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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나라 칙사를 혼낸 채제공 이야기
채제공은 1774년(영조50) 평안 감사로 부임한다. 당시 영조는 그를 보내기 매우 아쉬워, 그가 조정을 떠날 때 손수 “관서에 대해서는 내 마음이 풀리나 내 그리움은 어찌하리오?[關西心弛, 予戀曷勝?]”라는 여덟 자를 쓰고서 이를 품에 간직하라 하였다. 또 “내가 쇠약함이 날로 심한데, 경이 서쪽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슬프다.[衰日深, 卿當向西, 予心悵然.]”라고 하교하기도 하였다.
채제공이 평안 감사로 부임하여 시행한 일 중 하나가 백여 년간 적체된 귀록채(鬼錄債) 13만 냥의 탕감인데, 이 일은 이후 반대 당파에게 장오죄(贓汚罪)를 저질렀다는 논핵으로 이어졌다. 특히 대사헌 김문순은
①평양 감사 재직시 장오죄를 저지른 점,
②정조 즉위년 사도세자 추숭사건과 관련하여 이들과 결탁한 환관 김수현의 공초에 채제공의 이름이 나온 점,
③홍국영과 함께 사도세자와 정조의 정통성을 주장한 점을 들어 본격적인 역모 사건으로 번진다. 그래서 채제공은 1785년까지 정치적 은거기를 지낸다.
1786년(정조10) 9월 6일 정조가 효창묘(孝昌墓)에 행행(幸行)할 때, 채제공은 노량진에 머물고 있다가 길 어귀에서 배알한다. 정조는 기다렸다는 듯 그 자리에서 밀부(密符)를 전달한다. 이는 정조가 채제공에게 정승의 직임을 맡기기 전에 두 번째 전환의 계기[再轉之階]를 주기 위해서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그리고 채제공을 평양으로 보낸 뒤 3일에 걸쳐 대대적인 전교를 거행하여 그의 무죄를 밝힌다.
그런데, 이해 5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훙서(薨逝)하였으므로 중국 황실에서 칙사를 보냈다. 칙사는 8월 16일 의주에 도착하여 9월에 유제(諭祭)를 지내고 다시 올려보낸 상태였다. 그러므로 정조는 채제공에게 칙사를 접대하는 등의 절차를 유념하여 거행하라고 신칙하였다. 이후 채제공은 채제공은 2달 만에 도목 정사의 포폄 기한을 어긴 죄로 삭직되지만, 1788년(정조12) 그를 우의정에 제수되면서 화려하게 조정에 복귀한다.
채제공의 평안 병사 재임 기간은 2달 남짓에 불과했지만 평안 감사 때처럼 월봉을 덜어 군포에 보태고, 소금 수천 석을 받아 성 내에 묻어 비축하였다. 또한 이것이 허비되지 않게끔, 평안 병영 및 각 산성에 봉해둔 은전과 포목을 다른 용도로 옮길 경우, 반드시 사유를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도록 청한다. 이렇게 정확한 공문서를 주고받음으로써 수입과 지출을 확실하게 기록으로 남기게 하는 한편, 평안도의 재정을 감사나 병사가 사사로이 운용할 경우를 경계하였다.
그렇지만 “채제공은 악명높은 칙사들을 어떻게 대접했을까?”에 대한 부분은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후대에는 여러 야담과 일화가 만들어져 전승되었고, 결국 기록으로까지 남게 되었다.
상국 채제공이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을 때(1786, 정조10) 청나라 사신이 왔는데 흉포한 대통관(大通官) 한 명이 재화를 탐하여 나라를 흔들기 위해 아래에서 조종하여 폐단을 적지 않게 일으켜 의주에서 식참(食站)에 이르기까지 온갖 트집을 잡으니 열읍에서 적지 않게 뇌물을 주니 실로 청나라 사신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명령을 거짓으로 전달하여 “조선에는 산이 많아 곧은 길이 없으니 금번에는 곧은 길을 따라 갈 것이다. 곧장 동선령(洞仙嶺, 황해도 황주와 봉산의 분기점)까지 산을 뚫고 곧은 길을 만들지니, 명을 어기지 말라.”
라고 하였으니 모두 동요시켜 뇌물을 탐하려는 속내였다.
열읍의 수령들이 낙담하여 뒤숭숭한 마음을 그치지 못하여 관자(關子)와 노문(路文)이 평안 감영에 모두 이르니,
채제공이 보고서 “내게 방법이 있으니 관문은 보내지 말라.”라고 하며 걱정스레 여기지 않았다. 사행이 평양에 들어와서도 트집 잡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니 건장한 나졸에게 “너는 사신이 묵는 관사에 가서 통관 아무개란 놈을 곡직을 따지지 말고 잡아와라.”라고 분부하였다. 나졸이 명령을 받고서 가서 그 명을 전하니 통관이 냉소하면서 사신에게 들어가 고하였다.
사신이 “네게 죄가 있어서 잡혀가니 가서 보기만 하라. 죄가 있어서 벌을 받는다면 진실로 달게 여겨야 할 것이다.”
통관이 나졸을 따라 가니 채 관찰사가 너른 선화당에 크게 좌기(坐起)를 마련하였다. 왼쪽에는 서윤(庶尹), 중군(中軍), 찰방(察訪)이 늘어섰고 오른쪽에는 6비장들이 시립했고, 뜰 가운데는 대군물(大軍物)을 설치하여 총검수 수백명과 노령(奴令), 기수(旗手)가 좌우로 나뉘어 서있어 외견의 외엄이 엄숙했다. 이에 통관을 잡아 들여 명을 내렸다.
“너는 상국 사행의 막하로서 매우 당연하게도 분수를 지키고 마음을 잡아야 하는데 어찌 감히 상국의 세력을 믿고 이웃 나라를 멸시하여 아래에서 조종하여 온갖 트집을 잡아 나라를 흔들어 지극히 심하게 토색질을 하느냐? 네 죄는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또 산을 뚫어 길을 낸다고 멋대로 명을 내렸으니 시행할 수 없는 일일 뿐 아니라 자고로 전례(傳例) 없었으니 어찌 이처럼 방자함이 철철 넘친단 말이냐?”
통관이 굽히지 않고 패악스러운 말로 발뺌하니 채 관찰사가
“너는 죄를 인정하라.”라면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통관이 계속 불경하게 “네가 어찌 나를 벌하겠느냐? 나는 받지 않겠다. 네가 어찌 상국의 사행을 멸시하느냐. 맹세컨대 네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채제공이 시자에게 나무곽을 하나 꺼내라 명하고는 재빨리 붉은 옷을 꺼내어 입고서
“네가 내가 입은 옷을 보고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느냐?”라고 호령하였다.
통관이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말문이 막힌 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싹싹 빌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사죄하였다. 채 관찰사가 이에 곤장 몇 대를 엄히 치고
“지금 우선 간략하게 벌을 내리니 다시는 폐해를 일으키지 말고 지나가라.”
라고 꾸짖으니, 통관이 머리를 감싸고 떠났다.
사신이 그 일을 듣고서 “네가 나빠서 죄를 받았으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라면서 신칙하고는 가는 중에 채 상공의 일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부끄러운 기색이었다고 한다. 오가는 길에 한 번도 폐해를 일으키지 않아 여러 읍이 그 덕에 편안하였다.
대개 채상공이 연경에 사신 갔을 때 나랏일을 안정시켜 양국을 모두 편안하게 하였다면서 청 황제가 특별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제수하고 홍포를 하사하였다. 우리 나라 임금의 품계인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보다 자품이 높으므로 존엄을 누를까봐 감히 몸에 걸치지 못한 것이다. 통관이 처음에는 모욕했지만 홍포를 보고서 어찌 머리를 숙이고 놀라 복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기개있는 채상국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못 했을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 채향기는 탐욕에 눈이 멀어 온 나라를 휘감는 폭군을 만났습니다. 그는 밑바닥부터 나라를 조종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습니다. 수도에서부터 식량 보급소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갈취가 자행되었고, 각 마을과 촌락에서는 뇌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청나라 사신의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거짓 명령을 내렸습니다.
"조선은 산이 많아 곧은 길이 없으니, 이번에는 곧은 길로 가자. 동선 능선을 가로지르는 산길로 가자. 명령도 어기지 않겠다."
이 모든 것은 그의 탐욕스럽고 교활한 의도를 보여줍니다. 마을과 촌락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관리들과 사신들이 모두 조선 진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를 본 채향기는 걱정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내 계획이 있으니 사신들을 이용하지 마라."
청나라 사신이 돌아왔을 때, 여전히 많은 착취가 자행되고 있었다. 이에 채는 정예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사원으로 가서 그 관리라는 자를 죄가 있든 없든 모두 체포하라!"
병사들은 명령에 따랐다.
전령이 명령을 전하러 갔으나, 통신 담당 관리는 그를 비웃었다. 그는 사신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고, 사신은 "당신은 이미 죄를 지었으니 지금 당장 그를 만나러 가라. 나는 내 죄에 대한 처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했다. 전령은 사신과 함께 갔고, 사신은 넓은 현화당에 큰 전각을 마련했다. 좌정에는 황실 서기관과 중앙군 관리들이, 우정에는 여섯 명의 부장들이 서 있었다. 안뜰은 군사 장비로 가득 차 있었고, 수백 명의 포병과 검병, 그리고 노예 기수들이 양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겉모습은 엄숙했다. 그러자 사신은 그 관리(血血)를 붙잡고 소리쳤다.
"너는 상급국의 사신을 모시고 성실히 직무를 수행해 왔으면서도, 상급국의 권력을 빙자하여 이웃 나라를 멸시하고 아래에서부터 나라를 조종하여 온갖 소란을 일으키고 나라를 뒤흔들었다. 네 요구는 너무 지나치다! 너는 만 명의 죽음을 당해야 마땅하다. 게다가 산길을 통해 허가도 없이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불법일 뿐 아니라 전례도 없는 일이다. 어찌 감히 이토록 무모하고 오만하게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관리는 완강하게 어이없다는 듯이 자백했다.
사신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너는 벌을 받아야 한다!" 늘 불손한 관리는 대답했다.
"어찌 저를 벌하시는 겁니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감히 상급국의 사신을 모욕하다니! 맹세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사신은 말했다.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건가?"
그는 하인에게 나무로 된 물건을 가져오라고 명령했고, 그 물건에서 붉은 옷이 순식간에 나왔다. 그러자 사신은 그 매를 자신에게 쓰고는
"내가 입은 것을 보고도 벌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를 본 관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라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사신은 그에게 매를 몇 대 때리라고 명하고는
"지금은 가벼운 벌만 내리겠다. 꾀를 부리려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관리는 머리를 감싸고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사신은 "네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는데, 누구의 잘못인가?"라고 말했다. 그는 꾸중을 듣고는 길을 가는 동안 채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비록 사소한 잘못은 개의치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도를 오가는 그의 여정 동안… 아무런 사고도 없이 온 지역이 그의 노력에 의지했다. 재상이 연나라를 방문했을 때, 국정을 적절히 처리하여 양국에 이익이 되자 청나라 황제는 특별히 그를 금광광대왕으로 임명하고 붉은 도포를 하사했다. 우리 황제의 직위도 금광광대왕이지만, 그보다 훨씬 높은 지위에 있어 감히 그런 명예로운 칭호를 받지 못한다. 관리들은 처음에는 그를 업신여기었으나, 붉은 도포를 보자 어찌 감탄하며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덕성이 부족한 재(趙)는 결코 그런 일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서야만록』에서 발췌)
당시 청의 칙사는 조선의 국왕조차 쉽게 제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재앙이었다. 게다가 산을 뚫어 길을 내라는 명은 어불성설 그 자체이다. 무소불위의 땡깡을 부리던 칙사가 채제공에게 곤장을 맞고 목숨만 살려달라고 사죄하였으니, 그야말로 암행어사 박문수의 야담보다 더 통쾌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 위에 허구적 상상이 덧붙여진 일종의 팩션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이라는 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조선이 중국(명·청)의 제후국으로서 사대관계를 맺을 때,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의 관복, 의례, 서열을 중국 황제국 기준보다 두 단계 낮추어 적용하던 외교·예법 원칙이다. 그렇기에 조선의 왕에게는 중국의 황제, 황태자 다음 서열인 친왕례(親王禮: 황태자를 제외한 황족 서열에 준하는 대우)에 따라 옷을 보냈다. 대신들의 옷 역시, 중국 3품의 옷을 이 나라의 1품이 입도록 하였다. 왕을 비롯하여 신하는 물론, 국가의 품위(品位)까지 중국보다 두 등급 아래이다. 즉, 조선의 정1품도 중국의 칙사 앞에서는 정3품으로 격하되는 것이다.
그리고 금자광록대부란 전국시대 중대부(中大夫)에서 유래하여 당대는 정3품, 송대는 정2품, 원대는 종1품에, 명·청대는 금자광록대부는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특진광록대부라는 명칭으로 대학사, 즉 황제의 자문에게만 주는 정 1품 자리였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자면 친왕급의 조선 임금의 품계가 ‘대부’라는 점은 사실 오류이고, 금자광록대부라는 품계 명도, 특진광록대부라는 명칭도 실제 제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칙사보다 높았던 점은 맞았을 것이다. 다만 금자(金紫) 은자(銀紫) 명칭은 독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일부러 틀린 정보를 넣었을 수도 있다.
또한 건륭제가 채제공에게 품계와 홍포를 하사하였다는 구절도, 건륭제가 채제공에게 “조선 사신의 예모가 아주 훌륭하여 다른 번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朝鮮使禮貌甚好, 非他外藩可比.]”라고 예우하였다고 해서 그에게 정 1품의 품계를 제수하였을 리는 만무하고, “희고 매우 뚱뚱하며 얼굴에는 주름이 없고 수염도 그리 많지 않았으며 흰 머리털이 빛났다.[面白晢甚肥澤, 無皺紋, 須冉亦不甚白, 髮光閃爍.]”라고 건륭제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채제공 또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평안 병사로 부임하면서 일부러 중국 관복을 챙겨서 갖고 갔다는 것도 억지스러운 흐름이다. 이는 그저 작가의 도파민 넘치는 결론을 위한 장치라고 봐야할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이 야담이 채제공에게 국왕보다도 높은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실제 품계를 반영한 것이라기보다, 정조가 각별히 신임했던 채제공의 위상을 극적으로 부각하기 위한 서사적 장치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이 이야기를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으로 연출한다면, 촬영용으로 급히 제작한 홍포와 하조관의 세부 문양이 드러나지 않도록 저물녘을 배경으로 삼고, 이후에는 장인들이 관복을 분주히 제작하는 장면을 비하인드처럼 덧붙여 야담 특유의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글쓴이 : 이도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