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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시의 시적 논리 따라가기
김 택 중*
1.
시에 대한 기본적인 논리를 통해 시인에 대한 논증을 시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시는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서안나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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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서안나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시를 써야 한다.
2.
아래 작품을 추론 해 보면 ‘립스틱의 발달사’에서 고대에서 부터 내 곁에 있는 당신에게 까지 이르는 시간의 논법은 오류가 있다, 혹은 없다.
립스틱의 발달사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보석을 갈아
눈과 입에 발랐다
립스틱의 기원이 되었다
고대인들은 빛나는 눈과 입술로 별에 닿고 싶어 했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러므로 날개는 별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내 눈과 입술에
별이 뜨고 날개가 돋는다, 란 논법엔 오류가 없다
클레오파트라는 딱정벌레와 개미 몸을 짓이겨
입술을 칠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입술에 굶주린 곤충들이 날아들었다
여인의 입술을 위해 쉽게 목숨을 버렸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립스틱은 빛난다,
는 문장도 용서될 수 있다
당신이 별을 바라볼 때 애잔해지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선 욕망의 얼굴과
잠시 마주쳤기 때문이다
욕망은 순결한 육체를 천천히 날아올라
별들 사이에서 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침마다 당신의 입술에 날개를 그려 넣는 것이다
입술을 칠하며 별을 건너는 것이다
당신이, 반짝인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화장을 했다. 화장을 어디에 했는가? 눈과 입에 했다. 무엇을 가지고 했는가? 보석을 갈아서 했다. 왜 했는가? 별에 닿고 싶어서 했다. 보석과 별은 빛이 나는 것에 따른 유사성에 의한 관계, 눈과 입술에 보석을 바른 고대인들은 따라서 별에 닿고 싶어 한다.
별에 닿기 위해서는 지상에서 하늘에 있는 별에게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날개의 존재는 보석과 별의 동일성에 근거한 보석을 바른 눈과 입에서 태어난다. 혹은 하늘의 별에서 태어난다.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는 어떻게 화장을 했는가? 특히 입과 눈에는 무엇을 발랐는가? 딱정벌레와 개미를 짓이겨 발랐다. 그 후 굶주린 곤충들이 그녀의 입을 향해 날아와서 다 뜯어 먹어 그녀는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보석과 같은 눈과 입은 별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별을 바라볼 때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고 욕망이 생기기도 하는 것은 고대인들의 눈과 입술, 혹은 클레오파트라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순결할 수 없다. 단지 그 육체의 순결을 타고 넘어서 욕망하다 별이 될 뿐이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은 우리들의 눈을 통해 반짝이는 욕망과 마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침마다 그린 입술은 욕망하면서 어딘가에 존재하는 별을 찾아가기 위해 날개를 그리는 것이고, 그 날개는 욕망하면서 스스로 별이 된다.
사람들의 눈과 입이 반짝거린다.
하늘에 별도 반짝거린다.
아름다운 클레오파트라의 눈과 입도 반짝거린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과 입은 욕망하는 곤충들이 뜯어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목숨을 버리고 반짝이는 욕망만 남았다.
욕망은 날아다니다가 하늘에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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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신의 욕망도 별처럼 반짝인다.
3.
시적인 논의는 몇 가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시의 주제를 선택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전달과정이 전제 되어야 한다. 물론 상상력에 의한 시적인 요소의 객관화가 그것인데 구성 요소들 간의 긴밀한 관련성을 유지해야 한다. 상상력에 근거한 전제에 해당하는 것들의 상호 관련성은 시적주제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것들 간에 팽팽한 긴장을 유지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이 발현되는 경우 시적인 감동이 더해진다. 만일 시적인 감동이 독자에게 점점 떨어질 때에는 전제의 진실성에 대하여 의심을 해보아야 한다. 전제의 진실성이 사라지고 거짓된 것들로 이루어졌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개기일식
한 입술이 한 입술과 겹쳐진다, 물뱀처럼 캄캄하다, 한 남자의 입술이 한 여자의 캄캄한 사랑을 누르고 있다
맞은편의, 불붙는, 더듬거리는, 건너가는, 멈추는, 걸어가다 멈추는, 뼈를 감춘, 입술만 남은, 내가 잡지 못하는, 뒤돌아서는, 등 뒤에서 깨무는, 피처럼 붉은, 당신이란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는 조금씩 사라졌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 눈과 코를 지우고
형용사처럼 혀를 버리는 것
사라지는 여자의 눈썹이 서늘하다
어느 쪽이 슬픔의 정면인지
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이마
당신과 내가 삼켜버린 낡은 입술들,
한 입술과 한 입술이 쌓인다,
고요하다 입술들은,
울음과 울음이 겹쳐진다,
캄캄하다
시적인 상상력이 개기일식과 결합되면서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에서 삶의 의미로 다가간다. 자연적인 현상은 자체로의 의미 이외에는 없다.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원인과 그것의 결과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시적화자의 지배적인 감정이 이입되면서 그의 의미는 존재에 이유가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대상인 해와 달의 겹침 그리고 사라짐의 관계성은 “한 입술이 한 입술과 겹쳐진다”로 재현된다. 시적 상상력에 의한 현상의 동일성에 근거로 관계가 유지되는 단계에서 사랑이라는 의미가 생성된다. 겹침이라는 현상과 사라짐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관계의 산물이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원인의 중요성 보다는 결과에 의미가 확대되어 재생된다. 둘의 관계 때문에 겹침이 결국 누군가를 사라지게 한다.
남자와 여자가 ‘개기일식’으로 “한남자의 입술이 한 여자의 캄캄한 사랑을 누르고” 사라진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 눈과 코를 지우”는 일이다. 눈과 코의 지각과 감각이 사라진다는 것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누구인가 좋아한다면 몸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또 다른 대상이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하루가 백년 같이 뜨거워진” 사랑의 결과는 사라진다는 슬픔을 동반하고 울음으로 겹쳐진다.
서로의 겹침은 사라짐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한 겹칩이나 누구를 위한 겹침이 아니라 자연스런 끌림에 의한 겹침이다. 두 대상의 겹침에서 사라짐과 욕망의 대상으로서 삼켜버린 입술의 “울음과 울음이” 겹쳐지면서 캄캄하게 사라진다.
해와 달이 겹쳐진다.
개기일식이 시작되었다.
너와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너와 나는 겹쳐진다.
너와 나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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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슬프게 사라진다.
4.
아래 시는 공간과 공간의 소통방법 논의한다. 집의 거실과 베란다의 공간의 분할 방법에 가로놓인 거실문은 대상의 확장은 물론이고 축소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집의 존재에 따른 구체적인 공간의 인식을 통해 구체적인 장소로 동일시된다. 공간과 장소가 곧 시적자아의 사랑에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베란다
거실문을 열고 닫을 때
열림과 닫힘의 관계를 생각한다
나는 문, 그는 베란다
나는 그의 안에 있고, 그는 나의 밖에 있다
나를 열면 그는 반쯤 내가 된다
나를 닫으면 그는 마술처럼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정작 그가 사라진 건 아니다
내 두 눈이 그를 밀어낸 것뿐이다
나를 떼어 내면
그는 바람 잘 통하는 훌륭한 거실이 된다
그와 나는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바람만 남는다
내가 사라진 것도 세상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사랑의 밖이며 안이다
문을 열고 닫는 일
어쩌지 못해 혼자 생각에 잠기는 일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사람을 향해 뻗어가는
퇴화식물 뿌리 같은 캄캄한 눈동자
사랑아,
문에 접질려 피멍 든 손가락으로 어디서 울고 있는가?
그의 집은 시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시적인 대상으로 거실과 베란다가 존재한다. 그의 시적인 상상력이 생물이나 무생물의 관계를 벗어난 공간의 인식까지도 시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시적자아의 시적대상에 대한 확장된 상상력은 이미 우주의 현상인 ‘개기일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연적인 질서나 현상은 물론이고 공간상의 배치와 관계 맺기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의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그의 시적인 대상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로 설정된다.
거실문의 열림과 닫힘의 관계는 가까이 다가가기 혹은 겹침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교류한다. 따라서 시적인 자아와 늘 열고 닫을 수 있는 문과 같은 존재이다. 현실적으로 실현 될 수 없는 욕망의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이 ‘있다’와 ‘없다’로 나타난다. 현실에서 허용될 수없는 욕망의 대상은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버린 사라짐이다. 억압된 무의식의 표출은 의식의 느슨한 틈을 비집고 의식을 넘어서 존재하다가 강한 의식의 통제를 통해서 “나를 닫고 그는 마술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현존재의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의 욕망은 결국 자아에 의해서 생겨난다. 베란다를 가로 막는 문은 거실과 배란다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시적자아는 전제한다. 시적인 관계의 중심에 있는 나를 떼어낸다면 “바람이 잘 통하는 훌륭한 거실”이 될것으로 생각한다. 문이 없다는 것은 너와 나의 경계는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바람만 남는 것이다. 즉 소망하는 바람만 남는다. 그래서 시적자아와 대상과의 관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는 바람 잘 통하는 훌륭한 거실이 된다/그와 나는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바람만 남는다/내가 사라진 것도 세상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사랑의 밖이며 안이다”.
거실문의 열림과 닫힘의 관계를 생각한다.
나는 문이고 그는 베란다이다.
나는 안에 있고 그는 밖에 있다.
나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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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랑은 밖이며 안이다.
5.
시간은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 속에 현재는 없다. 그러므로 그는 사라진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의 ‘상사화’ 속에는 삶의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면 그는 상상력을 통해 욕망의 실현가능성이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
-상사화相思花-
꽃은 과거와 미래의 나의 사랑을 증명한다
내가 지상에서 사라질 때
당신은 꽃이란 이름으로 당신에게 도착한다
없는 나는,
있는 당신을 향해 손을 내민다
당신에게 내미는 나는 이미 지워진 손
그러니까 나는 많이 낡았고
뿌리와 줄기의 초록은 숨을 참아왔던 거다
당신은 긴 목을 힘껏 뽑아 올려
제 얼굴을 찢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제가 불러놓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그 무게로 서서히 몰락하는
사람들이 천천히 밥을 먹는 저녁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은 다리가 없다
그대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실컷 울고 나자 당신의 얼굴은 가벼워졌는가
나는 당신 쪽으로, 당신은 사라진 나를 향해 걸어온다
그렇게 스쳐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나는 얼굴 이전의 얼굴
기다림 밖의 얼굴
당신과 나는, 잊혀 진 우리의 1/2
꽃 진 자리 시끄럽다
당신, 뿌리로 스며드는 얼굴
상사화 꽃이 피었다. 그런데 내 몸이 사라진 후 “당신은 꽃이라는 이름으로”도착한다. 나는 존재하다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에 대하여 대립적인 관계의 설정은 상사화라는 독특한 꽃을 통해서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서 대리하여 나타나는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는 늘 엇갈림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시적대상을 향해 존재하는 나는 있다 없다. 그리고 ‘없는 나’는 모순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나는 없지만 주체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있는 당신을 향해서 손”을 내밀 수 있다. 그런데 “당신에게 내미는 나는 이미 지워진 손”이다. 그러면 시적화자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곧 그의 욕망은 사라진 것이다.
시적 대상은 꽃이다. 그 꽃은 지워진 나를 두리번거리며 찾고 있다. 그러다 “서서히 몰락 한다”. 여기서 시간의 순서는 모순을 포함한다. 시적화자와 대상이 간절히 원하는 그 시간에 그는 사라지고 없다. 주체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의 존재는 사라진다. 특히 인간의 성장과정 중에 존재와 인식은 늘 엇갈리는 상태에 놓인다. 예를 들면 자식은 부모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모는 존재하는 것이고, 자식은 부모의 존재를 인식하고 나면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은 늘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를 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적인 자아의 인식에 한계는 시간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화자는 “당신을 쪽으로”오고, 시적인 대상은 “사라진 나를 향해서 걸어온다” 그런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스쳐갈 뿐이다. 그래서 기다림은 늘 부조리한 1/2로 남는다.
내 몸이 사라진 뒤 상사화가 피었다.
내 몸은 존재하지 않지만 꽃을 원했다.
꽃은 존재하지 않는 내 몸을 찾다가 서서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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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당신과 나는 기다림 전에 얼굴로 그렇게 스쳐지나간다.
6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한다. 나와 당신은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무한의 존재이다. 그런데 그것은 찰라 이거나 순간이다.
탕진의 내력 2
사방 4킬로미터의 바위를
손바닥으로 쓸어 닳아 없어지는 게, 1겁이라면
등 뒤로 손을 뻗어 당신의
브래지어 후크를 풀 때, 1겁의 시간은
이미 흘렀다
처녀인 당신이 부끄러움도 잊은 채
사방 사십 리 돌산을
비단치마로 문지르다
당신이 먼저 닳아지는 것이, 1겁이라면
피가 도는 바위 안에
뜬 눈으로 고여 있던
나는 이미 손바닥이 다 닳은 사내,
깨어진 눈동자로 잎담배를 피우며
낙타를 타고 가는
비단치마가 다 해어진 계집, 당신은
연꽃으로 피어
유목의 흐린 꿈을 우린 오래도록 꾸었지
어디까지 왔는가 당신은?
두 얼굴이 동시에 묻는 말, 대답하는 말
그러다 입술이 푸르러지는 더딘 사랑
나는 두어 번 더 죽을 것이다
시적 자아가 손을 뻗어 대상에게 다가가는 것이 1겁이라면 “브래지어 푸는 시간에 이미 1겁의 시간이 지난다. 그리고 시적자아가 1겁의 공간의 점유하고 있는 바위를 비단치마로 문지르다가 그 자신이 달아 없어지는 시간도 1겁이 된다.
우리는 시간의 영속성을 말하면서도 주체의 영속성에 관한 것은 말한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의 시간의식은 주체적인 시간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이제까지의 자연적인 시간에 결부된 부속적인 인간의 존재의 의식에 대하여 허무적인 시간을 반영하고 있다면 위에서 시적인 자아는 존재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시간의식을 갖고 있다.
시적 자아는 주체적인 시간의 의식을 통해 겁의 인연설에 억매이지 않는다. 시적자아가 곧 피가 돌고 살아 있는 사방십리의 바위산이며, 그는 곧 바위를 문지르다가 손바닥이 다 닿아 없어진 존재이다. 그의 시적대상인 그녀 역시 “낙타를 타고 가면서 비단치마가” 다 해어지도록 기다리고 있다. 시적자아는 대상과 ‘닿기 위해서’ 기다리는 동안 ‘유목민의 흐린 꿈’도 꾸었지만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그런 존재이다. 시적자아의 존재의식은 결국 누가 누구에게 ‘닿는다’는 것은 인류의 시작 그 아득한 시간과 공간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다. 나의 존재에 대한 현재는 곧 조상들의 존재를 넘어선 과거의 산물이다. 따라서 시적자아의 현존재는 아직도 미래의 현존재를 기다리고 있다. 때문에 당신에게 가는 더딘 사랑 때문에 두 번은 더 죽을 필요가 있다.
피가 도는 바위 안에서 1겁의 시간을 기다려 당신에게 가고 있다.
그녀 역시 1겁의 바위를 문지르며 돌다가 치마가 다 해어진 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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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서로를 기다리는 동안 인류가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두 번은 더 죽어야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감성으로 빚은 언어의 연금술
- 이장희 시집『푸른 날들은 많지 않지만』
이 대 영
Ⅰ. 들어가며
문학의 경계를 허물며 숨 가쁘게 논의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들이 이제는 앙상했던 골격에 제법 살집이 붙어 있는 형국이다. 거칠었던 이론과 무성했던 말싸움도 이제는 숨고르기에 들어선 듯 조용하기까지 하다. 생태주의, 페미니즘, 칙릿, 일상성에 대한 논의들이 여전히 탄력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 이론들도 세분화 되어 이념의 돌담 쌓기에 여념이 없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언어를 다듬는 소리에서 느끼는 것은, 그동안 빈 가슴으로 언어의 두레질에 오랫동안 매달리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애써 퍼 올린 언어들이 오히려 우리의 감성을 압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른 언어로는 황량한 대지를 촉촉이 적실 수 없다는 소박한 진리를 새삼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는 한국평단에서의 이론과 논쟁의 부재현상을 자성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와중에 ‘다문화주의’와 ‘미시문화사’에 대한 담론들이 우리의 시선을 불러 모으고 있기도 하다.
정말, 거대담론과 체제들은 무너지고 있는 것일까? 민중시와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면 80년대 문단에서 거세될 것 같았던, 도시시와 해체시가 아니면 90년대 문단에서 뒤질 것만 같았던, 생태시와 페미니즘, 일상성에 대한 관심을 탄력 있게, 더 강하게 외치지 않으면 평론의 서열에서 밀릴 것 같았던 상황에서 우리는 근대문학기 만큼이나 거칠게 문학마당을 펼쳐온 듯하다. 거리의 뒷골목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안채의 살림도구들을 현시하기까지, 일상성 또는 미시적 사고가 우리의 감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만큼 거대담론이 미시담론으로, 체제 또는 이념지향의 시각이 인권 또는 존재 중심의 사고로 전환 되고 있는 예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문학의 경직성과 팍팍함에서 벗어나 전통적 시정을 토대로 언어를 빚고 있는 작가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문학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그 가슴은 청명한 하늘과 옥향을 담을 수 있는 성정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언어꾸러미를 상기하면서 토담골 가객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언어를 통해 청명한 시심과 감각적 서정을 전달하고 있는 이장희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이장희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푸른 날들은 많지 않지만』은 그동안 시인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서정시의 영역과 그 깊이를 확장해 가고 있는 작품집이다. 제1부는「시간의 정원에서」, 제2부는「그 어려운 주소」, 제3부는「까치재 산바람」, 제4부는 「영농일지」, 제5부는「수아야, 하연아 뭐하니?」, 제6부는「계림으로 동경으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푸른 날들은 많지 않지만』에서 이장희 시인의 작품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언어의 연금술, 그 역동성
이장희 시인의 작품들은 평자들에 의해 ‘살아 있는 소묘’로 언술되어 왔다. 이는 시인이 지닌 감각적 능력과 풍부한 서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명쾌한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미지화 하는 작가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시평은 적절한 것으로 보여 지며, 앞으로도 이장희 시인을 평하는 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식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소묘’라는 용어로 평하는 것이 적절한 가에 대해서는 생각을 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시가 선명한 색채와 더불어 살아 움직이는 언어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감성적 언어를 통해 자연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연금술사와 같은 마력을 보여주곤 한다.
제1부「시간의 정원에서」와 제3부「까치재 산바람」은 이러한 시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봄비가 내린다/하얀 레이스 속옷 사분대며/앞산에 내린 구름이/뽀얀 맨살을 씻는다//흙 속으로 물이 내려/캔버스에 스미면서/노오란 유채꽃이/무더기로 피어난다//하늘 향한 옥향/쭈빗쭈빗 초록 머리칼 세우고/낭자하게 코피 쏟아버린/동백 꽃//다시/바람처럼 쓸어가는/빗줄기//어른거리던 시간이 사라지고/보이지 않는 어떤 나무의/물색 옷자락
-「봄비」전문
안개가 내리고 있었다/진초록 솔밭 위로/잠자리 옷을 벗으면서/하늘이 내리고 있었다//천태산 흰 머리카락이/풀려나가며/엉겅퀴 맺혀있는 보랏빛 꽃술이/이슬을 물고/참나리 새벽 얼굴이/사랑의 눈을 뜬다//산발치 계곡물에/새소리가 떠내려가고/먼 길 돌아온/오솔길은/다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당골 산발치」전문
포플러 줄지어 걸어가고 있는/허옇게 얼어붙은 강 위/물들어 가는 들녘 끝에서/기러기 몇 마리/저녁 햇살을 물고 있고/늦은 바람도 따라와 뒹굴고 있다//초가집 둘러싸고 몸을 비트는 대나무/무덤가에는 하얗게 손을 흔드는 억새/먼 산 위에 걸터앉은 저녁놀과/길게 허리 걸치고 있는 구름/비행기 하나 지나가며/그리는 비행운
-「그 강의 풍경」부분
우리는 이 시들을 읽는 동안 역동적인 언어로부터 유로되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독자는 생동하는 몸짓과 울림이 스민 수려한 풍경들에 넋을 잃고 시어의 미감에 빠져든다. 그 생동하는 풍경은 하늘과 땅이라는 이원적 구도 하에 언어로 그려지고 있으며, 역동적인 사물들은 저 마다의 색채를 드러내게 된다. 그 사물은 자연물이며 자연물은 단순한 사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작가의 손에 의해 생명을 부여 받는다. 시인의 손을 통해 활유법으로 살아난 언어들은 시적 화자와 교감을 이루는 대상이 된다. 그러기에 이장희의 시어는 진행형을 쓰지 않은 진행형이며, 생명을 지닌 무생물이다.
「봄비」에서도, 흙과 하늘에 각각 위치했던 사물들이 시인의 세계로 들어오면 의상을 입고 생명체가 된다. 시인은 봄비를 내리게 하는 구름의 형상을 <하얀 레이스 속옷 사분대며/뽀얀 맨살을 씻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얀’과 ‘뽀얀’이라는 색채적 이미지와 ‘사분대며’, ‘씻는다’라는 언어의 조합은 이 시의 구조적 특징을 이룬다. 시인은 ‘구름’이라는 단순한 이미지에 채색을 하고 생명을 불어 넣는다. 이에 지상의 유채꽃들이 피어나는 자연의 서정은 그야말로 지상의 유토피아라 할 만하다.
「서당골 산발치」에서 지상과 천상 즉, 하늘과 땅은 인간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안개’는 옷을 벗고 있는 ‘하늘’이며, ‘천태산’의 횐 머리카락이 되며, ‘참나리’는 사랑의 눈을 뜬다. 「그 강의 풍경」에서도 ‘포플러’가 줄지어 걸어가고, ‘바람’이 뒹굴고, ‘대나무’는 몸을 비튼다. 또한, ‘억새’는 손을 흔들며, ‘저녁놀’은 산 위에 걸터앉고 ‘구름은’ 길게 허리를 걸치고 있다.
시인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에 채색을 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전능한 언어의 연금술사인 셈이다.
Ⅲ. 별리, 무겁게 가라앉는 비애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일수록 비극을 대하는 감정의 폭도 크기 마련이다. 하늘과 땅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 생명의 언어를 불어 넣는 연금술의 매력 뒤에는 한없이 추락하는 생명의 비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늘과 땅을 이원적 구도로 하여 시를 쓰는 작가에게 ‘별리’의 감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지상과 천상의 거리를 메우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사이에 ‘생명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음의 내용물이 없어졌을 때 작가가 느끼는 지천의 시적 거리감은 ‘상실’ 이상의 감정으로 수용된다.
낯선 도시/숨 돌릴 새 없었던/전세방 전전의 나날들/생활에 쫓겨따뜻한 말 한마디/나누지도 못했는데/이제 정든 집을 떠난다니//가을 새의 울음소리가/다시금 명치끝을 저미게 한다/저물어 가는 황혼/조용히 흘러가는 한 조각 구름.
-「추운 삶의 기슭」부분
벽제 화장터/티없이 쪽 빛으로 푸른 하늘/한 줄기 연기로 빨려드는/이승의 끈//가을 쓸리는/산 아래/이름 없이 나부끼는 바람
-「별리」부분
수아가 없는 집은/텅 빈 산채 같다/57㎝ 6㎏에/두 달 밖에 안 된 아기가/차지한 면적은/이렇게 컸을까?
-「빈집」부분
「추운 삶의 기슭」은 큰 딸 ‘수강’을 떠나보내며 느끼는 아버지의 부정을 담은 시이다. 가정을 꾸려 큰 절을 하고 떠나는 딸의 모습을 보며, 시인은 <이를 옥 물고 허공을 보았다>고 고백 한다. 그러면서 <허허 벌판 그 춥던 초임지>에서의 ‘냉골 방’ 생활과 ‘가마니 부엌생활’의 시린 추억, 그리고 낯선 도시에서 ‘전세방’을 전전하느라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음에 가슴을 저민다.
「별리」,「흑백 사진으로 남다」,「어려운 주소」등은 동생의 죽음을 시화한 작품 들이다.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 벽제에서의 화장, 일산 ‘청아공원’에 영혼을 안치하면서 느꼈던 비애를 담은 시이다.
시인은 동생의 부음을 접하고 <밥도 술도 먹을 수 없고/눈물도 흘릴 수가 없었다>라고 표현 한다. 영안실에서 <창백한 종이 아래 가라앉은 영혼>을 접한 후 낯선 땅에 그를 안치하고 돌아 와 <동생 이름 한 번 불러보고/눈물 한 번 흘려보고 술 한 잔 또 마신다>.
시집『푸른 날들은 많지 않지만』의 제5부「수아야 하연아 뭐하니?」는 손녀들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담고 있다.「빈집」은 시인의 손녀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만큼 큰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이다. <수아가 없는 집은/텅 빈 산채 같다>는 표현이 이를 대변한다. 또한 제5부에 실려 있는 시들을 읽고 읽노라면 사랑 또는 애정이란 단어와 조응할 수 있는 ‘애틋한’이라는 형용사가 있음에 평자들은 고마움을 느낀다. 그만큼 이장희 시에는 사랑이 근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사랑이 자연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모티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별리의 고통은 시인의 명치를 아리게 한다.
Ⅳ. 생명을 일구는 자리
시인은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생명을 가꾼다. 시인에게 ‘생명사상’이나 ‘생명에의 외경’이란 용어는 불필요 하다. 더욱이 ‘생태주의’와 같은 용어는 평자들에게나 필요한 화려한 수식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시인에게는 시 쓰는 행위 자체가 생명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며, 삶의 보람을 느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시 밖의 세상에서도 시인은 보문산 자락 헌집 빈터를 일구어 소중한 생명들을 가꾸고 있다. 한 마디로 생명을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는 사고와 생활은 그의 일상이다.
헌집 빈터에/수북히 쌓인 먼지를 걷어내고/한숨도 내다버리고/강아지풀 마른 풀잎도 태워버리고//은행나무 거친 가지를 치우고/돌을 캐내고/자갈을 골라내고/시멘트 가난의 조각들을 주워내고/지게 한 바수쿠리에 지워다 버리고/밭을 만들었다
-「산밭 일구기」부분
어느 새 상추는 청춘이다/쑥갓이 여린 꽃대로 꽃을 피울 모양이다/건방진 열무는 어린 녀석이 꽃만 피워댄다/아욱도 닮아간다/우거진 시금치 사이 어린 녀석들도/꽃대만 들고 있다
-「소나기를 맞으며」부분
옛날 추운 양지쪽에 모여/쩍쩍 갈라진 곱은 손 호호 불며 하던/구슬치기/알록달록 했던 미국의 원조 장난감/
산밭에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열매」부분
시인은 보문산 아래의 빈 집터에서, ‘한숨’을 내다버리고 ‘가난’을 걷어 내며 밭을 일군다. 그리고 그 곳에 상추, 시금치, 열무, 아욱 등 생명의 씨앗들을 심는다. 그리곤 자라나는 식물에게서 생명성을 느낀다. 그러기에 열무는 ‘어린 녀석’이 되며, 새싹은 ‘영롱한 손님’이 되며, 아주까리도 ‘여덟 손가락’을 흔든다. 이는 시인과 대상이 생명체로서의 동질감을 갖고 교감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생명과의 교감 이외에, 작가가 밭을 일구는 또 다른 이유는 그 밭에서 자라나는 것들을 통해 과거를 회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새싹 나오네」에서, 고구마를 보며 배고프던 시절에 즐겨 먹던 햇살에 말린 고구마 이삭, 그리고 감 껍질 맛을 떠올린다. 또한「열매」에서, 호박을 통해 구슬치기와 미국의 원조 장난감을 회상한다.
소중한 생명을 일구며 스스로가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시인이 지닌 가족애 그리고 생명존중 사상이 시인의 따뜻한 시심을 이루고, 사물들이 시인의 언어를 만나 생명을 획득하는 아름다운 성장을 우리는 그의 시에서 보게 된다.
Ⅴ. 나아가며
보문산성에서 ‘시루봉’ 으로 가는 길에 작은 재를 넘는다. 대전에 보금자리를 친 지 20여 년 만의 산행이다. 정상을 지척에 두고서도 산 아래 주점에서 노닐던 습관에서 벗어나 작심하고 산을 찾아 나섰다. 바로 이장희 시인이 느꼈던 감정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직접 ‘까치재의 산바람’을 느껴보고 밭에서 움트고 있는 생명의 소리들을 듣고 싶어서였다.
과연 시인이 “이 세상에 보문산 보다 높은 산은 없다”라고 노래할 만큼 대전 시가지가 발 아래 놓여 있었다. 멀리 보이는 회색의 도심을 바라보며, 어쩌면 보문산이 순수한 성정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빌딩 숲을 분주히 넘나드는 군상들을 건네 보며 미소 짓는 보문산성, 아니면 까치재의 산바람과 산사의 불심을 어우르고 있는 시루봉의 누각을 닮았다고나 할까?
나는 이장희 시인을 ‘감성언어의 연금술사’라 명명하고 싶다. 시인은 근원법 또는 이중의 공간 투시법을 통해 사물들을 채색하고 생명성을 부여하는 언어의 연금술사이다.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붓끝에서 작의성의 그림자나 은둔의 처소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 감정의 텃밭에서 언어의 연금술로 일군 생명체의 싱싱한 감각을 맛본다. 그의 시적 공간에는 만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살아 있는 감각은 시적 대상에게서 봄볕의 따사로움을 느끼게도 하며, 인동의 냉 기운 속, 아득하게 추락하는 비애감을 맛보게도 한다. 이와 같은 감각은 그가 싱싱한 언어들을 삶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에너지가 된다.
이장희의 시를 평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허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시인의 작품에서, 우리는 낮게 가라앉는 몇 줌의 언어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언어의 형태소는 지친 삶일 수도 있고 기댈 언덕을 찾는 중년의 무게가 담긴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푸른 날들은 많지 않지만』이란 시집의 제목이 그러한 시인의 느낌을 포괄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향후 시인의 시세계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시인의 청정한 시정과 삶의 연륜이 종교의 힘을 얻어 원숙미를 갖춘 시들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마도 그 시는 감각의 언어로 빚어 낸 가장 잘 익은 작품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