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는 친일인명사전이 오는 8일 반민특위 해체 60년, 편찬위원회 출범 8년 만에 발간된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최근 만주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전 게재를 막기 위해 유족이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낸 것에 대해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은 60년 전에 풀지 못한 '친일 청산'의 숙제를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오마이뉴스>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앞두고 갖은 굴곡을 겪어야 했던 지난 8년의 편찬사와 우리 시대에 사전이 갖는 의미를 3회에 걸쳐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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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008년 4월 2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4,776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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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되었습니다. 짧게는 이 작업을 위해 편찬위원회가 꾸려진 지 8년 만의 일이요, 길게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와해된 지 꼭 60년 만의 일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친일인명사전> 간행은 역사적 사건이라 할 만한 대역사(大役事)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위원장
윤 위원장은 발간사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지난 8년간의 작업을 '대역사'의 과정이라 칭했다. 윤 위원장의 말처럼 반민특위 와해 후 유야무야 흘러왔던 시대를 되짚어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공문서·신문·잡지 등 문헌자료 3천여 종, 인물정보 250만 건, 5천 건의 친일혐의자 모집단 추출 등 끝이 보이지 않는 편찬 작업의 방대함은 기본이었다. 지난 2003년 국회가 연구소의 용역연구 예산 전액을 삭감하는 등 편찬 사업이 좌초될 위기도 만났다.
유족들은 물론, 일부 수구단체들이 연구소 앞에서 집회를 열고 현판을 떼어내는 등 노골적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막아섰다. 당장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를 나흘 앞둔 4일, 보고대회가 열리는 숙명아트센터에는 '정체불명'의 항의전화가 계속 걸려와 센터 측에서 민족문제연구소에 우려 섞인 전화까지 하기도 했다.
그러나 편찬사업이 이와 같은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이들을 일으켜 세운 것은 '제2의 독립군'이었다.
발간 작업에 앞서, 1만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를 선언해 힘을 모았고 2004년엔 예산 삭감 사태에 공분하며 한 네티즌이 올린 국민모금운동 제안에 3만여 명의 시민들이 호응해 불과 11일 만에 목표액 5억 원을 넘기고 결국 7억여 원의 편찬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긴 산고(産苦) 끝에 8일 첫 선을 보이는 친일인명사전. 그 8년의 편찬사를 정리해본다.
반민특위 해체 60년 만에... 친일인명사전 편찬 그 힘들었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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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 표지, 제자(題字) 쇠귀 신영복 |
ⓒ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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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의 씨앗은 오래 전에 뿌려졌다.
<친일문학론>, <일제침략과 친일파>, <밤의 일제침략사> 등을 쓴 문학평론가이자 재야사학자였던 임종국 선생이 생전 못다 이룬 뜻을 후배 학자들이 이어받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하는 반민족문제연구소(현 민족문제연구소)가 1991년 설립됐다.
이후 연구소는 사전 편찬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친일파 99인>, <청산하지 못한 역사> 등을 펴냈다.
본격적인 편찬작업이 시작된 시점은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교수 1만인 선언' 이후다.
당시 반민특위해체 50주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와 몇몇 교수들이 나서 서명운동을 펼치기 시작해 불과 2개월 반만에 1만여 명의 교수들이 참여한 선언은 IMF 외환위기로 회원의 80%가 급감하는 등 침체기에 빠졌던 연구소에 다시 활기를 안겨 주었다. 당시 단일 사안으로 1만 명이 넘는 교수들이 서명에 참여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1년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각 분야의 교수와 학자 150여 명이 편찬위원으로 참여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인 편찬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전국 교수 1만인 서명에 동참했던 한국외대 이장희 교수는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에서 "사회 요소마다 친일 잔재가 뿌리를 박고 기득권 세력으로 남아있어 이름을 내놓는 것조차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지만 많은 분들이 서명을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 교수는 이어 "친일인명사전의 발간은 한국의 역사 청산만이 아니라, 아직도 과거사를 반성하고 있지 않은 일본, 그리고 동북아 평화질서를 바로잡는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다"며 "이를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이 한국사회의 시민적 가치는 아직도 숨쉬고 있단 것을, 정의가 항상 이기며 역사에 기록된다는 사실을 배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부와 국회가 못한다면 국민이"... 11일 만에 5억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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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는 2004년 1월 19일 오후 2시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카페에서 친일인명사전 성금 5억원 모금 달성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친일인명사전 네티즌 성금 이용방안에 대한 협약서>를 체결했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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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편찬사 가운데 '절체절명의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코 2003년 겨울이었다.
당시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예산조정소위원회는 여야 협의로 국회에서 편성했던 사전편찬 기초사업인 '일제단체인물연구'에 대한 지원 예산 5억 원 전액을 삭감했다.
그러나 좌초할 뻔한 친일인명사전을 구해낸 것은 일반 시민들이었다. 네티즌 한 명이 제안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오마이뉴스>의 공동캠페인으로 시작된 지 불과 11일 만에 목표액인 5억 원을 넘기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목표 금액이 달성된 뒤에도 시민들의 모금은 이어져 민족문제연구소는 무려 7억여 원의 편찬기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정책실장은 "당시 모금운동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3.1절까지 1억 원 정도 모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돈이 마구 들어와서 놀랐다"며 "이 과정에서 당시 행정자치부에서 절차상 잠시 모금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한 사실까지 보도되면서 단 하루 만에 총 1억 원의 모금이 걷히는 일까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 모금을 통해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시대착오적'이거나 민족문제연구소만의 사업이라는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고 친일 청산이 국민 공동의 관심사라는 사실이 확인됐다"며 "정치권이 친일 청산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특별법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국민모금운동의 의의를 설명했다.
"3만여 명이 넘는 분들이 모금에 동참하면서 친일인명사전은 연구소의 회원, 소수 학자들의 것이 아닌 국민의 사전이 된 것이다. 일부 정치인들과 달리 이 과정에서 선대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는 후손들이 나타나고 공무원, 정치인들의 경력에 선대의 친일 행적 여부가 중요한 공적 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잘못해놓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 일 기록한 책... 이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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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쇄신국민연합 소속이라고 밝힌 보수단체 회원들이 지난 2008년 4월 29일 오전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발표 기자회견'이 열리는 서울 중구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앞에서 '애국가 만든 안익태가 왜 친일파냐' '박정희, 유관순도 친일파냐' '너희들은 빨갱이냐'라며 항의시위를 벌인 뒤 언론회관앞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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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편찬위원회는 '친일파' 세부규정안 확정(2005),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발표(2005), '일제협력단체사전-국내 지방편' 펴냄(2006),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 발표(2008) 등 친일인명사전 최종 발간을 위해 박차를 가해왔다.
2008년 수록대상자 명단 발표 후 이의신청 과정에서 고등관 출신 신현확 전 국무총리, 화가 장우성, 국회의원 엄상섭 등의 유족들이 발행 및 게재금지 가처분신청 등 법적 행동을 취하면서 올해 8월 예정됐던 발간이 연기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친일인명사전의 학문적 객관성과 대의(大儀)는 명명백백하게 인정받았다.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 유족과의 가처분 1차 심리와 항고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발간을 나흘 앞둔 지금 2004년 국민모금운동 당시 대학원 석사로 연구소에 참여, 아르바이트 학생에서 현재 집필위원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명숙 연구원은 "연구소의 인명사전 작업은 모든 것의 시작"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 연구원은 "연구과정에서 일제시대 때 한 자리씩 하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며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면들이 일제시대로부터 기인하는 측면이 있는 이상 일제시대를 규명하는 이 작업이 우리 사회의 시작점을 조망하는 첫 씨앗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물론 편찬 과정 중 넉넉지 않은 연구 재정과 주말반납·밤샘근무·발간연기 등 연구원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연구원들이 '만성피로'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호소하면서도 편찬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이 같은 자부심 때문이었다.
이 연구원은 자신의 아이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물으면 다음과 같이 답하겠다고 했다.
"아이에게 '거짓말 안하기', '남 때리지 않기', '잘못한 것은 빨리 사과하기'를 강조한다. 아이가 만약 커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묻는다면 '우리나라가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잘못한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지 않아서 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쓴 책, 그들이 사과를 하게 해주고 싶어 만들어진 책'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잘못을 했다면 인정하고 사과를 먼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