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여행 단상>
흰 눈이 펄펄 내린다.
비가 내리는 밴쿠버를 벗어나서 호프를 지나니 벌써 하얀 눈이 무시로 내리기 시작한다. 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정감 어린 눈빛으로 마냥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 눈은 모든 세속의 티끌들을 감출 듯이 하얀 이불이 되어 따뜻하게 온갖 것들을 덮어준다.
떠난다는 것은 후련하다. 일상의 지루한 풍경들을 멀리하고 새롭고 낮선 것들과의 만남을 기약하기 때문이다. 그 만남 속에는 생각지 못했던 우연찮은 일들을 은근히 기대하며 훗날 추억거리를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떠나는 사람은 익숙한 세계로부터 멀어지면서 새로운 눈으로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게 된다. 떨어져 있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거기 엉겨붙어 있는 삶의 찌꺼기들과 일상에 젖어서 미처 알지 못하던 삶의 의미들을 하나하나 양파를 벗기듯이 깨달아보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여행은 새로운 것들을 보겠다는 것보다는 새로운 모습의 자신을 멀리서 바라보겠다는 뜻이 간곡하다. 여행은 자신의 일상을 떠나서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집 속에서 집을 볼 수 없듯이 자신 속에 빠져있어서는 자신의 진정한 참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에 떠나는 여행은 무엇을 보겠다고 덤비지 않는 게 좋다. 겨울여행은 사색하기에 너무나 좋은 기회이다. 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을 싫건 보는 것만으로도 원이 없을 것이고 눈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애초부터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이 좋다.
겨울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짐 속에 시집 한 권과 평소에 읽지 못했던 책 한 권, 그리고 메모장과 와인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차 창가에 스쳐 지나는 풍경들과 함께 이리저리 떠오르는 사념들에 휩싸여서 둥글둥글 작금의 일들 속에 자신을 헤아려 보다가 피어오르는 마음이 있으면 메모를 해둔다. 여행 중에 때때로 느낌을 적어두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눈송이가 가득히 쌓인 나뭇가지들이 축축 늘어져서 힘들게 땅을 향하고 서있다. 길고 길게 늘어선 삼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하염없이 달려가며 자연의 겸허함을 새삼 느껴본다.
가지런히 자라난 나무숲은 평화롭게 서로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너보다 내가 누구보다 내가 잘 낫다고 뻐기지 않는다. 옆에 나무를 찍어누르며 나만 자라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욕심을 내지 않는 모습이 눈에 덮인 채로 아름답게 보인다. 자연의 진정한 속내를 보고 있노라면 인간세상의 부질없는 모습들이 모두 다 부끄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남으로부터 대접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성경말씀 하나만이라도 순명 할 줄 안다면 좀더 자연과 닮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눈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내린다.
깊은 산중에 어둠이 짙어 가면 나그네는 외로워지고 슬그머니 한 잔 술이 그리워진다.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린 창가에서 몇몇 연인들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기울이는 와인이 맛있게 보이는데 그들은 옛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앞날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웃는 모습들이 마냥 보고 서있어도 싫지가 않다.
나도 눈 내리는 창가에서 흉내를 내본다. 향기로운 와인 한 잔에 감흥이 돋아 오르면 시집을 꺼내 읽어보며 내 시 한 수도 거기 보탠다.
세상사는 것 한번 마음먹기에 달렸다더라
부자들은 돈이 많아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갖고 싶은 게 많아서 괴로워라
나는 부자도 아니고 가난뱅이도 아니려니
내 마음먹기에 달렸구나
내리는 눈을 보며
와인 한 잔에 시 한 수
가진 것이 없다손 쳐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은 부러울 것이 없네
쌓인 눈도 봄이 오면 녹으려니
강물 되어 바다에 닿으면
너도 물이더냐 서로 안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