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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대 시
〔초대시〕
거리악사
권 준 호*
세상의 길은 오선지.
사람들은 음표가 되어 오가고
개울물처럼 흐르는
나의 노래는
무심히 흘리고 간
그대들의 숨은 사연.
그래서 나의 악보는
바람이다. 낙엽이다.
한 줄기 눈물이다.
내게 화려한 무대는 필요치 않아.
속삭이는 입김처럼
그대 귀를 간질이고 싶어
오늘 밤 공연의 조명은 달빛,
관객은 새 한 마리.
눈물
빈가지마다 눈물범벅이다.
겨우내 진주처럼 자라버린 상처를 터트리며
봄 문턱을 넘는 것이다.
울음보 여린 벚나무들은 저희끼리 모여
바람 속으로 일제히 하얀 눈물을 뿌리는데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봄마다
참았던 눈물을 환하게 날리며
가벼워지는 것이다.
기실 가벼워진 것들의
그 가벼운 눈물은 무거워
그 영롱함은 정녕 무거워
그대 발 앞에 깔리는 것이다.
무겁게 가슴속 징거둔 사랑을
저마다 꽃으로 터트리는 것이다.
그래서 봄은 늘 눈물바다인 것이다.
* 강원도 춘천 출생, 월간 ≪현대시≫에 작품 발표하며 등단, 춘천문학상 수상(2002), A4시동인회장, 시집 『고로쇠노동조합』 , gunjuno@hanmail.net
옥잠화
김 금 분*
흰 피가 솟았다는 목을 기억하는지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삼악산 기슭에
옥잠화 활짝 피어 향기 가득 채운다.
북한강이 흐르고 경춘선 지나가는
저 건너 강촌역을 내려다보며
초록 철대문집 혼자 여닫는 여자
먹는 것이라곤 산이슬밖에 없는데
팔십 넘은 열 손가락 굵은 옹이로
토종알, 산수유, 보리수 열매 경작하여
한 아름씩 안겨주는 지락헌 산보살
그녀 생의 쓴 맛을 세월로 거두어
내게는 혀끝마다 달콤함이 묻어나는 선물
오늘은 하얀 옥잠화 숲에 묻혀
女神들 옷자락을 썩썩 베어서
물 뿜은 신문지로 말아
반역투성이 내 항아리에 성화를 꽂으신다.
* 강원도 춘천 출생, ≪월간문학≫신인상, 강원문학상 수상(2002), 시집 『화법전환』 , 『사랑, 한 통화도 안 되는 거리』 등,
kgb7270@hanmail.net
숲에서 길을 잃다
김 재 룡*
숲속으로 비가 지나가고
가끔 서늘한 운무도 지나갔다.
젖은 나무 가지가
툭툭 끊어지는 소리도 지나갔다.
가끔 바람이 숲을 흔들며 지나가고
깊은 적막강산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 가는데
길을 잃었나보다.
수렴동이 가까운 곳인지
오세암 쪽으로 가는 길인지
봉정암을 향해 오르는 길인지
되돌아서 영시암 쪽으로
내려가는 길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발을 헛딛다가 미끄러지는 순간,
젖은 산죽 아래 홀연히
민달팽이 한마리가 보였다.
길 잃은 한 인간과 아무 상관없이
길 잃을 일이 없는 민달팽이가
산죽 그늘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춘천 - 섬
안개가 스며들기 시작하는 길을 따라
우리들은 동부시장으로 간다.
지하주차장 옹색한 현대식당,
반들반들 길이 든 번철에서
미끌어지기도 하고 뒤집어지기도 하며
굵은 소금이 덧뿌려진 생두부는 익어가고
동태의 토막과 내장, 곤이가 가득한 냄비는
설컹설컹한 무우와 함께 부글부글 끓는다.
맑은 술잔을 부딪치며 털어 넣기도 하고,
매운 고추를 숭숭 더 썰어 넣은 뽀그리장을 발라
호박잎쌈을 한입 가득 우겨넣으면,
남루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언뜻언뜻
어깨너머로 들려오기도 하겠지만,
머물러 있는 생에 안심하기도 한다.
그렇게 살아 온 것들은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되기도 하다가, 마주한 눈시울에
촉촉하게 맺히기도 한다.
드디어 우리들은 봉의산 가는 길이며
고슴도치섬을 함께 돌아다니다가,
멀어지는 길에 당신을 떠나보내고
후평동이나 석사동, 학곡리나 거두리로 스며들어,
안개 속에 외롭게 떠 있는 봉의산과도 같이,
깊은 기다림의 섬이 된다.
* ≪심상≫으로 등단(1985), rea1jr@chol.com
장날
김 창 균*
파장 무렵 장에 간다.
이 골목의 끝에는 어물전이 있어 좋고
저 골목의 끝에는 국밥집이 있어 좋다
어느 날은 뜨거운 수건을 얼굴에 덮고 누워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 날도 있다.
늙은 애비가 또
그와 같이 늙어 가는 아들과 마주앉아 낮술을 마시는
국숫집에 들어 국수를 먹기도 한다.
국숫발처럼 팅팅 불은 말씀들이 귀떼기를 치고
나는 코를 훌쩍이며 천천히 국수국물까지 먹는다.
그리고 파장 무렵 골목 끝에서 본
냉동 가자미나 청어나 명태 이런 것들을 생각한다.
이런 날은 오랜만에 만난 이들처럼
서로 옷소매를 잡아끌며 파장토록 장터를 기웃거리는데
천방에선 이슥토록 늙은 염소가 운다.
울음이 길다.
봄 산, 죽비소리
아직, 아직
일주문 밖은 푸르고
일주문 안은 겨울 빛으로 검은데
얼마나 세차게 죽비로
앞산을 내리쳤으면
일주문 밖은
어깨가 아프도록 푸르른가
푸르게 멍드는가
* 강원도 평창 출생, ≪심상≫신인상 당선(1996), 시집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muin100@hanmail.net
만해마을 ․ 퇴고
박 기 동*
원고 보따리를 들고 만해마을에 들었다.
평소 소원이라고 했던 여기에 왔다.
첫 날 저녁, 원고 몇 개를 읽어가다가 딱,
그것도 새벽에 딱
내 스스로에게 사기친 게 아닌가
잘못 살았다 시인이랍시고 잘못 살았다.
뼈 속으로 용대리 백담사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새삼 소스라쳤다.
길
길이 길을 낸다. 바람이 길을 낸다. 누가 누군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보인다. 길에 업혀간다. 길에 얹혀간다. 길을 따라간다.
먼저 간 사람을 따라가면 길로 가는 것이다. 따라가기만 하면 안전한 길이다. 맨 처음 이 길을 간 사람을 일러 이슬떨이라고 한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을 떨어버리며 가는 사람, 바짓가랑이 다 젖겠다. 길이 길을 낸다.
길이 길을 낸다. 기억이 길을 낸다. 추억이 길을 낸다.
길을 따라간다.
먼저 간 사람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한사코 생길을 파고 가는 사람이 있다. 눈보라가 그친 후 모든 길은 최초의 길이다. 이 눈보라 그치고 나면, 어디로나 가면 된다. 산지사방에서 솟아오르는 새싹, 오월의 꽃 무더기, 길이 막혀 길이 터진 것이다.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땅심으로 밀어올린 것이다. 길이 길을 낸다.
* 강원도 강릉 출생 ≪심상≫으로 등단(1982), 시집 『어부 김관수』, 『내 몸이 동굴이다』, 『다시, 벼랑길』등,
phdong@kangwon.ac.kr
비가 내렸다, 비가
유 문 호*
어디가 출발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날
쨍쨍한 날
낮게 걸려서 흔들리고 보니
길 위였다, 그 길 위로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소주 몇 잔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
쭈그리고 앉아있는
늑골을 따라 빗물처럼
길들이 흘러내렸다
꿈과 노래와 여자와 폭풍과 침묵 그리고
삭아가는 등뼈 하나
이 길 어디쯤
그리운 집은 있는 것일까
오래된 질투
이상한 일이다.
가슴이 자꾸 아픈 게 아무래도
내 내부에서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말 못하고 쌓아둔 마음들이
캄캄한 가슴에서 새가 되었나 보다.
갇힌 그 새
죽어가나 보다.
아픈 가슴
꾹꾹 누르며
나 혼자 바라보던 달을
창문에 걸어놓고 들어와
잠이 들었다.
깊숙한 밤 누군가
나를 부른다.
유령처럼 일어나 더듬거리는 발걸음으로
마당엘 나가보니
새가 되어버린 내가
날개를 벌려 달을 끌어안고
흘러가고 있었다.
* 강원도 춘천 출생, ≪하이텔≫ 문학상 및 ≪오늘의 문학≫ 작품상 수상, 시집 사랑, 지나가다등, poemway@naver.com
만월을 담다.
조 성 림*
흐드러지게 옷고름 풀던 복사꽃도
벌써 산 너머 간지 오랜데
우연한 길 과수원 옆에서
봉긋봉긋 올라와 키를 높이고 있는 살빛 복숭아들
한 바구니 샀다.
여인의 향기였을까.
향기가 흠칫 뛰어들어 코끝에
그리고 가슴 어디까지 훑고 지나갔을까.
순간 내가 망설이기 시작했으니
그 푸르딩딩한 자식들도 내가 한눈을 판 새
잎새 아래서 얼마나 상처로 기다렸을까.
누구도 눈을 주지 않던 세상을
잎사귀는 바람의 노래로 또 얼마나 달랬을까.
아내는 까칠하다고 껍질을 벗겼지만 나는 왠지
그 까슬까슬한 보풀까지 사랑스러워졌다.
그 상처들도 익을 수 있다니
어머니 햇살 좋던 여름날 다 익으셨는지
고개를 넘으셨고
거기 滿月이 가지마다 무수히 달렸다.
저 향기로 일렁이는 바다
군데군데 심하게 앓았는지
꺼멓게 병든 부분도 가슴에 단단히 박고 있었으니
저녁놀 속살 깊이 실핏줄로 번져가는 울타리
꺼먼 봉지에 둥근 만월을 그득 담고
농부의 거친 심정도 덤으로 더 넣는 것이었다.
아, 산수유꽃
우리학교 1학년엔 옥구슬 같은 다옥이가 있네
그녀는 근수축증이 진행되고 있고
휠체어에 늘 앉아있어 전교에서 제일 얌전하네
다소곳한 그녀는 수학도 아주 잘 하네
움직이는 것을 빼곤 빠짐없이 잘 하네
다옥이 어머니는 다옥이 그림자라네
화장실 때문에 하루 종일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네
딸의 수업시간에도 가만있질 않네
계단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철학에세이를 읽고
아마 나는 다옥이 어머니를 철학자라고 생각하네
내 몸은 뜨거워지고
창문에 붙어있는 산수유나무도 몸이 뜨거워지는지
어쩔 수 없이, 어쩌지 못하고
구슬 같은 꽃눈들로 불지르고 있네
아, 산수유꽃!
* 강원도 춘천 출생, ≪문학세계≫신인상 수상(2001), 춘천문학상 수상(2006), 시집 『지상의 편지』,『세월정류장』등,
아버지와 딸
-To Michael Dudok de Wit
한 승 태*
그의 자전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 누구나
지나야하는 방죽에는 높디 푸른 봄의 행진
페달이 힘겹던 언덕도 아름다워라, 그의
앙다문 치아처럼 가지런히 늘어선 포플러 그
하늘과 맞닿은 뿌리에서 솟아나온 심연
다리를 놓듯 강 건너로 길게 늘어지고
강변에서 포옹하고 못내 돌아서던 나룻배를 그를
그의 뒷모습을 물소리는 오래도록 배웅했으니
구름은 몸을 바꿔 가며 흘러가고 흘러왔지만
비의 냄새는 풍성하게 그를 돋아나게 할뿐
한 떼의 여학생들 자전거는 희희낙락했으며 폭풍은 불어오고
심연은 강폭만큼 더 깊고 더 길고 더 넓어졌으니
어쩌면 포플러는 그를 연주하는 손풍금 같았으리
바람은 쓰러지듯 자꾸 오던 길로 밀어주었으나, 그를 닮은
아이들은 또 강변에 와 손을 씻고 점점 포플러에 가까워져
나무만큼 키는 자랐으나 밤길을 혼자 가는 거와 같아서
다만 쓰러지는 자전거를 몇 번이고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어린 포플러를 키우며 그의 그림자는 커가고
더욱 완곡하게 갈대는 자라고 종달새는 모래알 같은 울음으로
그렇게 지는 석양을 방죽은 오래도록 지켜보았던 것이다.
종내에는 두 바퀴의 균형이 힘겨워져 가는 날도 있어
한그루 나무가 되어서야 강을 건넌다는 것이 어느 날
난파한 아버지의 나룻배를 발견하는 일 같아서
하늘에는 또 어린 딸의 자전거 바퀴가 딸랑대며 구르고
낙엽은 방죽을 따라 오래 뒹굴어 가는 것이다.
비낀 사랑
먼 가을 구릉들이 봉곳하고
구름은 젖꼭지를 세운다
철새들의 길을 황사가 급히 지우고
내몽고의 모래무덤이 통째로 날아온다.
온통 비 맞고 돌아온 유년
까맣게 마른 깻섶으로 아랫목을 덥히고
내 배꼽과 성기에서 배어나던
햇볕 졸은 냄새를 따라
낙숫물로 튀어 오르던 너의 생각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자작나무 가지를 두드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나 사랑으로 쫓겨난 알타이 무당
신神들의 계곡, 햇살 빽빽하게 들어차
까마귀 소리 자꾸 날 따라오고
사슴뿔에 새겨진 옛사랑의 얼굴도
분분히 떨어져 내리는 것이다.
* 강원도 인제 출생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1992),≪현대문학≫ 신인상(2002), hanst68@dreamwiz.com
정체는 꿈이다.
허 림
숲으로 들어서는 길에는
숲으로 든 새들이 잠을 잔다.
새들은 새들의 꿈을 꾸고
나무는 나무의 꿈을 만지다가
기억마저 희미한 달빛에
머리를 묻는다.
어둠은 숲의 푸른 가지마다
수만의 이슬을 내걸고
미처 하지 못한 말들 발화한다.
나는 꿈만 불안하게 만지작거린다.
실타래처럼 얽힌 꿈
내게 오는 꿈이란 입 속의 혀처럼 익숙하지만 안개처럼 묘연하다.
이 보이지 않는 꿈의 끝자락
사랑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한 뭉터기 꿈 내안으로 침몰한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그대와 헤어지고 나서 강가에서 나는 서성거렸다.
물결의 악보 위로 조곡 같은 바람이 흘러왔다.
물과 물 뒤섞이는 소리 발끝에 젖고
눈빛이 저녁 햇살이 잠시 붉어졌다.
강물 따라 흘러가는 노래는 조금은 슬프리라.
강에서는 고기들이 햇살을 마시려 뛰어오르고
물 속 돌들 자갈자갈 모난 가슴을 씻어 내리라.
물의 풀 결을 간질이며, 노래처럼 흘러가고
그대는 이미 떠났고 푸른 저녁이 왔다.
랩소디 같은 나직한 물의 노래가
물결의 악보위로 겹쳐져
흰 모래밭 발자국 마다 소복소복 쌓였다.
모래 속에는 영혼이 눈을 뜨고 반짝이고
밤이면 손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리라.
나는 사랑에 귀가 멀고 눈이 멀었지만
나는 노을강가에서 그대의 이름을 부르며 흘러갈 것이다.
바다까지 흘러가 섬이 될 것이다.
그대는 이 강을 따라 떠났고
물결처럼 남은 사랑만이
내 가슴에 와 뒤척인다 은밀하게
상처 속에 남아있는 고독은
미루나무 숲 그늘아래 서성이게 하리라.
밤 새 울음이 적막하게 둥글어지고
나는 나무의 저쪽에서 또는
물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를 듣는다.
내 사랑은 아직도 강가를 서성인다.
* 강원도 홍천 출생, ≪강원일보≫신춘문예 당선(1988), gjfla@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