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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추위를 이기고 오른 맑은 날의 가리왕산
1. 일자 : 2011. 2. 27 (일)
2. 장소 : 가리왕산(1561m)
3. 행로 및 시간
[장구목이(10:45, 임도 3km) -> 나무다리(11:00) -> (계곡) -> 장구목이 임도(11:57, 정상 1.2km) -> (주목 군락지) -> 이정표(12:30) -> 정상삼거리(13:07) -> 정상(13:15) -> 정상삼거리(13:25) -> (중식) -> 중봉(14:20, 숙암분교 5km) -> 오장동임도(15:10) -> 임도(15:45, 숙암분교 1.5km) -> (밧줄/험로) -> 숙암분교(16:25)]
4. 동행 : 홀로, 28인승 등산클럽
< 가리왕산 산행을 준비하여 >
'엄두가 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때의 '엄두'의 말 뜻은 '무엇을 하려는 마음'이다. 지난 토요일 일찌감치 28인승 산악클럽을 통하여 가리왕산 예약을 하고 나서, 상황 돌아가는 것을 살피니 등산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우선 일기예보가 심상치 않다. 한파가 몰아 닥친다 한다. 산악회 홈페이지에 안내된 예상 등산 시간이 5시간 50분, 길다. 게다가 하필 날짜도 크리스마스 이브, 가족들 눈치도 보인다. 한 가지가 아닌 둘 이상의 부정적 징후가 예견되면 뒤를 돌아 보아야 한다는 평소 지론에 맞게 '취소'라는 말을 만지작거린다.
그대도 무작정 취소할 수는 없어, 이곳 저곳에서 자료를 모으고 키워드들을 간추려 본다. 가리왕산 6월, 이끼 낀 원시계곡, 철쭉, 운해, 신록의 평원. 추운 계절에 상상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말들이다. 가리왕산 12월, 얼어 붙은 빙곡(氷谷), 설경. 특별히 더 생각나는 말이 없고 그나마 지금 상황으로는 별 매력이 없다. 사계절 변하지 않는 가리왕산의 풍경, 장구의 목을 닮은 들머리, 임도, 주목, 자작나무, 너른 정상, 돌탑에서 본 이웃 산들의 파노라마. 특별하지는 않아도 머리에 상(像) 들이 그려진다. 아무래도 취소는 안되겠다.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가리왕, ‘순하게 흐르다가 왕하고 입을 벌리는 그 음이 부드럽되 우람하다’, 나 같은 범인은 아무리 연구해도 생각해 내지 못할 표현이다. 인용한 문장은 장호 선생의 100대 명산기 중 가리왕산 편에 나오는 글이다. 선생은 글만 유장하게 쓰시는 것이 아니라, 국문학자다운 해박한 우리말 실력을 산행기에 과시하여 나 같은 문외한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신다. 늘 존경하고 또 존경해 마지 않는다.
여러 출처에서 가리왕산에 대한 정보를 얻어 비교한 결과, ‘부드럽되 우람한 산’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이 밖에 이 산과 관련되어 기억되어야 할 정보는, ‘옛 맥국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 강줄기가 나뉜 가람에서 산 이름이 유래했음, 1000급 산이 30개나 되는 정선의 진산 등이다.
산행을 며칠 앞 둔 날 한가한 시간에 지도를 들여다 본다. 해발 400미터의 장구목이에서 출발하여 계곡을 따라 완만한 길을 걸어 임도에 도착한 후, 급경사 길에서 1500미터급 산의 만만치 않음을 확인할 것이다. 삼거리를 지나 고원에서 환상의 설경을 감상하며 정상에 닿고, 중봉을 거쳐 다시 임도와 성환골을 거쳐 숙암분교로 하산하는 13km 거리의 준 원점회귀 코스가 머리에 그려진다. 소요시간은 날씨가 좋다면 휴식을 포함하여 5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나, 눈이 많은 길 사정을 고려하면 6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 희망사항 >
늘 마음 속으로 그곳에 한 번 가 보아야지 하고 벼른 지 몇 해 만에, 오래도록 숙제로 남아 있던 정선의 진산을 오늘 찾으려 한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가는 산행이지만, 이왕 마음을 다잡기로 했으니 힘을 내자.
돌이켜보니 몇 해 전 5월 초, 대식이 지역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강사생활을 했던 사북에 놀려 갔다가 오르려고 계획했으나 산불감시 기간이라 산림욕장 입구에서 차를 돌렸던 곳이 바로 가리왕산이다. 당시 산 중턱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산림욕장 입구가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다. 당시 산행 장소는 설악산 울산바위로 바뀌었고, 산행 후 성우 속초 시골집에서 별 보며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즐거운 밤을 보냈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길 사정을 살피러 오케이마운틴에 들러 가리왕산 산행기를 검색해 보니, 올 초 산행을 한 ‘빌더스’와 ‘육덕’이라는 필명을 쓰는 고수의 글이 인상 깊다. 두 분 모두 내가 가야 할 코스와 같은 길을 다녀왔는데 추운 날씨, 많은 눈, 맑은 날씨라는 환경이 이번 주말과 닮아 있다. 그들의 산행기가 약간의 글과 많은 사진이 특징이라면, 나는 글이 주(主)가 되고 사진이 보(補)가 되는 산행기로 그들과 견주어 보고 싶다. 그들의 산행기가 사이트에 올라오면 수 천명의 사람들이 찾고, 꽤 많은 댓글이 올라오는 것이 늘 부러웠는데 글로서나마 고수들과 겨루어 보고 싶어진다.
가야 할 코스는 '밑이 빈 세로가 긴 ㅁ 자형'의 전형적인 육산의 길이다. 계곡을 따라 올랐다가 능선을 따라 정상을 밟고 다시 능선을 따라 걷다가 계곡으로 하산하는 단순한 길. 언제가 찾은 소백산 어의곡 – 비로봉- 천동계곡 길과 흡사하다. 육산이긴 해도1200미터의 고도 차는 여전히 부담으로 다가온다. 올해 벌써 태백산, 강천산에서 실컷 눈 구경을 한 터라, 설경 이외의 다른 관심거리를 찾아 길을 떠나야겠다. 한 겨울에 봄을 꿈꾼다면 욕심이 되려나? 길 한 켠 양지바른 곳, 눈이 녹은 곳에서 움트는 봄의 태동을 확인했으면 좋겠다.
(산행 전 준비과정을 기록한 글로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정선 가는 길에 >
지난 밤과 새벽에 걸쳐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창 밖으로 쌓이는 눈을 보며 걱정스럽게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은 조금 더 내린 듯하나 차들은 정상적으로 다니고 있다. 다행이다.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선다.
복정역에 도착하니 7시 10분. 이후 20여분 동안 평소 등산 버스로 붐비던 GS주유소 앞은 등산객만 붐비고 버스는 한 대도 서지 않는다. 눈 길에 지연도착이 이어진다. 7시 30분 무렵 좌측으로 고개를 쭉 뺀 시선에 버스 한 대가 좌회전하는 모습이 들어온다. 28인승 산악클럽 버스다. 행운이다. 버스에 올라탄다. 만원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28인승 산악클럽에는 무언가 사람 끄는 비결이 있다. 무얼까?
탑승객이 모두 올라서자 버스는 바로 출발, 등반팀장이 간단한 코스안내 후 바로 소등. 어둠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저렴한 가격의 28인승 버스, 좌석 지정 선불 예약제도, 일기 관계없이 출발, 정확한 출발/귀경 시간, 식사/반주 등 일체의 군더더기 배제 등이 이 산악회의 성공 비결이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편한 버스 제공과 철저한 선불 예약제도를 통한 예약 취소 율 최소화가 그 비결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이 산악회에서는 친목도모의 행위는 일체 없다. 그저 쿨한 등산만이 주 목적인 사람들에게는 제격이다. 마케팅 성공 사례로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오늘 아침은 여주휴게소에서 먹었다. 점심은 행동 식을 때울 생각이다. 추운 날씨에 손이 곱아 자리잡고 식사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서 이다. 다시 버스에 올라 다운받아 온 영화 ‘써니’를 보다 잠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10시 40분, 여자 버스기사(이 분이 산악클럽의 운영자란다. 놀랍다)의 예상대로 정확한 시간에 장구목이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길에 눈은 보이나 날씨는 생각보다 춥지 않다. 앞 산에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행장을 꾸린다. 자, 장구의 목을 따라 출발하자.
< 장구목이에서 정상 >
10시 45분 계곡을 따라 완만한 경사 길을 오른다. 살포시 땅에 내려 앉은 눈은 돌 길에 클램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한다. 10여분 오르다 클램폰을 벗어 버린다. 발의 촉감이 훨씬 편하다. 좌측으로 계곡을 따라 걷다가 11시경 작은 나무다리를 건너자 계곡을 우측에 두고 걷게 된다. 고도는 서서히 높아가는데 길의 풍경은 변화가 없다. 보이는 모든 것이 ‘얕다. 눈도 길 위의 돌도 길의 경사도.’ 길 양 옆으로 산이 장구의 끝처럼 솟아 있고 그 사이 좁은 계곡 길을 오른다. 이름 ‘장구목이’의 유래를 몸으로 체득한다.
출발 후 40여분이 지났을까, 길 가에 주목 한 그루가 보인다. 고도를 꽤 높였나 보다. 시작 고도가 400미터 부근이었는데 800미터에 육박한다. 손목에 찬 고도계의 원리는 ‘공기의 밀도 즉 기압 차’인데 오늘처럼 눈 내린 겨울철에는 고도가 올라갈수록 오차가 심해 제 기능을 못한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그 변화의 정도로 내가 어디쯤 가고 있나를 가름할 수 있으니 고마운 존재다.
< 장구목이 들머리 풍경 >
길이 가팔라진다. 등에서 땀이 솟는다. 힘에 겹다. 고도에 비례하여 길에 눈도 많아진다. 가파른 된비알을 치고 오르자, 거짓말처럼 임도가 나타났다. 얼추 해발 1000미터가 넘는다. 널찍한 도로에 신설(新雪)이 하얗게 깔려 있다. 70여 분만에 다시 보는 인공의 흔적이 반갑다. 돌아 보는 오대산 방향의 산들의 너울이 깊다. 하늘이 참 맑다. 올 겨울 들어 처음 맛보는 제대로 된 푸른 하늘이다. 앞 산의 굴곡이 오늘따라 친근해 보인다. 먹의 농담으로만 그려낸 멋진 수묵화 한 점이 내 뒤에 걸린 느낌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맑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멋진 것이다. 더 함이 적어도 빛을 발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함이 주는 매력이 커서 일 것이다. 물 한 모금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 장구목이 임도에서 >
< 주목 군락에서 뒤 돌아본 풍경 >
임도를 지나며 나서는 길은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러셀이 덜 된 좁은 길, 눈에 발이 빠진다. 발을 헛디뎌 눈에 자빠진다. 콧김을 강하게 내 쉰다. 길게 이어지는 길이 끝 간데 없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거친 길을 올라서자 주목이 나를 반긴다. 때론 무성한 푸른 잎으로 또 때론 죽은 나무기둥으로 붉은 기운의 나무는 숲의 주임임을 알리고 있다.
이정표가 나타난다. 임도에서 거리 600미터를 올라왔고 정상까지는 또 그만큼을 올라야 한다. 해를 정면으로 받는다. 주목의 가지 사이로 햇살이 내게 내려온다. 길은 여전히 오르막,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바람이 분다. 이유를 찾으면 못 갈 것이다. 못 오를 것이다. 그저 가지 않으면 안 되니 길을 오른다. 1.2km라 얕보았던 길을 70분만에 오른다. 드디어 정상 삼거리.
< 주목 길을 오르며 >
가리왕산의 정상 능선에 섰다. 바람이 세게 인다. 어서 정상에 오를 욕심으로 쉼 없이 능선을 오른다. 나무의 식생이 변한다. 나목들이 많아진다. 풍경은 끝 간데 없이 트인다. 저 앞에 돌탑이 보인다. 가리왕산 정상이다.
< 가리왕산 정상에서 >
1561미터 고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상 부근은 너른 평지다. 누구 말대로 축구장 2-3개는 충분히 만들 수 있을 듯하다. 돌탑, 정상석, 뒤편 고사목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새로 산 작은 카메라가 성능을 발휘해 줄지 모르겠다. 바람이 심하게 분다. 멀리 산들이 너울거린다. 해발 1500미터급의 산들이지만 멀리서 보니 평화롭기 그지 없다. 구름이 그 평화를 더해 준다. 비워진 마음 안으로 풍경만이 벅차게 차 오른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탄하는 것뿐.
< 가리왕산 정상에서의 풍경 >
< 정상에서 중봉 >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정상 삼거리로 다시 내려온다. 정상을 벗어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바람이 잦아든다. 모든 것의 우두머리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나 보다. 멋진 고사목들이 눈 길을 끈다. 모진 바람을 이기고 가리왕산을 지키는 수호신들이다. 그 꿋꿋한 기상을 바라보는 눈에도 힘이 솟는다.
< 정상 부근의 나무들 >
정상 삼거리 부근 바위 뒤편으로 바람이 잦아진 곳에서 간식을 먹는다. 밥만 못하지만 떡, 빵, 차가 뱃속으로 들어가자 힘이 난다. 시간은 1시 30분. 예상보다는 조금 이른 행보다. 힘겨운 오르막 길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기운이 난다.
중봉까지는 능선 길이 이어진다. 눈이 많아 걷기에는 부담이 가지만 분명 평지 길이다. 오대산 비로봉에서 상봉 가는 길을 연상시키는 평온한 길이 이어진다. 도중에 자작나무 군락을 지난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길가에 쓰러져 있다. 거목이 쓰러짐을 보는 것은 분명 우울한 일이다.
다시 길을 걷는다. 하체가 굵은 나무 기둥에 커다란 구멍 세 개가 나 있는 재미있는 나무를 목격한다. 쓰러진 자작나무를 본 상심이 웃음으로 변한다. 숲의 식생이 다양하다. 거산에서 만이 볼 수 있는 풍요로움이다.
< 자작나무 군락에서 >
눈이 많아진다. 발목까지
푹푹 파진다. 허벅지와 장딴지에 힘이 간다. 식었던 땀이
다시 난다. 허벅지에 작은 경련이 온다. 땀이 많이 나면
수분과 염분이 적어져 근육 내 전해질 균형이 깨져 장딴지나 대퇴부에 경련이 올 수 있다 했는데 꼭 지금 내 경우가 그렇다. 준비한 스포츠 음료를 마신다. 덥고 갈증이 난다고 차가운 맹물을
마시면 뇌와 폐 신장으로 이어지는 혈관을 수축시키고, 그로 인해 피부와 근육으로 가는 피의 양도 줄어들어
쥐가 나거나 근육 경련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온 음료가 도움이 되는지 다리는 정상 상태로
돌아온다.
작은 봉우리를 내려서자 중봉이 눈에 들어온다. 중봉은 커다란 구릉의 형상을 하고 있다. 오르막은 싫은데 하고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내려오니 거의 평지 수준의 작은 오르막이 나온다. 그 정점에 중봉이 있었다.
< 중봉에서 숙암분교 >
중봉에는 산악클럽 일행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한 아저씨가 매실 차를 건 낸다. 매실의 시큼한 맛이 혀를 자극한다. 돌탑 뒤편으로 햇살이 비친다. 이제 하산 할 시간이다. 중봉에서 숙암분교까지는 5km의 거리, 2시간을 예상하고 길을 나선다.
<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
편한 하산 길을 예상했는데 눈이 발목까지 차 오른다. 비탈의 경사도 심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러셀이 덜 된 길에서 호되게 당한다. 신발 안쪽으로 눈이 스며든다. 기분 나쁜 축축함이 몸 속으로 파고 든다. 임도 길을 그리며 걸음에 속도를 낸다. 작은 주목 군락이 나타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40여분을 걸었을까, 길이 조금씩 순해진다. 비탈이 아닌 산 허리 길을 걷게 된다. 펜스가 보인다. 숲은 자작나무로 덮인다. 눈과 자작의 흰 기운이 더해지니 숲은 온통 백색의 기운이 감돈다. 색다른 경험이다.
오장동 임도의 평지를 지나자 다시 가파른 내리막, 내리 꽂힐 기세로 가파르게 고도를 낮춘다. 한동안 이어지던 비탈은 다시 산허리 길로 바뀌고 낙엽송 군락을 이룬다. 하늘을 빽빽이 덮은 낙엽송 길을 걷는 것은 숲의 풍요로움을 느끼기에 그만이다. 그 풍요로움의 끝에 다시 임도가 나타났다. 이제 험한 길은 끝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 고난의 서막이었다.)
이정표가 나타난다. 숙암분교 1.5km, 40분. 앞 선 이정표의 시간표기에 허풍이 심해 이번에도 20분 정도면 하산을 완료할 수 있겠지 하고 클램폰도 벗고 걷는데, 곧바로 바위와 밧줄이 나타난다. 이게 아닌데, 잠시 스쳐가는 시련이겠지 하고 길을 내려서는데 점점 가파른 길이 나타난다. 너덜, 밧줄, 비탈이 삼중주를 이루며 가뜩이나 무거운 다리에 힘이 더 가게 한다. 임도를 따라 우측으로도 길이 있을 것 같은데 굳이 험로로 등산로를 만들어 둔 이유를 모르겠다.
험로의 끝에는 커다란 돌 무더기 너덜이 있었다. 그 밑으로 숙암 마을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다. 시계를 본다. 4시 25분, 장구목이 들머리를 출발한지 5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점심도 행동식으로 때우고 쉬지 않고 걸었건만 깊은 눈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숙암분교 작은 학교 운동장을 보는 것으로 오늘의 산행은 마무리 되었다. 학교 운동장 담 밑으로 푸른 기운이 도는 잡풀이 보인다. 한 겨울 속에서도 봄을 준비하는 생명이 있음에 마음이 밝아진다.
< 낙엽송과 하늘 >
< 에필로그 >
“삶이 정녕 지겹고 힘들다 싶으면 지금 당장 겨울 밭 가에 나가보라.
그러면 언 흙을 비집고 올라와 땅에 배를 깔고 한 줌의 햇살이라도 더 받아 보려고 잎을 넓게 펼치고 몸부림 치는 냉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느 생물학자의 말이다. 봄은 아무에게나 거저
오지는 않는다. 또한 시련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열악한 환경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몸부림은, 종에 상관없이 언제나 처절하다.
먼 옛날 말하기 어려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진 체 이 부드럽고 우람한 산으로 숨어든 이들이 그랬듯이,
나도 이 한겨울에 봄을 고대하는 심정으로 가리왕산을 올랐다. 눈이 쌓여 힘에 겨운 길에
홀로 길을 지켜선 나무들, 그들이 있어 나의 산 길은 외롭지 않았다.
오늘은 올 해 마지막 산행이다. 올 62번의 산행 모두가 그랬듯이 오늘 산행도 값지고 즐거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