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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립당 大獨立黨연구회 G.INDI.P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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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시대桓國檀國 스크랩 동방문명의 빅뱅과 우리겨레의 원형
능소화 추천 0 조회 13 09.08.03 16: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솔본 (2005-07-25 01:39:25, Hit : 2476, Vote : 131
 동이문명의 빅뱅과 우리겨레의 원형

이제까지 나름대로 연구하고 살펴본 내용들을 거칠게 한번 정리하고자
합니다. 각각의 내용은 그것을 증명할 만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  BC 1만5천년전 홍적세 마지막 빙하기인 사르탄 빙기가 끝나가면서 인류는
   춥고 어두운 동굴생활을 마감하고 대지로 나오게 되었다.

   만주와 동시베리아의 두터운 빙하들은 북쪽으로 퇴각하고 그 자리에는
   탁 트인 드?은 초원이 펼져져 있었다.

   초원에는 맘모스를 비롯 '메가파우나'라고 불리우는 덩치 큰 동물들이
   풀을 뜯고 있었는데 자동차만한 거북과 어깨 높이 3m의 대형 들소들이
   초원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인류는 이 거대한 초원의 동물들로 부터 대량의 단백질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그것들은 인류의 생명과 풍요를 약속해 주는 신의 사자들이었다.

  사냥은 만주와 시베리아에 남은 이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생존수단이었는데
  이들은 이를 위해 처음으로 개를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석기도구를 개발해 내었다.

  세석기라고 불리우는 작고 예리한 석영돌칼들은 면도날보다 예리해서 잡은
  동물의 가죽과 고기를 다루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은 나중에 전세계로 퍼진
  만주-시베리언의 첨단 기술혁명이었다.

  이 시기에 초원은 동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만주 초원은 서쪽으로 남러시아 초원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동물들을
  따라 동으로 서로 이동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남러시아의 코카서스 인들이 동시베리아로 들어와 아이누가 되었고
만주-시베리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세석기와 토기문화를 전파하게 된다

  동아시아의 만주-시베리아인들은 이 세석기를 가지고 사냥외에 낚시바늘을 만들 줄 알았다.
  어로는 만주-시베리안들의 독특한 경제활동이었다.

  강과 해안가에서 잡은 고기는 빠른 시간내에 저장을 위한 손질이 필요했고 그것은  
  더욱 다양한 석기도구의 발전과 함께 인류최초로 '토기'라는 또 하나의 기술혁명을
  이루어 내게 된다.

  알프스 유럽 그리고 중근동에서 이시기에 돌을 깎아 그릇을 만드는 동안
  만주-시베리안들은 흙을 반죽해서 햇볕에 말리거나 불에 구워서 아주 ?고 가벼운
그릇을 만들었던 것이다!

토기의 이용과 확산은 만주-시베리아에서 정착문화를 더욱 확산시키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마을이 생기고 마을과 마을이 서로 연결되면서 교역과 족외혼을 통해 문화적
공동체로 성장해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서기전 1만2천년까지 만주-시베리아에서 유지된 환동해권 문화공동체의 모습이다.

그러던 어느 때, 그러니까 서기전 1만2천년을 전후로 이 온난하던 만주-시베리아에 급작스런
기후변화가 찾아 온다.

소위 '영 드라이어스'라는 짧은 빙하기가 지구 북반부를 강타하기 시작했던 것.
'빅 프리즈'라고도 하는 이 급작스런 빙하기는 간빙기에 녹은 빙하가 북대서양과 북태평양의
  난류를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그야말로 어느날 아침에 급격하게 찾아왔던 것.

  강력한 냉방하강기류가 대륙을 덮치면서 만주와 시베리아는 급속한 냉동고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맘모스들은 풀을 뜯다 선채로 얼어죽었으며 -60도에 이르는 칼바람이 만주
  시베리안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약 1천년간 지속된 이 빙하기로 만주-시베리아의 드넓은 초원은 다시 툰트라로 변해 갔으며
초원은 남쪽으로만 연결되었다.
만주-시베리언들은 초원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물들을 따라 함께 남으로 이동해 갔다.

이동하던 그들은 지금의 황해지역에서 드넓은 초원을 발견했다.
황해초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과 좁은 해안선을 따라 그들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수 많은 초원동물들의 군집을 보았던 것이다.

북에서 남하한 만주-시베리언들은 황해초원에서 자신과는 다른 문화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사냥할 수 있는 동물들의 수가 줄어 곡식을 심어먹던
초기 농경인들이었다.

사냥과 어로가 주업이던 북방족과 농경의 남방족은 황해초원에 새로이 형성된 동물군들을
놓고 경쟁관계에 접어든다.

그들의 체구는 북방종족보다 작았으며 무기나 도구도 그들보다 열등한 것이었다.  
남방 종족들은 새롭게 남하한 북방족과 문화적 경제적 충돌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동아시아대륙 황해초원에서 결국 북방족과 남방족간에 세계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결국 북방족의 승리로 전쟁은 끝난다. 그것이 1만1천년 경이다.

황해초원에서 빚어진 전쟁과 문화의 융합은 그곳에서 엄청난 기술적 경제적 발전을
가져왔다.

북방족의 수렵과 어로, 그리고 남방족의 농경과 가축의 문화가 얼키고 설키면서
비로서 동이문화의 원형이 구현되기 시작한다.
황해초원에는 거대한 신전과 성이 건설되고 천문과 수학의 발전이 이루어 졌다.

이것이 바로 '환발해권 문화공동체'이다.

그러던 어느 때..

서기전 1만년과 9천년을 사이로 다시 지구에 급격한 간빙기가 찾아온다.
영드라이어스의 갑작스런 빙하기처럼 그 간빙기역시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지구의 온도는 평균 10도가 치솟았으며 엄청난 폭우와 해수면의 증가로 인한
해일이 몰아쳐왔다.

거대한 문명의 금자탑을 건설했던 황해초원에는 폭우와 홍수, 해일의 파괴적인
재앙들이 몰아쳐 왔다.

동이족에게 남은 선택이란 해일을 피해 서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으로 피신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으로 부터 1만년과 9천년사이의 일이다.

황해초원을 떠난 동이겨레 일부는 서쪽으로 나아가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에 이르렀고
다른 일부는 힌두쿠시에서 남하해 인도로 들어갔다.

일부는 서진과정에서 정착해 원주민들과 새로운 혼혈자손들을 내었다.
이 모든 것은 만주-시베리언이 처음 고안한 토기와 세석기의 서방전파경로와 일치한다.

오늘날 중국의 고고학계가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는 중국문화의 원형이 동-서간 융합이
아니라 남-북간 융합으로 선행되었다는 증거들이다. 남-북간의 문화적 결합이후에 동-서간의
결합이 이뤄?다는 것이다.

황해초원을 떠난 동이겨레가 이집트와 수메르에 정착하는 것이 B.C 5000~6000년경이다.
인도에 정착하여 인더스문명을 연 것은 B.C 3000~B.C 2000년경이다.

특히 B.C 2000~B.C1000년경에 동이겨레는 아리아인의 시조로서 유럽에서 이집트,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정복지를 구축하게 된다. 그것은 철기의 발명과 말의 사육이 원동력이었다.

환단고기는 어쩌면 이 시기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메르의 딩기르(Dingir), 이집트의 타르쿠(Tarku) 히타이트의 타르훈(Tarhun)
은나라의 탕군(東君)과 투르크의 텡그리(Tengri)  시베리아의 탕가라(Tangara)
그리고 우리의 단군까지...

그 원형은 알(ar/al)로 전세계를 통일했던 황해초원의 桓(ar) 문명이 아니었을까..

무궁화의 원산지는 동아시아가 맞다

무궁화는 Hibiscus속인데 여기에는 아프리카종, 인도종, 동아시아종,태평양군도종,아메리카종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학자들은 우리가 말하는 무궁화, 즉 hibiscus Syriacus종의 원산지를 인도,중국등으로
지목하는데 특히 중국 복건성, 호남성등과 중국 동부쪽에 대규모의 무궁화 자생지 군락이
있어 이 곳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무궁화의 유전학적 검토에 따르면 인도종이 동아시아종에서 갈려 나간 것으로 밝혀진 만큼
인도의 무궁화는 중국 동부의 아속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말하는 무궁화는
원산지가 중국 동부라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태평양종은 이 동아시아종이 퍼져 나간 것으로 분석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참고로 무궁화는 하와이의 국화(나라꽃)이기도 합니다.

1. 동아군(East Asian group, 2. 하와이군(Hawaiian group), 3. 북미군(North American group), 4. 중남미군(Latin American group), 5. 남아군(Southeast Asian group), 6. 인도군(Indian group), 7. 아프리카군(African group),  ※ 실선…관상용 Hibiscus의 원산지, ※점선…비이용성 Hibiscus의 원산지<용진민족문화연구소, 원색무궁화도감, 1994>


한반도에 무궁화 자생지가 없다. 그래서 외국꽃이다?

아직까지 한반도에는 무궁화의 자생적 군락지가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고대의 강역을 한반도로만 비정하면야 이 무궁화는 외래종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고대 우리 동이겨레의 강역을 고려해 보면 이 무궁화가 우리꽃이 아니라는 근거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다시말해 무궁화가 한반도에서는 자생하지 않으니 무궁화가 우리 꽃이 아니라는 주장은
우리 동이겨레 선조들에 대한 모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무궁화가 우리 동이 겨레의 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하고 외국의 학설이 지지하고 있는
이 기묘한 현상을 어떻게 살명하면 좋을까요?

무궁화의 수령이 1만6천년? 무슨 뜻인가?

김정상은 무궁화꽃의 우리말 뿌리를 찾기 위해 1923년 전남 완도지역을 답사하였고
그 곳에서 "무-게"라는 무궁화의 오랜 어원과 " 이 꽃나무가 1만6천년을 살았다"는민담을
어느 촌로의 증언으로 채록하여 발표했습니다.

일단 무궁화꽃이 1만6천년의 수령을 가졌다는 속설은 우리 동이겨레가 1만6천년전에
이 꽃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만6천년전이라면 홀로세 빙하기가 끝나고 인류가 신석기혁명을 맞이할 무렵입니다.
이때 황해는 평야였고 일전에 제가 황해평야 유역에서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했을 가능성
을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위의 가상도와 무궁화의 동아시아 원산지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궁화는 1만2천년~1만년전 황해평야 '환문명"지로 부터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무궁화의 원산지는 과거 황해평야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곳에 우리 '환문명"이 처음 싹텄고 그것이 농경과 토기 그리고 개와 함께
전세계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말해 1만5천년전 동아시아의 개가 모든 개의 조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수메르의
개 "우르"(ur), 즉 우리 개 '워리'의 길을 추적해 보면 무궁화 ,샤론의 꽃,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의
전파경로가 거의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길을 '무궁화의 길'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무궁화는 왜 샤론의 꽃이 되었나?

무궁화를 구약 시편에서는 '샤론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번역은 1612년 킹 제임스 버전 성서에 처음 등장합니다.

학자들은 이것을 두고 논쟁을 해왔고 일부에서는 샤론의 꽃은 무궁화가 아닌 다른 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집트가 그리스의 영향하에 놓였던 그레코 이집트시절 동전에 새겨진 히비스쿠스 꽃은
분명히 우리 무궁화가 맞습니다. 그리고 샤론 지역은 다름 아닌 이 이집트를 한때 정복했던
히타이트인들의 선조 후리(Hurri)인과 가나안인, 모압인등이 섞여 살았던 비옥한 지역입니다.

언어학자들은 고대 후리안, 가나안, 아무르= 아모리테(모압)인 들의 언어가 당시 주변의 아카드어나
셈어와는 전혀 다른 교착어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아울러 이 민족들의 인종적 구성과 기원에 대해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특이한 것은 카톨릭백과와 성서연구자들은 이들이 셈족이 아니라 몽골로이드였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집트를 정복했던 히타이트인, 호리테의 선조인 후리(Hurri)인과 아무르(Amurr)=아모리테=
모압인들이 바로 샤론의 땅에 거주했던 이들이고 이들이 바로 이집트 신왕국의 소위 아시아틱 파라오(Asiatic Parao)선조들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시리아의 아무르(Amurr)인들은 아모리테,모압인으로 불렸으며 그들이 거주하던 도시는
"아스타르테"(Astarte)였고 우리 한글 성서는 이를 '아스다롯'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 "환문명'은 드러날  것인가?

환문명의 존재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저는 언제가 이 존재가 드러날 것으로 봅니다.
홍수로 인한 아틀란티스, 무우대륙이야기는 결국 이 황해평원 환문명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의미있는 것은 허황된 아틀란티스나 무우대륙의 초고대 문명을 증명하는 것 보다 지금으로 부터
1만2천년전의 황해평야 '환문명'을 증명하기가 더 쉽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인 것이죠..

-솔본-
-솔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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