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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무늬를 아로새기는 여행
(윤대녕, 『대설주의보』, 문학동네, 2010.)
박 현 이*
1. 지도를 펼치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다보면 청명한 봄날, 채광 좋고 풍광이 아름다운 집 안마당 평상에 앉아있는 느낌이 든다. 평상 옆으로 살갑게 자리잡은 벚꽃이나 복사꽃 그늘을 벗삼아 햇살의 농담이 화안하게 번지거나 다시금 천천히 잦아들 무렵까지 점점이 새겨지는 주변 풍경을 느릿느릿 감상하다보면, 몸 안 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차오르는 그리움은 시간을 거슬러 아련한 인연의 무늬에까지 닿게 할 것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인연들은 설령 그 농도와 필치가 강렬할지라도 시간에 바래져 잊어지기 쉽다. 그러나 특별한 장소에 아로새겨진 인연은 시간을 초월해 우리 안에 청렬한 기억으로 살아 숨쉰다. 그러므로 윤대녕을 ‘인상주의 화가’에 비유하면서 그의 소설을 “빛의 공간 속에 투영된 에피파니”라고 칭한 평론가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윤대녕이 붓질하는 다양한 여행 장소들은 그의 인물들이 경험하는 감정의 농담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역할과 그들이 살아온 삶의 결을 되살려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장소들은 인물들의 사소한 기억과 만나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기도 하고 매듭짓기도 한다. 대설주의보는 그가 단편 「풀밭 위의 점심」에 등장하는 한 화가의 입을 빌려 말한 것처럼 “기억, 빈집, 그림자”에 관한 소설집이다. 십년 전 그가 펴낸 소설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생각의 나무, 1999)도 기억과 인연,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이었다. 그러나 대설주의보는 인연의 그림자가 머금고 있는 “묘한 울림”에까지 이르고자 하는 섬세한 필치를 보여준다. 지나간 기억들을 원경화하여 단순히 반추하고 감상하는 것이 아닌, 근경화하여 현재의 시간 속에 풀어놓고 곱씹는 과정들은 그의 인물들이 세월의 나이테에 비례하여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깨달아가는 과정에 놓여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에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려놓은 인연의 무늬를 지도 삼아 소설 속 장소를 천천히 여행해본다.
2. ‘학바위’와 ‘백담사’ : 인연의 매듭 짓기와 풀기
「보리」에 등장하는 수경과 그는 해마다 청명(淸明)이 되면 지방 온천(“오랜 옛날 발목을 다친 학이 논에 날아와 몸을 회복하고 다시 소나무숲으로 날아갔다는 데서 유래한 유서 깊은 온천”)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인연의 끈을 6년째 이어오고 있다. 최근 유방암 선고를 받은 수경은 청명보다 앞서 그와 재회하던 온천으로 여행을 떠나 그를 기다린다. 홀로 마주하는 그곳은 그와 함께 한 시간의 흔적들이 새겨진 익숙한 곳이지만 동시에 낯선 곳으로 다가온다. 그와 함께 밥을 먹은 ‘옥이네’ 식당과 중국집 ‘영화은마차’를 차례로 둘러보는 수경에게 그 장소들은 “작년에 찍은 사진을 보듯 눈곱만큼도 변한 게 없었”지만, 그녀는 음식을 반도 비우지 못할 만큼 그곳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두 건물의 풍경 대비는 그녀가 경험하는 낯섦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즉, 재래시장 입구의 육십 년대 풍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 ‘XX극장’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근 40년 동안 변함없이 늘 그곳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건너편에 새로 지어진 5층짜리 ‘XX시네마’ 건물을 보고서야 ‘XX극장’의 존재감을 깨닫는다. 낯익던 풍경이 돌연 낯설어질 때, 그것은 그곳에 있는 변화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변화는 밖이 아닌, 안에 존재한다. 수경의 경우에도 그녀가 느끼는 낯섦은 바라보는 대상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 내부의 미세한 동요에서 비롯된다.
“난 너무 오랫동안 익숙한 길로만 다녔어.” 이러한 동요는 그녀를 산 너머 ‘학암(鶴岩)마을’로 이끄는데, 그곳의 풍경을 천천히 산책하면서 “차라리 500년쯤 묵은 느티나무 옆에 혼자 집을 짓고 살겠어요”라는, 오래전 그에게 내뱉은 말처럼 홀로 서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는 그녀가 생전 처음 가본 학암마을의 풍경을 낯선 여행자로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이는 특히 학암마을의 낯선 미장원에서 그녀가 머리를 자르는 장면과 겹쳐진다. 낯선 다방에서 진득한 커피를 마시고, 낯선 미용사에게 머리를 맡겨 커트를 하고, 우체국 옆 느티나무 고목을 바라보며 얻은 깨달음. 이것은 사소하지만, 관계를 매듭짓기 위한 그녀만의 엄숙한 제의와도 같다.
청명은 이십사절기의 다섯째 절기로 춘분과 곡우의 사이에 위치하며, 대개 양력으로는 식목일과 겹친다. 수경과 그의 청명절 온천에서의 만남은 일 년에 한 번인 만남이었지만 서로의 일상에 생기와 위안이 되는 봄비 같은 만남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수경에게 붙여준 ‘보리’라는 이름은 이들 관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함축한다. 일상이라는 “깜부기 안에 보리”처럼, 그들의 인연이 그러했을 것이다. 수경은 온천 호텔로 돌아와 그와 재회하지만, 연신 손톱을 깎아내고 발톱을 깎아내었듯 그를 비워낸다. “그게 누구든 과일과 칼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움과 원망이 아닌 “청명의 보리” 같은 심정으로 인연을 매듭짓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보리」는 끝내 도려내고 싶지 않지만 도려내야만 하는 수경의 왼편가슴과도 같은 인연의 매듭짓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대설주의보」에도 윤수와 해란이라는 지금은 헤어진 오래된 연인이 등장한다. 과거 얄궂은 오해로 헤어진 그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서로에게 다가서지만, 번번이 시간의 강물 속에 애써 잡은 인연의 끈을 놓쳐버린다. 결혼해 속초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해란의 삶은 잔잔해 보이나 실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수술을 받고 자살기도를 할 만큼 위태해져 있다. 뜻밖의 이별과 돌연한 결혼과 함께 그녀의 삶은 연속성이 결여된 채로 순식간에 흘러간다. 이는 윤수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로 올라왔는데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더군. 말하자면 삶의 연속성이 결여돼 있었던 거야.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두렵더군. 시간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이었지.”(89면)라는 고백에서처럼 그 역시 삶의 결락을 호소한다. 삶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결락을 공통항으로 이 둘의 사랑과 이별, 다시금 만남은 설악산 ‘백담사’를 중심으로 고이거나 흘러가거나 회귀한다. 그러나 드디어 만남을 결심하는 순간, “속초로 넘어가는 미시령, 간성으로 넘어가는 진부령, 양양으로 넘어가는 한계령 모두 대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어 세월의 긴 동선을 거슬러 회귀하는 그들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은 차단되어 있다. 그런데 이 때, 이 ‘대설주의보’는 윤수와 해란의 인연의 실타래를 끊는 장치인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이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때문에 모든 차편이 끊기고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눈속을 헤치며 당도한 백담사 계곡에서의 해란과의 조우는 의미하는 바가 깊다.
어디까지 왔을까.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에서 윤수는 발을 멈추고 캄캄한 눈 속을 노려보았다. 어디쯤일까. 멀리 솜뭉치 같은 부연 빛이 윤수의 눈에 빨려들어왔다. 벌써 백담사 가까이 온 것을 아닐 텐데. 실눈을 뜨고 재차 노려보니 그 빛은 이쪽을 향해 느리게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전조등 불빛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차가 올 때까지 윤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눈을 잔뜩 뒤집어쓴 알브이 차량이 체인을 쩔렁대며 그의 앞에 다가와 커다란 짐승처럼 멈춰 섰다.
운전석에는 젊은 스님이 타고 있었다.
이어 조수석의 문이 열리고 해란이 차에서 내렸다. (121면.)
“늘 그리워하지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있다”(101면). 「대설주의보」는 관계의 풀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묵호항 어시장 한켠 “타원형의 갈색 양동이 안에 노래미, 미역치, 숭어, 광어, 감성돔, 청어, 전갱이 등속처럼 꾸물대”며 우리네 삶 속에서 여기저기 출몰하는 인연은, 반추해보면 비록 갈색 양동이 폭 만큼의 작은 원 안에서 얽히고설키어 있을 따름이고, 시간의 세례에 비록 그 빛이 바래질지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싱싱하게 살아 꿈틀대”는 아름다운 삶의 청사진인 것이다.
3. ‘반구대암각화’와 ‘월정사 적멸보궁’ : 인연의 울림과 회귀, 적멸.
「풀밭 위의 점심」은 대학 시절 만나 우정과 사랑을 나눈 세 인물 사이의 묘한 인연을 담아낸 이야기다. 미학 연구 서클에서 만난 ‘나, 수연, 연우’ 이 세 사람은 강릉 여행에서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음으로써 상처를 공유하게 되고, 그 후로 “부모를 여읜 어린 남매들처럼 늘 붙어다니”게 된다. 그들에게는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부재하거나 있다 해도 그들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계모나 강압적인 아버지일 뿐이다. 이러한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 여행은 이들 인연의 이음새가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헝클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들의 관계가 견고해지는 절정의 순간은 나와 연우가 고향으로 내려간 수연을 찾기 위해 떠난 울산으로의 여행을 통해서인데, 울주 반구대암각화에서 셋이 찍은 사진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겹쳐지면서 이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네의 그림 안에는 숲속 풀밭 위에 다정하게 앉아 있는 두 남자와 누드의 한 여인이 담겨 있다. 이들이 앉아 있는 구도와 이들의 표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평의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앉아 있는 세 남녀에게서 전해지는 분위기는 묘한 따스함과 평온함이다. 풀밭에 기댄 한 남자는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적절한 간격을 두고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누드의 여인은 이쪽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다. 마치 “우리는 욕정에 사로잡힌 삼각관계도 서로를 질투하는 관계도 아니랍니다. 그저 우리는 풀밭 위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을 따름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친구일 수도 연인일 수도 있겠지요.” 라고 말하듯. 나와 수연, 연우 셋의 관계 역시 그림 속 인물들과 닮아 있다. 어쩌면 수연이 <풀밭 위의 점심>을 모방해 이들과 반구대암각화를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은 앞으로도 셋의 관계가 ‘풀밭 위의 점심’ 같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사연댐의 완공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물속에 잠겨있는 반구대암각화는 갈수기에 해당하는 두세 달만 볼 수 있는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이다. 마치 ‘여’처럼 잠겼다 드러나는 암각화는 이들의 인연을 암시해주는데, 수연의 바람과는 다르게 관계란 애초 밀물과 썰물 같은 것이어서 균형 잡힌 트라이앵글의 한 꼭짓점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헝클어져버린다. 셋 모두가 공평하게 “평생 친구나 연인으로 지내길” 바랐던 수연은 연우와 결혼한 후,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다가 결국 그와 이혼하게 된다. 나 역시 수연과 연우의 소식이 궁금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의 힘은 녹록치 않은 터라 “젊은 날 세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어쩌다 전설처럼 아득하게 기억될 뿐”, “시간의 엄습” 앞에서 희미하게 잊어져 간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나’는 지금 연우가 여는 <시간의 엄습>이라는 전시회에서 연우와 수연을 차례로 재회한다. 나에게 그들과의 인연은 “과거는 과거여서 아름다울 수 있겠으나 다시 그들을 만나 옛일을 떠올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관계’란 때로 ‘반구대암각화’ 같은 것이어서 잠겨있을 때는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다가 세월이 흘러 감정의 밀물이 빠져나간 뒤에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연우의 말은 이들의 인연을 갈무리하는 중요한 암시가 된다.
“기억, 빈집, 그림자 등이 최근에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는 주제들이야. 사람이 머물다 떠난 곳에는 저마다의 묘한 울림이 있잖아. 그것이 사적인 공간인 경우에는 더욱 울림이 크지. 낯선 곳을 경험하는 것은 실제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더 낯선 일이거든. 말하자면 지나간 것의 흔적, 내 안에 가라앉아 있는 것, 흐름 위에 멈춰 서 있는 것, 이런 것들이 내가 지금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 (50~51면.)
「풀밭 위의 점심」은 인연이 만들어낸 묘한 울림에 관한 이야기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얽힌 인연의 실타래를 풀 수 없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연을 추억하면서 그것이 만들어낸 무늬와 울림을 가만가만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일상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 비밀결사와 같이 신성한 그 관계는 “다만 결혼기념일에 남산 벚꽃을 보러 가는 대신 동대문 근처 폐허에서 열리는 옛 친구의 전시회에 들렀고 혹은 옛 연인들과 만나 저녁을 먹고 헤어졌을 따름”으로 담담하게 정돈될 지라도.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에도 세 남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풀밭 위의 점심」에서 그리고 있는 인연이 세 남녀의 우정에 기반한 사랑이라면,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는 심각한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나’의 흘러간 옛사랑에 대한 회상은 1960년대 유행가인 <꿈은 사라지고>를 구슬프게 부르던 삼촌과 <꿈은 사라지고>에 대한 문정숙의 화답가인 <나는 가야지>를 청승맞게 잘 부르던 여섯 살 연상의 은주, 이 두 사람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된다. 십대 시절, 인근에 주먹으로 몸에 늘 피를 묻히고 다니던 삼촌은 어울리지 않게 삼류 대학 철학과를 나온 이력을 갖고 있다. “존재가 원래 혼자라는 뜻이라는 건 알겠는데, 저 들판의 비석 없는 무덤처럼 말이다. 그게 가끔 감당하기 힘들다고 생각될 때가 있는 것이다.”(129면)라고 가끔 속내를 토해내던 삼촌은 내 기억 속에서 늘 <꿈은 사라지고>의 곡조와 오버랩 된다. 은연중 삼촌의 정서를 물려받은 나는, 대학시절 학교 앞 ‘목마와 숙녀’라는 카페의 여주인 은주에게 치명적으로 매료되는데, 그녀는 “맑거나 어두운 목소리, 아득하거나 환한 표정, 그리고 원숙함”을 지닌 여인으로 문득, 삼촌과 닮은 사람이다. 온전히 청춘을 은주에게 걸었던 나는 삼촌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주게 되고, 얼마 후 삼촌과 그녀가 살림을 차렸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 듣는다. 나는 은주 앞에서 팔뚝에 과도를 꽂은 채로 몸부림치다 군에 입대하는데, 그 후 삼촌과 숙모가 된 은주는 불화로 이혼하게 되고 은주는 딸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숙모가 떠난 후 행방불명 된 삼촌은 “전국 목욕탕을 전전한다, 간질이 발병해 실성했다, 온천 사업 계획 중이다”라는 등 들려오는 소문만 무성하다.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하던 나는 어긋난 옛사랑과 삼촌, 은주를 떠올리면서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나는 일찍이 남부럽지 않은 평온한 삶을 얻었으나 어쩐지 꿈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남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남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144면).
“우리가 삼촌을 사랑한 건 사실이죠?”
숙모는 삼촌과 나의 첫사랑이었다. 어쨌든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 숙모는 고개를 갸웃했을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아니, 삼촌이 우리를 사랑했던 걸까요?”
맥주잔을 들고 가만히 나를 마주 보던 은주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간 환하게 웃었다. (160면.)
젊은 날 삼촌과 은주를 통해 일찍이 깨우쳤지만 세월과 일상에 묻혀 사라졌던 ‘꿈은 사라지고’의 서글픈 정서는 삼촌의 죽음과 함께 숙모이자 옛 연인인 은주의 회귀로 나의 가슴에 다시 되살아난다. “돌아올 사람은 결국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158면)라는 인연에 관한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하면서.
「오대산 하늘 구경」은 인천공항에서 문막휴게소를 거쳐 주문진과 오대산 월정사로, 이어 상원사 동종과 월정사 적멸보궁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두 남녀의 “놀랍다면 참으로 놀랍고 하찮다면 또 하찮은”, “다소 불가해한” 관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연미와 ‘나’는 8년째 계절이 바뀔 즈음, 만나오고 있는 사이로 삼촌과 조카 같은 관계를 늘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시간 아무 변화도 없는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여자가 “그러지 말고 우리도 거래해요. 그게 결국 관계를 맺는 방식이고 사람이 사는 거잖아요.”라고 반문하자 남자는 부부관계를 포함한 거래 관계에 늘 지쳐 있으므로 그녀와의 관계는 “비합리적이고 비물질적인 관계”로 남고 싶다고 대답한다.
월정사에 이르러 적멸보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참배를 올리던 연미가 돌연 세속을 떠나 귀의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들 관계의 반전처럼 다가온다. 그가 산문을 빠져나가는 연미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면서, 순간 “화로처럼 뜨거운 얼굴이 되어 가슴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 까닭은 어쩌면 비합리적이고 비물질적인 관계가 애초부터 없음을 잘 알고 있던 그가 연미에 대한 스스로의 이기적인 태도와 위선을 들켜버림으로써 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와는 8년째 만나오고 있었다. 자주 만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대체로 계절이 바뀔 즈음 그녀가 연락을 해오는 편이었다. 사람을 만나다보면 변하지 않는 관계가 있고 또한 변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그녀와 나는 둘 다에 해당하는 관계였다. (169면.)
그와 여행 중 돌연 비구니가 되어 그와의 인연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간 연미는 “변하지 않는 관계”이자 “변할 수 없는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풀밭 위의 점심」의 ‘반구대암각화’가 물속으로 잠겼다 떠오르는 ‘여’와 같은 인연을 상징한다면, 「오대산 하늘 구경」의 ‘적멸보궁’은 서서히 물속으로 적멸하는 인연을 상징한다.
4. 여행과 인연
때로 여행은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수도 있고, 따뜻한 휴식과 위안이 될 수도 있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이 관계의 왜곡과 단절로 인한 도피와도 같은 여행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여행, 여름」은 우연한 관계가 머금은 따스함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에 등장하는 ‘나’와 유석은 과거에는 시인이었지만, 현재는 각각 카피작가와 출판사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들이 우연히 알게 된 시나리오 작가 강혜원도 과거 소설가로 등단한 작가이지만, 소설을 안 쓴 지 이미 오래다. 미쓰 강의 소설을 펴내주기로 약속한 유석은 그녀에게 “자극적이고 쉬운” “팔릴 것 같은” 소설 쓰기를 종용한다. 이에 미쓰 강 역시 큰 고민 없이, 쓰던 소설이 안 팔리면 영화 대본으로 고쳐서 영화사에 넘기면 된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나 역시 전에 썼던 시구를 그대로 베껴 카피 문구로 활용하는 카피작가로 이들 모두는 “시나 소설을 버린 지 오래” 되었다는 지점에서 묘한 동질의식을 느끼게 된다.
도비도 여행 중에 생긴 동질감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정을 가장한 이들 관계는 미쓰 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순식간에 와해되는데,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자책감에 시달리던 유석과 나는 도비도를 다시 찾게 되고, 그 여행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친 후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헤어진다. 돈독한 줄 알았던 이들의 관계란 유석의 마지막 말처럼, “오늘부로, 아니 어제부로 깨끗이 정리할” 수 있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은 마치 2000년대식 「서울, 1964년 겨울」을 떠올린다. 나는 혜경이 죽은 후에야 “혜경의 고향이 파주라는 사실과 그녀가 이남 이녀 중 둘째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처럼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의 의지조차 없이 우리는 그녀와 만나왔고 또 무감하게 헤어졌던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며 나이를 먹어가고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는 게 모두 어리석고 잔인한 속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234면.)
관계의 진정성에 대해 되묻고 있는 이 소설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며, 그것은 도피로서의 여행이 아닌, 일상을 회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진지한 그것이어야 함을 넌지시 일깨워준다.
「여행, 여름」 역시, 우연한 기회에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만난 나와 Y, E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끌벅적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해 여름 낯선 이들의 관계는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된 명물 안주”와도 같이 무르익어간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의 그들과는 달리, 이들은 서로에 대한 상세한 신원과 살아온 내력, 아주 사소한 취향이나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떨림과 만성적 피로와 허무함”의 속내까지 풀어놓는 가운데 인연의 깊이를 더해간다. 특히 Y와 나는 강구항으로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는데 그곳에서 서로의 비밀스러운 옛사랑과 추억까지 고백하고 공유하기에 이른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 각자의 안부를 물으며 연을 지속해오던 나는 Y의 간암 소식을 듣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그와 병실에서 마지막으로 재회한다. 일 주일 후, Y의 죽음 소식을 들은 나는 그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인 원주 토지문화관으로 들어가 그가 묵었던 109호에 머무르며 알 수 없는 상실감과 그에 대한 그리움에 끙끙 앓는다. 그리고 그러한 끝에 그와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
글쎄. 어떤 사람과의 인연은 첫 만남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상대는 기억하고 있을까? 가끔 묻고 싶은 때가 있으나 왠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 (244~245면.)
소설은, “첫 만남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인연일지라도, 그 끝은 “언덕 너머에 숨어 있는 달리아밭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마음을 선사하는 인연의 진정성에 대해 답하고 있다. 「도비도에서 생긴 일」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 풀린 셈이다.
5. 여행 끝 여운. 그리움으로 남는 잔상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라는 마르케스의 말처럼, 윤대녕의 소설은 기억하는 것들을 현재로 다시 불러오거나 혹은 과거 그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풀어낸다. 그의 이야기는 지나간 시간과 인연, 그리고 그것을 서서히 풀어내는 기억들에 관한 것이다. 윤대녕의 인물들은 여행 속에서 인연을 만나거나 재회하거나 이별한다.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이러한 매듭 짓기와 풀기를 반복하면서 우리 삶에 아로새겨진 인연의 무늬를 음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의 세계를 여행한 끝에는 늘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인연의 무늬가 만들어내는 그리움. 혹은 슬픔일 것이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
갑자기 불어닥쳐 가슴 쓰리고 이마가 쓰라린 사랑을 밀면
무겁고 차가워 놀란 감정의 동그란 테두리가 기울어져 나무가 밀리고
길 아닌 어디쯤에선가 때 아닌 눈사태가 나고
몇십 갑자를 돌고 도느라 저 중심에서 마른 몸으로 온 우글우글한 미동이며
그 아름다움에 패한 얼굴, 당신의 얼굴들
그리하여 제 몸을 향해 깊숙이 꽂은 긴 칼들
밀리고 밀리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이름이 아니라
그저 무늬처럼 얼룩처럼 덮였다 놓였다 풀어지는 손길임을
갸륵한 시간임을 여태 내 손끝으로 밀어보지 못한 시간임을
― 이병률, 「무늬들」 전문(「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 대전 출생, 충남대 문학박사과정 수료, 문학평론가, April-h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