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중의 왕은 봉황이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란’과 ‘호랑이’라면 몰라도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여겨지고 있는 봉황은 정작은 상상 속의 새여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학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만 하더라도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를 가졌으며, 오색(五色)을 갖추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을 위시하여 우리나라와 같은 동양의 세계관 안에서 봉황은 그 생태가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특히 왕과 왕실 관련 문화의 원형을 이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낼 수 있는 산물이란 참으로 무궁무진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것입니다.
상상 속의 새 봉황이 갖는 여러 가지 속성들 가운데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것으로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라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봉황이 자기 관리에 매우 철저하여 그만큼 고결함을 자랑하는 존재였음을 잘 말하여 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 봉황의 속성에 대한 또 다른 우리말 표현으로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쓰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쓰인 ‘깃들이다’가 흔히 ‘깃들다’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⑴ㄱ. 앞쪽에는 봉황이 *깃들어산다는 봉서루(鳳捿樓)를 세우고,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영봉루(迎鳳樓)라 이름 지었다.
ㄴ. 도심 숲은 건강을 지키는 복지의 원천이자 그 자체로 사람과 하나의 문화다. 그리고 그 속에는 생명이 *깃들어산다.
단어
의미
용례
깃들다
1)아늑하게 서려 들다.
어둠이 깃든방 안/거리에는 어느새 황혼이 깃들었다.
2)감정, 생각, 노력 따위가 어리거나 스미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어있었다./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육체에 깃든다.
깃들이다
1)주로 조류가 보금자리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 살다.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곳이 있다./
이 고장에는 새가 깃들일나무가 없다.
2)사람이나 건물 따위가 어디에 살거나 그곳에 자리 잡다.
이 마을에는 김씨 성의 사람들만 몇 대째 깃들여산다./우리 명산에는 곳곳에 사찰이 깃들여있다.
언뜻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위 문장들에서 밑줄 친 단어 ‘*깃들어’는 ‘깃들이어’ 또는 ‘깃들여’로 써야 올바른 말입니다. 이러한 언어적 사실은 우리말에는 ‘깃들다’가 ‘깃들이다’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별개의 단어에 속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깃들다’가 ‘깃들이다’는 어떠한 의미 차이가 있을까요?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두 단어의 의미와 용례입니다.
이러한 의미와 용례를 자세히 보면, ‘깃들다’는 주로 어떠한 기운이나 추상적인 것이 스며들어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반면, ‘깃들이다’는 새나 사람 혹은 건물 등이 일정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살거나 위치해 있다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깃들다’와 ‘깃들이다’를 그 의미 영역에 따라 엄밀하게 구별해서 써야 할 필요가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언어적 사실 외에 다시 상상의 새 봉황에 대해 좀 더 말할 것 같으면, 『순자(荀子)』 ‘애공편(哀公篇)’에서 “임금의 정치가 삶을 사랑하고 죽임을 미워하면 봉이 나무에 줄지어 나타난다.”고 한 것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무릇 삶을 사랑하는 어진 정치가 실현될 때에는 상상만 하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아미하는바 우리의 정치가 가야 할 길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