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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본기 琉璃明王(유리명왕) (BC19년 ~ AD12년)
琉[주석1]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주석2]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索之不得 倦而還 一旦[주석3]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주석4]子 至是繼位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유리(類利)이다. 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씨(禮氏)이다. 전에 주몽은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아이를 배었는데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유리이다. [유리는] 어릴 적에 길거리에서 놀다가 참새를 쏜다는 것이 잘못하여 물을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아비가 없어서 이처럼 고약하구나.”라고 하였다.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이에게]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고 말하시요. 만약 이것을 찾는다면 [그 아이는] 곧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셨다.”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는데,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니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1년(BC19년, 壬寅) 9월, 추모왕 사망.
*9월, 阿爾가 都切을 낳음. BC19년생.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2년(BC18년, 癸卯) 가을 7월, 다물후(多勿侯) 松讓(송양)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9월, 서쪽으로 사냥가서 흰 노루[白獐]를 잡았다. 겨울 10월, 신작이 궁궐 뜰에 모였다. 백제(百濟)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여름 5월,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백제본기 온조왕 1년, BC18년 근거.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鶻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3년(BC17년, 甲辰) 가을 7월, 골천(鶻川)에 별궁(別宮)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왕은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들어 [이들을] 후처(後妻)로 삼았다. 하나는 화희(禾姬)인데 鶻川人(골천인)의 딸이다.
또 하나는 치희(稚姬)인데 한(漢)나라 사람의 딸이다. 두 여자가 사랑 받으려고 서로 다투며 화목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서 2궁을 지어 각각 살게 하였다.
그 후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 나가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서로 다투었다. 禾姬(화희)가 稚姬(치희)를 꾸짖어 “너는 한나라 사람 집의 천한 첩으로 어찌 무례함이 심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稚姬(치희)가 부끄럽고 한스러워 도망쳐 돌아갔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좇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黃鳥]가 날아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노래하였다. “훨훨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서로 의지하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 것인가?”
*이때 송씨(松氏)는 죽지 않았음. 고구려본기는 거짓말.
*十年 四月 禾氏生子解術 BC10년 解術 출생. <출처: 孺留王(유류왕)>
*유리왕 4년, 을사, BC16년, 八月 松氏生子都助 都助태자 출생. BC16년생.
*유리왕 7년, 무신, BC13년, 五月 松氏生子解明于豆谷 解明태자 출생. BC13년생.
*유리왕 10년, 신해, BC10년, 四月 禾氏生子解術 解術태자 출생. BC10년생.
*유리왕 5년 雉氏가 시집 옴. 凉谷宮을 마련함.
*유리왕 9년 雉氏 도망. 황조가를 부름.
*유리왕 6년 BC14년, 4월, 왕의 동생 溫祚(온조)를 馬韓(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유리왕 10년 BC10년, 1월, 再思 薨. 沸流太子가 太輔가 됨.<고구려사략> 유류기 유리왕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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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기 백제서기 비류왕 5년, BC14년. (유리왕 6년)
五年 丁未 四月 遣王弟溫祚於馬韓 借地 時馬韓政衰 畏末曷樂浪加耶之漸盛 欲使王制末曷樂浪 乃許東北百里之地 且許採鐵鑄兵戈 優待王弟而歸 十月 王巡撫北邊 獲神鹿 十一月 馬韓使來 請王女 王謝以年幼 馬韓君臣耽樂 不恤國民 樂浪加耶年年納美女 侵入其封疆 疆域日縮 而不以爲意 甘兒生子馬婁
5년 丁未(정미, BC14년) 4월, 왕의 동생 溫祚(온조)를 馬韓(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당시 馬韓(마한)은 정세가 쇄락하여 末曷(말갈), 樂浪(낙랑), 加耶(가야)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末曷(말갈), 樂浪(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였다. 또 철을 캐내어 兵戈(병과, 무기)를 주조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왕의 동생을 우대하고 돌려 보냈다.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순무하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11월, 馬韓(마한)의 사신이 와서, 王女(왕녀)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고 사양하였다. 馬韓(마한)의 임금과 신하들은 耽樂(탐락)하여 국민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樂浪(낙랑)과 加耶(가야)가 해마다 미녀를 바치며 그 封疆(봉강)를 침입하였다. 강역이 날마다 줄어 드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甘兒(감아)가 아들 馬婁(마루)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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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 夏四月 王謂羣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주석6]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 良馬一十匹
11년(BC9년, 壬子) 여름 4월,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 = 涉臣)는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가 된다. 만약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아뢰었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굳은 나라이고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으므로,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왕은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였다. “사람을 시켜 배반한 것처럼 해서 저들에게 들어가 거짓으로 ‘우리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고 겁이 많아서 움직이기 어렵다.’고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선비는 필시 우리를 업신여기고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그 틈이 생기는 것을 기다렸다가 정예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서 수풀에서 그 성을 엿보겠습니다. 왕께서 약한 군사를 시켜 그 성 남쪽으로 나가게 하면 그들이 반드시 성을 비우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때] 신이 정예 군사로 그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친히 용맹스런 기병을 거느리고 협공을 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왕은 그 말에 따랐다.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내어 뒤쫓았다. 扶芬奴(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는 관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매우 많은 [적을] 목베어 죽였다. 왕은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게 되자 계책이 다하고 힘이 꺾였으므로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은 부분노의 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왕의 덕입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고 하고는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내려주었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13년(BC7년, 甲寅)
봄 1월, 형혹(熒惑)이 심성(心星)을 지켰다.
*유리왕 13년, BC7년, 無恤(무휼)이 태어남. BC7年生.
*1월, 金蛙 殂. 帶素立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恚之 冬十一[주석7]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 人多凍死 乃去
14년(BC6년, 乙卯) 봄 1월, 부여왕 帶素(대소)가 사신을 보내 문안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하여 태자 都切(도절)을 볼모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都切(도절)이 두려워서 가지 않았으므로 帶素(대소)가 성을 냈다. 겨울 11월, 帶素(대소)가 군사 5만으로 침략하여 왔으나,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었으므로 돌아갔다.
*BC6년, 1월, 온조 남하의 뜻, 재사가 온조의 왕비가 됨. => 재사가 沸流의 왕비가 됨.
유리왕 18년 (BC2년, 己未) 백제의 건국. 온조왕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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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본기 온조왕 14년, BC5년.
十四年 春正月 遷都
二月 王巡撫部落 務勸農事
秋七月 築城漢江西北 分漢城民
14년(BC5년, 丙辰) 유리왕 15년.
봄 1월, 도읍을 옮겼다.
2월, 왕은 부락을 순행하며 위무하고 농사를 힘써 장려하였다.
가을 7월, 漢江(한강) 西北(서북)쪽에 성을 쌓고, 漢城(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BC4년.
十五年 春正月 作新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15년(BC4년, 丁巳) 유리왕 16년.
봄 1월,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
*백제왕기 비류왕 17년. BC2년. 유리왕 18년.
十七年 己未 春 樂浪來侵 焚慰禮城(彌鄒忽也) 王戰敗 憂懣而薨 王弟溫祚統其衆 而繼立爲王 以新都爲慰禮城
17년 己未(기미, BC2년) 봄 樂浪(낙랑)이 쳐들어 와서 慰禮城(위례성, 彌鄒忽也)을 불질렀다. (비류)왕이 전쟁에 패하여 걱정하고 번민하다 죽었다. 왕의 동생 溫祚(온조)가 그 무리를 통솔하였다.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새로운 도읍으로 慰禮城(위례성)을 삼았다.
*백제본기 온조왕 18년, BC1년.
十八年 冬十月 靺鞨掩至 王帥兵 逆戰於七重河 虜獲酋長素牟 送馬韓 其餘賊盡坑之 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遇大雪乃還
18년(BC1년, 庚申)==> 온조왕 2년(BC1년, 庚申) 유리왕 19년.
겨울 10월, 靺鞨(말갈)이 갑작스레 습격하여 왔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七重河(칠중하)에서 맞아 싸워 추장 素牟(소모)를 사로잡아 馬韓(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 적들은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 왕이 樂浪(낙랑)의 牛頭山城(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臼谷(구곡)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곧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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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斯卑爲祟[주석9]” 王使謝之 卽愈
19년(BC1년, 庚申) 가을 8월,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택(長屋澤) 가운데에 이르러 [교시를] 찾아내어 칼로 그 다리의 힘줄을 끊었다. 왕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을 어떻게 상하게 할 수 있는가?” 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넣어 죽였다. 9월에 왕은 병에 걸렸다.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가 빌미가 된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사과하니 곧 병이 나았다.
二十年 春正月 太[주석10]子都切卒
20년(AD1년, 辛酉) 봄 1월, 太子(태자) 都切(도절)이 죽었다.
*都切(도절), BC19년생. 20살 사망.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養之 返見王曰 “臣逐豕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麋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AD2년, 壬戌) 봄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나서, 왕은 장생(掌牲) 설지(薛支)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찾아내어 국내 지방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고는 돌아와 왕을 뵙고 아뢰었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이 오곡을 키우기에 알맞고, 또 순록, 사슴, 물고기, 자라가 많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수도를 옮기시면 백성의 이익이 끝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4월, 왕은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일어났다.
9월, 왕은 國內(국내)로 가서 지세를 보고 돌아 오다가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러, 한 장부가 진펄 위의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기뻐하면서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씨(位氏) 성을 내려 주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주석11]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22년(AD3년, 癸亥) 겨울 10월, 왕은 國內(국내)로 천도하고 尉那巖城(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5일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 陜父(협보)가 간하였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형정(刑政)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러 나가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만약 [왕께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신은 정치가 황폐하고 백성이 흩어져서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왕은 듣고 크게 노하여 陜父(협보)의 관직을 빼앗고 관원(官園)을 맡아보게 하였다. 陜父(협보)는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爲太子 大赦國內
23년(AD4년, 甲子) 봄 2월, 왕자 解明(해명)을 太子(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크게 사면하였다.
*유리왕 7년, BC13년, 五月 松氏生子解明于豆谷 解明太子. BC13년생. 17살 태자됨.
*AD4년, 무휼이 11살에 태자가 되었다고 봐야 함.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 賜姓羽氏 俾尙王女
24년(AD5년, 乙丑) 가을 9월, 왕은 기산(箕山)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이상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양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羽氏(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에게 장가들였다.
*호동의 출생 = AD5년쯤.
고구려본기 琉璃明王(유리명왕) 27년, AD8년.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주석13]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曰 “今鄰國無故請見 其意不可測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27년(AD8년, 戊辰) 봄 1월, 王太子(왕태자) 解明(해명, 21살)은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黃龍國王(황룡국왕= 烏伊)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解明(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내가 힘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고 말하였다. 黃龍王(황룡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王(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黃龍王(황룡왕)에게 “解明(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과인을 위해서 [그를] 죽여 줄 것을 청합니다.”고 말하였다.
3월, 黃龍王(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太子(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太子(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고 간하였다. 太子(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黃龍王(황룡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갔다. 黃龍王(황룡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유리왕 7년, 戊申, BC13년, 五月 松氏生子解明于豆谷 解明태자 출생. BC13년생.
*유리왕 AD8년(戊辰), 1월, 3월 기사임. 解明(해명)이 黃龍王(황룡왕)을 만나고, 자살함. 21살.
*都助太子 薨. <고구려사략> 都助太子(도조태자)의 사망. 24살. (BC16년생)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鄰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二十一歲 以太子禮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納於邪』 今王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 讓王曰 “我先王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禮也 以幼事長者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効” 乃與羣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徧問羣下 有一老嫗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28년(AD9년, 己巳) 봄 3월, 왕은 사람을 보내 解明(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 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太子(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大王(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太子(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太子(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黃龍王(황룡왕)이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1년 내려 와서 기록됨. 27년(AD8년) 3월에 일어난 일. <고구려사략 원고 필사본>에 나옴.
*유리왕 28년, AD9년. 해우의 출생.
*AD8년(戊寅), 3월 기사임. 解明(해명)의 자살.
*解明(해명)은 BC13년생. AD8년-(-13년)= 21살 사망.
사론(史論): 효자가 부모를 섬길 때는 마땅히 곁을 떠나지 않고 효를 다하여야 하는데,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해명이 따로 떨어진 도읍에 있으면서 무용(武勇)을 좋아한 것으로 이름났으니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들으니 좌전(左傳)에 말하기를 『자식을 사랑하거든 의로운 방도로 가르쳐서, 그릇된 데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은 처음부터 미리 가르치지 않다가 악하게 되자, 몹시 미워하여 죽이고 말았다. [이것은]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였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 扶餘王(부여왕) 帶素(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우리 선왕과 당신의 선군인 동명왕은 서로 좋은 사이였는데, [동명왕이] 우리 신하들을 꾀어내어 도망쳐 이곳에 와서 성을 수리하고 백성을 모아 나라를 세우려고 하였다. 대개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 아이가 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예이며, 어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왕이 만약 예와 순리로써 나를 섬기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나라의 운수가 오래 보존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이에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사가 약하니, 이런 정세에는 부끄러움을 참고 굴복하여, 후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군신들과 상의하고 [부여왕에게] 회답하였다. “과인은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서 예의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을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왕자 無恤(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할아버지는 신령(神靈)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는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에게 참언하여, 욕되게 말을 기르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도망나온 것입니다. 지금 대왕이 전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를 경멸하니,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아뢰시오. ‘지금 여기에 알들이 쌓여 있습니다.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부여왕이 듣고 [그 뜻을]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니 한 할멈[老嫗]이 대답하였다. “알들이 쌓여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고,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 것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것은 ‘왕이 자신의 위험은 알지 못하고 남이 [굴복하여] 오기를 바라는 것이니, 위험한 것을 안전한 것으로 바꾸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16살 無恤(무휼)이 부여사신에게 충고.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羣鬪 黑蛙不勝死 議者曰 “黑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29년(AD10년, 庚午) 여름 6월, 모천(矛川) 가에서 검은 개구리가 붉은 개구리와 무리져서 싸웠는데,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논의하던 [어떤] 사람이 “검은 색은 북방 색이다. 北扶餘(북부여)가 파멸할 징조이다.”고 말하였다. 가을 7월, 豆谷(두곡)에 離宮(리궁)을 지었다.
*陜父(협보)가 신라의 태보가 됨 <고구려사략>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斬之 傳首京師 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騶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愈甚
31년(AD12년, 壬申)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하여 호(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려고 하지 않자 [왕망이] 강제로 보내었더니 모두 새외(塞外)로 도망쳤다. 그래서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요서(遼西)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자 [한나라] 주군(州郡)에서는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아뢰었다.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에 명해서 위안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부여의 무리 중에 반드시 따라 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흉노(匈奴)를 아직 누르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것은 큰 걱정거리입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하여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하여 머리를 베어서 수도로 보냈다.<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서는 모두『구려후(句麗侯) 추(騶)를 유인하여 베었다.』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고쳐 부르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래서 [고구려는] 한나라 변경 지방을 더욱 심하게 침범하였다.
*AD12년(壬申), 琉璃王(유리왕)이 王莽(왕망)에 의해 살해당함.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AD13년, 癸酉) 겨울 11월, 扶餘人(부여인)이 쳐들어오자, 왕은 아들 無恤(무휼)을 시켜 군대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無恤(무휼)은 군사가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으므로, 기이한 계책을 써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렸다. 부여 군사들이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밑에 이르자, 복병이 나가 불의에 공격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無恤(무휼)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無恤(무휼)이 扶餘人(부여인)을 정벌함. 20살 때.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烏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縣屬玄菟郡
33년(AD14년, 甲戌) 봄 1월, 王子(왕자) 無恤(무휼)을 太子(태자)로 삼아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가을 8월, 왕은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에게 명하여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다.
*AD14년, 1월, 無恤(무휼)을 太子(태자)로 삼음. BC7年生. 21살.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琉璃明王
37년(AD18년, 戊寅) 여름 4월, 王子(왕자, 解術)가 津(진)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은 애통해 하며 사람을 시켜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후에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알리니, 마침내 예로써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 밭 10경(頃)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은 豆谷(두곡)으로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豆谷(두곡)의 離宮(리궁)에서 죽었다. 豆谷(두곡)의 東原(동원)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琉璃明王(유리명왕)이라고 하였다.
*AD8년, 3월, 解明(해명)의 자살. 21살. (BC13년생).
*AD8년, 4월, 解術(해술)의 자살. 18살. (BC10년생)
*AD18년, 7월. 황룡왕 烏伊 薨. 81살. AD18년 - 81살 = BC63년생. 烏文 -- 烏伊 -- 烏婁.
*AD18년, 7월, 太后의 장례식으로 豆谷(두곡)의 東原(동원)으로 감. 都助太子(도조태자)의 사망. 34살. (BC16년생)
*AD18년, 10월, 無恤(무휼)의 즉위. 25살 (BC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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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大武神王立 或云大解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대무신왕(大武神王)<혹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 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AD14년)에 太子(태자)가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이 때에 이르러 [태자가] 卽位(즉위)하였다. 어머니는 松氏(송씨)로서, 多勿國王(다물국왕) 松讓(송양)의 딸이다.
*AD18년, 25살 즉위. BC7년출생, 어머니 松氏.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2년(AD19년, 己卯)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2년(AD19년, 己卯)
봄 1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크게 사면하였다. 百濟(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AD19년, 解婁(해루)를 太輔(태보)로 삼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3년(AD20년, 庚辰)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駏䮫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扶餘人得此烏 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羣臣議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3년(AD20년, 庚辰)
봄 3월,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가을 9월,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비로운 말[神馬]을 얻어 거루(駏䮫)라고 이름하였다. 겨울 10월, 부여왕 帶素(대소)가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 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 색이 되었고, 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것입니다.” 帶素(대소)가 기뻐서 그것을 보내고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습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부여]왕이 얻어서는 가지지 않고 우리에게 보내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帶素(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4년(AD21년, 辛巳)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舁鼎游戱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4년(AD21년, 辛巳)
겨울 12월, 왕은 군대를 내어 扶餘(부여)를 정벌하였다.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게 하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일군(一軍)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홀연히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았으니 [솥을] 지고 따르게 해 주십시요!” [왕은]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姓을 내려주었다.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리므로,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은] “하늘이 준 것이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에게 절하며 말하였다.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은밀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기를 청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AD21년, 王文(왕문) 사망. 芦花(호화)를 데려옴. 再思가 부여정벌에 참여.
*AD22년생 = 再思의 아들 출생년.
*AD53년 = 31살이 됨.
*AD53년에 7살이면, AD47년생이 됨.
**再思生多婁 AD22년생으로 수정했음. <고구려사략>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5년(AD22년, 壬午)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濘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斬頭 扶餘人旣失其王 氣力摧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 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 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王旣至國 乃會羣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孤之過也” 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三月 神馬駏䮫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夏四月 扶餘王帶素弟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淥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冬十月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5년(AD22년, 壬午)
봄 2월,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방비하지 않는 사이에 엄습하려고 말을 채찍질하여 전진하였으나, 진창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왕은 이때 怪由(괴유)에게 지시하였다. 怪由(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帶素)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부여사람들이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였다. 왕은 군량이 다하여 군사들이 굶주리므로,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하늘을 향하여 영험을 비니 홀연히 큰 안개가 피어나, 7일 동안이나 지척간에 사람을 분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빠져 나왔다. [이때]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것을 주었다.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이윽고 친히 죽은 자를 조문하고 아픈 자를 위문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의 덕과 의(義)에 감격하여, 모두 나라의 일에 목숨을 바치기를 바랬다. 3월에 신비로운 말 거루가 부여 말 100필을 거느리고 鶴盤嶺(학반령) 아래의 차회곡(車廻谷)에 이르렀다.
여름 4월, 부여왕 帶素(대소)의 아우()가 갈사수(曷思水)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季子(막내 아들)인데 역사책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帶素(대소)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자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에 이르렀다.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 결국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빼앗아 이곳에 와서 비로소 도읍하였는데. 이 사람이 갈사국왕(曷思國王, 曷至王)이 되었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사촌 동생(從弟, 絡奇, 絡文)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선왕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데 없는데 왕의 동생이 도망쳐 曷思(갈사)에서 도읍하였다. 나도 역시 불초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킬 수가 없다.” 마침내 1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 오니, 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고,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었으므로 絡(락)씨 성을 주었다. 겨울 10월, 怪由(괴유)가 죽었다. 전에 병이 심해지자 왕은 친히 가서 위문하였다. 怪由(괴유)가 말하였다. “신은 北溟(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두터운 은혜를 거듭 입었으므로 죽어도 사는 것 같아서 보답할 일을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착하게 여기고 또 큰 공로가 있었으므로, 북명산(北溟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계절마다 제사지내게 하였다.
*帶弗殺帶素.
大武神帝紀(대무신제기) 5년 AD32년 ==> AD22년.
여름 4월, 曷思王(갈사왕) 山解(산해)는 解素(해소, BC43년 출생)의 아들인데,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따르는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鴨淥谷(압록곡)〈가진구〉에 이르러 海頭王(해두왕)〈말갈추장〉이 사냥 나가는 것을 보고 함께 사냥하자 청하였다. 海頭(해두)가 오만무례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백성들을 빼앗았다. 曷濱(갈빈)〈근득리〉에 도읍하여 하북(河北)의 포륜(布倫)〈水의 이름〉 땅〈해두의 옛 땅〉을 다스리고자 청하여, (왕이) 허락되었다.
解素(해소)는 聖母(성모)가 낳은 金蛙王(금와왕)의 아들인데, 항상 帶素(대소)의 無道(무도)함을 간하면서 우리를 비호하였다.
解素(해소)가 죽음에 이르자, 둘째 아들 解婁(해루)가 우리에게 귀의하여(AD19년 태보가 됨) 온조(溫祚)를 돕게 하였고, 山解(산해) 또한 이때에 귀의하여, 딸을 후궁으로 바쳤다. 그 딸은 요염하고 德(덕)이 있어 皇后(황후)로 삼았다. 后(후)의 몸에는 향기가 있고 살결도 물고기 같이 희고 깨끗하여,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金蛙---解素---山解---
*金蛙---解素---山解---
---2째 解婁(BC26년 ~ AD34년)
*金蛙---解素---曷思太后---再思---再思의子---再思의孫子
온조왕 재위기간 BC2년 ~ AD28년.
*柳花---金蛙
*王文---芦花(曷思太后의 동생)
*山解 = 金蛙의 季子
*曷思太后
*고구려사초 모본제기 2년
二年 己巳 正月 擇宗室公卿女七人 納後宮 又采民間女七十人 分屬七宮 淫荒爲事 三月 暴風拔樹 四月 霜雹 上怒天 旣惡我 我亦惡天 命左右射天 八月 發倉賑民 納好童女葦花 再思之室也 曷思宮生女 怩之曰 "生此何爲" 乃名怩
고구려본기 武神王(대무신왕) 8년(AD25년, 乙酉)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爲右輔 委以軍國之事
8년(AD25년, 乙酉)
봄 2월, 을두지(乙豆智)를 우보(右輔)로 삼고 군무와 국정을 맡겼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9년(AD26년, 丙戌)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9년(AD26년, 丙戌)
겨울 10월, 왕은 친히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으나,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하지 않고 다만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다. 12월, 구다국(句茶國)의 왕이 개마[국]이 멸망한 것을 듣고 害(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이로써 땅을 점차 넓게 개척하였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10년(AD27년, 丁亥)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爲左輔 松屋句爲右輔
10년(AD27년, 丁亥)
봄 1월, 을두지(乙豆智)를 좌보(左輔)로 삼고, 송옥구(松屋句)를 右輔(우보)로 삼았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11년(AD28년, 戊子)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羣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恃德者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擅侵吾邦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左輔乙豆智曰 “小敵之强 大敵之禽也 臣度大王之兵 孰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 王曰 “謀伐若何”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 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王以力盡兵疲 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王從之 貽書曰 “寡人愚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帥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於是 漢將謂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踰旬 未得要領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藉口以報皇帝” 遂引退
11년(AD28년, 戊子)
가을 7월, 한나라의 遼東太守(요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를 모아 싸우거나 지키는 계책을 물었다. 右輔(우보) 松屋句(송옥구)가 말하였다. “신이 듣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벌같이 일어나는데 명분없이 군대를 출동시켰습니다.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결정한 책략이 아니라, 필시 변방 장수가 이익을 노려 멋대로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을 거역하고 인심에 어긋나므로 그 군대는 반드시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험한 곳을 의지하여 기발한 계책을 내면 반드시 깰 수 있습니다.” 左輔(좌보) 乙豆智(을두지)가 말하였다. “작은 적은 강해도, 큰 적에게 잡히는 법입니다. 신은 대왕의 군사와 한나라의 군사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꾀로는 칠 수 있지만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은 “꾀로 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지금 한나라의 군사들이 멀리 와서 싸우므로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성을 닫고 굳게 지키다가 그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나가서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왕은 그렇게 여기고 尉那巖城(위나암성)으로 들어가 수십일 동안 굳게 지켰다. 한나라 군사들이 포위하여 풀어주지 않았다. 왕은 힘이 다하고 병사들이 피로하므로 을두지에게 “형편이 지킬 수 없게 되어가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물었다. [을]두지가 대답하였다.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 땅이 돌로 되어서 물나는 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오래 포위하고 우리가 곤핍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연못의 잉어를 잡아 수초에 싸서 맛있는 술 약간과 함께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 먹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따라 하면서 글을 보내었다. “과인이 우매하여서 상국에 죄를 얻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에서 이슬을 맞게 하였습니다. 후의를 감당할 길 없어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부하들에게 제공하려고 합니다.” 이리하여 한나라 장수는 성 안에 물이 있으므로 단번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였다. “우리 황제께서는 신을 둔하다고 하지 않고 군대를 출동하도록 영을 내려 대왕의 죄를 물었습니다. 국경에 다다른 지 열흘이 지났으나 요령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내]온 [글의] 뜻을 들으니, 말씨가 공순하므로 어찌 이대로 황제께 아뢰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13년(AD30년, 庚寅)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13년(AD30년, 庚寅)
가을 7월, 매구곡(買溝谷) 사람 상수(尙須)가 그 동생 위수(尉須) 및 사촌 동생 우도(于刀)와 함께 항복해 왔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14년(AD31년, 辛卯)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14년(AD31년, 辛卯)
겨울 11월, 천둥이 쳤으나 눈은 내리지 않았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15년(AD32년, 壬辰)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逸苟·焚求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其所欲 有不與者卽鞭之 人皆忿怨 王聞之 欲殺之 印明舊臣 不忍致極法 黜退而已 遂使南部使者鄒勃素 代爲部長 勃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儕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死無恨矣” 勃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 乃與之爲友 仇都等感愧 不復爲惡 王聞之曰 “勃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 賜姓曰大室氏
夏四月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以女妻之 後好童還國 潛遣人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 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瞽瞍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虎帝復其王號 是立武八年也
15년(AD32년, 壬辰)
봄 3월, 대신 구도(仇都)·일구(逸苟)·분구(焚求) 등 세 사람을 쫓아내어 서인으로 삼았다. 이 세 사람은 비류부장(沸流部長)이 되었는데 바탕이 욕심많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 우마, 재화를 빼앗아 마음대로 하고, 주지 않는 자에게는 채찍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이었으므로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하고 내쫓아버렸을 뿐이다. 마침내 남부(南部) 사자(使者) 추발소(鄒勃素)를 대신 부장으로 삼았다. [추]발소는 부임하여 별도로 큰 집을 짓고 거처하였는데, 구도 등이 죄인이었으므로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저희들은 소인이어서 왕법을 범하여 부끄럽고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잘못을 용서하시고, 개과천선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추]발소는 그들을 이끌어 올려 같이 앉아 “사람이 잘못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잘못하여도 고칠 수 있으면 선(善)함이 매우 큰 것입니다.”고 말하고, 그들과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구도 등이 감격하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았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추]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하니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고는 성(姓)을 주어 대실씨(大室氏)라고 하였다.
(대무신 20년, AD37년) 여름 4월,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로 놀러 갔을 때 낙랑왕(樂浪王) 최리(崔理)가 나왔다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그대의 안색을 보니 비상한 사람이구나. 어찌 북국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는냐?”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돌아와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후에 호동은 귀국하여 몰래 사람을 보내 최씨 딸에게 말하였다.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뿔피리를 찢고 부수면 내가 예로써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 이에 앞서 낙랑에는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명령을 내려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최씨 딸이 날 선 칼을 가지고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의 [가죽]면과 뿔피리의 주둥이를 찢고 [부순 후] 호동에게 알렸다. 好童(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치게 하였다.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우리 군사가 갑자기 성 밑에 다다른 연후에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낙랑을 멸하려고 혼인을 청해서 그 딸을 데려다 며느리로 삼은 후에, 본국으로 돌아가서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
(대무신 20년, AD37년, 10월 낙랑 멸망)
(대무신 20년, AD37년) 겨울 11월, 왕자 好童(호동)은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왕의 손녀가 낳은 사람이다.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왕이 심히 사랑하여 호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첫째 왕비는 [그가] 계승권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호동이 저를 예로써 대접하지 않으니 아마 저에게 음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고 참언하였다. 왕은 “당신은 남의 아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왕비는 왕이 믿지 않는 것을 알고, 화가 장차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울면서 “청컨대 대왕께서는 몰래 살펴주십시요.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첩이 스스로 죄를 받겠습니다.”고 고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에게] 죄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당신은 왜 스스로 변명하지 않느냐?” 하고 물었다. [호동은] 대답하였다. “내가 만약 변명을 하면 이것은 어머니의 악함을 드러내어 왕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칼에 엎어져 죽었다.
*好童(호동)의 출생 = AD15년.
*AD37년에 자살. AD37년 - AD15년 = 22살 + 1살 = 23살.
사론(史論): 이제 왕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죄없이 죽였으니, 그가 어질지 못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호동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꾸지람을 들을 때에는 마땅히 순(舜)이 고수(瞽瞍)에게 하듯이 하여, 회초리는 맞고 몽둥이면 달아나서,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호동이 이렇게 할 줄 모르고 마땅하지 않은 데서 죽었으니, 작은 일을 삼가는 데 집착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공자(公子) 신생(申生)에게 비유할 만하다.
12월, 왕자 해우(解憂)를 太子(태자)로 삼았다. 사신을 한(漢)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고구려의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建武) 8년이었다.
*建武八年(壬辰,公元三二年)<자치통감>
十二月,高句麗王遣使朝貢,帝復其王號。
*대무신 16년, AD33년, 癸巳.
*대무신 18년, AD35년, AD45년 = 翊太子 출생.
*대무신 19년, AD36년, 5月, 갈사태후 사망, 丙申(= AD36년).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20년(AD37년, 丁酉)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20년(AD37년, 丁酉)
(10月) 왕은 樂浪(낙랑)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24년(AD41년, 辛丑)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24년(AD41년, 辛丑)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 梅花(매화)가 피었다.
고구려본기 大武神王(대무신왕) 27년(AD44년, 甲辰)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 號爲大武神王
27년(AD44년, 甲辰)
가을 9월, 漢(한)나라 光武帝(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樂浪(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取(취)하여 郡縣(군현)으로 삼았으므로, 薩水(살수) 已南(이남)이 漢(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죽었다. 大獸村原(대수촌원)에 장사지내고, 號(호)를 大武神王(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
*대무신왕 출생 BC7년 + AD44년 = 51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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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본기 閔中王(민중왕)
閔中王 諱解色[주석1]朱 大武神王之弟也 大武神王薨 太子幼少 不克卽政 於是 國人推戴以立之 冬十一月 大赦
민중왕(閔中王)은 이름이 해색주(解色朱)이고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맡아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그를 세웠다. 겨울 11월, 크게 사면하였다.
*원년(AD44년, 甲辰)
二年 春三月 宴羣臣 夏五月 國東大水 民饑 發倉賑給
2년(AD45년, 乙巳)
봄 3월,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漢人入寇 麻樂迎戰 大破之
三年 秋七月 王東狩獲白獐 冬十一月 星孛于南 二十日而滅 十二月 京都無雪
3년(AD46년, 丙午)
가을 7월, 왕은 동쪽으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살별[星孛]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야 없어졌다. 12월,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 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 夜有光 冬十月 蠶支[주석3]落部[주석4]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 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4년(AD47년, 丁未)
여름 4월, 왕은 민중원(閔中原)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7월, 또 (閔中原에서) 사냥하다가 石窟(석굴)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낼 것이며, 절대로 새로 능묘(陵墓)를 짓지 말라.” 9월, 동해 사람 고주리(高朱利)가 고래를 바쳤는데 [고래의] 눈이 밤에 빛이 났다. 겨울 10월, 잠지락부(蠶支落部)의 대가(大家) 대승(戴升) 등 1만여 가(家)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하였다.<후한서(後漢書)에는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 만여 구(口)』라고 하였다.>
*高朱利= 高婁의 손자.
五年 王薨 王后及羣臣 重違遺命 乃葬於石窟 號爲閔中王
5년(AD48년, 戊申)
(3月) 왕이 죽었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유명(遺命)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閔中王(민중왕)이라고 하였다.
*3月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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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본기 慕本王(모본왕)
慕本王 諱解憂 一云解愛婁 大武神王元子 閔中王薨 繼而卽位 爲人 暴戾不仁 不恤國事 百姓怨之
모본왕(慕本王)은 이름이 해우<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하였다>이고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죽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사람 됨됨이 사납고 어질지 못하며 국사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대무신왕 9년, AD26년에 출생.
*AD48년, 3월, 28살에 즉위.
元年 秋八月 大水 山崩二十餘所 冬十月 立王子翊爲王太子
원년(AD48년, 戊申)
가을 8월, 홍수가 나서 산이 20여 군데 무너졌다. 겨울 10월, 왕자 익(翊)을 왕태자로 삼았다. (14살?)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2년(AD49년, 己酉)
봄, 장수(麻樂, 乙布)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마락, 을포. 蔡棘(채극)
*AD49년, 후한서의 내용 그대로이다.
*3년(AD50년, 庚戌)
四年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4년(AD51년, 辛亥)
왕은 날로 포학해져 앉아 있을 때에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았고, 누울 때에는 사람을 베개 삼았다. 사람이 혹 움직이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신하로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에게 쏘았다.
*5년(AD52년, 壬子)
六年 冬十一月 杜魯弑其君 杜魯慕本人 侍王左右 慮其見殺 乃哭 或曰 “大丈夫何哭爲 古人曰 '撫我則后 虐我則讎' 今王行虐以殺人 百姓之讎也 爾其圖之” 杜魯藏刀以進王前 王引而坐 於是 拔刀害之 遂葬於慕本原 號爲慕本王 三國史記 卷 第十四
6년(AD53년, 癸丑)
겨울 11월, 두로(杜魯)가 임금을 죽였다. 두로는 모본 사람으로 왕의 좌우에서 시중하였는데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우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장부가 왜 우느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를 쓰다듬으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로다.’고 하였다. 지금 왕의 행함이 잔학하여 사람을 죽이니 백성의 원수다. 네가 그를 죽여라.” 두로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나아가니 왕이 [그를] 눌러 끌어다 앉자, 이에 칼을 뽑아 왕을 죽였다. 마침내 모본원(慕本原)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모본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4
*골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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