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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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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75년(선조 8) |
사망 | 1641년(인조 19) |
본명 | 이혼(李琿) |
본관 | 전주(全州) |
광해군은 1575년(선조 8)에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다.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 두 아들을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임해군과 광해군은 자식이 없던 의인왕후의 손에서 자랐다.
조정에서는 일찍부터 세자를 세우는 일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세자를 옹립하는 일 자체를 꺼려했다. 더구나 선조가 총애하는 인빈 김씨와 그의 아들 신성군을 없애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 일로 서인인 정철이 실각하기도 했다. 선조는 처음부터 광해군을 세자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신들도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다며 왕을 압박했다. 끝까지 망설이던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삼기로 했다. 큰아들인 임해군을 두고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것은 임해군의 성질이 포악해 세자가 될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세자 책봉을 알리는 교지에서 선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둘째 아들 광해군 이혼은 타고난 자질이 영명하고 학문이 정밀하며 일찍부터 인효(仁孝)스러워 오래전부터 많은 백성들이 기대해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했으니 선왕의 기업을 계승할 만하다. 이에 세자로 책봉하고 인해 군국(軍國)을 무마하고 감독하도록 하니, 비록 갑작스럽게 거행하는 일이지만 계획은 실로 예전에 정한 것이다. 신공(臣工)들은 내가 우연히 했다고 여기지 말라.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은 진실로 갑작스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 《선조수정실록》 권 26, 선조 25년 5월 1일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종묘와 사직을 지켰다. 그리고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고, 군국기무를 맡아 민·관군과 의병의 활동도 독려했다. 왕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한 것이다. 광해군은 1592년(선조 25)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분조를 이끌었다. 최홍원(崔興源),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등이 광해군의 분조에서 활약했다. 광해군은 분조가 해체된 후에도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하며 국란 극복에 앞장섰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모두가 합심해 전란으로 상처 입은 국토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야 할 때였다. 그러나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 중심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이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전란 중에는 왕을 대신해 분조까지 이끌었는데 새삼스럽게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원인은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선은 세자 책봉과 왕위 계승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나마 명나라의 재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 재가를 미루고 있었다. 이는 당시 명나라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조선을 조종하려던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선조도 마음이 돌아섰다. 전쟁 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나라의 근본을 세우겠다던 선조의 태도 변화에 광해군은 당황했다.
선조는 1600년(선조 33) 6월에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가 죽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김제남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가 인목왕후다. 당시 선조의 나이 50세였고, 인목왕후는 18세였다. 선조가 이처럼 젊은 왕비를 맞이했다는 것은 여전히 적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바람대로 첫 번째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이는 곧 광해군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선조는 아예 노골적으로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으면서 세자 행세를 하느냐."라며 광해군의 문안조차 받지 않으려 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이것은 광해군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었다. 광해군은 정통성 논란과 함께 서른 살이나 어린 동생과 왕권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1608년(선조 41)에 갑자기 병이 깊어지면서 상황은 광해군에게 유리하게 급반전되었다. 죽음을 앞두고 선조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아무리 적자라도 겨우 두 살인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눈을 감자 광해군은 즉위식을 올리고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1587년(선조 20) 유자신(柳自新)의 딸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유씨와 혼인했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던 문성군부인 유씨는 광해군이 폐출되자 폐비되었다. 광해군은 문성군부인과의 사이에서 폐세자 질(侄)을 비롯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나머지 9명의 후궁에게서는 자식이 없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등이 중심이 된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다. 대북 정권은 정적 제거의 칼을 빼들었다. 제일 먼저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은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 세력이었다.
유영경은 자신이 먼저 알아서 사직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은 선왕이 신임하던 재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북의 사주를 받은 대간의 탄핵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끈 공이 있음에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것, 세손의 원손 책봉과 혼인을 지연시킨 것,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 등을 이유로 유영경을 공격했다. 광해군은 결국 유영경을 삭탈관작하고 유배 보낸 후 죽였다. 유영경을 시작으로 소북의 여러 인사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남인인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서인인 이항복(李恒福)이 좌의정에 임명되는 등 조정에는 대북 외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가 뜻을 같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별다른 세력이 없었고, 정권의 실세는 대북에게 돌아갔다.
한편 문묘(文廟) 종사(從祀)를 계기로 북인과 남인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570년(선조 3)에 성균관 유생들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림 학문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이 네 사람을 이황은 '4현(四賢)'이라고 불렀고, 4현의 문묘 종사는 사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그러나 선조가 문묘 종사에 냉담한데다 조정 대신들의 이해관계도 다양하게 얽혀 있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이황이 죽으면서 4현에 이황이 더해져 5현이 되었다. 이들 5현의 문묘 종사는 광해군 대에 들어 이루어지게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6월 1일에 5현의 문묘 종사가 결정되었고, 그해 9월 10일 의식이 치러졌다.
5현의 문묘 종사는 많은 사림들에게 커다란 자부심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에 강한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대북의 핵심 인사인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조식의 제자였다. 그는 조식이야말로 참된 유학자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스승은 문묘 종사에서 빠지고, 조식이 생전에 선비로 여기지 않았던 이언적과 이황이 문묘에 종사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급기야 그는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회퇴변척소》를 올렸다. 《회퇴변척소》에는 "이언적과 이황은 이록(利祿)을 탐내고 진퇴가 분명하지도 않은 몰염치한 사람들로, 선비의 칭호를 주기도 아까운데 도학을 인정해 문묘에 종사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인홍의 상소는 조정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5현의 문묘 종사로 한껏 고무되었던 유생들은 분노해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조선 시대 유생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로 성균관, 사학, 향교, 서원 등에 비치되어 있었다.)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럼에도 정인홍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광해군 역시 정인홍을 옹호하며 유적 삭제를 주도한 유생들을 벌주었다.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유생들의 반발쯤이야 가볍게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일로 정인홍은 유림들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었다. 이는 정인홍 자신은 물론 결과적으로 인조반정으로 실권한 이후 위축되었던 남명학파의 쇠퇴를 불러왔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명나라에 선조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던 명나라는 광해군의 즉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어떻게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차지했냐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사신 이호민(李好閔)이 급히 변명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이호민 등이 연경에 도착하자 명나라에서 왕의 차서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호민 등이 논변할 때에 "진은 중풍에 걸려 저위(儲位)를 감당할 수 없었다."라고 잘못 말했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의심했다. 예부낭중이 "만일 임해군이 병에 걸렸다면 모름지기 임해군의 사양하는 주본을 갖추어 오라."라고 했다. - 《광해군일기》 권 4, 광해군 즉위년 5월 20일
세자 시절 내내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던 광해군에게는 슬픈 소식이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는 임해군을 직접 만나 내막을 알아보겠다며 조사단까지 파견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동복형으로, 타고난 성품이 사납고 방자해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밀어내고 동생인 광해군이 왕이 된 데 불만이 많았다. 대북 일파는 임해군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광해군은 혈육을 죽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대북은 기어이 모반죄를 씌워 임해군을 강화로 귀양 보내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그런 임해군을 명나라 조사단이 직접 만나겠다고 하니 광해군과 대북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임해군을 협박해 입단속을 하고 조사단에게 뇌물을 주는 것으로 사태를 무마했다.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 3월에야 겨우 명나라로부터 책봉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정확한 사인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으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현감이 그를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임해군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광해군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혈육의 죽음을 방조한 패륜 군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임해군의 죽음 이후로도 진릉군, 능창군 등의 왕족이 연루된 대규모 옥사가 발생했다. 광해군과 대북은 이런 식으로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이었다. 광해군이 어렵게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다고는 하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언제고 다시 재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북 일파는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빌미가 된 것은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칠서(七庶)의 옥'이었다. 칠서의 옥이란 서인의 거두인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비롯해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등 7명의 서자들이 모반을 도모한 죄목으로 옥고를 치른 사건이다. 평소 서얼에 대한 차별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은 큰일을 벌여 보겠다며 은상(銀商)을 강도질하여 재물을 모았다. 그러다가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을 훔친 것이 발각되어 잡혔다. 이때 이이첨의 친척인 이의숭(李義崇)의 사주를 받은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이 박응서를 꾀었다. 이 일에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면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고 한 것이다. 결국 박응서는 김제남과 몰래 내통해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고 고변했다. 김제남은 삭탈관작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박응서와 함께 잡혀 온 서양갑이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은 물론 영창대군과 인목대비까지 역모에 가담했다고 거짓 자백을 한 것이다. 서양갑은 자신의 어머니까지 모진 고문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광해가 내 어머니를 죽이니 나도 제 어머니를 죽여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실로 인목대비의 폐모를 예견하는 일이었다.
곧바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이어서 폐모론까지 등장했다. 그 뒤에는 이이첨 등이 있었다. 이이첨의 무리는 이 일에 동조하지 않는 서인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항복, 이덕형 등은 끝내 대북의 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다가 죽었다. 결국 이것은 훗날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된 데 이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1614년(광해군 6) 영창대군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펄펄 끓는 밀실에 갇혀 질식해 죽고 말았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가 저지른 일이었다. 임해군에 이어 영창대군까지 살해되면서 광해군은 패륜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한편 어린 자식을 잃고 슬픔에 빠진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홀로 남겨진 채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 경운궁(慶運宮)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됨으로써 인목대비 폐비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1월,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폐비에 반대한 인사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내는 등 계속해서 전횡을 저질렀다. 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들의 전횡을 묵과했다.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것이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 패륜을 저지른 군주라는 것이 광해군의 본질은 아니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 재건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가시적인 성과도 이룩했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 중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외교 정책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주의적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고수했던 이전까지의 왕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일면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17세기 초는 중국 대륙에서 명조와 청조가 교체되던 시기였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더욱 쇠퇴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었다. 반면 후금은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점점 세력을 넓혀 갔다. 그리고 마침내 1618년(광해군 10) 청은 명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것에 대한 보은으로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병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조선에 중립을 요구하는 후금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광해군은 섣불리 명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가 후금이 조선을 침범할 것을 우려했다. 물론 이것은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던 대부분 대신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광해군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아직 명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었기에 명의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광해군은 할 수 없이 형조참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1만 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다음과 같은 밀지를 내렸다.
우리는 대의명분상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고 우리의 힘은 약하니 후금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 - 《연려실기술》 권 21,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
이것이야말로 명과 후금 사이에서 군사적 충돌 없이 조선의 평화를 지키려고 했던 광해군식 등거리 외교의 본질이었다. 1619년(광해군 11) 3월 조·명 연합군이 후금과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했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이로써 광해군의 뜻을 알게 된 후금은 조선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외교문서를 보내왔다. 광해군 역시 호의의 표시로 후금에 막대한 물자를 보냈다. 이 일로 조선군 포로의 석방이 이루어졌다.
광해군이 이룩한 업적 중 또 하나는 바로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부담하는 공물을 실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한 근대적 개념의 세제이다. 이전까지의 공납은 지역별로 배정된 품목을 직접 바치는 것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또한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은 특산품이 공물로 배정되는 경우도 있어서 방납(防納)의 폐단이 있었다. 이러한 방납의 폐단을 줄이고자 임진왜란 때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시행되었다. 이 대공수미법을 보완하고 확대한 것이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경기도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백성들은 공물 대신 토지 1결당 12두(斗)의 흰 쌀만 내면 되었다. 대동법은 백성의 부담과 방납의 폐해를 줄이는 효과 외에도 시전(市廛)과 화폐경제의 발달을 불러왔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이서(李曙), 이귀(李貴), 김류(金瑬)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반정의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광해군은 그제야 궁성을 넘어 도망쳤지만 곧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끝이 났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다.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월, 폐세자 질은 땅굴을 파서 위리안치된 집에서 도망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어 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문성군부인 유씨는 1624년(인조 2)에 병으로 죽었으며, 광해군은 19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년(인조 19)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
광해군이 폐출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반정 세력은 살제폐모(殺弟廢母)의 패륜과 명나라에 대한 불충을 반정의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은 대북 정권의 독주로 인한 서인 세력의 반발이었다. 왕권을 지키려는 욕심에 대북의 전횡을 묵과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어떤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왕이었다. 반정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국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광해군의 노력은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