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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간 최고의 장거리 구간을 달리다 [대간 37]
1. 일자: 2014. 6. 6 (현충일)
2. 장소: 댓재-백봉령
3. 행로/시간
[댓재(02:35, 810m, 두타산 6.4km) -> (햇댓등, 963m) -> 통골재(04:03, 980m, 두타산 2.2km) -> (된비알) -> 두타산(04:55-05:05, 1357m, 청옥산 3.4km) -> 박달령(05:49, 1100m) -> 문바위재(05:55) -> 학등(06:27) -> 청옥산(06:28-06:40) -> 연칠성령(07:10, 1180m) -> (식사 -07:30) -> (암릉/밧줄) -> 고적대(07:57-08:07, 1357m) -> 전망대(08:24) -> 갈미봉(09:08, 1260m) -> 자작나무 숲(10:00) -> 이기령(10:33, 820m) -> 상월산1/2(11:13/20, 970m) -> 원방재(12:02-15, 730m, 백봉령 7.2km) -> 헬기장/1022봉(13:08-15, 백봉령 5km) -> 전망대(13:48) -> 987봉(13:58) -> 957봉(14:32) -> 863봉(14:56) -> 백봉령(15:08, 780m). 무박 28.1km]
< 대간 37구간 산행을 준비하며 >
당초 5월 2일로 예정되었던 37구간 산행이, 미시령-마등령 구간의 단속을 피하느라 이번 주로 변경되었다. 어려운 숙제를 하고 나니 더 어려운 시험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이다. 날씨가 날로 더워진다. 5월 말 치고는 이례적으로 연일 30도가 넘는다. 날씨가 산행의 변수가 되겠다. (산행 당일은 전날 비가 와서 날씨는 산행하기에 최적이었다.)
산거북님이 카페에 구간 산행 정보를 올려 놓았다. 구간을 삼등분 하여, 댓재-청옥 10km 4시간, 청옥산-원방재 11.9km 식사 포함 5시간, 원방재-백봉령 7.4km 3시간, 총 29.3km 12시간이다. 구간을 셋으로 나누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가름해보는 방식이 나와 같다. 긴 여정이다. 백두대간 중 최상급의 난이도에 가장 대간 다운 구간이라 한다. 헉!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다.
그간 두타산을 두 번 다녀왔다(‘09년 9월, ‘12년 7월). 한번은 이번과 같이 댓재에서 또 한번은 쉰움산을 거쳐 올랐다. 하산 길 두타산성 부근에서 바라보는 병풍 같은 암벽의 경치가 근사한 산으로 기억된다. 두 번 모두 청옥산을 오르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은 그 아쉬움을 푸는 산행이다. 사실 청옥산이 두타산 보다 높다. 높이로 산정을 결정하는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이다. 두 산에 직접 올라 그 이유를 확인해 볼 일이다.
장호 선생은 ‘두타산은 한반도 등뼈의 한가운데 배꼽 뒤를 바쳐주는 성체다.’라고 했다. 두타산에서 백봉령까지의 산 길은 대표적 동고서저(동高西低) 지형인데, 동쪽은 깎아지는 절벽인 반면, 서편은 상대적으로 평탄하다 한다.
가야 할 길과 지형의 대강을 머릿속에 넣고도 불안해지는 이유는 코스가 워낙 긴데다, 당일 기상, 기온, 식수 수급 등 변수가 많고 집결 시간도 교대 10시로 평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목요일 오후가 되면 이 모든 불확실성이 해소되리라 믿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동기들이 산과 멀어지고 있다. 희망이님이 발목 부상으로 한 달 넘게 휴식 중이며, 지난 산행에서는 아이넷님이 무릎 뒤 쪽이 아파 고생하더니 결국에는 거기에 더해 디스크 수술까지 받아야 한단다. 행진님도 발목 부상으로 불참 중이다. 모두 대간의 맛을 제대로 느끼며 산에 미쳐있던 이들인데 아쉽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리한 산행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아이넷의 경우 연속되던 무박 산행에 틈틈이 지리, 설악 종주까지 했으니 몸이 성할 리가 있겠는가? 남의 일 같지 않다. 내 페이스를 지키는 산행을 해야겠다.
< 희망사항 >
댓재-백봉령 29.3km 길은 대간의 꽃이라 한다. 길고 힘겹지만 그만큼 장쾌한 풍광으로 보상받는 코스다. 산도 삶과 같아 통과의례가 있다. 이번 구간은 대간 후반부의 대간인의 자질을 평가하는 의례로 인식된다. 거리로 치면 전체 47구간 중 가장 길다. 이기령까지는 기온도 서늘하고 힘도 남아 있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나, 이기령에서 백봉령까지 7개의 봉우리가 힘에 부쳐 보인다. 극한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먼 길을 걸으며 나를 시험하는 산행을 하고 싶다.
‘중국인이야기’라는 책을 읽다가, ‘위유런’이라는 사람에 반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청렴한 고위공직자이자, 중국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한 평생 중국의 통일을 위해 애 쓴 분이다. 죽으면 대만 가장 높은 산에 묻어날라 할 만큼 대륙 산하를 그리워했으며, 대만 등산인들은 실제로 옥산 정상에 그의 동상을 건립하고 뜻을 기렸다. 청나라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최초 보도해 우리에게도 특별한 분이다. 내가 그에게 반한 이유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청빈과 인자함 외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는 인간성, 가족에 대한 애끓는 사랑,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치욕이 뭔지를 모른다 할 만큼 열렬한 독서광이라는 이유다. 이익과 명예에 관한 그의 말을 되새겨 본다. ‘이익을 따지려면 천하에 이익이 될지를 따지는 것이 마땅하고, 명성을 구하려면 만세토록 남을 명예를 추구해야 한다.’큰 산에 오르며, 멋진 삶을 살다간 이웃 나라의 큰 어른의 뜻을 되새겨 보는 산행이 되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 댓재 가는 길에 >
퇴근 후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희동이가 애처롭다. 집사람과 작은 아이가 해외여행을 가고 큰 놈도 귀가하지 않았으니 혼자 있어야 한다. 집사람의 부재가 크게 다가온다.
10시 교대,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역 주변은 평소보다 활기가 넘친다. 버스에 오르자 손님으로 오신 분들의 모습도 여럿 보이고, 지난 산행을 결석한 느루님도 자리를 잡고 있다. 뒷자리는 공석이 많다. 아이넷님의 빈 자리가 커 보인다.
수면 모드로 들어간다. 버스는 한 밤을 가로질러 4시간 남짓 날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먼 길에 낭패를 보게 된다. 이내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다행이다.
2시 30분, 댓재에 도착했다. 서늘한 새벽 공기에 잠이 확 깬다. 이번 구간은 단속구간이 아니라 좋다. 잠시 여유를 가지며 행장을 정비한다. 트랭글의 GPS가 잡히지 않는다. 한참을 씨름 한 끝에 작동된다. 나중에 거리 500미터를 보정해야겠다.
< 댓재에서 청옥산 >
선두에 선 산거북님이 오늘은 천천히 가겠다 공표한다. 아무도 믿으러 들지 않는다. ‘말은 그리해도 걷다 보면 본성이 나올 텐데’ 하는 눈치다. 댓재 성황당을 지나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15분 만에 햇댓등에 닿았다. 고도 150미터를 단숨에 치고 올랐다. 느루님이 주저앉는다. 지난 주 결석하고 지방선거 운동 하느라 몸이 많이 지쳤다 보다. 대장님이 무전을 한다. 천천히 걷다가 고적대 지나서 탈출도 심각히 고려하는 눈치다. 내 판단으로는 느루님은 1시간 정도 걷고 나면 특유의 끈기를 발휘하리라.
햇댓등을 지나며 길은 평탄해진다. 선두에 서서 걸었다. 산거북님은 오늘은 약속을 지켰다. 평소와 다르게 무척 느린 행보다. 짝꿍 88님이 ‘형님, 사람 되셨수’라는 투로 농을 건냈다. 바람도 시원하고, 기온도 높지 않고, 길도 평탄하니 모두의 마음에 여유가 묻어난다. 90분 정도를 걸어 통골재에 도착했다. 4시 어름이다. 가끔씩 우측으로 동해의 불빛이 어른거린다.
통골재에서 두타산까지 2.2km는 된비알이다. 특히 초반 40분은 힘겨웠다. 고도 300미터를 순식간에 끌어올린다. 시원한 바람이 큰 도움을 주었다. 정상 인근 안부에 도착하니 길이 순해진다. 여명이 서서히 밝아온다. 하늘은 흐리다. 날은 흐려도 오늘의 태양이 뜨고 있음이 감지된다. 또 하루를 산에서 맞는다.
< 두타산 정상에서 >
< 두타산의 아침 >
4시 55분, 두타산에 도착했다. 두타(頭陀), 속세의 번뇌를 끊는 수행을 뜻한다. 일상의 번뇌를 산행으로 벗어버리려 하니 나의 이 행위도 넓은 의미에선 두타행이리라. 구름 낀 하늘에 옅은 주홍빛 기운이 느껴진다. 정상석 옆 공터에
텐트 두 동이 쳐 있다. 산에서 아침을 맞는 사람을 오랜만에 목격한다.
우리 일행의 ‘소란’에 놀랐는지 한 분이 밖에
나와 서성인다. 누구에게나 아직은 이른 시간인가 보다.
정상석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아직은 빛이 부족한데 사진이 잘 나올까 걱정이다. 일탈님의 빈 자리가 커 보인다. 후미를 기다리며 간식을 먹는다. 유박사님표 커피와 빵을 얻어 먹었다. 출발 전 버스에서 다리님이 빵 한 덩어리를 주며 지고 가라 하기에 거부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맛 나다. 다음엔 꼭 지고 와야겠다.
오늘의 주봉을 올랐다는 작은 성취감을 안고 청옥산으로 향한다. 졸음이 밀려든다. 4시를 지나며 88님이 졸리다 하더니, 내게로 바이러스가 옮겨왔다. 초반 비탈을 조심스레 내려선다. 동고서저의 지형답게 길 우측은 온통 절벽이다. 곳곳에 펜스가 쳐 있다. 날씨가 맑으면 풍광이 멋질 곳인데 길도 하늘도 어두워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한 무더기가 된 일행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박달재에 닿았다. 산죽과 참나무가 어우러진 숲 길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제법 운치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예전에도 와 보았다. 그 말은 앞으로 행로는 처녀 길이란 뜻이다. 새로움은 늘 설레고 두렵다. 오늘은 설렘이 더 강하다. ㅎㅎ
길이 좁아진다. 연칠성령이라는 이정표가 붙은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곧이어 문바위재가 나타난다. 일행들은 이곳에서 쉼을 취하고 있다. 주변이 커다란 바위지대다. 이곳부터 청옥산까지는 오름이 이어진다. 잠시의 휴식에 힘을 얻어 비탈을 오른다.
< 학등 주변 숲의 아침 >
언제부턴가 옥혜님과 짝이 되어 걷는다. 식생이 다양해진다. 이름 모를 야생화가 발 길을 자꾸 멈추게 한다. 처음 보는 꽃인데, 접사를 해 보지만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는다. 꽃과 씨름하는 사이 어느덧 능선 안부에 도착해 버렸다. 올라오는 까막바위님과 옥혜님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주위를 살피니 학등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바로 옆이 청옥산 정상이다. 부지불식간에 두 번째 이정에 도착했다. 학등과 청옥산이 이리 가까이 붙어 있을지는 몰랐다. 두타산 청옥산 길은 예상대로80분이 소요되었다. 훗날 학등은 아름다운 아침 숲으로 기억되리라.
< 청옥산 정상에서 >
청옥산 정상은 넓다. 후미를 기다린다. 10여분 후에 느루님 일행이 도착한다. 생각보다 몸 상태가 좋아 보여 다행이다. 288이 청옥산 정상석 주변에 모여 단체사진을 찍었다. 푸른 숲과 어느덧 훤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20여명이 산꾼들이 웃고 있다. 모두 든든한 사람들이다.
< 청옥산에서 고적대 >
아침식사는 고적대 가는 길에 하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편안한 숲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아침 숲의 고적함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싱그러운 아침이다. 옥혜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산에서 푼다고 한다. 바른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친구다. 산길을 걸으며 대화를 하며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싫지 않다.
7시 10분 연칠성령에 도착했다. 하늘을 칠성님께 이어진다는, 흡사 멧뿌리 콧마루 같은 연칠성령. 이름은 근사하지만 실제 모습은 평범한 고개마루다. 일행들이 모여 식사준비를 한다. 빵과 토마토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따듯한 국물이 그립다. 그만큼 아침 기온이 서늘하다.
< 바위 전망대의 두 남자 >
식사 후 주위를 둘러본다. 우람한 산군이 암봉을 품은 체 도도히 서 있다. 두타-청옥 구간은 육산이지만 주변은 만만치 않은 암봉이 산재해 있다. 두타는 큰 산이다.
고적대로 향한다. 길가에서 조금 들어가 난간에 기막힌 전망대가 있다. 상도님과 친구분이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풍경이 그윽하여 그들을 모델로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주변 풍경이 시원해진다. 푸른 하늘 밑에 숲이 날로 녹음을 짙어간다. 보이는 것은 온통 산이다.
풍광이 좋아진다는 것은 길이 험하다는 반증이다. 밧줄이 메어져 있는 암릉이 나타난다. 다행히 길지는 않다. 조심스레 올라선다. 고적대다. 고적대의 높이는 두타산과 동급이다. 정상은 두타나 청옥처럼 넓지는 않지만 바위 위에 올라 선 봉우리라 주변 풍광은 최고다. 멀리까지 시야가 확대된다. 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너울지며 흘러간다. 아아(峨峨) 하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 고적대에서 바라본 풍경 >
후미가 도착한다. 산거북님, 휴심님, 수돌님을 모델 삼아 고적대에서의 흔적을 남긴다. 키 큰 세 명을 배경 삼아 찍은 사진은 오늘 최고의 작품이 될 듯하다.
갈수록 시간 지체가 많아진다. 이제부턴 부지런히 가야겠다.
< 고적대의 세남자와 봉우리들 >
< 고적대에서 원방재 >
초반 오름 길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지나온 봉우리들을 살핀다. 내가 어찌 저런 곳을 지나왔나 싶게 우람해 보인다. 진행 방향으로 거북등처럼 갈라진 커다란 암봉이 보인다. 갈미봉이다. 길은 갈미봉을 좌로 크게 돌아 나 있다. 고도의 변화가 적은 오솔길을 후미 그룹과 함께 천천히 걷는다. 느루님 덕분에 오늘 후미는 여유롭다.
변화 없는 길이 길기도 길다. 근방일 듯 해 보이는 갈미봉까지 닿는데 고적대에서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대간 길에는 만만한 곳은 없나 보다.
< 갈미봉 원경 >
산행은 앞서거니 뒷서거니의 연속이다. 갈미봉을 지나며 후미 일행을 멀리하고 홀로 앞서 걷는다. 이기령까지는 4km가 넘는 멋 길이다. 페이스를 유지하려면 내 방식대로 가야 한다. 지도를 본다. 이기령까지는 대세 내리막이지만 3곳의 오름이 있다. 체력 안배를 하며 걷는다. 반복되는 오르내리막, 변화 없는 길에 지쳐갈 무렵, 숲에 자작나무의 개체수가 많아진다. 흰 나무등걸이 햇살에 빛나는 모습에서 숲의 귀족의 자태를 느낀다. 작은 변화에 힘을 얻어 마지막 내리막을 내려선다. 앞에는 288의 이방인 2기 멤버들이 그들만의 방식(그들은 길을 걸으며 쉴 세 없이 대화를 한다.)으로 산을 내려가고 있다.
< 이기령 하산 길의 숲 >
10시 30분 무렵 이기령에 도착했다. 대장님이 후미를 기다리고 있다. 지친다. 8시간을 걸어왔다. 쉼이 필요하다. 벤치에 앉아 남은 간식을 나누어 먹는다. 아침식사 때의 왁짜지껄 함은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원방재와 백봉령 오르내림 길에 대한 걱정이 잦아진다.
20여분의 쉼은 원방재로 향하는 첫 오름을 오를 힘을 주었다. 원방재까지는 3개의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첫 봉우리는 고도 170미터 정도를 올랐다 내려선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상월산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산이라 부르기에는 왠지 생뚱맞아 보인다. 산소리님 말로는 진짜 상월산은 10여분 더 가야 한단다. 햇살이 쏟아진다. 두 번째 봉우리를 오른다. 진짜 상월산이다. 역시 인상적이지 않다. 경치가 조금 더 좋아졌을 뿐이다. 다시 내려간다. 아카님이 평소답지 않게 힘겨워 한다. 산행을 하다 보면 안다. 특히 장거리 여정에서는 전체 산행에서 70%를 걸을 무렵이 가장 힘겹다.
12시 무렵 원방재에 도착했다. 작은 사거리다. 주변 팻말에는 ‘휴양림 150m’라는 표식이 있다. 부근에 도로가 있나 보다. 다정이님 일행과 벤치에 후미를 기다린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다시 신은 후에 끈을 메어 보라 한다. 이후 산행이 훨씬 편해진다고 추천한다. 실행에 옮긴다. 실제는 어떻지 몰라도 신발을 벗으니 기분은 잠시 좋아진다. 자, 이제 오늘의 최대 난코스와 승부를 걸어보자.
< 원방재에서 백봉령 >
‘산에 오르기는 힘들고, 산을 내려 가기는 어렵다.’산은 그 자체가 만만치 않은 존재란 날이다. 이 말이 실감나는 길을 걸었다. 원방재에서 1022봉까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말은 다 이유가 있다’는 말을 몸소 확인했다. 거리 2.2km에 비고 300미터, 길이 완만하다는 반증 아니겠냐고 가볍게 나섰으나, 그 안에는 3개의 긴 오르내림이 있었다. 그 까닭에 비고는 500미터 이상으로 늘어났다. 특히 마지막 비고 150미터의 긴 오르막은 마의 고개였다. 아무리 걸어도 정상과의 고도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죽어라 하고 땅만 보고 걸었다.
< 987봉 가는 바위 전망대에서 >
출발 전 500ml 생수 5통을 준비했고, 원방재까지 2병만을 마셨고, 쓸데 없이 많이 준비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1022봉에 오르며 충분한 물이 힘겨운 산행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확인했다.
다정이님, 현철님, 돈도니, 옥혜님과 길가에 털썩 앉아 허기를 달랜다. 힘든 길을 함께 하니 평소 친분이 적었던 이들과도 금세 친해진다.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지도를 보며 가야 할 길의 대강을 다시 머리에 넣는다. 한고비 넘겼으나 아직 안심한 단계는 아니다. 두 번째 봉우리 가기 전 작은 바위 전망대가 있어 쉬어 가기로 한다. 지나온 상월봉 정수리가 높다랗게 서 있다. 오랜만에 다정이님, 현철님 사진을 찍었다.
987봉은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주변과 고도 차가 크지 않아 눈 여겨 보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봉우리다. 앞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남았으나 비고가 그리 크지 않으니 큰 걱정은 이제 없다. 시간은 2시를 넘어가고 있다. 당초대로라면 백봉령에 도착했을 시간이다. 온도가 급격히 올라 속도를 내기가 만만치 않다. 957봉까지는 30분, 크게 어렵지 않게 올랐다. 이제는 길의 패턴을 읽는 능력도 몰라보게 좋아진다.
< 허물어지는 자병산 원경 >
< 백봉령에서 >
마지막 봉우리를 오르기 전 트랭글의 확인을 위해 핸드폰의 모드를 전환하고 집에 전화도 하며 여유를 가져본다. 마지막 봉우리는 생각보다 높고 길었다. 863봉을 넘자 백봉령 도로가 눈에 들어온다. 우측으로는 자병산이 허연 배를 드려내고 흉물스럽게 서 있다. 산소리님 말대로 대간 한 하나가 해체되고 있다. 안타가운 광경이다.
3시 8분, 대망의 종착역에 도착했다. 백복령, 동해 해산물과 영서 내륙의 곡식들이 100가지 복으로 드나드는 고개다. 댓재에서 시작해 12시간 40분만에 다시 도로와 만났다. 다리님이 준비한 수박을 베어 무니 달콤한 수박 향이 몸 속에 퍼진다. 감동이다. ㅎㅎ.
도로에 볕이 쏟아진다. 이젠 쉼이 필요한 시간이다. ㅎㅎ
< 에필로그 >
‘여럿이 가는 산행에서 모두가 끝까지 가기란 쉽지 않다.’ 내가 하산을 완료 한 후 30분이 더 지난 후미가 백복령에 도착했다. 끝판대장 수돌님이 나를 찾는다. 그답지 않게 백봉령에서 기념 사진을 찍어달란다. 모두에게 힘겨운 산행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완결은 감동을 낳기에 충분했다.
소모 칼로리 7230kcal(춘삼이님 기록으로는 8136kcal), 이동거리 28.1m, 평균속도 2.6km, 소요시간 12시간 39분. 오늘 산행의 결과다. 성인의 1일 칼로리 소모량에 3배에 이르는 에너지를 써 가며, 28km의 거리를 12시간이 넘게 걸었다. 보통 사람이 보면 미친 짓이다. 그 짓을 하고 또 다음 산행을 준비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산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죽을 듯 힘겹게 걷고 나서 자고 나면 또 그리워 지는 존재 말이다.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새벽에 일어나 사진 챙겨 28카페에 올리고, 출근을 했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사진방에 답글을 단다. 남들은 이 행복 모르리라.
지난 산행을 복기해 본다. 서늘한 새벽에 시작한 걸음은 두타산에서 동틈을 확인하고, 청옥산에서 단체사진 찍고, 고적대에 올라 대간 마루금을 확인하고, 이기령-원방재-백봉령 길고 지루한 길을 힘겹게 걸었다. 지나고 나면 잠깐인 산행에서 많은 걸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했다. 우리네 인생도 이러하리라. 긴 산행만큼 큰 여운이 남는 산행이었다.
< 37구간 산행 궤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