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 03. 17
촬영 : 2020. 02. 16(일)
출처 : 花岩의 世上萬事
■ 이정형(李廷馨) 묘(墓)
고양 벽제읍(碧蹄邑) 선유 1리(仙遊 1里)에 위치(位置)하여있다. 묘(墓)는 증정부인 (贈貞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와 삼위각묘(三位各墓)이며 앞에 묘표(墓表)가 있다. 또한 묘하(墓下) 10m 지점에 폭 76cm 두께 44cm 높이 216cm의 오석(烏石)으로 된 이수(螭首) 구부(龜趺)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종후학(宗後學) 종선(鐘宣)이 비문(碑文)을 짓고 이성우(李性雨)가 쓰고 전(篆)하였다.
이정형(李廷馨)은 조선시대 학자이며 문신이다. 명종 4년(1549)에 출생하여 선조(宣祖) 40년(1607)에 사망하였다.
자(字)는 덕훈(德薰), 호(號)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이다.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두직서령(杜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충목공(忠穆公) 이정암(李廷 )의 아우이다.
고암(顧庵) 정윤희(丁胤禧)의 문인(門人)으로 명종(明宗) 22년(1567)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년 뒤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형조정랑(刑曹正郞) 교리(校理)를 거쳐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좌승지(左承旨)로 왕(王)을 개성(開城)까지 호종(扈從)하여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특진(特進)되었다. 개성(開城)이 함락되자 형 정암(廷 )과 함께 황해도지방(黃海道地方)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여러차례 적을 격파시켜 양호(兩湖)의 길응 행재소(行在所)에 통하게 하므로써 경기도(京畿道) 관찰사(觀察使)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고, 판결사(判決事)로서 고급사(告急使)가 되어 요동(遼東)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선조(宣祖) 29년(1596) 서도도체찰부사(西道都體察副使)가 되었으며 그후 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1602년에 진하사(進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선조말(宣祖末) 북인(北人)에 의해 남인(南人)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등 원로대신이 쫓겨나자 병(病)을 이유로 사직하여 양주(楊州)에 은거하였다. 1606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가 재직중에 병사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했으며 성역(星曆)·복서(卜筮)·계수(繼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춘천(春川)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著書)로는 『동각잡기(東閣雜記)』·『황면기사(黃로記事)』·『용아일기(龍아記事)』·『수춘잡기(壽春雜記)』·『지퇴당집(知退堂集)』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