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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도행전 12장 1~16절
이 무렵에 헤롯 왕이 손을 뻗쳐서,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하였다. 그는 먼저 요한과 형제간인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 헤롯은 유대 사람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베드로까지 잡으려고 하였다. 그는 베드로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네 명으로 짠 경비병 네 패에게 맡겨서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되어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헤롯이 베드로를 백성들 앞에 끌어내기로 한 그 전날 밤이었다. 베드로는 두 쇠사슬에 묶여, 군인 두 사람 틈에서 잠들어 있었고, 문 앞에는 파수꾼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고, 감방에 빛이 환히 비치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고 말하기를 "빨리 일어서라" 하였다. 그러자 쇠사슬이 그의 두 손목에서 풀렸다. 천사가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신어라" 하고 말하니, 베드로가 그대로 하였다. 또 천사가 그에게 "겉옷을 두르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니, 베드로가 감방에서 나와서, 천사를 따라갔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는 일이 참인 줄 모르고, 자기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서, 시내로 통하는 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서, 거리를 하나 지났다. 그 때에 갑자기 천사가 떠나갔다. 그 때에야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말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겠다. 주님께서 주님의 천사를 보내셔서, 헤롯의 손에서, 그리고 유대 백성이 꾸민 모든 음모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서, 베드로는, 마가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니, 로데라는 어린 여종이 맞으러 나왔다. 그 여종은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너무 기뻐서, 문을 열지도 않고 도로 달려들어가서, 대문 앞에 베드로가 서 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여종에게 "네가 미쳤구나" 하고 말하자, 여종은 참말이라고 우겼다. 그러자 그들은 "베드로의 천사일거야" 하고 말하였다. 그 동안에 베드로가 줄곧 문을 두드리니, 사람들이 문을 열어서 베드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표준새번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표준새번역>
주님의 말씀은 정련되어 참으로 순수하므로, 주님의 종이 그 말씀을 사랑합니다.
<표준새번역>
혹시 “개미와 배짱이”라는 이야기를 알고 계십니까? 옛날 옛날에 개미와 배짱이가 살았습니다. 한 여름 무더웠던 날에도 변함없이 개미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먹을 것을 찾고 나르는데 반해 배짱이는 근처 잎사귀 그늘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놀면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를 비웃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추운 겨울이 찾아옵니다. 여름 내내 놀았던 베짱이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개미네 집에 가서 먹을 것을 구걸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젊어서 열심히 일하자'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에게는 훗날 좋은 보상이 이루어지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진다는 주제를 삼아서 많은 사람들이 성실하게 살려고 생각했던 동기를 주었던 순수한 내용의 동화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새롭게 쓰여진 조금은 다른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첫 시작은 비슷합니다. 옛날 옛날에 개미와 베짱이가 살았는데 더운 한 여름날 개미는 열심히 일을 하면서 먹을 것을 찾고 나르는데, 배짱이는 근처 잎사귀 그늘에서 음악을 연주하며 놀면서 열심히 일하는 개미를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습니다. 여름 내내 열심히 일했던 개미는 무릎이 시리기 시작하면서 뼈마디마디에는 류머티스관절염에 걸렸고, 무릎에는 늘 케토톱을 바르고 있었으며 심한 자외선으로 인해 피부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취미활동 하나 없이 일만 했던 개미는 겨울에는 늘 심심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개미 나라에서 십시일반 곡식을 모아서 옆 동네에 살고 있는 초대가수 배짱이를 부르기로 했답니다. 여름 내내 열심히 노래를 연마했던 배짱이는 수퍼스타k, 위대한탄생, 너목보 등 가수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모두 1등을 하고 '나는 배짱이 가수다' 에서 인기가수 배짱이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배짱이는 개미나라에서 보내온 엄청난 곡식을 받고, 노래를 몇 곡 불러주고는, 집으로 돌아와 겨울 내내 배부르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오늘날에 들어서는 '힘들게 고생해봐야 육체적 노동일 뿐, 한 우물만 파서 성공하자!' 뭐 이런 주제를 가진 내용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는 이것말고도 많은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짱이가 열심히 노래해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갖게 되었고, 개미나라의 최고 미인이었던 여왕개미에게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자 여왕개미가 배짱이에게 반해서 둘이 결혼하게 되어서 모든 개미들은 배짱이를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들으시면서 우습지만, 왠지 조금 씁쓸하신 생각이 들었다면 그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순수하게 전하고자 했던 그 마음, 그 주제가 전혀 다른 내용으로 변질되거나 결핍된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수”라는 단어 자체는 바보스럽고, 뭔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듯 합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결국 손해를 보며 살 수 밖에 없다는 수많은 경험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5살, 3살 형제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잠자리에 들기 전의 대화입니다. 3살 동생이 "형, 산타클로스가 무슨 선물을 양말에 넣어줄까?", "난 뽀로로인형이 받고 싶은데!!", "굴뚝이 없는데 어떻게 오지?" 등의 이야기를 형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5살 형이 이야기합니다. "아까 엄마가 뽀로로 인형 사놨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리고 니가 빨리 자야 엄마가 우리 방에 올거 아냐!!굴뚝은 필요없거든!" 이젠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순수한 마음이 더 이상 아이들에게는 없구나...느끼게 해 준 대화였습니다. 전 중학교때까지 믿었던 거 같습니다만..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도 순수함을 향한 목소리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TV에서 보면 '바보캐릭터'들은 오랫동안 사랑 받는 캐릭터입니다. 콩나물팍무쳤냐?, 영구 없다, 선생님~, 별들에게 물어봐~, 그랬던 것이었씁니다. 등등 세상의 문화도 바보같은 캐릭터를 내세워 순수함에 대한 향수를 이어가려고 하는 것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지만 순수함을 대체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도록 만들만큼 순수함은 우리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 그림을 그리시던 화가 권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의 작품이 상을 받게 되어 인제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기독교미술대상'에 작품을 출품하셨던 권사님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씁니다. " 처음부터 이 그림을 그리면서 대상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은 절대 없었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그렸더니 그 그림의 결과가 바로 대상으로 이어졌다" 라고 하셨습니다. 소위 이야기해서 돈을 벌기 위해 순수함을 사고 파는 세상 속에서 돈이 목적이 아닌 본질을 위해 그림을 그렸더니 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수한 의도가 통하는 곳이 예술계라 다행이라 하셨습니다.
이런 순수함,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은 비단 세상에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가장 마지막 순수함을 지켜가야 할 존재인 교회나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어느새 순수함을 찾아보기 힘든 세대가 되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교회나 신앙인들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너무 깊이 숨겨놓은 나머지 그것이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심심치않게 뉴스나 미디어 매체에서 말하는 “교회의 세속화”가 민감한 문제로 두각 되는 것도 바로 교회만큼은 이 땅의 순수함의 최종 보루여야 한다고 호소하는 역설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들'하면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뽑혔다고 합니다. 정직하며, 성실한 청렴한 이미지를 가진 교회,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향력을 실로 대단했었노라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산업화를 지나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교회는 '순수함의 영성'과는 점점 이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그래도 결혼하려면 교회에 가면 좋은 사람 만난다"고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이 이야기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정말 난감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세상에 없는 순수함도 새롭게 만들어 내고 유지해가야 할 존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유지는커녕 흔적을 찾기도 힘들지만 말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순수함, 선함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에서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준비하면서 함께 나누고 생각해 보고 싶은 내용이 바로 이' 순수함'에 관한 것입니다. 그 순수함의 넓은 범위 중에서도 교회가 지켜가야 할 순수함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기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12장의 본문의 내용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도 겨울왕국2만큼 흥행성적이 좋을 것같은 재미있는 구성을 가진 말씀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이러합니다. 헤롯왕은 연일 시내 곳곳을 시끄럽게 만드는 그리스도인들 중 우두머리인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야고보라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그리스도인도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헤롯와은 이제 이 밤이 지나면 그들의 우두머리인 베드로마저 죽이고, 이 소동을 마무리하거나 겁을 주어 강제로 해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롯왕은 예전에 비슷한 일로 그리스도인을 붙잡았을 때 부실한 경계로 인해 죄수들이 탈옥을 했던 쓰라린 트라우마가 있었기에 오늘은 더욱 더 철저한 경계로 옥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게 된 베드로는 초조하고 불안했을까요? 아닙니다. 지난 번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옥문이 열리는 경험을 해서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인한 믿음때문인지 입고 있던 옷가지를 풀어헤치면서 자기집 안방에서 잠든 것처럼 큰 대자로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순교한 야고보를 이어 베드로도 순교할 것이라고 걱정했던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잠들지도 못하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갇힌 자는 평안히 잠들고 걱정하는 자들은 밤새 기도를 하는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교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베드로도 같이 기도하며 찬양하면 좋았을 테지만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천사가 온 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윽고 천사가 옆구리를 쳐 깨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천사는 베드레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어, 옥문으로 유유히 걸어나오는 경험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는 저절로 열리는 옥문을 지나서 시내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정신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 일어난 그 놀라운 간증을 나누기 위해 '늘 기도하는 집'으로 불리웠던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향하였습니다. 역시나 늦은 밤이지만 불이 켜져 있었고 베드로는 기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위해 하고 있는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인사를 할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할까 들뜬 마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좀처럼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나요. 베드로가 왔소." 깊은 밤이라 목소리를 크게 높이지 못하고 연신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굳게 닫혀 열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구별한 한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 어린 여자아이의 이름은 로데였습니다. “누구세요?” “오, 로데로구나. 나야 베드로야. 내가 돌아왔단다.” 그 목소리를 듣고 로데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문을 열어 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기도하는 무리로 달려가서 크게 소리 쳤습니다. “베드로에요. 베드로 아저씨가 왔어요. 베드로 아저씨가 문 앞에 서 있어요.” 하지만 기도하는 무리는 로데의 말을 듣자마자 “무슨 헛소리야! 네가 미쳤구나. 빨리 와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나 하렴” 로데를 꾸짖었습니다. 기도하는 무리 중 한 사람은 어떻게 베드로가 살아 돌아 올 수 있느냐고 한탄하듯 한숨을 쉬었습니다. 로데는 지금 문 앞에 있는 것이 참말이라고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옥에 갇혀있는 베드로가 문 앞에 있을 수 있겠냐며 로데를 무시했습니다. “로데! 네가 너무 베드로를 보고 싶어서 그의 천사를 환상 중에 본게로구나. 다시 기도나 하자, 베드로를 위해서” 로데는 "아닌데..정말 베드로인데" 혼잣말을 했지만 어른들이 다시 기도를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옆에서 기도를 다시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과 귀는 현관문 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래 기다렸던 베드로는 “로데야!!장난 치지 말고 어서 문을 열어. 난 베드로가 맞아. 하나님께서 나를 옥에서 꺼내셔서 이렇게 인도해주셨다구” 그렇게 말하며 목소리도 높여 더욱 문을 크게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10분쯤 두드렸을까요? 그제서야 기도하는 모든 무리들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어보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는 정말 베드로가 서 있었습니다. "정말 베드로인가???", "정말 베드로가 맞나요?", "정말 베드로야! 베드로라구!" 놀라움과 웃음과 환호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쪽에서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감사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몇몇은 로데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멋쩍어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읽으면서 느끼셨겠지만 흥미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구절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해 열심히 밤이 새도록 기도했지만 그 기도의 응답은 믿지 못했던 '기도'만했던 사람들. 사도행전 기자였던 누가는 아마도 이 때를 다시 기억해 내면서 분명 우리에게 메시지를 나누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첫 번째 옥에 갇혔을 때의 사건보다 더 자세하게, 더 유머러스하게 글을 써내려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누가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하지 못했던 기도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기도했지만, 열심히 기도했지만 단순히 열심히 기도하는 행위라는 것에 그쳐, 가장 중요한 그 기도를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하실 '하나님'은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기도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이 아닌 기도하는 행위 자체만을 의지했던 모습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고, 교회시대의 문을 열었던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그 마가의 어머니의 다락방이라는 장소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는 바뀌지 않았지만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그 시절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순수성이 달라져 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기도했지만 베드로가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을 이해합니다. 야고보가 잡혔을 때도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전에 스데반 집사를 위해서도 기도했을 것입니다. 핍박받고 있는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했지만 상황은 전혀 달리 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을 보았기에 기도응답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베드로마저 곧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가득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기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베드로가 풀려나올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더 이상 슬프고 힘든 일이 없기를 바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교회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저의 신앙생활을 문득 뒤돌아보게 됩니다. 저 역시, 우리 역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와 어느새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수도 없는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드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반비례하듯 기도의 응답은 책에서나 등장하는 남의 이야기인것만 같고, 기도해봐야 달라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기도의 중요성은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 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다른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되고, 기도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찾는 것이 훨씬 더 빠른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기도해야 할 내용은 이미 나의 기준이 되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어느새 내가 생각하는 범위 딱 그 정도에 하나님을 사로잡아 한계를 만들어 드리고는 그 이상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개신교단체에서 교회를 대상으로 했던 설문조사를 통하면 가장 중요한 것 인줄 알면서도 가장 소홀히 여기게 되는 신앙생활의 기초로 뽑히 1위가 “기도”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나의 기준'으로 드리는 기도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사이에서 혼란이 찾아옵니다. 그러다보면 "몰라 몰라 기도 안해" 기도의 부재로 이어지는 삶 가운데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기도집회, 새벽기도회 등 기도회에 따로 참석해야만 하는 성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시간을 내서 하나님과 조용히 기도하는 것은 왜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은 진정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너무 인간적인 기도만 드리는 것은 아닌가 내 자신이 부끄러울 때가 있고, 너무 위대하고 놀라운 기도는 나같은 사람이 할 기도는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대체 무엇이 기도 앞에서 우리를 이토록 복잡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저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까요? 이 모든 기도에 대한 마음은 결국은 기도에 대한 '순수함의 부재'로 인해 찾아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 한 집사님의 은혜로운 간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집사님께서는 교회에서 주최하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첫날을 아침 일찍부터 참석하고 나니 하루종일 몸이 너무 피곤하셨다고 합니다. 새벽기도회를 참석하면 할수록 하루 동안의 직장 일에서 너무 피곤함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서 갈등이 시작되셨다고 합니다. 도대체 내가 이 새벽기도회를 참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1년에 한번 이 시간에 참여해서 내가 무엇인가 이루어냈다고 하는 자신감이나 성취감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특별한 이 시간에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일까?" 고민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러한 고민은 이번뿐만이 아니라 매일매일 마음 속에 일어났던 갈등이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내 그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신 집사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다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말씀과 찬양을 통하여 눈물 흘리며 감격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질문 "순수한 의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어떤 기도회에 참석함으로 인해 스스로 만족감을 누리려는 것일까?" 고민하는 집사님의 모습 속에서 오히려 저는 순수함을 향한 첫 발걸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환경, 나의 경험, 나의 지식,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순수함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져 있는 삶이라고 손사래를 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결코 하나님 앞에서 늦은 때라고는 없습니다. 결코 변할 수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수한 기도로 나아가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으며 의뢰하며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여기 있습니다. 너무도 바쁘고 복잡한 우리 마음에는 아직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음성에 응답할 “로데”라는 순수함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순수함이 우리 마음에 가득한 현실과 냉정함 속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순수함은 결국 복음의 메시지를 듣게 되어 있습니다. 냉정한 현실을 뛰어 넘어 내 마음 속에 있는 순수함, '로데'에게 힘을 더욱 허락해 주십시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가지만 나는 날로 더욱 순수하겠노라" 믿음으로 선포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로데라는 순수함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순수의 기도로 인도하여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기도가 무엇인지 3가지로 요약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순수한 기도는 대상이 분명히 정해져 있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자기 자신의 만족이 아닙니다. 밤새 열심히 기도했다는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 주체인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이 드러나야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온 천하의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기도하면 평안해집니다. 누가요? 기도하면 위로를 얻습니다. 누가요? 기도하면 삶이 변화됩니다. 누가요? 물론 기도로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하는 궁긍적인 목적이 언제나 하나님 한분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베드로도 이제 곧 죽고 저희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더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좁은 생각의 범위로 하나님을 국한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시는 것 그 이상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하는 대상에 대하여 혼란을 겪지 마십시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향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내 의지가, 내 경험이 아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입니다.
둘째, 순수한 기도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기도입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분명히 빵을 줄 것을 믿는 믿음으로 빵을 달라고 합니다. 빵을 주시는 부모를 의심하면서 설마 돌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이게 겉만 빵이고 속은 돌은 아닐까? 의심하면서 빵을 먹는 아이는 없습니다. 우리가 부모님들도 믿거니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의 대상이 "하나님"으로 분명히 정해졌다면 우리에게 분명하고 놀라운 믿음이 생깁니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하고 있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시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위대함을 가진 온 우주의 주인이시면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아바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바로 그 분께서 지금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단 그 바탕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기도의 고백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이 익숙한 성경 구절에는 더 붙을 말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응답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풀어내는 일은 초대교회 교인들은 할 수 없었지만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기도를 통하여 옥문이 저절로 열리는 기적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새로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시며, 날마다 우리를 은혜의 삶으로, 생명의 삶으로 이끌어가실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나의 경험, 나의 생각, 나의 지식, 나의 생각을 뛰어 넘어 믿음으로 기도하시길 원합니다. 잊지마십시오.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마지막으로 순수한 기도는 “결과”에 치중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도 중요한 관점입니다. 결과에만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순수한 마음을 잃게 됩니다. 초대교회에 놀라운 부흥은 박해와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순교합니다. 집사들이 돌을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지만 날마다 박해는 더 심해집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차라리 믿지 않았던 때가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결과에만 집중하지 않고 더욱 기도했습니다. 잠시 오늘 본문처럼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12장을 기점으로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을 알 고 계십니까? 핍박의 중심에 있던 헤롯왕이 죽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을 만남으로 변화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준비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여행을 시작하게 됩니다. 결과에 낙망치 않고 계속해서 기도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 13장부터 펼쳐지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세 가지 응답이 있다고 합니다. 응답, 무응답, 거절. 분명한 대상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자~그러면 이제 그 다음은 주님 차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를 믿음으로 순수하게 다 올려 드린 후에는 돌아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진행하실 지 기다리면 됩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말씀하셨던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시길 원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눈물로 기도한 후에 엘리 제사장을 통하여 들었던 위로의 말씀은 "평안히 가라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하시길 원하노라" 였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위로라 느꼈을 수도 있지만 한나의 믿음이 발현합니다. 수심 가득했던 한나는 그 말을 듣고는 얼굴에 다시는 근심하는 빛이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무엘을 임신하는 결과가 있었기에 근심하는 빛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직 그런 결과조차 알지 못할때 하나님이 일하심을 믿었을 때, 분명한 대상이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했기에 결과마저 하나님께 맡겼기에 더 이상 근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 한나에게 임한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가질 수 있는 임신은 결과를 떠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놀라운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있습니다. 분명한 대상이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했던 바울은 거절도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몸의 가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지 않고 더욱 낮아짐으로 헌신한 모습의 바울이었습니다. 다윗도 성전을 짓고 싶은 간절한 기도에 거절을 경험했습니다.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의 모든 준비를 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하며 감사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성경 속 기도의 사람들이 무응답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마저도 무응답을 경험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눈물이 핏물이 되어 흘러내리도록 기도했지만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기도를 우리 모두가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온전히 순정하려고 고개 숙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순수한 기도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모든 기도들이 무응답이거나 거절일 경우가 없기를 원합니다. 기왕이면 응답되는 은혜의 간증이 넘쳐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응답이든, 무응답이든, 거절이든 모든 결과의 예상에서 벗어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겸손히 고백할 수 있는 순수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순수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함들이 여전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 생활로, 순수한 기도의 모습으로 날마다 서 있으시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기도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 함께 잠시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현실에 냉정함들로 인하여, 환경들로 인하여, 살아온 순간들로 인하여,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통하여 굳어지고 닫혀있고 변질되어 있는 마음을 이 시간 순수한 거룩함으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기도하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불안함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도에 응답하실까 의심할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내 응답과는 정반대로 응답되는 것에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사실 삶에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 드리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마음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조금씩 하나님 닮아감으로 말미암아 순수한 거룩함으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분명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나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는 행위로 그치지 않게 하시옵소서. 구하라 주실것이요. 이 말씀에 온전히 의지하며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믿음의 바탕으로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믿음으로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의 방향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 기도에 응답하셔도, 설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동일하게 감사할 수 있는 겸허한 마음과 인내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인생에 놓여져 있는 수많은 기도의 시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우리 모든 순수한 영혼들이 되기를 원하오며 이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