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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소리 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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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만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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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섭(71) | |||||
1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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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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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구(6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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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
박봉래 |
박봉채 |
박세채 |
박봉구 |
박봉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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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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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향산 (순천소리) |
박춘홍(70) (판소리) |
박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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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분임(62) (가야금) |
박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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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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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판소리 학습과정
박봉술이 판소리에 입문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부친 박만조이다. 박만조는 내림으로 소리속을 잘 알았고 북도 상당히 잘 친 인물이었다. 당대의 대명창 송만갑 역시 제적등본에서 본적이 전남 구례군 구례면 봉북리 122번지로 무계 출신인 바, 구례에 살고 있던 박만조가 구례에 거처를 두고 송만갑 명창과 교분을 맺고 살았다.
박봉술의 부친 박만조는 송만갑의 소리를 광적으로 좋아하여 틈만 나면 송만갑에게 소리를 청해서 들었고 장남 박봉래를 송만갑 문하에 들여보내서 명창으로 길러냈다. 박만조는 송만갑을 집으로 불러들여 박봉래에게 소리를 가르쳤다고 박봉래의 딸 박향산이 증언했는데, 당시 약방 의원이었던 박봉채는 박봉래가 송만갑에게 배운 소리책을 가지고 있었다. 박봉채는 속목으로 소리를 다했는데 박봉래가 송만갑에게 소리를 공부할 때 옆에서 들어서 그 소리속을 익힌 것이다. 그 당시 김정문(金正文, 1887~1935)도 박봉래와 같이 배웠다. 송만갑의 제자는 수없이 많은데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제자로 박봉래, 김정문, 김초향, 김추월, 이화중선, 배설향, 심금홍 등을 들고 있는데 이중 남자 명창으로 박봉래와 김정문만을 언급했는데 이들이 얼마나 소리를 잘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박봉술의 아버지와 박봉채, 박삼채, 박봉구 같은 형들은 소리를 정식으로 배운 바는 없으나 많이 들어서 송만갑제를 거의 외울 정도였다. 박만조는 본인이 직접 명창으로 활동하지는 않은 대신, 자식이 명창으로 대성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였는데, 맏아들 박봉래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크게 상심하였다. 그래서 막내아들인 박봉술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고 그를 명창으로 키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어린 박봉술을 새벽에 깨워 박하사탕을 입에 물려주면서 소리를 배우게 했고 배위에 바윗돌을 굴려 뱃심을 길러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거니와, 박봉술은 이렇게 아버지 박만조의 열성적인 뒷받침 위에서 판소리 명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박봉술은 그렇게 아버지 밑에서 수년 동안 심청가를 제외한 판소리 네바탕을 배웠다.
1938년 박봉술의 나이 16세 때 서울로 올라와 마침내 송만갑 문하에서 소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박봉술은 이미 구례에서 부친 박만조에게 판소리를 상당히 배운 뒤였다. 송만갑에게 다시 지도를 받아 배운 소리는 적벽가이다. 당시 한승호(韓承鎬, 1924~ )와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로 가서 송만갑에게 이미 배운 것을 복습하면서 다시 바로잡아갔다. 그러니까 박봉술은 전에 부친을 통해 배웠던 송판 <적벽가>를 송만갑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으면서 복습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박봉술은 송만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소년명창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하여 이곳저곳에 불려 다녔다. 그렇지만 이듬해 송만갑이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게 된다. 그 무렵 박봉술은 변성기인데다 목관리를 잘못하여 설상가상으로 목까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1939년 5월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숨은 남녀명창의 등용문’이라는 ‘조선소리 경창대회’에 참가하여 낙선하고 말았다. (1939.5.10~16. <조선일보>) 그리하여 박봉술은 낙향하여 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등 지리산 언저리를 맴돌며 독공으로 목을 바로잡아 보려 하였으나 무리한 연마로 오히려 성음이 더 상하여 목이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그 이후 1942년부터 4년여 동안 둘째 형인 박봉채로부터 판소리를 배운다. 이 때 박봉술의 조카딸 박향산(전라남도 무형문화재)과 강도근(姜道根, 1918~1996)도 함께 배웠다.
이상의 판소리 학습과정을 정리해 볼 때 박봉술은 부친 박만조로부터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를 배웠고 이중 <적벽가>는 송만갑에게 다시 지도를 받았으며 송만갑 타계 이후는 박봉채에게 지도 받았다. 이로 보아 박봉술의 판소리는 송만갑제 외에 다른 계열이나 유파의 소리를 공식적으로 전승한 적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3. 수련과정과 공연활동
박봉술은 판소리 역사상 가장 희한한 명창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목이 꺾였는데도 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런 궂은 목을 가지고도 당대 최고의 판소리왕이 된 거의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봉술은 백일공부를 자주 들어가 소리 공부에 열중하다가 목이 괄리게 되었다. 목이 괄리기 이전에도 소리하기에 적합한 성음을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단단한 목구성을 타고난 것 같지는 않다. 박향산의 증언에 따르면 박봉술은 목이 쉽게 잘 쉰다고 했다. 이렇듯 선천적으로 단단한 목을 타고 나지 못한데다가 엄청난 독공을 하다보니 목이 괄리게 되고 만 것이다. 박봉술은 백일공부를 거의 해마다 했다고 한다. 백일공부를 들어가면 둘째 형인 박봉채와 조카딸 박향산과 함께 셋이 들어갔다고 한다. 박봉술이 소리를 하면 박봉채는 북을 쳐 주고 박향산은 밥해주고 소리공부를 했다. 박봉술은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소리를 하여 목이 부러져 버렸고 그런 목으로 소리를 하다보니 아구성을 많이 쓰게 되어 목이 완전히 꺾여버린 것이다.
한 때 형 박봉래를 연상케 하는 탁월한 재능을 보이며 소년명창으로 이름을 떨치던 박봉술은 목이 꺾이면서 높이 치솟았던 꿈만큼이나 깊은 절망감에 빠져들었고 목소리를 찾기 위해 절차탁마하였다. 박봉술이 찾아가 폭포소리와 싸웠다는 불일폭포는 쌍계사에서 2.7Km 더 올라간다. 지리산 청학봉과 백학봉 사이를 흐르는 불일폭포는 높이가 60m에 폭이 3m나 되는 2단 폭포다. 두터운 얼음장을 녹이며 흐르는 세찬 물소리가 동편소리처럼 장엄하다. ‘목이 꺾인 불운한 소리꾼’ 박봉술은 이곳에서 적벽대전(赤壁大戰)의 결연한 승부근성처럼 자신과의 피나는 싸움 끝에 ‘공력담긴 소리’를 만든다.
그는 목이 꺾였기 때문에 고음이 약했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희성으로 상성을 가늘게 처리하는 법을 터득하였는데 온힘을 쏟은 희성은 멀리서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그리고 힘겨운 듯하면서도 구성지게 고음을 처리하고 난 뒤에 땅이 꺼지듯 무게 있게 내려놓는 저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성이 잘 올라가지 않아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 소리에 익숙해지면 어떤 이의 고음보다도 더 장중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성은 가히 망망대해라 할 만큼 그 무게와 넓이를 헤아리기 어렵고 매우 웅장한 느낌을 준다.
박봉술은 목이 꺾여서 보통 소리꾼들이 쉽게 갈 수 있는 평범한 소릿길도 그에게는 험난한 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꾀를 부려서 지름길로 가지 않고 또한 편법을 쓰지도 않았으며 거북이 걸음새로 험한 천릿길을 마다하지 않고 정석대로 소릿길을 차근차근 밟아갔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박봉술은 창극 활동과 공연을 많이 하게 된다. ‘임방울과 그 일행’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순회하며 공연했다. ‘호남창극단’시절에는 강도근, 강사홍, 강종철, 정채란, 최설향, 김명화, 강옥련 등과 공연을 같이 했으며 박봉술과 강도근은 창극 공연시 중역을 맡았다. 또 ‘순흥창극단’시절에는 성창렬, 임준옥 등과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했다.
여순 반란사건과 6.25전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 단체 저 단체를 따라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뒤 1953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순천에 머무르며 소리를 가르친다. 그리하여 60년대에는 ‘순천의 박봉술’하면, 전주의 김동준, 군산의 이기권, 광주의 한승호, 남원의 강도근과 더불어 호남의 5명창이라 할 정도로, 명창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순천에 머무를 당시 동순천 역 건너편에 국악원을 열어서 판소리를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갔다.
그 이후 부산으로 거처를 옮겨 1969년까지 후진을 양성하며 지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로 박봉술제 적벽가의 후계자인 송순섭(宋順燮, 1936~ )도 이 때 부산에서 박봉술을 만나게 된다. 송순섭이 공대일 문하에서 소리를 학습할 당시 광주공원에서 살던 전행화라는 이가 박봉술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적벽가를 배우고 있었는데 공대일이 그 학습현장을 늘 왕래하며 박봉술의 소리가 대단하다며 감탄했고 호남국악원에 모이는 김명환, 성원목, 백남희 등도 박봉술의 소리를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 한다. 송순섭은 박봉술이 얼마나 소리를 잘 하기에 선생님들이 그렇게 칭찬을 할까 궁금해 하던 차에 우연히 1962년경에 박봉술 흥보가 음반을 듣게 되었고 과연 대명창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박봉술이 부산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송순섭은 곧장 부산으로 달려갔고 1963년부터 박봉술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982년까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십수 년간에 걸쳐 박봉술의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를 공부하였다.
박봉술이 서울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인데 그 때부터 3년 가량 박녹주(朴綠珠, 1906~1979)의 집에 기거하면서 제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때마침 1971년에 박녹주가 정통 판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설립하여 ‘판소리 유파발표회’를 열었는데, 박봉술이 거기에 단골로 출연하면서 그의 뛰어난 동편제 소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3년에 비로소 뛰어난 소리실력을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4. 음반을 통해서 본 박봉술의 음악성
소리꾼 중에는 더러 토막소리 몇 대목만 잘하는 명창이 있는데 박봉술은 판소리 다섯바탕에 모두 능하였다. 박녹주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은 박봉술을 1960년대를 전후로 한 시기에 판소리 다섯바탕을 다 할 줄 아는 거의 유일한 명창으로 인정하였다. 명고수 김명환(金命煥, 1913~1989)은 “박봉술이 목은 궂어도 제일 대가이다.”라고 높이 평가해 주었고 송순섭에게 “박봉술이 적벽가만 좋은 게 아니라 흥보가, 수궁가가 옥족이네.”라고 하여 송순섭은 박봉술에게 세 바탕을 모두 공부했다고 한다. 한 번은 김소희(金素姬, 1917~1995)가 송순섭을 불러 “박선생한테 흥보가 놀보 박타령 배웠는가?”라고 물었을 때, 배웠다고 하니까 “참말로 잘했네, 그 소리리가 참 좋은 대목이네.”라고 칭찬했다 한다. 박녹주는 생전에 박봉술을 가리켜 ‘소리왕’이라고 하면서 박송희(朴松熙, 1927~ )에게 “나 죽으면 이제 소리 배울 사람 박봉술이 밖에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박송희도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면 박봉술의 소리가 정말로 기가 막히는 소리임을 알 수 있다.”고 증언하였다.
박봉술의 <춘향가>는 전판을 부른 녹음자료가 이보형(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이 비공개 릴테이프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2005년에 음반으로 제작되었다. 1970년대 초에 박봉술이 상경하여 김명환 고수 집에 왕래하며 소일하고 있을 때 김명환이 이보형을 비롯한 여러 귀명창들에게 박봉술의 동편제 춘향가를 소개하며 좋은 바디라고 극구 칭찬하였고 박봉술의 춘향가를 들은 귀명창들은 감명을 받았다. 이보형은 그 즉시 박봉술 명창의 유고시를 대비하여 춘향가를 녹음해 두어야겠다고 절실히 느껴 녹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김명환 명고수의 북장단으로 박봉술 명창이 춘향가 전 바탕을 녹음하였고 이보형이 사재를 털어 사례비로 주었다. 이 녹음자료를 박봉술의 제자 송순섭이 음반으로 제작하여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보형에게 사재를 들여 사 들인 후 순천시와 협의하여 2005년 10월 박봉술 추모공연 때 기획하여 컴팩트디스크(CD)로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춘향가 음반은 전승이 끊어진 동편제 송만갑바디 춘향가의 유일한 자료이다. 춘향가는 판소리의 꽃으로 꼽히는 소리이고 박봉술 또한 중요한 판소리인 이 춘향가를 아주 공들여 익히고 수많은 시간 정성껏 연마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춘향가 사설을 보면 송만갑제를 거의 그대로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옥방형상-”으로 시작되는 옥중가 대목과 “백구타령” 대목, “남원골 오입쟁이” 대목 등은 송만갑이 부른 이후 다른 창자들은 부르지 않는 대목인데, 박봉술은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별가 대목에서도 “여보 도련님-”이후로는 송만갑이 그랬던 것처럼 모흥갑제 경드름으로 부르고 있다. 또 자진 사랑가 대목에서도 송만갑의 녹음자료와 같이 고수관제로 부르고 있다.
박봉술의 <심청가>는 전바탕이 녹음된 자료가 없고 1960년대 초반 신세기 레코드회사에서 녹음한 <흥보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 10인치 장시간음반(LP) 녹음집 가운데 심청가 음반(SNL-10622)이 유일한 자료이다. 여기에 “범피중류” 대목부터 “화초타령” 까지가 담겨있다. 송만갑제 심청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심청가> 음반이다.
박봉술의 <흥보가>와 <수궁가>는 여러 녹음자료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1982년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다서바탕」 음반으로 발매되어 나온 것이고 이것이 브리태니커 판소리 CD로 나왔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흥보가>는 동편제 송만갑 바디가 가장 활발히 전승되고 있는데, 박봉래-박봉술로 이어지는 바디와 김정문을 거쳐 박녹주, 강도근으로 이어지는 바디가 있다. 그런데 김정문은 김채만에게도 소리를 배워 송만갑의 원형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더군다나 제자들에게 “놀보 제비 후리는 대목” 이후로는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박녹주나 강도근은 놀보 박 타는 대목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박봉술은 놀보 박타는 대목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며 재담적인 요소를 풍부하게 지니고 있어서 동편제 <흥보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박봉술 <흥보가>의 음악적 특징을 보면 ‘우조적인 선율형’(우조선율형과 복합구조의 계면조선율형)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선율진행면에서도 다른 명창들의 <흥보가>에 비해 도약진행이 많다. 박녹주나 강도근이 도약진행을 사용하지 않은 부분에서도 완전 8도의 도약진행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송만갑이 다양한 도약진행으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볼 때, 박봉술은 송만갑의 음악어법을 잘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시김새에서도 “박타령”에서 강한 악센트의 꺾는 타루와 꺾는 목을 연속해서 사용하고 있어 송만갑이 악센트가 들어가는 시김새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했다는 점을 검토해 볼 때 송만갑만큼은 아니지만 일부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송만갑바디 <흥보가>의 원형에 가까운 박봉술제 <흥보가>를 현재까지 전바탕 부르는 명창은 송순섭뿐이다.
박봉술의 <수궁가> 녹음 자료를 분석해 보면 역시 송만갑의 소리제를 음악적으로 충실하게 전승한 바디로 평가된다. “토끼를 업고 세상에 나옴” 대목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토끼가 호기 있게 수궁을 빠져나오는 대목을 묘사한 소리인데, 박봉술의 노래는 고음반으로 남아있는 송만갑 노래와 거의 같은 선율 진행을 하고 있다. 한 옥타브가 훨씬 넘는 도약진행이 많고 토끼가 잠시 달을 쳐다보며 고향을 생각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우조길에서 계면길로 바꾸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오는 대목에서 다시 우조길로 바뀐다. 또한 박봉술 <수궁가>는 토끼가 용궁 들어가는 소상팔경(瀟相八景) 대목을 다른 수궁가처럼 심청가의 범피중류(泛彼中流)로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편을 가르키며 강남지방이요, 저편은 고소성(姑蘇城)이라...”하고 따로 소리로 짜고 있다. 더구나 수궁가의 노란자위라 할 수 있는 고고천변(杲杲天邊)대목은 사설도 기막히고, 곡조도 잘 짜여 있어 타의 추종의 불허한다. 현재 이 박봉술제 <수궁가>를 보유하고 있는 명창은 역시 송순섭뿐이다.
박봉술의 <적벽가>는 그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곡목인 만큼 여러 번 녹음이 되었는데 197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중요무형문화재 조사서 82호 <판소리 적벽가>가 대표적인 녹음이다. 박봉술 <적벽가> 음악 구조의 특징을 살펴보면 진양조 장단의 짜임새에서 규칙성과 정형성이 강조되어서 그 붙임새가 간단하고 명료하다. 또 높이 질러내는 상성이 많이 표현된다. 송만갑의 음역이 높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음질서는 바뀌지 않고 본청만 달라지는 우조길과 계면길의 관계조 선율이 자주 조바꿈되는 대목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 또한 송만갑의 특징적인 표현법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박봉술이 남긴 음반을 통해 그의 음악 세계를 살펴보면 박봉술은 동시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동편제 송만갑제를 충실하게 계승한 명창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좋은 소리 대목이 있으면 따와서 자신의 소리로 만들기도 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흥보가>에서 서편제 명창인 김창환의 ‘제비노정기’를 빌려왔고, ‘놀보 제비노정기’는 장판개의 ‘흥보 제비노정기’를 취한 것과 <적벽가>에서 김채만제의 ‘삼고초려’대목을 따와 다른 소리제라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대목이 있으면 가져와 자신의 소리로 만들었다. 옛날 소리 선생들은 “소리 도둑질을 잘해야 한다.”는 말을 하곤 했었는데 다른 소리꾼들의 좋은 더늠이 있으면 가져와서 자신의 소리제로 만들라는 이야기다. 결국 예술이란 전통성에 기반하면서도 현실의 변화에 조응하여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박봉술은 알고 있었다. 즉, 송만갑제를 이어받아 동편제의 법통을 충실하게 지키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5. 박봉술제 소리의 전승
박봉술은 자신의 아들과 딸 이외에도 조카딸인 박춘홍과 박미홍에게 소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박봉술에게 직간접적으로 소리를 배운 사람은 아주 많은데 김동준, 송순섭, 김일구, 안숙선, 박송희, 이옥천, 조상현, 왕기석, 정성숙, 정미옥, 이성근, 이용배, 선동욱, 한농선, 백인영, 강순영, 선농월, 조중천, 이규호 등이 있다. 또한 19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국립창극단에서 마련한 특별교육프로그램으로 창극단 단원들에게 <적벽가>를 지도하였다. 여러 제자 중 송순섭, 김일구, 박송희, 안숙선 등이 박봉술제 적벽가를 전 바탕 보유하고 있고 공연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 가운데 송순섭은 가장 오랫동안 박봉술에게 공부를 하였으며 <적벽가>뿐만 아니라 <수궁가>, <흥보가>까지 사사하여 현재 박봉술의 대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박봉술의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운 이가 없어 송만갑제 <춘향가>・<심청가>의 전승이 끊어졌다. 그나마 녹음자료라도 남아있으니 곧 복원이 되기를 기대한다.
박봉술은 모든 제자에게 똑같이 가르치지 않고 사람에 따라 목구성을 봐서 각기 다르게 가르쳤다 한다. 수업방식은 우선 1~2분 분량의 소리를 세 번 가량 불러주며 연습하라고 한 뒤 밖으로 훌쩍 나간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근방을 맴돌면서 제자들이 연습하는 것을 듣다가 나중에 소리를 시켜보고 잘못을 지적해 주는 식으로 소리를 가르쳤다 한다. 그리고 소리를 할 때는 입모양 예쁘게 하는 데 신경 쓰거나 우물우물하지 말고 입을 쫙쫙 벌려서 확실하게 발음하라고 강조했다 한다. 박봉술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설에 오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고쳐서 불러도 괜찮다고 해서 송순섭은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일부 잘못된 사설을 많이 수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박봉술은 어디 좋은 소리가 있다고 하면 제자들을 그리고 보내서 소리를 배워보라고 적극 권했다 한다.
일제와 해방후를 통해서 우리의 판소리가 온통 계면조 위주인 서름조로 바뀌었지만 박봉술의 소리만은 송만갑에서 이어온 동편제 소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명환같이 비판적인 사람도 귀명창들이나 전문가들이 오면 정권진(鄭權鎭, 1927~1986)과 박봉술을 불러 오라하여 밤이 새도록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들의 소리를 듣곤 했다. 또 까다롭기로 소문난 김소희 명창도 그녀의 제자들에게 박봉술의 소리를 배우라고 권하기까지 했었다.
목이 괄린 뒤에도 좌절하거나 고수로 전향하지 않고 소리꾼으로 우뚝 선 박봉술 명창은 공력으로 똘똘 뭉친 소리의 진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박봉술 명창은 1986년 교통사고를 당하여 건강을 해쳤는데, 결국 그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워 지내다가 1989년 12월 11일 깊고도 깊은 높고도 높은 동편제를 가슴에 품은 채 한 많은 소리 인생을 마감하고 벽제 공동묘지에 묻혔다.
목이 괄렸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우뚝 서서 명창으로 일가를 이룬 그 엄청난 집념은 인간 승리 그 자체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이룬 소리세계 또한 득음의 경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후 판소리 전승 방향의 올바른 지향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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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명(1997). “판소리 음반 걸작선”. 삼호출판사
노재명(2005). ‘명창 박봉술과 춘향가, 관련 증언자료’. “박봉술 춘향가 전집”. 예술기획 탑.
백대웅(1996). “다시 보는 판소리”. 어울림.
브리태니커 판소리(2000). “브리태니커 판소리 전집”.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최난경(2000). ‘박봉술 <흥보가> 연구’. “판소리연구 11집”. 판소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