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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년 실업 문제에 대해 논하라
인류학자 에드워드 사피어는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그가 속한 사회의 언어습관 위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소설 1984의 ‘신어사전’에서 전쟁은 평화로, 자유는 예속이라는 어휘로 대체된다. 언어에 의한 현실 왜곡이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에서도 발생한다. 대표적인 단어가 중소기업의 구인난과 청년의 구직난 문제를 지칭하는 ‘미스매치’다. 기업과 취업준비생 간 발생하는 미스매치는 서로 원하는 조건에만 부합하면 매칭에 성공하리란 전제를 상정한다. 그러나 현재의 노동시장은 어울리지 않는 짝이 만난 문제 정도로 볼 수 없다.
미스매치라는 신어는 1·2차 노동시장 간 노동조건이나 지역별 일자리 등의 총체적인 불균형 상황을 왜곡한다. 문제는 미스매치가 아닌, 일자리 환경의 미스-밸런스(불균형)다. 대도시, 대기업 중심의 경제성장, 1990년대 산업구조조정 등으로 고착화된 수직적 분업구조는 노동조건의 위계도 낳았다. 중소기업의 월 평균임금은 대기업보다 약 40%가량 낮다. 중소에서 중견으로,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역동성도 찾기 어렵다. 청소년의 80%대가 대학에 진학하고, 산업 대부분이 서울 및 대도시에 몰려있는 환경에서 자란 청년들은 자신의 조건에 적합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적정 급여와 복지, 발전가능성을 갖춘 일자리 자체가 극소수다.
노동시장에 만연한 미스-밸런스는 청년실업과 저성장 사이 악순환을 지속시킨다. 고용의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소, 서비스업 저임금이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일단 취직에 성공한 청년조차 첫 일자리 유지율이 37.7%로 저조하다. 일자리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실업 문제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중소기업 생산성 또한 10년간 대기업 대비 30%수준에 머물러 있다. 우리나라 사업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지지부진한 현 실정에서 약한 성장 동력은 고용감소로 이어진다.
미스매치가 아닌 미스-밸런스 완화를 위한 중소기업 진흥정책이 요구된다. 지난 21일 통과한 추경으로 정부는 중소기업 R&D 인력 확보를 위한 예산을 더하는 등 중소기업 전용 연구 지원을 2배 확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중소기업에서 개발한 기술의 사업화 성공률을 높여 생산성 증대까지 이어져야 한다. 현장에서 체감할 규제개혁으로 중소기업을 혁신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독려하는 것이다. 또한 지역별로 상이한 산업구조, 고용 수급 상황 등을 고려해 제조업, 서비스업 등의 산업 및 노동환경별 특수성에 따른 정책 개발이 필요하다. 불균등을 낳는 서로 다른 조건들을 파악해 맞춤형 해결책을 내놓는 방식이다.
정부의 지원은 본질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힘들다. 이번 추경으로 예산이 증액된 청년내일채움공제도도 중소기업에 취직한 청년이 대상인데다 단기적인 보조금 지원 정책이다. 근본적인 미스-밸런싱을 해결하긴 어려운 접근이다. 공공부문이 아닌 이상 일자리 창출 주체는 민간인 까닭이다. 그러나 정부 정책은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하는 규칙을 정할 수 있다. 균형 잡힌 노동환경을 조성해야 매칭도 활발해진다. 이를 위해 신어에 의한 왜곡이 아닌 정확한 언어로 시장을 진단하고 공정한 룰을 적용해야 한다. (1,556)
2. 포털은 언론인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모든 인간관계와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보편적 이념이 되었다. 예컨대 정치학에서 정당은 생산자로, 유권자들은 소비자로 치환되곤 한다. 포털 뉴스의 운명도 비슷하다. 기자는 뉴스 생산자가 되어 트래픽 늘리기를 위한 뉴스 생산에 집중한다. 뉴스 소비자는 댓글 수가 많거나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단 글을 클릭한다. 한 언론사의 능력을 측정하는 기준이 보도의 정확성이나 전문성이 아닌, 시장에서 팔릴 ‘상품성’이 된 것이다.
시장에서 탄생한 포털은 뉴스와 공론장의 상품화를 유발한다. 사업 초기 네이버는 공익 달성을 위해 뉴스를 제공한 것이 아니었다.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하는 플랫폼 사업의 특성상, 뉴스는 광고주와 잠재 소비자를 유인할 효과적인 상품이었다. 인터넷 언론 중에는 표현의 자유를 무기 삼아 취재보다 어뷰징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들이 생겨났다. 수만 개의 댓글이 달리는 뉴스 하단부의 공론장은 광고주의 눈길을 끌었다. 시장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자가 자유롭게 경쟁하고, 소비자는 자신의 선호에 따라 상품(기사)을 선택하는 이곳은 자유시장의 첨병이다.
그러나 언론의 존재 기반인 민주주의의 발전 차원에서, 상품화된 언론은 자신의 기반에 해를 입힌다. 포털이 창출한 공론장은 시장이 받는 압력에 따라 축소될 여지가 많다. 네이버는 비판 여론에 직면할 때도 회사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대안을 내놨다. 편집된 뉴스의 정치적 편향성이 제기되자 경영진은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편을 택했다. 그 결과 포털뉴스 70% 가량이 속보와 정보전달 위주인 통신사 뉴스로 채워졌다. 단신이 만들어낸 공론장의 수준은 높아지기 힘들다. 최근 드루킹 사태 이후 내놓은 댓글 규제 방안도 자유롭게 의견이 오가야 하는 공론장의 개방성을 제한한다. 뉴스사업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지키면서 제재를 가하는 어설픈 해결책은 언론이 제공해야 할 민주적 공론장의 지위를 손상시킨다.
따라서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포털과 공론장을 형성하는 언론의 역할은 분리되어야 한다. 포털 댓글창에 편중된 공론장의 이동이 필요한 것이다. 네이버도 받아들인 아웃링크 전환이 그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포털에 의존해온 언론사들도 체질전환을 꾀해야 한다. 실제로 네이버가 제휴 언론사에 아웃링크 전환 여부를 묻자 유보적 입장을 드러낸 언론사가 대부분이었다. 포털에서 독립할 자구책이 마땅치 않음을 방증한다. 막대한 속보량이나 자극적 제목쓰기 등 얕은 수로 소비자를 사로잡으려던 안일함에서 벗어나, 시민이 찾는 언론사로 나아가야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뉴스가 아닌, 고유의 정체성을 갖춘 콘텐츠를 제공하는 전문가주의가 요구되는 이유다.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일수록 ‘XX매체’만이 만들 수 있는 뉴스로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포털과 언론이 추구하는 윤리는 그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공익을 해치지 않고 기업 활동을 해야 한다면, 후자는 공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직업윤리이자 존재이유다. 그런 점에서 시장이 추구하는 자유와 언론이 필요로 하는 자유의 성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저널리즘의 원칙이 관철될 독립된 환경을 창안하는 일은 새로운 미디어 생태계에서 언론 앞에 놓인 과제다.
3. 탈진실과 저널리즘
가짜뉴스도 나름의 정의(正義)가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이끈 시민의 승리 뒤에도 가짜뉴스가 있었다. 17세기 촉발된 팜플렛 전쟁은 루이14세 절대왕정에 대한 근거 없는 악의적 비방을 팜플렛에 실었다. 팜플렛은 시민으로부터 분노의 ‘감정’을 이끌어냈고, 인민주권을 위해 싸우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감정으로 여론을 지배하는 탈진실은 비단 오늘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는 저널리즘의 이상이 가짜뉴스를 통해 실현되는 역설은 시대를 막론하고 발생했다. 진실 추구라는 저널리즘의 제1원칙이 사회 정의라는 지향점과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17세기와 달리 시민의 자유가 보장된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의 탈진실의 효과는 선거의 정치에서 극에 달한다. 지난 대선에서 선관위가 가짜뉴스와의 전쟁을 선포한 맥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수결주의 중심의 대의제에서 선거 승리는 다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체제에서 선거는 시민 참여 영역이 가장 극대화되는 제도다. 때문에 정치에서 점차 소외되는 시민은 선거라는 마지막 보루에서 자신이 바라는 사회적 정의를 세우고자 한다. 정치인의 말이 곧 진실이 되는 현실도 문제지만, 선거 전략으로 SNS와 포털에서 이를 유통하는 시민의 적극성을 간과할 수 없다. 시민은 정치인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무지한 민중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묻히기 쉬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려는 정치적 존재다.
저널리즘의 실패는 이러한 시민의 능동성이 단 하나의 신념을 쫓도록 방기했다는 데 있다. 한 사회의 정의는 그 자체로 주어지는 가치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합의를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이러한 다양성을 유지하고, 시민이 토론할 진실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정당이 겨루는 다수결주의 민주제 하에서 여론은 단일한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인의 말은 시민의 취약한 부분을 건듦으로써 힘을 발휘한다. 러스트 벨트의 백인 노동자가 트럼프를 지지한 이유는 그의 언변이 화려해서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품던 불만과 소외감에 대해, 애국자라는 정의의 언어로 그들을 감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탈진실은 사회적 정의가 아닌 전체주의적 권력을 확대할 뿐이다. 한 권력자의 말만이 유일한 진실의 지위에 오르며 다른 의견과 사상은 모두 배척한다. 결국 저널리즘은 여론의 다양한 흐름을 키우지 못하고, 진실 추구로서 사회 정의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조중동과 한경오로 대별되는 기성 언론을 향한 시민사회의 불신에는 ‘이들은 누구의 편인가’라는 당파적 질문이 자리 잡는다. 우리편이 아니라는 원색적 비난은 그간 한국 언론이 특정 정치 세력의 정의를 옹호해 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시민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언론의 소임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시민의 편에 서야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가 공론장에 나올 수 있도록 여러 이슈를 의제화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는 정파적 진실이 아닌 사실들의 정직한 수집과 조합이 만든 진실을 제공할 때 가능해진다. 그래서 대립하는 두 세력이 마주할 장을 마련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합의할 만한 정의를 갖춘다면 시민의 취약함을 건드리는 탈진실은 설 자리를 잃는다.
4. 미투 운동에 대한 언론 보도의 장단점에 대해 평가하고 단점을 극복할 방안에 대해 논하라.
20년 전 모 지상파 뉴스 앵커는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자살한 일을 보도하며, 정조관념이 희박한 세태에 생각할 바를 던져준 사건이라 칭했다. 피해자의 피해 사실은 정조를 잃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가해자의 잘못엔 침묵했다. 20년 전과는 달라졌지만, 성범죄 관련 의제를 다룰 때 언론은 피해 여성을 부각하는 방식을 취하곤 했다.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이라는 표현으로 피해자를 대상화하거나, 이영학의 변태적 성욕을 강조해 개인적 일탈로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다. 성범죄를 프레이밍하는 데 있어 언론은 문제의 구조적 본질에 다가가기보다, 개별적인 갈등을 드러내는 데 치중한 것이다.
미투운동의 촉발은 이러한 언론의 보도 태도에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의제를 생성하는 단계부터 가해자의 잘못을 부각하고, 권력형 성범죄라는 프레임으로 고발·폭로에 나섰다. MBC의 경우, 서지현 검사 이후 줄줄이 폭로된 사건에 가해자의 이름을 붙여 기사화했다. JTBC는 피해자의 증언에 귀 기울여 여성들의 말하기에 힘을 보탰다. 경향신문은 한발 더 나아가 미투를 ‘혁명’이라 칭하며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조명했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꼬집자 터져 나오는 폭로는 개별화된 사안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미투라는 이름 아래 변화를 요구하는 응집력 있는 하나의 목소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 이슈를 의제화한 데에 그쳤다. 의제가 성장해 사회적 합의로 해결책을 마련할 만큼의 생명력을 불어넣진 못한 까닭이다.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폭로 대상에 올랐지만 경찰 조사 이후 그들을 쫓은 보도는 찾기 힘들다. 안태근 검사를 조사한 검찰의 안일한 태도는 잊혀졌다. 또한 운동 초기 반짝 반응한 국회에는 수십 가지 관련 개정법이 계류 중일 뿐이다. 언론의 지속적인 관심 및 감시 없이 폭로의 동력도 점차 약해져가는 상황이다. 의제의 힘이 약화하는 가운데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만이 횡행한다면, 결국 운동은 또다시 개인들의 상처로 흩어져버리고 만다.
따라서 언론은 의제의 생성부터 성장, 소멸의 전 과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아픔이 사회문제로 확장되고, 이를 방지할 법적·윤리적 토대를 만드는 전 과정을 언론이 의제화하는 것이다. 종래의 의제 설정 역할을 넘어 언론이 끝까지 함께 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여성들에게 싸울 힘과 신뢰를 줄 수 있다. 실제로 뉴욕타임즈는 미투 보도 이후 기자와 시민단체, 일반 시민들이 모여 수개월간의 여정을 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와 함께 저널리즘의 역할을 상기하고, 시민사회가 언론을 지지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미투를 통해 언론과 시민이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의제의 온전한 생애주기를 확립하는 일은 곧 언론의 관성을 타파하는 시도일 것이다. 언론 역시 남성중심주의적 관념을 내재한 사회적 산물이다. 그러나 성범죄를 흥미 위주의 선정적 보도로 다루곤 하던 관행은 미투의 시작으로 자정작용을 거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 구조 자체의 개혁을 책임지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기존의 보도 관성에서 탈피해 저널리즘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5. 중요한 이슈가 또 다른 중요 이슈로 가려지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논술하시오.
기자는 사고를 사건화하고, 사건을 의제화한다. 언론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고들과 발화되는 말, 정부와 기업의 행위 가운데 특정 이슈를 선택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공중에 전한다. 민주적 사회에서 언론에 의해 공표된 의제는 나름의 생애주기를 갖는다. 처음 기자의 취재로 ‘생성’된 문제의식이 공론장에서 토론을 통해 ‘성장’하고 대안을 찾아갈 때 ‘소멸’한다. 주기가 명확한 의제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기능을 한다. 단순 사고로 치부될 수 있는 일이 의제화되어 발휘하는 힘은 언론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의제의 생애주기는 불분명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이었던 최태민-최순실 부녀에 관한 의혹은 대선 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침묵했고 국가 권력의 최정상에 있던 한 사인의 존재는 의제화되지 못했다. 태블릿PC라는 결정적 증거가 나온 뒤에야 정권 말 적폐청산이 의제화됐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면서 이 의제는 야권의 정치보복 프레임과 경합해 점차 생명력을 잃었다. 뇌물 의혹의 중심에 있던 기업인을 둘러싼 판결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연루자들의 개별적 사법처리 외에도 우리 사회의 구조적 적폐가 얼마나 사라졌는지 시민들은 알지 못했다. 의제는 쉽게 사멸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회, 정치적 쟁점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봉합되는 정도로 그치는 한계가 생긴다. 수많은 공적 의제가 급속히 성장했다 요절을 되풀이하면 갈등은 해결되지 못한 채 잊혀지기 일쑤다. 한국사회는 갈등 조정이 어렵고, 새로운 이슈를 향해 등 돌리는 냄비근성이 심하다는 비판은 언론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언론이 정치나 자본 권력의 눈치를 보게 된다면 생성 주기를 관장할 수 있는 의제를 만들기 어렵다. 대형 비리 및 부패 문제가 다른 중요 이슈에 묻혀 언론플레이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특정 집단의 입맛에 맞는 의제만이 쉽게 자리 잡는다면, 시민사회에서 해결되지 못한 구조적 문제는 얼굴을 달리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언론은 본연의 독립성을 회복하고, 의제의 온전한 생애주기를 확립해야 한다. 비리 의혹에 쉽게 침묵해버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제화할 독립적 여건이 필요한 이유다. 의제의 요절을 방지하기 위한 후속보도도 꾸준히 내보내야 한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적폐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지지부진한 분야는 어디인지 따져 물어야 똑같은 일이 터져 나오지 않는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재벌 갑질, 재해, 재난 구조 실패 문제 등도 반짝 등장했다 사라지는 의제 실패의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소음과 소리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명료한 메시지를 담는다. 언론 보도 역시 지나가면 그만인 소음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찌르는 공적 의제여야 한다. 민주적 사회일수록 이러한 의제들은 저항과 억압 없이 공론장에 진입할 수 있다. 때문에 의제의 진입장벽이 높지 않다. 자신의 의제를 끝까지 관철시키고, 변화를 이끄는 일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언론의 의무다. 스스로 권력화되어 의제의 장벽을 높일 것이 아니라 여러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언론의 성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6. 권력의 부패는 필연인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은 권력의 속성을 담고 있다. 권력은 개인이 뭉칠 때, 즉 집단을 이뤄야 발생한다. 집단에 의해 하나로 집중된 힘은 구성원들의 결속을 강화하고 질서를 부여한다. 모두가 동일한 규칙을 따를 것을 명하는 법은 평범한 개인이 제정할 수 없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입법부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안을 마련해야 모두에게 적용될 평등의 질서가 보장된다. 권력의 순기능이다. 이처럼 사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집단적 권력을 활용한다. 때문에 그것의 부패를 필연으로 여긴다면 사회질서의 구성 원리로서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모순에 봉착한다. 권력의 부패를 당연한 현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주지해야 할 것은 그것이 썩어 들어가게 되는 조건과 환경이다. 권력의 타락은 뭉친 힘의 정점에 있는 인물 또는 조직에 특권의식이 자리 잡을 때 발생한다. 특권은 특정한 소수 권력자에게만 인정되는 예외적 권한으로, 제도의 바깥에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이다. 채용 비리에 연루된 국회의원은 정해진 채용 절차의 바깥에서 자신의 권력을 활용했다. 대한항공 재벌 일가는 법망을 교묘히 피해 국내 반입이 금지된 품목을 들여왔다. 하늘 위 면책특권인 셈이었다. 권력자의 이러한 특권의식은 그들의 권한이 법과 제도의 한계영역을 넘어서는 지점에서도 발휘됐기에 생겨난다. 만인에게 평등해야 할 법이 예외 대상을 둔 결과다.
법의 바깥에서 발휘되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여러 규칙과 제도가 제한하는 자유를 권자가 무소불위로 행사한다면 기존의 질서는 흔들린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실력으로 올라온 공채 지원자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무관세로 물품을 들여온 총수 일가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법 위에 군림한 권력자가 규정을 따른 이들보다 더 큰 이득을 얻은 데 대한 분노였다. 이렇게 비대해진 권력은 법망 내부에도 반칙의 여지를 만든다. 뇌물 수수와 부정 채용 청탁 혐의를 받는 의원들을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으로 보호하고, 임시국회를 열었던 예가 대표적이다. 이는 법질서 준수가 아닌 권력자의 제 식구 봐주기에 불과하다. 툭하면 집행 유예를 선고받는 재벌들의 양형도 현행 사법질서의 공정성을 의심케 할 뿐이다. 법을 넘어 존재하는 권력의 필연적인 한계다.
따라서 제도 내로 권력을 제한하는 원칙과 실효성을 강화해야 한다. 법 앞에 평등한 만인의 사회를 구현하는 권력의 순기능을 되살리기 위함이다. 권력자는 법 밖에 자리하는 예외적 존재가 아닌, 가장 먼저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여야 한다. 사법적 경계를 넘나드는 권력에 대한 제도적 감시망을 확충하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 서민에게 엄혹하고 재벌에게 관대한 재판부라는 오명을 씻어낼 수 있다. 제도가 인정하고 있는 특권의 개선도 필요하다. 법으로써 질서를 세우는 입법자의 특권 내려놓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불체포특권은 물론 세비결정권이나 특별활동비 지급 등 각종 금전적 혜택 등이 개선 대상에 포함된다. 법령의 이름 아래 특권이 횡행해, 권력의 부패를 제도가 인정하고 마는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1,515)
7. 끊이지 않고 갑질 사건이 벌어지는 근본 이유와 해법을 논하라.
“내가 누군 줄 알아? 억울하면 출세해.” 이 익숙한 한마디가 갑의 심리를 포착한다. 출생이 신분을 결정짓던 구태는 민주화의 도래로 사라진 지 오래다. 고로 우리는 모두 평등해야 한다. 하지만 전 국민이 선거일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개인이 가진 자본의 유무가 경제적 차이를 만들고, 차이는 새로운 위계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개인의 관계는 평등할지라도 경제 영역에서 개인은 새로운 신분제를 맞닥뜨린다. 출세는 이 세계에서 높은 신분을 얻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집합적 욕망을 가리킨다.
오랜 시간 한국인의 지상과제였던 출세는 그 자체로 면죄부가 되고, 갑질을 용인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었다. 일단 출세해 갑의 위치에 오르면 불평등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구조 하에서,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해결책만이 떠오른다. 갑질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때는 2004년이지만, 갑의 횡포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 대기업 원청은 자본력을 무기삼아 하청을 압박했지만 이를 제지하는 감시망은 부재했다. 회사는 감정노동자에게 화내는 고객 앞에서 더 크게 웃도록 지시했다. 갑질은 출세하지 못한 을이 보호받지 못한 가운데 구조적으로 지속된다.
출세가 면죄부가 된 이상 불평등은 고착화될 수밖에 없고, 경제적 위계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 위기를 낳는다. 갑의 논리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갑과 을에 이어 병, 정을 향한 을의 갑질이 이어지는 것이다. 중소기업 사장은 직원을 상대로, 직원은 백화점 점원을 상대로 한 갑질의 연쇄다. 이는 민주사회의 가치도 훼손한다. 민주주의를 이루는 평등의 감각은 위계를 나누고, 그에 따라 모멸감마저 안기는 사회에서 유지되기 힘들다. 서로가 서로를 하대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유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출세를 면죄부로 인정하지 않고, 갑에게 책임을 묻는 제도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대기업의 우월적 지위 남용을 규제하고, 갑을의 불공정 관계를 규정한 공정거래법의 실효성을 강화해야 한다. 평등의 원리가 지배하는 법과 정치가 갑질이 일상화된 구조 개혁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기업 차원에서도 노동자를 보호할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회사가 나서서 고객의 갑질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를 먼저 위할 때 노사 관계 역시 갑을이 아닌 상생관계로 나아간다.
결국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냉대 대신 억울하면 문제제기하고, 권리를 요구하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접근 뿐 아니라 개개인이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대하는 존중의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집회와 같은 을들의 연대는 갑의 잘못을 비판하고, 을을 존중할 것을 명하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대한항공 전 사무장 박창진씨는 자신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기에 내부고발을 결심했다고 전했다. 갑과 을이 아닌 사람이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을의 용기는 물론, 이를 뒷받침할 사회적 안전망이 모두 필요할 것이다.
8. 최저임금 1만원 인상안을 논하라.
최저임금 1만원은 노동자의 편에 선 ‘착한 정책’처럼 보인다. 최저임금의 최저생계비 충족률이 70%를 밑돌고, 소득분배지표는 나날이 악화됐다. 임금 인상을 미룰 수 없는 이유다. 관건은 1만원 인상의 현실화 가능성이다. 착한 정책은 공정한 정부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 정책이 시행될 환경의 구조적 조건을 개선해 다양한 경제 주체의 입장이 고루 반영될 타협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공정함은 기계적 형평이 아니라, 상이한 조건에 있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이익을 극대화함을 의미한다. 이로써 임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모두 만족할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책의 실현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임금인상은 현재의 불공정한 노동환경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2017년의 가파른 인상 이전에도 최저임금 미만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의 수는 300만에 달했다. 노조 조직률이 11%, 단체협약 적용률이 20%이내인 노동환경에서 근로시간을 낮추는 등의 꼼수를 부리는 사용자에게 문제제기할 노동자는 많지 않다. 노동자 다수가 종사하는 중소 하청업체의 사정도 비슷하다. 최저임금이 올라도 원청이 결재한 인건비 내역서는 작년과 동일해 추가 인상분 부담은 하청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주고, 확실히 받을 여건이 부족한 상황에서 임금 인상은 노동시장에서의 약자를 옥죈다.
이러한 부작용이 지속된다면 정책 집행의 공정성은 신뢰를 잃을뿐더러 노사정간 협의도 어려워진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뒤늦게 산입범위를 조정해 사용자 부담을 완화한 반면 노동자 임금 인상 효과는 줄자 정부의 1만원 인상 실현 의지가 도마에 올랐다. 발생 가능한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정책의 연착륙을 위한 구조적 정비가 이뤄져야했다. 결국 최임위를 패싱해 국회가 급해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졸속 행정을 낳았고, 노동계는 반발했다. 7월 임금 협의는 요원해졌다. 2019년 8,660원, 2020년 10,000원 인상까지 갈 동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제대로 주고, 확실히 받을 노동환경 구조부터 개편하는 데 방점이 찍힌다. 인상안 협의는 이와 병행해 노사가 주도하고 정부가 조정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최저임금법 위반 시 처벌 조치를 강화하고, 노조 없는 노동자가 목소리를 낼 제반 조건이 먼저 갖춰져야 한다. 더불어 프랜차이즈 가맹본부의 과도한 유통마진 착취를 금지하고 수년간 계류 중인 임대차보호법 개정으로 자영업자의 숨통을 틔워 임금 인상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원청과 발주처가 최저임금 인상분을 공동 부담토록 의무화하는 방안도 이와 상통한다. 노-사, 대기업-중소기업 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노동시장에서의 약자를 지원하는 방향이다.
이렇게 공정해진 구조 위에서라면 노사 중심의 임금 협상도 실효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지난 10년간 7번을 공익위원 제시안으로 임금을 결정했다. 대통령 위촉을 받은 공익위원의 안은 정부의 영향력을 받기 쉽다. 정부는 중재자가 아닌 결정자가 된 셈이다. 각 주체의 양보와 타협 없이 정해진 임금은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최임위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행을 찾은 후의 협상 테이블에서라면 노사의 접점 찾기는 강제가 아닌 타협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 서로 양보할 지점을 찾아가며 신뢰를 다지는 과정이다. 언제나 대립각을 세운 노사가 상생관계로 돌아설 때 노동시장의 공정성도 높아질 수 있다.
9. 한국 보수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미래상을 논하라.
새뮤얼 헌팅턴은 보수주의를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이데올로기라 정의했다. 혁명에 대한 반발로 태동한 보수이지만, 그 자체로 변혁을 거부하지 않는다. 추상적 이론과 열정만으로 변혁을 목표삼는 태도가 위험하다고 여길 뿐 현실의 안정을 추구하며 개혁을 도모하는 것은 긍정한다. 보수식 실용주의의 핵심이다. 이상보다는 직면한 현실, 사회가 축적해 온 관습을 중시하며 실리적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또한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를 실사구시 사상이라 평가했다. 냉전기 사상의 각축전장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은 역사는 실리를 추구한 보수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탄핵과 두 보수 정권 대통령의 구속, 뒤이은 지방선거 패배는 보수식 실용주의의 실패를 드러냈다. 시대적 상황에 유연히 대응해 보수와 개혁을 추진하는 모습은 사라졌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 전통을 이어 경제대통령을 자임했다. 그러나 큰 성과는 보이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난에 봉착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소득불평등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한다며 경제민주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프레임만 내세우곤 세부 전략은 논의되지 않았다. 반공사상 중심의 권위주의적 과거로 퇴행한 행보만이 두드러졌다. 실리는 없고, 보수의 과오로 지적받아온 비민주적 행태와 정치적 부패를 지속해 국민적 실망을 불렀다.
보수 실용주의의 실패는 책임정치를 통한 복구가 아닌 보수와 수구의 동일시만을 낳았다. 오랜 전통이나 관습이 아닌, 낡은 구호 지키기를 자처한 형국이다. 반공, 산업화의 유산에 갇힌 수구로의 회귀다. 평양올림픽 프레임, 무조건적인 남북 회담 비난 공세는 반공의 덫에 갇힌 수구화를 보여준다. 노태우 정권이 북방정책으로 대북관계 신국면을 열고, 대북 강경책을 쓴 김영삼 정권마저 초기 북한을 평화 세력이라 규정한 전략과 대조적이다.오히려 보수의 수구화 과정에서 적폐세력으로 지목된 이들은 정치적 명맥을 유지했다. 친박계 인물들이 다시 지방선거에 나서고, 전 정권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이는 없었다.
다시, 책임지는 보수식 실용주의의 재건이 필요하다. 과거의 유산은 지키되 과실은 책임지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인적 청산과 새로운 정당 정비로 과거를 책임지고, 능력으로 경쟁하는 보수로 나아갈 때 보수의 수구화를 막는다. 2005년 영국 보수당 대표 캐머런은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전제하면서도 분배를 중시하고 약자 지원을 강화해 유권자의 선택을 받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강남3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유한국당 조은희 당선인은 정파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일 잘하는 구청장’이기에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 국가와 지역사회의 요구에 발맞추는 보수의 가능성이다.
베버는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모두 내재해 정치에의 소명을 가진 정치가를 강조했다. 자신의 신념만을 우위에 두는 지도자는 위험하다. 잘못된 결과를 맞이해도 신념만 지킨다면, 그 이후 변화 없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의 수구화는 구태의 신념만을 떠받들어 발생한다. 이제는 보수의 정치적 소명을 새로이 정립할 때다.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건 현실의 질서를 긍정하는 신념과 정치적 책임의식을 지닌 보수다.
10.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는 데 걸림돌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라.
냉전과 탈냉전의 시대를 가르는 중대한 차이는 국제사회가 불확실성의 영역을 증대했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대 축이 분명한 냉전기는 적과 동지가 명확했다. 선과 악의 구도는 선명했다. 그러나 1969년 냉전 체제를 청산하자는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과 중국이 수교해 손을 맞잡았다. 적대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탈냉전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적도, 동지도 사라졌다. 북한은 이러한 관계의 불확실성 시대를 목도하며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공산권이 붕괴하고,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가운데 체제 보장을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 핵이었다. 70년 남북 관계의 험로 역시 이 같은 위기의식의 산물이었다.
한반도 평화의 핵심인 비핵화를 가로막는 위협요소도 관계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40년을 반목해온 북미가 상호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일부터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되는 비핵화의 구체적 정의부터 방법, 시기 등 모든 사안에서 입장차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북미 정상회담 이전 수차례 반복된 실무급 회담부터 현재까지, 비핵화를 향한 양국의 의지만이 가장 확실한 합의 내용이었다. 더구나 비핵화 어젠다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한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의지가 외교전에서 표출돼 비핵화 셈법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당사국 간 불신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파고드는 외교술은 완전한 비핵화의 여정에 총체적인 불확실성을 노정한다.
이러한 장애물은 비핵화 완성까지 긴 시간을 할애하고, 그에 따라 갈등 요소가 증가할 확률을 높인다. 국면의 전환기마다 새로운 불확실성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70년 남북 대화의 역사에서 정권이 바뀌거나 약속이 깨진 일은 긴 불확실성의 시간 속에서 일어났다. 1992년 시작해 94년에야 채택한 제네바 합의도 미국이 약속한 경수로 제공이 미뤄지자 북은 핵동결 파기를 선언했다. 이행과 보상 의지가 불투명한 양국 합의의 결과는 또 다른 불신의 단초를 제공하고 만다. 이번 6.12 북미회담 전후로도 북중의 밀월관계가 깊어지고, 일본은 미 행정부와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견제하는 듯한 발언까지 나오며 후속 회담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회담 전략의 경우의 수가 늘고, 비핵화 시간표는 자연히 늦춰진다.
지체 없는 비핵화를 위해 확실성의 요소부터 구축해야한다. 관계의 확실성은 여러 주체들의 투명한 보증, 정례화된 만남으로부터 확보된다. 협상의 제도화와 국제사회의 공조가 중요한 이유다. 북미 협상 내용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도록 합의를 조약 수준으로 격상하는 방안이 있다. 신뢰 기반을 다지는 길이다. 국제사회가 북한과의 관계망을 직조해 비핵화 이행-보상 과정을 보증할 포석도 필요하다. 비공식적 물밑 외교를 넘어설 투명성 보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러 경제협력을 제안하고, 북방·남방 정책에 북한을 일원으로 포함한 것도 그 일환이다. 푸틴 대통령이 초청한 동방포럼을 필두로 6자회담 국가가 만나고, 이를 발판삼아 다각도의 국제 포럼을 연계할 방안도 있다. 관계를 제도화하고, 공개적인 네트워크를 확장해 불확실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다.
11. 한국 사회의 갈등 해결 능력이 다른 사회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를, 그렇지 않다면 갈등이 실제보다 과장되는 이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각각 논하라.
약 360만이었던 2012년 반려동물 가구 수는 5년 뒤 600만여 가구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반려 동물 수의 빠른 증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급성장에 따른 반려인과 비반려인 사이 공감대 부족에 있었다. 개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고가 발생하자 반려 동물의 위험성과 반려인들의 안일한 관리 태도가 도마에 올랐다. 개 파파라치 제도부터 반려견 입마개 의무화 움직임이 일었다, 반려인은 강하게 반발했다. 동물을 키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생각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이를 대하는 제도는 사회구성원 간 시각차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갈등’이 아닌 ‘사고’를 막을 수단으로만 기능한 셈이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이를 맞닥뜨린 사람들의 인식의 공백을 초래한다. 이를 한국 사회만의 특성이라 할 순 없다. 반려견 급증이 불러온 동물권 이슈나 동물과 사회의 관계 맺기 문제는 비반려인에겐 낯선 사안일 것이다. 이해의 기반이 다르면 갈등이 일어날 확률은 높아진다. 때문에 ‘싸움’의 과정에서 대화하고, 화해함으로써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토론과 중재 과정 없이 법적, 제도적 조치를 마련해 불필요한 갈등을 키우곤 했다. 반려견 사례에서 입마개 의무화, 개파라치는 동물의 신체적 특성과 반려인 사생활 문제는 배제한 비반려인의 시각만이 투영된 제도에 불과했다.
이처럼 인식의 공백을 그대로 둔 채 생긴 규제는 주체 간 갈등을 지속·심화할 공산이 크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 세 차례나 무산된 차별금지법이 대표적이다. 특히 성적지향성 문제는 언제나 양측의 각만 세운 채 서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누구나 공감할만한 인식의 토대를 가꾸진 못했다. 그 가운데 시도된 입법은 강한 반발을 사고, 오히려 반목과 혐오가 더해졌다. 사회적 합의 없이 만들어진 법도 새로운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1994년 제정된 난민법은 시민사회에서 난민 문제가 크게 다뤄지지 않았지만 탈냉전기 국제 사회에 자리잡을 정부의 의지로 관철됐다. 이에 난민법의 실효성이 문제시되고, 예멘 난민 문제가 급부상할 때 사회적 혼란은 가중됐다.
관건은 인식의 공백을 메우는 방식이다. 서로 간 ‘앎’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이를 제도화할 때 보다 정교하고, 사각지대를 최소화한 사회적 규칙을 만들 수 있다. 이는 곧 한 사회가 갈등을 바라보는 태도를 반영한다. 갈등은 단지 해결 대상이 아니라 상호 이해의 폭을 확장함으로써 공동체적 삶을 다지는 가치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적 타협기구로서 각계 분야에 중재, 조정 조직을 정비하고, 접근성을 보장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시민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몇 차례 이뤄진 공론화 위원회가 새로운 가능성이다. 위원회의 규모 및 내용의 다양성을 더해 규칙에서 배제 및 낙오되는 이가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1,413)
12.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의 범위 안에 포함되는가.
적절한 규제는 자유를 제한하지만, 사회 구성원을 향한 존중의 상징이기도 하다. 타인과 함께하는 사회생활에서 개인 행위 영역의 적정선을 정하고, 이를 보장하는 규제의 순기능이다. 때문에 자유는 법과 제도의 틀 아래 사회적 합의로 주어진다. 표현의 자유의 적극적 수호자인 밀이 자유는 사회적 권력(Authority)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의 합리적 자유다. 반면 방종은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개인우선주의의 발현이다. 방종하는 자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은 중요치 않다. 따라서 특정 표현이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그 말이 자유와 방종 중 어떤 토대에서 발현한 것인지 살핌으로써 가능하다.
사회적 권력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혐오표현의 가장 큰 목적은 노골적인 적대의 표출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있다. 그릇된 행동을 했거나 특정성별, 연령, 성적 지향을 가진 이를 벌레 보듯 XX충이라 명명해버리는 방식이다. 이는 타자를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므로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자유’에 따른 행위가 아닌 방종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제한이 전반적인 표현의 자유 위축을 부를 수 있다는 문제제기도 있다. 물론 몇몇 표현은 혐오와 비혐오의 경계에서 판단을 요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여성은 혐오라 보지만 남성의 입장은 다른 사례도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혐오표현 전체를 인정할 순 없다. 혐오표현 대다수가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위치에 처한 소수자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소수자 혐오는 높은 확장성을 지닌다. 가령 한 여성의 잘못된 행위가 큰 이슈가 됐을 때, 그의 잘못은 여성 일반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한다. 한 중년 여성의 미숙한 운전은 조롱거리가 되고, ‘여성은 운전을 하지 못한다’라는 집단화된 차별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이다. 혐오의 지속으로 생긴 고정관념은 배제의 원리로도 작동한다. 노키즈존이나 난민 갈등은 결국 아이와 엄마를 배제하고, 난민을 인정하지 않는 실질적 차별을 발생시킨다. 차별이 구조적으로 고착화되는 셈이다. 서로의 입장이 다른 표현은 토론을 통해 접점을 찾을 수 있지만, 구조화된 차별은 또 다른 불평등을 낳기 쉽다.
따라서 혐오표현의 방종은 제지하고, 만인의 표현의 자유를 확장할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다만 일방적인 법적 조치만으론 부족하다. 세 번이나 무산된 차별금지법은 입법단계부터 사회적 갈등을 초래했을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에 대한 문제의식과 감수성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탓이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 운동도 인종 차별과 홀로코스트를 겪은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그 뿌리가 공고하지 않다. 따라서 다양한 소수자 권리 옹호와 운동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부터 높여야한다. 무작위로 터져 나오는 말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실제 소수자가 처한 차별의 현실을 모두가 공감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각의 충돌을 논하고, 때로는 싸우며 새로운 규제를 정립하고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
13. 사법부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쓰시오.
사법부 독립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이는 국민들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할 수단이다. 헌법 105조도 사법부 독립을 논하지 않는다.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독립해 심판할 것을 규정한다. 다만 법관은 사법부 내부 구성원이다. 그들의 자율성은 입법부와 행정부 등 외부 환경으로부터 사법부가 독립해야 완전한 실현이 가능하다. 사법부 내부의 자유는 외부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할 때 지켜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법농단은 사법부의 종속성을 드러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숙원사업이던 상고법원은 일견 재판의 공정성을 높이는 방안이었다. 대법원의 과중된 업무를 완화해 내실 있는 상고 심리를 유도하자는 취지다. 문제는 그 수단이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행정부 입맛에 맞는 재판거래를 단행했다. 대법원장의 로비 정황도 밝혀졌다. 정치권력에 종속된 사법부는 법적 절차에 반하는 방식으로 목적을 이루려 한 모순을 보였다. 이는 사법부 내부의 종속성도 심화시켰다.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유착해, 정부 성향에 반하는 판사를 선별하고 인사에 개입해 법관 독립성을 침해한 방식이다. 외부 권력에의 종속이 필연적으로 내부 구성원 종속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법부의 이러한 종속성은 불투명하고 무책임한 사법권 남용을 야기했다. 민주적 체제의 법원은 권력자가 제대로 책임지게 하는 투명성을 확보한다. 공정한 재판은 사법부 독립에 힘입은 투명성과 책임성이 전제될 때 가능해진다. 그러나 전교조나 KTX 승무원 판결은 정부와의 거래목록에 속했다. 전 국정원장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판 과정은 불투명했고 권력자는 책임지지 않았다. 사법부 독립 침해를 근거로 법원행정처 PC 조사를 거부한 처사 또한 투명성에 반하는 폐쇄성을 더한다.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는 사법부의 독립 수호가 아니라 비리를 은폐하려는 폐쇄적 조치다.
따라서 바깥으로부터의 독립과 내부의 독립을 지킬 이중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대법관 임명권한을 내려놓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대법관 임기를 10년 정도로 늘려 임명권자를 의식한 재판 폐해도 방지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독립 요건을 강화하는 동시에 법관 개개인의 자율성 보장도 중요하다. 불신의 온상이 된 법원행정처 상근 판사를 없애고, 행정 전문 인력으로 대체한다는 최근 방침은 적절하다. 더불어 공수처 등 특수 수사기관을 설립해 사법비리의 확실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독립엔 책임이 전제됨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한국의 2016년 항소율은 4년 전 약 30%에서 40%대로 증가했다.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독립적인 사법부는 사회의 신뢰수준을 끌어 올린다. 하지만 사법부가 불신의 대상이 된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 간 믿음을 기대하긴 어렵다. 사법부 내 권위주의와 수직적 관료주의는 한국 사회가 품은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이제 안과 밖을 정비하는 사법개혁을 시작으로 고질적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모든 국민이 공정한 재판정에 서고 그 결과를 인정하는 데서 사회의 신뢰 회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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