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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공부 11회
1. 믿음에 있다고 하는 자들의 죄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定罪)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 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남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1-5)
1장에서는 로마서의 주제를 설명하고 이방인들(믿지 않는 사람들)의 불신으로 인해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2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을 향해서 너희들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뿐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나 심판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우리들의 잘못된 신앙을 철저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경고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실족했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유대인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불리었고,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선민(選民)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있었고, 그것을 꾸준히 연구하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던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보여준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했던 메시아를 고집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유리한 말씀만을 골라 취하였고 하나님을 왜곡되게 변조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중심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는 우를 범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유대인의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고 성경을 읽고 때를 정하여 기도하는 것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면서. ‘이 정도면 신자로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가!’ 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유대인을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 남을 판단하는 죄
주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1)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쓴 신앙수필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부분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에게는 두 개의 잣대(double standard)가 있다는 것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자신을 재는 자는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남을 재는 자는 눈금이 선명한, 한치 오차도 없는 냉정한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잣대는 공정합니다. 신자건 불신자건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끔찍한 범죄를 흉악범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큰 죄인이라고 흉악시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 23)하신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 하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하시는 심판이 엄격하고 호리라도 굽은 것이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히브리서 4장12-13절에서도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相關)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심판받는 모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까지도 심판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 예수님의 절규가 그 심판의 엄중함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3)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온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갖가지 방편을 만들어 내고 그것에 의지하며 심판의 진노를 피해 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대인이나 오늘날의 기독인도 만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으며 회당에서 매 안식일 마다 말씀을 듣고 기도 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택한 백성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나를 피해갈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이방인을 멸시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인들도 자신을 하나님의 우리 안에 든 양으로 보고 불신자를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공공연히 무시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질타하는 나 자신도 역시 유대인들이 받고 있는 경고를 받아야 할 죄인임을 느낍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무겁게 받아야 할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4)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업신여김
우리가 죄 범하는 즉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거나 벌을 주신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에 좀 더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광야 40년 생활을 생각해 보면 꼭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즉시 임하지 않으므로 죄인줄 알고도 그 일을 행하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이런 일쯤은 용서하실꺼야.”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알고도 죄를 짓는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죽음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오래 참으심에도 까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느니라.” (벧후 3:9)
5) 각자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음
노평구 선생님은 ‘현대인이 심판을 부정하는가? 저들의 죄악에 의한 양심과 도덕의 마비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가 심판을 무시하는가? 이는 저들이 하나님의 사랑만 알고 정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로써 저들은 신앙에도 도덕에도 철저치 못한 중성적인 존재가 되었다. 현대 기독자의 무기력의 원인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심판을 느끼지 못하는 저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의 신뢰도 있을 수 없다. 현실 죄악에 대한 심각한 싸움도 더욱 이를 이기는 힘도 있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고집과 회개치 못한 마음을 따라 남이 하는 죄를 비판하고 또 그일을 같이 행하는 악순환을 계속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진노를 점점 쌓아가고 있다는 것을 바울사도는 경고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찌무라(內村)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에 친압(버릇없이 너무 지나치게 친함)하여 그 자비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악은 한없이 용서되는 줄로 생각하며 또한 그것이 자비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더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랑을 물리치고 죄의 끝없는 골짜기를 향하여 한 걸음 한걸음 더 깊이 떨어져 간다. 이리하여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그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그 진노의 날이 한 번 이르면 그들은 스스로 뿌린 씨에서 열매를 걷어 들일 수밖에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아! 아! 그 무서운 심판의 날이여 그 때의 우리 동포의 비참한 운명이여 아! 아! 그때 내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말았으면 내 귀가 멀어 그 부르짖음을 듣지 말았으면!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엄연히 존재한다. 올 것은 마침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동포를 위하여 깊이 걱정하면서 하늘처럼 밝은 하나님의 진리를 엄숙히 들고 나오는 것이다.’
건물을 지을 때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벽돌처럼 내 앞에 진노의 탑이 쌓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15-23)”
마지막 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내게서 떠나가라!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라는 결과로 내 앞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인 나는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랄 뿐입니다.
로마서 공부 12회
2.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롬 2:6-11)
심판은 모든 사람이 다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한 까닭은 유대인들이 선민임을 내세워 그 심판을 피할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며 선지자들을 조상으로 두어 모든 교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먼저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 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르심을 받은자 뿐 이니라”(갈 6: 15) 오늘날의 우리도 성경공부나 교회 출석이, 각종 헌금이, 세례나 성만찬이, 새벽기도가 문제가 아니라 영적으로 새사람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 (벧전 4:17)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1) 심판의 표준
심판은 우리의 행위대로 되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살아가는 이 생활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이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각 사람이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3)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5:29)
이 말씀들로 보면 행위는 신앙의 시금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이 참된지 거짓된지 알 수 있는 척도가 ‘행위’라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어떤 공덕이나 선한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 행동, 생활모습 전체를 다 포함하는 뜻의 낱말입니다. 참 신앙은 선한 행위를 이끌어내며 거짓 신앙은 자기 배만 불리는 행위를 하게 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행위가 선한 것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으나 오직 하나님이 그 행위의 선악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참 신앙에는 선한 행위가 따르고, 선한 행위의 근본에는 참 신앙이 있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일체(一體)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요15:5) “나는 내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빌4:13) 이 말씀대로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정말 선한 일을 할 수 있으며 내 노력으로 하는 선행은 결국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참 신앙인들은 선행을 하고도 전혀 교만하거나 자랑치 않고 오직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습니까?
2) 영원한 생명을 주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할 것을 구하면 영생으로 하고’
이 구절은 선을 행하기 위해 꾹 참고 하나님 나라를 찾으며 살면 영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본성을 억누르고 선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두가 실감할 것입니다.
이점을 노평구 선생님도 지적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을 목표로, 이를 절대적인 인생의 원리로 삼고 살려 할 때 선에 대한 자신의 무력(無力)뿐 아니라 실로 내외로 이를 방해하는 사탄의 끈덕진 유혹과 장애에 봉착한다. 루터는 이 접근하는 악마에게 잉크병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괴에테의 파우스트가 위대한 것은 그것이 인생의 승리의 기록은 못되어도 심각한 이 싸움의 기록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하는 데는 악마의 유혹이상 또 자신의 시련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선은 오직 선을 위해서만 행해져야 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실로 하나님 앞에서만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그 자체를 위해 아니 하나님을 위해 행하지 않고 이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모독이나 거짓 행하는 위선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은 선행에 시련과 곤란을 두시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선이 참 선이 되기 위한 조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 시련 없는 선이란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아직 하나님이 받아들인 것이 못된다. 성서가 전체 믿음에 대한 고난이나 의에 대한 핍박을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결국 선은 선을 위해서만,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이기심으로 진리를 좇지 않는 사람
이기심에 얽매인 사람은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이기심을 전혀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를 끼친다거나 네게 손해되는 어떤 일을 만나면 그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 누구나의 심정일 것입니다. 물론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돌려 대주는 정도의 이타심을 발휘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바른 미덕임을 잘 알고 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처럼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에서 벗어나 곁길로 벗어나가는 것이 예사로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매가 있음을 오히려 감사해야 하며, 그 사랑의 매를 간청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간섭과 가르침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4) 악한 일을 하는 사람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환난과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혹시 회개할지도 모르니까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 사랑 하심이요. 멸망 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의인이 고난을 받는 경우도 많음은 왜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나기 위하여, 욥은 마귀의 어리석음을 증거하기위해서, 또한 우리들은 신앙을 반석처럼 정금보다 귀하게 연단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5) 선을 행하는 사람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모든 불의와 고난과 유혹에 대해 끝까지 싸울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도움과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 혼자서는 도무지 선을 행할 수 없음을 실감하며, 하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주님께 겸손 하게 모든 찬사를 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6)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차별이 없으므로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 자녀로서 기쁨을 누립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고, 남자나 여자, 학벌, 가문, 실력, 빈부에도 괘념치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죄인인지 의인인지조차 구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무런 죄 없는 예수님을 우리의 죄 때문에 심판하신 하나님, 독생자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모두에게 자연의 혜택을 누리며 살게 하시고 때로는 환난이나 고통을, 때로는 기쁨과 감사를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다.
로마서 공부 13회
3. 율법과 심판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本性)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롬2장12-16)
1) 심판에 대해서(12,16)
이 심판에 관한 문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졌는데, 이방인은 율법과 상관이 없다는 차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심판의 기준이 차별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이 기준이 되고, 이방인은 다른 기준에 의해(14-15)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정성과 편벽되지 않은 정의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었지만 그들만 하나님의 편애를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심판대에서 주어질 질문은 유대인이냐? 가 아니라 오로지 너희 삶이 어떠했느냐? 네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 일 것입니다. 심판은 죄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질 것입니다. 정죄를 받는지의 여부는 이방인인가 유대인인가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에 속해 있는가의 사실도 문제가 아닙니다. 하물며 가문이나 학벌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다만 자신이 행한 심판을 받을 뿐 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시는 표준은 이방인들에게 적용하시는 표준보다 오히려 높고 엄격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율법의 가르침과 교훈이 있었으므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산책임이 그만큼 더 보태지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한다는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우리도 유대인 못지않게 많은 것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신구약 성경이 있고(한 집에 몇 권씩은 있을 것입니다.) 바른 길로 인도해 주려는 많은 스승이 있고,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는 생명의 말씀들 담긴 책, 녹음테이프,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들리는 방송 등등 신앙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치는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핑계를 댈 수 없게 만듭니다. 심판대 위에서 드러나는 죄목들은 모두 나의 책임일 뿐 변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먼저 믿는 우리가 더욱 겸허해져야 하는 것은 은혜를 깨달아 주를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책임도 한층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사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두 군데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이기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은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5:22)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5:26-27) 그러나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심판하실 것임을 예수님은 직접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願)대로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무엇을 심판의 대상으로 삼을까요? ‘사람들의 은밀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우리가 상상 속에서 궁리하고 꾸몄던 것들까지도 그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해 온 수많은 일들은 물론이지요.
(Living Bible : Jesus Christ will judge the secret lives of everyone, their inmost thoughts and motives.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 깊숙한 곳의 생각과 행위 동기가 된 것들을)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잠깐 가졌던 작은 생각까지도 다 발각이 날 것이라고 하니 정말 끔직한 일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태연히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온갖 죄악들이 마음속에서 늘 소용돌이치면서 나를 괴롭혀왔는데 이제 그것들이 백일하에 폭로된다니 그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날에 있을 심판을 생각하면 공포가 엄습해 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 커다란 죄의 보따리를 십자가 밑에 내려놓을 수 있다는 허가를 보장받지 않았습니까? 할렐루야!
2) 율법에 대하여(13,14,15)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고, 랍비의 교훈을 늘 가까이서 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구별되어 살아왔다는 특권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별한 울타리 안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자기편이라 여기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므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만심을 갖게 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율법을 가진 것이 구원받는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무슨 교회의 구성원이라거나 성경을 가진 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씀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지시하는 모든 것을 지켰습니다. 율법에서 금한 안식일의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으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얽어매지 않았습니까?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 걷는 걸음의 수까지도 세었다고 하니 ‘완벽한 준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준수’는 ‘행함’이 아닙니다. 그 형식적인 모양의 ‘준수’는 듣는 수준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율법은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운전자가 신호를 위반하여 회전을 하면 경찰관이 금방 딱지를 뗍니다. 그 운전자가 신호 위반임을 알았다고 해서 벌금이 면제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와 비슷합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방인을 심판하는 잣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도덕적인 의식, 둘째는 그들의 양심, 셋째는 서로 이치를 따지고 변명하고 송사하면서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거 때문에 율법이 없었지만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13-15절의 내용은 자칫 율법을 지키고 양심에 따라 살기만 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건이 빠져버릴 우려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나 구원을 받는 방식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거나 도덕적 의식과 양심을 따라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하나님의 심판이 언제나 공정하며 진리에 따라서 우리를 판단하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심판이 고루 적용되며 누구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환기시키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그 율법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함을 지적하고, 율법을 모르니까 심판과 무관하다고 여길 이방인들에게는 누구나 느끼는 자신의 양심이 있으므로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는 부분입니다. 결국 인류 누구나 다 같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23)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공부 14회
4. 잘못된 신앙생활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2장 17-24)
유대인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들을 바울 사도는 모두 열거하며 오히려 그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다고 통탄하는 대목입니다. 바울 사도가 유대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 율법을 의지며 산다고 자부 합니다.
○ 하나님을(자신의 하나님임을) 자랑합니다.
○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 선한 것을 좋게 여기는(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자부합니다.
○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소경(우매한 자들)의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이며,
○ 어리석은자들의 스승이며,
○ 어린아이들을 인도할 수 있는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습니다.
사실 유대인은 긍지를 가질 만한 점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철두철미한 가정교육과 회당에서의 가르침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어떤 삶이 가치있는지 깨달았을 것이며, 일반 학문에서도 타민족을 가르칠 수 있는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에 대하여(간음), 타인에 대하여(도둑질), 하나님에 대하여(우상) 죄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가(宗敎家)와 신앙가(信仰家)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가들이 남을 가르치면서도 자신은 도리어 그 죄를 범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신앙가의 특징은 자신이 무능함과 죄인임을 깨닫고 남을 가르치려 하지 않으며 오직 인류의 참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할 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노평구 선생님은 ‘실로 터무니없는 율법의 자부 속에 묻혀 자체 모순적인 죄의 단잠에 떨어진 하나님의 선민, 이방인의 교사인, 유대인에 대한 참혹하고 무자비한 치명적인 최후에 일격(一擊)이 아닐 수 없다. 구원의 깃발은 죄성의 철저한 폭격 다음에 꽂아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 사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한없이 사랑한 바울의 뜨거운 애국심이며 안타까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유대교가 바리새주의로서 고형화(固形化)되어 완전히 형식과 위선으로 떨어져 버렸고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를 죽임으로써 자가패망(自家敗亡)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또한 유대인의 율법적, 도덕적 저조(低調)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한 후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을 다해 지키는 것이 옳은 순서인데, 그들은 율법을 가진 것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음성에 겸손이 귀를 귀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근본으로 하는 기독교가 근본을 잊어버리고 멀어질 때 교회가 아무리 늘어나고 전도와 교회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더라도, 신학과 교리가 요지부동으로 서고 감사와 은혜가 하늘에 넘친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을 모독하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바리새화, 교회화인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당시 바리새인들을 존경 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표면적으로는 완전한 사람들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위대한 선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눅16:15)고 경고하셨습니다.
5. 율법 실천과 할례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레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레가 무할레가 돠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장25-29)
유대인의 잘못된 신앙을 밝혀내고 있는 바울 사도는 이제 유대인의 ‘최후에 방어벽’이라 할 수 있는 할례 문제를 언급합니다. 영적 종교로서의 참된 유대교를 형식종교로 변질시키고, 나아가 예수님이 세우신 기독교까지도 딱딱한 규례의 갑옷을 입혀버린 의식(儀式)문제에 대해 ‘할례’에 관한 논의로써 명쾌하게 시비를 가립니다.
25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할례가 가치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할례 그 자체에는 고유한 가치가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치렀다는 증거나 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외형적인 할례의 행위에 내면적인 믿음이 동반되어야만 할레의 진정한 가치를 살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노평구 선생은 이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할례는 유대인의 선민으로서의 표시오. 하나님과의 계약관계에 들어간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부호이다. 따라서 유대인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계약의 내용이 되고 있는 율법 실천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다. 그들은 선민의 표시인 할례로써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 관대한, 특별한 취급을 받을 것으로 그릇 믿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내용을 몰각하고 위의 표시 자체를 범죄의 근거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히 살아 역사하시는 의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양심의 가책 없이 우상 신앙으로 전락한 때문이었다. 진정으로 할례는 율법의 임무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를 행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당시 철저히 형식화 되었던 바리새주의 속에서도 이의 제일선 첨단을 걸은 자신 바리새주의 챔피언으로서의 바울의 이 투철한 할례비판에 우리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6-27절에서 바울은 가정적인 논증을 합니다.
만일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이 율법의 의를 지킨다면, 할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율법을 진심으로 지키면 그 사람이 할례 받은 사람에게 “율법의 문자를 그대로 의지하고 있으며 할례를 그렇게 소중하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니 율법이 너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여도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무할례도 할례가 된다는 바울의 주장은 이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의 돌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마3:9) 라고 말한 세례 요한이나,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1-12)고 하신 예수님은 바울 사도보다 먼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구체적으로 철폐하신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는 천국이 선민 유대인의 것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의 것이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직접적인 원인이 예루살렘 성전의 모독과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한 것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의식(儀式)화한 종교를 부정(否定)한 일과도 관계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마지막의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종교가들 특히 바리새인들에 대해 심하게 책망하고 화를 냈던 일로 미루어 예수님은 바울보다 더 철저히 의식종교를 부정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마23:)
이제 바울은 28-29절에서 ‘겉모양의 유대인’에 대해 ‘속의 유대인’, 육신의 할례에 대해 마음의 할례, 문자에 대해 영을 대립시킴으로써 형식적인 종교 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산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의 일관된 주장은 신앙의 내면화(內面化)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10:16),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며 마음의 앞 가죽을 제거하고 여호와께 속하라”(렘25:24)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마음의 가죽을 제거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과 마음으로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양과 형식 아니라 우리의 내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과 진리의 예배를 주장하셨습니다.(요4:23) 바울 사도는 “문자는 죽이고 영만이 살린다.”고 하였습니다.(고후3:6)
신앙만의 신앙을 주장한 개혁자 루터까지도 세례를 할 때 쓰는 물이 예수님의 피로 변하며, 성찬도 그리스도의 살이 된다는 화체설(化體設)을 고집하여 이가 신교신앙에 남아 결국 교회주의의 발생과 신교 타락의 여지를 마련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례, 십일조, 봉사, 교회 가입, 직분 등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지 못 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느냐,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서도 (즉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했으면서도) 지극히 도덕적일 수 있으며, 성경에 능통할 수 있으며, 성경연구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보다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잣대는 사람의 마음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성품, 새로운 마음, 성령께서 거하시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할례라는 표정보다 중요합니다.
이 할례에 관한 논의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항상 보이는 증거와 기적을 기대하며 지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든가 세례라든가 묵주 같은 것들에서 그런 현상을 봅니다. 항상 보이는 증거와 기적을 바라며 사는 나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깨달아 자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