존재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에게만은 중요해질 수 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우리 서로에게만은 말이다.”
그렇다. 누구나 이 광대한 우주 속에 단 한 사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다. 그럼에도 혼자만이 아니다. 세상 만물이 나와 무관한 존재가 어디 있던가. 별 탈 없이 반복되는 일상도 알게 모르게 어디선가 도움의 손길이 있다. 내 존재 역시 누군가를 지탱해 주고 있다면, 살아 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인간 삶에서 너와 내가 서로 기대고 받쳐주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그 진실을 맷수쇠는 알고 있었다. 그 가치를 아는 사람도 결코 불의를 보고 눈감지 않았다. 고통을 감수하고 그 사회의 현안을 푸는 일에 함께할 책임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풀 한 포기도 우주의 기운을 받아 존재할진대, 어느 한 생인들 존귀하지 않겠는가. 소풍 전야처럼 가슴 설레는 삶이어도 한 생은 짧다. 살아있음이 감동으로 이어져서 서로의 인연을 귀히 여길 일이다.
심사평
‘존재와 기능 역할에 무신경한 현상 겨냥’
나는 평소에 글을 읽을 때마다 “······. 독자는 여러 사람이다. 따라서 가지가지로 요구한다. 나를 즐겁게 해 달라. 나를 슬프게 해 달라. 나를 감동시켜 달라. 나에게 공상을 일으켜 달라. 나를 포복절도케 하여달라. 나를 전율케 하여달라. 나를 사색하게 하여달라.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소수의 독자 만이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글을 지어 달라고 할 것이다.······.”라는, 모파상의 단편소설 서문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늘도 나는 “당신 자신의 기질에 맞는 최선의 형식으로 무엇이든지 아름다운 글을 지어 달라.”라고 요구하는 독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서 내 앞에 놓인 응모작품 400여 편을 읽었다. 가까스로 30여 편을 골랐고, 그들의 2차 읽기를 통해서 김만년의 ‘헛기침’, 권영애의 ‘여백’, 김옥희의 ‘가객의 노래’, 박금아의 ‘조율사’, 정원정의 ‘맷수쇠’ 등 다섯 편을 어렵사리 선하고 나서야 겨우 한차례 큰 날숨을 쉴 수 있었다.
‘맷수쇠’는 인생살이의 제 국면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멘토로 ‘맷수쇠’의 기능을 차용했다. 스스로의 존재감은 극구 부풀리면서도 그 존재의 기능이며 역할에 무신경한 현대인들을 겨냥하여 공동체에서 분골쇄신하는 자세로 주어진 직분을 다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삶의 모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객관성을 상실한 채 자기 주장만을 강변하는 현 시대상황의 엇박자를 글의 바탕에 깔고 건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사회적 관심과 어떻게라도 대안을 찾아내고자 하는 긍정적 성정에 손뼉을 쳐주고 싶었다.
모두가 놓치기 아까운 대목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특히 정원정의 ‘맷수쇠’가 수필로서의 제반 요건을 구비하고 글월로써 정제 완결하는 필력의 내성에 신뢰가 컸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이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말로 하여서 그것의 절반만 음성언어로 표현을 한다 하여도 연설가 아닌 이 없고, 그 연설가가 한 말의 내용을 반절만큼만 문자언어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작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일설이 있다.
모름지기 기성작가들과 작가 지망생들이 먼저 스스로의 현주소를 세세히 점검하고 반성하고 수정하고 겸허해져야함을 일깨우는 정문일침이라 하겠다.
공숙자<수필가, 대표에세이 동인회 전국회장 / 전북여류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역임>
돌확의 노래
2014 신춘문예 경남신문 당선작 이정인
정중동(靜中動)이다. 빗물 고인 돌확에 하늘빛 젖어드는 사이 흰 구름 살포시 제 몸을 적신다. 잠시 타는 목을 축이던 서산의 해는 긴 밤을 흘리고 사라져간다. 어둠에 빠져버린 웅덩이에서 달은 또 한 번 떠오른다.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돌확의 풍경에는 허허로운 운치의 노래가 흐른다.
돌확은 살아있는 추억의 화석이다. 나보다 먼저 고향집에 생겨나 지금까지 한자리에 망부석처럼 머물러 있다. 시골농가 개조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헐고 고쳐도 돌확은 처음 있던 그대로다. 정들 틈도 없이 빨리 변해가는 시대에 그대로인 모습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돌확을 볼 때마다 잊힌 날들을 재회하는 기분이 든다. 이미 돌확은 무정한 한 물건이 아니다. 고향집에나 내 마음에나 정겨운 한 존재다.
긴 세월 사람의 손길이 머문 것은 오래된 사람이 주는 정감과 다르지 않다. 귀밑머리 새치 같은 푸릇푸릇한 이끼가 돌확을 빙 둘러치고 있다. 늙은 아낙의 축 처진 뒤태처럼 주저앉은 느낌이 드는 것도 세월의 자국이다. 삶의 손때가 하나의 색이 되었다. 세상만물에 청춘이 지나간 흔적이란 비슷하기 마련이다. 돌확은 서서히 자연의 한 풍경으로 녹아들어간다.
좋아진 시절은 자꾸 정든 것을 앗아간다. 눈비 걱정 없이 실내에서 버튼 하나면 해결되는 세상이다. 편리한 전자제품에 익숙해진 생활패턴이 돌확의 몫을 야금야금 빼앗았다. 시골마을을 다녀가는 골동품 수집가들은 뒷방노인처럼 적적하게 세월을 나고 있는 고향집 돌확에다 눈독을 들인다. 가끔 도심 음식점 뜰에 잘 가꾸어둔 조경용 돌확을 볼 때면 정든 시골집을 떠나온 객지살이 신세 같은 괜한 감정을 느낀다.
돌확의 멋은 거친 진솔함이다. 손에 쥔 몽돌로 일일이 찧고 빻는 더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기계가 흉내낼 수 없는 투박한 맛을 자아낸다. 열무김치의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내는 홍고추는 돌확에 짓이겨야 그 모양이 더욱 맛깔스럽다. 특히 툭툭한 들깨토란국을 끓일 때 돌확에다 들깨를 빻으면 고소한 향이 한층 더 진하게 톡톡 터져 나온다. 비록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오히려 성글고 거칠어 재료 고유의 맛과 향이 잘 남아있다.
아무리 좋은 돌확도 혼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동글동글한 몽돌이 있어야 제 몫을 한다. 돌확과 몽돌이 만나 티격태격 살점을 떼어내듯 끊임없이 부딪치지만 깊은 맛은 바로 거기에서 생긴다. 시간이 흐를수록 득득거리는 소리는 점점 순일해지고 뻑뻑한 마찰은 어느덧 리듬을 탄다. 더께조차 매끄러워진 세월 앞에 돌확은 무엇이든 노래로 화답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돌확의 속성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모되면서 서서히 부드러워지듯 사람의 관계 역시 각자의 모난 목소리를 깎아낸 후에야 화음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돌확에서 함께 운명을 만들어가는 부부를 생각한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맞바람처럼 부딪치는 삶 속에서 서로의 아집을 조금씩 허무는 수행이다. 제 목소리 더 크게 내지르는 젊은 날의 기싸움이 늘그막 등 긁어주는 소리로 가는 긴 여정, 부부는 따로 또 같이 인생의 맛을 버무려내는 인연이다.
돌확처럼 더디지만 순박한 멋이 그리운 시대다. 순식간에 곱게 갈아만 버리는 분쇄기처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빠르기만 한 세상이다. 제 속 좀 긁힐지언정 사람 본연의 향기와 연민을 깨우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돌확의 철학이 아쉽다. 삶의 체취가 묻은 물건이 주는 정겨움을 잘 모르는 세대는 손맛도 들기 전에 유행을 좇아간다. 편의와 속도에 치중하는 요즘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일들에서 세월의 향기가 점점 사라져간다.
살아가는 동안 한 사람을 오래도록 곁에 두는 것은 큰 행복이다. 고향집 돌확처럼 묵은 정에 젖어 살던 노부부의 모습이 꿈 같다. 평생 부엌에는 얼씬도 안 하시던 아버지도 들깨토란국만큼은 공을 들여야 제맛이라며 몽돌을 쥐시었다. 자식들 위해 돌확 앞에 앉아 주거니받거니 아옹다옹하던 옛 시간들이 눈에 선하다. 노년의 소소한 정은 돌확과 몽돌이 짝을 이루어 터뜨리는 들깨처럼 알콩달콩 살가웠다.
수없이 부대끼는 만큼 사람은 서로 은근히 닮아가는 구석이 생기는 것 같다. 돌확의 육중한 무게감만 느껴지던 아버지는 서서히 유순해지고 어머니는 되레 무던해지셨다. 언제부턴가 어깨 낮아진 아버지에게서 온화한 어머니가 보였다. 인생의 까칠한 돌확에서 초피처럼 혀끝 싸한 기억도 고추처럼 눈 매운 사연도 함께 견뎌온 부부의 일생, 숱한 우여곡절의 따가운 양념들이 간간한 연륜이 되어 삶의 그림자로 잘 배어들었다. 60년 해로한 노부부는 서로에게 오래된 풍경이 된다.
세월의 풍상은 고풍스러운 빛으로 돌확에 물들어간다. 자연에 잘 어우러지는 그 예스러운 멋 때문인지 최근 부레옥잠이나 수련을 키우는 연못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돌확은 소리를 잃은 대신 생명을 품어 키우는 아름다운 하나의 터전으로 거듭났다. 돌확이 몽돌을 만나 부르던 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가처럼 지나갔구나 싶다. 문득 잊혀가는 그 소리가 그리워지면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인 고향집 돌확이 아른거린다.
늦가을, 돌확의 긴 침묵이 깨어난다. 온 가족이 모여 김장하는 날이면 돌확에서 갈아낸 어머니손맛 들깨토란국이 별미로 등장한다. 울퉁불퉁 어머니 손마디를 닮은 토란을 긁어놓고 돌확에다 들깨를 붓는다. 팔 힘 부치는 어머니를 대신해 몽돌을 쥐었다. 전과 달리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느낌에서 빠져나간 세월을 본다. 몽돌을 쥐는 이 싱거운 행위조차에서도 아버지의 빈자리는 크다. 우묵한 돌확에 먹먹한 그리움 한 줌, 후회 한 움큼을 담는다.
돌확의 울림이 유난히 크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가슴속 밑바닥을 후벼 파는 것 같다. 병석에 계신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내질렀던 부끄러운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꼼짝할 수 없는 돌확처럼 가만히 누워 자식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혼자 힘으로 살아온 양 큰소리치는 딸의 서툰 억지가 아버지 속을 얼마나 긁었을까, 좀처럼 닳을 것 같지 않은 돌확처럼 단단한 아버지도 하고픈 말을 삭이시느라 그 속 얼마나 문드러지셨을까 싶다.
으깨진 들깨에 물을 부으니 서글픈 눈물처럼 질척거린다. 어느 한때의 회상이 뿌옇게 이지러진다. 천주머니에 담아 국물이 숭숭 빠져나올 때까지 볼끈 짠다. 마음에 맴돌던 잔상도 질끈 묶어 걸러낸다. 모든 것들은 머물다 떠나간다. 돌확의 운치가 여백에서 우러나듯 어쩌면 살아가는 일도 비움의 철학인지도 모르겠다.
돌확의 공에 어머니 손맛까지 더해진 토란국 맛은 김장철의 구수한 추억이다. 둘러앉은 식구들의 숟가락 바쁜 손놀림이 걸쭉한 고소함을 더한다. 물컹물컹한 토란에 들깨향이 잘 스며들었다. 고향집에서 만들어 먹는 맛을 똑같이 따라해 보겠다는 야무진 포부가 애당초 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녕 그 비결은 돌확의 비밀에 부친다.
세월도 앗아가지 못하는 것은 돌확의 질박한 정취다. 소리에도 맛이 깃들어 있는 돌확의 오묘한 조화다. 아무래도 해마다 들깨토란국을 졸라야겠다. 자식들 먹일 생각에 어머니 실없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게, 돌확의 소리 가을처럼 깊어가게, 그 삶의 노래 멈추지 않게.
심사평
유려한 문장 솜씨, 독특한 비유법 돋보여
글은, 특히 수필은 문장이 생명이다. 먼저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술술 잘 읽혀져야 한다. 잘 읽혀진다는 것은 문법에 맞는 정확한 문장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신변과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는 글이 수필이고 보면 작위적이 아닌, 가슴으로 써야 할 것이다. 비록 사소하고 평범한 소재일지라도 철학을 동반한 지식과 감흥,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융합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더 큰 공감과 감동을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의 손에 들어온 작품은 200여 편이었으며 대체로 가족사를 다룬 수필이 대부분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회억하며 그리워하는 내용이라든지, 함께 지낼 땐 몰랐으나 직장으로 인해 먼 곳으로 떠난 형제의 끈끈한 정 이야기는 영혼에 잔잔한 울림을 줄 뿐 아니라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가족이 해체되고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해 전전긍긍만 하는 답답한 문장이 전개될 때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수필을 고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 착각한 글도 적지 않았다.
체험한 것을 그대로 적는 것만으로는 수필이 될 수가 없다.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따라서 문학의 향기가 나는 것이다.
문장의 정확성, 구성의 효율성, 주제의 통일성, 작품의 감동성, 소재의 참신성을 염두에 두면서 고른 작품은 ‘달의 시간’, ‘틈’, ‘돌확의 노래’ 등 세 편이었다.
‘달의 시간’은 글쓴이가 성격이 유한 탓인지 문장이 나긋하였다. 흔히 감동이라고 말하는 가벼운 떨림이 있었지만 문장 중의 몇몇 낱말이 어색하게 사용된 흠이 드러났다.
‘틈’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묘사가 돋보였지만 전개의 지나친 작위성, 단락의 구분이 정확하지 못한 점들이 아쉬웠다.
당선작 ‘돌확의 노래’는 비록 관념적인 문장이 몇 군데 있었으나 전면에 흐르는 유려한 문장 솜씨와 독특한 비유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시(詩)에서 함축 상징 비유 압축 리듬을 차용해 오기도 하였다. 주제 설정이나 작품 구성의 유기적 견고성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사건을 끌고 가는 기교도 구성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더 큰 성취를 위한 고뇌의 시간이 이어지기를 빈다.
<심사위원 정목일·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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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