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마을 이사동 이야기,난곡 송병화와 봉강정사
대전 사람들은 대전시의 남쪽 끝자락 동네를 산내라고 부른다. 이지명은‘산안이-사라니-사한리-이사동’으로도 불린다. 원래는산의안쪽마을이라는뜻에서출발했겠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며 마을의 이름도 여러의미로 바뀐 듯하다.
봉강정사가 있는 상사한리는 원래 백(白)씨가 살던 곳이다. 그 후 회덕에 있던 송(宋)씨 중 일부가 조상의 묘가 있는 이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면서 은진송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조상의 묘가 있는 산에모래가많다고하여사산(沙山)으로기록했는데,산아래한천(寒泉:차가운 샘)이유명하여 뒷날 사한(沙寒)으로 불리게 된다.
사산의 형국이선동채란형(仙童採蘭形)이어서한말의유학자송병화는자신의호를난곡(蘭谷)이라 하고 마을 이름을 사란(沙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곳의인물인송남수는하사한리큰소나무가 많이 있는 곳에 못을 파고 송담(松潭, 吾道山人)이라는 호를 삼고 살았다.
이사동은소화동천(小華洞天)추로지향(鄒魯之鄕)이사리(二沙里)는상사한리와하사한리을 합해 부르는 명칭이다. 이사동은 대별동을 가로 지르는 자라천의상류에위치한다. 오도산사라니재를 넘어 남쪽으로는 소호동과 통하고,서쪽 장군봉 사이의 절고개를 넘으면 구완동으로 통한다.
마을사람들은 비교적 완만한 북쪽의 자느리 고개를 넘어 호동을거쳐시내를오갔다고 한다.
이사동은 추로지향(鄒魯之鄕), 즉 선비마을로 알려져 왔다.
윗사라니 수침골 바위에새겨진소화동천(小華洞天)이라는명문과향교골이라는지명,오도산이란 산의 이름도 이 곳이선비가 사는 고을임을 짐작게 한다.
이사동은 오도산을 등지고 좌우로 잠두봉과 장군봉을 거느리고있다.잠두봉은월봉을, 장군봉은 사산을 거느리고 있다.
이곳에는 1,000 여기가 넘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와 문사들의 무덤이 있다. 마을규모에 비하면 엄청난 문인들과 인연을 갖고 있는 문향이라 할 수 있다.
동춘당 송준길은 아버지인 청좌와(淸座窩) 송이창(宋爾昌)의묘를 이곳에 쓰고 사산 아래 우락재(憂樂齋)에서 시묘살이를했다.
당시 동춘당과학문적으로교유했던윤선거,이유태,송시열, 유계 등이 찾아와서 시국과 학문을 논했던 곳이기도하다.
도학(道學) 터 봉강정사(鳳崗精舍)와 난곡 송병화대별동을지나는자라천의상류를따라올라가면봉강정사가있는영귀대소나무언덕이보인다.영귀대옆에는광영지라는 소류지가 있다.
이 소류지를지나면사라니재를넘는골짜기가나타나는데이골짜기가 수침골이다.
골짜기를따라난산길을조금오르면개울건너의바위에난곡송병화의글로전해지는소화동천(小華洞天)이라는 암각이 보인다.
송병화(宋炳華,1852~1915)의본관은은진(恩津)이다.자는회경(晦卿)이고호는약재(約齋),난곡(蘭谷)이며 사우당(四友堂) 송국택(宋國澤, 정절사 배향)의 9대손이다.한말위정척사의학자로 문충사에 배향된 송병선(宋秉璿), 송병순(宋秉珣)등과학통을같이 하였고, 당시유림들로부터 간재(艮齋)전우(田愚)와함께율곡과우암의학풍을이어받은마지막성리학자로평가를받았다.고종건양(建陽)1년(1896)에문하제자들과함께오도산(吾道山)아래영귀대(詠歸臺)에봉강정사(鳳崗精舍)를 짓고 이른바 난곡학파를 형성했다.
고종9년(1905)정릉참봉에제수되었으나나가지않았다.융희3년(1909)공자교(孔子敎)를 높이어 태극교종(太極敎宗)이라 하고 교장(敎長)으로 추대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고종14년(1877) 당시의 시국을 보다 못해 상경하여영상(領相)김병학(金炳學)을만나 시무책을개진했으나서로 뜻이 맞지 않아 돌아왔다.그후영귀대에몸을감추고학문과후진양성에힘을쏟았다.1910년망국의 비보가 전해졌다. 일제가통한과울분에차있는난곡을수금은사(讐金恩賜)로회유하려했으나일언지하에거절하고끝까지의(義)를 지켰다.
영귀대는 난곡이항상애송하던논어선진편의‘증왈막춘자춘복기성관자오육인동자육칠인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曾曰 莫春者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증석은 늦은봄날에봄옷을입고어른대여섯명이아이육칠명과기수강가에서목욕을하고무우에올라바람을쐬고노래를부르며돌아오겠다)’에서 유래한 것이다.
봉강정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무고주오량집’ 구조이다. 봉강정사의편액은당대의 문필가인 일창(一滄)유치웅(兪致雄)이썼고,영귀대현판은담당(澹堂) 송우용(宋友用)이, 의두헌(依斗軒) 현판은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이 썼다.
간재 전우가쓴 기(記)와 송병화가 직접 쓴 상량문이 전한다. 현재의 봉강정사는 1976년에 유림들에 의해 전면 중건되었다.
송병화는 난정수계(蘭亭修契:왕희지가 삼짇날 난정이란 정자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제를 올리고 시를 지어 겨룬 일)의 고사처럼 계를 모아 봄3월과가을9월에강회(講會)를여는전통을 세웠다.
난곡은우암의화양(華陽)을찬양하여스스로영귀대를소화양(小華陽)이라고하였고,공자와주자의상(像)을액자에모셔놓고강회때마다참배했다고한다.수침골의소화동천(小華洞天)암각은이러한생각을반영한것이다.후손인송진국(宋鎭國·69)씨에의하면,1970년대100여명 정도가 참석하는 마을잔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