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시집 발문

<A name="[문서의 처음]"></A> 발문                  저 모퉁이 길 돌아서면                              박영희(시인)    1   노동문학과 노동해방문학이 고개를 내밀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절을 불꽃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저기 모퉁이 길을 돌아보니 어쩐지 낯설고 알 수 없는 회한이 묻어난다. 누군가의 빈자리도 몇 보이고 무엇보다 예전의 눈빛들이 아니다. 건널목도 때론 경계가 되는 모양이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겨와 창밖을 내다보니 불꽃들이 진 자리에 풀꽃들이 피어나 있다. 우리는 저 풀꽃을 노래하며 십여 년의 시간을 보내왔던가.   그런데 왜일까. 십여 년 넘게 불리어진 노래가 저 홀로 흐르는 까닭은. 돌고 도는 순환의 연속으로 다가서는 까닭은. 불행하게도 울림을 잃어버렸다. 감동도 사라져버렸다. 갓 스물을 넘긴 청춘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낡은 틀을 부수느라 온몸의 몸짓이건만 십여 년이 넘도록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인들의 노래는 이제 지루하다 못해 진부하다. 눈과 머리로만 읽혀질 뿐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불행한 시절이다. 너와 나의 체온을 잃고서 무슨 노래를 부르랴. 어떤 사랑을 나눌 수 있으랴.   누구는 유연한 대처를 당부한다. 또 누구는 부드러운 직선을 강조한다. 이러한 시절에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그는 유연한 대처와 부드러운 직선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삶의 소유자일까. 그러나 뼈를 깎는 성찰도 너무 오랜 시간 지속되다보면 무덤이 되는 법, 노래를 불러야 할 시인이 사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철학자로 변모해 가는 지금 우리는 그 위험한 경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할 말로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마침내 모래알갱이가 되었을 때 그것이 한낱 자신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저기 저 골목의 처절한 몸부림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늪에서 한달 봉급 육십만원을 손에 쥐고 어린것들과 발버둥쳐대는 저 여인의 탄식은 또 어찌할 것인가.       2   정은호의 첫 시집 『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떠날 사람들 떠나간 빈자리에 작은 돌멩이의 외침이며, 그 끝이 보이지 않아도 저 모퉁이 길을 돌아가면 피어 있을 풀꽃 한 송이다. 그 풀꽃 한 송이와 더불어 어버이가 계시고 아내와 어린것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페인트 벗겨진 정거장 표지판으로 서 있다. 고향 갔다 돌아오는 일요일 저녁 완행열차도 내 마음처럼 힘겹게 고개를 오른다 조심해 가거라 손 흔드는 어머니 눈물 쏟아낼 듯한 그 눈빛 가슴에 내리꽂혀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오늘따라 쉬이 잠들지 못하고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이! 걱정하지 마이소 -「고향 다녀온 날」전문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가 갑자기, 직책이 뭐냐 직장생활 십 년 넘도록 했으모 무슨 직책이 있을 거 아니냐고 묻는다 평생을 다녀도 직책 같은 것 없이 급수만 올라간다고 했건만 직책이 없다는 말에 마냥 섭섭해하신다 -「직책」전문   자신을 낳아준 탯줄의 분신이건만 모성(母性)과 부성(父性)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가난한 살림에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시켜 자식을 객지로 떠나보낸 어머니는 그저 ‘몸조심해 가라’며 눈에 가득 당신의 세월을 담아 아픈 손을 흔드시건만 야속하게도 아버지는 봉급액수도 아닌 직책을 물어오신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장에 들어간 지 벌써 몇 해째인가.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값나가는 애완견도 명함을 내미는 세상에서 대리면 대리, 반장이면 반장, 무슨 직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어찌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랴. 진보가 더불어 사는 세상에 놓인 징검돌이라면 세상 모든 아버지의 바램이란 상승(진급)에 있지 않던가.   시인은 말에 앞서 글로서 모든 걸 대신하는 존재라고 했던가. 시집의 1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어버이를 향한 시인의 애틋함은 실로 아름답고 눈물겹다. 직책이 무어냐고 물어왔던 아버지의 섭섭함도 잠시, ‘공단노동자로 떠나던 그 해에 멸구 먹어 폭삭 주저앉은 벼를 바라보시며 눈시울 붉히시던 아버지’ 곁에 바싹 다가서 있으며「아버지의 농사」, ‘지각하듯 시작한 대학공부가 뭔지 농사철인데도 소설창작론 옆구리에 끼고 교수마저 없는 학습관으로 달려가는 자식의 발걸음이 무겁다’「일요일1」.   우리는 때로 아득한 시절의 그 한 페이지를 위안 삼아 얼키고 설킨 장편의 삶을 한 그루 당산나무로 살기도 하던가! 정은호의 삶에 그와 같은 한 페이지가 존재한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와 공단노동자로 굴러다니는 몸이지만 자신을 버팅기게 한 아버지가 그 중심에 서 계시는 것이다. 지금은 고향에서 비닐 하우스에 고추를 기르시는 아버지 태어나서 딱 한번 도시에서 살던 때 초등학교에 다니던 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덕 밑으로 나 있던 신작로를 따라 아버지 마중을 가곤 했었다 광목수건으로  땀을 훔치시던 아버지는 강바닥 모래를 퍼 올리며 우릴 보고 싱긋이 웃곤 하셨다 그 웃던 모습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위태위태한 이 도시에서 나를 버티게 한다 -「아버지1」전문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을 읽는 듯한 풍경이다. 자신은 뒤로 감춘 채 누이를 앞세운 것도 그렇거니와 어린 자식들의 마중에 강바닥의 모래를 퍼 올리다말고 광목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미소 한 자락을 풀어내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가 아닐 수 없다. 어디 그뿐이랴. 아버지의 그 싱긋한 미소 한 자락이 위태위태한 도심에서 자신을 버팅기게 만들어준  노동의 하루하루가 아닌가. 한 시인의 심성이 아버지를 향하고 있음은 들녘의 알곡들 익어가는 파아란 가을하늘이요 촉촉한 봄날의 흙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시인의 심성에 어머니를 품는다면 그 애절함은 또 어쩌랴. ‘참깨 자루 머리에 이시고 도시로 돈 사러 간 어머니는 오늘도 마산역 번개시장에서 손녀딸을 위해 사탕 봉지 챙기시는 걸 잊지 않고 계시며’「어머니」, ‘개천예술제가 열리던 날 손녀딸에게 줄 거라며 산 곰 인형한테서는 왼종일 들고 다닌 탓에 어머니의 냄새가 풀풀 난다’「곰인형」. 그 할머니를 아빠처럼 손녀딸도 가슴으로 꼭 품은 탓이리라.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는 할머니를 흉내낸다고 야단인 것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 시골 할머니 흉내낸다고 야단이다 고개를 숙이더니 엉거주춤 어깨 들썩 팔은 훨훨 꼽추 춤이다 평생 흙만 파며 살아온 어머니 어쩌다  기분 좋아 추는 춤 딸아이가 본 모양이다 아이는 신이 났고 그걸 지켜보는 아비는 눈시울 붉고 -「아이와 아비」전문   웃고 넘던 고갯길의 막바지에 오르자 콧날이 찡해온다. 한순간, 말문이 막혀버린다. 어머니를 향한 발길처럼 애틋하고 따순 발길이 또 있을까마는 몸조심하라며 손 흔드시던 모습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까닭이다. 아마 시집 1부에서 어버이를 함께 담은「옻칠」은 그래서 그날 저녁 시인의 집 밥상에 보름달로 떠올랐으리라.    3   가난한 어버이와 되는 일이라곤 없는 동생의 아픈 기억들을 일단락 정리한 뒤 2부로 들어서자  정은호의 숨소리는 가빠지기 시작한다. 저편의 서정 몇 조각이라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냉혹한 현실은 그마저 짓밟아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의 터널과도 같은 ‘노동의 새벽’을 지나온 지가 언제인데 노동자의 시련은 이토록 질기단 말인가.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고, 혹여 잘리지나 않을까 노심초사다. 줄을 잘 서야 살아남는 기회주의적 모순들이 노동판에 만연해 있고 출근해보니 동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그는 어디로 자취를 감춘 것일까? 동료들과 삼겹살을 구워놓고 소주잔을 기울여보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다. 밥 따로 국 따로다.    한 울타리 안에서 먹는 한솥밥 분명 똑 같은데 구조조정 있은 뒤 기계 잡은 동료와 땜빵하는 동료 사이에 두텁게 가로놓인 벽 엇나간 마음 이어보자며 뜻 있는 동료들 삼겹살 구워놓고 소주잔 돌려보지만 여전히 따로 국밥 -「따로 국밥」전문   난감한 일이다. 몸뚱이 하나로 밥을 벌고 자식들을 가르치고, 그 몸뚱이 같은 가슴 하나로 소주잔을 비우며 우정을 키워온 동료들 간에 틈이 벌어지고 있다. 보아하니 그 틈은 암담한 현실의 벽이다. 대체 어떤 바람이 강타한 것일까! 뜨겁게 타올랐던 노동의 새벽을 지나오자 전체를 무너뜨릴 시한폭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세계가 하나되는 찬란한 21세기를 코  앞에 두고서였다. 미국의 달러가 바닥이 나자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고 그 타계책으로 칼을 빼든 국가권력이 가장 먼저 내리친 곳은 노동자들의 일터였다. 목구멍으로 밥을 삼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노동력을 잃고 나자 내전(內戰)이 따로 없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어찌 시인이라고 잠자리가 편할 수 있었으랴. I.M.F를 주제로 시 한편 쓰지 않은 시인이 있다면 그건 시인도 아니라며 술잔을 털어넣던 한 시인의 자조는 두고두고 못이 되기도 했다.   정은호도 예외는 아니다. 서먹서먹한 관계를 치유해보고자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여보건만 어렵사리 마련한 술자리는 서먹하다 못해 싸늘할 지경이다. 오늘만큼은 좀 쉬고 싶으나 일요일에도 야근을 들어가야 하고 공단 하늘에 드리워진 먹구름은 걷힐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계속되는 지시에 따라 복종하듯 다시금 야근을 해보지만 이제 마음 둘 곳마저 사라져버린 일터는 공장이 무섭게 다가온다. 언제쯤에나 무섭고 두려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인가. 두어 차례 돌아선 저기 모퉁이 길을 돌아보니 햇살 한 줌이 아스라이 실눈을 뜨는 것 같기도 하다.    구조조정 경영합리화에 부서 이동 몇 번 공장생활 십 년인데 자리잡지 못하고 이리 떠밀리고 저리 떠밀려 오늘도 몇 군데 땜빵 일 간다 축배를 들며 아이엠에프 극복했다 야단이면 무엇 하나 늘 우리는 하루해가 길기만 하다 -「땜빵」전문   머슴을 부리는 주인은 하루해가 왜 이리도 한 사발 숭늉 식듯 금방이냐며 불만이고 머슴은 머슴대로 하루해가 왜 이리도 고래심줄처럼 질기냐며 줄담배를 피워무는 세상. 우리는 또 기억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그 시절을 지나오자 터진 외환위기는 우리 모두를 처참하도록 비겁하게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정은호는 우리들의 그 비겁함까지도 숨기지 않고 있다. 기계 두 대만 돌려도 몸과 마음 엄청 바쁜데 덕산댁 아지매 일 잘한다는 칭찬 한마디에 세 대나 돌린다 하루 내내 땀 뻘뻘 다리는 벌벌 허리는 휘청휘청 하루 이틀 일할 것도 아닌데 저러다 골병들지 -「덕산댁 아지매」전문   설사 그것이 자랑스런 모습이건 창피한 모습이건 시인이라면 적어도 그 치부까지 내보여주는 게 소임이라고 했던가. 정은호는「덕산댁 아지매」를 통해 우리 모두를 부끄러운 방관자로 만들어버린다. 가혹한 노래요 가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어디까지를 인정하고 어디까지를 거부해야 하는지! 장롱 구석에 넣어둔 황금 거북이를 시작으로 돌반지까지 끌어 모아 바닥난 달러를 땜빵시켜 놓았지만 여전히 구조조정의 칼날은 시퍼렇게 살아 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출근해보지만 잔업 아니면 특근으로 이어지고 어떤 날은 일감이 없어 하루종일 빗자루를 든 채 일터를 서성거려야 한다. 그러나 신성하다는 노동에 슬픈 현실만 지속된다면 누군들 배겨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시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일찍이 서점에 나온 시집들을 몇 페이지에서 그만 덮고 말았으리라. 은행 다니는 아내 실적 없어 승진 못한다고 신용카드 신청서 한 장 작성해달라는 작업반장 카드 한두 장쯤이야 다 있다고 했더니 사용 안 해도 된다고 신청서만 작성해달라기에 반원들 한장씩 적어 주었다 며칠 지나자 신용카드 날아오고 동료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야! 오늘 한잔 어떻노? 늘 호주머니 마른 사람들 이때 아니면 언제 한잔하나 -「운수 좋은 날」전문   내친 김에 옮겨놓긴 하였지만 글쎄다, 염려가 앞선다. 이런 일을 가지고도 과연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허나 혼자서도 아니고, 반원들 전체가 한날에 신청서를 작성해 한날에 우편물 속의 신용카드를 받았다면 어찌 한잔 꺾지 않을 수 있으랴. 누구는 삼일절에 놀고, 다음날은 월차 내고 놀고, 또 다음날은 일요일이라서 경사가 난 마당에 황금연휴에 황금은 고사하고 손가락이나 빠는 신세들이 아닌가. 이미 2부에서도「특근하던 날」을 통해 이와 같은 징조를 보인 바 있는 정은호의 천연덕스러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강도 높은 노동시간으로 인해 비록 몸은 지쳐 있으나 인간의 심성마저 망가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함이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언제고 얄팍한 호주머니지만 그 호주머니 속에 담고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체온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떠난 곳에서 만난 한솥밥 동료인「명근이 형」을 가슴 저리게 기억하고 있으며, 삼교대 근무에 쫓기듯 집을 나섰다가 만난「새벽녘 거리에서」의 생선장사 아줌마나 뻥튀기 아저씨의 고함소리는 시인으로 인해 다시금 되살아남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고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4   불혹을 코앞에 두고 있는지라 아내와 세 딸을 향한 행보도 시인에게는 자그마한 행복이리라. 그러나 정은호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 일요일에도 특근하느라 집을 나설 때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일하랴 때늦은 공부하랴 구조조정에 살얼음판 건너랴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일없어 휴업한 지 보름이 넘었다 언제 출근하라는 전화 올지 몰라 막상 무슨 일을 할 수도 없다 집에 있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아내 보기 미안한데 되려 아내가 더 미안해한다 -「미안하다」중에서 아내가 아침 밥상머리에서 봄나들이 가자는 걸 안 된다며 나는 가방을 챙겼다 나이 들어 시작한 대학공부 차마 떨치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다짐보다 딸아이 얼굴이 먼저 와 박힌다 -「출석수업」중에서   부부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이혼이 불가피했다며 사회현상에 그 초점을 맞춰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안달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한푼의 위자료라도 더 받아내고자 안달이다. 그러나 정은호는 쪼잔하게도 아내에게 미안하다. 어제도 미안하고 오늘도 미안하다. 어제는 동료들과 정병산 골짝에 모여 오랜만에 소줏잔 곁들이느라 미안하고 오늘은 뒤늦게 시작한 대학공부 때문에 미안하다. 문제는 이러한 시인의 마음에 다가서는 아내의 모습이다. 진실된 부부란 남편이 아내를 닮아가고 아내가 남편을 닮아간다고, 남편의 펜을 통해 보여지는 아내 역시 시인의 심성만큼이나 곱다.「목감기」에서는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감기약을 챙겨주는 따스한 손길이 보여지고,「사원아파트」에 이르면 퇴근하는 남편 앞에 아파트 열쇠를 손에 쥐고 웃어 보이는 쓸쓸한 미소 한 자락은 세 아이를 둔 엄마의 모습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렇듯 서로 다른 얼굴로 만나 부부로 살아가는 동안 닮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힘겨운 일인가. 어떤 대의가 아닌, 일상의 사사로움을 체온으로 담아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모든 불화와 불행의 출발에는 그와 같은 일에 시간을 들이지 않았기에 생겨난다. 머리(이론)가 가슴(일상)을 앞질러간 오독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할까. 사랑은 일차선이 아니라 이차선 도로이다. 두 사람이 가고자 하는 길은 다르나 두 사람이 응시하는 곳만큼은 한곳인 것이다. 그 한곳의 응시는 애절함일 수도 있고, 미안함일 수도 있고, 쓸쓸한 자락 바람일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정은호는 한 편의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바, 더 이상의 잔소리가 무슨 소용 있으랴. 오랜만에 쉬는 날 저녁시장에 갔던 아내가 내온 방울토마토 웬 방울토마토? 퉁명한 내 말에 요즘 시장에서 제일 싼 게 방울토마토라 한다 딸아이에게 한 입 넣어주고 살며시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올려다 본 하늘에 아이 눈동자 같은 별들이 쓸쓸히 웃는다 -「방울토마토」전문   아내에게 바치는 그 어떤 노래보다 시인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시가 아닐까 싶다.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시인의 오늘이 그대로 담겨 있는가하면, 요즘 시장에서 가장 싼 게 방울토마토라는 아내의 말에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와 담배를 피워 무는 시인의 순간도피는 쓸쓸한 코웃음을 흘리게 만든다. 세상의 남자들이라면 한번쯤 경험해본 일이 아닐까여서다. 다행스럽게도 한 가장의 순간도피는 한 개비 담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문 채 올려다본 하늘에서 자성의 노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의 눈동자처럼 빛나는 별들에게 전하는 한 사내의 쓸쓸한 미소다.   이런 성품을 지닌 시인이 어떤 연유로「다시 찾은 성주사 골짝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을 저만큼 밀어둔 채 다른 상념에 빠지게 된 것일까? 정은호는 누구보다 자그마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며 가꿔온 시인이다. 그런 그에게 민주노조를 만들어보겠다며 뜻을 같이했던 동지들과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패한 쓰라린 기억들은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5   공장동료로 이어지던 정은호의 시편들이 5부에 다다르면 동료는 동지로 바뀐다. 노동이 노조로 바뀌는가하면, 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로 바뀐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갑작스런 변화가 정은호에게 하루아침에 찾아온 손님은 아니다. 저 모퉁이 길을 돌아보니 그에게도 때묻은 이력서를 손에 쥐고 공단거리를 배회했던 기억들이 무슨 전과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창원공단 여기저기 이력서 넣기를 몇 번 전에 다니던 공장에서 노조활동 한 것 때문일까? 면접까지 잘 보고 연락한다 해놓고 끝이다 -「구속1」전문   짤막한 전문의 시에서 나타나고 있듯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의 저편은 이것만이 아니다. 양손에 수갑 차고 끌려가지 않아도 감방에 갇혀 있지 않아도 우리들의 생존은 벌판에 내몰려 있으며, 그래서 나는 A, B, C급으로 분류되어 특별관리 대상이 되거나 잡무 우선배치를 받게된다.   듣고 보니 한심할 노릇이다. 불꽃의 시절도 술자리의 안주로 오르고, 온갖 풀꽃들이 앞다퉈 시의 주제로 소재로 피어나는 마당에, 생존의 벌판으로 내몰림은 무엇이고 특별관리 대상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낼모레면 이 땅의 노동자들도 주 5일제 근무가 시행되는 판에 분노는 무엇이며 이미 낡아버린 저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은호는 노동자로서 노동자에게 할말이 있다. 일요일 한번 쉬어보는  절실한 노동자들 다 버려 두고 통념도 상식도 다 무시하고 공공부문 몇천 명 사업장 먼저 쉬어야 하는가 -「주 5일 근무 2」중에서   애써 물음표를 찍어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먼저 쉬어야 하는가’라는 그의 분노에 대한 대안 또한 곧바로 이어진다. 그의 대안은 간단하다. 공익을 위해서라도 공공부문 사업장보다는 선반공과 용접공이 쉬는 게 더 나을 것이며 노동강도를 따져보더라도 근무조건이 열악한 작은 공장의 노동자들이 먼저 쉬는 게 순리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노동판도 예전의 노동판이 아니다. 노조도 예전의 노조가 아니다. 누구 하나 50퍼센트가 넘는 비정규직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쉬어야 하고 우리가 먼저 주 5일 근무제를 실시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아니면 양대 노총에서마저 관심 밖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선거라도 다가와 노동자 후보를 내세우면 한쪽에서는 다 된 밥에 동지들이 재를 뿌렸다며 목청을 높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부도 사업가도 아닌 노동자가 노동자를 차별하는 마당에 선거는 얼어죽을 선거냐며 등을 돌려버린다. 씁쓸하고 참담한 현실이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서 있다. 노동자들끼리 서로 눈치만 살피며 밥인지 죽인지도 모를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 노동의 새벽은 생명의 새벽으로 날아가버렸고, 만국의 노동자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다. 밥이 되든 죽이 되든 오늘은 이미 어제가 아니고, 한 달 봉급 60만원으로 입에 풀칠을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이제 모든 문제는 그들의 몫이며 너희들의 몫이다. 그 틈바구니가 곧 기회인지라 살판나는 건 사업주들이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느라 바쁘고 가압류 딱지가 어지럽다. 이쯤 되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민주노총이 집계한 손해배상 가압류 금액이 일천이백육십 몇 억이라는데 단번에 읽어내기도 힘든 천문학적 숫자에 기가 찬다 어디 그것뿐인가 가족들은 물론 입사할 때 세운 보증인까지 손발 꽁꽁 묶어놓고 노조탈퇴 강요하니 단체행동권이 명시된 이 나라 헌법 있으나 마나 -「있으나 마나」전문   어디까지가 유연한 대처이고 어디까지가 부드러운 직선인 것일까? 우리도 머잖아 저 아메리카의 비극적 현실처럼 흑인들이나 이용하는 할렘가의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끝 모를 지하막장으로 내달려야 하는 것일까? 10시간, 12시간의 노동 속에서도 꾹 참고 순종하듯 그렇게 살아줘야 자본주의는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일까? 아, 이 무서운 신종의 계급주의를 또 저토록 유식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정의 내릴 것인가!   이 땅의 한 노동자 시인이 노래하기 훨씬 전에 사람이 죽었다. 한 노동자가 죽었다. 2003년 1월 9일이었다. 한국의 두산중공업에서 요구한 손해배상과 가압류에 못 이겨 한 노동자가 분신을 선택했다. 그의 죽음에 누군가는 정의를 내려줘야 할 것 같다. 배달호, 그의 죽음은 어리석었는가 아니면 막다른 길이었는가? 그의 죽음을 심성 착한 한 시인은 이렇게 품고 있다. 어제 새벽 배달호 동지 분신을 했다 늘 짐승 같은 거대한 재벌을 향해 온몸 던져 불 태워야 살아나는 아귀 같은 세상 답답한 가슴 얼마나 많은 날을 망설이며 아픔 삭이려 했을까 죽어야 살아나는 슬픈 세상에 슬픔만큼이나 검게 그을린 동지를 생각하면 이 땅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 세상을 뒤집고 싶다 -「배달호 동지를 생각하며 1」전문   누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죽어야 살아나는 슬픈 세상에서. 노동조합 사무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영정을 조합사무실을 오르내리며 보건만 눈빛 마주치기가 부끄럽고, 분신한 노동자를 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 슬프디 슬픈 세상에서. 이 한곁에 정은호가 있다. 시인으로서가 아니라 동지로서.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가 보고 있는 세상은 예전 그대로이다.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 정권의 세대교체라지만 그의 눈에 비치는 오늘은 여전히 탈바가지를 바꿔 쓴 것뿐이며 헌법마저도 제 멋대로다. 어디에도 약자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곳이 없다. 그렇다고 심성 착한 그가 불만과 분노로만 가득 차 있는가. 그건 아니다. 지리산으로 향한 그의 시선을 유보하는 이유도 다음과 같은 시편 때문이리라. 그가 꿈꾸며 부등켜안고 가야 할 세상이 하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시편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만원씩 반 회비 모아 봄놀이 간다 소속은 달라도 같은 현장에서 하루종일 몸 부대끼는 비정규직도 함께 관광유람선 안에서 소주잔 주고받으며 오늘만큼은 흥겨운데 마음은 자꾸 허전하기만 하다 저 바다는 언제나 한 물결로 출렁이는데 -「봄놀이」전문 글쓴이의 말  시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나는 시를 쓰면서 조금씩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땀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서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시인이란 하찮은 들꽃 한 송이를 보고도 `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시를 쓰면서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고, 그 길로 가기 위해 오늘도 일터에 갑니다.  이 시집에 실은 글들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삶과 생각들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것도 감출 것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웃들과 만나고 싶습니다. 늘 힘이 되어 준 객토동인과 정홍이 형, 그리고 발문을 써준 영희 형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우리 가족과 출판사 식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2003년 8월 정은호             날개글 나는 직업을 선택할 때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한 다음 고른다. 첫째, 부모형제와 아내 그리고 잘 아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곳. 둘째, 월급이 적은 곳. 셋째, 아무리 일해도 승진이 안 되는 곳. 이 세 가지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하면 죄 적게 짓고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은호 시인은 세 가지 다 골고루 갖춘 ‘소중하고 귀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땀흘려 일하고 정직하게 사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메마르고 흔들리는 도시 ‘쓰레기문화’에 푹 젖어 흥청거릴 때, ‘돈독’에 빠져서 이웃도 모르고 살아갈 때, 정은호 시인은 시를 썼다.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한 편 한 편 쓴 시들이 모여 첫 시집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시집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 서정홍(시인)   정은호의 첫 시집『지리한 장마,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떠날 사람들 떠나간 빈자리에 작은 돌멩이의 외침이며, 그 끝이 보이지 않아도 저 모퉁이 길을 돌아가면 피어 있을 풀꽃 한 송이다. 그 풀꽃 한 송이와 더불어 어버이가 계시고 아내와 어린것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페인트 벗겨진 정거장 표지판으로 서 있다.                        ― 박영희(시인) 정은호 시인과 나는 80년 중반 마산수출자유지역 안에서 서로 다른 문학동인 활동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그 시절, 꿈도 많고 서러움도 많던 시절, 자취방엔 살림살이는 없고 빼곡이 꽂힌 책 속에 묻혀 열심히 살아가던 정은호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시집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정은호 시인의 삶이 들어있다. “완행열차도 내 마음처럼 힘겹게 고개를 오른다”는 시인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시대는 변했으나 시인의 삶은 늘 그대로다. 한 달 일하지 않으면 한 달 굶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 시집은 보기 드물게 ‘좋은 시집이다’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어도 ‘아, 그렇구나’ 싶은……                             ― 이규석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