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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원강사모여라 원문보기 글쓴이: 2-Nomusiki
우선, 겨울 철 강의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학강모 선생님들께 응원의 말씀을 드릴께요
"드디에 봄이고, 겨울 방학 스케쥴이 마무리가 되네요 ㅜㅜ 이번 주만 지나면 늦잠 고고고고고고!!!!"
고생하셨습니다. 모두들.
제목에서 명기했습니다만, 잘난 척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글을 적을겁니다.
요 며칠 까페의 글들은
나이라는 제약 때문에 쇠퇴할 수밖에 없는 강사의 체념론적 이야기,
경기의 악화라는 요소 때문에 강사라는 직종의 흐린 전망에 대한 비판
그런 의견에 반박하고자 하시는 긍정의 메세지를 전하고자 하셨던 분들,
그리고 그런 긍정의 메세지는 결국 소수의 성공을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또 반박들입니다.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ㅎㅎㅎ
저는 희망을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글을 적는 것도 아니고,
강사를 업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모두는 고사하고,
노력과 실력만 뒷받침해준다면 다수에게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제 여건이 학강모에서 학원 강사의 전망이 다소 어둡다고 보시는 분들에게는
상위 1% 이내로 보이기도 할거구요, 뭐 그렇지 않은 분들도 당연히 다수 계실거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다수"란 전체 모수 중 다수가 아니라 그냥 여러 분 계실거란 이야기입니다.)
그냥, 이런 강사 생활도 있다. 이런 삶의 방식도 존재한다. 정도의 이야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2001년에 시작했으니까, 이제 14년차 강사입니다.
꼭 대학 때 강사 아르바이트를 넣어야 한다면 뭐 1996년부터지만,
그런 잠깐의 알바는 빼버리고 본격적으로 학원에 뛰어들어 일을 시작한 때가 2001년 9월이니까,
여하튼 햇수로는 14년차가 됩니다.
저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대치동이라는 학원 시장에서만 일을 해왔고,
중간에 인강 업체 스카이에듀에 들어가서 강의를 찍다가 오프 강의만큼 흥이 안나서 그만뒀으며,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한 원장님들은 많으면 5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학원 일을 시작하고 5년 정도 가량은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했지만,
뭐, 시간 지나면서 드러나듯이 우물 안 개구리가 잘났다고 설치는 정도였던 것 같구요,
업계 들어온 지 6년째 되던 해에 대박이 터졌습니다.
2004년에 인연이 되어 만난 예비고1 학생들 10명 한 팀이 대치동 각 학교 전교 1등이 되었습니다.
영동고, 단대부고, 휘문고, 청담고, 은광여고, 경기여고, 개포고, 양재고, 등,
1등이 모두 저와 인연을 맺고 함께 공부하게 될 기회가 왔는데 그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을 하니,
(사실 질문들에 모두 대답해 주려고 열심히 공부를 한 것 이외의 기술적인 면이 특별할 것은 없었네요)
2~10등 되는 아이들이 모두 해당 학원으로 몰려서,
데리고 있던 아이들 80명 가량 중
영어를 가장 못하는 아이가 그당시 비교과 영어인 CBT 270점 (300점 만점) 을 받은 학생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졸업하여 대학을 간 것이 2006-2007년 겨울이었고
뭐,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거의 다 서울대학교 붙고, 1/3 정도가 연고대, 한 두명이 성균관 / 서강대에 갔습니다.
워낙 잘 하는 애들이었으니까, 제 역할보다는 지들 스스로가 엄청 잘 했던 걸겁니다.
그 아이들은 지금 2014년에서도 학원마다 아이들 이름 대면 알 정도로 유명했던 애들이거든요. ㅎㅎ
입결이 그렇게 잘 나오니까,
아이들 덕분에 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덕분에 2006-2007에 용인외고 2기 아이들을 맡아 가르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용인외고 2기 아이들 역시 용인외고 역대 최고라고 평가받는 아이들인데요,
그 2기 아이들 중 중국어과 아이들이 가장 뛰어났고,
그 중국어과에서 가장 뛰어난 10명 가량이 저와 함께 비교과 영어로 IBT 수업을 시작했다가,
반응이 좋아서 중국어과 일어과 독어과 영어과 불어과 애들이 붙어서
용인외고 2기 애들만 또 한 80명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해가 대박이 터져서 용인외고 수업과 나머지 대치동 아이들 수업으로
겨울 방학 때 가장 많이 벌 때 기준으로 한 달에 4,000-5,000만원 사이 벌었습니다.
두 달 지나면 거의 1억원이 통장에 들어온거죠.
어떻게 그 인원이 그 금액이 되느냐고 속으로 반문하는 분들이 계실테니까,
간단한 이유를 말씀드리면, 용인외고 아이들은 주 4일 수업을 하고 1인당 100만원씩 냈습니다.
제가 60% 매출을 가져갔으니까, 8,000 * 60% = 세금 빼면 대략 4500-4600만원 정도 되는거죠.
근데 결석이니 뭐니 따지면 아무튼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2007년 한 해는 휘몰아치는 갑작스런운 돈더미 속에 정신 없어하며 살았습니다.
그 해에 서울역 부근의 포스코 샵 아파트도 사고, 외제차도 3대 사고, 신촌에 허름한 건물도 하나 사고
그랬습니다.
이 부분까지는 제 노력과 실력도 요소가 되었겠지만, 운도 많이 따라주었다고 생각들 하시겠죠?
저는 운이 좋게도 강사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점 이후부터
최고 중에서도 최고의 아이들과 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받았으니까요.
일반고 아이들이면 무조건 전교권, 외고 민사고 과고 아이들 중에서도 최상위권.
그런 아이들은 역시 잘 톡 톡 건드려 주기만 해도
예를 들어 주루륵 주루륵 IBT 116-119점 수두룩 (120점 만점) TEPS 주르륵 주르륵 920-956점 (990점 만점)
그리고 서울대 주르륵 주르륵 연고대 수두룩 수두룩 가끔 성대 서강대 등
2007년 입결도 당연 120명 가량 거의 다 서울대와 연고대, 그리고 소수의 서강대와 성균관대학교
합격생들만 제가 근무하는 학원에 합격생 명단을 붙였습니다.
한 달 다닌 애들이 서울대에 합격해도 붙이는 합격생 명단, 저는 3년 내내 함께 했으니 부끄럽지도 않은거구요.
그렇~~~~~~~게 운이 좋았던 2007년이 가고, 2008년 봄이 와서,
또 한 해 잘 되려던 참이었죠.
2008년 3월까지만 해도, 일요일 하루 수업 하면 1200만원은 벌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300만원 팀이 4개 바로 들어오더군요. 9-12, 1-4, 4-7, 7-10 시간표. 그럼 학원에 대략 한 500만원 팀이겠죠)
아 운이 좋아요~~~~~~~~~ 올 한 해도 돈 열심히 많이 벌어야지 빠라빠라뿅
하고,
2008년 4월에 병이 걸렸습니다.
신부전증 말기. 이제 평생 투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투석좀 하다 신장 이식해서 살면 되지 뭐" 하고 강남 세브란스에 입원해서,
복막 투석을 하기 위한 시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있는 애들 좀 가르치면 뭐 돈 걱정은 할 필요 없고, 보험도 많이 들어놨으니까 뭐"
복막 투석 시술을 받고 보통 2주면 퇴원합니다. 저는 못합니다.
열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4주가 지났습니다. 뭐가 이상하다면 목 옆 임파선을 드릴로 뚫어 조직을 떼 검사합니다.
혈액암입니다. T-cell 림포마 4기 (그러니까 말기)
수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항암 주사를 맡고 출근했습니다.
아이들이 예전에 겪지 못했던 이상한 냄새 (키모 테라피의 매캐한 내음이 있어요)를 감지하고 물어도
별 것 아니라고 웃으며 항암을 하며도 몇 차례 수업을 하다,
쓰러진 어느날이 2008년 7월, 그리고 제 수업은 모두 다 깨졌습니다.
병원에 1년을 일단 있었습니다. 신부전 말기와 혈액암 말기를 함께 앓는 사람은 없어서,
그 내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환자로 분류가 되어 암 병동에 있으며,
중간 중간 코드 블루가 울린 후에 돌아가시는 분들도 하루 건너 하루 듣기도 하고
뭐 그런 병원 생활이 1년여.
제 몸이 원악 약물 반응이 빨라서, 한 차례 키모 요법을 하면, 보통 2주 후 그 다음 치료를 하는데
백혈구 수치가 최소 4,000 이상이어야 좋다고 하는데 저는 '3' 까지 떨어졌습니다.
"오늘 밤이 고비다"는 이야기도 몇 차례 듣고, 아무튼 시간은 가고 가고 잘도 가고
그러다보니 저는 학강모만큼이나 신환모 (신장병 환우회 카페) 림프종 환우회 카페 모두 다 가입이 되어 있고,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었습니다 ㅎㅎㅎ 다음 카페거든요.
2008년 4월 입원해서 2009년 3월 항암이 끝나고 퇴원을 했는데,
약해진 몸이 툭하면 이런 병 저런 병 걸리고, 특히 복막염때문에 미추어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아프걸랑요. 참을 수가 없는 그런.
제가 올 겨울 대상 포진이 걸려서 지금 음청 아픈데, 이건 새발의 때도 안 될만큼 복막염이 아파요.
그래서 또 병원 병원 병원, 입원 입원 입원.
그렇게 시체처럼 있는 동안 어무이께서 사기를 당하셔서 제 보험료 현금 1억 8,000만원과
아파트 한 채, 그리고 신촌의 건물이 다 날아가고, 살던 집은 압류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략적 치료를 모두 마치고 나서 세상에 나오니 2010년 3월이 되었답니다.
2년이 지난거죠.
그리고 저는 잊혀진 강사가 되었습니다.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속에 그대 외로워 울진 않았어요.
이제 뭘 할지 고민하며 앞 날을 생각하니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는 커녕 바로 할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ㅎㅎㅎ
번역을 하고, 통역을 하고, 다시 학원가를 기웃거리며 기회를 보고
2010년 아는 원장님들 찾아가 그냥 조그만 수업들 모두 받아서 또 하기 시작했습니다.
3명이 한 반이어도 좋고, 5명이 한 반이어도 좋고 등등
2010년에는 경제활동이 시작된다는 점만으로 행복했기 때문에, 집 - 학원 or 다른 일을 반복하며,
쉬는 모든 시간에는 황금온천이라는 교대역의 사우나에서 보냈습니다.
아 뜨거운 물의 진정 효과여 그 나른함이여 빠밤 빠람 빠바밤
버는 돈은 거의 다 압류 잡힌 집 이자 내느라 드리고요.
2010년 가을에 스카이에듀 수시 사업 본부장을 하시던 남OO 선생님이,
텝스로 인강을 찍어보지 않겠냐고 하셔서 몸이 약한데 괜찮을까요 했는데,
주 한 두개만 30분짜리 찍으면 된다셔서 들어갔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정말 열심히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저는 몸이 힘들어서
한 주에 하나 혹은 두 강만 찍었고, 그러다 하기 싫어하던 차에
스카이에듀에서 그렇게 찍을거면 그만 하지고 해서 "기꺼이 해피하게요" 그만 뒀지요 ㅎㅎ
참고로 인강에 대한 환상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일반 학원과 마찬가지로 매출 1위와 2위는
격차가 많으니까 혹시 "지금이라도 들어가면 내가 스타가 될까"
글쎄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케팅을 특별히 열심히 해 줄 수 있는 연줄이 있으면 그럴지도요 ㅎㅎ
2011년이 왔습니다. 다시 대치동 보습 단과로 들어가야지 생각하고, 아는 원장님들에게 전화해서
수업좀 하게 해주십사 부탁을 드렸고,
그 때 연락을 주신 원장님이 대치 미래탐구 조OO 원장님이십니다. 제게는 너무 감사한 마음뿐인.
다시 시작했습니다.
한 반에 2명으로 시작했고, 첫 달 월급은 50만원 미만, 그리고 다음 달 약간 올라서 90,, 또 150,
그게 7월달까지 5개월여 지속. 대략 200-300만원 선 받을 수 있는 인원과 공부했는데,
여름 설명회를 열심히 하고 그 때 만난 아이들부터 한 반에 대략 15명, 그래서 여름이 지나니까 한 달에 1,000만원
그래서 2011년 여름부터 2012년 초겨울까지,
미래탐구에서 또 대원외고, 한영외고, 서울영재고 (과고), 한과영 (부산과고) 경기북과고, 대구 영재고, 하나고
등 좋은 아이들과 수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여 잘 하는 아이들과만 공부하며 승승장구 할 것 같았으나,
저는 학강모를 그 무렵 알게 되어 Honi 선생님을 알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상워권 아이들이 아닌 하위권 아이들이 사실은 우리의 도움이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
그런 아이들과의 교류를 하는 것이 사실 더 보람있지는 않을까
대화를 하며,
느끼는 바를 제가 정리하여
미탐 원장님께 "못하는 애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뭐, 표현은 달랐습니다만, "웃기고 있네요 샘" 이 대답이었습니다.
팔리는 강의를 두고 왜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느냐는 대답이었죠.
고집을 부렸고, 몇 차례 마찰도 있었고, 결국은 미래탐구라는 학원이 지니고 있는
당연히 효율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식 (매출이 짱이야) 사고방식에 반기를 품었다는 핑계를 대고
2012년 12월에
"원장님 그동안 감사드렸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곳으로 갈래요"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정말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
교보생명에서 경매에 넘긴 저희 아파트 때문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는데,
미탐에서 번 돈 다 착실히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그 돈 1억 약간 넘는데다 대출 1억 8천 받아서 지금 저와 제 부모님이 거주하는 일산 아파트를 샀습죠.
학강모 샘들 오셔서 축하해 주셨기에 기억하실거라고 믿습니당 ㅎㅎㅎ
그리고 지금 제가 근무하는 학원으로 온 것이 2013년 1월, 겨울 방학 시작하면서부터네요.
"원장님 저는 투석해요. 월수금 아침에는 수업 할 수 없구요, 월 금은 무조건 쉬어야해요"
"응 그래 맘대로 해 어차피 지금 애들이 많은 것도 아닌데 뭐 그런 걸 걱정해"
"감사감사 합니다."
학원에서 또 3명을 데리고 시작을 합니다.
원장님께 못하는 애들도 꼭 많이 받아야 한다고 강조를 합니다.
그 녀석들과 교류를 해야겠다고 말이죠. 걔네들을 올려놓으면 더 좋은 시너지가 생길 거라고요.
원장님은 아니나 다를까 상워권 아이들이 선생님 수업을 좋아하는 것을 다 아는데
무얼 하러 또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느냐고 저의 의지를 꺾으려고 할 줄 알았으나 그리하지 않으시고,
"그래 좋아요" 라고 했습니다. ㅋㅋ
그래서,
저는 그 때부터 한 반에 1등급과 8등급이 함께 있는 수업을 합니다.
물론, 내신입니다. 그 학교 내신이 8등급이어도 수능 외국어영역 3등급은 나올겁니다.
여하튼 제 입장에서는 그 전보다 못하는 애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된거죠.
그래서 3명을 데리고 2013년 3월에 수업을 시작했고, 달달이 아이들은 늘었고,
제가 8등급 아이들 내신 4-3등급으로 올리고 6등급은 2등급으로 올리고 4등급 애들을 1등급으로 올려놓자
못하는 아이들은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잘 하는 아이들은 "질 수 없다" 는 생각으로 늘고 늘고 늘어서
이제 또 한 반에 한 45명 정도씩 있습니다.
축약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제가 주로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휘문고 아이들 1, 2학년 160여명, 중동고 1, 2학년 대략 40명
안양외고 애들이 대략 40명, 그리고 여타 학교 아이들이 대략 4-50명 해서 한 300명 가량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실테니까 금액을 연도별로 정리하면,
2001-2006: 월 급여 200만원에서 700만원
2007-2008. 4월: 월 급여 2,500만원에서 5,000만원
2008-2010: 월 급여 0원 ~ 200만원
2011. 3-7: 월 급여 50만원 미만 ~ 250만원
2011.8~2012. 12: 월 급여 1,000만원~2,300만원
2013. 3~7: 월 급여 160만원~1,400만원
2013.8~2014. 2: 월 급여 2500만원~3,800만원
주 5일 근무 기준입니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수업 안 하거든요.
아~~ 얼마나 들쭉날쭉합니까. 이런 면들을 보고 학원 강사의 고용 불안정, 수입에서의 불안정을 우려하죠.
저는 불만이 없습니다.
시작할 때부터 지금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실망하거나 절망한 적이 없어요.
항암 치료를 할 때에도, 오늘 밤이 고비라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여기까지가 내 스토리의 끝이면 그걸로도 좋아" 라고 생각했지 절망하지 않았어요.
암세포가 없어져서 의사샘이 놀라고 기뻐하실 때에는 기뻐했어요.
아이들이 2명이어서 월급이 30만원대면 그걸로 뭘 사먹을까 생각했어요.
늘어서 월급이 올라가면 기뻤고, 줄면 그래도 생활하는데만 지장 없으면 해피했지요.
지금도 걱정하지 않고 삽니다.
투석을 하는 제 동료 신부전 환우들은 참 우울해해요.
5년 생존율이 낮으니까 이 목숨 살아봤자 뭐하냐고들 하는 사람들 부지기수로 많아요.
신환모 까페 글들 참 어둡고 힘든 분들이 많아요.
저도 투석을 해요.
"여러분은요?"
저는 행복한 삶을 삽니다.
가족들의 저를 향한 무한 신뢰와 격려, 그리고 듬뿍 넘치는 사랑이
여자 친구의 극진한 보살핌과 따뜻한 온기와 또 그 사랑이 제게 힘을 주고
동료들과 웃으며 보낼 수 있는 하루,
수업을 하며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아이들
아~~~~~~~~~ 좋군요. 좋아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아침 투석 하러 가면서,
"아 이 굵은 바늘은 매번 찌를 땐 아프긴 한데 덕분에 내 생명이 연장되는거구먼 음핫하"
그리고 쿨쿨 잡니다.
제 입장에선,
강사가 아니었더라면 이 스케쥴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일이 번역과 통역 등의 프리랜서밖에 없는데,
그런 일들 중 내 노력과 기본 성격, 실력만으로 경제활동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일은?
바로 강의입니다. ㅎㅎ
번역과 통역은 벌이의 한계가 좀 있는 편이구요 (거기도 까페 가면 힘들다고 죽는 사람들 천지에요)
제가 원하는 것은?
건강! 이제 건강하기만 하면 착실히 모아 놓은 돈으로
알콩 달콩 결혼해서 살 수 있을 생각만 합니다.
"여러분은요? 저보다 여건이 안 좋다고 생각하세요? 제 건강+ 재산 + 인맥 다 드리면 여러분의 건강과 바꾸실래요?"
저는 다시 제로베이스로 돌아가도 똑같이 일어설 자신이 있거던요.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저와 다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구요, 그 생각에 찬 물을 끼얹을 생각도 없구요,
그렇게 살겠다는데 그러지 말라고 말릴 마음도 없다니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그렇게까지 아직은 부정적이지 않은
그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아직은 걱정과 부정과 절망에 가까운 어둠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지 마시고,
남들이 걱정 할 때 그 만큼의 노력을 한 번 해 보세요.
남들이 안된다고 할 때 알았다고 하고 해 보세요.
뭐하러 말싸움을 하나요.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 나의 삶은 나의 것.
"나의 삶을 사세요"
그게 긍정의 삶이던, 부정의 삶이던 뭐던 잘 모르겠는데,
남들에게 너무 휩쓸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과 일들을 사회라는 제도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마음껏 하시며 기회도 보고, 실패도 하고 하세요.
그렇게 하기 싫으셔요?
그럼 그렇게 하지 마세요~~~~
마무리합니다.
저는 제 삶을 살며, 제 삶을 사랑하며, 제 주위 사람들과 열~~~~씸히 교류합니다.
잘~~~~~~~~ 살다가 생을 마감하도록 할께요.
"여러분들도 그러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요즘 행복하게 아이들과 수업하는 인증샷으로 마무리 고고합니다.
굿바이 에브리바디 떙큐 쏘머치 알럽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