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김희조(金希祖, ?~1199, 호는 강성, 시호는 문효)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殷說)의 7대손이다. 김희조는 고려 때 문하시중으로 병부상서를 지내고 도성부원군이 되었다. 그가 도강백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도강을 본관으로 하였다.
[ 대표적 인물 ]
- 김회련(懷鍊) :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 김약묵(若默) : 목사를 지냈다. - 김후진(後進) : 의병장이다. - 학자로는 김급(汲), 김만정(萬挺), 김도원(道元) 등이 있다.
[인구] 21,981명이 있다.(1985년)
*항 렬 표*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흠(欽) 석(錫)
영(永) 영(泳)
술(述) 주(柱) 병(柄)
환(煥) 섭(燮)
기(基) 규(奎) 재(在) 재(載)
호(鎬) 현(鉉) 종(鍾) 진(鎭)
수(洙) 제(濟)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상(相) 식(植) 표(杓) 환(桓)
희(熙) 형(炯)
재(載) 경(坰) 균(均)
옥(鈺) 현(鉉)
한(漢) 태(泰)
◀ 둔덕사(屯德祠) : 시조 문효공 김희조, 김 일, 김세보를 모신 사당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덕서리 도강 김씨(道康金氏)의 시조(始祖) 김희조(金希祖)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로 고려 말에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도성부원군(道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도강(道康)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소목(昭穆)을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어 사온서 직장(司溫署直長) 원경(原卿)을 파조(派祖)로 하는 태인사정공파(泰仁司正公派), 사재감정(司宰監正) 을경(乙卿)을 파조로 하는 강진시직공파(康津侍直公派), 전공조사(典工曹事) 일(鎰)을 파조로 하는 강진조사공파(康津曹事公派), 팔도 병사(八道兵使) 을상(乙祥)을 파조로 하는 인천병사공파(仁川兵使公派) 등 동본 4파(同本四派)로 각각 계대(繼代)하고 있다. 비교적 조선조(朝鮮朝)에서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혀온 도강 김씨(道康金氏)는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 회련(懷鍊)이 공주(公州)·해주 목사(海州牧使)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을 역임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고, 남우(南佑)는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며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강계부윤(江界府尹)을 지낸 서열(瑞說)은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功)을 세워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세보(世寶)는 성종(成宗) 때 생원(生員)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피화(被禍)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억울함을 상소(上疏)하는 기개(氣槪)를 나타냈다. 한편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벼슬아치)에 오른 약묵(若默)은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재임시 선정(善政)으로 표창(表彰)을 받았으며, 학자(學者) 후진(後進)은 석학(碩學) 이 항(李 恒)의 문하에서 경서(經書)와 역서(易書)를 연구하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귀(李 貴)와 함께 장성(長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량(軍糧) 보급에 앞장섰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중우(重羽)는 사예(司藝)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과천 현감(果川縣監)으로 나가 난민구제에 진력하였으며, 무과(武科)에 급제한 지백(知白)은 충청도 병마우후(忠淸道兵馬虞候)를 지냈다. 그외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으로 명망이 높았던 정(정)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 되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득룡(得龍)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여 진주 영장(晋州營將) 득수(得壽), 강진 현감(康津縣監) 응성(應珹), 함평 현감(咸平縣監) 광준(光俊), 해주 판관(海州判官) 광수(光秀)와 함께 가문을 빛냈으며, 관(灌)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1615년(광해군 7)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의 부당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심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서 평정(平定)에 공(功)을 세운 도언(道彦)이 분무원종일등공신(奮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고, 광우(光遇)는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풍기 현감(豊基縣監)을, 홍제(弘濟)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한 말(韓末)에 와서는 유학자(儒學者)로 명망이 높았던 우국지사 영상(永相)이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閔妃 :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斷髮令 : 일본이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머리를 깎게 한 명령)이 내리자, 국가(國家)의 운명을 개탄하여 두문 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융희 4) 8월 29일 한일합방(韓日合邦 : 일본이 한국 통치권을 빼앗은 일)이 되자 독립을 역설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군산(群山) 감옥에서 9일 단식 끝에 순절했다. 또한 기술(箕述)·재의(在義)·정술(廷述)도 한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천술(天述)은 한일합방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며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다가 우물에 투신자결하여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