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역사의 이해
조흥국
I. 태국 역사의 동남아적 배경
II. 태국 역사의 시대구분
III. 땀난, 퐁사와단, 쁘라왓삿 - 타이인의 역사의식
IV. 마하랏 - 타이인의 민족주의 사관
V. 태국 역사 연구의 문제점과 전망
I. 태국 역사의 동남아적 배경
태국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선 동남아시아 역사와 태국 역사 간의 관련성과 특히 동남아시아 역사연구에 있어서 태국 역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 나라의 역사와 그 나라를 포함하는 지역의 역사,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사와의 상호관련성은 역사연구에서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할 기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태국 역사의 동남아적 배경에는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요인들이 있다. 우선 지리적으로 태국은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과 남중국해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이 감싸고 있는 남중국해는 동남아의 하천들과 더불어 많은 동남아 민족들에게 삶의 핏줄과 터전을 제공해왔다.
그리고 태국은 동남아 지역의 특성인 열대에 속하여 많은 강우량과 습한 토양, 몬순 등의 기후적 특징들을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과 공통으로 갖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조건으로 인하여 태국에서는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벼재배가 기본적 생계형태로서 발전되었고, 이처럼 유사한 농경문화의 바탕위에서 여러 동남아 국가들의 것과 상호 비교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가 발달했다. 특히 동일한 계절풍의 영향하에 놓여 있는 태국은 역사적으로 많은 동남아 국가들과 상호 유사한 해외무역의 방식을 발전시켰고, 활발한 해외접촉은 태국과 동남아의 다른 지역들 간에 더욱 더 많은 문화적 연관성을 주었다.
대륙동남아를 표시할 때 종종 사용되는 “인도차이나”(Indochina)란 용어구성이 이미 암시하는 것처럼, 인도와 중국이라는 두 큰 문화권 사이에 놓여있는 동남아시아의 지리적 조건은 동남아시아의 또 다른 문화적 공통 특징들을 낳았다. 그리하여 인도의 힌두문화, 대승불교, 소승불교, 그리고 화교를 통한 중국문화가 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남아 사회에 역사적으로 깊은 영향을 주었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아직도 결정적인 사회적 역할을 행하고 있다.
끝으로 타이 민족은 이웃 민족들과 함께 대륙동남아 혹은 동남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발전에 영향을 미친 여러 공통된 역사적 경험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것들로서 10세기 경부터 13세기까지의 크메르 제국의 팽창과 지배, 13세기 말의 몽고족의 침입, 16-17세기의 유럽인들과의 접촉, 19세기 유럽열강들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협, 서양문화의 수용을 통한 국가근대화와 이에 따른 사회적 변동,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에 의한 침략과 점령 등이 있다.
태국은 이러한 동남아시아의 공통된 역사적 경험들 외에도 타이 역사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이웃 국가들의 역사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16세기 중기와 18세기 중기에 일시적인 국가의 정복과 왕조의 멸망으로 이끌었던 버마와의 전쟁, 오늘날 북태국의 치앙마이를 중심으로한 란나(Lan Na) 왕국, 북동쪽의 라오스, 동쪽의 캄보디아 등과의 전쟁, 그리고 남쪽의 말레이 반도의 여러 이슬람 왕국들과의 전쟁들이 있다. 그러므로 태국역사의 연구는 태국의 사방을 둘러싼 이들 국가들의 역사 연구와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쟁관계 외에도 태국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의 회교국들, 그리고 류우큐우(琉球) 왕국, 일본, 중국, 인도, 페르시아 등과 활발한 무역관계를 갖고 있었다.
II. 태국 역사의 시대구분
종래 태국사의 시대구분은 왕조사의 관점에서 행해져왔다. 이 관점은 1932년까지 왕실 중심의 절대군주 정치체제가 지속되어 왕권이 국가의 정치적 흐름을 좌우했던 역사의 배경에서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태국의 연대기 (年代記)들은 예외없이 왕의 행동에 서술의 초점을 둔다. 이것은 태국의 왕들에게 붙여진 `짜우 치윗’ (Cau Chiwit), 즉 `생명의 주인’이라는 칭호에서도 암시되어 있듯이, 왕이 백성의 삶, 나아가서 역사의 중심이라는 타이인들의 전통적인 인식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태국 역사학자들은 메남 차우프라야 (Menam Chao Phraya)강을 중심으로한 오늘날의 태국 중부지역을 지배했던 타이 왕국의 왕조로서 일반적으로 네 개를 든다. 이들은 각 왕국의 수도의 이름에 따라 수코타이 (Sukhothai)왕조, 아유타야(Ayutthaya) 왕조, 톤부리 (Thonburi)왕조, 라따나꼬신(Ratanakosin) 혹 방콕 (Bangkok)왕조로 불린다. 이에 따라 왕조사적 시대구분은 수코타이 왕국의 건립 이전의 시기와 1932년 입헌군주제로의 정체(政體)변화 이후의 시기를 추가하여 태국의 역사를 대개 다음의 여섯 시기로 나눈다.
1. 타이 민족의 이동과 최초의 왕국들 (13세기 중엽까지)
2. 수코타이 시대 (1238-1351)
3. 아유타야 시대 (1351-1767)
4. 톤부리 시대 (1767-1782)
5. 라따나꼬신 (방콕) 시대 (1782-1932)
6. 입헌군주제의 현대 (1932년 이후)
이러한 시대구분은 다소간 형태의 차이는 있으나 종래의 거의 모든 태국 통사(通史)들에서 발견된다. 그 예로서 1935년에 출판되어 태국의 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의 역사교과서로 사용된 차이 르엉신(Chai Ruangsin)의 “타이 민족사”(Prawatsat chat thai), 그리고 짜런 차이차나 (Caroen Chaichana)의 1954년 간(刊) “타이 역사” (Prawatsat thai)와 역시 태국의 대표적 통속역사가 중에 속하는 끄리앙삭 핏사나카 (Kriangsak Phitsanakha)의 1969년 간 “태국의 다섯 시대” (Thai ha yuk)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태국의 대표적인 문학사로서 1952년에 처음 출판된 쁠르엉 나 나콘 (Pluang Na Nakhon)의 “타이 문학사” (Prawat wannakhadi thai)에서도 거의 동일한 시대구분을 만난다.
위에서 언급한 네 왕조들에 따라 수코타이, 아유타야, 톤부리, 방콕 시대 등으로 태국 역사를 구분하는 방식은 20세기 중기 전후에 서양어로 쓰여진 거의 모든 태국역사 및 문화의 소개책자들에서도 수용되었다. 태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중의 한 사람인 롱 사야마난 (Rong Syamananda)이 1971년에 쓴 “A History of Thailand"도 예외가 아니다. 1952년에 설립된 `깜마깐 참라 쁘라왓삿 타이’(Kammakan chamra prawat- sat thai), 즉 태국역사편찬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롱 사야마난 교수는 아유타야 왕조시대를 16세기 중기 버마와의 전쟁, 17세기 유럽인들과의 접촉 등 역사적 흐름의 여러 특징들에 따라 네 시기로 구분하고, 방콕 왕조 시대도 라마 1세(Rama I)에서 라마 3세 (Rama III)까지 근대화 이전의 시기 (1782-1851)와 라마 4세 (Rama IV), 라마 5세 (Rama V)의 근대화과정 시기 (1851-1910), 그리고 민주주의적 정체 도입 이전의 라마 6세 (Rama VI)와 라마 7세 (Rama VII)의 통치시기 (1910-1932)로 나눈다. 롱 사야마난 교수의 이러한 시대구분은 비록 더욱 체계적인 역사서술 방식을 모색하던 위의 위원회의 취지에 입각한 그의 기본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나 종래의 왕조사적 시대구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태국역사학자의 시대구분방식을 1984년에 출판되어 그 사이 국제적으로 태국 통사의 스탠더드로서 인정되고 있는 와이어트 (D.K. Wyatt)의 “Thailand - a Short History" 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만나게 된다. 이 미국 코넬(Cornell)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는 그의 “태국 소사(小史)”에서 비록 수코타이 시대를 별도로 독립시켜 취급하지 않고 아유타야 시대를 1560년대 버마에 의한 패배를 기점으로 두 시기로 나누며 톤부리 시대를 방콕 시대의 도입부에 포함시켰으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롱 사야마난 교수의 시대구분 체제를 거의 답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와이어트 교수는 그 역사서술의 초점을 종래 태국 통사들에서처럼 태국 중부의 지배적 왕조들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중요한 타이 민족들의 전반적인 활동상으로 확대했다. 그리하여 14세기 이전 까지의 버마 북부의 샨(Shan)족, 인도 동북부 아삼(Assam)의 아홈(Ahom)족 등의 역사적 자취가 추적되고, 14세기 이후 북태국의 란나 왕국, 라오스 왕국의 역사적 흥망성쇠가 아유타야 그리고 방콕 왕조의 타이 민족과의 관계속에서 상세히 서술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비록 롱 사야마난이나 와이어트 모두 기왕의 왕조사적 시대구분의 기본적 틀을 견지하고 있으나, 우리는 이들의 시대구분이 종래의 수코타이, 아유타야, 톤부리, 방콕 왕조의 구분에 따른 획일적 서술의 형태를 버린 새로운, 각 시대의 국내정치적, 대외정치적 성격들을 더욱 잘 반영한 시대구분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아유타야 왕조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가 고려되었고, 방콕 왕조의 시대가 서양인들과의 관계발전과 그 영향에 따라 세분화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구분의 방식에서 앞장에서 언급한 바 태국의 역사는 동남아 이웃 국가들의 역사,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사와의 관련성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기본적 관점이 잘 적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태국사를 국제적 배경속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이러한 근본적 자세와 관련하여 카와베 토시오는 태국 역사의 시대구분이 동남아지역 역사의 시대구분 개념에 의해 지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여기서 동남아 국가들의 역사를 모두 포괄하는 공통적인 시대구분은 없으며, 그러한 개념은 가상적임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태국 역사가 동남아적 문화배경과 동남아 국가들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인식에서 이 일본의 동남아 학자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구분은 역사서술을 체계화하고 역사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실용주의적인 목적을 갖고 있을 뿐만아니라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한 민족의 자국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타이인들에게 있어서 왕은 오늘날 아직도 국가의 상징으로 비쳐지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적 관찰에 있어서 왕실의 활동, 왕조의 변천은 결정적인 판단기준이 된다. 우리는 그러므로 타이인들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게하는 전통적인 왕조사적 시대구분의 방법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그리고 거부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 왕조사적 시대구분은 위에서 살펴본 롱 사야마난이나 와이어트의 태국 통사에서 처럼 동남아 이웃국가들과 서양과의 관계를 고려한 시대구분 방식에 의해 훌륭히 보완됨으로써 더욱 세련되고 체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III. 땀난, 퐁사와단, 쁘라왓삿 - 타이인의 역사의식
앞장에서 논의한 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태국 역사의 이해를 위해 타이인들의 역사관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타이인들이 “역사”란 개념을 위해 사용해온 용어들로서 `땀난’, `퐁사와단’, `쁘라왓삿’ 등이 있는데, 이 용어들의 의미와 “역사”란 개념으로서의 변천을 조사함으로써 타이인들이 태국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해 왔는가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땀난 (tamnan)
`땀난’은 “설화(說話)”, “전기(傳記)”, “이야기”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땀난’ 역사서는 대개 고타마 붓다가 해탈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스리랑카에서의 불교의 발전에 대한 묘사, 그리고 불교가 태국에 전래되어 타이 왕들의 후원하에 발달하는 것을 서술함으로써 끝난다. 그러므로 `땀난’ 역사의 주요 테마는 불교이고, 그 역사의 원동력은 붓다며, 목적은 불교의 발달을 전달하는 데 있다. 왕국들과 그 통치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불교의 흥왕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사가(史家)의 붓끝의 조명을 받는다. 여기서 태국의 역사가 불교전통의 한 부분으로서만 서술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땀난’의 역사인식에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의 중심이 이제는 태국으로 옮겨졌다는 것, 즉 불교발전의 미래가 태국에 놓여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땀난’ 특유의 시간에 대한 인식이 확인된다. 불교의 발전을 묘사하는 `땀난’에 있어서 역사는 과거에만 관련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계속 이어진다. 즉 과거, 현재, 미래는 불교역사를 형성하며, 사건들은 단일한 시간의 의미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된다.
`땀난’의 저자들은 대개 승려였는데, 이러한 `땀난’ 계통의 대표적 역사서로서 1517년에 치앙마이의 승려인 라따나빤야 (Ratanapanya)에 의해 팔리어로 쓰여진 “지나깔라말리빠까라남” (Jinakalamalipakaranam)을 들 수 있다. 승리자 시대의 화환(花環)을 위한 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 역사책은 승리자 (jina), 즉 붓다의 생애와 그의 가르침, 즉 불교의 발달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에 따라 붓다의 열반 이후 불교의 발전, 북태국으로의 불교전파 그리고 그후 불교를 장려하는 여러 타이 왕국들과 왕들이 묘사되어 있다.
`땀난’의 역사서술 전통은 17세기부터 점차 소멸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여 18세기 말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어서 논의될 `퐁사와단’식 역사서술의 대두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2) 퐁사와단 (phongsawadan)
`퐁사와단’은 “혈통”, “가문” 등의 의미를 가진 `vamsa'와 “하강(下降)”, “지상에서의 현시(顯示)” 등을 뜻하는 `avatara'가 합친 `vamsavatara'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이 팔리 혹은 산스크리트 합성어는 “왕가(王家)의 지상에서의 활동”이라고 번역될 수 있다. 타이어로는 “가계(家系)”, “왕가들의 역사” 등의 의미를 지니게된 `퐁사와단’은 주로 왕들의 활동과 왕국의 변천을 서술의 초점에 두는 `왕조사’, `연대기’를 지칭한다.
우리에게 오늘날 알려져 있는 태국의 최초의 `퐁사와단’ 역사서는 “프라랏차 퐁사와단 끄룽 시 아유타야 차밥 루엉 쁘라섯” (Phraratcha phongsawadan krung si ayutthaya chabap luang prasoet), 즉 쁘라섯본(本) 아유타야 연대기로서, 1351년부터 1604년까지의 태국 역사를 내용으로 한다. 태국의 역사학자 담롱(Damrong) 왕자에 의하면 이 “쁘라섯本”은 1680년 경에 작성되었고, 그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다.
이처럼 17세기 말에 역사적인 정확성을 보여주는 사서(史書)가 편찬된 것은 당대의 태국왕인 나라이(Narai: 재위 1656-1688) 시대에 활발히 이루어진 태국의 대외관계, 특히 유럽인들과의 접촉에 기인한다고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는 대외접촉이라는 일반적인 배경 외에 나라이 왕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요인으로서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이에 대해 1685년에 아유타야를 방문한 프랑스인 슈와지 (Choisy)는 기록하기를, 태국왕은 그의 등위 이래 중국의 역사책들을 모으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경주했으며 이 목적을 위해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다.
1687년 말에 프랑스 정부의 사신으로서 시암에 온 라 루베르 (La Loubère)에 의하면 나라이 왕은 심지어 1세기의 로마 역사가인 쿠르티우스 (Quintus Curtius Rufus)의 책 뿐만아니라 여러 프랑스 역사책들을 타이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는 이러한 정보들로부터 17세기 후반에 대외적 접촉과 나라이 왕의 역사에 대한 적극적 관심의 결과 새로운 역사서술방식이 태국에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왕의 후원하에 궁정 브라흐만들이 학자 및 사가(史家)로서 왕실의 연대기를 편찬하였고, 이때 당시 소승불교세계의 국제적 문어(文語)인 팔리어 대신 세속적인 타이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서술의 형태인 `퐁사와단’ 역사는 대개 왕국의 건설부터 시작하여 그후 계승하는 왕들의 활동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것은 `땀난’에서 ‘퐁사와단’으로 넘어오면서 역사의 주제가 종교가 아니라 국가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타이 역사의 개념이 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세속적, 정치적인 것으로 옮겨졌다고 볼 수 있다.
`퐁사와단’식의 왕조사 편찬작업이 본격적으로 행해지게된 것은 라마 1세 (재위 : 1782-1809) 때부터였다. 이 방콕 왕조의 창건자의 지시에 따라 1795년과 1807년 각각 소위 “짠타누맛본(本) 아유타야 연대기” (Phongsawadan krung si ayutthaya chabap phan canthanumat)와 소위 “폰나랏본(本) 아유타야 연대기” (Phraratcha phongsawadan krung si ayutthaya chabap somdet phra phonnarat wat phra chettuphon)가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1767년 버마의 침략에 의해 멸망한 아유타야의 정치적 전통을 부활, 계승한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유타야 연대기의 편찬사업은 그후 라마 3세 (재위 : 1824-1851)와 라마 4세 (재위 : 1851-1868)의 정부에 의해서도 추진되었으며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어, 예를 들어 1912년에 왕실학술원 (Krom Ratcha Banthit)이 재편집한 “아유타야 연대기”(Phraratcha phongsawadan krung kau tam ton racha banthit)가 간행되었다.
3) 쁘라왓삿 (prawatsat)
`쁘라왓삿’(prawatsat) 혹 `쁘라와띠삿’(prawatisat)은 “전진”, “진행”, “사건”, “행위”, “생활” 등의 의미를 지니는 `pravrtti'와 “가르침”, “가르침의 수단”, “책”, “경전”, “학문” 등을 뜻하는 `sastra'의 산스크리트 합성어인 `pravrttisastra'로부터 파생한 타이어로서 오늘날 통상 사용되는 근대적 개념의 “역사”를 뜻한다.
`퐁사와단’의 역사와 `쁘라왓삿’ 간의 구별은 일차적으로 종래 사건을 나열하는 기술적 (記述的) 서술형태에서 분석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한 것에 놓여 있다. ‘쁘라왓삿’의 역사가들은 이제 사료와 역사적 증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퐁사와단’과 `쁘라왓삿’의 서술방식에서의 차이는 방콕 왕조의 라마 2세의 통치시대(1809-1824)라는 동일한 대상을 다룬 두 개의 역사서, 즉 짜우프라야 티파꼬라웡 (Cauphraya Thiphakorawong)의 “라마 2세 시대 방콕 연대기” (Phraratcha phongsawadan krung ratanakosin ratchakan thi song)와 같은 제목을 가진 담롱 (Damrong)의 “라마 2세 방콕 연대기”를 비교함으로써 뚜렷이 나타난다. 1869년에서 1870년 사이에 완성된 전자는 후기 아유타야 시대와 초기 방콕 시대의 왕조사적 연대기의 전통에 따라 역사적 사실들을 기술적 방식에 따라 단순히 나열하고 있다. 이에 비해 1930년대 초에 집필한 담롱 왕자는 타이 자료 뿐만아니라 외국의 문헌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이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였고, 특히 라마 2세의 기간동안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의 동기와 영향을 분석하여 합리적, 체계적인 역사의 재구성을 시도했다.
`퐁사와단’에서 `쁘라왓삿’으로의 역사서술의 발전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적으로 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문물의 영향에 그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서양문물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836년 미국선교사 브래들리 (Dan Beach Bradley)가 처음으로 들여온 타이 문자를 위한 인쇄기로서, 이를 통해 많은 역사책들이 인쇄되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타이 사회의 엘리트가 과학적인 역사연구의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19세기 중엽에 국가의 근대화에 착수한 몽꿋(Mongkut) 왕, 즉 라마 4세는 태국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져 오래된 비문(碑文)들을 수집하여 타이 민족의 초기역사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태국의 근대화를 위한 본격적인 국가개혁을 추진했던 그의 아들 쭐라롱꼰 (Chulalongkorn)왕, 즉 라마 5세 역시 부지런한 역사연구가였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태국의 역사서술 유형인 `쁘라왓삿’은 태국의 근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V. 마하랏 - 타이인의 민족주의 사관
앞장에서 논의된 타이인의 역사의식과 관련하여 이 장에서는 민족주의 사관이 태국의 역사서술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 예로서 태국의 역사학자들이 태국의 역대 왕들 가운데 몇 명에게 어떤 근거와 배경에서 “마하랏” (maharat : 산스크리트 “maharaja”로부터 파생), 즉 “대왕”(大王)의 칭호를 붙이는 지를 살펴보게될 것이며, 특히 태국의 “대왕” 중의 한 명으로 종종 추앙받는 나라이 왕의 “마하랏” 칭호의 문제점이 집중적으로 검토될 것이다.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태국의 많은 역사책들은 그 역대 왕들 중 국가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몇 명에게 “마하랏”의 칭호를 붙인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태국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누가 처음으로 이러한 “대왕”의 칭호를 붙이기 시작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단서는 타니니왓 (Dhaninivat) 왕자로 더욱 잘 알려져 있는 태국의 저명한 학자 핏타야랍 프릇티야꼰 (Phitthayalap Phruetthiyakon)이 제공하는데, 그에 의하면 담롱 왕자가 아유타야 왕조의 민족적 영웅인 나레수언(Naresuan) 왕에게 처음으로 “마하랏”이란 칭호를 붙였고, 이것이 그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신속하게 답습되었다. 여러 역사책들 간에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왕”이라고 불리는 태국 왕들은 대개 위의 나레수언 (1590-1605) 외에 람캄행 (1279?-1298), 나라이 (1656-1688), 쭐라롱꼰 (1868-1910)이다.
람캄행(Ramkhamhaeng)의 “대왕” 칭호에는 여러가지 근거가 제시된다. 우선 그의 치세동안 수코타이의 영향력이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의 나콘 시 탐마랏 (Nakhon Si Thammarat)까지, 동북쪽으로는 오늘날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Luang Prabang)과 비엉찬 (Viang Chan, 즉 Vientiane)까지, 그리고 서쪽으로는 버마 남부의 마르타반(Martaban)까지 미쳐, 그후 태국의 역사발전에서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한 타이 정부들이 가졌던 영토확장에 대한 관심의 모형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업적으로 람캄행 왕이 1283년 경 최초의 타이 문자를 만든 것을 친다. 롱 사야마난에 의하면 이 왕은 그 제정에 있어서 통일된 문자가 백성을 결합하는 힘으로서 뿐만아니라 독립국가를 위한 상징으로서 갖는 중요성을 인식했다. 람캄행 왕이 수코타이 왕조의 가장 뛰어난 왕으로 간주된다면, 1932년 이전까지의 방콕 왕조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서는 일반적으로 쭐라롱꼰 왕을 든다. 쁘라춤 촘차이(Prachoom Chomchai)가 “Chulalongkorn the Great" (Tokyo, 1965) 에서 상세히 분석한 것처럼 그의 업적은 노예제도의 폐지 등 많은 사회적 개혁을 이룩한 것과 특히 19세기 말 광범위한 정치적 개혁과 효율적인 외교를 통해 유럽열강들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지켰다는 것이다. 수코타이 왕조와 방콕 왕조에 비해 아유타야 왕조는 두 명의 “대왕”에 의해 대표된다. 첫번째는 나레수언(Naresuan) 왕으로서 그의 역사적 공적은 무엇보다도 15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잃게된 국가의 주권을 다시 회복하여 아유타야 왕조의 중흥(中興)의 기틀을 마련한 데에 놓여있다. 두번째 아유타야 왕조의 “마하랏”은 나라이 왕이다. 그러나 이 왕의 “대왕” 칭호에 관한 여러 태국 역사학자들의 서술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이 문제점이 상세히 논의될 것인데, 그에 앞서 우선 나라이 왕 치세의 일반적 특징과 이 왕의 중요한 정치적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라이 왕 통치시대의 국내정치는 역사적으로 종종 왕좌를 위협했던 왕족과 관료사회에 대한 강력한 왕권의 유지와 이것에 바탕을 둔 안정된 정부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그러나 왕족에 대한 그의 지나치게 엄격한 통제는 그의 유일한 왕위계승 후보자들이었던 이복동생들을 모든 정치적 활동으로부터 배제했고, 이것은 그가 1688년 중병에 걸려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의 정부의 한 권신(權臣)이었던 펫타라차(Phettharacha)가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한편 국내정치적 안정의 기반에서 나라이 정부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한 군사적 강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활발한 해외무역을 추진할 수 있었다.
대외정치적으로 나라이왕의 통치시대는 많은 아시아 및 유럽국가들과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접촉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특히 유럽인들과의 관계는 아유타야 왕조의 전체 역사에서 가장 활발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포르투갈인, 스페인인에 이어 네델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들이 태국 무역에서의 이익을 위해 서로 경쟁했다. 유럽 국가들과의 이러한 무역관계로부터 외교관계가 발전했는데, 그 중 1680년대에 양국간에 수차례의 외교사절 교환으로 이끌어졌던 프랑스와의 것이 가장 화려했고 긴밀했다. 유럽인들과의 이처럼 깊고 폭넓은 관계와 관련하여 나라이 시대 태국은 그 역사에 있어서 당시 처음으로 유럽 열강들로부터 위협을 경험하게 되었다. 즉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는 태국에서 자신들의 무역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군사적 수단을 사용헀던 것이다. 예를 들어 홀랜드동인도회사는 1664년 두 척의 전선으로써 메남 차우프라야강을 봉쇄했고, 영국동인도회사는 1686-87년 무역상의 손해배상을 타이 정부에게 강요하기 위해 해군력을 동원했다. 끝으로 1687년 말에 상당한 병력의 프랑스 군대가 당시 “왕국의 열쇠”로 간주되었던 방콕과 메르구이를 점령했는데, 이것은 태국을 아시아 무역을 위한 기지로 삼겠다는 프랑스 정부의 확고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1688년의 궁정혁명으로 인하여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롱 스야마난 교수는 그의 “태국사”에서 나라이 왕 시대의 역사에 대한 서술의 중점을 이러한 유럽인들과의 관계에 둔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그의 업적들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쁘라삿통 왕가의 이 마지막 왕 (즉 나라이)은 분명히 람캄행과 나레수언처럼 `대왕’의 칭호를 받을 만하다” 라고 쓰는데, 그러나 이 때 나라이 왕의 업적들이 어떤 것들인지 구체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나라이 왕의 “마하랏” 칭호는 나레수언 왕의 경우와 같이 일찍이 담롱에 의해 사용되어, 예를 들어 그는 한 아유타야 연대기의 주석(註釋)에서 나라이 왕을 “프라 나라이 마하랏” (Phra narai maharat)이라고 불렀다. 나라이의 이 “마하랏” 칭호는 담롱 이후의 많은 태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뜨리 아마따야꾼 (Tri Amatayakun)은 1951년에 출판된 “역사의 고사(古事)와 옛 이야기”에서 나라이 왕을 “솜뎃 프라 나라이 마하랏”이라 칭하고, 네델란드와 영국의 위협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자한 나라이 왕의 노력을 당시 시대상황에 적합한 탁월한 대외정책이라고 평한다. 태국의 가장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역사가인 위찟 완나깜(Wicit Wannakam) 역시 1955년에 간행된 그의 “아유타야의 왕들”에서 나라이를 “마하랏”이라고 부른다. 그 근거로서 그는 이웃국가들과의 전쟁, 유럽국가들과의 분쟁, 그리고 프랑스와의 우호적 관계를 경험했던 나라이 통치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이처럼 복잡한 국제적인 관계에 얽힌 국가를 잘 다스린 나라이 왕의 지혜와 능력을 든다.
뜨리 아마따야꾼과 위찟 완나깜의 이러한 견해들은 태국의 여러 다른 역사학자들의 나라이 왕 시대에 관한 서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라옹 시수콘 (Laong Sisukhon)은 1960년에 출판된 그의 “태국의 모범적 인물들의 전기(傳記)”에서 나라이 왕의 재위시대는 유럽의 열강들이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는데, “나라이 大王”이 그의 현명하고 통찰력있는 정책을 통해 국가를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지켰다고 쓴다. 끄리앙삭 핏사나카 (Kriangsak Phitsanakha)도 1969년 간(刊) 그의 “태국의 다섯 시대”에서 나라이 왕의 “대왕” 칭호를 위한 비슷한 이유를 제시한다. 같은 해에 출판된 “나라이 大王”에서 쁘라윤 핏사나카 (Prayun Phitsanakha) 역시 유럽국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보여준 나라이 왕의 탁월한 정책을 강조하는데, 이때 그는 위에서 언급한 뜨리 아마따야꾼의 견해를 충실히 좇는다.
이에 비해 솜퐁 끄리앙끄라이펫(Somphong Kriangkraiphet)은 1960년에 편집된 그의 “大王들과 유명한 인물들”에서 나라이에게 “마하랏” 칭호를 부여하는 이유로서 유럽인들과의 많은 접촉을 겪은 나라이 왕의 시대에 아유타야 왕국이 대외적으로 뿐만아니라 국내적으로도 가장 번성하였고, 국가의 명성에 기여한 뛰어난 여러 신하들이 배출되었으며, 이 시대에 태국의 문학이 황금기에 도달했다는 점을 든다. 이와 비슷하게 타이 노이 (Thai Noi)로도 알려져 있는 우돔 쁘라무언윗 (Udom Pramuanwit)은 1962년에 나온 그의 “나라이 왕의 궁정(宮廷)”에서 나라이를 태국 역사에 있어서의 다섯 명의 “대왕”에 포함시키면서, 나라이 시대 문명화된 유럽국가들과의 접촉은 태국에게 문명과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다시 국가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마하랏” 칭호의 부여를 통한 나라이 왕의 찬양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때까지 언급된 대부분의 태국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통속학문적 역사학자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짜런 차이차나 (Caroen Chaichana)는 1987년에 출판된 그의 “나라이 大王傳”에서 나라이를 “마하랏”이라고 부르는 여러가지 근거들로서 예를 들어 네델란드, 영국, 프랑스에 대한 대외정책에서 보여준 그의 통찰력, 그리고 유럽의 전쟁술, 교육, 건축기술 등의 유익한 것들을 나라에 도입한 것을 열거한다. 짜런 차이차나는 이어서 만약 나라이가 1688년 이후 계속 살았더라면 서양의 문명이 이미 당시에 태국에 널리 보급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때까지 관찰한 바처럼 나라이 왕을 태국 역사에서 “대왕” 중의 한 명으로 높이는 것은 다소간 태국 역사학자들의 애국적 혹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관점의 동기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나라이 왕의 소위 위대한 업적들은 부분적으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으며, 이것은 나라이 시대 태국의 실제적 정치상황에 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라옹 시수콘은 프랑스 정부가 군대를 여러 척의 전선과 함께 태국으로 파송한 것은 나라이 왕의 명예를 더욱 높였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당시 프랑스인들이 태국에서 실제로 의도했던 이해관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발상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양인에 대한 타이인의 민족적 긍지를 환기시키려는 저자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진다. 뜨리 아마따야꾼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라이 왕이 네델란드와 영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그는 이때 태국과 프랑스와의 관계에 있어서 다른 요인들, 예를 들면 프랑스에 대한 나라이 왕의 개인적인 관심을 간과하고 있다. 끝으로 유럽국가들과의 접촉이 태국에 문명과 진보를 가져왔다는 우돔 쁘라무언의 추측은 근거가 없다.
나라이 왕은 대부분의 태국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유타야 왕조의 한 재치있고 유능한 통치자였을 것이다. 이것은 나라이 왕에 대한 동시대 유럽인들의 묘사에 충분히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유럽국가들에 대한 정책, 특히 프랑스와의 긴밀한 관계를 위한 노력은 그 결과를 두고 볼 때 결코 현명하거나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친프랑스 정책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태국은 하마트면 프랑스 세력의 영향하에 빠질 뻔했으며, 종국에는 나라이 왕의 정부를 전복시킨 1688년의 쿠테타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로 볼 때 나라이 왕의 “대왕” 칭호는 태국 역사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다른 “대왕”들의 경우에 비해 설득력이 적다.
V. 태국 역사 연구의 문제점과 전망
태국 역사학은 유럽 국가들의 역사학이나 중국사처럼 학문의 전통이 오래되지 않으며, 그에 따라 연구의 깊이와 폭에 있어서 아직 부족한 점이 적지 않고 연구자 층의 두께도 비교적 얇다. 태국사의 연구는 아직 개척되어야할 많은 부분을 갖고 있다.
태국 선사(先史)시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타이 선사문화의 하나로 그동안 기원전 3,4 천년까지 추정되었던 반치앙(Ban Chiang, 반 치양) 유물들의 시기측정의 문제가 있다. 타이 민족의 문화적 자부심을 고양하는 위의 시기측정은 최근 기원전 1000년 정도까지로 대폭 수정되었다.
수코타이 왕국 건립 이전의 역사 역시 그 많은 부분이 불명확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기원 6세기 경에서 10세기 경까지 각각 북태국지역과 중부태국지역에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몬(Mon)족의 하리푼자야(Haripunjaya) 왕국과 드바라바티(Dvaravati, 드와라와띠) 왕국의 역사는 아직 어두움에 싸여있다. 그리고 13세기에 란나(Lan Na) 왕국과 수코타이 왕국을 세운 타이 민족의 기원, 특히 중국 서남부의 난짜오(南詔) 왕국 기원설은 아직도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왕조사적인 연대기가 없는 수코타이 왕국의 역사는 대부분 비문(碑文)에 의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한편 아유타야 왕조의 역사연구를 위한 주요사료는 아유타야 연대기인데, 이 연대기들의 내용의 신빙성은 대부분 의문시된다. 그 이유는 아유타야 시대의 역사적 문헌들이 태국이 1767년 버마에 의해 정복당했을 때 대부분 파괴, 상실되었고, 현존하는 사본들은 거의 모두 단편적인 기록이나 기억 등을 바탕으로 방콕 왕조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아유타야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1560년대와 1760년대의 버마와의 두 차례 전쟁은 그 역사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아유타야 왕조와 방콕 왕조를 잇는 톤부리 시대의 정치적 발전 역시 체코 출신의 타이 역사학자 Jiri Stransky가 쓴 “딱신(탁신) 하의 태국의 재통일 1767-1782” 외에는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비교적 많은 연구가 되어있는 것은 방콕 왕조 이후의 태국 역사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초기의 역사, 특히 라마 1세부터 라마 3세 까지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상황이다.
태국 역사의 연구는 그동안 주로 정치사에 집중되어 왔다. 그리고 정치적 발달에 대한 관심과 함께 경제사에 대한 연구도 병행되어 그동안 여러 연구결과들을 내놓았다. 그러나 태국의 정치 및 경제사의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대외관계사, 특히 아시아 국가들과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는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중국, 일본,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산발적인 연구가 있으며, 다른 아시아 국가들, 예를 들면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인도, 페르시아 등과의 역사적 관계는 본격적인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태국 역사의 다른 측면들, 예를 들면 사회사, 지성사, 문학사, 예술사 등도 더욱 본격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타이 문화사의 작업이 필요하다. 태국 역사연구에 있어서 끝으로 제기되어야할 문제는 태국의 변두리에 살고있는 소수민족들을 태국 역사에 어떻게 수용, 포함하는가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방콕 정부 뿐만아니라 많은 태국 역사학자들의 숙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