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신청자는 "일본의 '滿洲'침략과 중국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만주' 영토 문제 인식" 이라는 제목 하에서 검토할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조선 강점이라는 침략행위로 구체화되었고, 이로써 일본은 대륙진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1년 9월 18일 중국의 만주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감행하였다. 계속하여 일본은 중국의 심장부인 화북 지방으로 침략을 확대하였다.
한편, 중국의 장개석은 국민당을 영도하여 1927년 4월 남경에 수도를 정하여 남경국민정부를 정식으로 출범시키고 1928년에는 전국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나 남경정부는 장개석의 독재권력 강화에 대한 黨內 反장개석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였고, 黨外에서의 군벌세력 또한 장개석에게 불만을 품고 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산세력은 계급혁명을 표방하면서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소비에트정권을 세울 만큼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 때 일본이 침략하자 장개석은 '先安內後攘外政策'을 선언하여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국난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여 정치세력들이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계층이 지식인들이었다. 9·18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태를 공전의 위기라고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예컨대, 부사년은, 9·18 사변을 有史 이래의 가장 엄중한 국난이자,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20세기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3대사건의 하나라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지식인의 역할이 크다고 판단하고 "書生報國"을 부르짖으면서 학자들이 민족의 위기극복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호적·정문강·장정불·부사년 등은 {獨立評論}을 창간하여 수많은 글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대부분은 항일문제에 초점이 맞추어 강렬한 애국주의 성향을 띄었다.
그런데, 당시 만주는 일본의 점령지임과 동시에 내지 침공의 전초기지였다. 따라서 중국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만주 문제였다. 하지만 중국의 심장부인 화북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만주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청의 중국지배에 따른 한족의 만주족에 대한 부정적 시각, 제국주의 침략에 속수모책이었던 무능한 왕조 청의 발원지가 만주였으며, 그리고 비록 괴뢰이지만 이미 만주국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판단하건대, 중국인들의 영토로서 만주 관념은 내지에 비해서 훨씬 약하였을 것이라고 추론하여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화북을 보호하기 위해 자국의 영토로서 '동북'이 아닌, 독립된 지명이나 국가로서 '만주'나 '만주국'의 실체를 인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민정부의 지도자였던 장개석도 최악의 경우 만주를 포기하고 長成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자유주의 지식인들의 생각 또한 장개석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들에게는 일본의 침략이 만주에서 화북으로 코스를 정하여 확대됨에 따라, 만주는 화북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로써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반드시 사수해야할 영토는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정치지도자는 물론이고 지식인들조차도, 화북을 보호하기 위해 자국의 영토로서 '동북'이 아닌, 독립된 지명이나 국가로서 '만주'나 '만주국'의 실체를 인정하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