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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일한 피할 길
히2: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
히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히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우리는 함께 모여 복음을 고찰하는 것이 조금은 특이한 일이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설교를 듣기 위해 주일마다 모이는 광경을 백 년 전만큼 흔히 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시대착오적인 관습으로 여깁니다. 거의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일로 여기며, 그렇게 모이는 우리를 다소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정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묻는 자들에게 대답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수도 상대적으로 적지만, 그나마 일부는 자신들이 왜 교회에 오는지 한 번도 살펴보지 않은 채 잘못된 이유로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사실들에 유념해야 하는 정확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일차적 대상은 이런 사실들을 놓치고 등한시한 위험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이 권면은 불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유효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사실들에 유하며 주의를 집중하라고 말하자면 삶의 조류에 떠밀려 항구를 지나쳐 가다가 결국 난파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라고 간절하고도 엄숙하게 호소합니다. 의도치 않더라도 다른 문제에 매몰된 나머지 복음의 사실들을 등한시한 무서운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삶이 너무 풍족하고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어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정표가 꽉 차서 복음의 사실들을 생각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이 모든 경고를 하는 것이며, 단순히 경고하는 데서 더 나아가 복음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는 우리가 고찰하는 내용이 진짜 복음인지 혹시 복음 아닌 다른 것은 아닌지 먼저 확인해 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들은 것" 즉 처음부터 전파된 복음의 사실들에 유님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중대한 이유는 이 메시지의 원천, 즉 배후의 권위에 있습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앞서 그 문제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해도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 즉 인간이 처한 곤경과 처지부터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복음이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찰해야 하며, 역사적 사건의 기록을 고찰해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 관련하여 세상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직시할 것을 요구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다음으로 제시하는 이유, 복음의 사실들에 유념해야 할 중대한 이유는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의 위험한 처지. 절망적이라고까지 해야 할 형편과 처지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하나님을 모르는 비그리스도인들의 처지가 얼마나 위험한지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늘 나타나는 큰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로 고상하고 훌륭한 인생관 내지 인생에 대한 가르침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인생 철학과 인생관을 살펴볼 때 함께 참작할 만한 하나의 관점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무언가 기여해야 한다고 여기며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다른 관점이나 가르침들처럼 복음도 한 가지 삶의 방식으로 고찰하면서, 자신들이 그것을 채택하여 삶에 적용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복음관으로서, 이처럼 복음을 채택했기에 자신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직접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메시지인 복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큰 결핍감이나 절박감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라고 복음이 경고해야만 했던 문제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껴본적이 없습니다(마 3:7, 눅 3:7).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복음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정신을 고양시키는 아주 고상한 인생의 가르침. 점잖은 사람이 채택하여 실천할 만한 가르침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그런 자들의 진정한 문제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관이 때로 '방관자 관점'이라는 말로 묘사되는 것은 인류의 질병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자신들도 환자지만, 이처럼 다른 측면만 바라보는 탓에 정작 자신들에게 대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실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론 본인들은 안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모릅니다. 아주 방탕한 삶을 사는 이들조차 그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자신들이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은 모르며, 보응을 피해야 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자들의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자신을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종류의 가르침과 설교에 적극적으로 반발하기도 합니다.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는 건 모욕적이고 이기적인 개념이에요”라고 합니다. "그런 걸 강조하는 복음은 필요 없습니다. 자기 영혼의 구원을 확인하라는 건 너무 자기중심적인 말이에요"라고도 합니다. 이런 가르침 자체를 불쾌히 여깁니다. "스스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갈 거라고 자부하다니, 참 이기적이고 교만하네요"라고 합니다.
문제는 개인의 구원에는 이처럼 반발하면서도 자신들이 인생에서 지속적으로 기꺼이 추구하는 다양한 일-먹고 마시는 일이나 미래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는 반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옆구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라 의사를 찾아갔는데, 의사가 그렇게 자기 걱정만 하면 어떡하느냐고, 왜 통증을 그냥 넘기지 못하느냐고 왜 그렇게 자기한테만 집중하느냐고 말한다면 어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생각대로라면 몸의 구원을 위해서는 몇 년씩 신경을 쓰는 것이 당연해도 불멸하는 영혼의 영원한 운명 때문에 신경을 쓰는 것은 심히 이기적인 행동이 되는 셈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이들은 자신에 관한 진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불난 집에 갇히면 어떻게 구조받을까 계속 궁리하며 창밖으로 뛰어내려서라도 목숨을 구하려 드는 법입니다. 영원한 운명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 안다면 이런 어리석은 말은 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른 반론을 살펴봅시다. 두려움과 경고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인과 현대의 정신에 모욕이 된다고 느끼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지옥과 심판과 형벌을 설교하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현대인과 이전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더없이 행복해 합니다. 우리는 그만큼 발전했고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류를 전멸시킬 원자폭탄이나 세계대전 같은 위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이전 세대보다 우리가 낫다고, 각 시대는 이전 시대보다 나을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가 제일 낫다고 말합니다. 현대인이 이런 이상한 우월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한 가지가 바로 지옥과 하나님의 진노 및 심판의 무서움을 더 이상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그런 질문에서 벗어날 만큼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곧장 다른 문제로 나아가 봅시다. 이 질문과 20세기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과학 지식이 늘었다고 해서 과연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가 논하는 대상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다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영과 혼과 하나님 - 불변하시며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 성경을 떠나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현대인이어서 이런 교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저는 사람을 겁주거나 두렵게 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요즘 같은 때는 굳이 겁줄 필요도 없습니다. 현실 자체가 이미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환자의 수술이나 휴식이나 일정한 치료를 위해 의사가 어느 정도 겁을 주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자에게 병의 실상을 알려 주어도 듣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깊이 파악한 의사가 거듭 의견을 밝혀도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합니다.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음을 아는 의사는 결국 환자를 구하기 위해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를 두렵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병의 실상을 알고 환자의 안녕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창조주시요 재판장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밝히건대, 저는 오직 이 경우 외에 사람들을 겁주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이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도들, 찰스 헤든 스펄전 (Jaella Maldon spurecon) 이나 조나단 에드워즈 (Johnathan Edwards)를 비롯한 과거의 거인들이 두려움을 조장하길 즐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이 남긴 이름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설교를 했던 것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며 영혼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닥칠 일을 한 번도 전하지 않은 것 때문에 정죄받을 것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그들은 불쾌하다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거나 지옥 불로 사람들을 겁주려 한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 무서워 진리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대로 “주의 두려우심”을 안다면 권면해야 합니다(고후 5:11).
고후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이것은 마지막으로 살펴볼 이유와 연결됩니다. 이 가르침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와 완전히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벌 및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과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개념은 확실히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어떤 식으로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두 가지 의견으로 갈라집니다. 한쪽은 모든 사람이 죽을 때 보편적인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이들의 관점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바로잡아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또 다른 이들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두번째 기회를 주실 수밖에 없다고 회개치 않고 그리스도 밖에서 죽은 자들에게도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결국에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뭐라고 가르칠까요? 우리가 답해야 할 첫 질문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이 토론에 들일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절약될 것입니다. 그 질문은 "내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내 관점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서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토론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요점은 '성경을 믿을 것이냐? 사람의 생각을 믿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책에서 인생과 영원한 운명을 비롯한 모든 문제에 대한 관점을 얻든지, "나는 이렇게 믿는다" 또는 "내 모든 입장의 근거는 아무개 교수의 이런저런 견해에 있다"라고 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 특정 주제에 대해 성경이 하는 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굳이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습니다. 표면에 바로 나와 있습니다. 서슴없이 말하건대,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눈에 띄는 메시지는 없습니다.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성경은 경고의 책입니다. 이제부터 그 가르침을 일깨워 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인간관입니다. 히브리서의 이 진술은 복음 및 피할 길과 관련하여 두 가지 인간관 중 하나를 취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인간은 책임 있는 존재라는 성경의 관점입니다. 이 책은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본떠 지어진 존재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속한 특징을 인간 안에 두심으로 나머지 피조물과 크게 구별하셨습니다. 자신이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시며 교류하실 수 있는 존재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서, 그의 다스림을 받으며 그를 위해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인간관입니다.
물론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관점은 사뭇 다릅니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은 인간이 원시 점액질로부터 이러저러하게 발전해 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특별한 피조물이 아니라 다른 동물보다 좀 더 진화한 동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존재의 이유도 없고 목표도 없으며 궁극적 목적도 없는 동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꽃이나 동물이 죽듯이 인간도 세상에 태어나 잠깐 살다가 죽습니다. 어떤 점에서 더 진화했기 때문에 일정한 책임은 져야 하지만, 그 책임은 세상에 사는 동안의 삶과 사회에 한정됩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영원한 의미에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심판대 앞에 서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는 그런 개념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아주 다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완전히 다른 중대한 인격체, 중대한 피조물입니다. 인간은 피조 세계의 주관자라는 점에서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합니다. 히브리서 2장 좀 더 뒷부분에 그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6절) 이것이 인간에 관한 성경의 진술입니다. 인간은 일종의 진화된 짐승으로 인생의 무대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퇴장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운명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아주 엄숙하게 묻건대, 여러분은 자기 자신과 세상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 질문에 유념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에 관한 진실을 깨달을 것을 요구합니다. 두 관점 중 어느 것이 인간에게 찬사가 되고 어느 것이 모욕이 되는지 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현대인들이 어떻게 모순된 말을 하는지, 한편으로는 인간의 위대한 우월성을 자랑하며 거의 신으로까지 격상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왔다가 죽으면 그만인 짐승으로 묘사하는지 설명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다만 성경이 여러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길 요청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모를 수도 있지만, 인간은 설명할 의무와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행한 모든 일을 아시며 기록하신다고 여러분은 그 모든 행동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말을 걸고 계시는 분. 이제껏 말씀하셨고 아들까지 보내서 말씀하신 절대자 앞에 서서 대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 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전부 이 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그 지식을 어디에서 얻었습니까? 그 모든 지식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나님은 오직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태초로 돌아가, 성경이 그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한 분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자신에게 복종하며 살 것을 인간에게 명하셨고, 계명을 주시면서 순종치 않으면 형벌이 따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죽음이 찾아올 것이요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순종치 않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정말로 인간을 벌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인간과 인류 전체를 찾아왔고, 인간은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생겨났고, 땅은 저주받았으며, 삶은 우리가 아는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동인 동시에 계시였습니다.
홍수 이야기도 보십시오. 그때도 하나님은 자기 성품을 계시해 주셨으며, 인간이 의무와 책임을 가진 존재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간곡한 권고를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노아가 120년간 의의 교리를 전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도록 경고했지만,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비웃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심으로 노아의 말이 옳고 참된 것이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이 최고로 잘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 질투하는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출 20:3).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거듭 불순종할 때 어떤 형벌이 따를지 알려 주셨습니다.
구약성경은 말씀의 계시일 뿐 아니라 행동의 계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요 율법을 받은 자인 모세 역시 순종치 않았을 때 벌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고 홍해를 건너게 했던 위대한 지도자조차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하늘의 은총을 입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아도 똑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이 받은 형벌뿐 아니라 택함 받은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전체가 받은 무서운 형벌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통해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세우신 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포로가 되어 앗수르와 바벨론에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백성이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그의 말씀이 참되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공평하시며 의로우신 분으로서, 설사 자기 백성이라도 그 죄와 허물을 반드시 하신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영원한 기념물입니다.
"아, 그건 구약성경이잖아요 구약성경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관심이 있지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죄 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전한 세례 요한을 보기 바랍니다. 그도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라고 경고했습니다(마 3:7). 그의 긴박한 메시지는 피하라. 피하라"라는 것이었고 그와 함께 전한 또 다른 중대한 메시지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는 것이었습니다(요 1:29). 그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 나아갈 것을 촉구했습니다. 자기 제자들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보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전하신 메시지 또한 회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회개를 전하습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 주님은 또한 율법을 설명하시면서 기계적인 율법관을 폐기하셨습니다. 율법은 영적인 법입니다. 예컨대 신체적 간음의 문제만 다루지 않습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으로 이미 간음했다고 간주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방식입니다. 주님은 율법을 이전보다 무한히 더 지킬 수 없는 법으로 만드셨습니다. 산상설교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은 모두가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사람들은 "아, 그건 믿어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맞습니다.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주님은 연이어 말씀하셨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더 뒤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도 하셨습니다(요 3:36). 자기 전제를 내세우며 논쟁을 벌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라면 그가 이렇게 가르치신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 마지막 때, 땅의 모든 나라가 그 앞에 나아간 마지막 때, 모든 사람이 양과 염소로 분류된 마지막 심판의 때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도 읽어 보십시오. 그가 지옥에 대해 하신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영원한 고통의 불꽃에 대해 알려 주셨고, 음부의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서로 왕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6:26).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준다거나 모든 사람을 바로잡아 주겠다고 하시기는커녕 그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있어 건너갈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사견이 아니며, 일부 철학자의 생각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세상에 다시 오셔서 추수하시고 심판하신다는 말씀도 보십시오.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밝히신 말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막으려 드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천사 열두 군단에 명령하여 이 일을 피할 수 있음을 모르느냐?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을 이룰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주님은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촉구하듯이, 이런 사실들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요컨대이것이야말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친히 진하신 복음이다. 그는 거룩함에 대해, 사람들의 현 위치와 다가올 심판과 건널 수 없는 구렁텅이에 대해 가르치셨다. 이것은 주님이 친히 주신 메시지다 라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와 함께 지냈던 사도들의 글을 보아도 전부 다가올 심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오순절 날 심판을 진했고 바울도 아덴에서 심판을 전했습니다. 모든 사도가 모든 곳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늘의 진노를 피하라고 권면했고, 유일한 피할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하늘의 기름부음으로 자신들의 설교를 승인하셨다고 했으며, 자신들에게 임한 능력은 성령이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를 믿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했고 (행5:4). 그들은 바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표적과 기사와 이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입증하셨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서신서 곳곳에도 똑같이 엄숙한 메시지가 나오는데, 특히 히브리서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29). 이런 말씀은 저도 나누기가 두렵지만, 성경의 일부이기에 직면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온전히 거룩하시고 공평하시며 의로우시고 능하신 하나님,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은 대답을 해야 합니다. 계시록도 읽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경고와 마지막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선포가 아주 비상한 방식으로 기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모든 것에서 구원받을 일 또한 영광스럽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는 우리를 진노와 심판에서 구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었고, 그를 모욕했습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앞 세웠습니다. 하나님께 이보다 큰 모욕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정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부 해주셨습니다.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부정한 자에게 뿌리는 염소와 황소의 피나 암송아지의 제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부족하지만,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의 피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이 피야말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피할 길이요 유일한 속죄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우리 죄를 지고 우리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 제사를 거부하면 "다시 죄를 속하는 제사가 없습니다(히 10:26)
히10: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그리스도의 피를 외면할 때 남는 것은 장래의 고통과 번민뿐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여러분, 결론은 간단합니다.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말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 책은 이것만이 유일한 피할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알았기에 이같이 큰 구원을 우리가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이처럼 주를 만날 길을 친히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과 그 길을 거부하면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성령으로 깨우저 주시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