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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4-일반법회설법-대산종사법어-법위의 대의.hwp
▶원기 99년 9월 14일 일요일 일반법회
▶주제 - 대산종사 법어 <법위의 대의>
▶김제원교무님 설법
▶타이핑 : 일반 7단 문유진 / 편집 일반 7단 문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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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
덕분에 저도 광주에 잘 다녀왔습니다.
중학교 초등학교 동창들도 38년만에 만나고 왔습니다.
많이들 늙었습니다. 제가 다 형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말입니다.
오늘은 9월 단법회가 있는 주입니다. 단법회 날은 상시일기 체크한것과 마음일기를 써오고 마음공부 책자도 가져와야 합니다. 단장님들께서 전화로 챙기셨고 . 혹시 전화 안했더라도 다 가지고 와야 하는데 그러셨지요? 말을 잘 들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지난주에 법위 사정이 있었지요. 법위향상을 위해 법위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참고하여 지구, 교구, 총부 사정회에 올라갑니다. 개인의 사적인 판단이 아니라 공적인 검증으로 법위가 향상이 됩니다.
회보 1면을 같이 읽으면서 간단히 짚어봅시다.
대산종사 법어
<법위의 대의>
1. 공부의 정도를 법계로 안다.
2. 서원과 신앙심과 수행력을 측정한다.
3. 개교의 동기를 구현하기 위한 인격을 갖추는 표준이다.
4. 교리를 실천케 하는 표식이고 이정표이다.
5. 법계로써 일원세계 건설하는 설계도이다.
6.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할 원본이요
7. 최고속 법로로서 도력과 법력을 알아보는 틀이다.
8. 여래를 손에 쥐어주고 법력을 알아보는 틀이다.
9. 대변혁기의 새시대 새 지침반이다.
10. 과거의 새대는 천권시대이나 앞으로의 시대는 인권시대이다. 신, 불, 하느님이 지상에서 집에서 대중과 함께 활동한다.
11. 생불, 활불의 제조 그물이다.
12. 여래위까지 법위를 얻어가는 사실화된 안내도이다.
13. 혼자의 성불이 아니라 전체의 성불이요 영원한 성불의 길이다.
14. 법위는 교단의 생명이요 , 자산이다.
1. 공부의 정도를 법계로 안다.
법의 층계라 이야기 합니다. 공부의 정도를 법위의 어느 계단까지 올라갔는지를 스스로 점검하여 향상하자는 것입니다. 이 생에 지은대로만 내생에 받습니까? 이 생에 지은 것보다 조금 더 받기도 합니다. 이 법위가 그렇습니다. 대산 종사님께서는 약간 부족해도 법위를 올려주십니다. 이것은 빚이니 채워라 하심입니다. 결국은 활불로 살려 쓰시기 위함입니다. 무섭고 대단한 어른이십니다. 이 뜻을 사람들이 어찌 알까요?
2. 서원과 신앙심과 수행력을 측정한다.
참 무서운것이 서원입니다.
삶의 에너지고 한 인생이 살아가는 방향입니다. 가치관 인생관 진리관입니다.
이 안에는 생사관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서원이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서원이 있으므로써 신앙심과 수행력이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
신앙이 들어가면 서원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수행력이라는 것은 삼대력을 말합니다.
정신의 수양력은 쉽게 말해서 욕심 경계를 대해서 얼마나 멈출수 있느냐 입니다.
또는 비울 수 있느냐 맑힐 수 있는냐 입니다.
본래 참 나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욕심 경계가 오면 그냥 넘어집니다. 가벼운 시비 하나가 와도 그냥 넘어집니다. 그것은 수양력이 약한 것입니다.
그 다음 사리 연구력, 사람마다 일에 밝은 사람도 있고 이치에 밝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치는 일을 잘하자는 것이고 일 안에서 다시 이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일과 이치를 보아다가 연구 , 밝고 빠르게 분석해서 판단해서 그것을 제대로 알고서 넘어가자는 것이 삼대력입니다.
제가 보면 대부분은 욕심이 많아서, 즉 수양력이 부족해서 무너진 사람들이 많지만 특히 가난한 사람들 보면 연구력이 부족해서 가난하고 무너집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느닷없는 판단을 합니다. 자기가 연구력이 부족하면 나보다 연구력이 쎈 사람에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안합니다.
물어보는 마음은 신심입니다. 신심에 바탕한 연구력이 물어보는 취사입니다. 물어보아야 타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어제 청년법회 떄 청년들이 묻습니다.
지구의 인구수가 늘어나고 생령의 수가 자꾸 늘어나는데 그것은 영혼의 수가 늘어나는 건지, 어디서 어찌 느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랬습니다, 명절에 나한테 문자도 안하는 녀석들에게 쉽게 안가르쳐 줄란다. 했습니다. 이런 비싼것, 30년간 수억이 들어간 공부를 공짜로 주려니 아깝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타력을 정말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일을 해보니 어떤일을 10년을 해보니 그 일이 뭔가를 알겠습니다. 10년이면 알기만 하고 20년이면 만들어 낼 수 있을 듯한 능력이 생깁니다. 조절을 할 수 있습니다. 10년은 그냥 알기만 할 뿐입니다.
저는 간사때부터 교화 준비를 무섭게 했습니다.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했으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니 느낌이 달라집니다. 10년을 하니까 아하 이런거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20년이 넘어가니까 이제 내가 조절할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처음 원불교를 만나면 수양에 맛을 들이거나 연구력에 맛을 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종교인이 많이 속습니다. 일생 관념으로만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생활종교가 핵심입니다. 실천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에너지의 80% 이상은 취사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실행에다가 써야 하는 것입니다. 실행이 중요한 이유는 그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원리가 나오고 그 안에서 계속 수정이 되면서 또 원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취사를 하면서 다시 수양이 적용이 되고 다시 연구가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견성을 했더라도, 취사를 통해서 내가 깨친 것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듬어 집니다. 그것이 참 견성입니다.
그러나 원불교를 잘못 공부하면 그냥 안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 강성조 교우가 법문 문자를 보내지요?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그 사람의 공부정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법문 문자를 보면서 <아 내가 아는 법문이네> 이러고 끝나면 그런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원불교 공부 아직 먼 사람입니다. 생활에 변화가 없습니다.
김장하는 법을 배우면 김장을 잘 하게 됩니까? 10년이상 김장한 사람 절대 못따라갑니다. 나에게 어떻게 맞는 법문이고 이걸 어떻게 적용해야 겠다 하는 생각까지 들어야 합니다.
사법고시 시험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한 사람은 맞출 수 없는 교묘한 문제를 냅니다. 떨어뜨리는 문제를 내는 것이지요.
절대시간을 투자한 사람만이 맞출 수 있는 문제를 내는 것입니다. 수학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시간을 요구하는 문제를 줍니다.
아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 문제를 어떻게 변화를 주어 자기것으로 만들어 풀 줄 아느냐 하는 문제를 냅니다. 응용할 수 있고 빨리 단축시킬 수 있냐 하는 문제를 내는 것이지요.
꽃꽂이 예를 들겠습니다. 꽃꽂이를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제가 나름대로 판단한 바가 있습니다. 가장 적은 꽃으로 가장 제철에 맞는 가격이 싼 꽃으로 가장 오래 가게 꽃꽂이 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입니다.
꽃 몽땅 사와서 화려하게 해두고 며칠 안살게 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김장도 진짜 잘하는 사람은 맛있게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추가 물배추인지 60일 배추인지 고랭지 배추인지 잘 알고 어떤지 잘 판단하고 주어진 재료 안에서 가장 맛있게 하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 제일 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취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취사에는 시간을 많이 투자해 본 공이 있습니다. 이런 시간의 투자를 많이 한 지혜를 빨리 배우고 단축시킬 수 있는 것이 타력입니다. 묻고 활용하고 다시 점검을 받는 것, 이것이 원불교 공부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법마 상전급에서 항마위 못 올라가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묻지를 않는 것이지요. 스승이 있어도 묻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중근병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어다가면 박수받고 대충 알 것 같으니 자기 잘난 마음이 또로로 올라옵니다. 그래서 교무님도 자기가 다루려 합니다. 신심이 작거나 서원이 작으면 자만자족 소선소지에 만족하고 끝납니다. 참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취사가 원불교 공부의 가장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법회를 보는 것은 이 취사를 점검받는 겁니다. 주간에 취사를 하고 와서 법회때 대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도 결국 취사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천도를 배우면 그냥 나는 천도 받은겁니까?
아는 데에 그치고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원불교 공부가 아닙니다. 아는 것을 실지 경계를 당했을 때 활용하는가 자유자재로 써 먹는가 , 아는것을 활용할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참으로 아는 것이고 이것이 원불교 공부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이것을 경계하는 말로 납도끼라는 단어를 활용하셨습니다. 납도끼로 나무를 찍으면 도끼가 오그라집니다. 실지 경계에서는 맥을 못추립니다. 열매없는 과실수라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법위라는 것은 실제 수행력을 판단하는 가름입니다.
3. 개교의 동기를 구현하기 위한 인격을 갖추는 표준이다.
자 , 여러분 원불교의 실체란 무엇일까요? 원불교의 주인이 누구일까요?
서원과 신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일원상을 향하는 마음, 일원상을 실천하는 마음을 가진 그 사람이 교단의 실체요 교단의 주인입니다. 원불교의 개교의 동기가 내 마음의 동기와 같아져야 합니다 . 내 목적과 같아야 합니다. 대종사님의 개교의 동기가 되면 안됩니다.
4. 교리를 실천케 하는 표식이고 이정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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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식이라는 것은 간판이라는 것입니다. <이>자는 <마을리> 자이기도 하지만 거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어디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얼마만큼 남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이정표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얼마만큼 왔는지를 알려주면 어디로 가고 얼마만큼 남았는지 알려줍니다. 내가 지금 이제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고 서둘러야 할지 어찌할 지를 알려주는 기준입니다. 이런 이정표가 바로 법위입니다.
5. 법계로써 일원세계 건설하는 설계도이다.
일원세계는 원불교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불국정토 , 진리의 세계 , 낙원 세계, 도덕세계 , 미륵불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참 낙원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건설하는 설계도라고 하십니다.
흑석동 서울회관 재건축에 제가 설계도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설계비용을 아까워 하면 안됩니다. 시공은 설계에 비하면 정말 쉬운 일입니다.
원불교의 설계도는 정전입니다. 특히 교의편입니다. 수행편이 바로 이 교의편을 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맨 앞의 총서편은 설계도의 방향입니다.
시공업자들은 중간에 설계를 자꾸 바꾸어서 눈먼 돈을 챙기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설계를 소홀히 하면 중간에 몇 번을 수정하게 되고 그러면서 오히려 비용이 더 늘어나게 됩니다 .
공사하는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어떤 일의 방향을 잡아두고도 자꾸 타협하려고 합니다. 그 타협은 자기 습관, 자기 업력, 자기 육신 또는 인연에 걸리어 생깁니다. 설계도를 짜면 그대로 하면 되는데 자꾸만 변경을 하려고 합니다.
이 법위등급은 법위의 계단,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서원이나 신심이나 수행력이 눈에 보이지 않듯이 법위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경계를 당하면 법위대로 분명히 실행력이 차이가 납니다. 어쩌다 보면 보통급이 항마위처럼 할 수도 있지만 경계를 대어보면 한때의 특행으로 잘 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자기의 수행력 연구력 취사력만큼 하게 되어있습니다.
6.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할 원본이요
유무념을 잡거나 계문을 잡을때 , 보통급이 특신급이나 상전급 계문을 가져다가 대조하게 되면 한편으로는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진력증이 나기도 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됩니다.
유뮤념은 지킬만 한것을 먼저 잡아야 합니다. 막연하게 탐심을 제거하자. 이런 유무념은 참 갑갑합니다. 자기와 가까운 것부터 해야합니다.
예를 들자면 남자들은 <이를 잘 닦기>나 <신발 정리하기>,< 날마다 샤워하기> 등 자기 생활속에서 가까운 것부터 해나가야 합니다.
보통급이나 특신급은 자기의 단계나 근기에 맞도록 표준이나 기준을 잡고 해나간다면 오히려 이것이 법위 등급 향상에 있어서 더 빠른 길입니다. 마라톤 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100미터 주파하듯이 뛰면 그 사람이 일등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원불교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막 열심히 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보면 사라져 있습니다. 주변 인연중에 그런 경우 많을 것입니다.
법, 마음이라는 것은 무형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늘지 않습니다. 시간속에서 노글노글 해 지는 것입니다. 천여래 만보살을 배출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단계를 밟아가다 보면 천여래 만보살의 대열에 빨리 들어갈 수 있습니다.
7. 최고속 법로로서 도력과 법력을 알아보는 틀이다.
최고의 속도로써 법의 길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알아보는 틀이냐? 도덕과 법력을 알아보는 틀입니다. 여러분도 어떤 사람에 대해서 판단을 할때나 또는 스스로에 대해서 판단을 해야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서울대 법대를 나와서 하버드 법대나 로스쿨을 졸업한 후 어디 좋은 대학 총장을 한다고 하더라 하면 그 사람이 대단해 보이지요. 그러나 원불교에서 말한 법위 등급대로 한번 그 사람을 대어 보십시오. 원불교에서 말하는 이 등급에 딱 대입이 안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허망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잣대는 주세불이 내어놓은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생을 딱 마감하고 나면 유명무실이라, 허장성세 해 보았자 나중에 허망하기만 합니다.
오늘 아침에 성조 교우가 보낸 법문처럼 그릇이 작은 사람이 큰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더 큰 죄업을 집니다. 그릇을 키우면 설령 당대에 내가 무엇을 못하더라도 영생을 놓고 보면 그 자리는 오지 말라고 해도 내게 옵니다.
여러분, 이 시대는 인권시대입니다. 사람이 주인인 시대입니다. 그러나 자리라는 것은 천권으로 받아야 합니다. 원사장님의 예를 들어볼까요? 원지천 사장님이 연말에 직원을 뽑을때나 연봉을 협상할 떄 무엇으로 기준 삼겠습니까? 객관적으로 하시겠지요? 요즘은 객관적으로 하지 않으면 대중이 압니다. 그
런데 어떤 자리를 놓고 오히려 사장에게 왜 내게 그 자리를 주지 않느냐고 하면 사장이 볼때 (어허 자네는 더 안되겠네) 하는 생각이 들수 있습니다. 내가 위를 받거나 직책을 받을때, 내가 내 요구로 받는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안됩니다. 큰 자리는 하늘이 정해주기를 바래야 합니다.
제가 완도에서 근무할 때, 총무과장 겸 인사과장 이었습니다. 직원이 약 30명정도 됩니다. 그 당시 어떤 교무님을 한분 모셔와야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한 해에 2만명씩 왔다가고 한번에 500-600명이 오기도 하기 때문에 예쁘장 하고 보기만 해도 향기가 나는 여자 교무님을 한분 모셔와야 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때는 또 간접교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실속있는 사람은 오래 보아야 알겠지만 짧게 보는 사람은 또 겉으로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교무님을 찾아서 나하고 한번 같이 근무해봅시다 하면 안오십니다. <내가 그런데 왜 가냐>면서 안오십니다. 그런데 또 반면 전화가 옵니다. 완도에서 꼭 근무해 보고 싶다는 전화가 오면 또 그런 분은 제 마음에 안듭니다. 꼭 그분은 안왔으면 좋겠습니다. 참 신기하지요. 왔으면 싶은 사람은 안온다고 하고 안왔으면 싶은 사람은 올란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존경하고 싶거나 따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무엇을 보면 되느냐 하면 법위등급을 보면 됩니다. 설사 인물이 못났어도 설사 학벌이 약하거나 인물이 약해도 도력과 법력이 있는 사람이 결국은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한생만 놓고 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사람을 판단하고 알아보는 틀이 이것이어야 합니다. 한때 자기가 뭐 별거였어도 법위등급의 틀에서 누락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때 아무리 큰소리쳐도 다음생에 어떤 축생보를 받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존경 할 사람을 존경하시고 닮을 사람을 닮으셔야 합니다.
8. 여래를 손에 쥐어주고 법력을 알아보는 틀이다.
이 법위등급은 사실 여래위가 목적입니다. 여래위는 먼 기준이 아니라 내가 하기만 하면 잡을수 있는 법위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불교 공부에 확신이 적거나 원력이 크지 않은 사람은 항마위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보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사실은 이 생에 내가 출가위는 가겠지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교단에서 출가위 주던 말던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여래위로 가야겠다. 그게 대종사님의 뜻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 대변혁기의 새시대 새 지침반이다.
이 법위등급을 보면 대 변혁기, 즉 이제는 후천 개벽시대가 되었는데 새 시대의 새 나침반이다 이 말입니다.
10. 과거의 새대는 천권시대이나 앞으로의 시대는 인권시대이다. 신, 불, 하느님이 지상에서 집에서 대중과 함께 활동한다.
과거시대는 천권시대입니다. 이제는 후천 개벽시대로 활짝 열린 개벽시대입니다. 예전에는 당대에 짓는것을 다음생에 받는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당대에 짓고 거의 당대에 받습니다. 앞으로 더 빠를 것입니다. 옛날에는 인과를 잘 안믿었었죠?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하면서 말이지요. 앞으로는 그런것이 적어질 것입니다. 국가 법에 의해서 과를 받던가 아니면 진리의 법에 의해서 다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지록위마를 들어보셨습니까?
사슴을 가르켜서 말이라고 한다 이런 뜻입니다. 최근에 법조계에서 판결이 하나 나왔습니다. 11만건이 넘는 선거 부정 댓글을 단 원세훈 국정원장이 집행유예 판정을 받았지요. 이게 지록위마입니다. 국가가 도대체 정의라는 것을 법조계에서 세우던가 정치계에서 세우던가 교육계에서 종교계에서 세우던가 어디선가에서는 세워야 하는데 세우는데가 없어서 정말 걱정입니다.
옛날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 했을 때 , 오래 살려고 수은을 먹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일찍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기직전 신하에게 우리 아들에게 위를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진시황의 아들은 그 당시 옳은 소리 한번 했다가 쫏겨나서 지방에 가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죽은 후 신하가 지방에 가서 진시황의 말대로 아들에게 위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참하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게 되지요. 그리고 그 신하가 정권을 잡게 됩니다. 그 이후에 사람들에 묻습니다. 사슴을 가르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 묻고 사슴이라고 답하면 목을 칩니다. 말이지 않느냐 하고 물어서 <예 말입니다>. 하고 대답한 사람만 살립니다. 그것이 지록위마입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인권시대라 그런 불의는 무너집니다. 무서운 시대입니다. 북한이 만약 인터넷만 오픈이 되어도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시리아 이집트 리비아 모두 무너졌습니다.
인권시대는 이제는 그런 불의는 잠깐 숨겨질 수는 있습니다만 이제는 그런 쉬운 시대가 아닙니다.
아까 제가 자리를 받는 것은 인권으로 받지 말고 천권으로 받으라 했습니다. 권력은 쫒으면 나중에는 더러워집니다. 권력이 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권력을 탐하는지 아십니까? 명예를 왜 좋아합니까? 잘났다고 생각한 못난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명예입니다. 명예는 인사권과 내사권이 있어지면서 권력이 있어집니다. 내 힘으로 판단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고 집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 사람들이 고개를 숙입니다. 권력의 힘입니다.
총리만 되어도 서울 시내 지나가면 신호등이 다 바뀝니다. 그러면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장관만 되어도 특권이 20개가 됩니다. 공항에 가도 vip실로 들어갑니다.
이 권력의 맛이 좋습니다. 못난이가 대우받으려고 하는 것이 명예입니다. 진짜 명예는 꼭 필요한 자리에 사람들이 추천해서 들어가서 그 자리에서 정말 좋은 세상을 만들려다가 나오는 그 힘이 바로 권력이고 명예인것이지 중생들이 쫒아가서 찾아가서 얻어낼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명예가 아닙니다.
곧 관속에 들어갈 거면서 뭘 그리 쫒는지요.
11. 생불, 활불의 제조 그물이다.
왜 생불활불이라는 말을 썼나요? 옛날 부처님은 목불 석불 니불 와불 이런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대는 생불시대 활불시대입니다. 관념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지 곙계에서
실제 능력을 갖춘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능력을 갖춘 연구력 수행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취사가 실제 써먹는 취사여야만 비로소 생불 활불입니다. 납도끼처럼 구부러지는 도끼말고 실제 탁 쪼개려 들면 툭 쪼개지는 그런 실제적인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법을 내놓았는데 아직도 원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절에 가서 마냥 3000배 하고 천수경 100독 1000독하고 했다고 자랑하고 그럽니다 . 저도 가끔 생각합니다. 나도 원불교 안만났으면 저러고 있을 터인데 합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원불교 안만났으면 절에가서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2. 여래위까지 법위를 얻어가는 사실화된 안내도이다.
대종사님이 막판에 전체 다 둘러보시고 법을 짜시면서 또 무엇을 하셨냐 하면 이 법위점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다 물으셨습니다. 너는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냐 너는 공부를 어떻게 하냐 하시면서 너는 이것이 병이다, 이것이 잘못이다 다 지적해주셨습니다.
왜요 ? 교단의 생명은 법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위에 대해서 강조하신 분이 생각이 납니다. 돌아가시기 한달 전에 저하고 이 법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3시간 정도 향산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한테 <교단에 직책이 중요하지 않다, 법위 위주로 가야한다> 하시면서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 향산님 말씀이 참 생각이 납니다.
우리 교당에서도 똑같습니다. 회장이라는 자리보다도 (물론 애쓴것은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위입니다. 법위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사업은 사업대로 실적이 있어야겠지만 법위가 있는데 사업에 실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이 안됩니다.
13. 혼자의 성불이 아니라 전체의 성불이요 영원한 성불의 길이다.
대체로 불교를 공부하면 성불제중이라 해서 자기 성불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산속에 들어가서 성불하려 하고 자기 공부합니다. 동하 3개월 선을 몇 번씩 했다고 하면서 성불과정을 자랑하는 스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기점 자체를 혼자 성불이 아니라 전체 성불로 잡으셨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청정한 한 기운, 우주의 기운으로 한마음입니다. 즉, 자와 타가 불이입니다. 현실속에 나타는 기운은 둘셋이지만 무형의 한 기운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둘이 아닙니다. 자타도 둘이 아니고 영육도 둘이 아닙니다. 일과 이치도 둘이 아니고 동정도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체의 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을 바라시거든 한생의 행복을 바라시지 말고
이왕이면 영생의 행복을 바라십시오. 벌써 말만 들어도 그러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몸은 습관과 업력에 의해서 이생에 이정도 밖에 못됐다 해도 마음은 남녀노소도 선악귀천도 없습니다. 마음은 원래 툭 터져서 크기로 말하면 대포무외요 작기로 말하면 세입무내입니다. 작기로 치면 좁쌀도 들어갈수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있으면서도 없는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스스로 그냥 단생만 쳐다보고 작은 나만 쳐다보렵니까?
14. 법위는 교단의 생명이요 자산이다.
잘생겼다고 돈많다고 그 사람이 최고인거 아닙니다. 법위가 생명이고 자산입니다. 안암교당의 생명이 뭐냐 ? 법위입니다. 진짜 공부하는 사람이 몇 명이냐? 그런 사람이 많은 교당이 큰 교당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교당이 진짜 공부하는 교당입니다. 그것이 자산이 있는 교당이지 교도 숫자 많다고 교당이 크고 멋있다고 그것이 자산이 많은 교당이 아닙니다. 진짜 속 깊은 공부를 말합니다.
제가 하나만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공부를 하다보면 심고를 올리고 유무념을 챙기고 하는 것들이 따로 놀지요? 기도할 때는 어떻습니까? 그 기도속에 조석심고와 유무념이 빠진 기도가 있을수 있습니까? 그 기도속에 자신이 지은죄에 대한 참회도 없이 내가 원하는 것만 기도하는 기도가 말이 됩니까? 절대 속깊은 공부 아닙니다. 속 깊은 공부를 하면 이 모든 것들이 착착착착 서로 연관이 됩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진짜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교리를 만났던고 합니다. 우리는 하여간 어찌다행 인연이 깊어 이 법 만났습니다. 불연을 잘 승화시켜서 영생의 법연불연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행복하고 싶으시면 법위를 올리십시오. 하루 아침에 올릴수는 없지만 법위가 높아질 수록 훨씬 행복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법위 필요없어요, 줘도 안받어요 이런 무식한 이야기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와~ 대박~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완벽히 정리하시다니~ 인간계 최강!
정말! 바쁜데도 빠른 업로드~~ 멋져!!@.@ 짱짱^^♡ 감사해요!
자알 읽었어요. 고맙고요.
근데 큰 글씨 앞부분...대산종사 법어편....대의가 대위로...
네 수정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사진까지 찍어 올리는 정성~ 역시 쌤입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네 스캔까지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