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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逍遙遊 落穗>
미안 미안해! 미얀마(Myanmar)!!
厚堂 高 光 昌
◈ 地球村 旅行 - ‘逍遙遊’
“우리는 地球村에 놀러 온 旅行客이다.”라는 말이 있다. 태어난 곳에만 살다가 되돌아가면 지구촌 여행이 아니고 동네 여행이다. 다른 동네는 어떤 모습인지? 거기 여행 온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옛날 중국의 道家 思想家이고 ‘영원한 自然의 自由人’이라 불리는 莊子는 ‘삶이란 여행이다.’ “삶이란 여행’은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逍遙遊’하라” 했다. ‘逍遙遊’란 ‘멀리 소풍가서 논다’는 말이다.
친구 중에 한 달씩 自由 旅行을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내가 同行하자고 했더니 쾌히 승낙해준다. 旅行은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기러기처럼 同行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맘에 맞는 친구와 情談을 나누며 하는 여행이 가장 좋은 여행이다.
이번 우리들 ‘逍遙遊’는 4명이 1組가 되어 泰國에서 출발하여 Myanmar와 Malaysia를 거쳐 다시 泰國으로 돌아오는 한 달 코스다,
◈ 泰國에서 Myanmar Visa를 받다.
泰國과 Malaysia는 우리나라와 ‘相互 Visa 免除 協定’이 체결되어 있는데, 미얀마와는 그 協定이 되어있지 않아서 外交部에 미얀마 Visa를 신청했는데 나오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治安 狀態가 불안한 미얀마를 旅行自制地域으로 정하고 Visa를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미얀마를 못가면 앞으로 영영 갈 수 없을 것 같은 豫感이 들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 본 결과 태국 미얀마 대사관에서 Visa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만약 태국 미얀마 대사관에서 Visa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싱가포르나 인도네시아로 간다는 背水陣을 치고 출발했다.
泰國에 도착하자마자 미얀마 대사관에 갔는데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Visa 發給 手數料 말고 별도로 1인당 웃돈을 요구했다. 옛날 우리도 일을 빨리하려고 급행료를 내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요구한 웃돈이 너무 많아서 깎아 보려고 서투른 영어로 대사관 직원과 실랑이를 쳐 보았으나 결국 요구하는 금액을 다 주고 Visa를 신청해야만 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파는 수밖에 --
◈ 굴러다니는 廢車 博物館
미얀마는 인도, 중국, 라오스, 태국, 방글라데시 등 5개국과 接境을 이루고 있으나 入國하는 방법은 ‘하늘길’ 밖에 없었다. 隣接國과의 접경지역에는 軍事政府에 반대하는 少數 種族들이 살고 있고 일부 종족은 武裝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콕에서 1시간 여 비행 끝에 양곤의 ‘밍갈라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공항에는 空港버스도 없고 공항을 지나가는 일반 버스도 없기 때문에 양곤(Yangon) 시내로 가려면 결국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택시 승강장에 줄지어 있는 택시가 모두 낡은 차들 뿐이었다. 택시 승강장이 아니라 택시 廢車場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어떤 물건이 만들어지면 그 機能이 다 할 때까지 아껴 써야 한다는 생각은 좋은 생각이다. 우리도 50~60년대 몽땅 鉛筆을 例로 들면서 物資 節約을 권장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生命 安全을 생각한다면 廢車 活用은 너무 지나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폐차 활용하고 우리 목숨하고 뭣이 중헌디?
여기 와서 맨 처음 본 박물관이 굴러다니는 廢車 박물관이다. 작년(2004년)에 베트남 갔을 때, 사이공(호치민)에서 ‘광주신세계백화점’ 글씨와 로고가 선명한 차를 보고 離散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캄보디아 프놈팬에서는 ‘영동학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차를 보고 무척 親近感을 느꼈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中古車 再活用 우수국가라면, 미얀마는 廢車再活用 최우수국가라 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여기에서 맨 처음 본 박물관이 굴러다니는 廢車 博物館이다. 다음에는 어떤 박물관을 볼 수 있을는지?
◈ 자칭 ‘한국 드라마 Mania’라고 말하는 中國 호텔 女主人丈
우리가 찾아간 숙소의 主人이 50代 중반쯤 되는 中國 女子인데 아주 활달하게 보이는 데다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등 우리와 어느 정도 意思疏通이 가능할 것 같아 親近感이 들었다.
자기 자신은 한국드라마 ‘Mania’이고 온 가족이 한국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했다. 가족이 居處하는 內室이 5층에 있고, TV 수상기도 원래는 5층에 있었는데 한국드라마 시청 시간이면 온 가족이 5층 TV 앞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1층에 있는 카운터를 볼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TV 수상기를 1층으로 옮겨 놓았다고 하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겨울 戀歌’를 재미있게 보았고 지금은 ‘대장금’에 푹 빠져있다고 했다.
이곳은 한국으로 취업을 가려는 젊은이들이 많아 요즘 갑자기 한국어 배우는 붐이 생겨서 대학에 韓國語科가 있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學院도 여럿 있다고 했다. 자기는 요즘 K-pop 노래를 따라 부르며 한국어 배우는 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도 한국어로 말할 줄 안다는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서투른 우리말을 하는 것 같았다.
부근에 韓國식당이 있으니 紹介해주겠다고도 했으나, 우리는 고맙긴 하지만 “우리는 미얀마에 旅行하는 동안만이라도 이곳 햇빛을 쬐고, 이곳 空氣를 마시고, 이곳 물을 마시고 이곳 飮食을 먹으려고 한다”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들 나이가 主人丈보다 더 많으니까 꺼거(중국어), 니이상(일본어), 올더 부라더(영어), 오빠(한국어) 중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싶냐고 물었더니 조금도 망설임 없이 오빠! 라고 답변해 우리 모두 拍掌大笑했다.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를 얼른 파악하고 직업적인 奇智를 발휘해서 재치 있게 답변한 것이다. 이 答辯 하나가 우리와의 사이에 어색함은 덜어주고, 親近感은 더해 주었다. 이것이 自由 旅行 다닐 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재미고 보람이다.
公式 換率은 US$1당 약 k6.5인데 市中 換率은 US$1당 k9,5~ k11로 엄청난 차이가 나므로 換錢할 때 자기에게 부탁하라고 하면서 여기에는 僞造 貨幣가 없다고도 했다.
이 호텔에서 3泊하는 동안 우리가 日程을 빨리 끝내고 돌아오는 날은 1층 로비에서 호텔 主人丈의 ‘한국어 原語民 講師’? 역할을 해주었다.
◈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
主人丈이 우리에게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참고가 될 만한 몇 가지를 알려주었는데. 첫째, 외출 시에는 반드시 身分證을 지참해야 한다(버스 탈 때도 신분증 제시). 둘째, 여기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布敎 활동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셋째, 寺刹의 法堂에 들어갈 때에는 반바지 차림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금, 사파이어 등 寶石類 原石을 해외로 가져갈 수 없다(작은 紀念品 외에는 空港에서 반출이 안 됨). 다섯째, 택시를 타기 전에 반드시 흥정을 해야 한다. 이곳 미얀마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미얀마 문자(폐곡선으로 된 고유의 문자)로 표기하기 때문에 버스 타기가 어려우니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는 하나같이 미터기가 모두 망가져 있으니 떠나기 전 반드시 택시요금을 흥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 된다’는 것이 너무 많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동안 海外 몇 동네를 가보았지만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는 동네는 하늘 아래에서 여기가 처음인 것 같다.
◈ 豪華스럽게 치장한 쉐더공(Shwedagon) 파고다
미얀마는 2,500여 년 전부터 佛敎가 盛行하여 지금 미얀마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은 불교도 聖地巡禮者들이다. 파고다는 부처님이 직접 다녀가셨다거나 부처님의 遺品, 佛髮(머리카락)을 모신 곳이라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졌는데 미얀마 각지에 400만 여개의 파고다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Yangon에 있는 쉐더공(Shwedagon) 파고다는 가장 유명하다. 2,500여 년 전에 부처의 遺品과 佛髮을 이곳에 묻고 높이가 100m에 이르는 돔(Dome)을 만들어 놓은 세계불교도들이 가장 선호하는 성지순례지이고 미얀마의 象徵이자 자랑이고 自負心이기도 하다. 버고(Bago) 왕조의 신소부 여왕이 자기 몸무게에 해당하는 약 40㎏의 金을 寄贈하여 파고다의 外壁에 붙였고, 그 후 역대 왕들이 이를 이어받아 금판 8,688개로 파고다에 옷을 입혔는데 지금까지도 잘 부착되어 있다(금판 1개 가격이 현재 시가로 70만원 정도). 또한 파고다 중앙에 거대한 에메랄드를 안치하여 우리나라 石窟庵 本尊佛像의 이마에 있는 水晶처럼 아침 첫 햇살과 황혼의 마지막 빛을 반사할 수 있도록 하였고, 약 100여 개의 크고 작은 파고다와 건물들이 쉐더공 파고다를 둘러싸고 있으며 파고다 꼭대기에 세운 10m 높이의 티(hti 우산)에는 5,400여 개의 다이어몬드, 2,300여 개의 루비, 사파이어 등의 보석과 1,000여 개의 金鐘, 420개의 銀鐘이 달려있다고 한다.
이곳 파고다의 돔 둘레를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해 놓은 것을 보면 국민들의 佛心이 강하고, 金銀 寶石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우리나라 성철 스님이나 법정 스님이 이런 호화스런 돔을 보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부처님은 이런 호화스러운 돔을 원치 않으신다. 밖에 나가서 가난한 자나 病者를 도와줘라!”고 호통 치셨을 것이다.
紀念品을 사려고 가게에 들어가니 아가씨들이 달려 나오면서 오빠!오빠! 하며 우리를 반긴다. 우리보다 먼저 다녀간 장난기가 많은 사람들이 가르쳐 놓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呼稱인 것 같다. 물건을 샀는데 비닐 포장지 한 장은 배우 배용준 사진, 다른 한 장에는 Girl group 사진이 새겨져 있어 한국 演藝人들의 人氣를 짐작할 수 있었다.
◈ 도시 전체가 UNESCO 文化遺産으로 등록된 버강(Bagan)
만들레 南西쪽 193㎞ 떨어진 지역에 자리 잡은 버강은 버마족이 1044년 버강 王朝를 열었던 미얀마의 古代 首都로, 42㎢ 넓은 지역에 2,200여 개의 파고다와 많은 遺跡을 가진 미얀마 최고의 觀光地이자 세계3대 佛敎遺蹟地 중 하나이다. 몽고군의 침입, 영국 식민 시절의 文化財 약탈과 도굴, 일본 침략군의 문화재 약탈, 1975년 地震 등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지만 수많은 Pagoda들은 여전히 神秘함과 聖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백제의 옛 수도 부여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Slow Country!”
요즘 ‘Slow city’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 Slow city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쉬어가면서 여유롭게 사는 고장’ 이란 뜻으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 운동’이다. 우리 주변에도 담양 창평, 완도 청산도 등이 있다. 그런데 이곳 미얀마는 나라 전체가 ‘Slow’다. 즉 “Slow Country”다. 불교 신도가 78%나 되는데다가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행동하는 僧侶처럼 미얀마 국민들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車道에는 속도제한 표시도 없고 경찰 단속 카메라도 없다. 道路 사정이 좋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낡은 중고 버스가 빨리 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고르지 못한 도로가 過速 防止턱 役割을 하고 있는 셈이다. 逆說的이기는 하지만 Slow 면에서는 미얀마가 앞서가는 나라인 것 같다.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내 인생 시계가 느림의 삶을 추구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市內버스는 트럭을 개조한 ‘픽업’이 운행되고, 市外버스는 낡은 중고버스를 들여와 운행하고 있다. 버스 料金은 外國人이 內國人보다 30%~ 50% 정도 더 비싸고 市外버스의 경우 非需期라도 예약은 必須라고 한다.
事業차 들어온 外國人들은 時間이 곧 金인지라 주로 미얀마 국내선 여객기를 이용하는데 外國人의 항공료는 內國人의 2倍라고 한다.
◈ Korean Pass! Pass!
미얀마에 들어올 때만 해도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국내 治安이 不安 때문에 외교부에서 旅行 自制地域으로 정하여 Visa 발급도 해주지 않았고 1983년 아웅산 爆破事態가 아직도 記憶에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市·道 境界 檢問所 앞에서 차를 멈추고 운전기사는 通行料를 낸다. 우리나라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통행료 내는 것과 같다. 이때 軍警들이 차에 올라와 乘客들을 檢問檢索을 한다. 6·25사변 후 우리나라에서도 軍警이 버스를 세우고 올라와 身分證(道民證) 검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문검색하던 軍警들이 우리 일행 旅券을 보고는 웃는 얼굴로 “코리안 패스! 패스!”라고 외치면서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이제야 不安感이 다소 놓였다. KPOP과 드라마, 이곳에 進出한 企業등이 우리나라 弘報大使 역할을 톡톡히 해서 이곳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好感을 느낀 결과라는 생각이 들자 고맙고 感謝했다.
◈ Berma족은 어떤 種族인가?
미얀마는 180개나 되는 많은 種族이 사는 多種族 국가이다.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種族數는 135개) 言語와 宗敎, 生活風習이 다르기 때문에 종족 간에 다툼이 자주 일어난다.
버마족은 王朝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土着주민이며 오늘날 문화발전의 主人公도 자신들이고, 人口數로 보아도 버마족이 전체의 69%임으로 자신들이 나라를 책임져야 한다는 自負心이 대단한 民族이다. 버마족이 세운 버강 왕조는 타 종족을 침략하여 처음으로 통일 국가를 만들었고, 한때 나라 이름을 ‘Berma’라고 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 나라의 支配族은 자기들 버마족이고 나머지 소수종족은 被支配族이라고 생각한다. 支配, 被支配 종족 간에 階級意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족 간 갈등은 주로 버마족과 기타 소수종족 간의 宗敎의 자유와 人權문제 때문이라고 한다.
얼마 전 ‘로힝야族’ 문제가 바로 버마族에 대한 少數 種族 反撥의 좋은 例라고 볼 수 있다. 印度와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영국이 印度에 살고 있던 로힝야족을 건축노동자로 미얀마로 데려왔는데 2차 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떠나 버렸고. 로힝야족은 미얀마의 市民權 인정도 못 받고 無國籍 상태인데다가 종교의 자유도 없는 상황에서 이스람교도로서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로힝야족은 미얀마 정부를 상대로 市民權을 인정해 주고 宗敎의 자유를 달라고 몇 차례 진정도 하고 시위도 해 보았으나 돌아온 답은 “당신들은 건축노동자로 印度에서 왔으므로 이제 다시 印度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로힝야족은 자기들 시위를 가로막는 미얀마 군부와 충돌하게 되었고,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敵으로 간주하고 國外로 쫓아내 버린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버마족이 지배족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여러 소수종족과 손을 맞잡고 힘을 합하면 오늘과 같은 국내 불안은 없어지고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고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얀마는 열대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쌀 등 農産物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금,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등 값비싼 보석 地下資源이 풍부한 黃金의 나라이므로 財政的으로 결코 가난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 민족이 檀君의 자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 單一민족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倍達民族”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요즘 우리 민족이 配達(宅配)을 선호하기 때문에 ‘配達民族’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이 가끔 있다고 하는데 ‘配達民族’이라는 용어는 辭典에도 없고 우리 민족을 輕視하는 말이므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 信仰敎育 義務制?
우리나라 ‘兵役 義務制’처럼 이곳에는 ‘信仰敎育 義務制’(?)라는 게 있다. 국민은 누구나 일정 기간 동안 寺刹에 들어가 削髮하고 僧服을 입고 僧侶와 더불어 생활하면서 몇 년 동안 불교의 原理와 이를 日常生活에 適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佛敎 理想國家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僧服을 입으면 시내버스는 무료이고 僧侶는 이곳에서는 國民의 指導者로 존경을 받는다. 처음 만나면 두 손을 合掌하여 가슴까지 올리며 ‘밍글라바’(안녕하세요), 헤어질 때도 두 손을 합장하며 ‘째주 띤바대’(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하는 것이 生活化 되어있다. 상대편 말을 들을 때에도 두 손을 계속 合掌하고 있었다.
◈ ‘唯一神’ 對 ‘가난한 이웃’
나는 佛敎信者는 아니지만 佛敎聖地인 이곳에 왔으니 佛敎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 불교는 상좌부 불교(小乘佛敎)라 하는데 佛經 이해와 禪을 중시하고 붓다(佛陀)가 곧 神이라고 생각하며 평범한 일상적 삶의 행위 가운데에서 眞理를 깨닫는 體驗을 강조한다. 즉 붓다가 唯一神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불교는 佛經의 이해도 중요하지만 慈悲를 더 중시하고 불교의 大衆化에 주력하는 등 보다 진보적이어서 大乘佛敎라 한다. 모든 불교에서는 사랑을 중시하지만 大乘佛敎에서는 사랑을 慈라고 하지 않고 慈悲라고 해서 悲자를 붙였다. 悲는 남의 어려움(슬픔)을 생각하자는 것으로 어려운 사람 입장에서서(易地思之) 그 사람을 돕는 것이 참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스님이 “부처는 절간에 있는 佛像이 아니라 病들어 누워있는 者와 가난한 이웃이 곧 부처고, 信徒 개개인이 모두 부처이므로 부처답게 행동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교 경전의 중심사상이 般若心經인데 원효대사는 화엄경의 글을 引用하여 ‘一切唯心造’(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라고 하셨다. 般若心經과 一切唯心造 모두 ‘心’字가 들어간다. 따라서 불교중심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心)’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良心’이 곧 부처이므로 --
이곳 사람들의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 주머니가 없으니 돈은 허리춤에다 꾸겨 넣는다. 주머니가 없는 옷을 입는 것은 아마도 物慾을 갖지 말라는 佛心의 영향인 것 같았다. 나도 이곳에서 그동안 내 마음에 끼어있는 욕심의 때를 깨끗하게 씻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귀국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 耳目口鼻를 구분할 수 없는 佛像
미얀마는 國敎가 佛敎이고 국민 89%가 불교 신자이다. 국민들은 佛供을 드리기 위해 寺刹에 자주 가는데 金錢的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은 佛錢函에 紙幣를 넣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金딱지를 사 가지고 가서 佛像 얼굴 등 몸에 붙인다. 아무리 가난해도 佛供을 드리러 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금딱지가 더덕더덕 많이 붙은 불상은 耳目口鼻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나라 사람들의 佛心을 짐작할 수 있었다.
◈ 붓다(佛陀)가 豫言 한 도시 ‘만들레’
인구 50만이 넘는 제2의 도시인 만들레(Mandalay 만다레이)는 古代와 現代가 共存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미얀마 文化의 수도’이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와 함께 직접 오셔서 만들레 언덕에 올라 현재의 만들레 도시 자리를 가리키며 이곳이 다음에 큰 도시가 될 곳이라고 가리켜 주셔서 그후 그 자리에 도시를 만들었는데 그 도시가 바로 오늘날 ‘만들레‘라고 했다.
만들레市는 시내 중심지에 있는 현대식 建物과 商店이 영국 植民地時代의 건물과 調和를 이루고 있어서 아름답고, 옛날 首都였던 시절의 ‘만들레궁’ 등이 있다. 市外로 조금 나가면 뱀(snake) 파고다가 있는데 여기에는 뱀이 佛像 좌우에 한 마리씩, 그리고 머리에 한 마리 등 모두 3마리가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매일 11:00에 한 마리씩 교대로 내려와 미리 준비해 둔 水槽에서 목욕을 하고 信徒들이 준비해 둔 茶(미얀마 우유)를 마신 후 제자리로 돌아가는 儀式을 취한다. 이곳 사람들은 뱀이 寺刹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었다.
◈ ‘만들레’에서 만난 韓國人 僑胞
旅行 Guide book을 보니 만들레市에 韓國人 식당이 있어서 처음에는 好奇心으로 찾아갔다. 남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 사람, 여자는 미얀마 사람인데 泰國 식당에서 料理師로 같이 근무하다가 만나서 結婚하고 이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미얀마에 와서 처음으로 우리 僑胞를 만났다. 점심때인데 손님이 거의 없어 걱정이 되어서 食堂이 어떻게 운영되느냐고 물었더니 中國人들이 모임 때 이곳을 많이 利用해 주고, 자기는 佛敎聖地巡禮者들의 가이드Guide를 해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 韓國人으로는 ‘만들레대학’ 한국어과 교수 한 분이 더 계신다는 말도 덧붙였다.
메뉴판을 보니 우리 韓食은 없고 힝(미얀마 정식), 터민죠(볶음밥), 터민바웅(덮밥), 카욱쉐(칼국수) 등 태국, 인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퓨전 음식뿐이었다.
이들 음식은 부드러운 香辛料를 사용하여 누구나 먹기에 좋은 것들이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食堂 主人이 말도 조리 있게 잘할 뿐만 아니라 미얀마의 불교, 역사, 문화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처럼 自由旅行을 다니는 입장에서 異國땅에서 이런 사람을 만나니 千軍萬馬의 支援군를 만난 느낌이었다.
미얀마에 와서 意思疏通이 잘 안되니까 궁금한 것이 많아 답답했는데 이 식당에 와서 막혔던 구멍이 펑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것저것 묻고 답하는 對話 時間을 늘리기 위해서 식사에 술과 안주를 곁들여 賣上高를 올려주려고 했으나 우리 돈으로 2만 원이 조금 넘어갈 뿐이었다. 生活 物價가 아주 싼 곳이었다.
식당이 만들레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미얀마에 대해 궁금한 것이 아직도 남아있고 또 조금이나마 식당의 賣上高를 올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 다음날도 궁금 보따리를 들고 택시로 그 식당으로 향했다.
◈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미얀마는 1885년부터 1947까지 60여 년간 ‘英國의 植民地였다가 1930년대부터 아웅산의 주도하에 武裝鬪爭이 시작되자 영국은 1947년 1월 制憲議會를 만들어 아웅산이 內閣을 구성토록 하는 독립국가 탄생을 준비했는데 진보 혁명론자였던 우소Usaw 및 그의 일당에게 아웅산과 각료 6명이 被殺당하게 되자 우누Unu가 아웅산의 자리를 잇게 되었고 1948년 1월 4일 독립국가 ’버마‘가 탄생되었다. 우누Unu가 초대 首相이 되어 內閣制로 운영되었지만 곧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독실한 佛敎信者인 우누Unu는 佛敎 理想 國家를 제창했지만 불교도가 아닌 여타 소수종족들의 반발을 산데다 정치적 경험도 부족하여 國家統合에 완전히 失敗하였다.
네윈 Ne Win 장군은 한국의 5·16 군사반란이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이듬해인 62년 3월 2일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혁명평의회’를 ‘조직하고 모든 財産을 國有化하는 ‘버마식 社會主義’를 천명하고 국회의원의 25%와 장관 3명(국방, 내무 등), 國營企業體長도 모두 軍部가 지명하도록 하고, 이 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70%이상의 贊成이 있어야 하도록 법을 만들어 버렸다. 정치 군사 경제 등을 모두 軍部가 장악한 가운데 미얀마는 긴 軍部統治 時代로 접어들었다.
네윈이 버마식 社會主義를 제창하면서 외부세계와 斷絶한 채 오직 자신들만의 힘으로 국가발전과 국민통합에 주력했으나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反政府 시위가 일어났다. 1988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이라 8888항쟁이라 불리 운다. 이 항쟁으로 네윈 Ne Win은 26년 權座에서 물러났지만 군부독재가 계속되자 승려들까지 반정부 시위(샤프론 혁명)에 가담하였으나 군부독재는 끝나지 않았고 군부는 소수종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國名을 ‘버마’에서 ‘미얀마연방공화국’으로 바꾸면서까지 군부독재를 이어갔다.
민주세력에서는 우누Unu 전 수상을 중심으로 民族民主同盟(NLD)이라는 이름으로 政堂등록을 마치고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여기에 수지여사도 참여하였다) 1990년 실시된 國會議員 선거에서 NLD는 485석 중 70%가 넘는 362석을 차지하는 압도적 勝利를 거두었으나 군부는 선거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非常事態를 선포하고 NLD의 지도자인 수지 女士가 외국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2010년까지 自宅軟禁해 버렸다. 軍最高司令官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軍部指導者最高會議에서 선출하고 非常事態도 대통령이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軍最高司令官이 선포하며 非常사태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의 구별이 없이 軍最高司令官이 마음대로 한다.
늦게 배운 도둑이 어쩐다더니 --
◈ 同病相憐의 따뜻한 손길미안 미안해! 미얀마(Myanmar)!!
역사적으로 볼 때 軍部獨裁가 스스로 民主政府에 政權을 내놓는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도 5·18 光州民主化運動을 비롯하여 9·10 民主抗爭 등 국민들의 끊임없는 민주화 운동이 결국 軍部獨裁를 무너뜨렸었다.
이곳 軍部지도자들이 軍部獨裁를 우리나라에서 배웠으니, 군부독재를 終熄시키는 방법도 이곳 國民들이 우리나라 國民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어떨는지?
요즘 미얀마 市民團體에서는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5·18 光州民主化運動을 벤치마킹 하자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반가운 일이다. 우리가 미얀마 군부에 軍部獨裁를 억지로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 미얀마 軍部獨裁가 이렇게 오래 持續되는 걸 보면서 軍部獨裁의 쓰라린 경험이 있는 우리 국민들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同病相憐의 입장에서 온정의 따뜻한 손길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일을 하는데 늦은 때란 없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고 터널이 아무리 길어도 끝이 있기 마련이므로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마음으로 기다려 보는 수밖에 ---
南無阿彌陀佛!
◈ ‘아웅산 墓地’ 爆破 事件
미얀마 軍部指導者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고 현존하는 사람 중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이라고 한다. 그래서 1983년 전두환 대통령을 國賓으로 초빙했는데 아웅산 묘지 폭파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미얀마에서는 외국 원수가 미얀마를 방문하면 맨 먼저 아웅산國立墓地를 參拜하도록 되어 있는데 전두환이 참배하는 당일 미얀마의 儀典擔當者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5분 정도 늦게 宿所를 출발하여 아웅산 묘지로 가는 도중 北韓 工作員이 秘密裡에 설치해 놓은 時限爆彈이 터져, 참배 豫定 시각에 맞춰 현장에 미리 와있었던 隨行員들은 모두 死亡하고 전두환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儀典擔當者의 失手가 전두환을 살렸다. 전두환은 오래 살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웅산國立墓地’는 양곤 市內에 있는데 ‘아웅산장군追念日’에만 공개한다고 한다.
◈ 歷史속으로 時間 여행
지금 우리 나이에 特別한 날이 아닌 날이 없지만, 지금은 여행 중인 데다가 오늘은 살아있는 博物館을 구경하러 가는 정말 특별한 날이다.
인레 湖水(Inle Lake) 관광에 나섰다. 우리가 탈 차는 봉고차로서 오전 7시에 出發 豫定인데 8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했다. ‘미얀마 타임’은 옛날 우리나라 ‘코리안 타임’보다 훨씬 심한 것 같았다. 지금 코리안 타임은 거꾸로 ‘빨리빨리’가 되어 버렸다. 차가 늦게 출발한 것도 문제지만 낡은 차라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차는 출발했는데 道路 與件이 아주 안 좋았다. 아스팔트 옷을 아직까지 입어본 흔적이 없는 太古的 道路 모습 그대로였다. 산 밑을 따라 길이 났으니 꾸불꾸불한 모양은 당연한 것이지만 도로 바닥에 자갈과 나무뿌리, 큰 바위 등 때문에 屈曲이 심해서 낡은 차는 이 障碍物들을 피하면서 조심조심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었다.
“길”이란 순수 우리말인데 ‘길’자를 자음과 모음으로 풀어 놓으면 ‘ㄱ’, ‘ㅣ’ ‘ㄹ’이다. 길의 모양도 ‘ㄱ’자 모양, ‘ㅣ’자 모양, ‘ㄹ’모양이다. ‘길’이란 글자를 길의 모양을 보고 만들어낸 ‘象形文字’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꼬불꼬불한 ‘에움길’이다. ‘에움길’은 目的地까지 가는데 시간은 더 걸리지만 주위 環境을 천천히 그리고 많이 볼 수 있어 우리처럼 여행하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길이다.
40여 분 갔을 때 처음 고장이 났다. 모두 차에서 내려 도로가 언덕 나무 그늘 밑에 앉아 두 손을 合掌한 채 기다리고 있다. 어디가 고장이 났는지 修理하려면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늦어도 좋으니 目的地까지만 무사히 데려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느긋한 마음으로 두 손을 合掌하고 있는 듯 보였다. 버스 기사와 조수가 차 밑을 들락거리더니 다행히 어떻게 고쳐냈다. 여기서는 운전기사가 운전은 물론 修理工 역할까지 잘해야 될 것 같았다.
다시 출발하여 한참을 가다가 또 멈춰 섰다. 차 밖을 보니 길가에 기름통(플라스틱 통)이 몇 개 있고 기름통 주인인 듯한 분이 긴 쇠막대를 가지고 와서 기름통 입구에 넣었다가 뺀 후 기름 묻은 흔적을 운전 기사에게 보여주자 기사가 손가락 두 개를 보여준다. 기름 두 통을 넣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운전석 앞에 있는 油量計가 고장이 나서 殘油量을 알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탄 車는 가는 도중에 乘客이 있으면 무조건 다 태웠다. 돈을 더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乘客들이 가고 싶은 곳까지 데려다주려는 配慮인 것 같았다. 출발할 때부터 승객들만 차 속 坐席에 앉고 짐은 모두 차량 위에 올려서 밧줄로 꽁꽁 묶어 두었는데 좌석이 부족하면 조수가 차량 위로 올라가고 또 다른 승객이 타면 젊은 사람들이 자진해서 위로 올라갔다. 차량 위에 타는 것이 위험한 일이지만 불교에서 無財七施 중 자리를 讓步하는 것도 ‘座施’로 七施에 들어간다 하니 그걸 실천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운전기사는 차량 위에 탄 乘客들의 安全을 위해서라도 천천히 갈 수밖에 없었다.
기름을 넣으려고 잠시 쉬는 동안 옛날 어떤 책에서 읽었던 문장이 갑자기 생각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自然의 모습’인데 그것도 ‘자연이 本來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때’라고 쓰여 있었다.
차가 다시 출발했다. 가면서 주위 환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高速道路나 高速鐵道를 설치하려고 산허리를 잘라 낸 흔적이 없고, 지름길을 만들려고 논·밭길을 파헤친 흔적도 없다. 山과 들판 모두가 푸른색으로 자연 본래의 모습 그대로다.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미얀마라는 생각이 들자 더 열심히 自然을 바라보게 되었다.
두 번째 고장이 났다. 이번에는 중요한 部品이 망가진 모양이다.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그 部品을 팔아 달라고 事情을 30분쯤 해서야 겨우 부품을 구하고 고쳐서 다시 차가 출발했다.
우리도 60년 전만 해도 비가 온 후 차바퀴가 진흙 땅속에 빠지거나 자동차 始動이 꺼지면 乘客이 모두 내려 차를 앞으로 밀어주었던 기억이 새롭고 승객이 너무 많아 滿員이 되는 경우, 차장이 車門을 닫지 못한 채 차에 매달려 자기 몸으로 乘客들을 차 안으로 밀쳐 넣으면서 ‘오라이’! 라고 외쳐댔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우리가 탄 차는 좀 가다가 또 멈춰 섰다. 세 번째 고장이 난 것이다. 자동차 整備業所가 따로 없다 보니 無備有患일 수밖에 없을 것 같고 버스가 오고 가는 시각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좀 지났다. 인레호수까지 가야 하는 우리 일행의 마음이 바빴다. 도로 옆 큰 가게에 들어가 택시 좀 불러 달라고 했더니 자기 가게에 電話機가 없으니 좀 기다려 달라고 해 놓고 그 집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택시를 불러 왔다. 시골에는 아직도 전화기가 普及되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도 70년대 중반까지 전화기 없는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 고마워서 謝禮를 하려 했으나 절대 사양하는 바람에 말로만 ‘째주 띤바대!’(고맙습니다) ‘째주 띤바대!’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착한 國民性을 端的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場面이었다. 이런 착한 國民들이 어쩌다가 軍事政府의 獨裁를 받게 되었을까? 우리가 여기까지 이렇게 좋은 ‘사람 냄새’를 맡으러 온 건 아닐까?
運轉技士, 그리고 함께 搭乘했던 乘客들에게도 손을 들어 作別 인사를 했다.
出發한 지 무려 12시간 만이다. 12시간 동안 쉼 없이 혼자 운전한 기사가 고맙고 대단했다. 12시간 동안 혼자 운전! 지금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도 스스로를 稱讚해야겠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고생했다! 그동안 잘 견디어 주어서 고맙다!
初行길이라 모든 게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50~60년 前의 추억을 되살려 주는 살아있는 博物館을 구경하면서 왔다. 이곳에 오던 첫날은 廢車 博物館을 보았는데 오늘은 살아있는 博物館을 구경하면서 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루한 줄 모르고 왔던 것 같아 感謝한 마음뿐이다. 이런 좋은 體驗을 여기가 아니면 어디에 가서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인레 湖水에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여행하는 過程에서 幸福을 충분히 느끼면서 왔다고 생각했다.
幸福에서 ‘幸’字는 羊이 흙(土)을 머리에 떠받치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뜻글자라고 한다. 따라서 羊은 풀을 자라게 해주는 土(땅)에게 항상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이 곧 幸福이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서 幸福感을 느끼면서 왔다면 특정인 누구보다는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택시를 타고 오면서 기사에게 쉐낭 삼거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방금 택시 타신 그 부근이라고 했다. 양곤 호텔 주인이 호수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없으니 쉐낭 삼거리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라고 했는데 버스가 고장이 나도 우리가 내려야 할 곳까지 거의 다 와서 고장이 난 모양이다. 다행스럽다. 기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택시로 25분쯤 달리니 우리의 목적지 ‘인레 湖水’가 나타났다. 양곤 호텔 주인장이 豫約해 둔 호텔에 도착했다. 숙소는 湖水 바로 옆에 있어서 展望이 아주 좋았다. 案內해 준 방으로 들어가니 호텔 직원이 TV채널을 우리나라 MBC에 맞춰 주었는데 엄기영 앵커가 9시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황모 교수의 '줄기세포' 관련 搜査狀況을 報道하고 있었다. 이게 며칠만이냐? 여기까지 와서 고향 소식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향에 되돌아온 것처럼 무척 기뻤다. 배고픔도 잊은 채 한참 동안 TV 수상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地上樂園 인레 湖水(Inle Lake)
인레 湖水는 해발 875m 高原지대에 있는 길이 22㎞, 폭 11㎞의 미얀마 최대 규모의 山頂 湖水다. 너무 커서 바다인지 호수인지 헷갈린다. 海拔 800미터가 넘는 高原지대에 이렇게 큰 호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밤 10시경 호텔 앞 호수 근처에서 送年파티가 있었다. 호텔 投宿客을 위해 호텔 측에서 준비 했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2005년 12월 31일 금년 마지막 날이다. 가운데 탁자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앉아서 맥주, 과일, 빵 등을 놓고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자기소개, 자기 나라 소개, 민요 부르기를 하였다.
우리 호텔에는 캐나다, 네덜란드, 독일, 영국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다. 캐나다 부부는 3년째 이곳에 와서 ‘送年의 밤’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에 자세히 보니 湖水와 隣近 숲이 어우러져 호수가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見物生心’이라 더니 나도 모르게 物慾이 생겨났다. 앞뒤를 살필 겨를도 없이 난 天地神明을 원망했다. 이런 좋은 湖水를 미얀마에는 만들어 주고 왜 우리나라에는 주지 않았느냐고? 우리나라를 너무 忽待하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地下資源도 없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맨주먹으로 世界 强大國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天地神明께서 우리 국민들에게 좋은 品性, 명석한 頭腦, 끈질긴 熱情 등을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天地神明께 感謝해야 한다고 --
보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天地神明께 투정을 부려서 罪悚하다고 -- 앞으로는 더 이상 慾心 부리지 않겠노라고 ---
아침 식사 후 인레 호수 관광에 들어갔다. 관광은 숙박업소에서 신청하는 패키지 투어(보트 트립)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6명이 定員인 모터보트를 하루 賃貸하여 주변의 사원, 주변 마을에서 열리는 5일장, 채소나 방울토마토를 재배하는 물 위에 떠 있는 밭(준묘), 발로 노 젓는 인타족 뱃사공, 각종 수·공예품 공장, 수상시장, 水上家屋을 구경하고, 傳統衣裳을 입고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을 파는 목이 긴 빠다웅族(Long neck tribe 기린族) 등을 만났다. 湖水가 넓고 볼거리가 많아 하루 일정으로 다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이 湖水는 유럽의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휴양지로 英國이 미얀마를 지배하고 있을 때 休養地로 개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 등 유럽에서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호수 물이 맑은 청색이라 바닷물같이 느껴진다.
유럽 여행객들은 일단 양곤 비행장까지 온 후 양곤에서는 미얀마 국내 여객기로 갈아타고 호수 부근에 있는 ‘헤호’ 비행장으로 와서 다시 택시로 이곳 호수까지 온다는 것이다. 이 호수는 利用客의 便宜를 위해서 隣近에 작은 飛行場까지 만들어 놓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有名한 休養地인 것이다.
우리 일행은 낡은 버스 속에서 12시간 동안 시달리며 왔지만, 歲月의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50~60년 前의 追憶을 반추해 볼 수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 구경을 하면서 왔으니 우리가 더 보람 있고 값진 여행이었다고 自負한다.
유럽인들은 休養이 목적이므로 湖水가 目的地이지만 우리는 50~60년 전의 追憶을 되살려보는 ‘살아있는 博物館’을 보러 왔으니 12시간 동안 車를 타고 오는 過程 하나하나가 모두 目的地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후 호숫가로 나왔다. 바람이 불지 않으니 조용하고 湖水가 잔잔했다. 바람도 이 좋은 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잠시 쉬어 가는가보다. 글자 그대로 休養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보니 푸른 하늘에 별들이 쫙 깔려 반짝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별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 별들이 모두 이곳으로 休養하러 온 모양이다. 세계 각지에 있는 별들도 모두 이곳으로 休養하러 왔으니 이곳 하늘에 별들이 많을 수밖에 --
이 호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바람, 별 등 이 세상 萬物의 休養地인 것 같았다.
◈ 海拔 1,430m에 都市가 있다?
우리가 호텔 측에 이곳 高山族 마을의 집을 하나 訪問하고 그 집에서 미얀마式 점심도 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미리 해 두었더니 호텔 종업원이 30대 중반쯤 돼 보이는 現地人을 호텔로 데리고 왔다. 자기는 현지 가이드Guide라고 했다. 점심때까지는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곳에서 주로 사용하는 외국어는 영어, 인도어, 중국어, 태국어인데 옛날 영국의 식민지인 탓에 그 중 영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또 이렇게 높은 지역에 호수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더니 이 地域은 미얀마 東部의 高原地帶인 ‘샨’州에 속하는데 州都인 ‘따웅지’는 海拔 1,430m에 있는 都市라고 한다. 무등산보다 더 높은 지역에 도시가 있다? 海拔 1,430m인 따웅지에서 인레 호수를 내려다 보면 어떻게 보일까? 海拔 875m에 있는 湖水를 신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미얀마에는 種族간 階級意識이 존재?
점심때가 되어 가이드Guide집에 갔다. 방안에 들어서자 壁面에 걸려있는 커다란 女子大學生 졸업사진이 눈에 띄었다. 누구 사진이냐고 물었더니 자기 와이프 사진이라고 했다. 당신도 대학교를 졸업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버마족인데 중학교만 졸업했고 자기 아내는 소수종족인데 대학교를 졸업했단다. 소수종족 처녀가 버마족 남자와 결혼하려면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種族間에 階級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立證해 주었다.
◈ 幸福보다 더 좋은 것은 滿足이다.
점심은 대학에서 요리를 전공했다는 가이드Guide 부인이 인례호수에서 잡은 생선으로 요리를 해 와서 맛있게 먹었지만 우리가 바라는 미얀마式 요리는 아닌 것 같았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데 천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매우 요란했다. 천정을 보니 함석으로 지붕을 해 놓고 그 밑에 스티로폼 등 防音, 放熱 遮斷제를 붙이지 않아서 빗소리가 요란했다. 그런데 소나기가 내리자마자 온 가족이 웃는 낯으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멈추자 노래도 멈췄다. 그래서 왜 방음, 방열 차단제를 붙이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돈이 없어서 아직 못 붙였지만 비가 내리면 시원해지니까 고맙고, 비를 피할 수 있는 내 집이 있다는 것이 고마워서 온 가족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소나기가 내릴 때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날 때마다 고맙다고 노래를 부른다니 이런 마음의 餘裕가 바로 幸福이 아닐까? 이를 지켜본 순간 우리 일행도 행복 바이러스를 온몸에 받아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꼈었다. 幸福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滿足이었다.
이튿날 우리는 호텔 측에서 마련해 준 픽업트럭을 이용해서 따웅지 삼거리 까지 와서 양곤행 익스프레스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양곤으로 되돌아와서 늦은 저녁밥을 먹고 나니 미얀마에서 9박 10일의 마지막 밤 어둠이 서서히 내려왔다. 演劇이 끝나면 막이 내려오듯이 --
◈ 會者定離, 去者必返
아쉬움을 뒤로하고 드디어 떠나야 하는 날이다. 짐을 싸고 있는데 主人丈이 와서 그동안 사용하고 남은 짯(kyat 미얀마 화폐)이 있으면 달러로 換錢해 주겠단다. 空港 出國場에 가면 公式 換率로 換錢해 주기 때문에 적게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K50 이상짜리만 환전하고 나머지 액수가 적은 짯은 다음에 우리가 다시 이곳에 올 때까지 잘 保管해 주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합니다’ 하며 웃는다.
떠나기 前 ‘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고 써 보였더니 우리의 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웃으며 “要一定後來!”(다음에 꼭 오십시오)라고 한다.
‘再見’! (다시 만나요)
과연 ‘去者必返’을 履行하는 날이, 再見하는 날이 언제 다시 올려는지?
이제 우리는 泰國의 남쪽 休養地인 푸켓(Phuket)에서 2일간 休息을 취한 후, Malaysia로 가서 그 곳 旅行客들의 삶을 살펴 볼 豫定이다.
< 글을 마치면서 >
코로나19 때문에 방콕 생활을 하다 보니 소중한 시간을 그냥 무의미하게 보내고만 있는 것 같아 옛 추억을 되살려 旅行 落穗를 한 번 써보기로 했다.
요즘 미얀마 사태가 國際的인 뉴스의 초점이 되어있어서 미얀마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내가 옛 생각을 한번 反芻해 보려고 했는데 文章 表現力이 부족한 관계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수밖에 ---
9박 10일 동안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미얀마는 우리 남한보다 6배가 더 넓은 땅이어서 눈감고 코끼리 다리 하나 만져보고 온 느낌이다. 移動거리가 멀고 달리는 車의 속도가 느리다 보니 所重한 시간을 도로 위에서 다 보낸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더구나 지금부터 16년 전에 보았던 追憶을 오늘에 되살려보려고 하니 그동안 歲月의 밀물이 밀려와 追憶의 끈이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50~60년 前의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을 보고 온것 같아 무척 보람 있고 값진 時間 여행이었다고 스스로 自評해 본다.
우리와 미얀마가 다른 점이 있다면 미얀마는 “Slow Country!”답게 歲月의 시계가 우리보다 늦게 가고 있어서 지금보다 50~60년 전 우리가 10代 때에 겪었던 일들을 오늘 이곳 10代 들이 겪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生命 安全을 위해서 旅行을 自制하라고 Visa발급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우리가 이를 自制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Visa를 받아 올 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騷擾사태가 언제 끝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운 오늘날의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그때 갔다 오길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때 機會를 놓쳤으면 어떠했을까?
나는 外國 나들이를 한 후에는 이번에는 무엇을 배웠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곤 하는데 미얀마를 다녀와서는 “모든 일은 서서이, 쉬엄쉬엄 하자!”로 정했다.
몸도 Slow, 마음도 Slow한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의 餘裕가 부러웠고, 莊子가 말하기를 ‘삶의 旅行’은 ‘멀리 여행가서 노는 것’(逍遙遊)이라 했는데 ‘逍遙遊’세 글자에 모두 들어가는 ‘책받침 변’이 ‘쉬엄쉬엄’을 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牛步千里’라는 말이 있다. 소처럼 천천히 걸어야 千里를 간다는 뜻이다. ‘느림의 철학’이 몸에 벤 이곳 미얀마 사람들은 소처럼 뚜벅뚜벅 걷는 과정에서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苦難은 견딜 수 있을 만큼 주어지는 아픔이고, 보람은 견디어 낸 만큼 얻어지는 기쁨이다’라고 했다. 미얀마는 英國 식민지 60여 년에 이어 또 軍事獨裁 50여 년이 持續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무쇠도 담금질을 오래 하면 鋼鐵로 변한다고 했으니, 현 소요사태가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군사독재가 끝나는 날 미얀마 국민들은 鋼鐵 같은 힘을 가진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 옛날 버마제국의 名聲을 되찾으리라고 믿는다.
무한한 潛在力 그리고 수많은 文化遺産과 때 묻지 않은 自然이 우리를 반겨주는 놀라움의 땅 미얀마!, 아직은 여행객이 많지 않고 觀光인프라가 발달하지 않아 都市간 이동이 不便하고 각종 慰樂시설과 通信시설도 부족하지만 그만큼 未知의 땅을 探險하는 가슴 벅찬 感興을 느낄 수 있는 나라가 바로 黃金의 땅! 미얀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地球村에 놀러 온 旅行客이므로 현재의 자연을 빌려서 쓰고, 갈 때에는 자연 그대로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걸 가장 잘 실천하는 국민이 미얀마인 것 같아 이점은 참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이곳 少數民族 중 우리 民族과 너무 닮은 모습이고 음식도 우리 입맛에 딱 맞게 만들어 먹는다는 ‘샨(shan)族’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전체인구의 9%인 500만명 정도가 ‘샨족’이라고 하니 버마족 다음으로 인구수가 많은 민족이다. ‘샨족’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이번에는 시간의 餘裕가 없으므로 그 課題는 다음번에 다시 와서 解決하기로 하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高速道路를 100㎞로 달리면서 우리의 一方的인 잣대로 미얀마를 본 것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그리고 미얀마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自然環境을 우리가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럽히지는 않았는지? 罪悚스런 생각이 든다.
미안 미안해! 미얀마!!
미얀마를 다녀온 旅行客의 입장에서 여기 여행 온 地球村 여행객 모두가 즐겁게 여행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조용히 合掌을 해 본다.
觀世音菩薩! 南無阿彌陀佛!
그리고 우리가 미얀마를 여행을 하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미얀마 국민들에게도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째주 띤바대!(감사합니다)
(202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